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浿水

[수경]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림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海로 들어간다

 

 

[주]
許慎云..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盖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衞滿 自浿水西 至朝鮮. 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 田織信厚, 約以八法, 而下知禁, 遂成禮俗. 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 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 討 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髙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 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逺, 循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于事差謬, 盖經誤證也.
허신(許慎)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루방현을 나와 동쪽으로 海로 들어가는데 혹은 패수현을 나온다고 하였다.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군 동북쪽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 동쪽에 있는데 모두 (패수현과 루방현) 그 현을 나와 [남쪽으로, 본문의 南을 而로 쓴 것도 있다] 루방현을 지난다고 하였다. 옛날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으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는데 조선은 옛 기자의 나라이다. 기자는 백성에게 올바름을 가르치고 밭갈기와 옷감짜기를 믿음과 두터움으로 하였으며 8법으로 조약하여 금하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드디어 예절과 풍속을 이루었다. 전국시대에 위만이 이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방 수천리였다. 그 자손 우거에 이르러 한무제 원봉2년에 루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右渠)를 공격하였는데, 우거를 패수(浿水)에서 깨뜨려 드디어 우거를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흘렀다면 동쪽으로 건너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고 있는데 내가 고구려 사신에게 찾아가 물으니 말하기를 고구려의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난다고 하였는데, 즉 낙랑군 치소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평양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는데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漢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치소인 낙랑군 조선현을 지나고 서북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또한 漢이 흥하자 조선이 너무 멀어 요동의 옛 塞를 복원하여 패수를 경계로 한 것이다. 이것을 고찰하여 보면 옛 일에 대한 어긋남이 있는데 모두 수경의 어긋남을 증명하는 것이다.

 

 

• 大遼水

[수경]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대요수(大遼水)는 새(塞) 밖의 위(衛) 백평산(白平山) 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새(塞)로 들어간 후 요동군(遼東郡) 양평현(襄平縣) 서쪽을 지난다.

 

 

[주]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요수(遼水)는 또한 지석산(砥石山) 에서 나와서 새(塞) 밖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료동군(遼東郡) 망평현(望平縣) 서쪽과 만나는데(直) 왕망이 장설(長説)로 고쳤다. 굽어서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襄平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난다. 진(秦) 시황(始皇) 22년 연(燕)을 멸하고 료동군(遼東郡)을 두었는데 양평현(此)을 다스렸다. 한(漢) 고제(髙帝) 8년에 기통(紀通)을 봉하여 후국(侯國)이 되게 하였는데 왕망이 창평(昌平)으로 바꾸었으며 옛 평주(平州) 가 다스린다.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案此下近刻有, 遼水又南厯縣, 有小遼水, 其流注之也. 十五字]
(대료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료대현(遼隊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순목(順睦)으로 바꾸었다. 공손연(公孫淵)이 장군 필연거(畢衍拒) 사마의(司馬懿)를 료대(遼隊)에 보냈는데 즉 이 곳이다.

 

[수경]
又東南過房縣西
(대요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房縣) 서쪽을 지난다.

 

[주]
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 東南 , 北流, 西北屈, 逕廣成縣故城南. 王莽之平虜也, 俗謂之廣都城.又西北, 石城川水注之,水出西南石城山, 東流逕石城縣故城南. 地理志..右北平有石城縣, 北屈逕白鹿山西, 即白狼山也. 魏書國志曰..遼西單于蹋頓尤强, 為袁氏所厚, 故袁尚歸之, 數入為害. 公出盧龍, 塹山堙谷五百餘里, 未至柳城二百里, 尚與蹋頓將數萬騎逆戰, 公登白狼山, 望栁城, 卒與虜遇, 乗其不整, 縱兵擊之, 虜衆大崩, 斬蹋頓, 胡漢降者二十萬口. 英雄記曰..曹操于是擊馬鞌, 于馬上作十片, 即于此也. 博物志曰..魏武于馬上逢獅子, 使格之, 殺傷甚衆. 王乃自率常從健兒 數百人擊之. 獅子吼呼奮越, 左右咸驚. 王忽見一物, 從林中出, 如貍, 超上王車軛上. 獅子將至, 此獸便跳上獅子頭上, 獅子即伏不敢起, 于是遂殺之, 得獅子而還. 未至洛陽四十里, 洛中雞狗皆無鳴吠者也. 其水又東北入廣成縣, 東注白狼水. 白狼水北逕白狼縣故城東, 王莽更名伏狄. 白狼水又東, 方城川水注之. 水發源西南山下, 東流, 北屈逕一故城西, 世謂之雀目城. 東屈逕方城北, 東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 逕昌黎縣故城. 西地理志曰..交黎也, 東部都尉治, 王莽之禽虜也. 應劭曰..今昌黎也. 髙平川水注之, 水出西北平川, 東流逕倭城北, 盖倭地人徙 之. 又東南逕乳樓城北, 蓋逕戎鄉邑, 兼夷稱也. 又東南注白狼水白, 狼水又東北, 自魯水注之, 水導西北逺山, 東南注白狼水. 白狼水又東北逕龍山西, 燕慕容皝以栁城之北, 龍山之南, 福地也, 使陽裕築龍城, 改栁城為龍城縣. 十二年, 黒龍 白龍 見于龍山, 皝親觀龍, 去二百步, 祭以太牢, 二龍交首嬉翔, 解角而去. 皝悦, 大赦, 號新宫曰和龍宫. 立龍翔祠于山上. 白狼水又北逕黄龍城東, 十三州志曰.. 遼東屬國都尉治, 昌遼道, 有黄龍亭者也. 魏營州刺史治. 魏土地記曰..黄龍城西南有白狼河, 東北流, 附城東北下, 即是也. 又東北, 濫真水出西北塞外, 東南厯重山, 東南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出, 東流, 分為二水, 右水疑即渝水也. 地理志曰..渝水首受白狼水, 西南循 山, 逕一故城西, 世以為河連城, 疑是臨渝縣之故城, 王莽曰馮徳者矣. 渝水南流, 東屈與一水㑹, 世名之曰㯼倫水, 盖戎方之變名耳. 疑即 地理志 所謂侯水北入渝者也. 十三州志曰..侯水南入渝. 地理志 盖言自北而南也. 又西南流注于渝. 渝水又東南逕一故城東, 俗曰女羅城. 又南逕營丘城西. 營丘在齊, 而名之于遼, 燕之間者, 盖燕齊遼迥, 僑分所在. 其水東南入海. 地理志曰..渝水自塞外南入海. 一水東北出塞, 為白狼水, 又東南流至房縣, 注于遼. 魏土地記曰..白狼水下入遼也.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방현(房縣)은 옛 료동군(遼東郡)에 속한 현이라고 했다.
료수(遼水)는 오른쪽으로 백랑수(白狼水)와 모인다.
백랑수(水)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백랑현(白狼縣)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우북평군 광성현(廣城縣)을 지나고] ,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굽어 흘러 우북평군 광성현(廣成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왕망의 평로현(平虜縣)인데 세간에서는 광도성(廣都城)이라고 한다.
(백랑수는) 또한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석성천수(石城川水)가 백랑수(之)로 들어간다. 석성천수(水)는 서남쪽 석성산(石城山)에서 나오는데 동쪽으로 흘러 우북평군 석성현(石城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우북평군에는 석성현이 있다고 했다. (석성천수는) 북쪽으로 돌아서 백록산(白鹿山)  서쪽을 지나는데 즉 백랑산(白狼山)이다.
위서국지(魏書國志)에서 말하기를 ‘료서(遼西) 선우(單于) 답돈(蹋頓)이 특히 강성하여 원씨(袁氏)에게 두터움을 입었는데 그래서 원상(袁尚)은 그에게 돌아갔고 여러 번 들어가 해를 끼쳤다. 공(公)이 로룡(盧龍)을 나와서, 산을 파고 계곡을 막아 500여리를 가서, 류성(柳城)까지 향하여 200리를 가다가, 오히려 답돈(蹋頓)의 장수와 수만의 기병들과 맞닥뜨려 쓰웠다. 공(公)은 백랑산(白狼山)에 올라 류성(栁城)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오랑캐(虜)와 맞났는데 그들의 정돈되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 병사를 늘어트려(縱兵) 그들을 쳤다. 오랑캐(虜)의 무리는 크게 붕괴되고 답돈의 목을 베었으며 호한(胡漢)인 중에 항복한 자가 20,0000명이다.
영웅기(英雄記)에서 말하기를 曹操于是擊馬鞌, 于馬上作十片, 即于此也. 博物志曰..魏武于馬上逢獅子, 使格之, 殺傷甚衆. 王乃自率常從健兒 數百人擊之. 獅子吼呼奮越, 左右咸驚. 王忽見一物, 從林中出, 如貍, 超上王車軛上. 獅子將至, 此獸便跳上獅子頭上, 獅子即伏不敢起, 于是遂殺之, 得獅子而還. 未至洛陽四十里, 洛中雞狗皆無鳴吠者也.
석성천수(其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광성현(廣成縣)으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백랑수(白狼水)로 들어간다.
백랑수(白狼水)는 북쪽으로 백랑현(白狼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복적(伏狄)으로 바꾸었다. 백랑수(白狼水)는 또 동쪽으로 흐르다가 방성천수(方城川水)가 백랑수(之)로 들어간다. 방성천수(水)는 서남산(西南山) 아래에서 발원하는데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굽어 흘러 옛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이것을 작목성(雀目城)이라고 한다. (방성천수는) 동쪽으로 굽어 흘러 방성(方城) 북쪽을 지나고 동쪽으로 백랑수(白狼水)로 들어간다.
백랑수(白狼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창려현(昌黎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교려현(交黎縣)이며 동부도위(東部都尉)에서 다스리며 왕망이 금로(禽虜)라고 바꾸었다고 했다.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지금의 창려(昌黎)라고 하였다. 고평천수(髙平川水)가 백랑수(之)로 들어가는데 고평천수(水)는 서쪽 북평천(北平川)을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왜성(倭城) 북쪽을 지나는데, 아마도 왜(倭)의 땅에 사람들이 이곳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고평천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유루성(乳樓城) 북쪽을 지나는데 대개 융(戎)의 향읍(鄉邑)을 지난다. (융이란) 이(夷)의 다른 호칭이다. (고평천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백랑수(白狼水)로 들어간다.
백랑수(白狼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자로수(自魯水)가 백랑수(之)로 들어간다. 자로수(水)는 서북쪽 원산(逺山, 먼산?)에서 인도되어 오는데 동남쪽으로 흘러 백랑수(白狼水)로 들어간다.
백랑수(白狼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룡산(龍山)을 서쪽을 지난다. 연(燕) 모용황(慕容皝)이 류성(栁城)의 북쪽과 룡산(龍山)의 남쪽을 복지(福地)로 하였는데, 양유(陽裕)로 하여금 룡성(龍城)을 쌓게 하였으며 류성(栁城)을 룡성현(龍城縣)으로 바꾸었다. 12년에 흑룡(黒龍)과 백룡(白龍)이 룡산(龍山)에 나타났는데 모용황이 친히 보고 200보를 가서 태뢰(太牢) 로 제사하니, 두 룡이 머리를 교차하여 기뻐 빙빙날아 뿔을 풀어헤치고 갔다. 모용황이 기뻐하여 크게 (죄인들을) 사면하고 새로운 궁전을 화룡궁(和龍宫)이라 하였다. 룡상사(龍翔祠)를 산 위에 세웠다.
백랑수(白狼水)는 또한 북쪽으로 흘러 황룡성(黄龍城) 동쪽을 지난다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말하기를 ‘료동속국(遼東屬國)은 도위(都尉)가 다스리며, 창료도(昌遼道) 인데 황룡정(黄龍亭)이 있으며 위(魏) 영주자사(營州刺史)가 다스린다’고 하였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황룡성(黄龍城)의 서남쪽에 백랑하(白狼河) 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황룡성 동북쪽 아래를 접근하는데 즉 이곳이다.
(백랑수는) 또한 동북쪽으로 흐르는데, 람진수(濫真水)가 서북쪽 새(塞) 밖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중산(重山)을 지나서 동남쪽으로 백랑수(白狼水)로 들어간다.
백랑수(白狼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2개로 나뉘는데, 오른쪽 물줄기는 투수(渝水)로 의심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투수(渝水)는 상류에서(首) 백랑수(白狼水)를 받는다(渝水首受白狼水)’고 하였다. (투수는) 서남쪽으로 산을 돌아, 옛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이를 하련성(河連城)이라 하며 이것이 혹시 림투현(臨渝縣)의 옛 성이 아닌가 의심된다. 왕망은 풍덕(馮徳) 으로 고쳤다. 투수(渝水)는 남쪽으로 흘러 동쪽으로 돌아서 하나의 물줄기와 모이는데 세간에서는 이를 개륜수(㯼倫水)라고 하며 대개 융(戎) 지역에서 다르게 붙인 이름이다. 혹 이것은 지리지에서 말하는 ‘후수(侯水)가 북쪽에서 투수(渝水)로 들어간다’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 십삼주지에서 말하기를 후수(侯水)는 남쪽으로 흘러 투수(渝水)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지리지에서 말하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개륜수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투수(渝水)로 들어간다. 투수(渝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이를 녀라성(女羅城)이라고 한다. (투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영구성(營丘城) 서쪽을 지난다. 영구(營丘)는 제(齊)에 있는데 그것을(영구성이라는 것을) 료(遼)에 (있는 성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연(燕)의 사이라는 것은 대개 연(燕)과 제(齊)가 멀어서 (두 나라의 땅이) 나뉜 곳에 겹치는 곳에 있을 것이다. 투수는(其水)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투수(渝水)는 새 밖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하나의 물줄기는 동북쪽으로 새(塞)를 나와서 백랑수가 되는데,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房縣)에 이르러 료수(遼水)로 들어간다. 위토지기에서 말하기를 백랑수는 아래로 흘러 료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수경]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대료수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안시현 서남쪽을 지나고 바다로 들어간다.

