고구리연구소 서길수는 한국역사를 침탈한다는 중국의 동북공정 밑바닥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동북공정 논리의 밑바닥은 일본이 청국 동쪽 지리를 변조.이동한 조작지리 곧 식민사관이고 식민사관이 성공한 결과 거저 얻은 이조선의 서북 4 도 땅 곧 장물땅을 지키기려는 몸짓일 뿐이다. 모르기는 우실하도 마찬가지인데 우려스러운 점은 이들이 식민사관.동북공정의 엉터리 지리 논리를 수긍한다는 점이고 더 나아가 선전.홍보까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1932 년까지만 하여도 지금의 란하 위치에 흐르던 황하와 요하를 일본이 만주국지도에서부터 동북쪽으로 2000 여 리 떨어진 지금의 서요하와 지금의 요하로 표시하고 중국 2 번째 정사 <한서/지리지>에 설명.기록된 대요수라고 주장하는 것을 긍정.수용한다.

 

현 <중국전도>의 표시도 만주국지도를 그대로 습용 표시한 것도 모르고 있다. 현 <중국전도> 표시의 지명 곧 지금의 란하.대릉하.요하.혼하.압록강 등이 그 위치 그대로 2000 여 년 이상 흐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신채호가 고대의 요수는 왜 란하라 했으며 계연수가 패수를 왜 란하라 했는지 고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중국 3 번째 정사 <후한서/군국지> 요서.요동.현토.낙랑 등 군의 주석에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각각 3300 리, 3600 리, 4000 리, 5000 리 떨어졌다는 설명을 올바로 해석할 능력이 없는가? 식민사관.동북공정 비판한다는 사람들의 역사지리 인식 수준이 한심함을 넘어 참담할 지경이다.

 

한편 우실하는 동북공정에 대한 대책으로 중국의 논리를 해체하고 (고)조선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해야 하고 요하문명에 대해서도 우리의 관점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며 제법 올바른 대략의 방향을 주장하지만 그동안의 우실하 주장을 보면 요하문명을 동북아 지역의 공통문명으로 인식하자며 지금의 지정학적 상황에 맞추어 타협하려는 비학구적일 뿐만 아니라 전혀 사실과 다른 쌩뚱맞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우려스럽다.

 

그러나 요하문명은 오직 환웅천왕의 고조선과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 곧 왕검조선과 단군의 제위를 이어받은 단군부여의 백성들이 일군 문명이다.

 

 

 

 

즉 지금의 중국 요녕성 적봉.능원.건창.조양 등의 지역은 고조선.왕검조선.단군부여.고구려.진국.통신라.고려 까지의 중심강역이였으며 이조선의 서북쪽 국경 인접지역이였다.

 

위 모사도에 표시된 고대 역대국 영역의 근거는 발굴되었다는 청동단검 등의 출토물 한가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출토물보다 훨씬 명확하고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기록자들이 남긴 문헌과 고지도 때문이고 대표적인  것이 표시된 황하潢河와 요하遼河 때문이다.

 

황하는 중국 2 번째 정사 <한서>의 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이고 황하 동쪽에 표시된 요하가 현토군 서개마현에 주석된 2100 리 길이 염난수다. 이러한 전한 시기부터의 지리는 1911 년 청국이 멸망하고 1932 년 봉천군벌 장학량이 일본군에 쫓겨날 때까지 대략 2130 여 년 동안 변동이 없었다. 결국 지금의 란하와 요하 및 지금의 압록강은 1932 년 일본이 세운 꼭두각시 만주국부터의 지리일 뿐이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의 산해관 북쪽 지점에 설치되었던 낙랑군도 동남쪽으로 2000 여 리 옮겨져 지금의 평양이라고 한.중.일 3 국 역사학계가 주절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중국의 역사 사기질을 서길수.우실하가 모른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한심맞다. 

 

 

아래는 서길수가 주최한 `동북공정 백서 발표 대회`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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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으로 역사침탈 완료…김치공정, 한복공정은 그 일환"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2-03-02 01:00
고구리·고리연구소, 2월 2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동북공정 백서' 발표대회 개최
 

“동북공정은 새천년 10년 계획 가운데 하나였고, 2001년부터 2009년까지 8년간 계속되었으며 2009년 공식적으로 역사침탈 완료를 선포했다고 밝혔습니다. 2010년부터 훔쳐 간 역사를 자국의 국사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여 현재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는 중화인민공화국 국사로 바뀌고 온라인 백과사전 ‘백도백과’까지 국사(國史)로 기술하여 배치를 마쳤습니다.” 

 

서길수 고구리·고리연구소 이사장은 2월 2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북공정 백서' 발표대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는 2017년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다”라고 말한 뒤 고구리·고리연구소에서 4년간 한중 역사전쟁을 철저히 검토한 결과이다.

 

 

 
고구리·고리연구소는 2월 2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동북공정 백서' 발표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정유철 기자]

 

서길수 이사장은 “이제 이렇게 훔쳐 간 역사를 바탕으로 2017년 국제무대 G2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이 세계에 알린 뒤, 김치공정, 한복공정, 심지어는 손흥민도 중화인민공화국 사람이라며 역사와 정체성 침략이 봇물 터지듯 일반화되고 있다”며 “이같은 한중 역사전쟁의 진행과 성과를 정확히 파악하여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동북공정백서》를 통해 국민에 보고한다”고 밝혔다. 고구리·고리연구소는 중국의 한국 역사 침탈 목적과 그 전략·전술을 다룬 《동북공정백서》를 발간했다. '한중수교 30년 역사침탈 20년'이라는 부제가 붙은 백서는 900쪽 분량이다. 고구리는 고구려, 고리는 고려, (고)조선은 고조선을 의미한다.

 

《동북공정백서》에 따르면 동북공정은 2002년2월부터 2007년 1월까지로 계획됐으나 실제로는 2009년까지 8년간이나 진행됐다. 길림성사회과학원에서 낸 학술지 《동북사지》를 통해 역사 왜곡을 이어갔다. 2004년 창간된 《동북사지》는 첫해에는 월간으로 발간됐으며, 2005년부터는 격월간으로 발행했다. 2016년 3기부터는 다시 《학문》으로 제호를 바꿔 2016년 4기와 2017년 1기를 펴낸 뒤 폐간된다.

 

《동북공정백서》는 크게 두편으로 나눠 국책 역사침탈을 여섯 마당으로 정리했으며 뒤편에서는 《동북사지》를 통해서 본 동북공정 분석을 우실하 한국항공대 인문자연학부 교수, 고구리·고리연구소 박승범·박찬규 연구원, 한규철 전 고구려발해학회 이사장·회장, 박선영 세종대 교수 5명이 동북공정의 성과를 분석했다. 우실하 교수는 《동북사지》에 수록된 ‘(고)조선’에 대한 연구 동향 분석을 소개했다.

