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보던 파리의 출몰…美대령의 고백 "세균전, 합참에서 짰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7]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⑯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  기사입력 2024.04.13. 11:46:39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펼칠 무렵인 1952년 초,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북한·중국의 주장이 거세졌다. 미국은 '그렇다면 유엔 조사단을 구성하자'고 맞섰다. 북한·중국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유엔이란 '미국의 작은 국무부'에 지나지 않고, 둘째, '유엔군'이란 이름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당사자인 유엔이 '공정한 조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국제적십자사(ICRC)가 조사에 나서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나왔다. 북한·중국은 "국제적십자사라는 게 실은 '스위스 적십자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쳤다. "국제적십자사는 한반도에서 미국이 무차별 폭격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내는 상황에 대해 아무런 논평이나 지적을 하지 않았다. 미국의 세균전을 중립적으로 조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큰 몸집에 긴 날개, 못 보던 파리였다" 

미국의 세균전 전쟁범죄 의혹을 밝혀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면서 모두 3개의 조사단이 꾸려졌다. △사실상 중국 정부가 만든 '미 제국주의 세균전 죄행조사단'(활동기간 1952년 3월15일~1952년 4월10일), △국제민주변호사협회가 만든 '국제민주변호사협회 위원단'(1952년 3월3일- 1952년 3월19일), △세계평화이사회 이름으로 만들어진 '국제과학위원단'(1952년 6월23일-1952년 8월31일)이다. 

'미 제국주의 세균전 죄행조사단'은 중국이 정치적 선전 공세를 펼 목적으로 꾸렸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 그렇기에 국제사회에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국제민주변호사협회 위원단'을 꾸린 국제민주변호사협회는 1946년 프랑스 인권 변호사들이 중심이 돼 24개국의 법조인들이 모여 출범한 단체다. 따라서 이 협회의 조사위원단은 나름 공신력을 지녔다. 9명의 법학교수·변호사·판사(출신국은 영국·프랑스·네델란드·벨기에·이탈리아·오스트리아·브라질·중국)로 구성됐다.

9명의 위원은 1952년 3월3일부터 19일까지 북한에 머무르면서 현지 조사를 나갔다. 그들은 미군의 세균전 공격이 사실이라 못 박았다. 위원단은 조사 보고서 끝에 '미국 비행기들이 북한에다 전염병으로 감염된 곤충들을 투하했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며 미국의 세균전 공세를 비난했다.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북한 당국이 '용의주도하고 철저한' 방역대책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라 했다. 

[위원단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과 지방 항공감시소의 보고에 따르면, 북조선 169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곤충들이 발견되었다. 그 대부분은 지금까지 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파리는 재래의 한국 파리와는 달리 몸집이 크고 긴 날개를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곤충이 나올 수 없는 대단히 낮은 기온(1월 최고온도는 영상 1도)을 고려할 때 이런 곤충들이 나타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전문적인 조사결과는 다수 곤충이 병균에 감염돼 있음을 보여주었다](김주환편,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1989, 170쪽).

조사위원단이 지닌 한계는 법조인 중심으로 구성돼 세균전문가가 없었다는 점이다. 보름 동안 북한에 머물며 조사활동을 벌였지만, 북한과 중국에서 주는 자료에 많이 기댔다. 전쟁 중이라 현장 조사를 제대로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보고서가 나오자 미국은 곧바로 세균전 의혹을 부인하고 나섰다. 위원단에 세균전문가들이 빠져 있기에 믿기 어렵고, 공산권의 선전에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 미군 비행기가 떨어뜨렸다고 북한이 주장했던 ‘세균 폭탄’. 공중에서 땅에 닿으면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세균에 감염된 곤충이 쏟아졌다고 한다. ⓒNCNA

ISC의 중심 인물, 조지프 니덤 

정치적 선전 공세에 그치지 않고 전문가들이 나서서 그 나름의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낸 것은 '국제과학위원단'(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ISC)이다. 위원단은 영국인 조지프 니덤(케임브리지대, 생화학), 소련인 주코프-베레즈니코프(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교수, 세균학)을 비롯해 프랑스 동물생리학자, 이탈리아(2인) 해부학자와 미생물학자, 스웨덴 임상연구소장, 브라질 기생충학자 등 모두 7명의 과학자로 꾸려졌다(이 가운데 이탈리아 미생물학자는 정식 조사위원이 아닌 '옵저버'). 

소련인 주코프-베레즈니코프는 731부대의 세균전 범죄를 다룬 하바롭스크 전범재판(1949)의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이력을 지녔다. 7명의 조사단 요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영국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1900–1995)이었다. 1952년 조사단이 꾸려질 당시 니덤은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전공인 생화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세균전이 폈는가를 살펴보는 국제과학조사단에 니덤이 참여한 동기와 역할에 대해 쓴 김태우(한국외국어대, 한국현대사)교수는 니덤을 가리켜 '과학사와 중국학 분야에서 워낙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 평가한다. 니덤은 30대 초반 <화학적 발생학>(Chemical Embryology, 1931,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1941년 '과학 분야에서는 노벨상 다음 가는 명예'라는 영국왕립학회 회원(FRS)이 됐다. 

그게 끝이 아니다. 연구자로서의 삶 후반부엔 과학사 관련 역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1954,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을 써냈다. 이 책은 중국에 대한 서구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거의 하룻밤 사이에, 그리고 거의 혼자 힘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니덤은 나이 50대에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과학사 저서로, 그의 인생 전반부 업적 전체를 압도하는 놀라운 연구성과를 남겼다. 그런 업적을 인정받아 1971년 인문학계 최고 영예인 영국아카데미 회원(FBA)이 됐고, 1992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명예훈위'(Companions of Honour)까지 받았다. 이렇듯 니덤은 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최고 영예를 얻게 되었는데, 20세기에 위의 세 가지 타이틀(FRS, FBA, CH)을 동시에 지닌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고 한다](김태우, '한국전쟁기 조지프 니덤의 세균전 국제과학조사단 참여동기와 주요역할'. <의사학> 제32권 제3호, 2023년 12월).

이렇게 니덤의 약력을 소개하는 까닭이 있다. (독자분들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문제의 세균전 의혹을 밝히려는 사람이 지녀야 할 과학적 엄밀성과 진지함이란 잣대로 보면, 니덤이 뛰어난 연구자였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1937년 케임브리지대로 유학 온 중국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면서 니덤은 1942년부터 4년 동안 중국 충칭의 영국대사관 외교관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가 중국군을 상대로 세균전을 편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ISC 보고서, "일본군이 썼던 방식과 똑 같다" 

니덤을 중심으로 한 국제과학위원단(ISC)은 1952년 7월9일부터 2주 동안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 조사활동을 벌였고, 이어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서 8월6일까지 2주 동안 머물렀다. 북한에서 미군 공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8월31일 베이징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대한 사실조사를 위한 국제과학위원단의 보고서'(ISC보고서)란 긴 이름으로 670쪽에 이르는 두툼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니덤이 ISC의 중심인물이었기에 흔히 '니덤 보고서'로 일컬어지는 ISC보고서는 북한과 중국의 주장을 거의 대부분 사실로 받아들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보고서 앞부분에 미군의 세균전 의혹을 731부대와 관련시키는 대목이다. 미국의 세균전 능력이 731부대의 전쟁범죄자들로부터 얻은 '피 묻은 정보'와 떼려야 뗄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생물무기, 특히 곤충무기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꿈을 지녔다. 그들은 만주에서 철수하기 전에 세균전과 관련이 있는 문서들을 조직적으로 없앴다. 1952년 초 북한·중국(만주)의 세균전 의혹이 제기되기 전에 이시이 시로가 한국을 2차례 방문했다는 언론 보도가 잇달아 나왔고, 3월에 다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 내 점령당국(미국)이 이시이 시로의 활동을 도왔는지, 미군 극동사령부가 본질적으로 일본의 (세균전)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본 위원들이 줄곧 품었던 의문이었다](Report of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1953, 12쪽). 

731부대를 비롯한 '이시이 기관'의 우두머리 이시이 시로는 1952년 초에 한반도를 적어도 두 번 비밀리에 다녀갔다고 알려진다. 그가 방문했다는 시기는 '미국이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는 북한·중국의 주장이 거세지기 직전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이시이의 한반도 극비 방문을 확인해주는 미국의 문서는 없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미국이 인정한 바도 없다).

이시이가 미군 관계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한반도를 다녀간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 가지 추론을 해본다면 이렇다. 그가 다녀갔다는 1952년 초 무렵은 전선이 한반도 중부 지역을 경계선으로 지구전 양상을 보였다. 정전회담도 개점휴업 상태로 큰 변화가 없었다. 미국으로선 그런 상황에서 세균무기의 효능을 실험해볼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난날 중국에서 악명을 떨쳤던 '원조(元祖) 세균전문가'가 한반도 전선을 돌아보고 뭔가 새로운 기획안을 내놓길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위원단이 내놓은 조사보고서 곳곳에는 이시이 시로의 망령을 떠올리는 서술이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이 채택한 페스트와 관련된 세균전의 고전적인 방법은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컨테이너든 스프레이든 대량으로 배달하는 것이었다.···이 모든 사실과 다른 유사한 사실들에 비춰볼 때, 본 위원회는 한국에서 미 공군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이 썼던 방식과 똑 같거나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페스트를 북한에 퍼뜨렸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ISC보고서, 24-25쪽). 

▲ 1952년 8월에 나온 ‘북한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대한 사실 조사를 위한 국제과학위원단(ISC) 보고서’ 표지. 670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방식이 ‘일본군이 썼던 방식과 똑 같다’고 지적했다.

'니덤 보고서'가 지닌 한계 

ISC보고서('니덤 보고서')는 한반도에서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전염병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있고, 그 원인은 비행기에서 세균을 떨어뜨리는 미국의 '항공 활동'에 있음을 세계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위원단이 전쟁지역에까지 가서 조사활동을 편 목적은 미국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본 위원회는 사망한 한국 민간인의 숫자, 총 질병률 및 사망률에 관한 구체적인 수치를 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위원회가 확인한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전염병이 발생했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 길(원인)을 거슬러보면 언제나 미국의 항공 활동으로 돌아간다(the trail always leads back to American air activity). 세계는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경고를 받아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는 위험과 함께 이런 종류의 전쟁(세균전쟁) 가능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ISC보고서, 59쪽). 

미국은 ISC보고서를 가리켜 '수집된 곤충 표본을 갖고 세균이 묻었다고 하는 공산권의 거짓 선전활동'에 과학자들이 속았다고 했다. 아울러 그들이 낸 보고서는 허점투성이이라 깎아내렸다. 하지만 니덤을 비롯해 조사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서구의 과학자들이 곤충 표본 수집가들에게 속을 수 있겠는가" 하고 반박했다. '인터뷰와 조사를 벌인 목격자 수백 명의 증언들이 의심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서로 너무 일치하며 너무 독립적'이라는 것이었다.

ISC는 미군이 세균에 오염된 곤충을 살포하기 위해 썼다는 폭탄 모양을 한 빈 통, 세균 매개 곤충의 샘플, 그리고 세균에 감염돼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하지만 조사단은 몇 가지 한계도 지녔다. 무엇보다 북한·중국이 제공하는 자료에 많이 기댔다. 미군 비행기의 공습 순간에 ISC 요원이 바로 그 곳에 머물다가 갓 떨어진 세균무기와 그 속에서 꿈틀대는 곤충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바람직하겠지만,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지 못했다.

노벨상 수상자, "나는 회의론자였지만 생각 바꾸었다" 

그럼에도 ISC보고서는 세균전 연구자들 사이에 후한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이 사실이라 여기는 대표적 연구자인 스티븐 엔디콧, 에드워드 해거먼이 그러하다. 이들은 둘 다 캐나다 토론토 요크대학 교수 출신으로 동아시아역사학 전공자들이다. 특히 엔디콧은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고 1980년대에 중국 쓰촨(四川)에서 대학교수를 지낸 중국통이다. 

이 두 연구자는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The United States and the Biological Warfare, 1998)이란 문제작을 써냈다. 이 책은 위에서 살펴본 ISC보고서(이른바 '니덤 보고서')를 비롯해 미국의 여러 문서보관소의 관련 문서들을 뒤져 얻어낸 여러 정황 증거들을 분석하면서, 미국의 세균전 '설'이 단순히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라 주장했다. ISC보고서에 대한 이 두 연구자의 평가를 보자. 

[이 ISC가 비록 중국 혁명에 우호적인 사람들로 구성됐다고 하지만, 단 한 명만 소련 출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서구에서 훌륭한 경력과 명성을 쌓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낸 보고서는 미군의 활동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비춰볼 때 더욱 존경스럽게 취급돼야 한다. 거기엔 단 하나의 결론만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 동안 곤충과 다른 매개물을 이용해 생물학전(세균전)을 실험했다는 북한과 중국의 설득력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마찬가지로 설득력 있게 재창조했다](엔디콧&해거먼,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중심, 2003, 286쪽). 

ISC보고서는 '설마 미국이 세균전을 폈겠느냐'며 공산권의 주장에 의문을 품었던 많은 회의론자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1967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던 조지 월드(하버드대 생물학연구소장)는 엔디콧과 해거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처음엔 우리가(미국이) 한국에서 세균전을 벌였다는 생각을 전면 거부했다. 니덤이 공산주의에 편향됐다고 믿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니덤은 훌륭하고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며 기념비적인 학자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펼쳤다는 주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당혹스럽고 수치스런 마음으로 당시 내가 믿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 지금은 매우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엔디콧&해거먼, 291쪽). 

▲ 1952년 8월 ISC 조사위원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보고서를 발표하는 모습. 사진 가운데 팔짱을 낀 이가 조사단의 중심인물인 영국의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 ⓒISC

"세균전 계획, 1951년 합참에서 짰다" 

ISC의 활동 가운데는 포로로 잡힌 존 퀸 중위를 비롯한 미군 비행사 4명과의 면담도 있었다. 4명 모두 미 공군 중위였던 포로들은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음료를 마시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서너 시간씩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ISC조사단에게 '세균전을 펼쳤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의 진술에 따르면, '옳지 못한 것은 알았지만 군인이라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했다. 자료사진들을 보면, 포로가 밝게 웃는 모습도 보인다(이들은 포로교환으로 풀려난 뒤 진술을 뒤집고 '세균전 따윈 없었다'고 주장했다). 

공산권에선 미 공군 포로들이 남긴 자술서를 세균전 증거로 내세웠다. 자백 또는 증언 형식으로 자술서를 내놓은 공군 포로는 모두 36명이었다. 이 가운데 계급이 가장 높은 이는 프랭크 슈와블 대령(미 제1해병 항공비행단장)이었다. 1952년 7월 격추돼 포로가 된 그는 공산측 방송에도 나와 마이크 앞에서 그가 관련된 세균전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의 자술서엔 하급장교라면 알기 어려웠을 고급정보가 보인다. 

[한국전쟁에 있어서 일반 세균전 계획은 1951년 10월 합동참모본부에서 이뤄졌다. 참모본부는 극동군총사령관(당시 리지웨이 대장)에 의해 소규모 실험적 단계로 시작되었던 세균전 규모를 한반도(북한) 전체로 확대하도록 건의했다. ···이들 지역은 최소 10일 간격으로 재오염시킬 예정이었다. 작전은 콜레라 폭탄을 사용해 6월 첫 주에 개시됐다. 그 뒤 황열병, 티푸스에 의한 오염작전이 계획되고 있었다](데이비드 콩드, <한국전쟁 또 하나의 시각> 2, 과학과사상, 1988, 360-361쪽). 

슈와블 대령의 자술서 내용을 책에 옮긴 미 역사학자 데이비드 콩드는 1946년부터 연합군총사령부(GHQ)의 문관으로 일본 도쿄에서 근무했었다. 맥아더 장군이 전범 우두머리인 히로히토 일왕과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미국의 일본점령정책에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품게 됐다. 1947년 GHQ를 떠난 그는 패전 뒤 미 군정 아래의 일본, 좌우 갈등과 전쟁의 격동기를 맞았던 한국 등 동아시아 정치사를 비판적으로 다룬 책을 여러 권 남겼다. 

슈와블 대령이 '일반 세균전 계획은 1951년 10월 합동참모본부에서 이뤄졌다'고 밝힌 내용은 포로가 된 앤드류 에반스 대령의 입에서도 확인된다. 미 전쟁기획국 출신인 에반스 대령은 1953년 중국 인민지원군의 대공포에 격추돼 붙잡혔다. 그는 '한반도에서의 생물학전(세균전)은 참모본부가 인편으로 리지웨이 장군에게 관련 명령을 전해 착수됐다'고 털어놓았다. 슈와블 대령과 에반스 대령이 리지웨이 장군에게 세균전 관련 대면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엔디콧&해거먼, 194쪽 참조). 

▲ ISC 조사위원들이 격추돼 포로로 잡힌 존 퀸 중위를 면담하는 모습. 조사단은 모두 4명의 미군 포로와 면담하면서 이들이 털어놓은 세균전 사실을 확인했다(맨 오른쪽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존 퀸 중위). ⓒISC

세균폭탄 떨어뜨린 조종사, "명령은 명령" 

1952년 4월에서 7월 사이에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들도 한반도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들의 말을 모아보면, 세균폭탄을 일본에서 가져왔고, 공식 보고로 세균탄을 가리킬 때는 '불발탄'이라 불렀고, 비행사와 탑승원 사이에서도 '세균탄'을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비밀을 지킨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했고, 이를 어길 경우 군법회의에 넘겨질 것이라 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콩드의 글을 다시 보자. 

[세균전에 종사하는 비행사의 사기는 대단히 낮았다. 그들은 기지로 돌아오면 네이팜과 세균 투하의 임무를 잊으려고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것은 무자비한 군대의 명령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명령은 명령이다!"](데이비드 콩드, 363쪽). 

위 문장 끝에서 '명령은 명령'이란 표현은 세균전에 투입된 미군 조종사들뿐 아니라 군인이라면 지켜야 할 일반적 의무로 여겨진다. ISC보고서('니덤 보고서')에 실린 미군 조종사의 자술서에도 그런 내용이 보인다. 존 퀸 중위의 자술서에 나오는 한 대목. 

[우리가 비행기를 타러 갔을 때 경비병을 만났다. (비행기 날개 쪽에 있는 폭탄이) 세균 폭탄(germ bombs)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경비병은 날개 폭탄들은 잘 관리(포장)돼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비행기를 점검할 때 항법사가 "비행기 날개폭탄에 어떤 병균도 없다"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고, 나는 "명령은 명령이니..."라고 말했다](ISC 보고서, 614쪽). 

정전협정(1953년 7월27일) 뒤 포로교환으로 풀려나 미국에 돌아가면서 존 퀸 중위를 비롯한 포로들은 진술을 뒤집었다. 세균전 자백은 '강요'에 따른 것이라며 '세균 살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한국전쟁 기간 중에 펼쳐졌다는 세균전 의혹은 (한쪽에선 '사실'이라 주장하지만) 당사국인 미국이 '사실이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침으로써 논란으로 남았다. 

다음 글에서는 세균전이 실제로 있었다고 여기는 캐나다 요크대학의 스티븐 엔디콧, 에드워드 해거먼 교수의 주장과, '세균전은 없었고 공산권의 선전이었다'는 밀튼 라이텐버그(메릴랜드대 국제안보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의 반론을 중심으로,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을 더 살펴보려 한다.(계속)

경실련 "총선 결과가 의대 증원 심판? 의사단체 후안무치 기찰 따름"

논평 내 강경 비판…"특권 지키려 의료대란 일으킨 당사자 적반하장"

이대희 기자  |  기사입력 2024.04.15. 19:00:00
 
 

4.10 총선의 여당 참패를 두고 대한의사협회(의협) 등이 정부의 의대 증원안을 원점 재검토하라는 민의로 해석한 가운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를 "민심 왜곡"으로 규정하고 "의사집단의 유아독존적 사고"가 반영됐다고 일침했다.