 

[주]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십삼주지에서 말하기를 대료수는 새(塞) 밖으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도달하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 小遼水

[수경]
又玄菟髙句麗縣有遼山小遼水所出
또한 현도군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주]
縣故髙句麗胡之國也. 漢武帝元封二年平右渠, 置玄菟郡于此. 王莽之下句麗. 水出遼山, 西南流逕遼陽縣, 與大梁水㑹. 水出北塞外, 西南流至遼陽, 入小遼水, 故地理志曰..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郡國志曰..縣故屬遼東後, 入玄菟. 其水西南流, 故謂之為梁水也. 小遼水又西南, 逕襄平縣, 為淡淵. 晉永嘉三年, 涸. 小遼水又逕遼隊縣, 入大遼水. 司馬宣王之平遼東也, 斬公孫淵于斯水之上者也.
고구려현(縣)은 옛 고구려(髙句麗)  호(胡)의 나라이다.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우거(右渠)를 평정하고 현도군(玄菟郡)을 이곳에 두었는데 왕망이 하구려라고 하였다. 소료수(水)는 료산(遼山)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료양현(遼陽縣)을 지나며 대량수(大梁水)와 모인다. 대량수(水)는 북쪽 새(塞) 밖에서 출발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료양(遼陽)에 이르러 소료수(小遼水)로 들어가는데 옛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대량수(大梁水)는 서남쪽으로 흘러 료양(遼陽)에 이르러 료수(遼水)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며, 군국지(郡國志)에서는 고구려현(縣)은 옛날에 료동(遼東)에 속했는데 후에 현도(玄菟)에 속했다고 하였다. 그 물(其水, 대량수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옛날에는 량수(梁水)라 하였다. 소료수(小遼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襄平縣)을 지나고 담연(淡淵)이 된다. 진(晉) 영가(永嘉) 3년에 물이 말라버렸다. 소료수(小遼水)는 또한 료대현(遼隊縣)을 지나서 대료수(大遼水)로 들어간다.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요동을 평정하였는데 공손연(公孫淵)을 이 물 위에서 목을 베었다. 

 

[수경]
西南至遼隊縣入于大遼水也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료대현(遼隊縣)에 이르러 대료수(大遼水)로 들어간다.

• 濡水

[수경]
濡水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
유수(濡水)는 새(塞) 밖으로부터 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요서군 령지현(令支縣) 북쪽을 지난다.

 

 

[주]
濡水出禦夷鎮東南, 其水二源雙引, 夾山西北流, 出山合成一川. 又西北逕禦夷故城東, 鎮北百四十里, 北流, 左則連淵水注之, 水出故城東, 西北流, 逕故城南, 又西北逕緑水池南. 池水淵而不流. 其水又西, 屈而北流, 又東逕故城北, 連結兩沼, 謂之連淵浦. 又東北注難河. 難河右則汙水入焉. 水出東塢南, 西北流逕沙野南, 北人名之曰沙野. 鎮東北二百三十里, 西北入難河, 濡 難聲相近, 狄俗語訛耳.
유수(濡水)는 어이진(禦夷鎮) 동남쪽을 나오는데 유수의 2개의 발원지가 짝을 이루어 인도되는데, 산을 끼고 서북쪽으로 흐르는 것과 산을 나오는 것이 합하여 1개의 하천을 이룬다. (유수는) 또한 서북쪽으로 흘러 어이(禦夷) 옛 성을 지나고 어이진(鎮) 북쪽 140리를 (거쳐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왼쪽에 련연수(連淵水)가 있어 유수(之)로 들어간다.
련연수(水)는 옛 성의 동쪽을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또한 (련연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록수지(緑水池)의 남쪽을 지난다. 록수지(池)의 물은 연못이라서 흐르지 않는다. 련연수(其水)는 또한 서쪽으로 흘러 돌다가 북쪽으로 흐르며, 또한 동쪽으로 흘러 옛 성의 북쪽을 지나 2개의 늪을 연결하는데 그것을 련연포(連淵浦)라고 한다. (련연수는) 또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난하(難河)로 들어간다. 난하(難河)의 오른쪽에서 오수(汙水) 가 들어간다. 오수(水)는 동오(東塢)의 남쪽을 나와서 서북쪽으로 흘러 사야(沙野)의 남쪽을 지나는데 북인(北人)들이 이를 사야(沙野)라 한 것이다. 어어진(鎮) 동북 230리를 (거쳐서) 서북쪽으로 흘러 난하(難河)로 들어간다. 濡(유)와 難(난)의 소리가 서로 비슷하여 狄(적)들의 세간에서 부르는 말이 잘못된 것이다.  

