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고고학자 이진희는 1982 년 한국에서 간행한 <광개토왕릉비문 탐구>에서 일본 명치왕의 육군 참모본부가 고구려 광개토왕(앞으로 영락태왕이라 함)의 릉비 비문을 변조한 경과를 상세하게 밝히고 논증하였다.

이진희에 의하면 1870 년대 초 일본명치왕 참모부는 본래 임무인 군사 작전 수립과 성공을 위해 조선.청국에 밀정을 보내 세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 중에서 참모부가 관여하고 실행한 대표적인 것이 영락태왕비문 쌍구가묵본 입수와 해석 및 비면 석회도포와 2,3 차 변조라 하며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즉 1880 년 고구려 영락태왕비가 청국 봉천성 흥경부 환인현에서 발견되었고 1884 년 일본 밀정 육군 중위 주내경신(사코오가께아키)가 비문을 쌍구탁본한 100 여 매를 입수.휴대하고 귀국하여 참모부에 제출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참모부 주도하에 6 년에 걸쳐 간신히 석문을 작성하고 해독하여 1889 년 정탁본처럼 꾸며 일본 사회에 발표하였는데 비 발견이나 일본 밀정이 쌍구가묵본을 입수한 것은 물론이고 공개한 1889 년까지도 이조선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주) 현재의 압록강 변에 있는 영락태왕비(광개토왕비)

 

일본 참모부는 영락태왕비문 일부를 변조하여 4 세기 중반에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군사 활동을 강조하려 하였고 그 변조한 문구를 기초로 임나일본부 설치를 기정사실화하려 했지만 이진희는 쌍구탁본한 비문의 글자에 의문이 있기때문에 이제라도 비문을 정밀하게 조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하고 옳은 주장이라 본다.

 

문제는 이진희가 논문을 발표한 1960 년대 초에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및 일본 3 국의 지리 인식이 이미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이진희도 그 왜곡된 지리를 눈치채지 못하고 간과하였다는 점이다.

 

즉 1880 년 영락태왕비가 발견된 청국 환인현 위치와 이진희가 비문 재조사를 주장한 1960 년대 초 영락태왕비의 위치는 같은 곳이 아니다. 일본 참모부 하수인들인 흑판승미.금서룡 등이 환인현을 찾아가 조사한 것은 1919 년까지였을 뿐이고 그 후 현지 조사가 허락된 1935 년 가을이였다.

 

이 16 년 동안 어느 누구도 영락태왕비를 찾을 수 없었는데 그 기간 중에는 만주국이 1932 년 건국되었고 1934 년에는 일본참모부가 1870 년대 초부터 조선과 청국 국경 지역 지리를 동쪽으로 확산.이동 수법으로 조작한 지리를 선전해온 습작지도 표시를 공식화한 만주국지도가 간행되었다. 만주국지도는 청국의 동북쪽 국경 지명을 동북쪽으로 크게 확산.재배치 표시한 뻥튀기 조작지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1934 년 이후의 영락태왕비 위치는 원래의 위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지리 조작이 가능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서기전 202 년 전한 시기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의 중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에 기록.설명된 대요수.요하가 지금의 란하 중.하류 본.지류였기 때문이다. 즉 신채호.교시와 같이 `고대의 요하는 란하`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 중국 2000 여 년의 정확한 지리였고 비록 지류를 본류로 설명한 과장된 부분은 있지만 계연수의 `패수는 란하`라는 문장도 신채호의 문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한편 아래 참조와 같이 참모본부 동과부 下村修介는 1875 년 복원화승 대좌가 청국 공사관부무관으로 부임할 때 수원으로 동행하여 각지를 스파이짓하고, 뒤에 참모본부 관서국에서 간행한 <지나지지> 총체부(1887), 만주부(1889)를 편집한 중심인물이라 하는데, 만주부에 표시된 지리는 당연히 당시의 청국 지리와 달랐고 연쇄적으로 이조선의 압록강도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지금의 청룡하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압록강을 표시한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 멸망 시기의 강역은 서북강역을 잃은 반쪽짜리 강역으로 크게 축소되었고 이는 이조선을 영원히 식민지배하기 위하여 조선 역사 정통과 강역 모두 크게 축소시켜 조선인의 자조를 조장하여 독립 의지를 꺽으려한 기획 중의 하나인 것이다.

 

결국 영락태왕비 이전은 지리 조작의 후행적이며 부수적인 절차였을 뿐이였다.

 

 

 

[참조]

 

아래는 이진희도 영락태왕비 이전을 예측했을 만한 <광개토왕릉비문 탐구>의 본문 일부다.

 

1907 년 5 월에 小澤德平 大左가 비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현지에 뛰어 들었을 때 집안현지사 오광국이 `如愛此碑 僅可先送拓本數張(이 비를 좋아한다면 먼저 탁본 몇 장을 보낼 수 있을 따름이다)이라 답한 것도 탁본이 판매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본문 16 쪽)

 

그리고 노일전쟁이 끝나자 고대에 있어서 출병과 지배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과시하기 위하여 비의 반출을 계획하고, 1907 년 5 월에는 小澤 육군 대좌가 현지에 뛰어든 것이다. 이때 해군은 압록강 하구까지 군함을 파견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본의 학자가 好太王碑를 알기 훨씬 이전부터 참모본부는 그것을 알고 비문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비 그 자체를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했다. 그뿐 아니라 참모본부 편찬과에서는 酒匂가 비문을 갖고 돌아오기 전부터 고대의 한일관계사를 연구하여 1882 년에는 <任那考稿임나고고>가 쓰여졌다. 그것은 학자들이 한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전의 일이다. (본문 17 쪽)

 

[비의 일본으로의 반출 계획]

일본의 구 참모본부는 광개토왕릉 비문에 손을 대었을 뿐 아니라 비 자체를 일본으로 운반하려고까지 했다.

...

동양사의 대가인 白鳥庫吉(학습원 교수, 뒤에 동경제대 교수)은 1905 년 8 월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물론 일본 역사에도 이 3 국이 일본에 조공했다든지, 혹은 속국이 되었다든지 하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일본 역사 등은 소위 전설이며 역사상의 가치가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 비문은 당시에 있어서 가장 신용할 역사상의 유물이다. 이에 의해서 일본이 조선 남부를 지배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 중요한 재료를 제공한 것이다. 나는 이 비를 일본에 가지고 와서 박물관이나 공원이나에 세우는 것은 실로 재미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 당시 일본은 삼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지만, 북부의 고구려와는 반대의 지위에 위치한 것이다. ...`

... 그는 1905 년부터 비의 운반을 열심히 주장했는데, 노일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06 년에는 그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해서 현지에 발을 내딛고 있다. ... 白鳥는 다른 글에서, `비를 갖고 돌아오는 일은 민정서의 승낙을 얻었을 뿐 아니라 나의 우인인 大原군도 마찬가지로 그 희망을 갖고 있었다`...

