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미 국무부, 제주4·3에 첫 입장…“비극 잊으면 안 돼”

한겨레 질의에 사건 76년 만에 입장 밝혀

기자허호준
  • 수정 2024-04-02 20:09
  • 등록 2024-04-02 16:24
1948년 5월15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미군 고문관 대위가 경비대 장교들과 작전 계획을 논의하는 모습이다. 미국국립기록관리청 보관 사진

미 국무부가 제주4·3에 대해 “비극적인 사건”으로 “잊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제주4·3 당시 한반도 남쪽을 군정 통치(1945년 9월~1948년 8월)했던 미국은 사건의 발발과 확산에 직간접적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도 지금껏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왔다.

미 국무부는 최근 ‘제주4·3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이냐’는 한겨레의 이메일 질의에 “1948년의 제주사건은 참혹한 비극(terrible tragedy)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답신을 지난달 27일 보내왔다. 미 국무부는 답신에서 “미국은 민주적 가치와 인권 증진에 헌신하는 가까운 동맹국으로서, 앞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한국의 결의를 공유한다”고 덧붙였다.

제주4·3에 대한 입장을 묻는 한겨레의 이메일에 미 국무부가 지난달 27일 보내온 답신

미국 정부가 제주4·3과 관련해 문서로 입장을 밝힌 것은 사건 발생 76년 만에 처음이다. 그동안 현대사 연구자들과 제주 지역사회는 4·3 문제 해결과 관련해 남아 있는 과제 중 하나는 ‘미국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라고 지적해왔다.

 

실제 제주4·3 시기 미군정이나 군사고문단, 주한미국대사관이 작성한 각종 문서는 미국이 4·3 진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정부가 2003년 10월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고 나와 있다.

국내에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4·3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1988년 무렵부터 미국의 인정과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해왔다. 70주년이었던 2018년 10월에는 제주4·3연구소와 제주4·3희생자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이 4·3에 대해 미국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10만9996명의 서명을 받아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달했다. 하지만 미대사관 쪽은 최근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군정 당국은 4·3 무장봉기 직후인 1948년 4월 중·하순 미군정장관 딘 소장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진압을 명령하고, 같은 해 5월에는 미 보병 6사단 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브라운 대령은 당시 “나는 사건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한국의 군·경을 지휘했고, 그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5천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무차별 검거됐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사고문단을 통해 토벌작전을 지원하고,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지속해서 제주도 사태와 관련한 진전 상황을 보고받았다.

1948년 5월 제주도 최고 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기자회견에서 “사건 원인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언급한 &lt;조선중앙일보&gt;(1948년 6월8일)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작년 여름 육군사관학교의 갑작스러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에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명박 정부 당시의 건국절 논란, 박근혜 정부 당시의 국정교과서 논란에 이은 세 번째 '역사전쟁'의 신호탄이었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역사학도로서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 없었다. 전국 역사학도 서명운동·대통령실 앞 1인 시위·전통활쏘기대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에 저항했다(관련기사: 육군사관학교와 윤 대통령 때문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https://omn.kr/26vsz).

독립운동사 전공자로서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왜곡과 모욕은 내 공부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니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독립운동사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선양으로 맞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번에 그 첫 번째 결실을 이루게 됐다. 홍범도 장군과 함께 북간도 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최진동 장군(1883~1941)에 관한 학술논문이 나온 것이다.

최진동 장군에 주목한 이유

먼저 내가 최진동 장군에 주목한 까닭을 소개하고자 한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의 해' 선포 후 우리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로 평가받는 '봉오동 전투'는 대한북로독군부 및 신민단 등 북간도 지역에 산재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벌인 전투였다. 그리고 최진동은 대한북로독군부의 수장으로서 봉오동 전투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이끈 전투'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는 듯하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도 홍범도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등장하면서 전투를 홍범도 홀로 지휘한 것처럼 묘사된 바 있다.

사실 봉오동 전투 당시의 활약뿐만 아니라 최진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홍범도에 비해 대중들에게는 낯선 것이 사실이다. 학계에서도 봉오동 전투 및 홍범도에 대한 연구 성과가 꾸준히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최진동에 관한 연구는 저조한 편이다.

다행히도 독립운동사·군사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최진동에 관한 연구가 너무 저조했다는 문제의식이 공유되면서, 최진동에 관한 학술연구들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나의 논문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이하 내용들은 본 논문의 일부를 요약·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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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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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북간도 항일무장투쟁을 이끌다

봉오동 전투 이전에도 두만강 일대 국경 부근에서는 최진동의 사병 조직이었던 '대한군무도독부'가 주축이 되어 산발적인 교전이 이뤄졌다.

1920년 3월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이 전개되는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군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로 침입하여 일본 경찰·군대와 교전을 치렀다(온성 작전).

비상이 걸린 일제는 온성 작전 당시 침투한 독립군의 수령이 최진동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인 봉오동 일대에 대한 토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최진동 부대의 온성 작전이 봉오동 전투를 이끌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일제의 움직임에 독립군들도 비상이 걸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봉오동 일대에는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모여있었는데, 일제와의 전면전에 대비하여 단일한 지휘체계에 대한 확립을 꾀하게 된다. 그 결과 1920년 5월 19일 군무도독부·국민회 군무위원회의 연합으로 최진동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한북로독군부'가 성립됐다.

이어 합류한 홍범도 부대는 북로독군부 산하 북로정일제1군사령부(사령부장 홍범도)라는 조직으로 개편된다. 홍범도 부대는 명목상 북로독군부 아래 편제됐으나 일종의 '외번(外藩)'격으로서 지휘명령권이 북로독군부장이나 국민회장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독립군 연합이 성사된 직후인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 연합은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온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전개했다. 최진동 역시 북로독군부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직할 부대를 이끌고 한 고지를 맡아 전투를 수행했다. 그렇게 독립군 연합은 일본군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제1회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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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3~6월 두만강 국경 근처에서 전개된 최진동 부대의 전투도. 일제가 당시 보고서에 첨부한 지도 위에 해당 전투 지역 위치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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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당시 지휘관은 누구였나

그런데 최근 학계 일각에서 '봉오동 전투 당시 실질적 지휘관이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기존 연구자들은 대체로 홍범도가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해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는 '홍범도 단독지휘설'(박민영), 지휘권은 홍범도와 최진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보는 '홍범도·최진동 공동지휘설'(반병률) 등으로 설명해 왔다.

그런데 '사령관' 최진동이 전투를 지휘했고 홍범도는 휘하의 '연대장'에 불과했다는 1920년 12월 25일 자 <독립신문> 기사를 근거로 전투를 총지휘한 주체는 북로독군부장 최진동이었다는 반론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연대장이라는 직책은 임시정부가 구상했던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편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제 이러한 편제로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었다. 또한 홍범도는 편제상 북로독군부 산하에 편입되어 있긴 했으나 외번격으로 그 어디에도 명령권이 속하지 않는 독자적 위상을 구축하고 있는 상태였다.