 

濡水又北逕沙野西, 又北逕箕安山東, 屈而東北流, 逕沙野北, 東北流逕林山北. 水北有池, 潭而不流. 濡水又東北流, 逕孤山南, 東北流, 吕泉水注之. 水出吕泉塢西, 東南流屈而東逕塢南, 東北流, 三泉水注之. 其源, 三泉雁次, 合為一水. 鎮東北四百里, 東南注吕泉水. 吕泉水又東, 逕孤山北, 又東北, 逆流水注之. 水出東南, 導泉西流, 右屈而東北注, 木林山水㑹之. 水出山南, 東注逆水, 亂流東北, 注濡河.
유수(濡水)는 또한 북쪽으로 흘러 사야(沙野) 남쪽을 지나고, 또한 북쪽으로 흘러 기안산(箕安山) 동쪽을 지나다가, 돌아 흘러서 동북으로 흘러 사야(沙野)의 북쪽을 지나며, 동북쪽으로 흘러서 림산(林山) 북쪽을 지난다. 유수(水)의 북쪽에는 연못이 있는데 물이 흐르지 않는다. 유수(濡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서 고산(孤山) 남쪽을 지나며,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려천수(吕泉水)가 유수(之)로 들어간다.
려천수(水)는 려천오(吕泉塢) 서쪽을 나와서, 동북쪽으로 흘러 돌아흐르다가 동쪽으로 흘러 려천오(塢) 남쪽을 지나며,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삼천수(三泉水)가 려천수(之)로 들어간다. 삼천수(其)의 발원지는 삼천안차(三泉雁次, ???)인데, 합하여 하나의 물길이 된다. 어이진(鎮) 동북쪽 400리(를 거쳐서) 동남쪽으로 흘러 (삼천수가) 려천수(吕泉水)로 들어간다. 려천수(吕泉水)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고산(孤山) 북쪽을 지나며, 또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역류수(逆流水)가 려천수(之)로 들어간다. 역류수(水)는 동남쪽의 도천(導泉)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굽이돌아 흐르다가 동북쪽으로 물을 대는데 목림산수(木 林山水)가 그곳에 모인다. 목림산수(水)는 산의 남쪽으로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역수(逆水)로 들어가는데 난류가 일어나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유하(濡河)로 들어간다.

 

濡河又東, 盤泉入焉. 水自西北, 東南流注濡河. 濡河又東南, 水流迴曲, 謂之曲河. 鎮東北三百里, 又東出峽,入安州界, 東南流逕漁陽白檀縣故城. 地理志曰..濡水 出縣北蠻中. 漢景帝詔李廣曰..將軍其帥師東轅, 弭節白檀者也. 又東南流, 右與要水合, 水出塞外, 三川竝導, 謂之大要水也. 東南流, 逕要陽縣故城東, 本都尉治, 王莽更之曰要術矣. 要水又東南流逕白檀縣, 而東南流入于濡. 濡水又東南, 索頭水注之. 水北出索頭川, 南流, 逕廣陽僑郡西. 魏分右北平置, 今安州治. 又南流注于濡. 濡水又東南流, 武列水入焉. 其水三川派合. 西源右為溪水, 亦曰西藏水, 東南流出溪, 與蟠泉水合. 泉發州東十五里, 東流九十里, 東注西藏水. 西藏水又西南流, 東藏水注之. 水出東溪, 一曰東藏水, 西南流出谷, 與中藏水合. 水導中溪, 南流出谷, 南注東藏水, 故目其川曰三藏川, 水曰三藏水.東藏水又南, 右入西藏水, 亂流右㑹龍泉水. 水出東山下, 淵深不測. 其水西南流注于三藏水, 三藏水又東南流, 與龍芻水合, 西出于龍芻之溪, 東流入三藏水, 又東南流, 逕武列溪, 謂之武列水. 東南厯石挺下, 挺在層巒之上, 孤石雲舉, 臨崖危峻, 可髙百餘仞. 牧守所經, 命選練之士, 彎張弧矢, 無能屆其崇標者. 其水東合流入濡.
유하(濡河)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반천(盤泉)이 (유하로) 들어간다.
반천수(水)는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유하로 들어간다.
유하(濡河)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물길이 돌아구부러지는데(迴曲) 그것을 곡하(曲河)라 한다. 어이진(鎮) 동북쪽 300리를 (거쳐서), 또한 동쪽으로 골짜기(峽)를 나와 안주(安州)의 경계로 들어가며, 동남쪽으로 흘러 어양군(漁陽郡) 백단현(白檀縣) 옛 성을 지난다.
한서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혁수(洫水) 가 백단현(縣) 북만(北蠻)의 가운데를 나온다고 하였다. 한(漢) 경제(景帝)가 리광(李廣)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將軍其帥師東轅, 弭節白檀者也.’
유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요수(要水)와 합하여진다.
요수(水)는 새(塞) 밖에서 출발하여 3개의 하천이 아울러 인도되어지는데 그것을 대요수(大要水)라고 한다. (대요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요양현(要陽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원래 도위(都尉)가 다스렸고 왕망은 요술현(要術縣)으로 고쳤다. 요수(要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백단현을 거치고, 동남쪽으로 흘러 유수로 들어간다.
유수(濡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색두수(索頭水)가 유수(之)로 들어간다.
색두수(水)는 북쪽으로 색두천(索頭川)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흘러 광양교군(廣陽僑郡)의 서쪽을 지난다. 위(魏)에서는 나누어 우북평을 두었으며 지금(北魏)에는 안주(安州)에서 다스린다. (색두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유수로 들어간다.
유수(濡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무렬수(武列水)가 들어간다.
무렬수(其水)는 3개의 하천 물갈래가 합하여진 것이다.
서쪽에서 발원하는 오른쪽의 것은 계수(溪水)가 되는데 또한 서장수(西藏水)라고도 한다. (서장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계(溪)를 나와서 반천수(蟠泉水)와 합하여진다. 반천수(泉)는 안주(州) 동쪽 15리에서 발하여 동쪽으로 90리를 흘러 동쪽으로 서장수로 들어간다. 서장수는 또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장수(東藏水)가 서장수로 들어간다. 
동장수(水)는 동쪽 계(溪)를 나오는데 또한 동장수(東藏水)라고 하며 서남쪽으로 흘러 곡(谷)을 나와서 중장수(中藏水)와 합하여진다. 
중장수(水)는 중계(中溪)에서 인도된 것인데 남쪽으로 흘러 곡(谷)으로 나와서 남쪽으로 동장수(東藏水)로 들어간다. 따라서 지칭하기를(目) 그 하천을 삼장천(三藏川)이라 하며 물을 삼장수(三藏水)라 한 것이다.  .
동장수(東藏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서장수로 들어가는데 난류가 일어나서 오른쪽으로 룡천수(龍泉水)와 모인다. 룡천수(水)는 동산(東山) 아래에서 나오는데 룡천(淵)이 깊어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룡천수(其水)는 서남쪽으로 흘러 삼장수(三藏水)로 들어간다.
삼장수(三藏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룡추수(龍芻水) 와 합하여지는데 (룡추수는) 서쪽 룡추(龍芻)의 계(溪)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흘러 삼장수(三藏水)로 들어간다. (삼장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무렬계(武列溪)를 지나는데 그것을 무렬수(武列水)라 한다. (무렬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석정(石挺) 아래를 지나는데, 석정(挺)은 층층의 뫼 위에 있어서 외로운 돌이 구름에 들려있고 낭떨어지에 임하여 위태롭고 험준하니 가히 높이가 100여 길(仞)이다. 목수(牧守)가 지나가다가 命選練之士, 彎張弧矢, 無能屆其崇標者.
무렬수(其水)는 동쪽으로 흘러 유수와 합류하여 들어간다.