 

우 교수는 “《동북사지》(2004-2017)에는 ‘(고)조선’과 관련한 총 9편의 논문이 실려있다. 대부분은 기자조선과 관련한 것인데, 이는 중국이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고)조선과 관련한 9편의 논문은 모두 역사침탈기간(2004-2009)에 전문적인 학술논문 분야에 실린 것들이다. 2009년부터는 단 한 편도 안 보인다.”며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은 신화일 뿐이고,역사로 인정하지 않으며 기자조선, 위만조선은모두 화하족이세운 제후국, 번속국, 지방정권으로 본다. 몇몇 학자는 진국(辰國)은 조선보다 일찍, 한반도를 정벌한 하대(夏代) 제후국이던 商의 3대 군주 상토(相土)가 한반도 남부에 건설했다고 본다. 여러 학자는 ‘辰國은 한반도 남부’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은 한반도 서북부’에 공존하던 서로 다른 정권으로 보며 모든 논의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과 ‘중화민족’이라는 기틀 위에서 전개된다.”고 분석했다.

 

우 교수는 “‘중화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에 속한 사람을 ‘중국인’이라고한다. 이 ‘중국인’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56개 민족’을 하나로 묶어서 또다시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개념적으로 성립되기 어렵다”며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인’은 있어도, 56개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중화민족’은 없다. 이것은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인’은 있어도 이 민족들을 모두 합쳐서 ‘미국민족’이라는개념을 사용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또한 《동북사지》에 실린 논문들 이미 역사학의 한계를 넘어선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펴면서 한반도의 상고-고대사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 교수는 "첫째, 모든 논문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한 중화민족이라는 비학술적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은 학술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 둘째, 이제는 신화시대부터 한반도에 전욱(顓頊) 고양씨족단(高陽氏族團)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논리까지 나오고 있다.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신화라고 비판하고 허구라고 주장하면서, 단군보다 더 오래 전의 신화적 인물인 전욱집단이 한반도 남부에 거주한 세력이라고 보면서, 마치 실제 역사인 것처럼 역사학자들이 논문을 쓴다는 것이다. 한국 역사의 순서를 ‘전욱집단– 진국 – 기자조선 – 위만조선……’의 순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응하여 우 교수는 “한국학계에서도, 중국의 논리를 해체하고, 이제는 (고)조선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 교수는 "첫째, 우선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학계 역사 이론의 바탕이 되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과 그에 기반한 ‘중화민족’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해체시켜야 한다. 둘째, 새롭게 발견된 요하문명에 대해서 우리의 관점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요하문명지역을 중심으로 좌로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우로는 한반도로 연결된다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며 "새롭게 전모를 드러내고 있는 요하문명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요하문명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문명’이다. 하나의 거대한 ‘문명’에 대한 연구는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고학, 역사학, 민속학, 사회학, 정치학, 문화학, 종교학, 신화학, 미술, 미학, 건축학, 철학 .... 등 많은 학문 분야에서 연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집트문명의 상형문자 연구는 언어학자들이 연구하고, 그들의 상형문자에 드러난 사후세계나 종교에 대해서는 종교학자나 신화학자가 연구하고, 거대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건축학자나 천문학자들이 더 잘 연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래는 기사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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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대 고고학 교수 “KBS2 `` ‘고려거란전쟁’ 국경선 틀렸다, 당시 압록강은 중국 요하``

천지일보 기자명 이예진 기자 2024.02.08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107509&fbclid=IwAR1JLTK_VVzht56qbh_c4rPtgTHaDE1TsNh6qeq6MTEu3egQ5E74daTr0Bw

...

◆ ◆ “일제에 의해 국경선 축소돼”

 

그가 지적한 지도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벌어지는 지경(地境)에 대한 내용이다. 복 교수는 “고려와 거란이 전쟁할 때 압록강은 지금의 중국 요하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압록강을 오늘날의 압록강으로 설정하여 지도를 그리면 고려영토의 약 250㎞정도가 축소되게 된다는 것을 고려했어야 했다는 것이다”라며 “사실 현재 드라마제에 의해 국경선 축소돼”

 

그(에서 쓰고 있는 지도는 아마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와 있는 지도를 기본으로 한 것 같은데, 이 교과서에 실려 있는 지도가 고려의 실제 영토를 2/3이나 줄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원인으로 대일항쟁기 때 일제가 조작한 지도를 꼽았다. 그는 “1913년에 만들어진 지도인 조선역사지리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이는 일제에 의해 우리 역사가 조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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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대가 언급한 위 기사 설명 중 적색 표시 구절은 아래와 같이 서술되어야 옳은 것이다.

 

중국 하북성 동쪽 끝에 표시된 지금의 란하 중류 지점의 동쪽 지류다.

동서 폭 2000 리 쯤인 지금의 요녕성과 길림성 남부 정도가 축소되게 된다는 것...

1875 년 일본육군참모부가 간행한 일본 공식 관찬지도라는 <아세아동부여지도>의 표시를 지금까지 쓰고...

 

복기대.윤한택 등은 지금의 압록강이 고구려.고려.이조선의 압록강이였다고 주장하는 한국사학계를 비판하며 고려 압록강만큼은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윤의 주장은 한국사학계의 주장보다는 조금 진척된 듯 보이지만 지금의 요하를 중국 2 번째 정사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 혹 현토군 서개마현과 요동군 서안평현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 염난수라고 인식하는 점에 있어서는 한국사학계와 똑같은 것이다.

 

복기대의 주장을 조금 수정.보완하자면 고려 압록수 뿐만 아니라 고구려 압록수도 이조선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450 리 떨어져 있었다. 즉 고구려와 고려 압록수는 같은 물길이고 중국 한.당 시기 요동 요양현을 경유한 요수였고 요.청 시기의 혼하였다. 반면에 이조선의 압록강은 전한 시기 낙랑군을 흐른 820 리 길이 열수였고 고구려.고려 시기에는 살수로 불렸던 것 같다.

 

한편 이조선 시기 이중환.이익 등의 기록에 백두산의 좌향이 해좌사향이라 했는데 특히 해좌亥座의 의미는 이조선의 도읍인 지금의 서울을 기준으로 해 방향 곧 시계 10 시에서 12 시 사이 방향을 말하는 것으로 아래 추정도의 적색 실선이다.

 

 

 

따라서 복기대 등의 주장은 명백한 식민사관 논리일 수 밖에 없고 동북공정 찬양하는 반민족행위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이조선의 북쪽 경계선이 지금의 북조선 북쪽 경계와 똑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세아동부여지도>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연구/고지도

 

 

그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

 

1873 년경부터 일본 서향융성이 명치왕의 권위를 활용하고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청국의 직예.봉천 경계 지역 지리를 변조.이동시킨 엉터리 습작지도를 간행.선전하여 1932 년 만주국지도에서 공표하였고 1948 년 중국이 만주국지도를 습용했기 때문이다. 가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기전 202 년부터 1932 년 만주국이 건국될 때까지 약 2100 여 년 동안 황하.요하 곧 <한서/지리지>의 대요수.염난수는 지금의 란하 중.하류였다.