15일 경실련은 논평을 내 총선 후 의협이 내부 잡음을 정리하며 의대 증원 저지를 위해 나서는 양태를 두고 "총선 결과를 의대 증원에 대한 민심으로 해석하고 증원 저지를 위해 ‘원팀’으로 결속하는 의료계의 행태에 기가 찰 따름"이라고 개탄했다.

경실련은 "여당의 총선 대패는 윤석열 대통령의 불통과 미숙한 국정운영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의대 증원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라는 의료계의 해석은 특권 지키려다 지금의 의료대란을 만든 당사자의 적반하장이자 후안무치한 발상"이라고 질타했다. 

경실련은 그간 "시민사회·소비자·환자단체들은 지속적으로 정부에 의대 증원 정책 추진을 요구했다"며 "정부의 일방적 증원 규모 결정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의료계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번 사태의 핵심 책임은 "지난 4년간 의대 증원을 부정하며 논의를 거부했던 의사단체에 있다"고 강조했다.

경실련은 "의사단체의 실력행사로 정책이 지연되거나 중단된 것은 이번만이 아니"라며 "2023년부터 시행된 비급여 보고제도 역시 2020년 국회에서 법 통과 이후 의료계의 반대로 정책 집행이 2년이나 지연"되는 등 "여야 합의로 국회의 정상적 절차를 거친 정책임에도, 의사단체가 반대하면 정책 추진이 지연되거나 시작도 못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고 밝혔다. 

 

이어 경실련은 "불법 행동으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불편을 초래한 의료계는 사태 파악도 못하고 총선 결과를 악용"하고 있다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의사의 본분은 뒷전인 채 오직 특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입장을 관철하려는 유아독존적 사고의 극치"라고 분개했다. 

또 "대화 주체로서 사회적 갈등 해소에 나서야 할 의료계는 선거 전에는 증원 규모 조정도 가능하다더니 여당의 선거 참패를 계기로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고 "사직 전공의들은 정부의 증원 정책으로 피해를 봤다며 복지부 차관을 직권 남용 등으로 고소한다"며 "이렇게 특권의식에 취해있는 의료계 행태를 국민이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 하나"고 탄식했다.

경실련은 "의대 증원은 의사 집단행동으로 한 차례 중단됐던 사안"이라며 "더는 정부가 의료계에 휘둘려서 정책 집행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아울러 경실련은 정부도 이 사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무엇보다 가장 큰 실책은 법적 근거도 없고 비민주적이며 폐쇄적인 의․정 양자 간 협의체 구조를 2년간이나 지속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2025년 입시부터 증원된 의대 입학정원을 모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지 않다"며 "윤석열 정부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선거로 주춤했던 의대 증원 추진을 조속히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택우 의협 비대위원장과 임현택 의협 차기 회장 당선인이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열린 브리핑 도중에 포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쟁·능력주의·공정 '야만의 트라이앵글' 깨야 한국의 미래가 있다"

[프레시안 books] 김누리 <경쟁교육은 야만이다>

전홍기혜 기자  |  기사입력 2024.04.07. 05:07:39 최종수정 2024.04.07. 12:07:46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등을 통해 '한국형 불행'의 근원을 제시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김누리 중앙대 교수의 신간 제목이다.

경쟁 교육은 야만…오만한 엘리트와 열등감을 내면화한 대중을 양산한다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OECD 국가 중 꼴찌(2021년), 청소년 자살율 1위 등 한국의 극심한 경쟁교육의 폐해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만 너무 과한 표현이 아니냐는 지적에 김누리 교수는 2일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제 표현이 아니고 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명이라고 평가 받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입니다. 이는 독일 68세대가 교육 개혁을 추진할 때 가장 중요한 모토였습니다. 독일에서는 당시 히틀러의 역사, 아우슈비츠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파시즘적 세계관의 핵심은 첫째, 경쟁, 둘째 우열, 셋째 지배입니다. 경쟁을 통해 우월한 자가 지배를 하는 게 자연의 질서이자 인간사회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한국 교육을 보세요. 경쟁, 우열, 지배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12년 동안의 한국 교육을 통해 성숙한 민주 시민이 길러질 수 있을까요? 위험한 파시스트를 길러내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라고 봐요." 

'학벌'이 새로운 신분, 계급, 특권을 만드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은 12년간의 치열하고 소모적인 학습노동에 시달리며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나뉜다. 미성숙하고 오만한 엘리트와 열등감과 모멸감을 내면화한 대중들을 양산하는 파시즘적 교육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리기 힘들 것이라고 김 교수는 단언한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 ⓒ프레시안(김봉규)

경쟁교육은 아이들을 무능하게 만들어…한국 대학은 너무 너절하게 죽었다 

김 교수는 경쟁교육이 이처럼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고도의 능력마저 이제 기계가 대체하는 것입니다. 최근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에 어떤 교육을 해야 하나? 너무 명확하죠. 기계로는 대체할 수 없는 능력,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첫째 사유하는 능력, 둘째 창조하는 능력, 셋째 비판하는 능력, 넷째 공감하는 능력이에요. 저는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4가지 능력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 줄 세우기를 합니다. 경쟁 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비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무능하게 한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서 암기를 통해 등수를 매겨야 하는 이유는 대학 입시 때문이다. 그러나 살인적인 경쟁을 뚫고 들어간 대학은 과거와 달리 '비판적 지식인을 양성하는 고등 교육 기관'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이 대학까지 소유하게 되면서 완전히 '탈정치화된 대학'의 현재 모습에 김 교수는 "대학이 죽어도 너무 너절하게 죽었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대학이 자본의 노예가 된 현실은 대학 캠퍼스의 모습을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연세대에서 청소 노동자들, 경비 노동자들이 시위를 한다고 학생들이 고발하고 민사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이것 자체가 한국 교육이 얼마나 막장이 되었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독일을 방문해 대학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학생들이 끊임없이 정치, 사회적 문제와 관련해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나눠줍니다. 지금 한국 대학 캠퍼스에 넘쳐나는 유인물들은 오로지 취업 정보 뿐입니다." 

경쟁, 능력주의, 공정…야만의 트라이앵글 

 

경쟁교육이 문제라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으면서도 왜 우리는 바꾸지 못할까? 김 교수는 "경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테리 이글턴 옥스퍼드대 교수는 이데올로기 연구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불행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일에 대한 탐구’라고 했어요. 저는 이 말이 정곡을 찌른다고 봅니다. 한국인들은 지금 자신의 불행에 스스로를 내던져요. 경쟁 이데올로기 때문입니다. 경쟁의 ‘결과’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되고, 경쟁의 ‘과정’은 공정 이데올로기에 의해 합리화됩니다. 경쟁, 능력주의, 공정 이데올로기가 강고한 삼각체제를 이루고 있어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한국 사회를 이런 야만사회로 만들어놓은 근원적 뿌리입니다. 저는 이를 책에서 '야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대학 입시·서열화·등록금 폐지, 불가능하다고? 독일과 프랑스를 보라 

경쟁교육을 통해 불행을 내면화한 아이들이 과연 어른이 되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이들이 타인의 행복을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이라는 현상은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이기도 하다.

살인적인 경쟁 교육을 바로잡기 위해선 ‘개혁’으로는 부족하고 ‘혁명’이 필요하다는 김 교수는 대학 입시 폐지, 대학 서열화 폐지, 대학 등록금 폐지 등을 나아갈 방향으로 제시했다. 

"한국에서 대학 입학시험을 없애자고 하면 이게 대체 가능하냐고 묻는데, 유럽에서 대학 입학 시험을 보는 나라가 어디 있나요? 독일은 '아비투어'라고 고등학교 졸업 시험만 보고, 이 시험에 90% 이상이 붙습니다. 합격하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원하는 때에 갈 수 있어요. 심지어 30, 40대에 대학에 가는 사람도 많아요. 물론 의학과나 심리학과 등 학생들이 몰리는 과는 정원제한을 둡니다. 이런 경우에도 과거엔 추첨으로 선발하다가 최근엔 아비투어 성적을 제한적으로 반영하기도 합니다. 

독일만이 아니라 프랑스도 '바칼로레아'라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이자 대학 입학 자격시험만 봅니다. 독일처럼 대학 서열화도 없습니다. 우리처럼 대학 서열화가 있는 나라는 주로 영미권 국가들이지요.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모델은 국가가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고등교육까지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게 성숙한 사회라는 인식을 공유합니다. 그러니까 대학을 나왔다, 어느 대학을 나왔다가 자기 우월감이나 열등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김 교수는 교사들의 정치 참여 금지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법 개정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OECD 38개국 중에서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지금 여의도에 교사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습니다. 과거의 교사가 두 분 있을 뿐이지요. 지난번 독일 의회는 640명 의원 중 81명이 전현직 교사였습니다. 독일 의회를 구성하는 직업군 가운데 교사는 두 번째로 많은 의원을 배출한 직업군입니다. 한국은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1963년부터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주 정부에서 당연히 이걸 복원시켰어야죠." 

'이미 경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한국에서 교육 혁명이 가능한 일이냐고 묻자 김 교수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적은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무력감입니다.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이 있어야 그쪽으로 가죠. 제가 이런 이상적인 방향과 사례를 계속해서 얘기하니까, 이제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으면서도 서서히 새로운 교육을 꿈꾸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김누리 지음, 해냄 펴냄. ⓒ해냄

- <무제목국경도> 이조선 영조 26 년 편찬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

소장: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고지도/ 제목- 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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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7 . 2

  
  최성재
  
  
   [신라의 정통성에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때는 언제인가]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한국의 온갖 문제점을 찾아내려는 환원주의자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사대주의와 패배주의와 일제식민지배와 분단과 군사독재를 몽땅 신라에게 돌리고, 고구려를 숭상하며 중국과 일본을 압도하는 동이족의 대제국을 꿈꾼다. 그러면서 스스로 국가의 통일을 위해 하는 일은 16살 관창이 한 것의 100분의 1도 않는다. 말만 우렁찰 뿐이다. 혀만 날카로울 뿐이다.
  
   한국인 스스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욕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의 일이다. 불과 100년도 안 된 일이다.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따른 것이다. 일제하에서 그것은 한국인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주기도 했지만, 해방 후에는 미래에 대한 환상과 과거에 대한 환멸을 심어 주는 역할이 커서 이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이 한국에는 재야의 민족사관으로, 북한에는 주체사관으로 계승되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남북 국수주의자들의 의기투합]
  
   제일 큰 문제는 한국의 자칭 민주세력 중 일부가 좌경화되면서 김일성의 가문을 회칠하기 위해 만든 주체사관을 맹종하는 것이다. 북한이 한국에 대해 허무맹랑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단지 지역적 위치가 옛 고조선과 고구려 땅의 일부임을 근거로 터무니없이 신라를 욕하고 고조선과 고구려를 높이 받드는 것에 엔돌핀이 솟아나서, 그들은 김일성의 독립투쟁과 친일청산, 평등 사회 구현 등을 곧이곧대로 믿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정통성과 업적을 매질하고 짓밟는 데 무한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김구와 장준하를 신처럼 떠받들며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통성과 업적을 찬양하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 이들 자칭 남북의 ‘정통’ 민족세력들은 외세를 배제하고 내부의 사대주의자와 수구보수세력을 거꾸러뜨리고 남북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고구려는 신라에 통합되어 오늘에 이름]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제멋대로 역사를 고쳐 쓰는 지극히 유치한 수작들이다. 고구려는 70년에 걸쳐서 400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두 제국 수와 당을 상대로 20세기의 두 세계대전에 못지 않게 큰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자국만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도 지켜 주었지만, 마침내 힘이 고갈되어 멸망했다. 역사적 임무를 충분히 다한 것이다. 고구려는 한민족의 긍지이다.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외교 실패였다. 이 외교실패는 오늘날 북한이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이 어리석은 행렬에 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이 구국의 일념으로 가담하고 있다.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당으로 원군을 청하기 전에 642년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연개소문은 신라의 생명줄인 한강유역을 되돌려 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로 보기 좋게 거절하고 왕족인 그를 아예 감금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춘추는 거짓 약속을 하고 풀려난 다음에 고구려의 갖은 방해책동에도 불구하고 직접 서해를 건너가 당의 군사를 빌려 올 수밖에 없었다. 당도 645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참담하게 패한 후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에 신라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환단고기에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삼한일체론을 들먹이며 고구려가 수나라와 싸울 때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주고 기다렸다가 중원의 당을 빼앗아 분리지배하자는 제의를 했다고 씌어 있다는데, 이건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허구이다. 왜냐하면 김춘추가 찾아갔을 때 수나라는 망한 지 28년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강한 연개소문은 세계와 미래를 보는 눈이 흐릿했던 데다가 강국 고구려에 대한 자만 때문에 고구려를 망국의 길로 이끌었고, 약한 김춘추는 세계정세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밝았던 데다가 신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겸손과 마음속으로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히지 않는 자존심과 호랑이 굴도 맨몸으로 찾아가는 용기 때문에 삼한일통의 기틀을 마련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아들들간의 내분으로 너무도 우습게 망한 후에 그 지배족은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한족에 흡수되거나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귀순했다. 그리고 일부는 발해를 세웠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대거 고구려 후손은 고려로 귀순했지만, 나머지는 요와 금이 세워지면서 우리 역사에서 멀어졌다. 다시 말해서 발해까지는 만주가 우리 역사의 현장이었지만, 발해의 멸망 이후는 고려 땅에서만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세 나라 후손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단일민족을 형성했기 때문에, 만주는 싫든 좋든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만주가 우리 땅이라면 일본도 우리 땅인가]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삼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게 일본이지만, 중국의 재통일과 신라의 삼국통일,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일본도 독립왕국을 세웠기 때문에, 만주가 우리 역사에서 떨어져 나갔듯이 일본도 우리 역사에서 떨어져나갔다. 고구려를 생각하며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이불 속에서 고함을 지르고 싶으면, 그 기개 그대로 일본도 우리 땅이라고 현해탄을 바라보고 소리소리 질러 보라. 지나가던 개도 단박에 정신병자임을 알아보고 비웃을 것이다.
  
   [역사 결정론의 함정]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역사 가정의 환타지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한 번의 역사적 사건으로 그 후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역사 결정론의 함정에 스스로 빠진 자들이다.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그 후 우리나라는 중국과 늘 맞먹거나 중국을 압도하거나 중국을 종의 나라로 한 1000년 부려먹었을 거라는 달콤한 환상에 젖는다. 돈키호테 수준의 코미디다.
  
   그러면, 대제국 로마는 왜 멸망했으며, 멸망한 후 무려 1400년이 되어 이태리는 겨우 통일했는데, 그것도 기껏 로마제국의 광대한 영토는 어디 두고 이태리 반도만 간신히 차지했을까.
  
   그 강대하던 당 나라는 왜 망했으며, 송은 왜 요와 금과 원에 시달리다가 끝내 멸망하고 중원을 원이 차지했을까. 원은 왜 100여년 만에 망했을까. 원을 물리친 명은 왜 옛날에 고구려의 한 피지배족에 불과했던 만주족에게 멸망했을까. 그 어떤 나라든 흥망성쇠를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라는 600년 내전을 종식시켰다]
  
   신라는 엄청나게 큰 일을 했다. 뛰어난 군사외교적인 안목으로 세계 최강의 당과 손을 잡아 사비성과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본색을 드러내는 당과 무려 8년에 걸친 국가 총력전으로 중국인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쫓아냈다. 당이 물러난 것은 토번과의 전쟁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 태종이 내전에 시달리느라 싸움 한 번 못하고 돌궐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에, 마침내 힘을 길러 북쪽과 서쪽의 오랑캐를 완전히 섬멸해 버렸기 때문에 고구려 외에는 당을 위협할 나라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국경 지대를 노략질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신라가 한 일 중 가장 빛나는 것은 600년 내전 종식이다. 단군의 자손끼리 600년에 걸쳐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피를 흘리던 전쟁을, 동족상잔을 후삼국 시대와 6󈸩 동란 때 외에는 아예 뿌리를 뽑아 버린 나라가 신라였던 것이다. 1300년 평화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한민족은 위대한 신라 덕분에 외국과의 전쟁 외에는 전쟁이란 것을 모르고 살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 어떤 민족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의 민족으로 거듭났다. 국경 지대의 약탈을 빼면, 외국과도 큰 전쟁은 통일 신라 시대 이후에는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통일신라시대는 당을 내쫓은 후 국가간의 전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큰 전쟁은 고려 때에 제일 많았다. 요나 원과 큰 전쟁을 치렀고 왜구의 잦은 약탈에 시달렸다. 그러나 원과의 전쟁 외에는 모조리 승리했기 때문에 고려는 민족적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조선도 500년 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잇달아 겪은 16세기 말 17세기 초 외에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신라가 일찌감치 통일 국가를 이룬 덕분이다. 일본시대에 한국인을 열등감에 시달리게 하기 위해 일본의 역사가들이 과장해서 935회니 뭐니 하면서 국경에서 말 한 마리 잃은 것까지 다 포함하여 전쟁 횟수를 엄청 늘려서 마치 우리나라가 수천 년 동안 이민족에게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렸던 것처럼 세뇌했는데, 아직도 이를 철석같이 믿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김을 자랑삼는 한국인이 너무도 많다. 그러면서 ‘한민족이 최고야’를 되뇐다. 중증의 도착 증세다.
  
   [만주를 되찾지 못한 것은 고려와 조선과 북한의 책임]
  
   만주를 되찾지 못한 것은 신라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고려의 책임이요, 조선의 책임이다. 왜 그 비난을 신라가 덮어써야 하는가. 신라는 원래 땅을 3배 이상 늘렸다. 그러나 고려는 신라가 물려준 땅의 10분의 1도 넓히지 못했다. 조선도 세종대왕 때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한 이후 땅을 한 뼘도 넓히지 못했다. 한국과 북한은 더하다. 순전히 미국의 힘으로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났지만, 초등학교만 나와도 너도나도 입만 열면 신라를 욕하지만, 간척한 것 외에는 땅을 넓힌 것도 없고 통일도 우리 힘으로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평화통일하는 것은 백년하청이다. 결국 통일도 미국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신라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북한은 코미디 공화국-그러나 아무도 웃지 못한다]
  
   북한은 웃겨도 보통 웃기는 게 아니다. 협동농장만 해체하면 당장 한 명도 안 굶겨 죽일 수 있고, 필리핀이나 인도나 멕시코처럼 북한 주민을 아무런 간섭하지 말고 외국으로 내보내 달러를 벌어서 조국으로 송금하게만 해도 중국 부럽지 않게 살 수 있고, 원자탄 개발하는 돈과 김일성 동상 만들고 관리하는 돈만 풀어도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오로지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구려 정통성’이니, ‘주체의 나라’라느니, ‘지상낙원’이라니, ‘우리는 행복해요’라느니, 하면서 적화통일을 달성하여 너무너무 잘 사는 한국을 집어삼킬 궁리만 하고 있다.
  