 

濡水又東南, 五渡水注之. 水北出安樂縣丁原山, 南流, 逕其縣故城西, 本三㑹城也. 其水南入五渡塘, 于其川也, 流紆曲溯, 涉者頻濟, 故川塘取名矣. 又南流注于濡.
유수(濡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오도수(五渡水)가 유수로 들어간다. 오도수(水)는 북쪽 안락현(安樂縣)  정원산(丁原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안락현(其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원래 삼회성(三㑹城)이다. 오도수(其水)는 남쪽으로 흘러 오도당(五渡塘)으로 들어가는데, 오도당(其川)으로 향해 갈때에(于) 물의 흐름이 굽어 거꾸로 흐르는데 길가는 자가 물을 자주 건너기에 그래서 오도수(川)과 오도당(塘)이 (五渡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故川塘取名矣). (오도당은)은 또한 남쪽으로 흘러 유수로 들어간다.

 

濡水又與髙石水合, 水東出安樂縣東山, 西流厯三㑹城南, 西入五渡川, 下注濡水. 濡水又東南逕盧龍塞. 塞道自無終縣東出, 渡濡水, 向林蘭陘, 東至清陘, 盧龍之險, 峻坂縈折, 故有九䋫之名矣. 燕景昭元璽二年, 遣將軍步渾治盧龍塞道, 焚山刋石, 令通方軌, 刻石嶺上, 以記事功, 其銘尚存. 而庾杲之注《揚都賦》言..盧龍山在平岡城北, 殊為孟浪, 逺失事實. 余按..盧龍東越清陘, 至凡城二百許里. 自凡城東北出, 趣平岡故城, 可百八十里. 向黄龍則五百里. 故陳夀《魏志》田疇引軍出盧龍塞, 塹山堙谷, 五百餘里, 逕白檀, 厯平岡, 登白狼, 望柳城. 平岡在盧龍東北逺矣, 而仲初言在南, 非也.
유수(濡水)는 또한 고석수(髙石水)와 합하여진다.
고석수(水)는 동쪽 안악현(安樂縣) 동쪽 산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삼회성(三㑹城) 남쪽을 지난 후에 서쪽으로 흘러 오도천(五渡川) 으로 들어가서 아래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유수(濡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로룡새(盧龍塞) 를 지난다..
로룡새(塞)로 가는 길은 무종현(無終縣)으로부터 동쪽으로 나가 유수(濡水)를 건너 림란형(林蘭陘)을 향하고 가면 동쪽으로 청형(清陘)에 이르는데 로룡(盧龍)의 요해지(險)이다. 높은 비탈이 얽히고 꺾이어 구쟁(九䋫)이라는 이름이 있다. 연(燕) 경소(景昭) 원새(元璽)  2년에, 장군(將軍) 보혼(步渾)을 보내 로룡새(盧龍塞)을 길을 닦으라고 하였는데, 산을 불사르고 돌을 깎아 수레가 다니는 길을 다스리게 하였다. 각석령(刻石嶺) 위에 그 공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직도 남아 있다. 이에 유고(庾杲)의 주석《양도부(揚都賦)》에서 말하기를 ‘로룡산(盧龍山)은 평강성(平岡城) 북쪽에 있고, 뛰어남이 맹랑하게 되었고(殊為孟浪) 멀어서 그 일에 대한 사실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데 로룡(盧龍)에서 동쪽으로 청형(清陘)을 넘어 범성(凡城)까지 200리 정도 되는데 범성(凡城)으로부터 동북쪽으로 나가서 옛 평강성(平岡城)까지 향하면(趣) 가히 180리이다. 황룡(黄龍)까지 향하면 즉 500리이다. 옛 진수의 《위지》에 말하기를 전주(田疇)가 군사를 이끌고 로룡새(盧龍塞)를 출발하여 산을 파고(塹山) 계곡을 막아(堙谷) 500여리인데 백단(白檀)을 거쳐 평강(平岡)을 지나 백랑(白狼)에 올라 류성(柳城)을 바라보았다고 하였으니 평강(平岡)은 로룡(盧龍)의 동북쪽으로 멀게 있다. 그런데 중초(仲初)는 남쪽에 있다고 하였지만 그렇지 않다.

 

濡水又東南, 逕盧龍故城東, 漢建安十二年, 魏武征蹋頓所築也.
유수(濡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옛 로룡성(盧龍城)의 동쪽을 지난다. 한(漢) 건안(建安) 12년에 위 무제(조조)가 답돈을 정벌하고 쌓은 곳이다.

