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에서 <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조에 언급된 고구려.낙랑.마한.변한.백제.동옥저 등의 위치는 서나벌.신라와 비교하여 추정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적색 원의 위치를 한반도 지역에 배열하는 것 자체가 식민사관이고 동북공정 홍보하는 무지무식한 짓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적색원 위치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일까?

위와 같이 서나벌은 지금의 요하 하류 북안 지점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왜일까?
당시의 요수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가 위 추정도에 표시한 물길이였기 때문이다. 결국 <후한서/군국지> 요동군의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곳으로 대요수가 흘러들었고 동시에 현토군에서 흘러오는 2100 리 길이 염난수도 흘러들었다.
<한서/지리지>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玄兎郡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麗莽曰下句麗 屬幽州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후한서/군국지>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一)...
(一)魏氏春秋曰 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 因名之水小水貊
玄兎郡 武帝置 洛陽東北四千里
樂浪郡 武帝置 洛陽東北四千里
위 추정도가 비록 지금의 란하 유역 지도 표시와는 다르지만 중국 역대국의 약 2600 여 년 간 곧 춘추시대부터 1911 년 청국이 멸망한 해까지의 지리와 지형지세는 마땅히 위와 같았고 또한 지형지세는 당연히 현재도 같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1873 년경부터 일본 명치왕과 서향융성은 하수인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아래와 같이 난수.대요수.염난수 곧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란하 1 물길로 변조한 아래와 같은 습작지도를 간행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그러한 습작지도는 1932 년 일본 꼭두각시 만주국지도에서 공식 표시되었고 현 중국전도는 만주국지도를 습용한 것이다.
결국 이조선 선학들이 기록으로 남긴 백두산의 좌향인 해좌사향亥座巳向이 축좌미향丑座未向이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지무식한 한국사학계와 재야는 위 지리가 잘못인 줄도 모른다.
- 일본놈이 조작하여 제시하는 이조선 영조시기 간행된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보이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
도> , 한국문화재청이 2007 년 보물 1537 호로 지정

- 정상적인 고지도 <무제도>, 아래 한국보물 1537 호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원본으로 추정됨
소장: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따라서 이덕일이 제시한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와 중국 강소.안휘성 지역의 대륙백제와 고구려의 북쪽 강역 표시는,
명백한 식민사관.동북공정 옹호 논리이며 동시에 지극히 무지무식한 망상.과장적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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