 

광개토왕릉비를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해 해군이 압록강 하구까지 군함을 돌려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연구자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 당사자의 한 사람이었던 押上森藏(1855~1927) 퇴역 중장은 1918 년 10 월 일본역사지리학회 예회 석상에서 그의 현역시대에 비를 운반할 계획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押上森藏은 비를 운반하지 못했던 이유를 `아무래도 컸으므로 운반이 곤란하였고 또한 자면이 손상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중지`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白鳥는, `한국 것을 갖고 돌아와 물의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이 그 밖에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집안현향토지>(1915)에는 집안현지사인 오광국이 봉천제학사에게 보낸 1907 년 5 월 자의 주목할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의하면 오광국은 일본군 제 57 연대장인 小澤德平 대좌가 와서 비를 `일본박물원`(당시의 제실박물관, 현재 동경국립박물관)에 진열하고 싶으니 팔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그 비는 민간의 것이며 더우기 비석은 묵직하므로 운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하자, 小澤은 병륜(군함)과 비교하면 석비의 무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군함이 침몰한다 해도 끌어 올릴 수 있으므로 병력을 동원한다면 석비는 아주 쉽게 반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용의심심함을 살필수 있었다고 한다. ... 小澤德平(1855~1914)은 육군사관학교 제 2 기 졸업생으로, 1885 년 5 월에 참모본부에 들어간 이래 전후 18 년간 참모본부원으로서 청국 각지를 스파이짓하며 누빈 인물로, <회여록>이 출판된 1889 년 6 월에는 참모본부 제 2 국 부로 있었다. 광개토왕릉비의 발굴.운반을 어디서 계획하고, 누가 그것을 小澤에 명령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비와 관련을 갖는 군인이 모두 참모본부원을 지낸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해답은 쉽사리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1917 년에 竹內榮喜 중좌(뒤에 소장)가 `친히 현지를 방문하여 릉비 그 자체를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竹內도 참모본부에서 근무한 것이 있는 인물로, `릉비 그 자체를 검토한 1917 년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 부관`이었다. (본문 101,102,103,104,105쪽)

 

하지만 일본 학자로서 최초로 비를 본 것은 로일전쟁 직후인 1905 년 가을 鳥居龍藏(1870~1953)이었고, 그 이전에 현지에 발을 내디딘 사람은 없다. 노일전쟁에 의해서 일본군이 점령이 시작되기까지는 일본인에게는 자유로운 만주 여행이 허가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파이로서 구참모본부에서 파견된 경유는 별도이다. 그들은 현지어에 숙달할 때까지 훈련을 받은 뒤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각지에 잠입했다. 처음으로 비문을 갖고 돌아온 酒匂景信은 북경에서 중국어를 습득하고 중국인 의사로 변장하여 성경성 일대를 누빈 참모본부 파견 장교였다. 5 년 이상의 세월이 걸려 비문을 해독.해석한 것도 참모본부 편찬과였으며, 酒匂와 교대하여 파견된 栗栖亮 중위도 비를 조사하였고,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년 동 편찬과의 倉辻明俊 중위도 비를 조사하였다. (본문 16,17 쪽)

 

한편 <회여록>의 <고구려고비고>에는 `명치 21 년(1888) 10 월 橫井忠直 識`이라 되어 있어 양자가 쓰여진 시기도 같다. 이들 사실로부터 해독 작없의 실질적인 중심은 橫井忠直이며, 그의 1888 년 10 월 석문은 다른 해독자의 의견을 대폭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佐伯有淸의 논문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재검토를 위한 서장>(일본역사 제 287 호, 1972.4)에 의해서 횡정과 참모본부와의 관계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즉 좌백은 이 논문에서,

`이 인물은 1883 년 6 월의 <개정 관원록>에서 ``참모본부 과료 7 등출사 / 대분(역주:대분현 출신이란 뜻) / 橫井忠直``이라 보이고, 그 이듬해 육군대학교 교수를 겸임하였으며, 1885 년의 <개정 관원록>에서는 참모본부 편찬과 과료 겸 대학교수로서 기재되었고, 전게한 참모본부 편찬과 편 <정서전기고> 상권에는 1885 년 11 월 참모본부장 山縣有朋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그 서문의 글자를 橫井忠直이 쓰고 있다. 橫井은 <정서전기고>를 편찬했을 것이다. 또한 1888 년 <고구려비출토기> 등을 집필했을 무렵에 해당하는 1888 년 12 월 1 일 현재의 <직원록> 육군참모본부 및 육군대학교 항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편찬과 과원 대학교교관교수 橫井忠直...

육군대학교 교관 橫井忠直

 

이상의 좌백 연구에 의해서 橫井忠直은 1883 년 6 월에 참모본부에 출사하여 1885 년부터 동 편찬과 과료를 역임한 사실이 명백하게 되었다. 그런데 해독 작업의 정리가 행해진 해인 1888 년 9 월의 <개정 관원록>갑편을 보면 참모본부 육군부 제 2 국 항에는,

편찬과

과장 육군보병소좌 大原 里賢 ...

과원 대학교교관.육군교수 橫井 忠直 ...

동과附 육군성판임3등 下村 修介 ...

라 되어 있다. 편찬과장인 大原里賢은 1874 년부터 십수년간에 걸쳐서 청국 각지를 스파이짓하며 누비고 비 반출계획에도 관계한 인물로서 <영희본>을 수집하고 비문 해독 작업의 직접적인 지휘자였다. ... 또한 동과부에 보이는 下村修介는 1875 년 복원화승 대좌가 청국 공사관부무관으로 부임할 때 수원으로 동행하여 각지를 스파이짓하고, 뒤에 참모본부 관서국에서 편집한 <지나지지支那地誌> 총체부(1887 년 11 월 간행)와 동 편찬과 편집 <지나지지> 만주부(1889 년 10 월 간행)를 편집한 중심 인물이다.

 

이렇게 하여 비문 해독 잡업의 중심 인물이었던 橫井忠直의 경력 및 그가 속했던 참모본부 편찬과의 동정의 일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문 해독 작업은 만 5 년 이상을 소비한 후 횡정이 다른 해독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1888 년 10 월 석문을 작성한 것이라고 한 판단에 잘못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발견한 井上賴圀 문서에 의해서 그러한 판단이 정확하지 않음을 알았다. (본문 79,80 쪽)

 

[해독작업의 정리]

井上賴圀의 <옥록>에는 <회여록>과 같은 석문을 싣고, 그 뒤에 해독 작업의 정리가 1888 년 10 월에 酒구의 입회하에 행해진 것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정상의 첨서가 붙어있다.