유수(濡水)는 또한 남쪽으로 흐르다가 황락수(黄洛水)가 유수(之)로 들어간다. 황락수(水)는 북쪽 로룡산(盧龍山)을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유수로 들어간다. 유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락수(洛水)와 합하여진다. 락수(水)는 로룡새(盧龍塞)를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濡水又屈而流, 左得去潤水, 又合敖水, 二水竝自盧龍西注濡水.
유수(濡水)는 또한 굽어돌아 흐르다가 왼쪽으로 윤수(潤水)와 만나 지나는데, 또한 오수(敖水)와 합하여진다. 두 강은(윤수와 오수)는 모두 로룡(盧龍)의 서쪽으로부터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濡水又東南流, 逕令支縣故城東, 王莽之令氏亭也. 秦始皇二十二年, 分燕置遼西郡, 令支隸焉. 魏土地記曰..肥如城西十里 有濡水, 南流逕孤竹城西, 右合玄水, 世謂之小濡水, 非也. 水出肥如縣東北玄溪, 西南流逕其縣東, 東屈, 南轉, 西迴, 逕肥如縣故城南, 俗又謂之肥如水. 故城肥子國, 應劭曰..晉滅肥, 肥子奔燕, 燕封于此, 故曰肥如也. 漢髙帝六年, 封蔡寅為侯國. 西南流右㑹盧水, 水出縣東北沮溪, 南流, 謂之大沮水. 又南, 左合陽樂水, 水出東北陽樂縣溪. 地理風俗記曰..陽樂, 故燕地, 遼西郡治, 秦始皇二十二年置. 魏土地記曰..海陽城西南有陽樂城. 其水又西南, 入于沮水, 謂之陽口. 沮水又西南, 小沮水注之, 水發冷溪, 世謂之冷池. 又南得温泉水口, 水出東北温溪, 自溪西南流入于小沮水. 小沮水又南流, 與大沮水合而為盧水也. 桑欽説盧子之書, 言晉既滅肥, 遷其族于盧水. 盧水有二渠, 號小沮 大沮 合而入于玄水.  又南與温水合, 水出肥如城北, 西流注于玄水. 地理志曰..盧水南入玄. 玄水又西南逕孤竹城北, 西入濡水. 故地理志曰..玄水東入濡, 盖自東而注也. 地理志曰..令支有孤竹城, 故孤竹國也. 史記曰..孤竹君之二子 伯夷 叔齊 讓國于此, 而餓死于首陽. 漢靈帝時, 遼西太守亷翻 夢人謂已曰..余孤竹君之子, 伯夷之弟. 遼海漂吾棺槨, 聞君仁善, 願見藏覆. 明日視之, 水上有浮棺, 吏嗤笑者, 皆無疾而死. 于是改葬之. 晉書地道志曰..遼西人見遼水有浮棺, 欲破之. 語曰, 我孤竹君也, 汝破我何為? 因為立祠焉. 祠在山上, 城在山側. 肥如縣南十二里, 水之㑹也.
유수(濡水)는 동남쪽으로 흘러 령지현(令支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령씨정(令氏亭)으로 바꾸었으며 진(秦) 시황(始皇) 22년 연(燕)을 나누어 료서군(遼西郡)을 두었는데 령지현이 료서군에 속한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비여성(肥如城) 서쪽 10리에 유수(濡水)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고죽성(孤竹城) 서쪽을 지나며 오른쪽으로 현수(玄水)와 합류한다. 세간에서 말하기를 현수를(之) 소유수(小濡水)라고 하는데 틀렸다.
현수(水)는 비여현(肥如縣) 동북쪽 현계(玄溪)를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비여현(其縣) 동쪽을 지나고 동쪽으로 굽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구르고 서쪽으로 돌아 비여현(肥如縣) 옛 성 남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비여현 남쪽을 지나는 현수를) 비여수(肥如水)라고 한다. 옛 성은 비자국(肥子國)인데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진(晉)이 비(肥)를 멸하고 비(肥)의 아들이 연(燕)으로 달아났는데 연(燕)이 그곳에 봉하였기에 비여(肥如)라 한다’고 하였다. 한(漢) 고제(髙帝) 6년에 채인(蔡寅)을 봉하여 후국(侯國)으로 하였다. (현수 즉 비여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로수(盧水)와 모인다.
로수(水)는 (즉 로수의 발원을 설명하면 이러한데) 비여현(縣) 동북쪽의 저계(沮溪)를 나와서 남쪽으로 흐르는데 저계 남쪽을 나오는 강(之)을 대저수(大沮水)라고 한다. (대저수는) 남쪽으로 흘러 왼쪽으로 양락수(陽樂水) 와 합하여진다. 양락수(水)는 동북쪽 양락현(陽樂縣) 계(溪)를 나온다. 지리풍속기(地理風俗記)에서 말하기를 ‘양락(陽樂)은 옛 연(燕)의 땅인데 요서군에서 다스렸다. 진 시황 22년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해양성(海陽城) 서남쪽에 양악성(陽樂城)이 있다’고 하였다. 양락수(其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저수(沮水)로 들어가는데 그곳을(之) 양구(陽口)라고 한다. 저수(沮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소저수(小沮水)가 저수(之)로 들어간다. 소저수(水)는 랭계(冷溪)에서 발하는데 세간에서는 랭지(冷池)라 한다. (소저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온천수(温泉水) 구(口)와 만나는데, 온천수(水)는 동북쪽 온계(温溪)에서 나와서 온계(溪)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 소저수(小沮水)로 들어간다. 소저수(小沮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대저수(大沮水)와 합하여져서 로수(盧水)가 된다.
상흠설로자(桑欽説盧子)의 책에 말하기를 ‘진(晉)이 이미 비(肥)를 멸하고 그 족속들을 로수(盧水)로 옮겼다’고 한다. 로수(盧水)는 2개의 물줄기(渠)가 있는데 소저(小沮)와 대저(大沮)이며 합하여져서 (로수가 된 후) 현수(玄水)로 들어간다. 로수는  또한 남쪽으로 온수(温水)와 합하여지는데 온수(水)는 비여성(肥如城) 북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현수(玄水)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로수(盧水)는 남쪽으로 흘러 현수(玄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현수(玄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고죽성(孤竹城) 북쪽을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옛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현수(玄水)는 동쪽으로 흘러 유수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모두 동쪽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盖自東而注也) .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령지현(令支縣)에 고죽성이 있고 옛 고죽국이라’고 하였다. 사기에서 말하기를 ‘고죽의 군(君) 2 아들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인데 이곳은 나라를 양보하고 수양(首陽)에서 굶어 죽었다’고 하였다. 한(漢) 령제(靈帝) 때에 료서태수(遼西太守) 렴번(亷翻)이 꿈속에서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죽(孤竹) 군(君)의 아들 백이(伯夷)의 아우라 하였다. 遼海漂吾棺槨, 聞君仁善, 願見藏覆. 明日視之, 水上有浮棺, 吏嗤笑者, 皆無疾而死. 于是改葬之. 진서(晉書) 지도지(地道志)에서 말하기를 료서(遼西) 사람이 료수(遼水)에 관(棺)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파괴하려고 했다. 말하기를 나는 고죽국의 임금인데 네가 어떻게 나를 깨뜨릴수 있는가? 그래서 사당을 지어줬는데 사당은 산위에 있고 성은 산의 옆 비여현 남쪽 20리 강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수경]
又東南過海陽縣, 西南入于海
(유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해양현(海陽縣)을 지나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주]
濡水自孤竹城東南, 逕西鄉北, 瓠溝水注之. 水出城東南, 東流注濡水.
유수(濡水)는 고죽성(孤竹城) 동남쪽으로부터 서향(西鄉)  북쪽을 지난 후에 호구수(瓠溝水)가 유수(之)로 들어간다. 호구수(水)는 고죽성(城) 동남쪽을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濡水又逕故城南, 分為二水. 北水枝出, 世謂之小濡水也. 東逕樂安亭北, 東南入海.
유수(濡水)는 또한 옛 성의 남쪽을 지나고 강 줄기가 2개로 갈라져서 (하나는) 북쪽으로 나가는데 세간에서는 소유수라고 한다. (이 강은) 동쪽으로 흘러 낙안정(樂安亭) 북쪽을 지나고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濡水東南流, 逕樂安亭南, 東與新河故瀆合. 瀆自雍奴縣承鮑丘水, 東出, 謂之鹽闗口. 魏太祖征蹋頓, 與泃口俱導也, 世謂之新河矣. 陳夀魏志云..以通海也. 新河又東北, 絶庚水, 又東北出, 逕右北平, 絶泃渠之水, 又東北逕昌城縣故城北, 王莽之淑武也. 新河又東, 分為二水, 枝瀆東南入海. 新河自枝渠東出, 合封大水, 謂之交流口. 水出新安平縣, 西南流逕新安平縣故城西, 地理志遼西之屬縣也. 又東南流, 龍鮮水注之. 水出縣西北, 世謂之馬頭水, 二源俱導, 南合一川, 東流注封大水. 地理志曰..龍鮮水東入封大水者也. 亂流南㑹新河, 南注于海. 地理志曰..封大水于海陽縣南入海. 新河又東出海陽縣, 與緩虚水㑹. 水出新平縣東北, 世謂之大籠川, 東南流逕令支城西, 西南流與新河合, 南流注于海. 地理志曰..緩虚水與封大水皆南入海. 新河又東與素河㑹, 謂之白水口. 水出令支縣之藍山, 南合新河., 又東南入海. 新河又東至九過口, 枝分南注海. 新河又東逕海陽縣故城南, 漢髙祖六年, 封搖母餘為侯國. 魏土地記曰..令支城南六十里有海陽城者也. 新河又東, 與清水㑹, 水出海陽縣, 東南流逕海陽城東, 又南合新河, 又南流十許里, 西入九濄, 注海. 新河東絶清水, 又東, 木究水出焉, 南入海. 新河又東, 左迆為北陽孤淀, 淀水右絶新河, 南注海. 新河又東㑹于濡.
유수(濡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낙안정(樂安亭) 남쪽을 지나고, 동쪽으로 신하(新河) 옛 독(瀆)과 합하여진다.
독(瀆)은 옹노현(雍奴縣)으로부터 포구수(鮑丘水)를 잇고, 동쪽으로 나가는데 이를 염관구(鹽闗口)라고 한다. 위(魏) 태조(太祖)가 답돈(蹋頓)을 정벌하고 구구(泃口)와 함께 (물길을) 내었는데 세간에서는 이를 신하(新河)라 한다. 진수(陳夀)의 위지(魏志)에서 말하기를 ‘이로써 바다와 통했다’고 하였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를 끊고 또한 동북쪽으로 나가서 우북평(右北平)을 지나고 난 뒤에 구거수(泃渠之水)를 끊는다.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창성현(昌城縣) 옛 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숙무(淑武)로 바꾸었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2개로 나뉘는데 지독(枝瀆)은 동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지거(枝渠)로부터 동쪽으로 나가서 봉대수(封大水)와 합류하는데 이를 교류구(交流口)라고 한다.
봉대수(水)는 신안평현(新安平縣)을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신안평현(新安平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료서군에 속했다고 했다. (봉대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룡선수(龍鮮水)가 봉대수(之)로 들어간다. 룡선수(水)는 료서군(縣) 서북에서 나오는데, 세간에서는 마두수(馬頭水)라고 하며 2개의 발원지가 있어 남으로 하나의 하천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룡선수(龍鮮水)는 동쪽으로 흘러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난류가 일어나 남쪽으로 신하(新河)와 모여서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봉대수(封大水)는 해양현(海陽縣)에서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해양현(海陽縣)을 나와서 완허수(緩虚水)와 모인다. 완허수(水)는 신평현(新平縣) 동북쪽을 나오는데 세간에서는 대롱천(大籠川)이라 하며 동남쪽으로 흘러 령지성(令支城) 서쪽을 지나고 서남쪽으로 흘러 신하(新河)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완허수(緩虚水)는 봉대수(封大水)와 더불어 모두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소하(素河)와 모이는데 이곳을 백수구(白水口)라고 한다. 소하(水)는 령지현(令支縣)의 람산(藍山)을 나와서 남쪽으로 신하(新河)와 합류하고 동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구과구(九過口)에 이르는데 작은 물줄기가 나뉘어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해양현(海陽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한(漢) 고조(髙祖) 6년에 요모여(搖母餘)를 봉하여 후국(侯國)이 되게 하였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령지성(令支城) 남쪽 60리에 해양성(海陽城)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청수(清水)와 모인다. 청수(水)는 해양현(海陽縣)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해양성(海陽城) 동쪽을 지나고 또한 남쪽으로 흘러 신하(新河)와 합류하며, 또한 남쪽으로 10리정도를 흘러서 서쪽으로 구과(九濄)로 들어가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청수(清水)를 끊고 또한 동쪽으로 흘러 목구수(木究水)가 나오고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좌이(左迆)가 북양고정(北陽孤淀)이 되는데 정수(淀水)는 오른쪽으로 신하(新河를 끊고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가낟. 신하(新河)는 또한 동쪽으로 유수(濡水)와 모인다.