 

1137 년 송인 황상이 바위에 새겼다는 아래의 <지리도> 탁본을 보라. 거란.요국의 동경요양부 곧 전한 시기 요동군 요양현이였고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도 봉천성 봉천부 요양주 위치가 지금의 산동반도 정북쪽인 것이 보이는가?

 

 

이러한 연유로 1910 년 망국후 압록강을 건넌 신채호 선생이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했고 계연수 선생도 조금 과장되었지만 패수를 란하라 한 것이다.

 

아래는 현 <중국전도>에 중국 2 번째 정사인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요서군 비여현을 경유하는 난수, 요동군 안시현으로 흘러내린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현토군 서개마현과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흘러내린 2100 리 길이 염난수 곧 송.요 시기부터 청 시기까지의 황하.요하는 청색 실선으로 추기한 것이다. 또한 1656 년 이조선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진주정사 로정인 의주에서 북경까지 1990 리 로정은 적색 실선으로 추기하였다.

 

 

결국 지금의 <중국전도>는 아래와 같은 일본놈의 지도 위.변조 결과일 뿐이다.

 

주) 청색 표시는 서기전 202 년부터 1932 년까지의 지리이고 적색 표시는 1932 년 이후부터의 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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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인삼'이 누르하치의 청나라 만들었다 (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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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인삼'이 누르하치의 청나라 만들었다

"인삼 연구자로 참석한 자리에 갔더니 좀 당황해하시더군요. 고려 인삼이 아니라 만주족과 요동 인삼 얘기를 했으니까요. '인삼=우리나라만의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한 거죠. 반면에 제 책을 접한 외국 독자들은 '그 시대 인삼은 요즘 시대의 석유 같은 것'이라고 대번에 이해하더군요. 주요 천연자원을 둘러싼 긴장 관계라는 보편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최근

ww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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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학회장 이일걸은 간도가 어디인지도 모르더니만,

김선민은 이조선 땅이 아니라 한다.

다들 정신이 나갔군.

이런 인간들이 역사를 논한다니 참으로 한심하다.

 

간도와 남만주가 어디인지 제발 쳐들 보거라.

 

 

- 이조선 영조 26 년 (1751)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렸을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고지도 자료실

 

위와 같았던 지리를 1873 년 전후하여 일본 서향융성이 지리를 조작한 이후 아래와 같은 엉터리 지도까지 간행되어

급기야 2007 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 보물 1537 호로 지정하기까지 하였다.

 

 

정인보.리지린 등의 역사 지리 인식은 착각이며 비판.비난을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식민.공정 맹종질이다. 물론 서기전 3 세기 경의 준왕조선의 왕검성과 한나라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가 한반도 평양이라고 우격다짐하는 시궁창쓰레기 수준의 이병도.신석호.이기백.김철준.김정배.노태돈.송호정 등 보다는 약간 진일보한다. 

 

그러나 <규원사화>를 저술한 북애노인은 임검성.평양성으로도 불렸을 서기전 24 세기 건국된 왕검조선 첫도읍 아사달 위치는 청국 길림성 쌍양현 치소인 소알연 곧 우수牛首의 한글 뜻인 소머리에서 기원하였을 소밀성 또는 속말 곧 속말강이며 후일 개칭된 송화강 변에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삼국유사> 및 정약용의 <강역고> 등에 의하면 준왕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 및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는 모두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끝 건창 부근에 있었다. 

 

 

 

 

그러나 북조선의 리지린은 1960 년대 초기 북경대학 고힐강에게서 고조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정인보의 학설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즉 <한서/지리지> 현토군 고구려현에 주석된 요수를 지금의 요하로 인식하고 지금의 요동 해성이 험독이였으며 기준과 위만의 왕검성이 있던 곳이였고 당연히 요수 강변이고 패수가 흐르는 곳이라 주장하였다. 북조선 학계를 평정한 듯 보였지만 단군릉을 개축하고 지금의 평양을 단군 왕검의 아사달이라 확정하자 리지린의 학설은 사망하고 말았다. 

 

정인보 보다 10 여 년 전인 1920 년 대 초 신채호는 이미 중국 정사급 지리지에 언급된 요수.요하를 지금의 란하라 하였고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 곧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에 설치된 청 시기의 해성현을 흐른 물길 헌우락이라 하여 <청사고/지리지>의 개평현  북쪽 어니하를 정확하게 지목했다.

 

 

 

즉 신채호 역사인식의 번조선 도읍 아리티인 전한의 험독현,안시현 및 청국의 개평현 위치와 정인보가 인식한 준왕조선과 만.우거의 왕검성.패수.험독.해성.요수 등의 위치는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와 요하만큼이나 현저하게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환단고기/북부여기> 본문에 `패수는 지금의 란하`라는 구절을 남긴 엮은이 계연수의 역사지리 인식은 어떻게 평해야 할까? 당연히 신채호의 지리 인식을 더 명확하게 확인시킨 구절이라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영향을 받아 약간 다르게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를 지금의 요하라고 인식하는 윤내현이나 그러한 지리 인식에 터잡아 간신히 고려 천리장성이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복기대 등의 주장은 당연히 문헌 기록을 잘못 해석한 것이며 식민.공정 주장을 맹종하는 시궁창쓰레기 수준의 한국사학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패수.왕검성.요하 등 극히 간단한 지명 위치 조차 설왕설래하게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즉 1873 년경 일본 명치유신 3 걸 중 우두머리격이고 극렬정한론자인 서향융성(사이고다카모리)가 청국 봉천 지역에 밀정을 파견하여 세밀한 지리 정보를 수집한 후 교묘.교활하게 변조하여 청국의 동북 경계를 더 동쪽으로 확장하고 이조선의 서북 경계를 크게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중국 정사 <한서/지리지><후한서/군국지><진서/지리지><위서/지형지>의 유주 소속 군.현 기록과 북위 시기 간행된 <수경주/고수.포구수.난수.대요수.패수> 기록 및 이후의 수,당.요.금.원.명.청의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송.명.청 시기 간행된 고지도에 근거한 사실의 지형지세에 기반한 지도는 아래와 같았다.  

 

 

결국 1873 년 경 일본 서향융성이 기획.실행한 변조.조작지도의 원리는 아래와 같이 란하.황하.요하.압록강 등의 주요 물길을 삭제.연결.전환.이동 등의 조작 수법이였다. 

 

 

아래는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를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이고 가장 대표적인 조작인 황하의 방향 전환이 표시되어 있다.

 

 

결국 아래와 같은 쓰레기 수준의 한반도 지도가 4000 여 년 전까지 소급되어 인식되고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일본공식관찬지도 1875 년 일본육군참모부 간행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연구/고지도

 

 

복기대가 <전라도천년사> 발간 저지와 관련하여 강연한다고 한다.

`한4군이 갈석에서 대동강으로?`이라는 글귀를 보면 그의 강연을 듣지 않아도 대략 어떤 얘기를 하겠는지 짐작하겠다.