 

`이 비는 靑江秀, 橫井忠直 두 사람의 주 및 도서료.박물관 등에 사본이 있긴 하나 착란이 있어 잘 통하지 않는다. 인하여 명치21년(1888) 10 월 11 일 궁내성에서 참모본부의 원본 및 통구에서 얻어 온 酒匂대좌에게 번호를 정정케 하였다(원비 글자의 깊이는 석면에서 3 촌쯤 되고, 결손이 심하므로 큰 종이에 탑본하기가 불가능하여 한 매에 16 자로 하여 번호를 붙인 것이다). 河田剛, 丸山作樂, 橫井忠直, 그리고 나는 서로 협의하여 그 곳에서 이와 같은 훈점을 붙였다. 酒구景信은 북경에서 지나어를 배우고 만주 지방에 여행할 때 이 비를 얻었는데, 이 곳 인가는 20 호쯤 있었다 하며, 이에 이르기를 묘비상의 와瓦도 갖고 돌아와서 丸山作樂에 선사했는데 와는 거의 돌과 비길만한 견고한 것으로 가장자리에 문자가 있다(酒구대좌를 처음에는 佐川대좌라고 썻다가 뒤에 이를 酒匂로 정정하였다). (본문 81쪽)

 

丸山作樂(1840~1899)은 외무대승을 역임, 1871 년 `征韓`을 기도한 인물로 1887 년 경에는 제실제도취조괘로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이나 井上毅의 자문에 응하였다. 한편 井上賴圀(1839~1914)은 그 당시 궁내성 도서료 주임어용괘였으며 뒤에 <고사유원>교열원, 학습원 교수를 역임한 거물이다.

 

참모본부 편차과에서의 해독 작업은 이상과 같은 경과를 거쳐 <회여록> 제 5 집으로서 1889 년 6 월에 출판되었다. 그간 일본의 대표적 漢學者가 해독에 참가하여 栗田寬, 飯田武鄕, 佐藤誠實 등의 국학자를 위시하여 일본 근대사학을 개척한 重野安繹. 久米邦武. 星野恆 등이 이를 교열했다. 그것은 일보 ㄴ학계를 동원한 해독 작업이었다고 해도 큰 잘못이 없을 정도로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해독 작업이 진행된 사실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해독이나 교열을 한 사람은 누구 한 사람도 이에 대하여 공적으로 써서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참모본부로 부터 엄격한 함구령이 내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

해독 작업을 완료한 뒤 酒匂 쌍구본은 네 폭으로 표장되어 탁본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 문자의 둘레나 순위 번호, 서로 연결한 부분을 짚은 먹으로 발랐다. 그리고 명치 21 년 (1888) 12 월 酒匂景信의 이름으로 명치천황에 헌상되어 1890 년 7 월에는 비의 존재를 널리 선전하기 위해 제국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본문 82,83쪽)

 

이처럼 일본의 대외 침략정책이 강화되어 가는 중에 참모본부는 1879 년 10 월 독일공사관 주재 무관으로서 군사행정을 배우고 돌아온 37 세의 桂太郞 중좌를 관서국장에 발탁하여, 그에게 대청 침략작전의 방안을 기초시키는 한편, 10 여 명의 장교를 비밀리에 청국에 보내어 군사적략적인 견지에서 병제.군비.지리를 조사 연구케 했다. 또한 이듬해인 1880 년에는 `지나어학생`의 명목으로 10 여 명을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안남.페르시아 방면에까지 참모본부 군인이 파견되었다. ...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편집한 <인방병비략>(1880)이나 <지나지지>는 이러한 조사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참모본부는 한국에도 군인을 보내어 <조선지지>를 편찬하는 등 대한.대청 침공작전 준비를 진행하는 한편 山縣有朋 참모본부장을 중심으로 군비의 대확장과 야전을 위한 정비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었다. (본문 90.91쪽)

 

 

2021 년 씀.

2024 년 고침.

 

 

즉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아래의 지리를 의심해야만 한다.

 

 

 

위와 같은 지리 표시를 토대로 서기전 24 세기 경의 왕검조선의 아사달 임금성이나 3 세기 경의 준왕조선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을 지목해서는 안된다.

 

준왕조선의 왕검성이나 낙랑군 및 고구려 평양성을 한반도 평양이라고 단정하는 한국사학계를 비난하며 비정批正(혹 定)이라는 이상한 단어를 동원하여 인하대고조선연구원들과 같이 지금의 요동 해성 혹은 요양이라고도 하며 또 윤내현.이덕일 등과 같이 지금의 산해관 서쪽 갈석산 부근이라며 목청을 높힌다.

 

그러나 지금의 란하.대릉하.요하.압록강 등이 표시된 중국전도로는 왕검성.낙랑군.평양성은 한반도 평양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로 산해관 갈석산 부근이 낙랑군일 수가 없는 것이고 요동의 요양 부근이 고구려 평양성일 수가 없으며 고려 국경이 요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왜인가?

 

한국.중국의 역사지리 문헌에 설명된 지리가 현재의 한국.중국전도 표시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일본명치왕과 서향융성이 1873 년경부터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란하 1 물길로 조작한 습작지도가 1932 년 만주국의 지도에서 공식 채택된 후 1948 년 건국된 중공에게 그대로 습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의 청국과 이조선의 지리는 아래와 같았다.

 

 

 

 

위와 같은 지리여야만 중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 기록 곧 <관자><설원><사기><삼가주석><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위서><수경주><수서><신.구당서><통전><요사><금사><원사><명사><만주원류고><청사고> 등은 물론이고 송.명.청 시기 간행된 모든 고지도와 일치한다.

 

즉 <후한서/군국지> 요동군과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요동군 지역을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4000 리 떨어진 현토군을 경유한 2100 리 길이 염난수가 흘러들어야 하고 준왕조선의 왕검성 부근 곧 서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진 곳이여야 하고 그 지역에는 820 리 길이 열수가 흘러야 하는데 이러한 지리와 지형은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변동이 없었으며 이러한 지리를 충족시키는 지역은 오로지 지금의 란하 중류 지역 뿐이기 때문이다.

 

 

- 1137 년 송나라 황상이 각석한 <지리도>

 

 

 

- 1612 년 명나라 모워의 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

 

 

 

 

또한 당연히 <삼국사기><삼국유사><동국통감><조선왕조실록> 등과 이조선 선학들의 개인 기록인 <성호사설><택리지><강역고-정약용><조선상고사-신채호><환단고기/북부여기-계연수> 등의 기록은 물론이고 아래의 이조선 영조시기 홍문관에서 제작한 고지도와 일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비정批正의 문제가 아니라 지리를 통관하는 연혁이다.

 

위 정상 고지도조차도 일본 명치왕과 서향융성의 하수인인 육군참모부 편찬과.지도과에서는 아래와 같이 변조하였고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2007 년 12 월 31 일 한국보물 제 1537 호로 지정까지 하였다.

 

 

한국역사학계는 시민들을 향하여 전문지식도 갖추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역사를 해석한다고 한다.

과연 역사를 왜곡하고 맹종하며 무지무식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1873 년 즈음 일본명치왕과 서향융성은 청국의 동북 국경 지역을 흐른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아래와 같이 삭제.연결.조작 등의 수법을 동원하여 란하 1 물길로 변조하였다.