봉오동 전투에 참전했던 신민단 사령관 박승길의 회고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 직전 홍범도와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봉오동에 모인 독립군 단체들에 작전태세와 대기명령을 발했다 한다. 그런데 정작 신민단 군사들은 전투 도중 홍범도가 퇴각 명령을 내리자 "우리는 다른 데서 온 군인들이다"라며 거부했다.

여러 사료와 증언을 종합해 봤을 때, 봉오동 전투 당시 지휘권은 최진동과 홍범도만 행사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부대의 지휘관들 각자가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했음을 추측게 한다.

이러한 결론이 최진동과 홍범도 두 사람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걸로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누가 총지휘관이었는가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지휘체계가 불완전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기습해오자 하나가 되어 싸웠고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봉오동 전투 승리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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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미상의 최진동 장군 사진 (김춘선·안화춘·허영길, <최진동장군>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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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최진동, 그들을 잊지 말아야

본 연구에서는 1920년 당시 북간도 지역 독립군이 얼마나 열악한 현실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룩했는지 다시 한번 조명했다.

다만 '1920년 북간도 지역'이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매우 한정된 범위만을 살펴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봉오동 전투 승리 후 최진동은 일본군의 간도 침공을 피해 러시아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1920년 이후 최진동의 삶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삼을 생각이다. 

여러모로 부실한 논문이기에 세상에 소개하기가 많이 민망하다. 그럼에도 굳이 부족한 논문을 소개하는 까닭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최진동이라는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니 본 논문이 일반 시민들에게 홍범도 장군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홍범도 흉상 철거 반대 운동의 동력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드러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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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동 장군 묘(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251번 묘). 2024년 2월 16일 장군의 묘역에 논문을 헌정하며 술 한 잔 부어올렸다. 이날 올린 술은 최진동의 고향인 함경북도 지역의 주민들이 빚어마시던 '농태기'라는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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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정보]

- 제목: 1920년 북간도에서의 최진동의 항일무장투쟁
- 저자: 김경준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 등재지: 동북아역사논총 82호
- 발행기관: 동북아역사재단
- 발행년월: 2023.12.
- 논문 열람: https://url.kr/diyw46 (무료 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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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신흥무관학교로 검색한 나무위키 설명문 중 일부다.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대고산(大孤山)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 했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독립운동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것과 직결되는 사업이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따라서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1912 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봉천부(奉天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면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통화현은 과연 어디였을까?

지금의 압록강 중류 북쪽에 표시된 통화 부근일까?

 

아니다.

지금의 통화는 1932 년 건국된 일본 꼭두각시국 만주국의 통화현이다.

 

1911 년 멸망한 청국의 봉천성 흥경부 통화현은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류 지금의 청룡하 상류 지점이다. 

 

 

근거는 당시의 요하가 위 표시와 같이 지금의 란하 정북쪽 지류이고 이조선의 압록강이 지금의 청룡하이기 때문이다.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흥경부 통화현

府東南二百七十裡 明 建州衛之額爾敏路 光緖三年置縣 隸興京同知 宣統元年改隸府 縣境居旺淸邊門外 北龍岡山脈 自興京.海龍間納噜窩集入 迤邐而東 歷臨江直達長白山 亘二百餘裏 山南之水皆入鴨綠江 山北之水皆入松花江 爲鴨綠江松花江之分水嶺 以其爲永陵幹脈 故曰龍岡 南有渾江 自臨江入 西流屈東流 復迤西南入懷仁 左受大羅圈溝河小羅圈溝河 右受哈泥河加爾圖庫河 舊設馬撥七 西哈馬河快當帽子英額布歡喜嶺半截拉子入興京 又快當帽子西南行 曰高麗墓頭道溝等入懷人

주) 高麗墓: 광개토왕릉 즉 영락태왕릉 

 

"대통령 후보들에게 이동휘 선생과 같은 국가관이 필요하다."

설 연휴 첫 날인 1월 31일 오후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서 만난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이승택 부회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동휘 선생은 정의감이 넘치고 청렴결백하며 국가관이 뚜렷한 분이었다"며 "지금 대통령이 되려는 이들에게 그런 국가관이 있긴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지도자들이 먼저 책을 읽고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길 바란다"라고 역설했다.

이날은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선생 서거 87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이 부회장을 비롯한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회원들은 무후선열제단을 찾아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유해를 찾지 못해 묘소가 없는 이동휘 선생은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모셔져 있다.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는 통인(通引)으로 있을 당시 기생을 추행하는 군수를 보고 화로를 끼얹었을 정도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에 투신한 선생은 고종의 신임을 얻었을 정도로 강직하고 충성심이 남달랐다. 1903년 5월 강화도 진위대 대장으로 부임한 선생은 진위대장직을 사임한 후에도 강화도에 머물면서 기독교 선교활동과 교육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경술국치 후 해외로 망명한 선생은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교육운동·선교운동에 종사하다 다시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1917년 선생은 사상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 일대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거대한 물결을 목도한 선생은 러시아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유동열·김립·오성묵·오와실리·이인섭 등과 함께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1919년 9월 11일 서울의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상해에서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선생은 통합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외교독립론을 고수하며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은 끝에 1921년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임시정부 탈퇴 후에도 선생은 사회주의 혁명노선에 입각하여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했다. 고려공산당 지도자로 러시아에 가서 레닌을 면담하는 등 한국 독립을 후원받기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의 조선공산당 활동을 간접적으로 후원한 것이다.

이후 혁명가와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한 모플(국제혁명가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말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던 선생은 눈보라로 인해 걸린 독감으로 1935년 1월 31일 끝내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62세였다.

 

<성재 이동휘 일대기> 저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동휘는 러시아식 공산주의를 답습하고 이를 한국혁명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이른바 정통 공산주의자 범주로부터는 먼 거리에 있었다"며 "그는 조국의 광복과 근로대중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면 어디든지 어떤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 달려간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

통합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한평생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선생. 그러나 조국은 그에게 가혹했다. 사회주의 노선을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홀대받았던 것이다. 독립유공자 서훈도 1995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이뤄졌다(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그러나 서훈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선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2019년 10월 김진태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당시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김좌진 장군은 빠지고 이동휘가 들어갔다"며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우리나라 공산주의의 시조같은 사람"이라고 폄훼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김진태 의원의 발언에 격분하여 항의 전화를 걸기도 했다는 이승택 부회장은 "이동휘 선생의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며 "선생만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가 없는데 이념 문제로 대우가 소홀했다"고 씁쓸해했다.

'미쓰야협정'으로 독립군활동 제약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40회] 한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고, 무기 휴대와 집회결사를 금지시켰다

21.02.15 17:59l최종 업데이트 21.02.15 17:59l

김삼웅(sol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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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된 최운산 장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제공 관련사진보기

 
길림감옥에서 만기로 출소한 최운산은 현장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만주의 사회 분위기는 3년 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정세의 변화 탓이기는 하지만 무장전쟁론자인 그로서는 얼른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만주 곳곳에는 여전히 무장전쟁만이 일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용맹한 독립군도 산재해 있었다. 