   한국의 이승만이 미군의 대위로 집권했다고 해 보자. 한국인들과 북한 공산당은 얼마나 길길이 뛸 것인가. 이승만이 김일성보다 독립운동을 100배나 했지만,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간 데 없고 아무리 내세워 봤자, 90% 국내 갑산파의 도움으로 함경도의 벽지 보천보에서 꾸벅꾸벅 졸던 일본 순사 몇 명 죽인 것을 마치 100만 일본대군을 물리친 듯이 ‘피바다’ 가극을 만들고 김일성 혁명역사를 날조하여 독립운동을 저 혼자 다한 듯이 60년을 한결같이 북한주민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친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뼛속까지 절은 사대주의자]
  
   김일성만큼 사대주의에 뼛속까지 절은 자가 없다. 그런 자일수록 주체사상을 내세운다. 일본헌병의 자손이 친일파 척결에 앞장서서 독립군의 후손인 척하는 거나 마찬가지 심리이다. 소련군에 빌붙어 정권을 잡았을 뿐 아니라 그는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애걸하여 그들의 무기와 작전으로 소련의 힘을 빌려 인민군을 창설하여 동족상잔을 일으켰다. 이런 자가 신라가 당의 힘을 빌려 통일한 것이 사대주의라고 이를 바득바득 간다. 한국의 지식인 중에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이런 자들이 득실거린다. 군대와 외교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북한이 고구려를 조금이라도 닮고 싶으면 한국이 아니라 만주로 쳐들어가야 한다. 한국을 삼키기 위한 속셈을 감추기 위해 마치 미국과 전쟁을 벌일 듯이 60년 동안 줄기차게 해 대는 헛소리는 제발 그만하고 만주로 쳐들어가서 간도와 백두산이라도 찾아오면, 한국도 기꺼이 도와 줄 것이다. 중국을 상대로 전쟁한다는 것은 이불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못한다. 철두철미한 사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온상은 북한]
  
   졸고 ‘한국의 일제청산과 북한의 일제계승’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친일파청산도 겉과 속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한국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친일청산을 확실하게 했다. 반민특위 유산이라는 것 하나만 갖고, 한국의 정통성을 짓씹고 북한의 정통성을 흠모하는 자들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공부는 죽으라고 안 하고 누가 일러 준 정답만 달달 외면서 귀를 틀어막고 눈을 부라리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으니까.
  
   [정통성은 유교의 잔재]
  
   정통성에 목을 매는 것은 유교 문화의 잔재이다. 자신과 비슷한 무리가 정치든 학문이든 언론이든 권력을 잡기 위해 내세우는 가면일 따름이다. 실은 한국이나 북한이나 권력이 곧 정통성이다. 권력만 잡으면 제멋대로 스스로 정통성을 독점한다.
  
   공자도 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를 멸망시킨 탕왕과 은을 멸망시킨 주공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것은 잘못이나 그 후에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 예를 확립한 것은 잘못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백성을 버린 군주는 하늘이 버린다고 보고, 천명이 바뀌었다고 하여 탕왕과 주공을 정당화하고 그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도 그 이상은 내다보지 못했다. 춘추시대는 다시 주 왕실을 중심으로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그것이 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후에 맹자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과감히 혁명을 옹호했다. 그는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예가 필요함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그 정도에 그쳤다.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무기체제의 발달, 그리고 인구의 증가 등으로 왕도정치만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가 없었다. 제자백가가 다 필요했다. 특히 중원의 400년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군대와 새 시대에 맞는 행정체계를 구축할 법가의 사상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한의 정통성: 공자의 덕치와 진시황의 법치가 결합하다]
  
   마침내 천하의 인재를 우대하고 이상적 덕치보다 현실적 법치를 앞세운 진이 중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법이 만능이 아니었다. 유방이 세운 한이 비로소 400년 평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하은주의 제도인 봉건제에서 예로 상징되는 덕치에 곧 공자와 맹자의 덕치에 진시황의 군현제에서 실현된 법치를 합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봉건제와 군현제를 합친 군국제이다.
  
   비로소 정통성 문제가 일단락된 것이다. 천하대란을 종식시키고 백성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하고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게 한 군주가 곧 정통성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피를 이어받은 자가 곧 정통성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도 폭군이나 암군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고 천하대란이 일어나면, 정통성은 또 오리무중으로 빠져든다.
  
   [오랑캐에게 400년이나 지배당한 한족의 정통성 문제]
  
   중국인들이 그 후에도 정통성 문제로 정신적 공황을 겪은 적이 두 번이나 있다. 한번은 몽골족의 원이고 또 한 번은 만주족의 청이다. 도합 400년을 한족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도대체 누가 정통성을 주장할 것인가. 이 때 나온 것이 송의 성리학이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이었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고도 송의 성리학자는 끝내 정통성은 한족에게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송은 물론 당이나 한보다 위대한 원의 치세를, 징기스칸이 자신도 법의 아래에 있다고 함으로써 오늘날의 중국 못지 않은 법치를 확립한 원의 치세를, 보통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만 해도 2만개가 넘었던 근대국가와 가장 흡사한 원의 빛나는 치세를, 그들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한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착오적인 성리학적 정통론은 원이 멸망한 후 명에서도 부활되었다. 그런데 그 명이 가렴주구로 백성을 개돼지 취급하다가 또 한 줌밖에 안 되는 만주족에게 무릎을 꿇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정통성이 있는가. 모택동에 의해서 한족이 고구려가 멸망한 후 중국과는 전혀 상관없었던 만주를, 당이 신라와 힘을 합쳐 평양을 함락한 후 안동도호부니 뭐니 하면서 잠시 거들먹거렸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과 힘을 합쳐 악착같이 덤벼드는 신라한테 8년간 시달리다가 끝내 쫓겨나고 당과 신라가 싸우는 사이에 힘을 기른 대조영이 당에게 반기를 들고 발해를 세우면서, 겨우 요서 땅을 차지했을 뿐 중국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만주를, 만주족에게 약 300년간 지배당한 덕분에, 인구가 너무 적었던 만주족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만주를 공짜로 얻어서 중국을 통일한 후에 중국은 또다시 정통성 문제에 봉착했다.
  
   [중국의 모든 통일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한 중국]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봉건귀족을 물리치고 공산당이 외세를 몰아내고 통일했기 때문에 공산당의 최고 우두머리가 당연히 정통성을 갖는 것이었다. 이전의 왕조와 다른 것은 세습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산당 안에서 지도자가 나오면 된다. 그러면 원과 청의 정통성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도 한당송명과 똑같이 정통성을 갖는다. 통일왕조는 모조리 정통성을 갖는다. 공산당보다는 한 단계 아래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 역사의 많은 부분과 중국의 많은 지역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서북공정이니 동북공정이니 하면서, 역사에 등장하는 중국 주변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중국에 편입시킨다. 고구려까지 자기 나라요, 자기 역사라고 주장한다. 100년 앞을 내다보고 북한과 한국까지 변방의 역사로 집어넣을 속셈이다. 중화주의가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두고 볼 일이다.
  
   이처럼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특히 등소평 이후에 전통을 정통성 못지 않게 중시하고 있다. 모택동 치세에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다가 국가가 거덜난 후에 크게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한민족의 정통성]
  
   중국에 비하면 한국의 정통성은 아주 단순하다. 35년간의 일제시대 외에는 같은 민족끼리의 지배와 피지배였으니까. 고려 말기에도 우리나라는 원의 간접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왕조도 겨우 신라, 고려, 조선 셋밖에 없다. 문제는 정통성 에 대해 처음부터 시대착오적이었던 성리학을 조선시대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데 있다. 융통성이 전혀 없다. 그것은 현대의 남북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정권 잡은 자가 장땡이다.
  
   [정통성의 핵심은 국민]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른 나라나 정통성의 해답은 이미 5000년 전에 답이 나왔다. 백성을, 국민을 잘 살게 하는 정권이 정통성이 있다. 정치는 결과지 동기가 아니다. 말로는 국민을 다 같이 잘 살게 한다고 하고선 국민을 80% 거지, 10% 죄수, 10% 도둑으로 만든 정권은 정통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북한은 북한주민을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으니까, 전세계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5000년 역사상 정통성이 가장 적은 정권이다. 대신에 한국은 해방 당시 아프리카의 가장 못 살던 나라보다 못 살았던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굴지의 민주 국가로 끌어올렸으므로 대부분의 역대 국가 원수는 정통성이 있다. 있어도 대단히 많이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저 혼자 잘난척하는 정권이 더 문제다. 경제든 정치든 이전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루면 누구나 박수를 칠 것인데, 하라는 일은 않고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는 일에, 잘난 남을 헐뜯는 일에, 앙심을 품은 과거사 캐는 일에만 열중하고, 주자학에 정신적 노예가 되어, 동족을 학살하고 굶겨 죽이고 개돼지 취급하는 데 크나큰 희열을 느끼는 북한의 정권에 정통성 콤플렉스를 갖는 정권이 가장 큰 문제다.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역사는 이들에게서 정통성을 완전히 박탈할지 모른다. 예나 제나 정통성의 기준은 안보와 경제 곧 부국강병이기 때문이다.
  
   (2005. 7. 2.)

‘한자의 탈을 쓴 일본어’ 등 방송·법률용어 순화 힘쓴 박갑수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정충신 기자입력 2024. 3. 30. 11:12
 
2015년 세종문화상 수상 당시의 박갑수 서울대 명예교수. 문화체육관관부 제공

경범죄처벌법 제1조 14 ‘음용(飮用)에 공(供)하는 정수(淨水)를 오예(汚濊)하거나 또는 그 사용을 방해하는 자’ → ‘사람이 마시는 물을 더럽히거나 그 사용을 방해한 사람’(1983년 개정)

민사소송법 198조(재판의 탈루) ‘법원이 청구의 일부에 대하여 재판을 유탈(遺脫)한 때에는 소송은 그 청구의 부분이 계속(繼續)하여 그 법원에 계속(係屬)한다.’→212조(재판의 누락) ‘법원이 청구의 일부에 대하여 재판을 누락한 경우에 그 청구 부분에 대하여는 그 법원이 계속하여 재판한다.’(2002년 개정)」

 

알아듣기 어려운 경범죄처벌법·민사소송법 표현을 고치는 등 평생 법률·방송용어 순화에 애쓴 남천(南川) 박갑수(朴甲洙) 서울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가 지난달 23일 오전 6시 45분경 서울성모병원에서 만 8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유족의 네이버 블로그 글(‘소천을 알립니다’)에 따르면 "고인은 1년반 전에 낙상한 뒤 거동이 불편하던 차에 2월 22일 갑자기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가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영면"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본인의 소천 사실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한 달 뒤에 사회에 알리기로 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작성해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유족은 지난 26일에야 블로그에 별세 사실을 공개하고, 지인들이 추모 글을 쓸 수 있는 방명록을 마련했다.

1934년 8월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청주고, 서울대 사범대학, 동 대학원(국문학과)을 졸업했다. 1958∼1967년 이화여고와 서울사대부고 교사로 일하다 1968년 청주여대 조교수를 거쳐 1969년부터 서울대 국어교육학과에서 가르쳤다.

1980년 법제처 정책자문위원 제의를 받고 경범죄처벌법 조문을 쉬운 말로 바꾸는 데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법제처가 ‘법률 용어 순화집’ 6권을 펴내는 데 모두 관여했다. 1997년 대법원의 의뢰로 민사소송법 한글화 작업에 착수, 다음해 ‘공무소(公務所)’는 ‘공공기관’, ‘게기(揭記)하다’는 ‘규정하다’, ‘계쟁물(係爭物)’은 ‘다툼의 대상’, ‘해태(懈怠)하다’는 ‘게을리하다’, ‘수계(受繼)하다’는 ‘이어받다’로 각각 바꾸는 내용의 순화안을 제출했고, 이중 일부가 반영됐다.

1972년 MBC에서 ‘이것이 바른말’을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1985∼1987년 KBS 2TV ‘바르고 고운 말’에 출연하는 등 라디오와 TV에서 수십년간 우리말을 가르쳤고, 스포츠 중계나 광고의 외래어 남용 문제점을 지적했다. 1985년 KBS 시청자 불만처리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신문·잡지 등에도 ‘바른 말 고운 말’(동아일보), ‘우리말 산책’(중앙일보) 등 연재했다. 동아일보 연재를 보면 1994년 5월 12일자에선 스승의 날 노랫말 중 ‘참되거라 바르거라’는 ‘참되고 바르게 돼라’, ‘고마와라’는 ‘고마워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같은 해 7월7일자에선 방송 사극 ‘한명회’에 나온 ‘민초(民草)’라는 말은 한자의 탈을 쓴 일본말이어서, 조선조 세조 때에는 쓰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8월 18일자에선 ‘쓰레기 분리수거해 달라’는 어색한 표현이라며 ‘분리는 시민이, 수거는 당국이’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초 외에 출영(出迎)·하주(荷主)·입장(立場)·명도(明渡) 등이 모두 ‘한자의 탈을 쓴 일본말’이라고 한 것도 고인이었다.

 

서울대 사대에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지도자과정’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1995∼1996년 한국어국제화추진협의회 공동대표, 1996년 회장을 맡았고, 2001년 한국어세계화재단 이사로 활동하는 등 한국어 세계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중고교 한문·문학 등 교과서 집필에도 다년간 참여했다. 학문적으로는 문체론에 관심을 기울여 ‘문체론의 이론과 실제’(1977), ‘국어문체론’(1994), ‘현대문학의 문체와 표현’(1998) 등을 펴냈다. 1988년 도쿄대 도서관에서 춘향전 필사본을 찾아냈다.

국민훈장 모란장(1999), 세종문화상(2015), 대한민국 세계화 봉사대상(2019)을 받았다.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한 뒤 분당 봉안당 홈에 모셨다.

정충신 선임기자

chung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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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하다 붙잡힌 미 폭격기 승무원들은 생체해부 당했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입력 2024. 3. 30. 11:10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5]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⑭

미국 포로가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죽음을 맞이했는가는 논란거리다. 일본이 저질렀던 생체실험의 희생자들 가운데 조선 독립운동가와 러시아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 731부대는 만주 선양(瀋陽, 奉天)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2000명가량의 포로 가운데 일부에게 '세균무기에 백인 특유의 면역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생체실험을 했다(연재 62 참조).

여기까지는 사실로 확인된다. 하지만 그 생체실험으로 연합군 포로가 숨졌는지는 불확실하다. 731부대 본부에서처럼 '마루타'로 여러 독성 실험을 한 뒤 수술 칼로 몸을 가르는 끔찍스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군이 강한 적개심으로 연합군 포로들을 마구 다뤘고, 731부대가 세균무기 개발에 미쳐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생체 해부가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만주 포로수용소는 의혹으로 남았지만, 패전 무렵 일본 본토에서 미군 포로들을 마구 죽이고, 심지어는 생체 해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은 도쿄 대공습(1945년 3월10일)을 비롯해, 전쟁 후반부에 잇달았던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로 말미암아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됐고, 포로로 잡힌 이들에 대한 보복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공습 보복으로 8.15 당일에도 미군 처형

[1945년 6월19일 공습으로 인한 참담한 피해 상황은 서부군사령부 안에 구금된 미군 전폭기 탑승원에 대한 증오로 폭발했다. 공습 다음 날인 6월20일, 사령부의 검도(剣道) 유단자들이 사령부 뒤편의 후쿠오카 시립여자고등학교 교정에서 8명의 탑승원을 참살했다. 대낮에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참극이었다](東野利夫, <污名: 九大生体解剖事件の真相>, 文藝春秋, 1979, 67쪽).

윗글의 필자 도노 도시오(東野利夫)는 1945년 후쿠오카 규슈제국대 의과대학의 19살 신입생이었다. 밑에서 곧 살펴보겠지만, 그는 포로로 잡힌 미 B-29 폭격기 승무원 8명이 1945년 5월과 6월에 걸쳐 규슈제국대 의대 실습실에서 생체해부되는 참극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도노는 그 날의 끔찍했던 사건을 메모해 두었다가 훗날 <오명>(污名)이란 이름의 책을 펴냈다.

도노에 따르면, 그가 살던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한 큐슈지방에서는 1945년 초여름 포로로 잡힌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을 처형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도노가 두 눈으로 목격한 규슈제국대 의대에서의 생체해부 말고도 1945년 6월 29일에 8명(바로 위에 옮긴, 검도 유단자들의 척살 사건),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8월9일에 8명, 심지어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했던 8월15일 당일에도 17명의 처형이 이뤄졌다. 도노의 글을 보자.

[처형은 8월 9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흘 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진 날) 후쿠오카 남쪽 교외의 아부라야마 화장장 옆, 잡목림에서 행해졌다. 처형된 8명 모두 B-24 탑승원이었다. 또 패전한 8월 15일 오후 구금소에 남아 있던 탑승원 17명이 같은 곳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은 B-24 공습에 대한 보복이었다](東野利夫, 67쪽).

▲ 1945년 3월10일 공습 뒤의 도쿄 주거지역. 일본은 잇단 공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겪었기에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고, 포로를 마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石川光陽

잔혹한 르메이가 부른 적개심과 증오

이미 이 연재에서 살펴봤듯이,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은 엄청난 무차별 공습을 일본에 퍼부었다. 공습의 지휘관은 미 육군 제21폭격단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소장.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 또는 '도살자 해리스'(Butcher Harris)란 별명을 얻었던 아서 해리스(영국전략폭격기 사령관) 못지않은 호전적인 성격을 지녔다. 한국전쟁 때 미 전략폭격집단(SAC) 총사령관이었던 르메이는 "(한반도에서) 우리는 백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밖으로 내몰았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연재 40 참조).

 

르메이의 공습 명령에 따라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도쿄는 물론 나고야, 오사카, 고베, 요코하마를 비롯해, B-24 또는 B-29의 폭격을 받은 도시는 67개에 이르렀다. 일본이 얼마만큼 폭격으로 초토화됐는가'는 1945년 8월말 미군 선발대의 모습을 그린 존 다우어(MIT대 명예교수, 역사학)의 책 한 구절이 잘 말해준다.

[요코하마에 상륙해 도쿄로 가던 미군 부대원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도시의 폐허에 할 말을 잃거나 두 눈을 감아버렸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민음사, 2009, 46쪽).

전쟁 말기에 미군 폭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겨나자 일본인들의 적개심은 매우 컸다. 미군 포로를 때려죽이거나 생체해부하는 잔혹한 전쟁범죄 행위들이 일본 본토에서 벌어졌다. 규슈제국대학 의대 해부 실습실에서 B-29기 승무원 8명이 생체해부를 당하는 참극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다.

일본의 패망이 불을 보듯 뻔한 때였던 1945년 5월5일, 마리아나 기지로부터 출격해 폭격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B-29 폭격기 1대가 후쿠오카 남쪽 시골마을(오이타현 구즈미 남부의 산간 촌락)에 떨어졌다. 19살 난 학병이 몰던 전투기로부터 가미가제(神風)식 공격을 받고난 뒤였다. 탑승자 11명은 낙하산으로 탈출했지만, 현지인들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끝내 승무원 1명은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다른 1명은 자경단의 총에 맞아 숨졌다.

나머지 9명은 일본 육군 서부군사령부로 끌려갔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펼쳐질 경우, 후쿠오카를 비롯한 규슈 지역 방어가 서부군사령부에 맡겨진 임무였다. 그 무렵 일본군은 일반 연합군 포로와 B-시리즈(B-19, B-24, b-25, B-29) 전폭기 탑승원 포로를 따로 다루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이들을 데려가 심문했다. 군사 정보를 캐기 위해서였다.

도쿄 참모본부에서 내려온 비밀 전문이 미군 전폭기 포로들의 운명을 갈랐다. '포로로 잡힌 탑승원들 모두를 도쿄로 보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정보의 가치가 있는 기장만 도쿄로 보내라. 나머지는 군사령부에서 적절히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기장 마빈 왓킨스 중위만 도쿄로 압송돼 갔고 나머지 8명은 서부사령부 감방에 갇혔다.