 

 

변조 후엔 원래의 란하 동쪽 모든 지리를 <청사고/지리지>에 대략 맞추어 전면적으로 더 동쪽으로 이동.표시한 습작지도를 간행.홍보했다.

 

결국 아래와 같은 조작지도가 한.중.일 3 국 역사학계 공히 역사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이러한 지리는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의 지리 부분 핵심 논리가 됐다.

 

 

그 조작.습작 지도가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다.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 년 일본 공식관찬지도, 육군참모부 간행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연구/고지도/아세아동부여지도

 

그러나 위 엉터리 지도가 간행되었다는 1875 년 당시까지 지금의 란하 부근의 역사지리는 아래와 같았다.

 

- 역대 3 조선 강역

- 3 국 강역

- 서국 전.후한 유주 8 군

 

- 한국보물 1537 호로 지정된 엉터리 조작지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간행된 것으로 알려짐. 

 

- 일본명치왕의 하수인들이 만들고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BY_DAUM->

<!-BY_DAUM->우선, <후한서>에서 우북평군과 요서군이 서로 확 차이나는 것은 치소 중심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후한 때 요서군의 치소는 양락(陽樂)현인데 난하 유역의 비여현이나 영지현과는 달리, 양락현은 훨씬 북동쪽의 대릉하 유역으로 비정됩니다. 이미 거론하신 후한서 군국지 거리기록도 그렇지만, 후한서 조포전도 중요한 근거입니다. 이에 따르면 조포가 요서태수로 부임한 이듬해에 사람을 보내 어머니와 처자식을 데려오게 하는데 그 일행이 도착하기 직전 유성을 지나다가 선비족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따라서 후한 요서군의 군치인 양락현은 유성의 바로 동쪽, 즉 지금의 조양시와 의현 사이 쯤으로 비정되며, 이는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기록과도 서로 부합됩니다.   

둘째, <구당서>의 경우는 평주보다 계주의 수치가 더 크다는게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만 수십리 정도는 그냥 측정상의 편차이거나 사소한 오기로 볼 수 있겠죠. 
 
만약 오기라고 가정한다면, 장안으로부터 계주, 평주의 거리나 평주-영주의 거리를 볼 때 평주의 수치를 줄여 적으면서 생긴 오류일 가능성이 크므로(가령 ‘二千八百五十里’나 ‘二千九百五十里’를 ‘二千六百五十里’로 오기) ‘영토확장’하기 위해 날조한 것으로 의심할 사안은 아닙니다.

셋째, 청골님 글을 읽고서 <통전>을 처음 자세히 살펴봤는데 분명 이상하네요. 관련 대목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상곡군(=역주) [동] 범양군 214리. [동북] 범양현 양향현 경계 80리. / 서경(장안)과의 거리 2,297리. 동경(낙양)과의 거리 1,462리.
범양군(=유주) [동] 어양군 210리. [서] 상곡군 214리. [동북] 귀화군 80리. / 서경 2,523리. 동경 1,680리.
귀화군(=순주) [동] 어양군 215리. [남] 범양군 80리. [동남] 어양군 210리. [서남] 범양군 80리. / 서경 2,700리. 동경 1,850리.
어양군(=계주) [동] 북평군 300리 [서] 범양군 210리. [동남] 북평군 석성현 185리. [서남] 범양군 옹노현 경계 125리. [동북] 북평군 석성현 경계의 폐 노룡수(廢盧龍戍) 200리. / 서경 2,820리. 동경 2,020리
북평군(=평주) [동] 유성군 700리. [남] 바다 200리. [서] 어양군 300리. [동남] 임유관 180리. [서북] 석성현 140리. [동북] 유성군 700리. / 서경 4,320리. 동경 3,520리
유성군(=영주) [동] 요하 480리. [남] 바다 260리. [서] 북평군 700리. [북쪽] 거란 경계 50리. [동남] 안동부 270리. [서남] 북평군 700리. [서북] 거란경계 70리. [동북] 거란경계 90리. / 서경 5,000리. 동경 4,110리.

(예를 들어 ‘[동] 범양군 214리’ 는 ‘동쪽으로 214리 가면 범양군에 닿는다’ 는 뜻으로 읽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통전 주군전의 기술방식은 엄밀히는 지명 중심은 아니고 방위 중심의 설명입니다. 모든 군마다 동,서,남,북,동남,서남,서북,동북의 여덟 방위를 일일이 설명하고 있으나 논지와 관련된 부분만 뽑아서 정리했습니다.)

위에서 알 수 있듯 앞에서부터 쭉 일관성이 유지되다가, 북평군, 유성군의 서경(장안), 동경(낙양)과의 거리 대목에서 갑자기 엉뚱한 수치가 튀어나옵니다. 어양군 동쪽으로 300리 가면 북평군이 있는데, 어양군은 동경으로부터 2,020리이나 북평군은 느닷없이 3,520리 ? 

군들이 정확히 일직선으로 늘어선 것은 아니고 또한 요즘과 같은 직선거리 개념이 아니므로 숫자가 반드시 딱 떨어질 필요는 없고 몇십 리 정도 차이나는 것은 통상적인 편차 범위 내로 볼 수 있습니다만, 그 범위를 훌쩍 벗어나서 천리 이상이 차이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네요. 

제가 보기에도 이 대목은 분명 오류가 있는 것 같고, 북평군, 유성군의 수도와의 거리 대목이 의심이 갑니다. 가령 북평군의 경우 각각 천 리를 줄여서 서경 4,320리 -> 3,320리 ; 동경 3,520리 -> 2,520리로 수정하면 쭉 이어져온 전체적인 흐름과 서로 들어맞으며 이는 유성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류가 있는게 맞다고 하더라도, 이를 두우나 후대의 필사자, 판각자의 의도적인 조작에 기인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수도와의 거리만 달랑 나와있다면 혹 그렇게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이 경우에는 그 중간과정이 일일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이상하다는게 금방 드러나니까요. 청골님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의도로 조작을 하고자 했다면 앞의 수치들, 특히 어양군-북평군, 북평군-유성군의 거리도 함께 다 고쳤어야 됩니다. 이를 볼 때 어떤 경위로 생긴 오류인지 확정하기는 힘드나 적어도 의도적인 조작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학이 원글보기
메모 :

 

- 1873 년경부터 이조선 서북국경 지도조작 모의

재일고고학자 이진희의 <광개토왕릉비의 탐구>와 <아세아동부여지도>에 근거하여 명치왕과 서향융성의 지도조작을 추정함.

 

- 지도조작 주모자

일본 명치왕

서향융성 - 1873 년 육군 초급장교 수십 명을 이조선.청국.대만에 밀정으로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 

 

- 하수인

일본육군참모부

계태랑     - 참모부장

대원리현 - 편찬과장

횡정충직 - 영락태왕비문 쌍구탑본 석문 작성 실무자, 1889 년 정탁본으로 발표, <임나고> 작성

하촌수개 - 청국.이조선 국경 변조 지도 작성 추정자

 

- 대표 밀정

주내경신 - 1883 년 영락태왕비문 일부 변조와 쌍구탑본 휴대하고 귀국

 

 

 

- 1875 년 일본육군참모부 간행, 공식관찬지도라고 설명됨.