중국에서는 1920년대 중후반에서 30년대 초기에 걸쳐 두 갈래의 큰 흐름이 동시적으로 전개되었다. 1928년 5월 제남(濟南)에서 중ㆍ일 양국군이 충돌하는 '제남사건'이 발발하고, 6월에는 일제가 장작림이 탄 열차를 폭파시켜 그를 사망케 하였다.

무엇보다 만주의 정세에 큰 변화를 준 것은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미쓰야 경무국장과 중국 봉천성 경무국장이 맺은 이른바 '미쓰야(三矢) 협정'이었다. 한국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재만 한인의 단속을 강화할 목적으로 체결된 이 협정은 한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고, 무기 휴대와 집회결사를 금지시켰다.

일제는 이에 앞서 조선에서 치안유지법을 제정한 것을 그대로 만주의 한인들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미쓰야협정'은 일제가 재만 동포와 그곳 독립운동 세력을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보여준다. 

                                     미쓰야 협정

1. 중국재류의 조선인은 중국관헌에서 청향장정(淸鄕章程)에 따라 호구(戶口)를 엄중조사하며 패(牌)를 편성해서 서로 보증하며 연대책임을 지게 한다.
2. 중국관헌은 각 현에 통령(通令)해서 재류선인이 무기를 휴대하고 조선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시킨다. 범하는 자는 체포해서 조선관헌에 인도해야 한다.
3. 불령선인 단체를 해산하고 소유하는 총기는 수색ㆍ몰수하여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
4. 조선인 소유의 총기화약(단 농민이 소유한 조수구제용 총기는 제외)은 당해 관서에서 수시 엄중수색해서 몰수한다.
5. 조선관헌이 지명하는 불령단 수령을 체포해서 조선관헌에 인도해야 한다.
6. 중일 양 관헌은 불령선인의 단속실황을 상호 통보해야 한다.
7. 중일 양 경찰은 마음대로 월경할 수 없다. 만약 필요할 때에는 상호통보해서 대신 처리하는 방법을 청구해야 한다.
8. 종전의 현안은 서로 성의를 가지고 기한을 정해서 해결해야 한다. 이상.

                              중화민국 14년 6월 11일
                              대정 14년 6월 11일. (주석 1)
 

 
  만주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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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갈래는 급속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과 세력의 확대였다. 장개석 국민정부의 부패와 일제침략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가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로 나타났다. 이같은 현상은 재만 한인사회로 파급되었다. 

간도는 당시 50만 명의 교포가 살던 지역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간도공산당)이 조직되어 항일 투쟁을 하고 있었다. 간도공산당사건은 1928년부터 30년까지 4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사건은 당시 만주총국이 서울에서 진행중인 조선공산당사건 공판의 공개를 주장하는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계획하다가 일제 간도영사관 경찰서에 탐지되어 29명이 검거된 사건이다. 이후 1928년 9월 2일 국제 청년일 기념 집회를 개최하려다 발각되어 70여 명이 검거되었다.(2차사건).

1929년에는 광주학생 운동이 일어나 해외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만주총국도 3ㆍ1혁명 11주년을 기념하여 일제에 대한 항의운동을 하려했다. 시위의 전 단계로 2월 28일 오도구(五道溝)를 시작으로 북간도에서 일제타도와 독립만세를 외치는 농민 시위가 시작되었다. 5월 1일을 기하여 일제히 시위를 일으키려 했으나 3월 하순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5월 중순까지 130여 명이 검거되어 좌절되었다. (3차사건).

간도공산당 4차사건(5ㆍ30폭동)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해체된 뒤 중국공산당 만주성 위원회가 주도한 사건이다. (주석 2)

이와 같은 정세의 변화에 따라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은 1929년 3월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가 길림에서 2차 통합회의를 열고 자치기관으로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최운산 형제도 참여하였다. 

한민족의 힘을 한데 모아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은 1920년대 후반부터 국내와 국외에서 일어났다. 만주 지역에서는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의 통합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 일부는 혁신 의회를 조직했고. 정의부를 중심으로 신민부의 민정파와 참의부의 일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은 국민부로 통합했다. 국민부는 농민운동 지도, 계몽활동, 정치적 훈련을 비롯해 반일 자치운동에 노력하는 한편 친일 앞잡이에 대한 숙청도 맹렬히 진행했다. 

한편 국민부를 행정부로 삼고, 이 행정부를 지도하는 민족유일당으로 조선혁명당을 조직했다. 곧 독립운동과 군사활동은 조선혁명당과 당 산하의 조선혁명군이 맡고, 국민부는 당의 지도를 받는 자치정부의 형태가 갖추어진 것이다.

조선혁명당은 만주와 국내에 지부를 설치했으며, 1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1930년대 중반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1929년 6월의 혜산진 무력 독립 시위를 지도했으며, 1932년에는 중국의용군과 함께 일만(日滿)연합군과 정규전을 벌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주석 3)


주석
1> 일본외무성, 『일본외교연표와 주요 문서』 하.
2> 하일식,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297쪽, 일빛, 1998.
3> 앞의 책, 199쪽

사이비교주로 합성된 독립투사... 함부로 다룰 분이 아니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영화 '사바하'의 나철 합성사진

19.03.31 11:35l최종 업데이트 19.03.31 11:35l
 
 영화 '사바하' 포스터.
 영화 "사바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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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개봉된 영화 <사바하>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창시자인 홍암 나철(1863~1916)의 사진이 잘못 사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철은 오기호와 함께 을사오적 암살 활동을 벌이고, 민족종교 대종교를 창시하는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비중 있게 거론되는 인물이다.

영화 <사바하>는 종교문제연구소를 운영하는 목사가 신흥종교의 비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사연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사이비 교주의 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철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내보내 물의를 일으켰다. 29일 <사바하> 제작사는 "명백한 실수였다"라면서 "인지하지 못했다, 죄송하다"라는 입장을 내놨다.

나철은 누구?

1863년 전라도 보성에서 출생한 나철은 일반적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바로 '과거시험 급제자'라는 사실이다.

1894년에 과거시험이 공식 폐지됐기 때문에, 훗날의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은 과거시험과 인연이 멀었다. 500년간의 과거급제자 평균 연령이 36.7세였기 때문에, 1894년 이전의 과거 급제자가 1905년 이후 본격화되는 항일투쟁에 청춘을 바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나철은 29세 때 장원 급제하고 승정원(주상 비서실) 등에서 근무했다. 한양·경기·충청·경상도 출신에 비해 관직 진출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호남 출신임을 감안하면, 비교적 안정적인 인생 행로를 걸은 셈이다.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경력이 특별한 편이다.

그러나 나철은 편안한 생활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지자, 1905년 징세서장을 사임하고 본격적 구국운동의 길에 뛰어들었다. 세금 거두는 것보다 나라 구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던 것.