 

 

복기대는 고려의 북쪽 국경선과 천리장성 위치를 지금의 요하부근까지로 주장하며 지금의 압록강 하류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뻗으며 쌓였었다고 주장하는 한국사학계를 비난하고 고구려 평양성 위치도 지금의 요동 요양 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즉 고려.거란 시기의 요하가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복기대의 스승 윤내현도 전한 시기의 대요수가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하며 윤내현에게 영향을 준 리지린도 전한 시기 현토군 고구려현을 경유한 요수 곧 <수경주>의 소요수를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복기대 등 중국 요녕.길림 지역에서 역사학을 수학한 자들은 거의 대부분 동북공정 논리에 포획되어 있다. 복기대의 스승 윤내현에게 영향을 준 북조선의 리지린도 마찬가지다.

 

 

사실 쓰레기수준의 국사편찬위보다는 약간 진척된 일면이 있지만 지금의 요하를 전한 시기부터의 대요수 또는 요수라고 인식하는 것은 한국강단사학계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결국 그들도 명백한 식민사관.동북공정 논리 홍보자들이다.  

 

하지만 준왕조선 시기는 물론이고 삼국.고려.이조선.대한제국 시기까지도 대요수.요하는 지금의 란하 중류 지점의 서북쪽 본류 일부와 정북쪽 지류였었고 물음표 모습의 지금의 란하 상류는 별개의 물길인 난수였다.

 

 

따라서 고려 서북 국경 중 남쪽은 요동의 요양 동쪽에 흐르는 태자하였고 북쪽은 요양에서 북쪽으로 240 리 떨어진 명 시기의 철령위 동쪽인 혼하 부근까지였으니 지금의 란하 중류의 동쪽 지류인 폭하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1873 년경부터 일본 명치유신 3 걸 중 1 인인 서향융성은 지금의 란하 본류 중류 부분인 동남류한 황하와 요하의 이름을 동북쪽, 동쪽으로 각각 3000 여 리 씩 옮겨 지금의 서요하와 지금의 요하로 표시한 엉터리 습작지도를 간행.선전하였었다. 그 증거가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다.

 

- 일본공식관찬지도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 년 일본 육군참모부 간행

주) 1- 란하 2- 황하 3- 요하 4- 흑룡강 5- 바다.灣 6- 갈석산 7- 백두산 8- 이조선압록강 9 - ? 10- ? 혹 大토람산

 

 

 

결국 요하 동쪽에 흘렀던 고려의 압록강이나 이조선의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낙착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왕검조선부터 대한제국까지 4300 여 년 동안의 조선 서쪽 강역은 훈죽.동호.산융.선비.거란.몽고.여진.만주족의 땅으로 둔갑되고 백제.신라.고려.이조선.대한제국의 영역은 지금의 압록강 남쪽으로 쑤셔넣어지게 되는 것이다. 소위 요하문명까지도 중국인의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식민사관의 핵심 논리이고 동북공정 논리도 이러한 식민사관 핵심 논리에 터잡은 것이다. 결국 이조선.대한제국의 서북강역이 청국 영역으로 둔갑되는 것이고 종내는 이러한 지리는 왕검조선 시대부터였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북공정은 이조선 서북강역인 장물땅을 앞으로도 영원히 차지하려는 장물아비 심보일 뿐이며 일본의 조작지리 곧 식민사관 논리가 밝혀지는 것을 땅속으로 묻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기대.윤내현.리지린 등의 주장은 민족사관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외려 식민사관과 동북공정 논리를 한국인 스스로 굳혀주는 반민족행위임이 명백한 것이다.

 

윤내현이 전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갈석산.진장성동단 지점이라는 주장은 대단히 무지무식한 해석이다. 갈석산 부근은 전.후한.서진 시기의 요서군 지역이였고 윤내현이 낙랑군 위치라며 인용한 <진서/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 기록은 서진西晉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진 낙랑군 지역을 유지하지 못하고 낙랑군의 서남쪽 후방인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300 리 떨어진 요서군 지역으로 옮긴 교치 기록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요서군에 낙랑군이 설치되었었다고 인식할 수가 있단 말인가?

 

 

위와 같이 서기전 202 년 전한 시기부터 청국이 멸망하고 중국 봉천에 터잡은 동북군벌 장작림이 일본에 쫓겨갈 때까지인 1931 년까지 약 2100 여 년 동안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 등 5 군과 이후의 평주.영주.영평부 등의 위치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 서쪽 지역이였고 요동군은 지금의 란하 중류에 2 개의 승덕이 표시된 지역이였다. 서기전 108 년 설치되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졌다는 낙랑군 위치는 당연히 지금의 관성.쌍산자.건창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를 서향융성이란 놈이 일본 육군참모부와 밀정들을 동원하여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1 물길로 변조하고 황하.요하를 동북.동쪽으로 대략 3000 여 리 이동시켜 지금의 서요하와 요하를 표시한 엉터리 습작지도를 간행.선전하였고 이러한 기획은 1932 년 만주국지도에서 공식화되었다.

 

신채호가 피를 토하며 써내려간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의 핵심 구절은 `고대의 요하는 란하`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라는 단 2 개의 구절일 수 밖에 없는데 어찌 그 해성을 지금의 란하 중류 반가구수고 동쪽 강안 지점이 아니라 지금의 요동 해성이라 할 수가 있는가?

 

신채호의 역사인식을 숭모했다는 정인보나 정인보의 영향을 받았을 북조선의 리지린은 서기전 3 세기의 준왕조선도 아니고 어떻게 서기전 24 세기의 왕검조선의 왕검성을 지금의 요동 해성.개평이라 할 수 있는가?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가 패수를 란하라 한 구절을 보지도 못했단 말인가? 이조선 숙종 2년 <규원사화>를 서술한 북애노인이 단군조선의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했고 지금 곧 1676 년 경 만주 길림땅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 곧 그 땅이라고 단정한 구절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래 고지도는 현재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정확한 지도일 것이다.  

 

-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 (1751) 간행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고지도 자료,<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제목

 

 

위 <백산대맥도>의 묘사 범위는 마땅히 아래의 적색 실선 지역일 것이다.

 

1000만원 현상 '전라도천년사' 문제점 전국청소년 채굴대회 응모?

 

대체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대학총장들도 전공이 아니라며 도리질을 하는데.

 

한문글이라도 쬐끔 아는 늙은이들이 모여서 열정적인 역사토론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하루가 급하다.

부족하더라도 역사토론회를 매일 그리고 공개 실시해야 한다.

부족하고 미흡한 해석과 토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수정되고 채워지며 제 길을 찾아갈 것이다.

한반도 평양 지역이 낙랑군 설치 지역만 아니면 식민사관을 척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낙랑군 위치를,

리지린은 지금의 요하 하류 남쪽에 위치한 해성.개평 지역이라고 하며,

윤내현은 갈석산이 표시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창려 지점이라고 무지하고 쌩뚱맞은 소리를 하는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을 수료하고 중국 북경대학에서 <고조선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리지린도 명백한 식민사관 맹종자이고 동시에 너무나 확실한 동북공정 찬양자다. 또 대만에서 중국고대 갑골문 수학했던 윤내현도 식민사관 맹종자인 천관우.공석구조차도 교치가 분명하다고 주장한 갈석산.낙랑군설을 무제 유철이 설치한 곳이라고 쌩뚱맞은 주장을 했는데 역시 식민사관.동북공정 찬양자다.