출처: 한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연구/고지도

 

주1) 1875 년 당시 란하는 1 물길이였고, 황하는 2, 요하는 3 , 흑룡강은 4 물길이였고 이조선의 압록강은 8 물

        길이였다. 또한 1 란하는 춘추~진시황 시기에는 요수로 불렸으며 한~당 시기에는 난수, 송~청 시기에 란

        하로 개칭. 황하 2 물길도 한~당 시기에는 대요수였으며 송 시기 이후 황하로 개칭. 요하 3 물길도 한~당

        시기에는 염난수였으며 송 시기 이후 요하로 개칭. 흑룡강 4 물길은 북위~당 시기에 흑수로 설명.기록되

        었고 청시기에서야 흑룡강으로 기록됨. 압록강 8 물길은 전한 시기의 열수列水였으며 고구려의 살수薩

        水임.

   2)  이조선 시기 백두산은 7 위치에 있었고 지금의 백두산 10 은 <삼국사기/신라본기>의 토함산으로 추정

        됨.

   3) 결국 일본명치왕과 서향융성은 이조선의 압록강 8 물길을 9 물길로 이동.조작시키기 위해 2,3 황하.요하

       를 4 위치로 이동.조작한 것

 

      

 

 

- 재하수인들

 

1. 백조고길(1865-1942) -시라토리 구라키치

- 1887 년 동경제국대학 사학과 개설

-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중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 전개

- 1906 년 일본 조차지 청국 봉천성 금주구 대련에 있던 남만주철도(주)(- 이하 만철이라 약함) 내에 `만주역사지리조사부`  설치를 주도하여 전내긍,송정등,도엽암길-이나바 이와키치 등을 불러들여 만주 즉 길림과 조선의 역사.지리에 대한 조사.연구를 개시하였고 이후 인력이 부족해지자 진전좌우길.지내굉(1878-1952) 등을 추가로 영입

- 1908 년 한 서점에서 한국사 관련 문헌사료 5000 여 권을 만철이 지원한 5000~6000 원으로 사들임, <고려사> 20 원

- 1913 년 <만주역사지리> 편찬

  고대사

  1. 한대의 조선(백조고길.전내긍) 2. 한대의 만조(도엽암길) 3. 삼국시대의 만주(전내긍) 4.진대의 만주(전내긍) 5.남북조시

      대의 만주(전내긍) 6. 수.당 고구려 원정기의 만주(송정등) 7.발해국의 강역(송정등)

  근대사

   1. 요대의 만주 강역 2. 허원종의 행정록으로 본 요.금대의 만주 교통노선 3. 금대의 만주강역(송정등) 4. 동진국의 강역

   5. 원대의 만주 강역 6. 원.명대의 만주 교통노선(전내긍) 7.명대 요동의 변방장성 8. 건주여진의 원주지 및 이주지

   9. 청대 초기의 강역(도엽암길)

- 이후 진전좌우길.지내굉은 <조선역사 지리>를 편찬

- 1914 년 만철의 재정적 지원이 대폭 축소되자 연구 공간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로 옮기고 매년 만철로부터 기금을 지원

   받음, 전내긍.지내굉은 문과 교수로, 송정등은 국학원대학 교수로, 도엽암길은 조선총독부 부설 조선사료편찬과 주임

              

2. 송정등(1877~1937) 1909 년 진장성 동단을 요양 서북부로 비정

3. 도엽암길 1910 년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 논문 발표, 진장성 동단을 한반도 황해도 수안이라 주장

4. 조거용장(1870~1953)

- 동경제국대학 인류학교실 청강생

- 1895 년 조수 신분으로 요동반도 현지조사에 참여를 시작으로 대만.중국서남부.시베리아.동아시아 각지를 조사하고 보고

  서와 전문서 발표,

- `한 낙랑시대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하여 <남만주조사보고서>를 간행

- 일선동조론 주창

- 1911 년부터 조선의 석기.고분.체질인류.민속 등 다방면 조사에 참여, 

  평양 등 한반도 북부가 낙랑군이라 주장

5. 관야정-세키노 다다시

- 동경제대 건축학과 교수

- 1910 년 평양지역 고분 발굴, 효문묘 동종 유물 수습

- 1911 년 황해도 사리원역 부근에서 `어양 장` 명문의 벽돌 파편 발견, 부근 고분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전` 발견하여 황해

  도 지역을 한대의 대방군으로 단정

- 1913 년 9 월 23 일 평양 대동강변 고분군에서 토성 발견하고 기와 파편을 수습하고 이 일대를 한대 낙랑군 치소로 단정

- 1918 년 북경 유리창에서 한대 발굴품을 300 여 엔에 구입하여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냄, 쌀 5 키로가 1 엔 

- 1921 년 조선총독부 박물관, 중추원에서 강연(송병준.이완용.이경영 등이 내방)

- 1921 년 총독부 초대 만찬에 백조고길.지내굉과 함께 참석 

6. 금서룡-이마니시 류

- 조선총독부 촉탁

- 1913 년 9 월 30 일 평안도 용강에서 점제현신사비 발견하고 이 일대를 낙랑군 점제현으로 단정

7 등등. 산전재치랑- 도굴꾼, 1921 년 가을 낙랑태수장 봉니가 출토된 지역 정밀 조사

            관구반 - 평양법원 검사장, 1923 년 평양 토성리 부근에서 조선우위 봉니 입수

 

그러면 한국인 이병도.신석호 등의 위치는 어떨까? 

명치왕의 재하수인에 불과한 조선총독부와 어용학자 금서룡 등등의 한국인

`머슴`일 뿐이다.

 

명치왕.서향융성이 기획.습작한 지도가 조작이고 그 조작에 근거한 역사 해설을 학문이라 할 수는 없다.    

 

이조선과 청국 사이의 국경 지역 지리는 1875 년 간행된 일본 공식관찬 지도를 기점으로 동,동남,동북 방향으로 최소 300 리에서 최대 만여 리까지 뻥튀기.조작되었다.

습작에 불과한 엉터리 조작에 불과한 일본공식 관찬지도 <아세아동부여지도>의 지도 표시는 지금의 <중국전도> 하북.요녕.길림.흑룡강 4 성 지명 표시와 똑같다.

 

조작의 결과는 엄청나다. 한국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식민사관.동북공정의 지리 논리를 지탱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즉 왕검조선의 아사달 임검성을 지금의 하얼빈으로, 준왕조선의 왕검성, 낙랑군조선현, 고구려 평양성. 고려 서경, 이조선 평양부 등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는 원래의 위치에서 대략 동쪽으로 또 동남쪽으로 대략 3000 여리 씩 이동된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내의 지리는 물론이고 현재의 중국 하북.요녕.길림.흑룡강 4 성의 지리도 고대부터 유지돼어온 정상적인 지리라고 단정하는 순간 식민사관.동북공정 굴레로 떨어지게 된다.