"우릴 무차별 폭격했으니 죽어할 놈들이다"

서부군사령부(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육군 중장)는 군사재판을 거치지도 않고 B-29기 승무원들을 '전쟁범죄자'로 몰아 죽이려 했다. 그럴 경우 총살이 일반적인 처형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규슈의대 출신으로 서부군 사령부에 근무하던 코모리 타카시 군의관이 규슈제국대 의대 관계자들과 상의 끝에 '의학 쪽에서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5월17일부터 6월3일 사이에 B-29기 승무원들은 2명, 2명, 1명, 3명씩 나뉘어 모두 4회에 걸쳐 규슈제국대학 의대 해부 실습실로 끌려갔다. 건강진단을 받는 줄 알고 수술대에 누운 미군은 마취 주사를 맞은 뒤 깨어나지 못했다. 미군 포로를 의대까지 끌고 온 일본군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포로들의 피가 뽑혀 나가고 대체혈액 실험용 바닷물이 주사기 바늘을 통해 들어갔다(그 무렵 규슈제대 의사들은 대체혈액을 개발해달라는 일본 군부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마취로 의식을 잃은 미군 포로의 배에 해부칼이 닿았고, 폐와 심장, 간을 비롯한 신체기관이 하나둘씩 떼어내졌다. 그 끔찍한 생체실험과 해부에 앞장섰던 일본 의사는 규슈의대 출신의 코모리 군의와 이시야마 후쿠지로(石山福二郞) 교수, 2명이었다. 의대 신입생 도노는 수술대 바로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봤다. 4회에 걸친 생체해부 가운데 2회를 목격했다.

도노에 따르면, 해부를 이끌었던 이시야마는 '젊고 유능했던 의대교수'였다고 한다. 이시야마는 겁에 질린 채 해부실 안에 있던 제자들에게 "심장을 자르는 것도 꿰매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바로 가까이에서 생체해부를 지켜보던 일본군 장교는 이렇게 외쳤다. "이놈들은 우리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란 말이다."

(참고로, 일본 본토에서 미군 폭격기 승무원을 처형한 첫기록은 1942년 4월18일 둘리툴 편대의 일본 폭격 때였다. 제임스 둘리툴 중령이 이끈 16대의 B-25 경폭격기 편대가 도쿄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폭격했다. 연료 부족으로 중국의 일본군 점령지역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승무원 8명이 붙잡혔다. 그들은 일본으로 압송된 뒤 '민간 주거지역을 폭격한 전쟁범죄자'로 재판 받은 끝에 3명이 처형됐다.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의 보복으로 일본을 타격했다는 선전 효과를 내세웠고, 둘리툴 중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켰다.)

▲ 1945년 규슈제국대 의대 구내 실습실에서 생체해부로 죽은 미 B-29 폭격기 승무원들. 사진 속 11명 가운데 2명은 격추 당시에 죽고, 기장은 도쿄로 압송돼가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위키미디어

5명 교수형, 4명 종신형

의대 해부실에서 미군포로가 생체해부된 사건이 쉬쉬 하며 비밀에 붙여지긴 어려웠다. 도쿄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법무국 수사관들은 사라진 미군 승무원들의 행방을 캤다. 서부군사령부는 처음엔 "그들은 히로시마 포로수용소로 이송된 뒤 핵폭탄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둘러댔다. 어설픈 거짓말은 들통 나기 마련이었다. 5개월 동안의 조사 끝에 B-29기 승무원들이 의과대학에서 생체해부로 숨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관련자들은 붙잡혔고, 1948년 8월27일 요코하마(横浜)에서 군사재판이 열렸다. 전쟁범죄 현장을 목격했던 의대 신입생 도노도 GHQ의 조사를 받은 뒤 법정 증언대에 섰다. 주범 가운데 규슈대 출신 군의관 코모리는 이미 미군 공습으로 죽었고, 이시야마 후쿠지로 교수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요코하마로 이송되기 앞서 스스로 목을 맸다.

요코하마 군사재판 검찰관은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야만성'이라고 피고들을 꾸짖었다. 서부군사령부 소속 2명(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 사토 요시나오 대좌)과 규슈의대 교수진 3명(토리스 타로 조교수, 히라오 켄이치 조교수, 모리 요시오 강사)이 교수형을 받고 죽었다. 다른 4명에게 종신형이 내려졌지만, 이들은 1950년대에 일본 정부의 감형과 사면 조치로 모두 풀려났다.

의대 신입생으로 끔찍했던 범죄행위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도노는 산부인과 개업의로 지내면서 그날의 엄청난 충격을 잊지 못하고 내내 힘들게 살았다. 34년 뒤 <오명>(污名)이란 책 앞머리에 그는 '전쟁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적었다. 특히 '전쟁 말기의 분위기와 혼란은 의사들을 미치게 했다'고도 썼다(도노는 책을 낸 다음 해인 1980년, 도쿄로 끌려가는 바람에 혼자 살아남았던 기장 마빈 왓킨스를 찾아가 사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2021년 타계).

여기서 짚어볼 점 하나.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비롯된 피해를 떠올린다면, B-29 폭격기 승무원들의 생체해부가 이해나 용서가 될까. 어려운 일이다. 미군의 공습 그 자체가 전쟁범죄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했지만, 보복심리나 적개심이 그런 잔혹행위를 합리화할 수 없다. 어떤 그럴듯한 논리를 들이댄다 해도 마구잡이 포로 학살, 더구나 생체해부란 용서 받지 못할 전쟁범죄다.

전쟁범죄 반성 없는 일본의사회

이렇듯 전쟁의 광기 속에 인간성을 저버린 자들이 곳곳에서 피를 흩뿌리는 가운데 일본은 8.15 패망을 맞이했다. 일본 의사 모임인 일본의사회는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비롯해 지난날 일본 의사가 벌인 전쟁범죄에 대해 집단적으로 사과의 뜻을 나타냈을까.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규슈제국대학 의대에서 벌어진 미 B-29기 승무원 생체해부에 대해서 사죄와 더불어 용서를 빌었을까. 아니다. 침묵으로 지내왔다.

일본 의학계의 그런 분위기 아래 731부대 출신자들도 사죄와 용서를 빌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전쟁 중에 생체실험을 거듭하면서 얻어낸 자료를 바탕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따거나, 생체실험으로 갈고닦은 혈액의 동결·건조 기술로 혈액은행을 세워 한반도 전쟁특수를 틈타 떼돈을 벌기도 했다.

일본 의사 모두가 줄곧 과거사 문제에 나 몰라라 하며 파렴치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소수의 양심적인 의사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그 과정에서 저질렀던 비인도적 전쟁범죄를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왔다. '15년전쟁과 일본의학의료연구회' 소속인 다케우치 지이치, 하라 후미오 두 의사는 오사카 개업의 6200명이 모여 만든 오사카보험의협회 출신의 평화운동가들이다. 이 두 사람의 글은 일본의사회에 비판적이다.

[지금까지 일본의사회가 보여준 모습은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더구나 국가정책에 따라 일본군과 일본기업들이 강제동원한 '종군위안부'와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는 일본정부와 다를 바 없다. 이는 일본 각 지역의 의사회도 마찬가지다](15년전쟁과 일본의학의료연구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299쪽).

▲ 만주 하얼빈 남쪽 핑팡 옛 731부대 터에 자리한 ‘731부대 죄증진열관’.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이 ‘마루타’들을 생체실험한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김재명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

731부대 군의관들이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아 전쟁범죄 처벌을 비껴간 것과는 달리, 독일에선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으로 처벌이 있었다. 지난 연재 51과 52에서 살펴봤듯이, 1947년 8월19일 나치 의사들은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킨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로 처벌을 받았다(7명 교수형, 9명 장기 징역형).

731부대 일본 의사나 나치 의사가 저질렀던 생체실험은 끔찍한 전쟁범죄임에 틀림없다. 논란은 그 무렵의 국제사회에서 의사가 지켜야 할 윤리나 도덕적 기준이 제대로 마련돼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에서 나치 의사들은 '인체실험을 정당 또는 불법이라 가름하는 보편적 윤리기준이 국제사회에 세워져 있지 않다'면서 자신들의 행위는 '전시독일법에 따른 정당한 행위였다'고 우겼다.

이 재판의 검찰 쪽 의학 전문가로 미국의사협회에서 파견한 앤드류 아이비(1942-43년 미국생리학회 회장)는 반론을 폈다. "인체실험에 대한 규칙은 지금까지의 관습, 사회적 관례, 그리고 위료행위의 윤리에 의해 충분히 확립돼 왔다"고 반박했다. 의료윤리를 둘러싼 법정 공방 뒤 재판부는 나치 의사들의 뻔뻔한 주장을 일축하면서 나름의 의료윤리 기준을 판결문 뒤에 붙여 내놓았다. 그 문건은 앤드류 아이비가 중심이 돼 만든 것으로, 오늘날 흔히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이라 일컬어진다.

모두 10개 항목으로 이뤄진 이 강령은 의사가 어떤 의료윤리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첫머리는 인체실험 대상자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 강조했다. 731부대의 '마루타'처럼 특이급(特移扱)이란 형태로 강제로 끌고 와 '처음부터 죽음을 전제로 한 실험'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강령의 주요 내용을 보자.

[△연구는 불필요한 모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상해를 피해야 하고 △어떠한 실험도 사망이나 불구가 생길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는 경우엔 (연구진 자신도 피실험자로 참여하는 경우를 빼고는) 해선 안 되며 △(사람보다는) 동물 실험을 먼저 해야 하고 △상해와 장애 또는 죽음으로부터 피실험자를 지킬 수 있도록 적절한 준비와 설비가 마련돼야 하며 △실험을 계속하면 피실험자에게 상해나 불구, 또는 사망을 부른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으면 실험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일본 전쟁과의료윤리검증추진회, <731부대와 의사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4, 100-101쪽 참조).

이 강령에 비추어 731부대 의사들의 행태를 보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는 물으나 마나다. 그들의 악마적 행태는 너무나 뚜렷이 드러난다. 동물 실험을 건너뛰고 바로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생체 실험으로 죽게 했다. 한 마디로 731부대에선 뉘른베르크 강령 그 어느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피실험자를 온각 가학적인 방법으로 괴롭히다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든 731부대 의사들은 '조직적 전쟁범죄의 공범자'들이었다.

독일의 '어정쩡한 비(非)나치화'

독일의 경우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을 거치긴 했지만, 전쟁범죄자로 처벌된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 많던 나치 의사들은 법적 심판을 비껴갔다. 패전 뒤 독일에선 대학이든 병원이든 지난날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했던 나치당원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를테면 독일 쾰른에 가까운 작은 도시 본에서는 의사 112명 가운데 102명이 나치 당원이었다. 나치 전력을 문제 삼아 이들의 의사 면허를 빼앗는다면 의료체계가 무너질 테니, 탈(脫)나치화를 밀어붙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연재 33 참조).

그런 이유로 서독 초대총리 콘라드 아데나워가 이끌던 기독교민주연합(약칭 기민련, CDU) 정권은 적극적으로 탈나치화를 추진하지 않았다. 때마침 동서냉전의 바람이 불었다. 의료계 뿐 아니라 학계나 다른 분야에서도 탈나치는 멈췄다. 나치를 지지했던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교수들이 대학에 곧 복직했다. 이를 가리켜 탈나치화가 아닌, '어정쩡한 비(非)나치화'라 일컬어진다.

돌이켜 보면, 나치 독일정권 아래서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목소리를 낸 의사는 거의 없었다. 극히 소수의 의사만이 그들의 기독교적 양심 또는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소극적인 저항을 했을 뿐이다. 많은 의사들이 나치 정권의 잘못된 우생학 정책에 따라 장애인 단종수술이나 안락사, 강제수용소 학살을 실무적으로 거들었다. 패전 뒤 (소수이긴 했지만) 나치 히틀러 정권이 추진했던 제3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이들조차 있었다(이는 마치 일본의 극우들이 대동아공영권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 731부대가 1945년 8월 소련군을 피해 도망칠 무렵 폭약으로 파괴된 보일러실. 거대한 굴뚝 2개가 지난날의 전쟁범죄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김재명

전쟁범죄 책임 부인해온 독일 의사들

지난 주 글에서 소개한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평론가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가 쓴 책<戦争と罪責>(岩波書店, 1998)에는 패전 뒤 독일의 의사들이 지녔던 감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1946년 12월부터 1947년 8월에 걸쳐,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이 열릴 무렵, 그 재판의 성격을 독일 의사들에게 해설하기 위한 책자가 만들어졌다. <인간 경시의 독재>(Das Diktat der Menschenverachtung)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노다에 따르면, 그 책을 공동 편집한 알렉산더 미처리히와 프레트 밀케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의사들은 그들의 공격적인 진리 추구와 독재의 이데올로기가 교차하는 지점에 섰을 때, 처음으로 공인된 살육자이자 공적으로 임명된 고문관리가 되었다. 지난날의 끔찍한 행위가 지금 조용히 법정에서 밝혀지고 있다. 재판관의 판결이 어떤 것이든, 23명의 피고만을 죄인으로 보고 그들을 이상성격의 소유자로 보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죄를 끌어들여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것은, 제대로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 시대에 사악함이 승리했다고 해서, 우리 존재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노다 마사야키, <전쟁과 죄책>, 또다른우주, 2023, 131-132쪽).

위 글의 요점은 나치 정권의 전쟁범죄에 대해 독일 의사들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공범자로서의 집단적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적) 죄를 자각한 상태에서 삶을 이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독의 많은 의사들은 이런 지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노다의 글을 보자.

[미처리히가 쓴 서문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논점을 간결하게 지적했다. 그런데 서독의 의사 집단도 역시 이와 같은 지적에 귀 기울일 힘(뜻)이 없었다. 이 서문은 베를린대학 교수들에 의해 삭제되었고, 미처리히는 격렬한 인신공격을 받았다](노다 마사야키, 133쪽).

이는 독일의사회뿐 아니라, 나름의 엘리트 의식을 지닌 의사집단의 집단적 완고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한때는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했던 많은 독일인들이 패전 뒤 그랬던 것처럼, 독일 의사들도 스스로를 '나치 정권의 희생자'로 여기는 집단적 자기 합리화에 기울어 있었다.

베를린 의사회,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독일의사회가 오늘날처럼 나치의 과거사와 전쟁범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면서 열린 모습을 보인 것은 1980년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을 찾아가 비에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던 때(1970년 12월7일)보다도 한참을 지난 시점이다.

베를린 의사회가 잘못된 과거사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종전 40년도 더 지난 1988년이 되어서였다. 성명서를 통해 "베를린 의사회는 과거의 짐을 지겠다. 우리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면서 지난날 나치 독일에서 의사가 했던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나치 전쟁범죄의 협력자 또는 공모자) 역할을 돌아보고,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에 따라 독일의사회도 달라졌다. 1989년 '인간의 가치-1918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의학'이란 주제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고, 나치즘과 의학이 사악한 동맹을 맺었던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이렇듯 독일의사회는 뒤늦게나마 사죄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견주어 일본의사회는 어떠한가. 전후 80년이 지나도록 지난날 침략전쟁 속에서 일본 의학계가 어떤 일을 했는지 따져보려 들지 않는다. 소수의 양심적인 의료인들이 반성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집단의 힘으로 이를 눌러왔다. 필요에 따라선 겉치레로 '히포크라테스'니 '생명 윤리'를 말하겠지만, 집단적인 반성을 슬그머니 건너뛰고 전쟁범죄로 얼룩진 과거사를 아예 잊기로 한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껏 여러 회에 걸쳐 일본 731부대의 악행과 그 뒤 상황을 살펴봤다. 세균무기를 만든답시고 731부대가 저질렀던 악행은 전쟁범죄사에서 매우 끔찍하고 특이한 엽기적 전쟁범죄였다. 그들이 저질렀던 '인도에 어긋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는 우리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로 꼽힌다. 이 범죄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악마의 의사'들은 전승국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았지만, 그들의 죄의식마저 깔끔하게 지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 앞에 용서를 비는 것이 진정한 면죄부를 얻는 길이다.

4차에 걸쳐 세균전 전문 조사관을 파견한 미국은 731부대 간부들로부터 '피 묻은' 세균전 정보를 챙겼다. 1947년 가을에 그 '더러운 거래'가 마무리됐다. 3년 뒤 터진 한반도 전쟁에서 미국은 세균전을 폈다는 의혹을 받는다. 다음 주 글에선 독자들과 함께 그 문제를 들여다보려 한다.(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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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년대 초고가 완성된 <청사고> 지리지에는 황하潢河가 왜 아래의 짙은 청색 실선 표시와 같이 흘렀다고 설명.기록되어 있을까? 

 

 

 

한국의 노태돈.송기호.송호정 등 이병도 직계는 반드시 답을 해야만 한다.

서영수.서길수 등 방계도 자신있으면 답해 보시라. 

 

위 표시의 황하는 연접하여 산맥을 이루는 칠로도산.노로호산 등의 맥에 막혀 흐를 수가 없다. 그런데 왜 지리지에 흐른다고 했을까? 

 

중국 역사학자들 모두는 알아도 낯이 뜨겁고 입이 간지럽지만 입 벌릴 수 없을테고 일본 실세와 학자라는 자들은 숨이 끊어진다 해도 뱉지 않는다는 각오로 살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노태돈 등은 답을 알아도 반민족행의의 처단이 두려워 일본의 교활과 중국의 음흉에 맞장구치며 무식을 자처한다. 

 

이러한 함구는 식민사관.동북공정을 비판한다는 재야도 마찬가지다. 리지린.윤내현.복기대.윤한택.문성재.남의현.이덕일 등이나 외계인이 구조 신호 보내듯 망상질하는 안경전.심백강 등이다. 모조리 지금의 요하가 중국 한.진.연.북위.수.당.요.원.명.청 시기의 요하라고 인식한다. 

 

이렇게 남한의 반민족행위와 어리석음이 100 여 년간 지속되는 사이 환웅천왕의 고조선과 왕검조선.단군부여.진辰 등이 일군 문명은 중국 시조라는 황제헌원이 일으킨 문명이 됐고 그 땅도 동호.선비.거란족의 땅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지금의 요하는 1932 년 일본이 건국한 꼭두각시 만주국부터의 요하일 뿐이다. 100 여 년 전에 신채호.계연수가 교시하였듯이 중국 전한 시기부터 1932 년까지 대략 2100 여 년 동안의 대요수.요하는 지금의 란하 위치를 흘렀다. 중국 정사<사기>부터 <청사고>와 정사급 지리 기록인 <관자>부터 <수경주><통전><독사방여기요><만주원류고> 등과 송.명.청 시기 간행된 고지도 등으로 검증해 보라.

 

 

 

2100 여 년 동안 대요수.요하는 지금의 란하 위치를 흘렀기 때문에 지금의 노합하.서요하는 태백산 아래를 흐른 우수하 즉 소머리강인 속말강이였고 흑수.흑룡강이였으며 지금의 요하는 신라 동쪽의 바다였고 이조선 시기에는 슬해 등으로 불렸다.

 

이러했던 지리를 1873 년 경부터 일본 서향융성이 기획하여 청국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1 물길로 변조하고 황하.요하를 동북쪽으로 2000 여 리 이상 이동.위작하여 조선 5000 여년 역사 현장을 동쪽으로 2000 여 리 밀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1986 년경부터 지금의 능원.적봉.부신.통화 등의 지역에서 발굴되는 고대문명의 유적.유물은 환웅천왕의 고조선과 왕검조선이 일군 문명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문명을 명명해도 물길은 요하가 아니라 우수하였고 중국 시조라는 황제 헌원이 아니라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이 일으켰으니 마땅히 우수하 또는 조선문명이라 해야 한다.