'을사오적을 처단하자'... 전직 관료의 놀라운 행보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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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까지 안정적인 엘리트의 길을 걸었던 것과 비교할 때, 항일투쟁은 상당히 거칠었다. 임금을 모셨던 승정원 관료가 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일들을 그는 전개해 나갔다.

처음에는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해 두 민족이 서로 공존하면서 각기 주권을 존중하자"라며 독립을 호소했다. 이토 히로부미도 면담하려 했다. 하지만, 이토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말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판단하게 된 나철은 귀국 뒤 무기를 들었다.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다섯 대신들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의 목숨을 거두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오혁이라고도 불리는 오기호 등을 모아 20여 명의 인원으로 조직을 꾸렸다. '감사(敢死)의용단'이 바로 이 조직이다. 사(死)를 각오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담은 조직이었다. 그는 활동자금을 마련하고자 위조 지폐까지 찍어냈다. 그가 추진한 오적 암살 활동이 역사학자 이이화의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 3권에 이렇게 묘사돼 있다.
 
"오적이 대궐로 들어갈 적에 행동대원이 한꺼번에 총을 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5적의 입궐 시각이 달라 실행되지 못했다. 나철 일행은 폭탄을 넣은 상자를 선물로 위장, 박제순·이완용에게 보냈다. 뱀 같이 약은 박제순이 폭탄임을 알아차리고 이완용 등에게 연락, 선물상자를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완용 등이 폭사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자 나철은 새로운 작전에 착수했다. 오적을 개별적으로 찾아가 죽이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각자 5적을 분담하여 권총 저격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이홍래라는 청년이 길가에 숨어 있다가 권중현에게 총을 쏘았는데 빗나가 부상만을 입히고 말았다. 이홍래는 곧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배후세력을 실토했다."
 
권중현에게 부상을 입히고 붙들린 이홍래의 실토로 조직원 18명이 체포되자, 나철은 자신이 주동자임을 밝히고 형사 처벌을 자청했다. 이로 인해 10년형을 받고 귀양을 가게 됐지만, 5개월 뒤 특사로 풀려났다. 그 뒤 재산을 다 털어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 호소 활동을 한 번 더 전개했다. 과거에 일본에서 못다 했던 일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역시 효과가 없었다.

종교로 눈을 돌리다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의 단군성전에서 찍은 단군상.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의 단군성전에서 찍은 단군상.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그가 새롭게 결심한 것은, 민중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강한 종교를 활용해 항일운동의 신국면을 여는 일이었다. 이런 결심이 한국 종교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종교로 이어지는 단군교를 창시하는 역사적 국면을 열게 된 것. 고조선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인정하고 그 뜻을 계승해 독립운동을 펼치고자, 고조선 군주인 단군을 숭배하는 조직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천도교·불교·기독교 지도자들로 구성된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종교를 통한 항일운동을 구상한 나철의 판단은 시대 흐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대종교를 통한 그의 민족주의에 관해 정영훈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홍암 나철의 종교민족주의'라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홍암의 대종교는 비록 인류의 구원을 추구하는 보편 종교의 성격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민족의 고유 종교로 자처하면서 이 고유 종교의 부활을 통한 민족 부활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말·일제 하의 종교민족주의 중에서도 전형적이며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

대종교는 한민족이 공동 조상으로 상징하는 단군을 교조이자 신앙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국조 숭봉과 고유 종교의 추이가 역대 국가의 성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관점 하에 고유 종교가 존립·발전해야만 민족의 부활이 도모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002년 발행한 <정신문화연구> 제25권 제3호.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깔린 단군 신앙을 기초로 독립운동을 개시한 나철을 일본제국주의는 특별히 경계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매우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철과 대종교를 집중 탄압했다. 집회도 금지하고, 자금 활동도 간섭했다. 숨을 쉴 수 없도록 훼방한 것.

활동이 벽에 부딪히자 나철은 마지막 수단을 강구한다. 민족종교 교주로서 순국·순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립투쟁의 의욕을 자극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단군 유적이 있는 황해도 구월산으로 올라가 단식과 성찰의 시간을 보내다가 호흡을 조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언은 '독립투쟁에 헌신하라'였다.

만주로 향한 대종교... 무장투쟁의 계기를 마련하다

나철이 죽은 뒤 대종교는 새로운 전기를 열고자 본부를 만주로 옮겼다. 이로써 만주에서 무장투쟁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다. 대신, 대종교의 국내 활동을 위축시켰다. 민족대표 33인 중에, 이 강력한 민족종교의 지도자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일제의 탄압과 나철의 죽음으로 대종교가 만주로 기반을 옮겼기 때문이다.

홍암 나철은 안정적인 세무서장직을 과감히 버리고 을사오적 처단운동과 독립 호소 운동을 벌이다가 나중에는 민족의 정신적 원천을 독립운동에 활용하고자 대종교를 창시하고 이 종교의 기반을 다졌다.

그런 독립운동가의 얼굴이 영화에서 사이비 종교 교주의 사진으로 활용된 것은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제작진이 단순히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차원이 아니라, 보다 철저한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보천교, 알고 보니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성지

 

한때 600만 신도에 달했던 보천교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며 인적 산실이었다. 어릴 적에 동학접주였던 아버지 차치구를 따라 동학혁명에 가담했던 보천교 교주 차경석은 일제에 의해 '갑종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철저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심한 압박속에서도 그는 상해임정과 독립단체들에게 아낌없는 재정.인적 지원을 하였고, 짓밟힌 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 망해버린 나라를 새롭게 재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는 항일투쟁과 민족독립,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불태운 시대의 영웅이었다. ⓒ 조우성

보천교 간부들,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

1923년 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상해에서 한민족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내와 상해, 만주.북경.간도일대 등 각지에서 독립활동을 하는 100여 개의 단체 대표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보천교'에서도 진정원 간부인 배홍길(배치문)과 김종철, 청년회 대표인 강홍렬(강일) 3명을 파견하여 국민대표회의에 참여시켰다. 

강홍렬(강일)은 3.1운동때 영남지역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합천지역에 배포했고 합천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배홍길(배치문)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목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력이 있다. 두 사람은 국민대표회의가 끝나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들은 의열단에 입단하여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김원봉 단장에게 단원과 군자금모집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였습니다. 강홍렬(강일)과 배홍길(배치문)은 의열단과 보천교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습니다. 