 

한편 한국사를 조선총독부에서 왜곡하기 시작하였다고 이해한다면 한국사의 실체를 영원한 미궁으로 밀어넣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조선총독부의 왜곡이란 것도 극히 편향된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고 고대 지명 위치를 추정하는 방법도 지금의 중국.한국 지도 도면상에서 단순.지목하는 정도이고 이는 역사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볼 수는 없겠다. 특히 중국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상충하는 해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사 왜곡 시점도 1910 년이 아니라 1873 년부터다. 그 주체도 당연히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일본명치왕과 서향융성이고 그들의 하수인이 육군참모부였다. 조선총독부나 어용학자 백조고길.금서룡.진전좌우길 등은 명치왕의 하수인인 육군참모부의 재하청 하수인일 뿐이고 이병도.신석호나 지금의 노태돈.송호정 등은 총독부의 하수인에 불과한 진전 등의 재하청 하수인에 불과한 한국인 머슴들일 뿐이다.

어쨋든 일본명치왕은 1875 년 일본 공식 관찬지도라는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를 간행하였는데 이 지도 표시에는 식민사관과 이후 중국의 동북공정의 기본 핵심 논리가 담겨있다.

<아세아동부여지도>

일본 공식 관찬지도, 1875 년 육군참모부 간행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연구/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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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875 년 당시 이조선과 청국 국경선은 책문과 압록강 사이 120 리 공지가 있었을 뿐으로 위와 같은 축척 지도상으로는 한 선으로 표시되어야 한다. 이처럼 국경 지역 지리를 뻥튀기식으로 조작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모순과 허점이 있기 마련인데 일본은 청국과 이조선의 국경선을 멀찍이 떨어트린 수법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니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쨋든 ​청국의 동북쪽 국경선만큼은 실제와 거의 비슷하게 표시되었고 이조선의 서북 국경선인 압록강은 동쪽으로 3000 여 리 쯤 이동되어 지금의 압록강으로 인식되도록 선전하려는 의도가 담긴 엉터리 습작지도일 뿐이다.

 

하지만 1875 년 당시 요하와 압록강은 아래 추기와 같이 지금의 란하 정북쪽과 하류의 동쪽 지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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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조선과 청국과의 국경선은 아래 추정도의 적색 실선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고려 압록강은 요동의 요양 동쪽을 흐르는 강이였으니 당연히 이조선 압록강보다 북쪽에 위치하였고 요.금.원.명.청의 정사 지리지 기록의 혼하였으나

이조선 선학들은 이를 구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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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산해관.성경.흥경.영고탑` 제목으로 게시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편찬한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추정됨, 한국보물 1537 호 <서북피아양계만

리일람지도>의 원본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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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세아동부여지도>라는 엉터리 지도가 선전.홍보되기 시작하면서 이조선 강역은 지금의 압록강 남쪽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조선에 그치지 않고 이전 고려 강역, 남북국.삼국 영역도 축소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삼국 이전 준왕조선.진辰.한韓과 그 이전 단군부여.왕검조선과 환웅천왕의 고조선 강역도 동쪽으로 혹은 동남쪽으로 3000 여 리 씩 옮긴 곳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이 식민사관.동북공정의 핵심 실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러한 일본명치왕의 지도조작을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한 신채호는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고 하였고 <환단고기>를 엮어 편찬한 계연수는 다소 과장되었지만 `패수는 란하`라며 다른 곳을 생각할 여지를 남기지 않고 콕 짚어 지금의 란하 중류에 패수가 흐른다고 정확하게 지목하였다.

 

연.진 장성의 동쪽 끝은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중류와 하류까지였다.

 

 

1- 1873 년 경 일본 명치왕, 서향융성

2- 1910 년 일본 도엽암길, 한반도 황해도 수안까지

3- 1980 년 중국 항춘송.이경발.장극거, 오한기-나만기-북표까지

4- 1990 년대 중국 염충, 부신까지

5- 1990 년대 중국 손걸, 창무까지

6- 1990 년대 중국 유자민, 압록강까지

7- 1990 년대 중국 장박천, 혼춘까지

 

그런데 위와 같이 일본명치왕이 진장성 동단을 대략 300 리 쯤 동쪽으로 연장.조작하고,

이후 쓰레기 일본놈 도엽은 한반도 황해도 수안까지라고 주장했으며,

이후 중국 여러 놈들도 쬐끔의 양심은 있었는지 점차 주절거리더니 압록강.혼춘까지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 년 중국 쓰레기 담기양은 1873 년 쯤 일본이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삭제.연결.이동 조작한 정황을 그대로 이어받은 1900 년 양수경의 조작도 <역대연혁지도> 황하부분도 등을 발전시켜 <중국역사지도집>에서 진장성 동단을 한반도 황해도 수안까지라는 엉터리 그림을 그려 놓았다. 

 

 

- 양수경의 <역대연혁지도> 황하 부분도

 

 

-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 전국7웅 영역도

 

 

- 담기양과 고힐강

 

담기양(왼쪽) 고힐강(중앙)

고힐강은 북경대 역사학 교수로 1980 년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박사 학위 논문을 심사했다. 결국 리지린의 북경대 박사 학위 취득은 북조선 역사학계가 동북공정 논리를 수긍하는 계기가 됐다.

이조선을 식민지배하려고 또 식민지배를 손쉽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명치왕은 조선 4000 여 년의 역사와 지리를 축소.조작했다.

 

대표적인 것은 서기전 108 년 전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동남쪽으로 대략 3000 여 리 옮길 수 있는 지리를 조작했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 년 일본육군참모국 간행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두연구소 홈페이지 연구/고지도

 

 

그러면 일본 명치왕의 하수인인 서향융성과 육군 참모부는 어떻게 지리를 조작했을까?

 

아래 고지도의 추기 표시와 같이 지금의 란하 위치를 흘렀던 전한 시기의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 곧 송.거란 이후 황하.요하로 개칭된 물길을 지금의 요하라고 표시한 위와 같은 습작.조작지도를 간행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한.일 역사학계에 주지시켰다.