 

 

 

위와 같은 수준은 오로지 중국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송.명.청 시기 간행된 고지도에만 근거해도 넘치도록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위 주장에 대해 상식.합리적 논파가 자신있다면 한.중.일 3 국 백성 누구든 나서시라.

 

 

 

 

[참조]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北至內蒙古阿巴噶右翼旗界 一千二百裡 東至奉天寧遠州界 六百八十裡 南至河南蘭封縣界 一千四百三十裡 西至山西廣寧縣界 五百五十裡     

다륜약이구...北有錫拉穆楞河 自內蒙古克什克騰旗入 合碧七克碧落拜察諸河 北入巴林旗

승덕부  ...康熙42年(1702) 建避暑山莊於熱河...西南省治780裡...熱河古武列水...欒河自欒平入合之...

란평현  府西南60裡 ... 西림계...西北欒河自豊寧入...潮河自豊寧入 西南沽河自獨石口入...평천현  府東150裡 ...老合河古託紇臣水 俗省曰老河 出喀喇沁右翼南190裡永安山 亦曰察罕河 與...又東北合昆都倫河 入建昌大寧城東北80裡...

적봉직예주 西南距省治1320裡...領縣1 潢河自圍場入 州北200餘裡之巴林旗 東南老哈河 自平泉逕東南隅 納伯爾克河北入建昌 英金河古饒樂水...又東合卓索河入建昌

조양부... 明 營州衛...置朝陽縣 光緖30年以墾地多熟 升府 以建昌隸之... 西南距省治1420裡... 西北潢河 自內蒙古阿魯科爾沁旗入 西南大凌河自建昌入 合南土河 逕西平房西...又東至龍城 一曰三座塔城...至金敎寺 東北 左合土河 入盛京義州 

건창현 府西南260裡... 東有布古圖山 漢白狼山 白狼水出焉 今曰大凌河 ... 東入朝陽... 北有潢河自赤峰入 老哈河 河自平泉入合伯爾克河 錯出復入 英金河亦自縣來會 復合落馬河 東北至穀口 乾隆8年更名敖漢 玉瀑 與潢河會 又東入朝陽 柳邊北首朝陽 南訖臨楡 

봉천성

신민부 ...省西一百二十裡 瀋陽中衛與廣寧左衛地

진안현 ...府西 一百五十裡  明 廣寧衛 鎭安堡 ... 東沙河導源直隸綏東 南流 右受老河 入盤山曰南沙河

금주부 반산구 ... 明廣寧盤山驛... 分遼水自遼中冷家口西南入 逕口南入海 西南沙河東沙河西沙河皆南入海

 

<청사고>를 못믿겠다고?

그러면 <명사/지리지>는 어때? 

 

[명사/지리지>

北平行都指揮使司

本大寧都指揮使司 洪武29年9月置 治大寧衛 ...領衛10.....西南距北平布政司八百裏

會州衛   洪武20年9月置 永樂元年廢...西北有馬孟山...土河之源出焉 下流合於漌(潢誤記?)河 又南入於遼水

營州前屯衛 元興州屬上都路...南有老河 源出馬孟山流經此 又經行都司城南 東北入於潢河...

물, 끓이기만 해도 나노·미세 플라스틱 최대 90% 제거된다"

이주영 기자 님의 스토리  5시간

中 연구팀 "물속 탄산칼슘 성분이 나노·미세 플라스틱 응집시켜"

(서울=연합뉴스) 이주영 기자 = 플라스틱 쓰레기가 잘게 부서진 나노·미세 플라스틱(NMP)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물을 끓이는 것만으로도 나노·미세 플라스틱을 최대 90% 제거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물, 끓이기만 해도 나노·미세 플라스틱 최대 90% 제거된다"© 제공: 연합뉴스

 

 

중국 광저우 지난대 에디 쩡 교수팀은 29일 미국 화학회(ACS) 학술지 환경 과학 및 기술 회보(Environmental Science & Technology Letters)에서 수돗물을 끓이면 석회질(탄산칼슘) 성분 작용으로 나노·미세 플라스틱을 최대 90%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나노·미세 플라스틱은 물과 토양, 공기 등 주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직경 1천분의 1㎜ 이하의 나노 플라스틱으로 인한 상수도 오염이 점점 빈번해지면서 우려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팀이 생수 1ℓ에서 플라스틱 뚜껑을 여닫는 과정 등에서 생긴 플라스틱 입자가 24만 개나 검출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연구팀은 물을 끓여 화학물질이나 생물학적 물질을 제거하고 마시는 일부 아시아 국가의 전통에서 착안, 이 방법이 수돗물 속 나노·미세플라스틱 제거에도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 연구를 계획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실험에서 광저우에서 탄산칼슘(CaCO₃) 성분이 0~300㎎/ℓ 포함된 수돗물을 채취, 폴리스티렌(PS)·폴리에틸렌(PE)·폴리프로필렌(PP) 등 나노·미세 플라스틱을 섞어 5분간 끓이고 식힌 다음 나노·미세 플라스틱 양 변화를 측정했다.

미네랄이 많이 들어 있는 경수를 끓이면 탄산칼슘 등 성분이 뭉치면서 하얀 물질이 만들어진다. 실험 결과 수온이 올라가면 탄산칼슘이 나노·미세 플라스틱 입자를 둘러싸면서 결정구조를 만들어 응집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캡슐화 효과는 탄산칼슘 함량이 높은 경수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탄산칼슘 함량이 300㎎/ℓ인 물에서는 끓인 후 최대 90%의 나노·미세 플라스틱이 제거됐다. 탄산칼슘 함량이 60㎎/ℓ 미만인 연수에서는 약 25% 제거됐다.

쩡 박사는 시간이 지나면 나노·미세 플라스틱이 포함된 탄산칼슘이 일반 석회질처럼 쌓인다며 이 물질은 닦아내 제거할 수 있고 물에 남아 있는 불순물은 커피 필터 같은 간단한 필터에 부어 제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결과는 물을 끓이는 간단한 방법이 수돗물 속 나노·미세 플라스틱을 제거, 물을 통한 나노·미세 플라스틱 섭취 위험을 줄여줄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 출처 : Environmental Science & Technology Letters, Eddy Zeng et al., 'Drinking Boiled Tap Water Reduces Human Intake of Nanoplastics and Microplastics', http://pubs.acs.org/doi/abs/10.1021/acs.estlett.4c00081

scitech@yna.co.kr

 

 

“문 정부, 촛불 명령인 연합정치 배신…준비조차 안 된 이에게 정권 넘겨줘”

[한겨레S] 커버스토리│심상정 정의당 의원 인터뷰
“1700만 촛불이 일군 열망이 5년 만에 절망으로
‘윤석열 키운’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명도 없어
교섭단체·2세대 리더십 구축 실패 내 책임
정의당 ‘선명한 민생야당’으로 재정비”

기자신승근
  • 수정 2024-01-06 11:07
  • 등록 2024-01-06 07:00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회의사당 본청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심상정 의원은 정의당의 유일한 1세대 현역 의원이다.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의회에 진출한 그는 2012년부터 2020년까지 경기 고양갑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자신의 말대로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거대 양당에 적을 둔 적이 없는 제3당의 정치인으로서 지역구에서 3선을 한 유일한 사례”다. 고 노회찬 의원과 함께 진보정당의 미래를 책임졌던 그는 2015년 경선에서 노 의원을 제치고 정의당 대표가 된 뒤 상임대표, 당대표 등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그는 촛불 혁명으로 범민주 진영과 합리적 보수가 연합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 연합정치의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단독정부로 대응했다. 이에 심상정 의원은 거대 양당 기득권 정치구조 타파와 다당제 연정을 위한 토대 마련을 위해 민주평화당과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법 개정을 이뤄냈다. 검찰·정치개혁을 지렛대로 정의당이 민평당·바른미래당·대안신당과 공조해 선거제도 개혁에 미온적인 더불어민주당을 압박한 결과다.

정의당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제도 도입으로 2020년 21대 총선에서 20석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과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정의당은 역대 최고인 9.8% 득표에도 의석은 6석에 머물렀다. 20석 확보를 상정하고 ‘2030 청년 쿼터’ 4석을 비례대표 1·2·11·12번에 배정했지만 비례 1번으로 원내에 진출한 류호정 의원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22대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엔 정의당 의원 자격을 유지하며 신당 창당을 진행하고 있다. 노회찬·심상정을 이어 정의당을 이끌 2세대 리더십으로 부상한 김종철 전 대표는 성추행으로 석달 만에 좌초했다. 이후 정의당은 지난 3년 동안 세차례 비대위를 출범시키며 몸부림쳤지만 계속 표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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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당 독점 정치를 깨고 다당제에 기반한 연합정치를 꿈꾸며 진보정당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그렸던 선거제도 개혁, 청년 세대 전면 배치 등 심상정 의원이 주도한 수많은 시도는 그렇게 좌절되고 왜곡됐다. 정치개혁의 불씨를 되살리겠다며 출마한 2022년 대선에선 2.37%를 얻고 낙선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0.73%포인트 근소한 차이로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단일화 없이 완주한 심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책임론에도 시달렸다. 대선 이후 수많은 논란에 침묵을 이어온 그가 지난 3일 한겨레와 만나 자신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단일화 책임론 등에 대해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오는 7일 촛불정부가 5년 만에 윤석열을 앞세운 보수 세력에게 정권을 내주는 과정을 복기한 책 ‘심상정, 우공의 길’을 발간한다. 출간 전 원고를 미리 받아 보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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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넘겨준 울화통 터지는 상황인데…”

―지난 대선 이후 2년 가까이 침묵을 이어왔습니다. 왜 이 시점에 책을 내고 인터뷰를 하는 것인가요?

“22대 총선 앞두고 여전히 양당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다양한 제3당 창당 논의가 이뤄지고, 논쟁이 계속되는 건 결국 1700만 촛불이 일궈낸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열망이 5년 만에 절망으로 바뀐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 대해 책임 있게 복기하고, 그걸 통해서 우리 정치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또 무엇을 놓쳤는지 짚어보려고 책을 썼습니다. 저는 촛불정부가 가장 크게 놓친 게 바로 연합정치라고 봅니다. 두번째로 좀 개인적인 차원인데, 제 침묵이 길어지다보니 저에게 너무 덧칠된 게 많습니다. 아무리 역사가 강자의 것이라고 하지만 다수파의 시선이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소수파의 시선이 더 작은 진실을 담은 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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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정부를 자임한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윤색되고, 그쪽 시각으로 정의당과 심상정 의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우고 있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다수파에 패널도 많고, 마이크가 세니 그런 시선으로 덧칠돼 있어요. 당시 정치의 능선에서 활동했던 정치가로 제가 한 일, 제가 본 일, 또 제가 느낀 일에 대해서 국민께 늦었지만 설명을 드리는 것이 균형 있는 평가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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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지난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7일 발간될 책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촛불 세력의 명령인 연합정치를 배신했다고 규정했습니다. 심 의원도 공동정부 구성을 위해 강도 높게 문재인 정부를 압박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요?

“박근혜 탄핵은, 1700만 촛불을 보고 초당적·초정파적인 세력을 아우른 연합정치로 기존 정치질서를 넘어 과감하게 미래로 가자며 80%의 국회의원이 찬성한 것입니다. 진보부터 개혁중도, 개혁보수까지 아우른 연합정치가 탄핵의 역사를 만들어냈고, 국민들은 그 과정에서 당시 그걸 연합정치라고 설명해내지는 않았지만 새 정치를 경험한 거예요. 그런 국민의 경험·열망은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당 정부로 축소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상당 기간 80% 넘는 지지를 보냈다고 생각해요. 촛불의 열망을 받아안아야 할 책임, 공동정부든 다른 어떤 연합정치의 대안이든 그걸 제시하고 추진해야 할 권한과 책임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책에 썼듯 전병헌 정무수석은 저에게 찾아와 단독정부로 가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단독정부를 공식화했어요. 저나 정의당이 왜 더 압박하지 않았냐는 건데 장관 한두 자리 얻자고 저희가 촛불 혁명의 최선봉에 나선 건 아니거든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탄핵하고 전면적인 개혁으로 새 시대를 열어달라는 촛불 시민들의 열망을 ‘욕심’으로 격하시킨다면 국민들이 얼마나 실망을 하셨겠습니까?”

―어쨌건 정의당이 검찰개혁과 정치개혁을 밀어붙이지 않았습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단독정부를 공식화했는데,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촛불의 개혁 열망을 실현할 것인가 저희 나름대로 고민하고, 정의당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검찰개혁과 정치개혁 연대를 제안한 거죠. 어쨌든 촛불정부가 과감한 개혁으로 나가도록 정의당이 예인선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장 어려운 정치개혁과 검찰개혁 과제를 중심으로 개혁 공조를 하자, 그래서 정의당은 다른 야 3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과 함께 민주당에 개혁 공조를 제안하게 된 것이죠.”

―결과적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등 검찰개혁, 선거제 등 정치개혁도 제대로 안 됐고, 결국 심상정이 불가능한 걸 잘못 선택했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이 골을 넣도록 패스하는 것까지 최선을 다했어요. 골을 넣을지 말지 결정하는 건 문 대통령과 민주당 몫이죠. 정의당이 제안하고, 야 3당이 힘을 모아서 정치개혁과 검찰개혁에 앞장섰는데 그 패스가 골로 연결되지 않아 저희가 더 속상하고 허무했죠. 잘 차려진 밥상이 엎어진 것입니다.”

―잘 차려준 밥상을 누가, 왜 엎었다고 생각하나요? 문재인 대통령이 거대 양당 틀 안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선택을 했다고 보는 건가요?

“저도 이 질문을 문재인 대통령께 그대로 던지고 싶습니다. 왜 문재인 정부가 촛불 민심의 명령인 연합정치를 하지 않고 단독정부로 갔는지? 그래서 5년 뒤 아무런 준비조차 되지 않은 윤석열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는데,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가신다면 연합정치를 하실 생각이 있는가 묻고 싶어요. 집권당이 단독 책임 정부를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민주당 단독정부가 촛불정부로 책임을 오롯이 다했는지에 대해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의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성찰이 없으니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정권을 넘겨준 울화통 터지는 이 상황에 대해 도대체 해명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대선 때 심상정이 단일화 안 해줘서 그렇게 됐다는 것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

심상정 의원을 포함한 야 4당(정의당·진보당·노동당·녹색당) 대표와 의원단이 지난해 9월14일 국회에서 선거법 개악 중단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정의당에 단 한번도 입각 제안 없었다”

―패배의 책임을 심상정에게 덮어씌우기를 한다는 건가요?

“지난 대선은 이재명만 패배한 게 아니고, 심상정의 패배이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촛불정부에 대한 평가죠. 윤석열 대통령 당선, 윤석열 정부의 거대한 퇴행을 겪으면서 국민의 한숨과 분노가 너무 크잖아요. 당연히 대선 후보의 한 사람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느껴 침묵이 좀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한국 정치 안에서 각 정당과 각 후보에게 각자 무게에 걸맞은 어떤 책임이 구체화되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누군가는 지난 대선 당시 제가 얻은 2.37%를 보지만 저는 박근혜 탄핵을 이루고 촛불정부를 세웠던 80%를 보고, 그 가운데 잃어버린 30%에 주목합니다. 제 문제의식은 윤석열 대통령같이 아예 준비조차 되지 않은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한 이 정치구조에 대해 누구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될 때, 그 이후 국민의힘 전신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였어요. 사실상 괴멸 직전까지, 박물관의 입구까지 촛불 시민들이 갖다놨어요. 그런 대선 후보조차 없었던 국정농단 세력에게 어떻게 정권교체를 허용했나요? 이런 점에 대해서 더 깊이 고민해봐야 되지 않나요? 적대적인 공생관계에서 반사이익으로 지금 윤석열 정부 탄생이 이뤄졌는데…. 언제까지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단일화 책임론으로 대응할 것인가요? ‘심상정 책임론’을 얘기하지 않아도,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했고 윤석열 정부의 거대한 퇴행으로 국민들이 고통받고 분노하는 모습 자체가 저에게는 형벌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감당할 저의 몫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제가 얻은 2.37%로, 윤석열 정부 탄생,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릴 수 있는 건가요?”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 때문에 윤석열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건가요?

“이제 승자독식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좀 중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의회 중심주의로 나가야 하고, 그것을 위한 선행 단계로 다당제 연합정치로 가야 한다고 봐요. 다당제 연합정치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쌓아야 하는데, 그 다당제 연합정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제도 개혁이 선거제 개혁과 결선투표제 도입이라고 저는 봅니다.”

―연합정치가 없었다고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심상정 의원에겐 노동부 장관, 고 노회찬 의원에겐 환경부 장관을 제안했는데 거절했다는 얘기까지 돌았습니다.

“문재인 정부 끝날 때까지 저는 그런 질문에 시달렸습니다. 단 한번도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입각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책에도 썼는데 당시 민주당의 의원, 문재인 정부 장관들이 저한테 노동부 장관직에 대한 책임 있는 제안이 있었는데 제가 검토조차 하지 않고 완강하게 거절했다는 투로 얘기했는데, 저는 어떤 제안도 받은 적 없습니다. 저는 진보정당 안에서 대표적인 연합정치론자입니다. 촛불 혁명에 동참했던 정당을 파트너로 존중하고 그 정당들의 핵심 정책을 중심으로 연합하는 구체적인 제안 과정을 통해 장관 자리가 제안이 됐다면 정의당이 검토를 안 할 이유가 없죠. 제안조차도 없었는데 그런 얘기가 계속 나올 때, 저는 ‘문재인 정부는 왜 매사 이런 식으로 일을 만들지?’ 이런 불쾌감이 있었죠. 제가 거짓말을 하는 모양새가 돼버리니까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문 전 대통령, 서점 하실 때 아니야”

―책에서 이재명 후보와 단일화에 대해 책임 있는 제안이 있었다면 당원과 지지자가 나를 압박했을 것이라는 취지로 적었는데요?

“이재명 후보와 단일화 얘기도 장관 제안 논란과 똑같은 거예요. 저는 이게 소수파의 생존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다당제 연정의 정치개혁을 하자고 촉구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숙제를 정치권이 지난 20년간 미룬 결과라고 봅니다. 저는 정치개혁 어젠다를 복원하기 위해 대선 출마를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재명 후보의 진지한 제안이 있었다면 당연히 숙의 과정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떤 단일화 제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심상정 아니냐? 국가적 차원에서 좀 더 큰 정치를 했어야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 고민은 깊이 받아들입니다만 그게 결국은 알아서 죽으라는(후보 사퇴하라는) 그런 거라면 지난 20여년 동안 제가 해온 제3당의 길, 저희 정의당이 걸어온 길 자체가 부정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심상정에게 이런저런 장관직도 많이 제안했는데 야멸차게 거절하고, 단일화 제안도 했는데 이것도 다 거부하고, 아무리 진보정당의 정치인이라도 이건 아니다’라며 저를 국가의 미래를 돌아보지도 않는 아주 강퍅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저는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단일화 압박이 ‘제3당 불가론’으로 귀결되는 이런 정치구조, 저는 이건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참석한 지난해 7월3일 국회 초당적정치개혁 의원모임 간담회에서 심상정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문재인 대통령, 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 탄생의 책임을 회피하려 그런 핑계를 대는 거라고 보는 것인가요?

“윤석열 정권의 탄생과 그 후 퇴행에 대해서 저와 정의당 몫의 책임, 그것은 저와 정의당이 당연히 져야 됩니다. 그런데 촛불 시민이 문재인 대통령 만들어줬고, 지방정부 다 몰아줬어요. 21대 총선에선 180석도 만들어줬지 않습니까? 이런 집권당의 책임 대신 소수 정당에 ‘독박’을 씌우는 책임 전가형 마타도어(흑색선전)를 생산하고 있어요. 저희가 걸어온 25년 진보 정치의 길을, 그 가치를 부정하는 행태는 이제 좀 인내하고 용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실관계를 최대한 정제해 ‘심상정, 우공의 길’에 기술한 것입니다.”