 

濡水又東南至絫縣碣石山. 文穎曰..碣石在遼西絫縣. 王莽之選武也. 絫縣并屬臨渝, 王莽更臨渝為馮徳. 地理志曰..大碣石山在右北平驪成縣西南, 王莽改曰掲石也. 漢武帝亦嘗登之, 以望巨海, 而勒其石于此. 今枕海有石如甬道, 數十里, 當山頂, 有大石如柱形, 往往而見, 立于巨海之中, 潮水大至則隠, 及潮波退, 不動不沒, 不知深淺, 世名之天橋柱也. 狀若人造, 要亦非人力所就. 韋昭亦指此以為碣石也. 《三齊略記》曰..始皇于海中作石橋, 海神為之豎柱. 始皇求與相見. 神曰..我形醜, 莫圗我形, 當與帝相見. 乃入海四十里, 見海神, 左右莫動手, 工人潜以腳畫其狀. 神怒曰..帝負約速去. 始皇轉馬還, 前腳猶立, 後腳隨崩, 僅得登岸. 畫者溺死于海, 衆山之石皆傾注, 今猶岌岌東趣, 疑即是也. 濡水于此南入海, 而不逕海陽縣西也, 盖經誤證耳. 又按, 管子 齊桓公二十年, 征孤竹, 未至卑耳之溪十里, 闟然止, 瞠然視, 援弓將射, 引而未發, 謂左右曰..見前乎? 左右對曰..不見. 公曰..寡人見長尺而人物具焉, 冠, 右袪衣. 走馬前, 豈有人若此乎? 管仲對曰..臣聞豈山之神, 有偷兒, 長尺人物具. 霸王之君興, 則豈山之神見. 且走馬前, 走導也, 袪衣, 示前有水, 右袪衣, 示從右方涉也. 至卑耳之溪, 有賛水者, 從左方涉, 其深及冠, 右方涉, 其深至膝. 已涉, 大濟. 桓公拜曰..仲父之聖至此, 寡人之抵罪也久矣. 今自孤竹南出則巨海矣. 而滄海之中, 山望多矣, 然卑耳之川, 若賛溪者, 亦不知所在也. 昔在漢世, 海水波襄, 吞食地廣, 當同碣石, 苞淪洪波也.
유수(濡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류현(絫縣) 갈석산(碣石山)에 이른다. 문영(文穎)이 말하기를 갈석(碣石)은 료서군 류현(絫縣)에 있다고 하였는데 왕망이 선무(選武)로 바꾸었다. 류현(絫縣)는 아울러 림투(臨渝)에 속한다. 왕망(王莽)은 림투(臨渝)를 풍덕(馮徳)으로 바꾸었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대갈석산(大碣石山)은 우북평(右北平) 려성현(驪成縣) 서남쪽에 있다으며 왕망이 게석(掲石)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한(漢) 무제(武帝)가 또한 일찍이 대갈석산에 올라가서 큰 바다를 바라보고 그 돌에다가 새겼다. 이제 바다에 임하여 솟은 길과 같은 돌이 있는데 수십리가 되고 큰 돌은 기둥 형상인데 종종 가서 보니 큰 바다 가운데에 서 있다. 밀물이 일면 숨어버리고 썰물이 되면 움직이지 않고 잠기지도 않으며 그 얕고 깊을 알지 못하니 세간에서는 이를 천교주(天橋柱)라 한다. 형상은 사람이 만든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위소(韋昭)는 이것을 가리켜 갈석이라 하였다. 《삼제략기(三齊略記)》에서 말하기를 시황(始皇)이 바다 가운데에서 석교(石橋)를 짓고 해신(海神)이 기둥(豎柱)으로 되었다. 시황(始皇)이 서로 볼 것을 구하니 해신이 말하기를 ‘나는 형상이 추하고 나의 형상을 그릴 수도 없으니 마땅히 제(帝)가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바다 40리를 들어가서 해신을 보았는데 좌우에 움직이지 않는 손이 있어 공인(工人)이 몰래 다리(腳)에 그 형상을 그렸다. 해신이 노하여 말하기를 ‘제(帝)는 빨리 가기를 약속하라’고 하였다. 시황(始皇)이 말을 굴려 돌아와 다리 앞에 오히려 서니 뒤쪽 다리가 차례로 무너져서 겨우 바위로 올랐다. 그림을 그린자는 바다에 빠져 죽고 여러 산들의 돌은 모두 기울어져 물이 흐르게 되었다. 이제 오히려 동쪽의 높은 산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유수(濡水)는 또한 이곳에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해양현(海陽縣) 서쪽을 지나지 아니하며 모두 경(經)에서 그릇되이 증명한 것이다.
또한 생각해보니 관자(管子)에서 기록하기를 제(齊) 환공(桓公) 20년에 고죽(孤竹)을 정벌하는데 비이(卑耳)의 계(溪) 10리를 다 이르지 아니하여 멈추어 바라보고 화살을 들었으나 쏘지 아니하였다. 좌우 사람에게 말하기를 앞이 보이느냐고 하였다. 좌우 사람이 말하기를 보이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환공이 말하기를 ‘과인은 키가 아주 큰 인물을 갖춘 자가 갓을 쓰고 우거의(右袪衣) 한 자가 앞으로 말을 타고 달려갔는데 어찌 사람이 이와 같은가?’라고 하였다. 관중(管仲)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기산(豈山)의 신에게 도둑질하는 아이가 있는데 키가 아주 크고 인물됨이 갖추어져 있고 패왕의 임금이 흥할 때 곧 기산(豈山)의 신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달리는 말 앞에 달릴 수 있는 길을 인도하는데 우거의(右袪衣)가 가는 길 앞에 물이 있으며 우거의(右袪衣)는 오른쪽으로 건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비이(卑耳)의 계(溪)에 이르니 찬수자(賛水者)가 왼쪽으로 건너니 그 깊이가 머리에 쓴 갓까지 올라오고 오른쪽으로 건너니 그 깊이가 무릎까지 오므로 다 건너게 되었다. 환공이 절하며 말하기를 ‘중부(仲父)의 성스러움이 여기에 이르었으니 과인의 죄가 오래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지금 고죽으로부터 남쪽으로 나가면 큰 바다이며 창해(滄海) 가운데에는 바라보이는 산이 많은데 비이천(卑耳川)과 찬수자의 계(溪)도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옛날 한(漢) 시대에 바닷물이 일어나 땅을 삼키운 곳이 넓으니 마땅히 갈석도 물결에 파해쳐졌을 것이다. 

 

• 습여수(濕餘水)

[수경]
濕餘水出上谷居庸闗東
습여수(濕餘水)는 상곡군(上谷郡) 거용관(居庸闗) 동쪽에서 나온다.

 

[주]
闗在沮陽城東南六十里居庸界, 故闗名矣. 更始使者入上谷, 耿况迎之于居庸闗, 即是闗也. 其水導源闗山, 南流歴故闗下, 溪之東岸, 有石室三層, 其户牖扇扉悉石也, 盖故闗之候臺矣. 南則絶谷, 累石為闗垣, 崇墉峻壁, 非輕功可舉. 山岫層深, 側道褊狹, 林鄣邃險, 路才容軌. 曉禽暮獸, 寒鳴相和, 羇官逰子, 聆之者莫不傷思矣. 其水厯山南, 逕軍都縣界, 又謂之軍都闗. 續漢書曰, 尚書盧植隠上谷軍都山, 是也. 其水南流出闗, 謂之下口, 水流潜伏十許里也.
거용관은 저양성(沮陽城)  동남쪽 60리의 거용현(居庸縣) 경계에 있는데 옛날 관(闗)의 이름이다. 후한(後漢)의 경시제(更始帝) 의 사자(使者)가 상곡에 들어갔는데 경황(耿况)이 그를 거용관(居庸闗)에서 맞이하였는데 곧 이곳이다. 습여수는 관산(闗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옛 관(闗) 아래를 지나는데 시냇물(溪)의 동쪽 언덕(岸)에는 3층의 석실(石室)이 있다. 그 석실(户)의 창과 사립문과 문들은 모두 돌인데 모두 옛 관(闗)의 후대(候臺, 망대?)이다. 남쪽은 곧 골짜기로 끊겼고 여러 돌들로 관(闗)의 담을 쌓았으며, 높은 담은 벼랑과 같이 험준하니 가벼운 공으로는 쌓지 못하였을 것이다. 산봉우리는 높아 골짜기가 깊으므로 옆 길이 좁디 좁으며 숲이 담처럼 가로막아 깊고 험준하니 길은 겨우 수레가 지날만하다. 새벽에 날짐승과 날 저물 땐 들짐승이 차갑게 울어 서로 조화를 이루니 노니는 나그네가 그것을 들으면 옛날의 상처를 생각하게 된다. 그 강(습여수)은 산(관산) 남쪽을 지나 (상곡군) 군도현(軍都縣)의 경계를 거치는데 또 이르기를 군도관(軍都闗)이라 한다. 속한서(續漢書)에서 말하기를 ‘상서(尚書)에 로식(盧植)이 상곡(上谷) 군도산(軍都山)에 숨었다’라고 하였는데 이곳이다.  그 물(습여수)는 남쪽으로 군도관(出闗)을 흐르는데 하구(下口)라 한다. 물이 자맥질하고 숨고 하기를 10여리 정도이다.