 

 

 

따라서 전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도 위와 같이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이였다.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관성.쌍산자.건창 지역이 <후한서/군국지> 낙랑군 주석과 같이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진 곳이고, <후한서/동이열전.왜>와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왜> 기록과 같이 낙랑군 요徼 곧 변두리 또는 대방군에서 배로 해안을 따라 한韓 지역을 남쪽으로 또 동쪽으로 지나면 왜의 북쪽 해안인 지금의 부산 쯤인 변진구야한국까지 7000 여 리일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왜>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裏 始度一海千餘裏 至對馬國

왜인은 대방군 동남쪽 큰 바다 중에 있다. 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읍을 세웠고 예전 한 시기 조견하는 나라는 100 여 국에 이르렀으나 지금 사신을 통하는 나라는 30 국이다. 대방군에서 왜까지는 뱃길로 해안을 돌아 한국을 지나야 하고 남쪽으로 갔다고 동쪽으로 가서 왜국의 북쪽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까지는 7000 여 리다. 그곳에서 바다길 1000 여 리를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이러한 명치왕의 조작질을 1910 년 대한제국 강제 병합 후 압록강을 건너 청국으로 망명한 신채호가 정확하게 인식하고 남긴 교시가 바로 `고대의 요하는 란하``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란 문장이였고, 조금 과장되기는 했지만 지금의 해성을 신채호가 언급한 해성이라고 혼동하는 자들에게는 신채호 교시보다 훨씬 명료한 것이 계연수의 `패수는 금今 란하`라는 교시 문장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환웅천왕의 고조선과 서기전 2333 년 개국된 단군 왕검의 조선 곧 왕검조선 및 왕검조선이 47 대 1000 여년으로 멸망하고 곧바로 단군의 제위를 이은 부여의 1000 여 년과 그 단군부여의 남쪽 제후국이였을 서기전 3 세기까지의 부.준왕 조선까지도 신화.전설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서기전 195 년 경 준왕조선의 왕검성을 차지한 연나라 망명인 만과 손자 우거까지 약 80 여 년의 준왕조선 땅 점거, 속칭 위만조선을 환웅천왕의 고조선과 왕검조선과 동격으로 인식되도록 `고조선` 명칭에 포함시켰다.

 

위와 같이 주장한 백조고길.진전좌우길.금서룡 등등은 명치왕의 지시를 따른 어용쓰레기들일 뿐이고 이병도로부터 시작된 한국사학계는 어용쓰레기들의 주저리를 보물로 여기는 등쉰들이고 명백한 반민족행위이며 명확한 역적들인 것이다.

 

한국 강단사학과 재야는 등쉰짓 그만하고 각성하거라.

 

아래 중국전도에 추기한 표시는 1910 년 지리다.

 

 

위 추기의 근거는 당연히 <청사고/지리지>이고 거슬러 올라 <한서/지리지>까지 통관한다.

 

그런데 1873 년 쯤부터 일본명치왕은 위와 같은 지리를 뻥튀기식 조작 수법을 동원하여 아래의 만주국지도와 같은 습작지도를 제작.선전하여 조선 역사 강역을 반도로 축소시켰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일본 공식 관찬 지도, 1875 년 육군참모부 간행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연구/고지도

 

1945 년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은 마땅히 한국에게 돌려주어야 할 이조선의 서북 4 도 땅을 시치미 뚝 떼고 차지하였다.

그것이 지금의 요녕성 영역이다.

게다가,

앞으로 먼 미래까지 영원히 장물땅을 차지하려고 만리장성이 압록강 하류까지였고  또 낙랑군도 한반도 평양 지역이라고 막무가내로 우긴다.

 

그러나 일본.중국에 좋은 시절은 서서히 저물고 있다. 

 

기시다 총리,

명치왕의 지리 조작을 인정.사과하라.

 

시진핑 주석,

대국 체면에 금 가는 창피 당하지 말고 조용히 요녕성 땅 내 놓아라.

 

 

 

 

서한 건국부터 청국 멸망시까지 약 2100 년 동안 요동군을 경유한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 곧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황하와 요하는 아래 추정도와 같이 지금의 란하 본류 중류와 정북 지류였다.

 

그래서 요서.요동.현토.낙랑 4 군 위치도 위 표시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1873 년 쯤 일본명치왕은 위와 같았던 물길 지리를 아래와 같이 조작했다.

 

 

 

결국 일본명치왕의 지리 조작 결과 중국놈까지도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래는 일본명치왕이 청 시기의 황하를 요하의 상류 3 개 지류 중 하나인 서요하로 연결.변조한 증거다.

 

-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황하부분도

<황조일통여지전도>는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간행.

또 1900 년 쯤 청국인 양수경도 위와 같은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한국놈이 한반도 평양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무지무식한 놈이고 마땅히 쳐죽일 역적 놈이며,

 

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 동단 지점이 낙랑군 설치 지점이라고 한다면?

역사 자료를 제대로 읽지 못한 약간 모자란 등신이다.

 

이런 자들이 한국역사학계에 득시글하여 지금까지도 저급하고 무지막지한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이 척결되지 못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평안.함경.황해.강원 4 도 영역을 고대 중국의 변방족인 동호.오환.선비.거란.여진 등의 땅으로 만든 것이 식민사관이고, 그 조작을 묵인하고 영원히 동호.여진 등의 땅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동북공정이다.

 

지리가 조작되어 땅은 빼앗겼지만 역사가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의 현장이 바뀐 것 뿐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현장은 지리지 기록과 일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낙랑군 등 고대 지리 문제만 한국 역사의 전부인 양 읊조리는 것은 너무 순진한 짓거리임을 인식해야 한다. 식민사관 비판한다면서 왜놈 금서룡.진전좌우길 등이나 한국의 이병도 등만 비난하는 일이 전부일 수도 없고 어떠한 성과도 거둘 수가 없는 이유다.   

 

청국이 멸망한 1911 년 당시 란하.황하.요하가 지금의 어느 물길이였는지를 밝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일본 명치왕은 1870 년대 초 청국의 란하.황하.요하.송화강.흑룡강 등 동북지역의 주요 물길과 주변의 모든 지명 곧 산해관.적봉.조양.요양.길림.합이빈 등을 더 동북쪽의 적절한 위치로 옮긴 습작지도 곧 뻥튀기식 조작 작업 결과물을 세계적으로 또 대대적으로 선전.홍보하였다. 이후 일본은 1932 년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운 후 <만주국지도>를 통하여 조작 지리를 공식화하였으며 현 <중국전도> 표시도 <만주국지도>의 복사판일 뿐이다.

 

결국 아래와 같은 지금의 지리는 고대부터 변함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다.    

 

 

 

그러면 명치왕 그 놈이 왜 그랬을까? 

조선역사를 왜소하게 만들어 조선인의 독립의지 싹을 애초부터 자르려는 목적이였을 것이다.  

 

한편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만죽국 영역을 모두 차지한 모택동은 청국 당시의 지리를 몰랐을까?

아니다.

모택동이 중국 2000 여 년 동안의 요하가 지금의 란하 중.하류였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지금의 요녕성 땅덩어리를 횡재수한 이 놈도 주은래와 같이 북조선 김성주 앞에서 지금의 요동은 조선 영역이였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 시기의 대요수가 지금의 요하라며 명치왕과 입을 맞춘 꼴이다.  