단재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 여사도 보천교 간부

의열단 활동을 하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도 보천교 신도였습니다. 당시 선화사급의 여성간부였죠. 1924년 초에 독립단체 정의부가 결성된 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박자혜 여사가 보천교 북(北)방주인 한규숙을 중개 하였습니다."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 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

지난 15일 상생문화연구소 주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된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학술대회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보천교와 월곡 차경석 교주의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운동, 일제의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탄압정책 등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1920~1940간의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을 검색해 보면 보천교(증산계열)의 항일기사 검색수가 타종교의 검색숫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이 나온다. 이것은 민족종교 보천교(증산계열)가 그 만큼 일제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 STB 상생방송
 
 
김좌진 장군, 보천교에 5만원 지원 받아

북로군정서 김좌진 총사령관은 홍범도 이범석 장군과 함께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이 패전 후 군대를 증파하여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이고 한인부락을 초토화시키는 등 만행을 일으키자 김좌진 장군은 부대를 전략상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인 밀산-수분하와 북만주-동녕현으로 이동하였다. 독립군도 무기와 식량보급 등의 문제로 차츰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1923년 초에 최측근 유정근을 밀사로 파견하여 보천교의 차월곡 교주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면서 '만주로 들어와 독립운동을 함께 하자'는 서한을 보냈었죠. 이때 유정근은 일제에 붙잡혔으나 군자금은 만주로 보내졌었죠. 1924년 9월경에도 보천교로부터 5만원(2만원을 지원받았다는 별도의 보고자료도 있다)을 지원받아 김좌진 장군이 옛부하들을 소집하여 무력행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일제시대 1원이 순금 두 푼(750mg), 1925년 급여 40원이 쌀 2가마에 해당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당시 1원은 현재 약 4만원 정도로 볼 수 있으므로 5만원이면 현재 20억 정도에 해당하는 큰 돈입니다."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 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


상생문화연구소 주최와 STB상생방송의 후원으로 15일 국회의원회관 2층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보천교 학술대회는 1,2부의 주제발표와 3부 종합토론, 4부 특별 강연 등 총 4부에 걸쳐 근 8시간 동안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 조우성
 
 
백범 김구, "상해임정은 보천교에 빚을 많이 졌다"

보천교의 재정간부 김홍규는 불교계의 거목 탄허스님의 선친인데,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거금 10여 만원을 숨기고 있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어 고문을 당했고, 상해임시정부 간부 라용균 제헌의원은 보천교 간부 임규로부터 5만원의 자금을 건네받아 상해 임정에 전달하였다고 증언했다. 

"비밀리에 전달되는 독립자금의 특성상 보천교가 실제 얼마만큼의 재정지원을 임정에 했는가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본 검경 문서나 재판기록에 만주 독립군 요원이 국내에 침투하여 보천교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려다 체포된 사례를 보면 보천교가 해외독립운동에 재정후원을 한 정황은 많습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데이터베이스에도 1923년 충청도의 보천교 교도 박운업이 "보천교는 상해임정에 있는 힘을 다하여 지원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백범 김구 선생은 측근들에게 '우리가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정읍에 보천교 본부가 있었거든요."(남창희 인하대학교 교수, 한미동맹의 민중적 기원:보천교와 이승만의 대미정체성 비교 연구)
 
 
보천교 관련 공식자료와 연구문헌의 인물들과 상해 임시정부 중요인물들간의 네트워크 분석을 해 본 결과 상당히 밀도가 높은 관계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증언에 의하면 백범 김구도 정읍 보천교를 몇 번 이나 비밀리에 다녀갔다고 전하며,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에도 1923 충청도 보천교 교도 박운업이 "상해임정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 ⓒ 남창희 인하대 교수
 
 
차경석과 부친 차치구, 전봉준 장군과 마지막까지 생사를 함께 해

보천교 교주 월곡 차경석(1880~1936)이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에 적극적인 것에는 그의 아버지인 차치구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다. 

"월곡 차경석의 부친 차치구는 전봉준장군과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차치구는 동학접주로 정읍에서 기두하여 혁명에 가담했는데, 동학군이 일군에게 공주전투와 우금치에서 전멸당하고 전봉준 장군이 피노리에 숨었을 때 같이 동행을 했습니다. 차경석의 아버지가 밀고를 당해서 참혹하게 분살형을 당했는데, 차경석의 장녀 차봉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차치구의 몸이 다 타버려서 차경석이 몰래 아버지의 두상만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존경하던 아버지를 따라 동학혁명에 종군했던 그가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였으니 그의 가슴속에 동학군을 무수히 살해한 일제와 썩어빠진 조선왕조 말의 관료, 정치체제에 대한 증오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겠습니다." (안경전 상생문화연구소 이사장, 근.현대사에서 보천교의 위상과 역할)

차경석은 1899년 동학혁명때 살아 남은 사람들이 조직한 영학당에 가담하여 봉기를 일으켰다가 관군에 잡혀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그의 인품과 학식에 매료된 관료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차경석, 제주도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 지원

일제는 1917년 4월 24일 차경석을 국권회복을 추구하고 배일사상을 가진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여  '갑종 요시찰인물'로 분류하였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을 돌다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의 김연일 등과 상의하여 1918년 9월 19일 제주도 법정사(法井寺)에 교도 약 30명을 소집하여 "왜놈은 우리 조선을 병합하고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가혹하게 다루니 실로 왜놈은 우리 조선민족의 원수다. 이제 국권을 회복함으로써 교도는 우선 도내 거주의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인 상민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1918년 10월 6일 밤 김연일은 신도 33명을 소집하여 인근 각 면.이장들에게 '일본관리를 소벌(掃伐)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격문을 배포한 후 제주성내를 돌며 전선을 절단하고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방화 전소시켰습니다. 보천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한 법정사의 집단 항일운동은 국권상실 이후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초이자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었습니다." (중원대학교 김철수 교수, 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

보천교는 한때 신도가 근 600만에 달했다고 한다. 미 국무성 밀러 보고서에도 보천교 신도를 600만으로 적고 있다. ⓒ STB 상생방송
 
 
일제와 친일언론들,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사이비종교로 매도

일제는 1915년 8월에 조선총독부령으로 포교규칙을 선포하여 독립활동에 적극적인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단체로 분류하여 건전하지 못한 반사회적집단, 미신집단, 사이비종교단체로 규정했다. 언론도 일본 총독부의 선전도구로 전락해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유사종교 및 사교와 같은 사회악의 존재로 취급하였다. 신문은 보천교를 비윤리적 반사회적 사상과 가르침을 펴는 미신, 사교집단으로 매도했다.

일제는 민족종교를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과 같은 정치적 변혁을 꾀한다고 판단해 민중과 격리시키고 통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이비종교단체라는 올가미를 씌워 종교가 아닌 일반결사단체로 취급하여 '보안법', '집회취체에 관한 건'을 적용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는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만들어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를 탄압하고 파괴시켜 나갔습니다. 1920년 청송군 일본경찰서는 안동을 비롯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보천교 신도 3천여 명을 체포하여 감금하였고, 그 중 수십 명이 고문치사하였고, 700여 명을 기소하였고, 고등법원에서 최고 징역 2년 6개월을 받은 사람이 129명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에서 검거된 보천교 신도가 삼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강영한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일제의 보천교 탄압과 해체)

일제, 유사종교해산령 만들어 보천교와 민족종교 강제 해산시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일제는 한국의 민족성, 독립 등을 풍기는 모든 단체는 철저하게 해체시켰습니다. 그 정점은 1936년에 내린 '유사종교 해산령'입니다. 두 사람 이상의 집회가 금지되고, 1원 이상의 금전수합 역시 금지되었습니다. 유사종교 해산령에 따라 각도 경찰국은 종교시설물을 폐쇄시키고, 종교지도자들을 검거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습니다.