 

리지린.윤내현의 무지무식하고 쌩뚱맞은 주장들을 보통 상식 수준의 비판도 없이 졸졸따르는 복기대.이덕일 등은 비판.비난할 가치도 없다.

 

왜일까?

 

단재 신채호가 고대의 요수는 란하,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라 하였고 계연수가 패수는 란하라 하였듯이 중국 춘추시대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요하는 지금의 란하였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지리를 1873 년경부터 일본명치왕이 변조.조작하여 만든 엉터리 지도 표시를 현재의 한.중.일 역사학계가 역사사실이라고 공인하고 있다.

 

따라서 환웅천왕의 고조선 영역은 명확하지 않지만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 곧 왕검조선과 이후 단군의 제위를 이은 부여 곧 단군부여 및 고구려와 고조 대조영이 세운 震 영역 등은 모두 아래 추정도와 같이 중국 정사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 주석의 대요수와 <요사/지리지> 동경도 기록의 요하의 동쪽 전강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1980 년 몽고족 출신 중국인 유국상이 주장한 서기전 7000 년 대의 소하서 문화로부터 시작된 요하문명의 주요 유적지가 몽땅 고조선.왕검조선.단군부여.고구려.震 영역에 속했던 것이다.

 

따라서 요하문명을 조선문명이라 개칭하여야 하고 왕검조선.단군부여.고구려.진국의 영역은 물론이고 이후의 통일신라.고려.이조선의 영역고 수정.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 인식을 가져햐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인하대고조선연구소 복기대.윤한택이나 안경전역주 <환단고기>까지도 들먹이며 해설하는 이완영 등은 고려 국경선이 지금의 요하이고 서경.왕검성.평양성 등의 위치도 지금의 요동 요양 쯤이라고 한다. 이덕일은 윤내현을 따라 낙랑군이 지금의 갈석산.산해관 부근이라고까지 한다.

 

그러면 저들 모두 요하문명은 동호 선조의 문명이고 중국인의 시조라는 황제 헌원이 일으킨 문명이 맞다고 보는 것인가?

 

저들 모두 식민사관.동북공정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왕검성.평양성이 한반도 평양이 아니고 일본이 조작하고 중국이 암묵한 지금의 지리 어느 곳에 있다고만 하면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너무 무지무식하고 오줌.똥 가리지 못하는 등신짓들을 하고 있다.

앞 글에서 <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조에 언급된 고구려.낙랑.마한.변한.백제.동옥저 등의 위치는 서나벌.신라와 비교하여 추정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적색 원의 위치를 한반도 지역에 배열하는 것 자체가 식민사관이고 동북공정 홍보하는 무지무식한 짓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적색원 위치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일까?

 

위와 같이 서나벌은 지금의 요하 하류 북안 지점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왜일까?

 

당시의 요수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가 위 추정도에 표시한 물길이였기 때문이다. 결국 <후한서/군국지> 요동군의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곳으로 대요수가 흘러들었고 동시에 현토군에서 흘러오는 2100 리 길이 염난수도 흘러들었다.

 

 

<한서/지리지>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玄兎郡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麗莽曰下句麗 屬幽州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후한서/군국지>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一)...

(一)魏氏春秋曰 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 因名之水小水貊

玄兎郡 武帝置 洛陽東北四千里

樂浪郡 武帝置 洛陽東北四千里

 

 

위 추정도가 비록 지금의 란하 유역 지도 표시와는 다르지만 중국 역대국의 약 2600 여 년 간 곧 춘추시대부터 1911 년 청국이 멸망한 해까지의 지리와 지형지세는 마땅히 위와 같았고 또한 지형지세는 당연히 현재도 같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1873 년경부터 일본 명치왕과 서향융성은 하수인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아래와 같이 난수.대요수.염난수 곧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란하 1 물길로 변조한 아래와 같은 습작지도를 간행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그러한 습작지도는 1932 년 일본 꼭두각시 만주국지도에서 공식 표시되었고 현 중국전도는 만주국지도를 습용한 것이다.

 

결국 이조선 선학들이 기록으로 남긴 백두산의 좌향인 해좌사향亥座巳向이 축좌미향丑座未向이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지무식한 한국사학계와 재야는 위 지리가 잘못인 줄도 모른다.

 

 

- 일본놈이 조작하여 제시하는 이조선 영조시기 간행된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보이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

도> , 한국문화재청이 2007 년 보물 1537 호로 지정

 

 

- 정상적인 고지도 <무제도>, 아래 한국보물 1537 호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원본으로 추정됨

소장: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따라서 이덕일이 제시한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와 중국 강소.안휘성 지역의 대륙백제와 고구려의 북쪽 강역 표시는,

명백한 식민사관.동북공정 옹호 논리이며 동시에 지극히 무지무식한 망상.과장적 발상이다.

 

 

 

 

 

 

지리 문제는 지리로 풀어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이설이 터잡지 못한다. 굳이 언어.유전자.경작지 등의 검토라는 지리 외의 군더더기 방법을 동원하는가? 세계 석학들의 연구논문이고 네이쳐 등재 논문이면 뭐하나? 무엇을 확정지을 수 있나? 어차피 정황 증거일 뿐인데.

 

<삼국유사> 기록과 같이 환웅천왕의 고조선, 단군 왕검의 조선 및 <삼국사기> 기록의 부여.고구려.백제 등의 위치 지금의 란하 동쪽 지역이였다. 근세 신채호.계연수가 주장하였듯이 요하.패수는 지금의 란하였기 때문이다.

 

 

 

그 요하.패수 위치를 지리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설명.기록한 사서는 한국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국 자료에는 차고도 넘친다. <관자><설원><한서/지리지><후한서/군국지><진서/지리지><위서/지형지> 등을 필두로 수.당.요.금.원.명.청의 정사급 지리지와 송 이후 청까지 간행된 모든 고지도를 보라. 요하가 지금의 요하인가를. 지도 조작을 증명해 내지 못하면 한국사는 없다.

 

1873 년 경부터 일본명치왕과 서향융성이 청국 동북 경계선 지리를 더 동쪽으로 뻥튀기 조작한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신채호.계연수가 이미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하고 무식한 한국사학계는 제 고집피우고 있는 중이다. 대가리 좋다지만 너무나 멍청한 서울대 역사학박사들이다. 비루하게도 밥벌이가 먼저라는 것인가?

<삼국사기/신라본기.시조 혁거세 거서간>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초기명 서나벌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 월 병진일에 시조 혁거세가 즉위하였고 칭호는 거서간이요 나이는 13세였으며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며, 뒤이어 앞서 조선의 유민이 산곡 사이에 분거하여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그러면 서나벌이 지금 대한민국의 경주인가?