 

이후의 한국사학계는 물론이고 북조선의 리지린이나 남한의 윤내현 등도 일본 명치왕이 조작하고 모택동이 암묵하고 차지한 조작 지리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명치왕이 인력과 재력을 쏟아부어 청국의 동북쪽 지역 지리를 뻥튀기식으로 조작하기 시작하여 극에 달할 당시인 1910 년 전후에도 신채호.계연수는 `고대의 요하는 란하``패수는 금란하`라며 대략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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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1751 년(이조선 영조 26 년) 쯤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본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자료실

 

 

 

- 1875 년 쯤 일본명치왕이 위 고지도를 조작.간행하였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2007 년 12 월 31 일  대한민국 보물 제 1537 호로 지정

 

 

- <아세아동부여지도> 일본공식관찬지도, 1875 년 일본 육군 참모부 간행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연구/고지도

 

 

아래는 서기전 75 년 경 서한이 설치한 요서.요동.현토.낙랑 4 군 위치와 서기 10 세기 초부터 서기 1911 년까지의 산과 물길 명칭이다. 

 

위 지리에 관한 근거는 중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모든 고지도이고 아래는 그 고지도 중의 하나다.

 

- 1137 년 송인 황상이 각석한 <지리도>의 황하.요하 부분도

 

 

그런데,

1932 년 만주국지도부터는 1911 년까지의 란하.황하.요하.압록강 곧 서기전 75 년 당시 난수.대요수.염난수.열수 등 주요 4 강의 위치를 아래와 같이 변조.이동시켜  표시하였고 결국 난수 최하류에 설치된 요서군, 대요수 하류와 염난수 중류에 설치된 요동군, 염난수 중상류와 요수 상류 유역에 설치된 현토군과 패수 동쪽 열수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 등 4 군 위치는 동쪽으로 뻥튀기되어 표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변조.이동을 기획하고 습작지도를 간행.선전.홍보하기 시작한 시기는 1870 년대 초부터였고 주모자는 일본명치왕, 하수인은 서향융성과 육군 참모부였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 년 일본 공식 관찬 지도, 육군 참모부 간행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연구/고지도

 

조선 역사를 왜곡한 소위 식민사관의 기초 논리를 발상하고 실현한 자들은 1910 년 이후의 조선총독부와 금서룡.진전좌우길 등 일본의 소위 역사학자들이 아니다.

 

훨씬 이전인 1871 년 일본 명치왕과 서향융성.환산작락.이등박문.정상의 등이며 실무는 군 참모국.참모본부가 맡아 이조선과 청국 사이의 국경 지역 지리를 동쪽 방향으로 뻥튀기한 습작지도를 제작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즉 청국 동북쪽 국경 지역 지리는 적절하게 넓히면서 재배치하여 이조선 서북 영역을 대체시켰고 이조선의 서북 영역 지명들은 동남쪽인 지금의 압록강 남쪽으로 쑤셔넣어 역시 적절하게 재배치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습작지도 간행을 반증하는 대표적인 조작지도가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자료실에 게시되어 있는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일본 공식 관찬지도라고 설명되어 있으며 1875 년 육군 참모국이 간행했다고 한다.

일본 참모국에 봉사하였던 이들은 재일교포 고고학자 이진희에 의하면 육군경 및 참모국장 산현유붕, 관서국장 계태랑, 참모본부장 대산암, 편찬과장 대원리현, 교수 횡정충직 등이고 편찬과 과부課附로 1887 년 <지나지지/총체부>와 1889 년 <지나지지/만주부>를 편집한 중심인물 하촌수개 등이며 이들이 영락태왕릉비문의 변조와 해독, 영락태왕비 반출과 이전 및 국경 지역 지리 변조 등을 주관하였일 것이다. 

 

즉 고려와 거란.요국 사이의 국경이나 이조선과 명.청국 사이의 국경은 아래와 같았는데, 일본 참모국 주도로 란하.황하.요하를 변조하여 1 개 물길인 란하로 칭하고 황하.요하는 동쪽으로 3000 여 리 씩 옮겨 흑룡강.바다로 기록된 물길을 대체시켰다.

 

 

결국 지금의 란하 최하류인 만灣이며 기록상으로는 바다인 대요수.염난수 곧 황하.요하의 최하류로 흘러내렸던 이조선의 압록강 역시 동쪽으로 3000 여 리 옮겨져 지금의 압록강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니 부.준왕 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동천왕.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성 및 고려의 서경과 이조선의 평양부 및 서기전 108 년 중국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했다는 낙랑군 추정지 등 모두가 대한반도 평양으로 낙착될 수 밖에 없는 지리 틀이 된 것이다. 

 

따라서 1900 년대 초부터 조선역사를 주절댄 백조고길.조거용장.나가통세.관야정.금서룡.흑판승미.지내굉.진전좌우길 등은 명치왕과 그 막료들이 청국과 이조선 국경 지역 지리를 조작한 지리를 30 여 년 후에 재포장한 하수인에 불과한 자들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가 끝난 1945 년 이후에도 위와 같은 지리조작은 위력을 발휘하여 1948 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는 당연히 청국의 지리와 달랐다. 모택동 이후 모든 중국인들이 청국 지리를 몰랐을 리가 없다 하지만 저들은 대한제국의 서북강역을 고대부터 중국 영역이라며 일본의 지리 조작을 용인.암묵하고 비학자적 자세로 막무가내로 주장하여 일본의 조작으로 거저 얻은 땅 곧 장물땅을 지키려 한다. 이것이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다.   

 

 

 

나는 이병도 이하 지금의 한국 역사학계도 저 내용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조선 선학들은 물론이고 <삼국사기><삼국유사> 기록의 평양성.서경은 왕검성이였고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며 그 위치는 당연히 대한반도의 평양이라고까지 주절댄다. 조작자.암묵자 보다도 훨씬 더 악취 풍기는 쓰레기급 대가리들이다.  

 

 

 

참조: 1. 이진희의 <광개토왕릉비문 탐구> 이기동 역주

          2. 중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송.명.청 시기 석각.간행된 고지도

          3. 대표격 고지도, 1137 송인 황상이 각석한 <지리도>

 

 

아래 추정도는 1911 년 청국이 멸망한 당시의 직예성 승덕부와 영평부 위치다.

 

 

아래는 현 중국전도를 모사한 약도다.

 

 

즉 일본명치왕군부놈들은 1870 년대 초부터 란하.황하.요하를 변조.이동시키고 란하와 황하 사이 지역에 설치되었던 청국의 승덕.영평부 속현들까지도 동쪽으로 이동.확산.재배치하여 습작지도를 간행하고 홍보질하였다.

 

위와 같은 조작질은 1934 년 만주국지도를 간행하면서 확정되어 1948 년 건국된 현 중국에 그대로 습용되었다.

 

그러면,

일본놈이 청국 지명을 이동.재배치한 지역의 원래 지명은 무엇이였을까?

 

당연히 아래 추정도와 같이 청국 봉천성의 심양.창도.환인 등과 이조선의 평양과 의주.길주 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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