1936년 6월 6일, 일경이 보천교 간부 24명을 연행하였고, 이틀 후에는 경찰 수십명이 밀어닥쳐 본소 성전의 제기와 일월상, 제단마저 전부 뜯어갔습니다. 6월 15일에는 보천교 건축물을 강제로 경매에 부쳤습니다."

정읍에 있던 보천교 본소 중심건물인 십일전은 일제에 의해 강제 경매.해체되어 조계종 조계사 대웅전 건설재료로 사용되었다. 사진은 1938년 경 사진으로 십일전 기둥으로 조계사 대웅전을 짓는 모습이다. ⓒ 조계종 홈페이지
월곡 차경석은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의 영웅

보천교 본소 십일전 건물은 뜯겨져 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 대웅전이 되었고, 본소 정문이었던 보화문은 옮겨져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다.

"월곡 차경석은 옷 두벌만 지니고 다니며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항상 도망다녔습니다. 그는 상해 임정이나 독립단체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다 협조해 주었습니다. 차경석 셋째딸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 선생도 여러 차례 정읍을 비밀리에  찾아와 차교주를 만났다고 합니다. 보천교는 국권회복운동, 독립운동의 심장부였습니다. 정읍은 독립운동의 메카였습니다.

월곡 차경석 선생이 일제와 친일언론에 의해 친일파, 사이비교주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지만 잘못된 역사가 바로 잡히고 잃어버린 보천교의 역사가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그를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의 영웅, 새 역사의 문을 연 위대한 지도자로 받들게 될 것입니다." (안경전 상생문화연구소 이사장, 근.현대사에서 보천교의 위상과 역할)

김좌진 장군 항일운동 자금지원한 '보천교'의 재발견

국회에서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학술대회 열어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75964&PAGE_CD=N0002&CMPT_CD=M0117

17.11.11 17:44l최종 업데이트 17.11.11 17:4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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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로군정서 백야 김좌진 사령관은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제공한 2만여 엔의 자금으로 옛 부하들을 소집하여 무장대를 재조직하여 무장독립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북로군정서 백야 김좌진 사령관은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제공한 2만여 엔의 자금으로 옛 부하들을 소집하여 무장대를 재조직하여 무장독립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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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관동청경무국(關東廳警務局)은 1924년 11월 26일 일본외무성 아세아국과 조선경무국 등에 '김좌진金佐鎭 군자금 확보' 건을 보고한다.(秘 關機高授 제32743호)

"최근 김좌진은 자금이 부족하여 부하를 해산하고 모든 활동이 불능한 상태가 되었으나 금년 봄 조선 내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2만여 엔의 군자금을 제공하여 김좌진이 이 돈으로 옛 부하들을 소집하여 무장대를 편성하여 동지들을 거느려 동령현東寧縣으로 들어왔다. 김좌진이 보천교를 배경으로 행동하는 그의 장래는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읿어버린 역사 보천교, 김철수, P97)

독립군 북로군정서 김좌진 총사령관이 보천교 교주 차경석으로부터 수만 엔의 자금을 지원받아 조직을 재건하여 무력행동에 나섰다는 관동청 경무국장의 보고 내용이다.

 

혼자된 며느리에게 담배 가르친 시아버지

<답사> 경북 성주와 봉화로 떠난 `심산의 역사 기행`

 

15.06.20 20:31l최종 업데이트 15.06.20 20:31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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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도교도원 제1회 입학기념 촬영(성균관 명륜당, 1949.3.8.). 앞줄 가운데부터 차례로 정인보·김구·김창숙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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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베푸는 '심산 역사탐방'의 답사단이 심산 생가인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에 도착한 것은 지난 5월 30일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였다. 나는 이른 점심을 챙겨먹고 정오 전에 일찌감치 사도실에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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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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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은 경북 성주가 낳은 독립투사다. 대가에 그의 생가가, 읍내에 심산기념관이 있지만 사람들은 무심히 그를 숱한 독립지사 가운데 한 분이라고 여기고 만다. 그러나 심산은 역사평론가 이덕일이 '그가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한 열혈 독립 운동가였다.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
-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중에서

경술국치(1910)를 당했을 때 매천(梅泉) 황현은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도 어렵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봉건적인 충(忠)을 지키고자 한 게 아니라 '글을 아는 자', 즉 '선비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이 지적한 것처럼 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선비로서의 양심은커녕 국망(國亡)에 무심하고 세속의 이욕만을 좇던 양반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고 그 선비들이 일생을 바쳐 천착한 성리학이 나라의 지배적 사상이었는데도 그랬다.

'을사오적 참형소'로 시작된 독립투쟁의 길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받은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 순종의 장인 윤택영,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 이때 일제가 이들 지배층에게 내려준 은사금(恩賜金)은 1700여만 원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이 가까워오는 1919년,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 등이었다. 정작 거기 유림 인사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이 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심산은 유교 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보고 통탄해마지 않았다.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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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 김우옹을 모시다가 고종 때 훼철된 후, 1992년 복원된 청천서원. 현판은 백범 김구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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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독립운동은 일찍이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스승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이완용 등 오적을 참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의 독립운동은 낡은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척사위정(斥邪衛正)'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1945년 8월 초순 건국동맹 결성 사실이 드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될 때까지 그는 오직 독립투쟁 한길을 갔다.

심산은 영남의 문벌사족인 의성김씨, 조선조 중엽의 명현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재주가 남달랐으나 성품이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열서너 살이 되어 비로소 사서(四書)를 읽었다. 부친이 유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대계 이승희(李承熙, 1847∼1916)에게 교육을 부탁했으나 성리학설을 싫어하여 문하에 들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그가 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1896년 부친상 후부터다. 당시 열여덟 심산은 이승희(성주)·곽종석(경남 산청)·장석영(경북 칠곡) 등 원근의 유학자들 문하를 두루 찾아 경서에 대해 물었는데 특히 이승희를 각별히 따랐다. 당시 명문가 출신으로 일제하에서도 안일한 삶을 누리고 있던 양반 지주들이 많았지만 심산은 이때부터 구국활동에 몸을 던져 간난과 형극을 길을 걷게 된다.

"사직은 중하고 임금은 가볍다"

1905년 '을사오적 처단상소' 이후 심산은 매국단체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역적을 치지 않는 사람 또한 역적이다'라는 격문을 돌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과 일간지에 이들에 대한 성토문을 보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일본 헌병 성주분견소에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때, 분견소장과 나눈 일문일답은 그가 수구적 충군(忠君)의식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보여준다. "황제가 합방을 허가한다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고 묻는 헌병에게 심산은 "황제가 역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고 설령 허가하더라도 어지러운 명령이니 따르지 않겠다"고 답한다.