 

신라본기는 혁거세  즉위 8 년에 왜인이 군사를 이끌고 변방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신덕이 있음을 듣고 이내 돌아갔다고 하였고, 19 년 봄 정월에 변한이 나라로써 항복해 왔고, 21 년에는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 불렸으며 이 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이 즉위하였다고 기록.설명되어 있다. 30 년 기록에는 낙랑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해 오려다가 변방 백성이 밤에도 문을 닫지 않았을 뿐더러 들에는 곡식이 쌓여 있음을 보고서 서로 말하기를, `이 지방 사람은 서로 도둑질을 모르니 도가 있는 나라라고 할 만하다. 우리가 몰래 군사를 이끌고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과 다름없는 짓이니 부끄러운 일이 아니냐`하고 이내 이끌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38 년 기록에는 호공을 보내어 마한을 방문하니, 마한 왕은 호공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진辰.변卞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조공을 바친 일이 없으니 사대의 예가 이럴 수가 있소?`하였다.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이성이 발흥함으로부터 인사가 닦여지고 천시도 화평하며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하고 백성들은 공경하고 사양하므로, 진한의 유민에서 변한.낙랑.왜인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없으나 우리 왕이 겸허하여 하신을 보내어 수빙토록 하였으니 예로 보아 과하다 하겠거늘 오히려 대왕이 노하여 병사로써 협박하시니 이 무슨 뜻입니까?`하였다. 예전에 중국 사람이 진秦나라의 난에 시달리어 동으로 온 자가 많았었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처하여서 진한과 더불어 살다가 이에 이르러 차음 번성해졌기 때문에 마한이 시기하여 문책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또 40 년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가 즉위하였고 53 년에는 동옥저의 사자가 좋은 말 200 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과군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나셨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신을 보내어 드리는 것입니다.`하였다고 하며 61 년 봄 3 월에 거서간이 승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라 시조 혁거세 기록에 나타나는 마한.변한.진한.동옥저.고구려.낙랑.백제.왜倭 등의 위치는 서나벌을 기준하면 대략 아래와 같을 것이다. 상호간의 거리와 서나벌은 물론이고 주변 지형도 전혀 파악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나벌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나라들의 위치나 각 나라들 간의 거리와 지세지형 및 지명 등을 파악할 도리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고구려 흥망지를 토대로 백제와 서나벌 곧 신라 초기 흥망지를 추정할 수 있게된다. 

 

아래는 재야 이덕일이 제시하는 삼국 및 대륙백제 추정도다.

 

 

위 추정도에 표시된 고구려의 북쪽 강역과 대륙백제 표시는 한국강단은 물론이고 중국.일본으로부터도 무지무식하다는 평가와 핀잔을 자초할 만한 지극한 망상일 것이다. 

 

또 한국의 역사학계 곧 강단이나 재야 모두 마한.백제와 진한.신라 등의 위치를 지금의 한반도 남부에 위치시키지만 그러한 행위는 명백한 식민사관 지리 논리일 뿐만 아니라 동북공정 주장을 맹종하는 무지무식한 짓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서나벌.신라의 금성을 비롯하여 고구려 졸본.국내성과 백제 위례.한성은 대체 어느 곳에 있었을까?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 년 당시 서북 방면 지리는 아래와 같았다.

 

 

그래서,

1910 년 압록강을 건너 청국으로 망명한 신채호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고대의 요하는 란하`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라 한 것이며,

압록강 변에서 일본 경찰에게 살해된 계연수도 <환단고기/북부여기> 본문에 `패수는 금今 란하`라는 자신의 지리 비정을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서국의 2600 여 년 간 요수 위치는 아래 추정도의 적색 숫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즉,

적색 1 물길은 춘추 시기부터 진시황 시기까지의 요수였으며,

적색 2 는 서한 시기부터 당 시기까지의 대요수였고,

적색 3 물길은 송.거란 시기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은 물론이고 만주국이 세워진 1932 년까지의 요하였다.

 

따라서,

청색 1 물길은 고구려.고려의 압록수였고,

청색 2 물길은 진국(발해)의 압록수였으며 고구려에서는 서압록이라 칭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청색 3 물길은 이조선의 압록수였고 서기전 3 세기의 준왕조선 열수였고 고구려의 살수였을 것이다.

 

 

위와 같았던 서국의 요수 3 물길을 진짜 일본 명치왕을 독살하고 이등박문 출신지인 조슈번의 하급무사로 추정되는 일본명치왕놈과 가짜 명치왕을 세운 서향융성이 1873 년경부터 변조하여 아래와 같은 습작지도를 제작.배포하고 1932 년 만주국의 지도에서 확정시켜 서국 2600 여 년간의 요수.요하가 춘추시대부터 지금의 요하인 것처럼 천지개벽.환골탈태된 것이다.

 

 

결국 해좌사향亥座巳向이라는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의 좌향이 대한민국에서는 축좌미향畜座未向이 된 것이다.

 

역사에 관심있는 대한의 모든 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증거 기록을 제시하고 상식.합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으면 해 보라.

 

 

 

 

 

 

 

 

 

한국역사학계는,

100 여 년 전부터 일본명치왕이 축소.조작한 식민사관과

일본이 조작한 지리를 암묵하고 향유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홍보.선전질한 못된 반민족 행위를 당장 중지하라.

 

동시에 지금까지의 모든 위.조작과 곡해.사기.기만 등의 잘못을 고백하고

한국민들에게 사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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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 년 일본육군참모부 간행,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연구/고지도, 일본 공식관찬지도라 설명됨

 

 

- 일본명치왕이 조작했을 것이 확실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2007 년 12 월 31 대한민국 문화재청  보물 제 1537 호 지정

 

 

위 엉터리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원본은 아래일 것이다.

 

-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추정

소장: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출처: 국립중앙도서관홈페이지 고지도/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위 <백산대맥도>의 묘사범위는 아래의 적색 실선 내 지역이다.

 

 

 

 

 

 

 

 

노태돈의 소고조선론은 동북공정서 나온 것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서울대 명예교수 노태돈, 고조선 전공도 아니면서 손대고구려 전공, 고조선 중심지 변천연구로 역사파괴 가세윤내현 연구와 비교하면 근처에도 못가는 수준 드러

www.koreahiti.com

 

 

반민족 사학은 일제식민사관과 중국동북공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서울대 명예교수 노태돈, 고조선 전공도 아니면서 손대

고구려 전공, 고조선 중심지 변천연구로 역사파괴 가세

윤내현 연구와 비교하면 근처에도 못가는 수준 드러내

고조선 권위자, 윤내현을 빨갱이로 몰아 이념으로 모독

조선총독부 부역자, 이병도 소고조선론 이어 새롭게 날조

 

 

 

1990년 노태돈(서울대 명예교수)의 「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1988년 『한국사 시민강좌』 2집 발행으로부터 2년 후이다. 제목 그대로 고조선 중심지가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영수의 고조선중심지 이동설과 다른가? 많이 다르다. 어쩌면 서영수가 겨우 벌어준 시간 동안 주류 고대사학계의 본령이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노태돈은 이기백, 김철준 등의 제자이다. 이병도의 학문적 손자뻘되는 인물로 주류 고대사학계의 맥을 잇는 3세대 대표 주자이다.