―책에선 무도한 윤석열 정권 때문에 반대로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반성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어쨌든 1700만 촛불이 밝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열망이 5년 만에 절망으로 바뀐 이유에 대해 많은 부분이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에 대한 평가와 성찰이 생략됐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의 미래’를 쓰시면서 ‘비가 오지 않아도 또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다 내 책임인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목은 ‘진보의 미래’지만, 내용 대부분은 자신의 집권기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거든요. 그 반성을 기반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의 미래를 그렸고, 그 트랙을 타고 민주당이 재집권에 성공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바로 지난 정부였고 더구나 촛불정부였는데 1700만 촛불에게 뭔가 책임 있는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 대통령, 그리고 민주당도 집권 5년을 성찰한 결과를 내놔야 합니다. (문 전 대통령이) 지금 서점을 하실 때가 아니죠. 노무현 대통령처럼 같이 일했던 수석·장관·전문가를 불러모아 집권 과정에 대해 리뷰하고, 또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그 평가와 성찰의 결과를 내놔야 될 때 아닌가요? 윤석열 후보도 문재인 정부가 만든 것이고, 이재명 후보는 민주당 후보이고 국민들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그런 대결 구도로 여기까지 오다보니 지금 정치가 맥락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평가해야 할 것이 생략되고 책임져야 할 것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 서로 적대와 혐오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입니다.”

 

“민주당, 160석 예상하고도 위성정당…충격적”

―어쨌든 정의당이 검찰개혁과 정치개혁을 지렛대로 개혁연대를 추동했는데 조국 사태로 그 동력이 약화했고, 정의당은 조국 법무부 장관을 인준해 곤경에 처했어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나요?

“지금은 모든 것이 명확해져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데 그 당시는 딜레마 상황이었죠. 조국 사태는 검찰개혁과 반개혁, 다른 한편은 특권과 반특권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검찰개혁을 위해서는 조국을 지켜야 했고 특권 타파를 위해서는 조국을 버려야 했습니다. 정치인 심상정 저 개인의 판단이었다면 아주 쉬웠을 겁니다. 그런데 몇달 뒤에 총선을 치러야 하는 그런 당의 대표로서는 무엇을 잃어야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조국 법무부 장관 승인 과정을 통해 검찰개혁 동력이 급속히 떨어졌고 끝내 검사 윤석열이 정권의 대항마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정의당 당내 압도적인 의사를 존중하고 검찰개혁 우선 원칙을 가지고 조국 장관을 조건부 승인을 했는데 후과가 매우 컸습니다. ‘민주당에 민주가 없고 국민의힘에는 국민이 없다’고 했는데 조국 사태를 계기로 ‘정의당엔 정의가 없다’는 말이 생겼어요. 결국 당장의 어떤 제도 개선이나 정책 실현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당이 가지고 갈 가치나 방향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는 아주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선거법 개정을 주도할 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정의당은 더 초라해졌는데, 이건 누구 책임인가요?

“저희는 야 3당과 민주당을 믿고 이 개혁을 추진한 것이죠. (국민의힘이) 위성정당으로 압박하더라도 결국은 민주당이 원칙을 지켜나간다면 소기의 성과·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당시 유시민 작가가 제게 와서 한 얘기를 책에도 썼지만, 21대 총선을 몇 개월 앞두고 이미 민주당 지도부는 160석 이상 확보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그걸 알고도 20석을 더 욕심부리려 스스로 만든 법을 짓밟고 위성정당을 쏘아 올린 것입니다. 그게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유 작가가 제게 민주당의 수뇌부는 160석은 무조건 넘고 경우에 따라서 180석까지 가능하다고 판단한다고 말했을 때, 김어준 같은 친민주 스피커는 민주당은 과반 의석도 안 된다고 위기의식을 부추기며 심상정과 정의당이 욕심을 부리겠다고 한다며 ‘심상정 욕심론’으로 저를 공격했어요. 저희보고 배신했다고 얘기했는데 촛불정부가 촛불 개혁을 배신한 것이죠. 저희는 촛불 명령을 수행한다는 자세로 이런 개혁(검찰개혁과 정치개혁) 공조를 시작한 것이고, 이 과정을 통해 정의당은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한 단계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는데 위성정당 사태로 그게 좌절된 것입니다. 위성정당 사태로 촛불을 아예 꺼버리고, 정의당의 미래도 막아버린 거죠.”

―정의당 입장에선 현행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제도 유지가 최선일 텐데, 이재명 대표가 그런 선택을 해도 제3당 창당, 유사 위성정당이 우후죽순 나올 수도 있어요. 정의당은 어떻게 총선을 치러야 하나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정당의 유불리나 이해타산을 앞세우면 선거제도 개혁은 안 됩니다. 저는 지속적으로 정의당이 선거법 개정의 수혜자가 아니어도 좋다, 그래도 이건 해야 된다고 얘기해 왔어요. 지금 제3당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그동안 20년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정당과 정파들이 제3지대에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일회성으로 끝나거나, 살아남은 경우도 양당에 흡수됐어요. 지난 20년 동안 양당 틈바구니에서 거의 피멍 들면서 버텨온 유일한 정당이 정의당입니다. ‘너희 정의당은 왜 이렇게 못하냐’고 하는데 사실 20년 동안 많이 힘들었고 체력도 많이 소진돼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제 제3지대, 제3당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실현하고, 3당으로도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그런 제도적 보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초기에는 정당이 난립하고, 혼탁하고, 자기 구명을 위한 정당도 생기지만 제3당이 유력 정당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제도적 장치가 된다면 저는 다당제가 정착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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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우 비상대책위원장 등 정의당 지도부가 지난 2일 광주시의회에서 새해 기자회견을 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연합뉴스

 

“청년비례 실패…류호정 문제 송구”

―정의당 대표로 정의당을 청년 정치의 산실로 만들기 위해 도입한 많은 시도가 실패했습니다.

“촛불 광장에서 가장 새로운 모습이 청소년과 청년들이 대거 몰려나왔다는 겁니다. 촛불이 명징하게 이야기한 것 중에 하나는 그 청년의 미래, 그게 시대정신이다,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성찰이 있었죠. 그런데 그때 2030 청년 정치인의 비중이 2% 미만이었단 말이죠. 저는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되 당대표가 공천권을 행사해 낙점하고 호위무사처럼 청년 정치인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쟁을 통해서 자기 실력으로 자리를 잡는 그런 경선 방식이 공정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청년비례대표 경선을 한 것이죠. 그런데 실패했죠. 류호정 의원에 대한 실망감 같은 것으로 표현이 되는데 정의당 비례대표 1번이 정의당이 아닌 곳에서 다른 정치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상황이니 당시 당대표로 유구무언이죠. 국민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분명히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심상정이 류호정을 발탁해서 1번 줬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우리 당의 시스템은 좀 다르죠. 류호정 의원은 발탁한 게 아니고 당원 투표에 의해서 1번을 받은 것이죠. 그때 제가 정의당 대표로 했던 것은 위성정당이 가시화되기 전에 이미 우리는 비례 경선에 들어갔기 때문에, 저는 연동형을 전제로 21대 국회에서 정의당이 20석을 얻는 걸 목표로 했을 때 1·2·11·12번 이 4석을, 목표한 20석 가운데 20%인 4석을 ‘2030 청년 쿼터’로 앞 순위에 배정한 것입니다. 그게 제가 한 일입니다.”

―류호정 의원의 신당 행보와 관련해 책에서 “정의당에 류 의원 탈당에 미련을 갖는 사람은 없다”며 탈당을 요구했습니다. 류 의원은 “정의당 주류가 당원을 배신했고 민주당 2중대 논란을 불렀고, 그래서 난 탈당 안 한다”고 합니다.

“그 문제는 현재 당 지도부(김준우 비대위)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어쨌든 류호정 의원은 정의당에 신의를 저버렸어요. 자신을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지켜줬던 수많은 당원의 정성·기대·아픔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정의당 1번은 고군분투한 정의당 당원들의 것이라는 점을 존중하길 바랍니다. 정의당이 아닌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면서 정의당 비례대표 1번 의원직을 유지하겠다는 건 아니라고 봐요.”

지난달 12일 정의당 의원총회 모습. 신당에 참여하겠다는 류호정 의원의 자리가 비어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정의당의 유일한 1세대 현역 의원이고, 당대표도 지냈습니다. 정의당 위상 축소, 현재 위기에 대한 자신의 책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나요?

“정의당이 어려움에 봉착한 것은 결국 위성정당 사태라는 거대한 좌절, 2세대 리더십인 김종철 전 대표의 좌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난 총선에서 9.8%, 최고 지지율을 확보했음에도 지속가능성을 만들려고 제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선거법이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 사태로 좌절을 맞았고, 결국 정의당 교섭단체 만들기에 실패했어요. 사람이 당장의 어려움은 감수해내지만 미래가 없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인데, 결국 위성정당 사태로 정의당이 전망을 잃어버린 거죠. 또 2세대 리더십을 열려고 했던 김종철 대표도 좌초했습니다. 정의당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제 노력, 2세대 리더십을 세우려는 제 노력이 결국 실패했습니다. 당시 당대표로 당의 미래를 개척하는 소임을 다하지 못한 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 책임을 엄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의당,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보정당 20년 역사를 보면 고비고비마다 위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떠났지만 그럼에도 정의당은 20년 동안 해온 잠재력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 국민들은 정의당이 획기적으로 무슨 큰 도약을 당장에 할 수 있기를 바란다기보다 지난 3년 동안 헝클어진 정의당의 모습을 좀 선명하게 잘 정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봅니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고 선명한 민생 야당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상황이기 때문에 정의당의 존재 이유를 다시 한번 재정립하고, 작지만 행동으로서 매운맛을 보여 나간다면 국민들이 정의당에 회복의 기회를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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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년 월 일 신청인: (서명)

 

취재 지원 = (사)부산국학원·부산국학운동시민연합
도쿄 =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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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로 남은 증언 "日왕실도서관에 단군史書가 있다"

 


해방 전 12년 동안 서릉부 사서였던 故 박창화 씨 '단군사료'존재 증언
숨겼는지 없는건지 알 길은 없지만 1920년대 공문에 단군 말살의 흔적
日 강탈해간 사료 끈질기게 찾다보면 단군史 실마리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도쿄 천황궁 내에 있는 서릉부(왕실도서관)의 출입구. '금지입내(禁止入內)'라 쓰고 한글로 '출입금지'라고 적은 것이 이채롭다.

일본 도쿄 천황궁 내의 서릉부(書陵府). 일명 왕실도서관으로 고대 및 근현대의 희귀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는 곳. 그러나 쉽게 접근이 안된다는 곳.

도쿄 국립공문서관 앞에서 천황궁의 북문(北桔橋門)을 통해 서릉부를 찾아간다. 사위가 삼엄하다. 외곽에 해자(垓子:성 주위에 둘러 판 못)를 치고, 성곽속에 깊이 파묻힌 천황궁은 8월 한낮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곳에 한국 고문서가 있을 것인가…'. 풀리지 않는 궁금증과 풀릴 것 같은 기대감이 묘하게 교차한다. 발걸음이 서늘하다. 확인되지 않은, 그래서 답답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이곳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서릉부를 찾아간 이유

서릉부는 왜 찾아갔던가. 먼저 방문 경위를 간단히 설명해 두어야겠다.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 황거내의 서릉부에 단군(고조선) 관련 희귀 사서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 확인 욕구가 발동했다. 희귀 사서의 존재를 밝힌 사람은 박창화(朴昌和, 1889~1962)라는 인물이다. 그는 해방 직전까지 12년간 일본의 왕실도서관(서릉부)에서 촉탁 사서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왕실도서관(서릉부)에 근무할 때 '단군조선' 관련 사서들이 다량 쌓여 있는 걸 봤다. 한국에서 약탈해간 것들이다. 그 중 일부는 내가 정리했다. 그걸 찾아와야 한다."

  
  서릉부 입구의 안내석.

박창화의 증언이 소개된 글을 읽고 궁금증이 증폭되던 때에 후원자가 나타났다. 부산국학운동시민연합의 이성명(53) 대표와 부산국학진흥회 이재관(50) 회장이 그들이다. 이성명 대표는 "박창화 선생의 증언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서릉부에 가봐야겠네요. 가 봅시다. 우리가 동행하지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일본 서릉부 방문단(3명)이 급조되어 기자를 포함한 일행은 지난 8월 중순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박창화의 행적

'단군 사료' 증언자인 박창화는 한일 근현대사의 '연구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미스터리하면서도 역사적인 면이 있다. 1889년 충북 청원 출생, 1900년초 한성사범학교 졸업, 1910년대 영동보통학교 훈도 근무, 만주서 생활, 일본 관헌에 잡혀 일본행, 1933~1944년 궁내청 서릉부 사서로 근무, 광복 후 귀국해 청주사범학교 교사 근무….

그의 또 한가지 중요한 행적은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을 남긴 사실이다. 1989년 2월16일자 국제신문 1면에 실린 '화랑세기 필사본 발견'이란 특종기사가 촉발한 '화랑세기 논쟁'은 아직도 뜨거운 학계의 쟁점이다. 원본이 전하지 않는 신라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박창화가 베꼈느냐, 창작했느냐가 관건이다.

  
  이성명(왼쪽) 대표와 이재관 회장이 서릉부 입장표와 열람증을 보여주고 있다.

박창화의 서릉부 근무 이야기는 계간 '한배달' 40호(1998년 겨울호, 70~74쪽)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해방 후 청주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최기철(작고) 전 서울대 교수가 당시 역사교사였던 박창화의 행적을 증언하는 형식이다.

최 전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박창화는 일본 왕실도서관에 보관중인 수많은 사서들이 조선총독부가 수탈해간 것임을 확인했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료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단군 사료가 많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는 것이다. 당시 왕실도서관에 함께 근무했던 한 일본인은 "조선의 고서를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들은 조선에 없는 것들"이라는 말까지 늘어놓았다고 한다.

10여년 전 최기철 교수로부터 증언을 듣고 녹취했다는 (사)한배달 한애삼(65) 전 부회장은 "박창화 선생이 서릉부에서 우리 고문서 20만권을 직접 보고 분류작업을 했다는 것은 최기철 교수뿐만 아니라 서울대 법대 학장을 지낸 고 최태영 박사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면서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모르는 일'로 돌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창화의 서릉부 근무 사실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인적관리 자료에서 확인된다. 1935년 그곳의 직원 명부에는 박창화가 왕실도서관 촉탁(특별계약직)으로 월 수입이 85엔이었다고 돼 있다. 박창화란 이름은 국사편찬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DB) 속의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나온다.


  
  조선총독부 등이 작성한 '단군 합사(合祀)' 관련 공문서. 도쿄=박창희 기자

서릉부의 희귀 사료들

서릉부는 도쿄 황거 북쪽편에 자리해 있었다. 도서 열람은 듣던대로 까다로웠다. 현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열람 희망 도서 목록을 작성해 우편으로 신청했다. 그곳 규정에 따라 방문자의 인적사항(외국인도 허용)과 열람도서 목록(한 사람당 하루 12책까지 열람)을 작성한 뒤 연락처를 남겼다. 20여일 후 답신이 왔다. 열람 일정과 시간은 서릉부측에서 잡았다.

서릉부는 4층 짜리 신식 콘크리트 건물 3개동으로 꾸며져 있었다. 입장표를 부착하고 서릉부로 들어선다. 출입구 유리창에 '관계자 외 입입금지(立入禁止)'란 문구가 붙어 있다. 한자 밑의 한글이 이채롭다. 안내 직원이 나타나 신분을 확인하고 열람증을 주었다. "카메라 등 일체의 사물은 소지할 수 없습니다. 손을 씻은 뒤, 소독기에서 소독을 해 주십시오."

사무실 겸 열람실은 1층에 있었다. 좌석은 12개 정도였다. 안내직원이 연필과 지우개를 주며 메모를 허용했다. 필요한 부분은 유료 복사를 허용하며 단 시일이 걸린다고 직원이 설명했다.

우리는 우선 한국 사료 등을 정리해 둔 '화한도서분류목록(和漢圖書分類目錄) 하권(1951년 간)을 주목했다. 42쪽에 '조선사(朝鮮史)' 항목이 있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징비록(懲毖錄)' '동국기략(東國紀略)' 등 72책이 목록화되어 있다. "제목만 봐선 모르고 내용을 함께 훑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네요. 한국 학자들이 마음먹고 접근하면 연구 테마가 적지 않을 거예요." 동행한 역사학자 H씨가 나직이 얘기했다.


감감한 단군 사료

눈치 챘을 테지만, 서릉부가 공개한 도서목록에는 단군 관련 사료가 없었다. 아니, '일본인들은 없다고 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서릉부 내의 사서직원에게 '박창화'라는 조선 인물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 분 얘기를 듣고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선) 당신네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박창화에 대한 연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조금 후 일행이 신청한 도서가 나왔다. 북한에서 찾는다는 '의방유취(醫方類聚)' 최치원이 지은 '계원필경(桂苑筆耕)' 그리고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모두가 희귀 사료였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한국에서 몇 년전부터 환수운동이 추진된 사료다. 맨 뒷장을 들추니 '대정(大正) 11년(1922년) 조선총독부 기증'이란 도장이 찍혀 있다. 기증자가 있어 훔친 게 아니라는 뜻이란다. 이를 본 이재관 회장은 "이 통한의 장례 자료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라며 눈시울을 붉힌다.

'서릉부 고도서'에 대한 연구 논문을 쓴 바 있는 울산대 허영란 교수에 따르면, 서릉부의 자체 목록에는 약 1100여 종의 한적(漢籍) 자료가 있으나 공개 DB에는 628종만 수록되어 있다. 이들 공개 DB목록은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웹사이트 '해외소장한국전적문화재'에서도 검색할 수 있다. 그러나 비공개 부분은 오리무중이다.


단군 합사(合祀)의 진상

서릉부에서 단군의 '단(檀)'자도 찾지 못했던 일행은 다음날 도쿄 국립공문서관을 방문했다. 고문서 전문가인 김경남(여·46) 박사가 동행했다. 한국 국가기록원 학예연구원이자 일본 학습원대학 특별연구원으로 활동하는 김 박사는 예리한 촉수로 공문서 더미 속에서 '단군'을 찾기 시작했다. 검색창에 흥미로운 제목이 떴다. '조선신궁에 단군합사의 건'. 조선총독부가 1920년대 작성한 제51회 제국의회 설명자료(국립공문서관 2A 34-7-2351)였다. 자료에는 단군이 조선의 시조이기 때문에 조선신궁에 합사해야 한다는 견해를 담고 있다. 이는 조선 사람들에게 단군이 시조로서 자리잡고 있고 일본도 단군을 인정하고 있음을 웅변한다.

비슷한 문건은 또 있었다. 1925년 내각 총리부가 작성한 공문(국립공문서관 2A 35-8-20)이었다. '조선신궁의 단군합사 운동에 관한 건'이란 제목의 이 공문은 단군을 조선신궁에 함께 모시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수신처는 내각총리대신을 비롯 내무대신,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내무성 신사국장, 척식국장, 동경지방재판소, 동경경비사령관, 교토·오사카 지사 등이다.