헌병이 '황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역(逆)'이라고 하자, 심산은 "사직은 중하고 임금은 가벼운데 난명(亂命)에 따르지 않음이 충이다"라고 답한다. 이는 그의 의식이 이미 '국가'와 '정부'를 구별하고 국가 수호를 위해서는 정부의 통치도 거역할 수 있다는 데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심산이 태어난 사도실 마을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답사단을 기다리는 동안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생가가, 오른쪽 길섶 동강의 불천위(不遷位)사당과 어깨를 맞댄 고가가 있다. 심산이 1910년에 연 성명학교(星明學校)다.

성명학교는 동향으로 배치된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집이다. 고종 때 청천서원이 훼철되자 심산의 부친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晴川書堂)으로 중건했고, 심산이 여기에 성명학교를 연 것이다. 심산은 '김창숙이 나고 청천이 망하고 말았다'는 완고한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교를 강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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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학교는 동강을 모신 청천서원이 훼철되자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중건한 청천서당(晴川書堂)에 연 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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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칸 대청 안벽에는 '청천서당' 현판이, 대청 앞 기둥에 '성명학교' 현판이 걸렸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2칸, 오른쪽에는 1칸 온돌방을 들였다. 서당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지만 마당에는 씀바귀와 고들빼기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그해 8월, 나라가 망하자 심산은 "선비로서 세상에 산다는 것은 치욕이다"라며 음주와 미치광이 노릇으로 3년여를 보냈다. 그러다가 모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4, 5년간 독서에 정진하게 된다. 이후 심산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소양이 된 학문과 문장은 모두 이 시기에 기반을 닦은 것이었다. 

심산은 행동성이 강한 편이었지만 청년기에 스승인 이승희나 곽종석의 의병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앞서 밝힌 대로 그의 독립운동은 낡은 존화양이(尊華攘夷)에 입각한 '척사위정론'을 벗어나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근대 국제관계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조선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독립주권의 회복을 기도했던 것이다.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다

이러한 심산의 독립운동은 자연히 대외적으로 선전·섭외 활동을 중심으로 출발하게 된다. 이는 바로 그 자신이 참여하지 못한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1919년 심산이 파리평화회의에 조선 독립청원서를 보낸 파리장서(長書)운동은 심산의 대외적 선전·섭외 활동의 첫 출발이었다.

심산은 전국 유림을 규합하려 했지만 보수적 유생들의 지역·학통·사색당파·사고의 차이 때문에 이를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곽종석·김복한 등 영남과 충청도 유림 130여명이 연명한 장서를 작성하여 극비리에 출국, 상하이로 갔다. 거기서 독립청원서를 영역하여 파리의 김규식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하는 한편, 장서를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언론계, 외교사절, 해외 교포와 국내 지방 향교에 우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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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의 야성송씨 문중을 이끈 송준필이 1919년 파라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한 백세각(百世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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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심산이 파리장서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봉화군 해저리 만회고택(晩悔古宅). 심산의 부친 김호림은 이 마을에서 자라 심산의 조부에게로 출계(出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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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읍 해저리 송록서원 앞에 2014년에 건립된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서명한 유림 가운데 봉화 출신은 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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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황한 일제가 국내 유림 500여 명을 체포하는 등 대규모 옥사를 벌이니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의거(1919~1921)'다. 이 의거는 국내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민족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심산은 파리에 가는 대신 중국에 머물면서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였고 임시의정원 4차 회의에서 경상도 의원에 선임되었다. 심산은 자신의 유학·한문학적 교양을 통하여 중국과의 대일본 공동항쟁을 위한 연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심산이 혁신유림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선각자로 기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하이에 임정을 수립했지만 1921년을 고비로 국내외 독립운동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심산은 1925년 베이징에서 이회영(李會榮)과 함께 만주와 몽골 접경에 황무지 3만 정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여기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일제 총독하의 모든 기관 파괴', 나석주 의거를 기획

그러나 모금활동은 부진했고 심산은 "친일 부호들의 머리를 베어 독립문에 달지 않고는 우리의 독립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라며 분노하였다. 심산의 국내 잠입 모금활동 사실이 드러나며 다시 6백여 명의 유림 인사들이 검거되는데 이것이 '2차 유림단 의거(1925~1926)'다.

심산은 모금의 실패가 민심이 죽어 있고, 그것은 일제의 위장된 '문화정치'에 매수된 지식층과 주구화된 식민지 관리 및 일부 부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먼저 일제 총독 하의 모든 기관을 파괴하고, 다음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고, 그리하여 민심을 고무시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다시 불붙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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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 표석.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왼쪽 화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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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로 돌아온 심산은 이동녕과 김구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모금한 돈으로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기로 한다. 1926년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동척사원과 경찰 간부 등 여럿을 죽이고 일경과 교전 중 자결한 나석주(1892~1926) 열사는 바로 심산이 파견한 청년이었다.

이듬해(1927) 심산은 국내에 보냈던 맏아들 환기의 부음을 들어야 했다. 환기는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출옥 후 바로 사망한 것이었다. 아들의 주검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심산은 지병이 악화되어 상하이 조계의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다가 이를 탐지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었다.

1928년, 심산은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병세가 깊어지면서 혼절하여 사경을 헤매기도 했지만 그는 일제의 고문에 굴하지 않았고 한국인 변호사들의 무료변론도 거절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포로'로 자처하면서 구차히 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의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된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히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1934년 병이 위중하여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무렵, 이미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해 사람들이 '벽옹(躄翁-앉은뱅이)'이라고 부르자 스스로도 이를 별호로 썼다. 그러나 그의 저항정신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하는 등 그의 투쟁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1940년, 일제의 감시가 다소 느슨해지자, 그는 고향집을 찾아 어머님 묘소에서 2년 간 시묘(侍墓)했다. 1920년 정월, 망명지 상하이에서 모친의 부음을 들었지만 그는 어머니와 영결(永訣)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그 시묘는 실로 20년 만의 뒤늦은 자식 노릇이었던 셈이다.

심산은 1944년 8월에 서울에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에 남한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비록 실질적 활동은 못했지만 일제의 패망과 민족 해방에 대비하고 있었던 이 지하조직에 심산이 참여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민족적 양심을 대표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심산이 해방 소식을 접한 것은 1945년 8월초, 건국동맹을 결성한 사실이 드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어 있을 때였다. 을사늑약 체결 후에 스승과 함께 상경하여 '오적참형소'를 올린 때부터 40년이 흘러 스물여섯 청년은 예순여섯의 노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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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의 심산 김창숙 선생의 생가 안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1년 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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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의 둘째 며느리 손응교 여사. 옆은 아들 김위 씨. 손여사는 젊어 남편을 잃고 걸음조차 어려운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었고 만주와 중국에 세 번, 국내는 30여 차례나 오가며 심산이 국내외 독립운동가에게 보내는 '비밀편지'를 전했던 숨은 독립유공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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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로 보낸 차남, 유해로 돌아오다

그해 10월에 심산이 1943년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로 보냈던 차남 찬기가 유해로 돌아왔다. 1927년 맏이 환기를 떠나보낸 지 꼭 18년 만이었다. 아들 셋 가운데 둘을 조국 해방 투쟁에 바친 심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스물일곱에 청상이 된 둘째며느리에게 담뱃대에 불을 붙여달라고 하면서까지 담배를 가르쳤다.