 

[수경]
東流過軍都縣南, 又東流過薊縣北.
동쪽으로 흘러 군도현(軍都縣) 남쪽을 지나, 또한 동쪽으로 흘러 계현(薊縣) 북쪽을 지난다.

 

[주]
濕餘水故瀆東逕軍都縣故城南, 又東, 重源潜發, 積而為潭, 謂之濕餘潭. 又東流, 易荆水注之, 其水導源西北千蓼泉, 亦曰丁蓼水. 東南流逕郁山西, 謂之易荆水. 公孫瓉之敗于鮑丘也, 走保易荆, 疑阻此水也. 易荆水又東左合虎眼泉水, 出平川, 東南流入易荆水, 又東南與孤山之水合. 水發川左, 導源孤山, 東南流入易荆水, 謂之塔界水. 又東逕薊城, 又東逕昌平縣故城南, 又謂之昌平水. 魏土地記曰薊城東北百四十里有昌平城, 城西有昌平河. 又東流注濕餘水. 濕餘水又東南流, 左合芹城水. 水出北山, 南逕芹城, 東南流注濕餘水. 濕餘水又東南流, 逕安樂故城西, 更始使謁者韓鴻北徇, 承制拜呉漢為安樂令, 即此城也.
습여수(濕餘水) 즉 도랑(수준)으로 동쪽으로 군도현(軍都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또한 동쪽에서 다른 발원지가 있어 자맥질하여 물이 쌓여 못을 이루는데 그것을 습여담(濕餘潭)이라 한다. (습여수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역형수(易荆水)가 습여수(之)로 들어간다. 그 물(역형수)은 서북쪽 천료천(千蓼泉)에서 발원하는데 (역형수는) 또한 정료수(丁蓼水)라고도 한다. (정료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욱산(郁山) 서쪽을 지나는데 그것을(욱산 서쪽을 지난 정료수를) 역형수(易荆水)수라고 한다. 공손찬(公孫瓉)이 포구(鮑丘)에서 패하여 역형(易荆)으로 달아나 보존하였는데 아마도 이 강이 아닌가 한다.  역형수(易荆水) 또한 동쪽 즉 왼쪽에서 호안천수(虎眼泉水)와 합하여지는데 (호안천수는) 평천(平川)을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역형수로 들어간다. 또한 (이 때에) 동남쪽에서 고산수(孤山水)와도 합하여진다. 평천(川) 왼쪽에서 발(發)하는 물은 발원(導源)가 고산(孤山)인데 동남쪽으로 흘러 역형수(易荆水)로 들어가니 이름은 탑계수(塔界水)이다. 또한 동쪽으로 계성(薊城)을 지나고 또한 동쪽으로 창평현(昌平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나는 물을 창평수(昌平水)라고 한다. 위씨토지기(魏土地記)에서 말하기를 계성(薊城) 동북쪽 140리에 창평성(昌平城)이 있는데 창평성 서쪽으로 창평하(昌平河)가 있다. (창평하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습여수(濕餘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창평수와 합하여진 후에) 습여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왼쪽에서 근성수(芹城水)와 합하여지는데 (근성수는) 북산(北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근성(芹城)을 거쳐 동남쪽으로 흘러 습여수로 들어간다. 습여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안락(安樂)  옛 성의 서쪽을 거친다. 경시제(更始帝)가 알자(謁者)인 한홍(韓鴻)으로 하여금 북쪽 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承制拜 오한(呉漢)은 안락령(安樂令)이 되었는데 바로 이 성이다.

 

[수경]
又北屈, 東南至狐奴縣, 西 入于沽河.
또 북쪽으로 굽어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어양군 호노현(狐奴縣)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주]
昔彭寵使狐奴令王梁, 南助光武起兵, 自是縣矣. 濕餘水于縣西南, 東入沽河. 故地理志曰, 濕餘水自軍都縣東, 至潞, 南入沽, 是也.
옛날 팽총(彭寵)이 호노령(狐奴令) 왕량(王梁)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광무제가 병사를 일으키는 것을 돕게 하였는데 이 호노현에서 시작한 것이다. 습여수(濕餘水)는 호노현 서남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그래서 지리지에 말하기를 습여수(濕餘水)는 군도현(軍都縣) 동쪽으로부터 로하(潞河)에 이르러 남쪽으로 고하(沽河)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 올바른 것이다.  

 

• 고하(沽河)

[수경]
沽河從塞外來
고하(沽河)는 새(塞) 밖으로부터 온다. 

 

[주]
沽河出禦夷鎮西北九十里, 丹花嶺下. 東南流, 大谷水注之. 水發鎮北大谷溪, 西南流, 逕獨石北界. 石孤生, 不因阿而自峙. 又南, 九源水注之. 水導北川, 左右翼注, 八川共成一水, 故有九源之稱. 其水南流至獨石, 注大谷水. 大谷水又南逕獨石西, 又南逕禦夷鎮城西. 魏太和中置, 以捍北狄也. 又東南, 尖谷水注之. 水源出鎮城東北尖溪, 西南流, 逕鎮城東, 西南流, 注大谷水, 亂流南注沽水.
고하(沽河) 는 어이진(禦夷鎮) 서북쪽 90리 단화령(丹花嶺) 아래에서 나온다.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대곡수(大谷水)가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대곡수(水)는 어이진(鎮) 북쪽의 대곡계(大谷溪)에서 발생(發)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독석(獨石) 북쪽 경계를 지난다. 독석은 홀로 생겨난 것인데, 언덕으로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우뚝 서있다. 또한 (대곡수는) 남쪽으로 흐르다가 구원수가 대곡수로 들어간다(又南九源水注之). 구원수는 북천(北川)에서 인도된 것인데 좌우의 날개 8개의 물줄기들이 합하여 하나의 물을 이루므로 구원(九源)이라 한 것이다. 구원수(其水)는 남으로 흘러 독석(獨石)에 이르러 대곡수(大谷水)로 들어간다. 또한 대곡수는 남쪽으로 독석의 서쪽을 지나며 또한 남쪽으로 어이진 성의 서쪽을 지난다. 위(魏) 태화(太和)에 설치한 것인데 북적(北狄)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한 (대곡수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첨곡수(尖谷水)가 (대곡수로) 들어간다(又東南尖谷水注之). 첨곡수는 어이진(鎮) 성 동북쪽 첨계(尖溪)에서 발원하여 나온 것인데 서남쪽으로 흘러 어이진 성 동쪽을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대곡수로 들어간다. (이렇게 하여) 난류가 일어 남쪽으로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又南出峽夾, 岸有二城, 世謂之獨固門, 以其藉險憑固, 易為依据. 巖壁斗聳, 疎通若門, 故得是名也.
(고수는) 또한 남쪽으로 골짜기 협곡을 나오는데 언덕에 2 성이 있어서 세간에는 그것을 독고문(獨固門)이라 한다. 그 험준한 것을 의지하여 굳게 지켰는데(以其藉險憑固易為依据). 바위들이 벽처럼 우뚝 솟아 소통함이 문과 같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沽水又南, 左合乾溪水, 引北川西南, 逕一故亭東, 又西南注沽水.
고수(沽水)는 또한 남쪽으로 흐르다가 왼쪽에서 건계수(乾溪水)가 합류한다. (건계수는) 북천(北川)의 서남쪽에서 인도된 것인데 옛날에 있던 하나의 역참 동쪽을 지나서 또한 서남쪽으로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沽水又西南, 逕赤城東. 趙建武年, 并州刺史王霸, 為燕所敗, 退保此城. 城在山阜之上, 下枕深隍, 溪水之名, 藉以變稱, 故河有赤城之號矣.
고수(沽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적성(赤城)의 동쪽을 지난다. 조(趙) 건무(建武) 년간에 병주자사(并州刺史) 왕패(王霸)가 연(燕)에 패하여 물러나 이 성에서 지켰었다. 성은 산 언덕의 위에 있고 아래에는 깊은 해자가 면해 있는데, 시냇물(溪水)의 이름으로 바꿔 불렀으므로 하(河, 沽水?)는 적성(赤城)을 부르는 호칭이 되었다.