 

이런 그가 고조선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은 윤내현 등장 이후 7년이 지나서야 겨우 논문 한 편을 쓸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노태돈 또한 고조선 연구자가 아니다. 그는 삼국 시대를 주로 연구했으며 특히 고구려사를 연구했다. 그런 그가 어느 시기 작정하고 쓴 논문이 이 논문이다. 따라서 이 논문의 수준은 이것만으로도 벌써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서영수의 논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하다. 그러나 윤내현에 비추어서는 여전히 근처에도 못 간다. 논문이란 공부의 정도와 공부한 시간과 진실에 대한 열정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노태돈은 이 셋 다 윤내현보다 많이 부족하다. 이것은 일제 이래 소고조선론 일반이 신채호의 정통 대고조선론 일반에 턱없이 부족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일제와 주류 고대사학계가 항상 그렇듯 그들에겐 다른 무기가 있다. 첫째 강고한 그들만의 조직이고 둘째 백주 대낮에 윤내현을 빨갱이로 만들 수 있는 그들만의 다양한 기술과 잔혹함,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강심장 같은 것들이다. 노태돈은 말이 어눌해 강의에는 별 재주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덤덤한 얼굴 뒤로 이런 재능만은 누구보다 탁월했다. 그런 탓으로 이 논문은 지금까지도 주류 고대사학계 고조선 관련 최고의 논문이자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논문으로 남아 있다.

 

이 논문 이전과 이후 고조선 관련 학술 논문을 한 편도 쓰지 않았음에도 노태돈은 이 50여 쪽 쪼가리 하나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주류 고대사학계 비루함의 상징이자 그럼에도 여전히 철옹성으로 존재하는 비밀이다. 그럼 그 기술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뜻밖에도 이것 또한 한 꺼풀만 벗기면 어린아이 장난처럼 단순한 것이다.

 

노태돈은 이 논문에서 두 가지를 했다. 첫째, 중국. 북한. 남한 전체에 걸친 기존 사료와 연구 중에서 소고조선론에 유리하고 대고조선론에 불리한 것, 그러면서도 가부를 결정하기 어려운 애매한 자료들을 골라내어 편집한다. 거기에 자기만의 주관적 해석을 덧붙인다. 이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혹시 다른 자료나 해석들과 모순되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 주류 고대사학계에는 비판자나 감시자가 없다. 특히 노태돈 같은 거물이 규정하면 주류 사학계 내부에서는 모두가 순종한다. 또 윤내현을 포함한 대고조선론자들의 반격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기백이나 송호정이 그랬듯 그냥 무시하고 멸시하며 빨갱이 표절자라는 말만 반복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합성 따위는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일반 대중이 듣기에 이상하지 않을 만큼만 교묘하면 된다.

 

둘째, 이것이 중요한데, 노태돈은 고고학 분야에서 중국 학계에 의지하게 된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우선 이전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공산당은 남한에서 악의 축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그 시기 한국 고대사학계로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중국 고고학계에 의지한다는 건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노태돈이 이 생각을 해내고 실천했다. 중국 개방 10년이 가져온 여파중 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당시 중국 고고학계는 그 악명 높은 동북공정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이다. 이들은 일본 이상으로 고조선을 축소시키고자 하는 자들이며 한국의 소고조선론을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보다 더 갈망하는 자들이다. 하물며 이런 중국 학계가 고고학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지는 어린아이도 알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물량은 얼마나 막강한가. 노태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윤내현의 고고학이 옳고 그른가는 문제가 안 된다. 윤내현이 어떤 얘기를 하던 중국 고고학계의 물량공세를 뚫고 나갈 수는 없다. 특히 정치·경제적 외압을 뚫고 나갈 수는 없다.

 

이 두 가지로 노태돈의 논문은 완결되었다. 박수받을 일이다. 고조선에 대해 아는 게 없고 공부한 게 없어도 반박 불가능한 고조선 논문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국력과 직결된다는 말을 다시 상기하자. 그러나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는 이 사실을 훨씬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이병도가 일제에 기대어 자신의 학문을 유지했듯, 시대가 바뀌자 노태돈은 중국에 기대어 자신의 학문을 유지했다. 실은 그들은, 학문은 본래 권력이자 오로지 권력일 뿐이라고 처음부터 확신하는 자들이었다. 이 신념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자들이 주류 고대사학자들이다. 그게 아니면 멀쩡한 윤내현을 빨갱이 표절자로 만드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노태돈은 이것으로 달라진 시대의 첫 번째 이정표를 설정했다. 이병도의 소고조선론이 지배하던 해방 이후 45년, 서영수의 허접한 실험을 거쳐 노태돈은 비로소 공식적으로 고조선을 한반도에서 만주로 옮겼다. 그만큼 시대가 바뀌었고 윤내현이 말했듯 그들로서는 더 이상 버틸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병도의 이론을 바꾸는 일은 노태돈 정도 거물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태돈 정도가 아니면 누가 감히 이병도 선생의 이론을 바꾼단 말인가. 대신 노태돈의 새 이정표는 강력한 교두보이기도 했다. 그 교묘한 기술과 중국 고고학계의 결합은 윤내현의 천재로도 어찌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태돈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이 교두보를 강화하고 포장해야 한다. 나아가 이 교두보를 다시 소고조선론이 한국을 지배할 수 있는 총사령부나 총독부로 만들어야 한다.

 

출처: 『고조선과 21세기』, 김상태, 2021. 126~129쪽 #고조선과21세기 #한국사시민강좌 #이기백 #서영수 #이기동 #빨갱이 #표절론 #윤내현 #이병도 #송호정 #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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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언제까지 일본명치왕놈이 조작하고 중국모택동이 암묵하여 쐐기박은 역사 동굴의 우상을 신봉하려는가?

 

 

위 지리는 공식적으로는 1932 년 건국된 일본 꼭두각시국인 만주국부터의 지리였을 뿐이다. 하지만 청국 정사인 <청사고/지리지>를 비롯하여 중국 2000 여 년간의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고지도에 의하면 동굴 바깥의 실상은 아래와 같았다.

 

 

중국 정사급 지리지 기록보다 더 확실하고 정확한 지리는 이조선 선학 이익.이중환 등이 언급한 해좌사향이라는 백두산의 좌향일 것이다.

 

위와 같은 지리 인식이 있어야만 <삼국사기><삼국유사>나 정약용의 <강역고> 글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신채호.계연수가 왜 고대의 요하는 란하,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 패수는 금 란하라고 했겠는가?

 

제발 역사의 기본 소양은 갖추고 살자.

 

 

역사동굴의 우상을 믿으라고 사기질하다 죽은 놈들은 반론하지 못할 것이니 살아 있는 제자 노태돈.송호정 등이나 요즘 티브이 화면에 얼굴 내미는 조법종.강봉룡 등도 반드시 반론해야 할 것이야.

 

재야 자처하는 윤내현.이덕일.복기대.문성재.윤한택.이완영 등도 반론해 보라.