그것은 남편을 잃고 걸음조차 어려운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삯바느질로 힘겹게 생계를 꾸린 젊은 며느리에게 베푼 시부의 사랑이고 위로였다. 일찍이 그이는 만주와 중국에 세 번, 국내는 30여 차례나 오가며 심산이 국내외 독립운동가에게 보내는 '비밀편지'를 전했던 숨은 독립유공자였다.

며느리와 함께 담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른바 '맞담배'를 한 독립투사를 상상해 보라. 불의엔 굽힐 줄 모르는 성정이었지만, 구태의연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개방적이며 진취적인 사고를 지녔던 이가 심산이었던 것이다.

도착한 답사단과 함께 어느덧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둘째며느리 손응교 여사가 홀로 지키고 있는 심산 생가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 기력이 떨어진 노인을 뵈면서 답사단은 옷깃을 여며야 했다. 그이가 감내한 세월이 바로 이 땅의 고단한 현대사였음을 새삼 떠올리면서.

그이가 갓 결혼해 남편과 처음으로 시아버지를 뵈러 간 데가 대전형무소였다. 심산은 그때 이미 고문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상태여서 간수에게 업혀 나왔다. 며느리는 시집 와서 시아버지가 걷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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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여 반독재호헌 구국선언을 발표한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심산은 투옥되었다. 사건 당시 연행되고 있는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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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은 해방 공간에서 성균관 초대 관장과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도의 재건과 개혁에 앞장섰다. 성균관대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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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진정한 해방'을 위한 심산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 유도회를 조직하고 성균관 초대 관장과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도(儒道)의 재건과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유도의 현대적 재건을 좌우 대립의 이념적 혼란을 극복하고 민족 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로 파악했던 것이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반독재 투쟁

특히 무엇보다도 민족의 분열을 경계했던 심산은 일찍이 임시정부의 노선에 비판적이었지만 해방공간에선 임정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이른바 '동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또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 등과 더불어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극력 반대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이 암살되는 정국의 혼란을 거치면서 친일파가 정권과 유착하여 다시 실세로 떠오르자 심산은 이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단신으로 맞섰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심산은 여전히 탄압받고 거듭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 대통령 하야 경고문,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여 반독재호헌 구국선언을 발표한 국제구락부 사건, 이승만 삼선 취임 반대, 보안법 개악 반대, 민권쟁취 구국운동 등 독재와 맞서는 외로운 싸움에서 그는 늘 전면에 있었다.

1955년 무렵부터 독재 권력과 주변세력들에 의해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분규가 확산되자 심산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심산은 집 한 칸 없이 곤궁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일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는 그의 선비정신이 대학을 세우고 총장을 지내고서도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한 것이었다.

1957년 겨울, 병으로 가마에 실려 고향에 돌아온 심산은 '쇠약한 몸으로 병상에 누우니 온갖 감회가 층층으로 나와, 고시(古詩) 한 편을 지어 여러 일가에게 보'였다(심산 자주(自註))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던가. 시에는 이루지 못한 평화와 통일을 절절하게 그리는 노 독립운동가의 회한이 짙게 배어 있다.

천하는 지금 /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 한 사람 손아귀에,
아아, 겨레의 슬픈 운명이여.
전부가 돌아갔네.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 빨리 오려무나.

 - <통일은 어느 때에> 중에서

1962년 5월 10일, 불요불굴의 저항정신과 실천적 행동주의의 표상이었던 심산은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그 열혈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84세.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사회장이 엄수되었고, 그의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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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은 1962년 5월 10일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5월 18일, 서울운동장에서 선생의 사회장이 엄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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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전통과 원칙을 지켜나갈 때 비로소 대의명분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 비타협·불복종의 행동주의자. 한평생 격동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스스로를 갈무리해 온 심산은 지나간 시대의 '마지막 선비'였다.

역사와 역사적 인물은 곧잘 그 당대의 삶과 자취를 통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환기해 주곤 한다. 비록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지만 그 성찰의 시간으로 우리의 비루하고 속된 삶의 민낯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1박2일은 얼마나 값진 시간이 될까.

과거를 통해 오늘을 돌아보는 역사 탐방, 심산기행은 이튿날 오전, 1919년 심산이 파리장서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봉화군 해저리 만회고택(晩悔古宅)에서 그 공식 일정을 마쳤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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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학자 “안중근 의사 이토 저격은 범죄 아니다”


 

등록 : 2014.02.28 11:23 수정 : 2014.02.28 11:23

 

나카츠카 나라여대 교수 “일본 역사인식 지지 못받아”

 

“미국과 영국은 제국주의 시대의 부끄러운 역사까지 교과서에 실었습니다. 일본도 자신의 잘못한 과거를 제대로 연구하고 밝혀낸다면 한국·중국·일본 사이의 역사 갈등은 단번에 해결되리라 봅니다.”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85) 나라(奈良)여대 명예교수는 28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점점 우경화하는 일본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며 일본 정부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며 일본의 침략사를 파헤친 지한파이자 대표적인 ‘일본의 양심’으로 불린다.

 

 나카츠카 교수는 3·1절을 기념해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가 마련한 기념 강연을 위해 전날 방한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며 “하지만 일본의 언론 풍토에서 양심적인 목소리를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일본내 뿌리깊은 우경화 경향을 지적했다.

 

 이 때문에 그는 ‘풀뿌리 역사 교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민간 교류로 역사 인식을 바꾸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이런 역사 왜곡을 바로잡으려고 민간 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매년 우리나라의 동학농민운동 격전지를 방문하고 있고, 작년에는 전남도립도서관에 자신이 소장한 자료를 기증했다.

 

 3·1운동에 대한 나카츠카 교수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는 “3·1운동은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 민족운동의 기폭제가 된 운동이었다”며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쟁을 계승한 한국 민족운동의 대폭발”이라고 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민족운동 중 가장 큰 의미를 지녔고, 중국의 5·4운동도 3·1운동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나카츠카 교수는 일본에서 3·1운동이 제대로 교육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정도로 간단히 기술될 뿐, 의미나 배경은 애써 외면한다는 얘기다.

 

 그는 “진보적 지식인도 조선 침략, 그에 앞선 동학농민군과 의병 학살에 눈을 감는다”며 “그래서 지금의 일본인은 한국인이 역사 문제를 왜 제기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고 개탄했다.

 

 나카츠카 교수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들어선 것을 두고 “안중근은 범죄자”라는 망언을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봤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들어선 19세기 후반을 ‘영광의 시대’로 포장하면서, 이토 히로부미까지 ‘평화적인 인물’로 미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토는 군부와는 다르게 평화적이었다는 이미지가 있다”며 “그러나 그는 동학군 학살 작전에 최고 결정권자로 깊숙이 개입한 인물로, 안중근 의사의 저격은 범죄가 아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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