일본 본국에서 이 운동을 폭넓게 논한 것은 일선(日鮮)융화책으로 보였다. 내용 중에 '단군을 북방시조로 하고 전설적인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대목이 있다. 이때 이미 단군을 신화로 격하, 역사가 아닌 것처럼 몰아갔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보여줄 것만 보여준다

일본은 자신들의 식민통치 공문서를 거리낌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볼테면 봐라'는 태도는 식민 지배를 당연시하는 군국주의에 끈이 닿아 있을 것 같다. 이는 '보여줄 것만 보여준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게 일본이에요. 식민통치 공문서를 모두 남겨 놓고 봐라고 하잖아요. 치밀한 조사 연구와 자료 관리가 국력이 되는 시대예요. 독도 분쟁도 (일본이) 자료를 갖고 있기에 큰소리 치는 겁니다. 우리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30년 후를 내다보고 기초 자료를 모으고 연구를 해나가야 하는 거죠. 지도자들이 눈을 떠야겠죠." 김경남 박사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이번 취재를 바탕으로 '조선신궁의 단군합사 건'에 대한 논문을 쓰겠다고 했다.

귀국길에 주일한국대사관에서 만난 권철현 주일대사는 "우리 상고사가 바로 서야 한국사가 바로 선다. 가장 중요한 것이 사료다. 지금부터 모으고 해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게 국력이 된다"고 강조했다.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에 대한 사료를 일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숨길 수 없는 한일간의 현실이다. 일본이 약탈해 간 것이라고 해도 무조건 '내놔라'고 할 수도 없다. 실사구시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단군 사료부터 하나하나 DB화 하는 작업부터 벌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 것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남의 나라에 가 있는 것을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렇게나 보아온 고문서 한쪽, 고서 쪼가리 하나라도 새롭게 보고 모으는 자세, 그것이 역사를 찾는 길일 테다.


■ 日 약탈 한국고서들 얼마나

- 1910년부터 조선 고대사 사료 20여만권 쓸어가

  
  도쿄 천황궁 안내도. 빨간점 찍힌 곳이 서릉부다.

일본에 흘러 간 한국사 관련 고서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8·15 해방 후 나온 '제헌국회사'와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문정창 지음)에 따르면,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寺內正毅)는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말까지 조선의 고대사 사료 51종 20여만 권을 약탈한 것으로 나온다. 이중 일부는 불에 태워졌고 상당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왕실도서관인 서릉부에 가장 많은 자료가 들어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서릉부 도서의 수집-분산-보관 과정은 울산대 허영란 교수의 연구 논문에 제법 상세히 소개돼 있다.

'…메이지 초기 서릉부(당시 도서료)의 수집 도서는 아카사카이궁(赤坂離宮)내의 창고 등에 분산 보관되었다. 그후 1942년 태평양 전쟁 중 공습을 피해 미나미타마군(南多摩郡)의 비상 서고 3개 동에 보관하였고, 1944년 3월에 서릉부는 내각문고가 보관하던 귀중 도서 약 7만5000점을 기탁받아 위의 비상서고에 소개 격납시켰다. 공습 피해가 점차 커지자 1944년 10월에 서릉부에 남아 있던 도서를 선별하여 도치기현(枋木縣) 어용저(御用邸)에 옮겼다. 그뒤 다시 양서를 골라 소개하였고 패전 후 비상서고에 보관중이던 도서와 공문서를 다시 반입, 1946년 1월 서릉부 서고가 재정비되었다.'

일본에 있는 한국 고서를 집대성한 연구 성과물도 있다. 일본 도야마(富山)국립대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67) 교수가 2년전 펴낸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집부(集部)'(교토대출판부)가 그것. 후지모토 교수는 한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70년부터 궁내청 서릉부와 동양문고, 국회도서관, 도쿄대, 교토대 등 일본 내 대형도서관은 물론 지방의 공·사립도서관과 개인서고, 영국 대영박물관 등 100여 곳을 뒤져 목록을 옮겨적는 방식으로 총 5만여 종의 서적을 정리했다.

이들 서적은 경(經·경전) 사(史·역사) 자(子·여러 학자의 철학서적) 집(集·개인문집)으로 분류 되었으며 각 고서에는 저자와 판본, 각수(刻手·판목을 새긴 사람), 종이 질, 활자, 간행연도 등을 수록하고 있다.

후지모토 교수의 연구 성과는 해외에 있는 한국 고서들에 대한 서지학 차원의 국내 연구가 절실함을 일깨운다.

취재 지원 = (사)부산국학원·부산국학운동시민연합
도쿄 =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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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 '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근대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규슈(九州) 지역을 다녀왔다. 규슈는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섬으로,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우리와 역사적 인연이 깊은 곳이다. 아울러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이글은 이번 여정에 동행한 기자가 규슈지역 여러 곳을 돌아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탐방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말]
 
 
가고시마(鹿児島)는 일본 열도 최남단에 있는 현으로, 옛 이름은 사쓰마(薩摩)다. 2천 년 전, 권력 싸움에서 밀린 가야국 왕자가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화산지대가 많고 온천이 유명하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지는 풍광이 그림처럼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곳이 많지만, 과거 조슈번(야마구치현)과 함께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용맹한 무사들이 살던 본거지였다.

에도 말기, 270개가 넘는 번(藩) 가운데 유독 두 지역이 유신의 핵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본래 규슈 지역의 번주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추종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가장 많은 병력을 차출한 곳도 이곳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권력을 잡아 어쩔 수 없이 충성을 맹세했지만, 에도 막부에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었다. 사쓰마의 사무라이들에게 막부 타도는 시대적 소명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지리적 환경도 영향을 끼쳤다. 한반도와 가까워 오래전부터 대륙과의 교류가 왕성했고 서양문명을 먼저 접할 기회가 많았다. 국외여행을 법으로 금지하던 시절에 사쓰마 출신 15명, 조슈 출신 5명이 신문물을 배우고자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간 것(최종 목적지는 영국이었다)을 보면, 이곳이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민감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우리와는 불편한 악연(惡緣)으로 얽힌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1597년) 당시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장수가 이곳 번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다. 히데요시가 죽고 퇴각하는 일본군과 이를 막아선 조명 연합군이 남해에서 맞붙었을 때, 요시히로의 조총부대가 쏜 총에 맞아 이순신 장군이 운명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노량해전(1598년)이다.

철군할 때, 팔십 명이 넘는 조선 도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와 여기 정착해서 만든 도자기가 일본 최고의 명품 백자로 평가받는 사쓰마 야키(燒)다. 전북 남원에서 잡혀간 도공 심당길(沈當吉)의 후예들이 지금까지 이곳에서 대를 이어 도자기를 굽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 브랜드를 납치된 전쟁포로의 후손들이 만들었다니. 서글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조슈가 일본 육군의 뿌리라면, 해군의 뿌리는 사쓰마라 할 만큼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바다와 친밀했다. 일본 해군의 기초를 닦은 곳이 지금의 가고시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 함대 사령관으로 당시 세계 최강이라는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대해 연전연승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태평양 전쟁 당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조직한 해군 소장 아리마 마사후미(有馬正文)가 이곳 출신이다.

러일전쟁의 분수령이 된 쓰시마 해전(1905년) 일화는 유명하다. 많은 이들이 러시아의 승리를 예견했지만, 헤이하치로는 이 전투에서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가 이 싸움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펼친 전술이 학익진(鶴翼陣)과 비슷하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1592년)에서 썼던 그 진법이다. 삼백여 년 전, 자기 조상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기억을 끄집어내 재활용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나.

곳곳에 남은 메이지 시대의 흔적
 
 
▲ 유신 후루사토관 입구 벽면에 쓰여진 글씨  가고시마 시청에서 차로 8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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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심장이라는 별칭답게, 가고시마 곳곳에는 메이지 시대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가고시마 유신의 역사가 기록된 후루사토관(ふるさと館)을 찾았다. 후루사토는 고향이라는 뜻이다. 박물관 입구에 네 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유신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들을 도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고마쓰 다케와키(小松清廉), 사쓰마번의 11대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야키라(島津齊彬)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영웅 가운데 한 명이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뛰어난 리더였지만, 조선 정벌을 둘러싸고 메이지 정부와 대립해 직을 내려놓고 귀향했다. 얼마 후, 고향인 이곳에서 봉기했고 정부군과 일대 결전(1877년, 세이난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해 할복자살한 비운의 인물이다.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4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다카모리는 요시다 쇼인과 함께 대표적인 정한론자(征韓論者)다. 메이지 유신 후 사무라이의 사회적 몰락이 임박하자 이를 해소할 방안으로 조선을 침범해 근대화시키고 조선과 일본이 연대해 서양에 맞서야 한다는 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당시 사쓰마는 무사 계급이 총인구의 20%에 이를 만큼 다른 번(藩)에 비해 사무라이 수가 많았다. 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카모리가 강하게 조선 정벌을 주장한 배경이다.

죽마고우이자 혁명동지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사무라이를 밟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버릴 수 없다며 그와 결별한다. 그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무사도(武士道)가 유달리 강한 사쓰마의 무사들이 명분 있게 죽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거라는 해석도 있다. 이 전쟁을 끝으로 왕정복고를 둘러싼 내분이 마무리되면서 메이지 정부는 안정을 되찾는다.

 
 
▲ 사이고 다카모리 탄생지 기념비 유신 후루사토관 인근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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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사토관 내 기념품을 파는 매장에 다카모리의 형상을 넣은 상품들이 즐비하다. 비극적 삶을 살다간 영웅의 이미지만큼 좋은 관광상품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감히 천황에게 칼을 겨눈 역적이었음에도, 일본 헌법 반포(1889년) 때 사면됐다. 일본인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인물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이웃 나라를 정벌하려 했던 침략자일 따름이다.

후루사토관 근처에 가지야(加治屋) 마을이라는 동네가 있다. 다카모리가 태어난 곳이다. 바로 길 건너편이 고라이(高麗) 마을이다. 고려는 조선은 뜻한다. 정유재란 때 끌려온 조선인 도공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곳이다. 마을 곳곳에 조선인의 숨결이 남아 있어서 고려떡을 판매하는 가게가 여전히 성업 중이다. 이곳은 도시미치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인가.

두 마을 사이에 갑돌천(甲突川)이라는 작은 하천이 흐른다. 다카모리와 도시미치는 이 냇가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을 것이다. 하천 중간에 다리가 있는데, 이름이 고라이바시, 고려교(高麗橋)다. 원래 있던 다리는 홍수로 유실되고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 마주 보고 있다. 한쪽은 일본인이 살던 마을, 다른 쪽은 조선인 집성촌. 한국과 일본의 엉킨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다.
 
 
▲ 가고시마시 갑돌천에 있는 다리, 고려교  원래 다리는 홍수로 유실되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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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사토관에서 차로 15분 정도 가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기계공장이 보전된 장소가 있다. 사쓰마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건립한 상고집성관(尙古集成館)이 그곳이다. 메이지 시대 산업 근대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배와 대포 등 당시 만들었던 철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탐방단이 갔을 때는 공사 중이어서 전시물을 볼 수 없었다.)

사쓰마는 임진왜란 훨씬 이전부터 흔히 조총(鳥銃)이라 부르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화승총을 대량 생산할 만큼 신무기 개발에 앞장선 곳이다. 집성관 앞뜰에 철제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설치한 반사로(용광로) 터가 남아 있다. 아편전쟁 때 중국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에 충격을 받은 번주가 서양 열강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제철소와 조선소를 비롯해 서양식 공업을 일으켰다고 한다.

 
 
▲ 상고집성관 내 반사로터 기념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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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왜의 침략에 대비해 거북선을 건조한 것과 비견된다고 할까. 다카모리와 도시미치 등 젊은 사무라이들을 발탁해 중용한 사람이 나리아키라다. 조선의 22대 국왕이었던 정조(正祖) 임금이 떠오른다. 탕평(蕩平)으로 인재를 두루 기용하고 구습에서 벗어나려 애쓴 개혁 군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장려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임에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 그가 한 세기 뒤에 세상에 나왔다면 조선의 운명이 바뀌었을까.

정조가 탄생한 해(1752년)로부터 정확히 백 년 후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高宗)이 태어난다. 메이지 시대 훨씬 이전부터 지방정부가 직접 대포를 만들고 서양 배를 연구하는 등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강병(强兵)을 추구할 때,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현명한 군주와 사명감 넘치는 신하들이 조정을 이끌었다면 이 땅의 근대사는 다른 궤적을 그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인류의 근대는 원양 항해의 기술발달에 힘입은 대항해시대였고, 문명과 문명의 접촉은 폭력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앞선 문명을 이룬 자들이 자신들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른 문명을 억압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 한, 야만의 시대였다. 일본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이 기술을 배웠고 조선과 동아시아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다. 조선은 이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했다. 

가고시마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로야마(城山) 공원 전망대에 올랐다. 바다 건너편 섬 사쿠라지마(桜島)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섬 중앙에 화산이 있어 연간 700회 이상 용암이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화산섬 특유의 자연생태계를 지닌 곳이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무척 평화로워 보이지만, 봉우리 아래에서는 용암이 끓고 있을 것이다. 저 섬의 모습이 한반도 주변 환경과 닮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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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 '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근대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규슈(九州) 지역을 다녀왔다. 규슈는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섬으로,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우리와 역사적 인연이 깊은 곳이다. 아울러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이글은 이번 여정에 동행한 기자가 규슈지역 여러 곳을 돌아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탐방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기자말]
 
 
 
하기(萩)는 야마구치현(山口縣) 북부에 있는 인구 4만 5천 명의 작은 도시다. 삼 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두 개의 강줄기가 도시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관광지도 아닌 이 소도시를 해마다 1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여기가 메이지 유신의 발원지 중 한 곳이며 일본 우익사상의 정신적 스승으로 칭송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고향이다.

유적지가 많아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 5종이나 된다. 에도시대 말기, 쇼인이 설립한 사숙 쇼카손주쿠(松下村塾)도 그중 하나다. 한글로 작성된 안내문에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일찍이 이곳에서 공학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여기서 공부한 학생들이 일본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쇼인이 가르친 건 공학이 아니라 제국주의 세계관이다. 그는 봉건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이 지배하는 국가를 세워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했다. 그의 정치이념은 천황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 평범한 백성들이 궐기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초망굴기론(草莽崛起論)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신분 타파와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하는, 당시로선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그가 집필한 유수록(幽囚錄)에는 '일본이 중국과 조선을 정복해 국체를 단단히 했다면 서구 열강에 굴종하는 치욕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외세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하루빨리 조선을 공격해 공물을 바치게 하고 대만과 만주를 포함한 대제국을 건설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으려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세계관이다.

봉건 막부는 썩었으니 천황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 서구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강력한 무력을 키워야 한다. 한반도를 넘어 대륙을 향해 나가야 한다. 구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그의 주장은 피 끓는 나이의 청년들에게 강렬한 울림으로 들렸을 것이다. '일타 강사'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얻고자 젊은 무사들이 그의 집으로 모인 이유다.

요시다 쇼인의 집으로 모여든 젊은 무사들
  
▲ 일본 하기시, 쇼카손주쿠 앞에 설치된 안내판  요시다 쇼인이 사숙을 만들고 운영한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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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곳을 거쳐 간 학생이 9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 대다수가 하급 무사 출신이다. 한국인에게 사무라이(侍)의 이미지는 칼을 차고 다니는 무사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향교와 사숙 등 크고 작은 교육기관에서 유학을 공부한 지식인(士)으로 봐야 한다. 신분 질서가 빠르게 해체되면서 이들은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고,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칼 대신 책을 잡았다.

에도 시대의 이념적 토대는 중국에서 건너온 주자학(朱子學)이었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는 수직적 상하 관계에 입각해 있었고, 이는 출신과 서열을 중시하는 중세 일본 사회에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가 발달하고 전통적인 위계질서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학문과 이념들이 속속 등장한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일본 고유의 유학이 발흥,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토(水戸)에서 시작된 국학이 대표적이다.

쇼인이 일본의 시각에서 맹자를 풀이한 것도, 고전의 힘을 빌려 정한론과 제국주의 이념을 구체화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뿌리는 유학(儒學)이고, 변화의 씨앗은 서구열강이 일본 열도를 침범하기 훨씬 이전부터 낡은 체제의 땅 밑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던 셈이다. 그 토대 위에서 칼 찬 사대부, 책 읽는 사무라이들이 600년 이상 지속된 봉건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다.

서당 안에 그에게 정신적 세례를 받은 인물들 사진이 붙어 있다. 유신 3걸 중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조선 병참의 일등 공신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에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영웅으로 추앙받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한반도를 침략한 원흉들일 뿐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쇼인은 약관 29살의 나이에 반역죄로 막부 정권에 의해 참수당한다. 하급 무사 출신인 그가 당대의 사무라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지만, 20대의 어린 청년이 벽촌의 작은 서당에서 불과 1년 사이에 유신의 지도자 다수를 길러냈다는 해석은 과도해 보인다. 진실이 무엇이건, 극우 제국주의 이념을 설파하던 자리가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는 사실 앞에 슬픔과 분노가 느껴진다.

일제 침략전쟁을 이끈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위패 1호가 요시다 쇼인이다. 많은 일본인이 이곳 하기 시를 찾아 그의 생가를 돌아보고 신사에 들러 참배한다. 그의 고향 후배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도 그중 한 명이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건 당연하고 또 필연적이라는 믿음을 설파한 이에게 수상이 존경을 표하는 모습은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잘 알아도 요시다 쇼인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 국정교과서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일본에서 쇼인을 다룬 책이 천 권 넘게 출간된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짧은 생애를 강렬하게 살아냄으로써 유신을 정초(定礎)한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영웅의 일대기를 좋아하는 정서 때문일까. 일본인의 마음에 그는 여전히 신화로 남아있다.
 
 
▲ 이토 히로부미 구택으로 가는 길 안내판 규슈지역 어디에서나 한글로 된 안내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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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카손주쿠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이토 히로부미가 살았던 고택과 별관이 있다. 30평 남짓한 단층집으로, 국가 사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고택 옆 작은 공터에 이토의 동상이 서 있다. 이등박문(伊藤博文).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익숙한 이름이다. 을사늑약 후 초대 총감이 되어 한반도 강점에 앞장선 장본인이다. 조건반사처럼, 대한국인 안중근의 얼굴이 떠오른다. 두 사람은 역사 속에 하나의 고리로 묶여 있다.

별관 입구에 하기를 빛낸 다섯 명의 청년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에도 말기, 영국으로 밀항해 런던대학에서 공부한 이력을 가진 5명의 하급 무사들. '조슈 파이브'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일본 조폐국 설립자인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일본 철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일본 공학의 대부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초대 내각 외무대신을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초대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그들이다.

조슈번(長州藩)은 야마구치현(縣)의 옛 이름이다. 메이지 초기, 폐번치현(廃藩置県,1871년)으로 번이 현으로 바뀌었다.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배격하자는 존황양이(尊皇攘夷)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 중 하나가 조슈번이었다.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과 동맹(1866년)을 맺고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260년간 유지되던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린 후, 유신 시대를 열어간 양대 축이다.
 