 

망상.사기질하는 심백강.황순종.오재성 등은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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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원문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964679&PAGE_CD=N0002&CMPT_CD=M0114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동굴의 우상'을 경계한다. 동굴 안쪽에 죄수들이 앉아 있다. 뒤쪽의 동굴 입구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사지와 목이 묶여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죄수들은 앞쪽 벽면에 비친 그림자를 실상으로 여긴다. 족쇄에서 풀려나 지상에 다녀온 누군가가 세상과 사물의 실체를 알려줘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동굴 속 환경에 익숙해져 지상에 올라가길 꺼린다.`

 

 

 

[이기환의 Hi-story]

김부식이 홀대한 가야, 유네스코는 왜 세계유산으로 대접했을까입력 : 2023.09.24 08:00

히스토리텔러 기자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9240800021


 

 

히스토리텔러 이기환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한반도 남부 중앙 지역에 산재한 고분군을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가야로 인식합니다. 아래는 그 주요 기사입니다.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 제왕의 사적을 기록한 ‘본기’에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는 마련했지만 <가야본기>는 빼놓았다. 그래서 <사국사기>가 아닌 <삼국사기>가 되었다.

 

다만 ‘신라본기’에 종종 ‘가야국’ 이야기를 끼워 넣었습니다. 기원후 77년(탈해왕 21) ‘가야와의 황산진 전투’를 시작으로 “지원군을 보내 가야를 공격하는 포상8국을 물리쳤다”(209), “가야가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212)는 기사가 보입니다.

또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을 격퇴했다”(481), “가야국 왕이 혼인을 청했다(522)”, “법흥왕이 변방 순행 중 가야국 왕을 만났다”(524)는 내용도 있네요. 급기야 “532년(법흥왕 19) 금관국왕 김구해가 항복했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김구해는 김유신(595~673)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이후 “554년(진흥왕 15)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562년(진흥왕 23) 9월 배반한 가야를 토벌했다”는 가야의 멸망소식을 전합니다.

 

<삼국사기> ‘잡지·지리’는 ‘김해소경’을 설명하면서 ‘금관국’의 역사를 요약 소개합니다.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가락국 혹은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10대 구해왕에 이르렀고, 532년 항복하여….”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전은 “김유신의 12대조인 수로왕이 기원후 42년 가야를 건국하고, 후에 금관국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부연설명 했습니다. 제법 구체적이죠. 금관가야 만이 아닙니다.

‘대가야국’ 이야기도 <삼국사기> ‘잡지·지리’에 나옵니다.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멸망시키고….”

 

이상하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10대 500년 이어간 금관국과, 16대 520년 존속한 대가야가 분명히 존재했죠.

그쯤되면 ‘금관국본기’, ‘대가야국본기’ 등은 아니더라도 ‘가야본기’ 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은 왜 ‘가야’의 역사를 무시한 걸까요. 일반적인 설명은 이거죠.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삼국과 같이 통일된 하나의 고대 국가를 이룬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한반도 남부 중앙 지역이 <삼국사기/신라본기> 기록의 금관국.대가야 영역이였을까요?

<삼국사기> 내용으로 보아 금관국.대가야 등의 영역은 서쪽의 백제와 동쪽의 신라 사이 지역일 수 밖에 없고 그 외라면 당연히 백제.신라의 부근일 것인데 과연 금관국.대가야 영역이 지금의 경상.전라도 지역이였는가라는 말입니다.

 

나는 김부식이 인식한 금관국.대가야 영역은 한반도 남부의 중앙 지역이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왜일까요?

 

백제와 신라의 흥망지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대릉하 서쪽 상류와 동쪽 하류 지역이고 또한 고구려의 서쪽 국경 지역인 한.진.수.당 시기의 요동이 지금의 란하 중류 2 개의 승덕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부식은 고려 송도에서 <삼국사기>를 저술했을 것이고 묘청의 반란군을 서경에서 패퇴시켰을 것인데 그 송도.서경 위치도 한반도 중앙의 개경.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대릉하 중.상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백제 흥망지는 전국시대 연국과 시황의 진 그리고 유방의 서한이 설치한 요동군 동쪽 지역의 남쪽 지역이였고 요동군 동쪽 끝 지역과 이어져 설치된 낙랑군의 서쪽 지역입니다. 요동.낙랑 2 군 위치와 관련하여 대략적이지만 정확한 기록은 중국 정사 <후한서/군국지> 요동.현토.낙랑 3 개 군 주석입니다.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각각 3600 리,4000 리, 5000 리 떨어진 곳이 지금의 란하 중류와 동쪽 강안 지역이였고 그곳으로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및 820 리 길이 열수가 흘러내렸습니다. 신라는 당연히 낙랑군의 동쪽에 위치하였었습니다. 백제.신라가 흥망한 마한.진한 위치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이였고 그 동쪽인 지금의 요하 하류 유역이 진한 영역이였습니다.

 

지리가 그러했기 때문에 <신증동국여지승람/경사>에 마한고지인 백제 강역의 오른쪽 곧 서쪽에는 발해가 있다는 고려 시기의 기록이 수정되지 않고 전해진 것입니다. 이때 한국의 역사가들이 밝혀야 할 것은 당연히 발해입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券之一 京都上

古朝鮮馬韓之域 北鎭華山有龍盤虎踞之勢 南以漢江爲襟帶左控關嶺 右環渤海 其形勝甲於東方誠山河百二之地也

百濟中葉自漢山而徙居末幾播遷南土 高麗肅宗雖置南京有時來巡 而巳皆不足以當形勝之勝

 

 

위 기록의 발해는 요동군을 경유하는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염난수가 합류한 후 이루어진 만灣이고 이 만이 지금의 란하 최하류였으며 남쪽의 발해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백제 흥망지는 중국 하북성 동쪽 끝 지역을 흐르는 지금의 란하 하류의 동쪽 강안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서진 말인 서기 300 년 경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할 때 백제는 서쪽으로 만灣인 지금의 란하 하류를 건너 요서 지역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 1612 년 명국인 모원의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

 

 

 

그러면 백제의 동쪽과 신라의 서쪽 및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을 가야를 한반도의 남부 중앙 지역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신라 융성기인 진흥왕 시기부터 동남쪽으로 곧 지금의 요동을 거쳐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점거하였을 것입니다. 금관국.남가야.대야국 등이 이 시기에 복속되었지만 그 가야의 남쪽 경계가 지금의 어느 지역까지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사 <후한서><삼국지> 열전 기록에 의하면 3 세기까지에는 대략 한반도 전체가 변진 12 국의 영역으로 설명.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한반도 남부 중앙의 고분군 지역을 가야 영역이라 명토박기에는 서국과 우리 동국의 사서 기록으로는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며 따라서 성급한 결론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백제.신라의 흥망지를 한반도 남부의 서쪽과 동쪽으로 인식하는 것도 무지무식한 해석일 수 밖에 없고 명백한 조작.식민사관일 수 밖에 없고 동시에 동북공정 논리를 선전.홍보하는 짓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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