▲ 하기시, 다카스기 신사쿠 동상 일본 최초의 기병대를 창설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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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에는 요시다 쇼인 사숙과 신사 외에도 일본 우익의 뿌리가 할 수 있는 인물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유신 3걸로 활약한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의 생가, 기병대를 창설해 4천 명의 결사대로 도쿠가와 막부 10만 대군을 격파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탄생지, 쇼인이 죽고 뒤를 이어 막부 타도 운동을 이어다가 자결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의 탄생지가 이곳에 있다. 모두가 쇼인의 제자들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성하마을(castle town)을 둘러봤다. 막부시대 고급 무사들이 살던 주택과 담장이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있는 곳이다. 마당 정원에 노란 감귤이 달린 나무들이 눈에 많이 띈다. 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 계급이 몰락하자 생계를 위해 감귤나무를 많이 심었고 그 전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기는 제주도와 위도가 비슷하다. 하기 해안가에 밀려온 최초의 감귤 씨앗은 제주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 하기시 성하마을 주택가의 감귤나무 에도시대 말기부터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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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현은 일본에서 정치 1번지로 불린다. 초대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며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노부스케의 친동생으로 박정희 정권과 단돈 5억 달러의 배상금으로 일제 강점의 역사를 청산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이들에게서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아베 신조 등 이 지역에서 배출한 총리만 9명에 이른다. 한반도 강제 병합의 주역 10명 중 8명이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자민당(自民黨)으로 대표되는 일본 보수 우익세력의 뿌리는 넓고 깊다. 도쿠가와 막부가 망한 시점(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 정치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 우기고, 제국주의 시절에 있었던 과거사는 이미 청산되었다고 강변하고, 위안부는 정부의 강압 없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로 뛰어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왜 일본은 반성하지 않는가.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독일은 유대인 희생자 위령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데 같은 전범인 일본에서는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를 당당하게 참배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가해자임에도 피해자 흉내를 내는 이유는 뭘까. 일본 사회가 과거 조상들이 벌인 침략 행위에 대해 통렬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는 작업은 간단치 않다. 이유가 무엇이건, 이 비틀린 역사의식의 뿌리에는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우월감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국가주의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멀리는 임진왜란부터 가깝게는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증명해주듯, 일본의 극우 세력은 언제든 요시다 쇼인이 남긴 글을 지렛대로 군국주의의 망령을 다시 키우려 할지 모른다. 매의 눈으로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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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8년 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 경천사에 세워졌던 10층 석탑(왼쪽). 일본에 반출되었다 다시 돌아와 1960년 경복궁에 세워진 석탑(가운데). 2005년 다시 해체 복원되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온 현재의 경천사 10층 석탑(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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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서프라이즈!(Oh! Surprise!)"

2022년 5월 21일 저녁.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환영 만찬 장소인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 동문으로 입장한 바이든 대통령은 박물관 천장을 찌를 듯 높이 치솟아 있는 무언가를 올려다보며 "오! 놀랍군요!..."라며 경탄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고려시대 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탑으로 국보 제86호로 지정된 '경천사지 10층 석탑'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서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균형감을 지닌 크고 화려한 석탑이 실내에 우뚝 서있는 모습에 감동한 것 같았다"라고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경천사지 10층 석탑' 외에도 국보 '황남대총 북분 금관'과 보물 '여주 출토 동종'(청녕4년 명 동종)을 둘러보며 한국 문화의 우수성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미 정상회담 만찬 장소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선정한 것과 관련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 않았나 싶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과 함께 해체 복원되어 다시 세워진 경천사 10층 석탑. 현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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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이국적 양식이 섞여있는 10층 석탑
 

우리나라 박물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약 41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1908년 9월 종로의 창경궁에서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시련을 겪으며 남산, 덕수궁, 구 중앙청 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 2005년 현재의 자리인 용산에 터를 잡았다.

박물관 로비에 들어서면 13.5m 높이의 크고 화려한 석탑이 박물관 3층 높이까지 치솟아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위용을 드러낸다. 실내에 서 있는 아파트 4층 높이의 탑을 상상해보라. 바이든 대통령뿐만 아니라 관람객 누구라도 그 크기와 화려함에 압도당하게 된다. 전시관을 이동할 때나 계단을 따라 층을 올라갈 때도 줄곧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주게 된다.

한국사 검정능력 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석탑은 고려시대 때 대리석을 깎아 만든 '다각 다층 석탑'으로 1348년 3월 고려 충목왕 4년에 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의 개풍군 부소산 기슭 '경천사(敬天寺)'에서 만들어졌다. 1층 탑신석 상단에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지정팔년무자3월(至正八年戊子三月日)'이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1348년 3월 고려 충목왕 4년에 세워진 경천사지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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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은 원나라 순종 때 사용했던 연호로 지정 8년은 1348년이다. 탑의 형태를 보면 3단으로 된 기단은 위에서 볼 때 한자 '아(亞)' 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탑의 재료가 대부분 화강암인데 반해 특이하게 대리석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원나라 양식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10층 탑신(塔身) 중 3층까지는 기단과 동일한 '아(亞)'자 일명 '사면 돌출형' 모양이다. 기단부에는 밑에서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의 장면과 나한들을 새겨 놓았다.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들의 법회 모습을 16장면으로 묘사한 화려한 조각들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형식은 원나라 때 유행한 라마교 양식이다. 3층은 지붕을 두 겹으로 구성하여 변화를 주었다.
   
 
  석탑의 기단부. 위에서 볼 때 한자 ‘亞’ 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원나라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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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4층부터 10층까지는 정사각형 형태를 취하고 있다. 몸돌에 난간을 세우고 옆모양이 여덟 팔(八) 자 형태의 '팔작지붕' 모양이다. 옥개석의 낙수면에 기와골을 섬세하게 모각하여 고려시대 목조 건물을 연상케 하는 우리 전통 양식을 취하고 있다.

몸돌 4면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오존 불상을 생생하게 조각했다. 이는 불교 존상들의 모습을 위계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각 모서리마다 둥근기둥을 모각했다. 탑의 꼭대기 상륜부에는 네모난 보탑과 보주가 있다.

하늘을 향해 날렵하고 세련되게 솟아오른 탑신. 층층이 새겨진 다양하고 디테일한 조각들.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시대 석탑의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할 만하다.
  
 
  탑신에 새겨진 오존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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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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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 석탑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보 제2호로 지정된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 건립에 큰 영향을 준다. 두 탑은 마치 쌍둥이라 할 만큼 매우 유사하다.

원나라 황제와 황후·황태자를 위하여

그렇다면 고려에서는 왜 우리나라에서 잘 나지도 않는 대리석을 사용하여 이국적인 원나라 양식과 우리 전통양식을 혼합하여 이 탑을 세우게 되었을까. 고려말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서기 1259년. 7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끈질긴 침략 전쟁에 항복한 고려는 결국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이후 80여 년 동안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으며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야 했다. 백성들은 원나라 침략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제공하느라 허리가 휘었다. 수시로 원나라 황실에서 요구한 '공녀'와 '환관'들을 바쳐야 했다.
  
 
  탑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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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정에서는 '과부처녀추고별감'을 만들어 과부와 처녀들을 모집했다. 이때부터 백성들은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찍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백성들의 반원(反元) 감정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이런 와중에 누가 왜 그토록 원성이 자자한 원나라 양식의 탑을 쌓았을까.

1층 탑신석에 새겨진 발원문에 답이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이 석탑의 발원자는 당시 원나라와 가까운 '친원파(親元派)' 세력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진녕부원군 강융(姜融)과 자정원사(資政院使) 고룡봉(高龍鳳), 대화주 성공(省空), 시주 법산인 육이(六怡) 등의 시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원(元)나라 황제와 황후·황태자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며 이 탑을 세웠다.
   
 
  탑신 상부와 상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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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융은 관노 집안 출신으로 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신임을 얻었고 그의 딸을 원나라 정승에게 바쳐 권세를 누린 인물이다. 고룡봉 또한 고려 출신 환관으로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간 기철(奇轍)의 여동생을 원의 황제인 순제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공녀로 끌려가 고룡봉의 추천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의 여인. 드라마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는 '기황후(奇皇后)'다. 황제의 총애를 받던 기황후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고 그 아들은 훗날 북원의 황제가 된다.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가 황후가 된 고려의 여인. 드라마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는 ‘기황후(奇皇后’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나라 황제 순제와 기황후 그리고 황태자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며 친원파들이 지은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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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여동생을 팔아 출세한 '아비'와 기씨 '오래비들'을 둘러싼 친원파 세력들은 '기황후'를 등에 없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고려 조정을 쥐락펴락했다. 그들은 고려 왕실에서 가까운 경천사에 원나라 양식의 10층 탑을 세우고 뒷배가 돼준 황제와 황후, 황태자의 만수무강을 빌며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석탑의 수난사

고려말 친원파들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개경 경천사에 세워진 석탑은 어떻게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들어오게 됐을까. 여기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 문화재 수난사가 담겨 있다.

고려 왕실의 출입이 잦았던 경천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0층 석탑은 560여 년을 굳건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인박명이라 했듯이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큰 수난을 겪는다.
  
 
  1960년에 경복궁에 다시 세워진 경천사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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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식민통치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조선 전역을 돌며 우리 문화재를 조사했다. 1902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라는 도쿄대학 미술사학 교수가 조선땅을 밟는다. 그는 우리나라 전역을 돌며 왕궁, 고분, 사찰, 성곽, 문루, 미술, 공예 등 유적과 유물 전반을 조사했다. 2년 뒤 1904년 이조사를 바탕으로 <조선건축조사보고서>가 발간된다.

이 보고서가 발간되자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07년 무참하게 해체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해 1월 고종의 아들이자 훗날 순종이 되는 대한제국 황태자의 결혼식이 열린다. 일본 국왕의 특사 자격으로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가 결혼식에 참석한다.

평소 경천사 석탑의 아름다움에 군침을 흘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다나카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해 3월 다나카는 이 탑을 해체했다. 주민들과 군수가 나서 반발하자 헌병들을 동원해 총칼로 위협하며 막았다. 한밤중에 해체한 석탑을 소달구지에 실어 개성역으로 운반한 다음 일본으로 가져갔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 (Home B. Hulbert 1863~1949) 박사. 23살 때 한국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로 독립신문 창간을 도운 언론인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석탑 강탈 사건을 폭로했다. 죽어서도 한국 땅에 묻혔다. 한강변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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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강탈 사건'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대한매일신보>는 10여 차례 논설을 실으며 불법반출의 부당성을 알렸다. 외신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은 지속적으로 문화재 약탈을 폭로했다.

국제적인 비판 여론이 확산되자 일제는 1918년 석탑을 반환했다. 원래 있던 경천사가 아니라 총독부가 있는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긴 했으나 반출 당시 훼손이 심했던 터라 당시 기술로는 복원이 어려웠다. 해체된 상태로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방치됐다. 1960년에 겨우 다시 세워졌고 1962년 국보 제86호로 지정됐다.
 
 
  1960년에 경복궁에 다시 세워진 경천사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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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끝이 아니었다. 경복궁에 세워진 석탑은 1995년 다시 해체되었다. 산성비에 약한 대리석 석탑의 훼손이 심해 보존 처리가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존처리는 10년이 걸렸다. 그리고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옮겨올 때 경천사 10층 석탑도 함께 세워져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으로 반출된 지 실로 100여 년 만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석탑은 수난을 겪는 사이 상륜부의 원형이 심하게 훼손돼 온전하게 복원할 수 없었고, 탑 내부에 있었을 '사리장엄구'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약산 김원봉 욕보이는 빨갱이 프레임

정희상 기자 입력 2019.04.05. 19:01                            

      
조선의열단을 창단한 약산 김원봉은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는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로 낙인찍혔고, 북에서는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었다. 약산의 삶과 비참한 가족사를 추적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가운데 여전히 남북에서 잊힌 이들이 있다. 의열단 단장 약산(若山) 김원봉 선생이 대표적이다. 약산의 독립운동이 오랜 금기를 깨고 조금이나마 알려진 것은 영화를 통해서였다. 2015년과 2016년 잇따라 개봉한 영화 <암살>과 <밀정>은 뒤늦게나마 후세가 약산의 독립운동 공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이었다.

약산은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였다. 일제가 백범 김구 선생에게 내건 현상금 60만원보다 많은 100만원을 내걸 정도였다. 1919년 조선의열단(의열단)을 창단한 약산은 크고 작은 무장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0년대에는 백범과 독립운동의 양대 거목으로 불릴 만큼 조직화된 항일 무장투쟁에 매진했다.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분투했지만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친일파가 득세하는 분단된 조국이었다.

ⓒ시사IN 윤무영 오는 11월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겠다고 밝히는 약산의 조카 김태영씨.ⓒ시사IN 윤무영 오는 11월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겠다고 밝히는 약산의 조카 김태영씨.

친일 경찰 노덕술, 약산 취조하며 뺨 때려

1947년 2월 약산은 친일 경찰로 악명 높았던 미군정 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 뺨을 맞는 등 치욕을 겪었다. 약산은 비참한 현실에 울분을 토하고 월북을 택했다. 비운의 서막이었다. 그는 남북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북에서는 1958년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었다.

약산이 북으로 간 뒤, 집안은 멸문에 가까운 참화를 당했다. 남은 가족 대부분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총살당했다. 당시 여고생이던 막내 여동생 김학봉씨(2월24일 작고)는 고문과 연좌제를 겪으며 살아남았다. 그녀의 세 아들 중 한 명인 김태영씨(63)가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 발족을 서두르고 있다. 약산의 조카 김태영씨는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30년 넘게 미국에서 틈틈이 중국을 오가며 삼촌의 행적을 추적했다. 오는 11월 의열단 창단 기념일에 맞춰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겠다는 김태영씨를 만났다.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국경일인 천장절(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에 일장기를 변소에 버렸다. 이 사건으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후 열다섯 살에 그는 서울의 중앙학교로 편입했다. 중앙학교는 계몽운동가들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했다. 열아홉 살이던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3·1운동을 진압한 일제의 만행을 접하고 더 이상 평화적 방법으로는 독립을 실현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다.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은 이렇게 탄생했다.

의열단은 1920년 봄 처음으로 국내에 공작조를 보냈다. 실패로 돌아갔다. 일제에 모두 체포당하는 과정에서 이름이 공개되었다. 이어 9월과 12월에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에 각각 폭탄을 투척해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다.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 1922년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면서 활약상이 알려졌다.

ⓒ연합뉴스 2015년 8월 약산 김원봉의 막냇동생 김학봉씨(당시 83세)가 약산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연합뉴스 2015년 8월 약산 김원봉의 막냇동생 김학봉씨(당시 83세)가 약산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 통치는 갈수록 강고해졌다. 1926년 약산은 항일 군대를 양성해 조직적인 독립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전환한다. 암살투쟁이라는 의열단의 한계를 인식한 결과였다. 그는 의열단원 24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 군사전략을 배우고,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등 중국 항일운동의 주요 지도자들과 교분을 맺었다.

약산은 민족주의자였다. 1927년에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깨뜨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약산의 대원들 대부분은 공산당 지역에 남아 일제와 싸웠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이념을 넘어 누구와도 합작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밝히고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만주사변 후에는 국민당 장제스의 협력을 받아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시인 이육사 선생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 출신을 바탕으로 조선의용대를 만든 약산은 조선민족혁명당을 발족했다. 독립을 위해 범민족적 단체들이 모여야 한다는 취지였다.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총 9개 정당과 단체가 참여했다. 1938년 10월 중국과 일본의 전투가 한창일 무렵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항일전을 도왔다. 1944년에는 충칭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약산은 좌우 대립이 첨예해지자 좌익 계열 연합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김원봉은 친일파와 우익 정치 깡패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그는 1947년 3월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총파업 배후로 의심받았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 출신 노덕술을 시켜 약산을 체포했다. 노덕술은 약산을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며 뺨을 때리는 등 갖은 수모를 안겼다. “외삼촌은 그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뒤 의열단 동지 유석현 선생을 만나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약산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태영씨는 가족들만 간직해온 기억을 꺼내 약산의 월북 전후 사정을 들려주었다. 1947년 7월19일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울 혜화동에서 한지근의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약산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몽양 장례식 후 약산은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는 제보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초기, 형제·사촌 9명 총살당해

고향 집에서 지내다 하루는 가족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다급한 전화를 받은 뒤였다. “그때 외숙모님은 둘째를 낳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심상찮은 외삼촌의 채근에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집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고 한다. 약산은 떠나기 전 동생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앞으로 누가 물어보거든 절대로 약산의 동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했다. 외삼촌이 떠난 뒤 사복 차림의 무장대가 담을 뛰어 넘어와서 총을 쏘아댔다. 집을 뒤지더니 외삼촌 행방을 대라고 가족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약산은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다 1958년 10월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납북된 조소앙·안재홍 등과 함께 ‘중립화 평화통일 방안’을 주장하면서 김일성 주석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약산은 장제스와 맺은 친분이 국제간첩 혐의로 둔갑되어 숙청됐다고 한다.

남한에 남은 약산의 가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한국전쟁 초기 형제·사촌 9명은 김원봉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군경에 총살당했다. 약산의 부친은 외딴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 간신히 총살을 면한 약산의 다섯째 동생 김봉철씨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자 형제들의 유골을 수습해 장례식을 치렀다. 그는 책임자 처벌과 유족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김봉철씨는 특수반국가행위자로 구속되었다. 형제들의 묘지는 파헤쳐지고 비석은 산산조각 났다. 김봉철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5년6개월가량 복역하다 출소했지만 화병을 앓다 1986년 숨졌다.

여동생 김학봉씨는 중앙정보부 감시 아래 살았다.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전전했고 자녀들을 고아원에 맡겼다. “외할머니가 생전 몰래 보관한 외삼촌의 유품을 어머니에게 물려주고 돌아가셨다. 장제스 총통이 외삼촌에게 선물한 족자 4개와 의열단원과 찍은 흑백사진들이었다. 중앙정보부의 감시가 삼엄해 어머니는 혹시나 자식들에게 화가 미칠까 봐 장 총통이 선물한 족자 4개를 불태웠다. 사진만 보관하다가 나에게 물려주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김태영씨는 어린 시절 외삼촌을 원망했다. 약산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는 40년이 걸렸다. 남쪽에 남은 가족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경험 때문이었다. “약산은 아무리 친일파가 득세해도 이승만에게 협조하는 척하면서 남한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북으로 가는 바람에 남은 형제자매가 다 죽는 고초를 안겼다는 원망이 들었다. 중국 내 독립운동 흔적을 찾아다녀보니 친일파를 적으로 보고 평생 싸운 그분의 성격상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더라.”

그는 연좌제의 사슬을 피해 1982년 미국으로 떠났다. 약산의 동지였던 유석현씨가 당시 민정당 고문이라 도움이 되었다. 김태영씨는 미국에서 자수성가해 사업체를 일궜다. 1990년대 초부터는 약산의 행적을 찾아 중국을 드나들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김원봉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였다. 월북한 북한 고위층이었다는 이유였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약산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유족은 2007년 약산의 독립운동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하며 서훈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약산이 자발적으로 월북한 데다 북한에서 장관급 이상을 지냈다는 이유에서였다.

영화 <암살>로 약산의 독립운동이 얼마간 베일을 벗으면서 그를 바라보는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2015년 김태영씨는 당시 야당 대표이던 문재인 대통령을 찾아갔다. 약산을 다룬 영화 <암살>이 나왔다고 알렸다. 당직자들과 영화를 본 문재인 대통령은 “약산의 조카를 직접 만났다. 약산은 정말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한 분인데 해방 후에 북으로 갔다가 숙청되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설 곳이 없었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친일파가 아직도 떵떵거리며 사니…”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는 약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선정을 권고했다. 보수 진영은 강력히 반발한다. ‘약산이 골수 사회주의자인 데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는 이유를 댔다.

약산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좌우를 넘나들었던 독립운동가였다. 필요하다면 중국 국민당과도,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았고 또 아나키즘에 심취하기도 했다.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몽양 피살 이후 신변 안전을 위해 ‘반강제’로 월북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맥락도 봐야 한다. 더구나 북에서는 자본주의 진영 장제스와 내통한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다.

올해도 약산에 대한 서훈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김태영씨는 이러한 현실이 여전히 답답하다고 했다. “친일파들이 아직까지 떵떵거리며 사니까…. 빨갱이를 계속 만들어내거나, 빨갱이 프레임을 덧칠해야만 유지되는 듯한 대한민국 보수의 정치철학이 유감이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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