 

沽水又東南與鵲谷水合. 水有二源, 南即陽樂水也. 出且居縣, 地理志曰..水出縣東. 南流, 逕大翮山 小翮山 北, 厯女祁縣故城南. 地理志曰..東部都尉治. 王莽之祁縣也. 世謂之横水, 又謂之陽田河. 又東南逕一故亭, 又東, 左與候鹵水合. 水出西北山, 東南流逕候鹵城北, 城在居庸縣西北二百里, 故名云候鹵, 太和中更名禦夷鎮. 又東南流注陽樂水. 陽樂水又東南傍狼山南, 山石白色特上, 亭亭孤立, 超出羣山之表. 又東南逕温泉東, 泉在山曲之中. 又逕赤城西, 屈逕其城南. 東南入赤城河, 河水又東南, 右合髙峯水, 水出髙峯戍東南, 城在山上. 其水西南流, 又屈而東南, 入沽水.
고수(沽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작곡수(鵲谷水)와 합류한다.
(작곡수는) 2개의 발원지가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은 양락수(陽樂水)이다.
(양락수는) 상곡군 차거현(且居縣)을 나오는데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양락수)는 차거현의 동쪽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양락수)는 남쪽으로 흘러 대핵산(大翮山)과 소핵산(小翮山) 북쪽을 지나고, 상곡군 여기현(女祁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리고 왕망의 기현(祁縣)이라 하였다. 세간에서는 횡수(横水)라 하며 또한 양전하(陽田河)라고도 한다. (양락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옛 역참 하나를 지나고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왼쪽에서 후로수(候鹵水)와 합류한다.
후로수(水)는 서북쪽의 산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후로성(候鹵城) 북쪽을 지나는며 성은 거용현(居庸縣) 서북쪽 200리에 있는데 옛 이름은 후로(候鹵)라고들 한다. 태화(太和) 년간에 (후로성의) 이름을 어이진(禦夷鎮)으로 바꿨다. (후로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양락수로 들어간다.
양락수(陽樂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변방의 낭산(狼山) 남쪽을 지난다.  낭산의 돌은 흰색으로 특상(特上)인데 홀로 우뚝 서있으며 여러 산 중에서 표가 나게 튀어 나와 있다. (양락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온천(温泉)의 동쪽을 지난다. 온천은 산곡(山曲) 가운데에 있다. (양락수는) 또한 적성(赤城) 서쪽을 지나 굽이 돌아 적성(其) 남쪽을 지난 후 동남쪽으로 적성하(赤城河)로 들어간다. 적성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에서 고봉수(髙峯水)가 합하여 지는데 고봉수(水)는 고봉수(髙峯戍) 동남쪽에서 나오는데 성은 산 위에 있다. 고봉수(其水)는 서남쪽으로 흘러 또한 굽이 돌아 동남쪽으로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沽水又西南流出山, 逕漁陽縣故城西, 而南合七度水. 水出北山黄頒谷, 故亦謂之黄頒水, 東南流注于沽水.
고수(沽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산을 나와서 어양현(漁陽縣) 옛 성의 서쪽을 거쳐서 남쪽으로 흘러 칠도수(七度水)와 합류한다. 칠도수(水)는 북산(北山) 황반곡(黄頒谷)을 나오기 때문에 황반수(黄頒水)라고도 하는데 동남쪽으로 흘러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沽水又南, 漁水注之. 水出縣東南平地, 泉流西逕漁陽縣故城南. 應劭曰..在漁水之陽也. 考諸地説則無聞, 脈水尋川則有自. 今城在斯水之陽, 有符應説, 漁陽之名當屬此. 秦發閭左戍漁陽, 即是城也. 漁水又西南, 入沽水. 沽水又南與螺山之水合, 水出漁陽城南小山. 魏土地記曰..城南五里有螺山, 其水西南入沽水. 沽水又南逕安樂縣故城東. 晉書地道記曰..晉封劉禪為公國. 俗謂之西潞水也.
고수(沽水)는 또한 남쪽으로 흐르다가 어수(漁水)가 고수(之)로 들어간다. 어수(水)는 현(縣,여양현?) 동남쪽 평지(平地)에서 나와서, 샘물로 흘러 어양현 옛 성 남쪽을 서쪽으로 지난다. 응초(應劭)는 말하기를 (어양은) 어수(漁水)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모든 지리에 대한 설을 상고해본 즉 들은바 없으며 지리지를 상고해보고 하천에 대해서 찾은 즉 응초의 자의적인 해석인 것이다.  현재 성(어양성?)은 사수(斯水)의 북쪽에 있는데, 응초의 설명이 들어맞는다면 어양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이에 속해야만 한다. 진(秦)때에 여문(閭門)의 왼쪽에 (살던 빈민들 900명을) 어양(漁陽)의 수비병으로 징발하였는데 바로 이 성이다. 어수(漁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고수(沽水)는 또한 남쪽으로 흐르다가 라산(螺山)의 물줄기와 합하여지는데 (라산의) 물줄기는 어양성(漁陽城) 남쪽의 작은 산에서 나온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어양성(城) 남쪽 50리에 라산(螺山)이 있는데 그 물이 서남쪽으로 흘러 고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고수는 또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락현(安樂縣) 옛 성의 동쪽을 거친다. 진서(晉書) 지도기(地道記)에서는 진(晉)이 류선(劉禪)을 봉하여 공국(公國)이 되게 하였다고 했다. 세간에서는 (라산과 합하여진 고수를) 서로수(西潞水)라 한다.

 

[수경]
南過漁陽狐奴縣北, 西南與濕餘水合為潞河.
(고수는)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호노현(狐奴縣) 북쪽을 지나서, 서남쪽으로 습여수(濕餘水)와 합하여진 후에 로하(潞河)가 된다.

 

[주]
沽水西南流, 逕狐奴山西, 又南逕狐奴縣故城西, 漁陽太守張堪于縣開稻田, 教民種殖, 百姓得以殷富. 童謠歌曰..桑無附枝, 麥秀兩岐. 張君為政, 樂不可支. 視事八年, 匈奴不敢犯塞. 沽水又南, 陽重溝水注之, 水出狐奴山, 南轉逕狐奴城西, 王莽之所謂舉符也. 側城南注, 右會沽水.
고수(沽水)는 서남쪽으로 흘러 호노산(狐奴山) 서쪽을 거친다. 또한 남쪽으로 흘러 호노현(狐奴縣) 옛 성의 서쪽을 거친다. 어양 태수 장감(張堪)이 호노현(縣)에서 논을 개간하고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치니 백성들이 부를 얻었다. 동요가(童謠歌)에서 말하기를 桑無附枝, 麥秀兩岐. 張君為政, 樂不可支. 視事八年, 匈奴不敢犯塞. 고수(沽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양중구수(陽重溝水)가 고수로 들어간다. 양중구수는 호노산(狐奴山)에서 나오는데 남쪽으로 전(轉)하여 호노성(狐奴城) 서쪽을 거친다. 왕망(王莽)의 거부(舉符)라고 하는 곳이다. 성의 남쪽을 돌아 물을 대고 고수(沽水)와 오른쪽에서 모인다.

 

沽水又南, 濕餘水注之.
고수(沽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습여수(濕餘水)가 (고수로) 들어간다.

 

沽水又南, 左㑹鮑丘水, 世所謂東潞也.
고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포구수와 왼쪽에서 모이는데 세간에서 말하기를 (포구수를) 동로수(東潞水)라고 한다.

 

沽水又南逕潞縣, 為潞河. 魏土地記曰..城西三十里有潞河, 是也.
고수(沽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로현(潞縣) 을 지나서 로하(潞河)가된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성 서쪽 30리에 로하(潞河)가 있다고 했는데 이곳이다. 

 

[수경]
又東南至雍奴縣西為笥溝
(고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옹노현(雍奴縣) 서쪽에 이르러 사구(笥溝)가 된다.

 

[주]
㶟水入焉, 俗謂之合口也. 又東, 鮑丘水于縣西北而東出,
루수(㶟水)가 들어가는데 세속에서 말하기를 합구(合口)라 한다. 또 (고수는) 동쪽으로 흘러 옹노현(縣) 서북쪽에서 포구수(鮑丘水)가 동쪽으로 나간다(東出).

 

[수경]
又東南至泉州縣, 與清河合, 東入于海. 清河者, 派河尾也.
(고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천주현(泉州縣)에 이르러 청하(清河)와 합하여 지고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청하(清河)는 강 줄기의 꼬리(하류?)이다.

 

[주]
沽河又東南逕泉州縣故城東, 王莽之泉調也. 沽水又東南合清河, 今無水清. 淇 漳 洹 滱 易 淶 濡 沽 滹 沱 同歸于海, 故經曰派河尾也.
고하(沽河)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천주현(泉州縣) 옛 성의 동쪽을 거치는데 왕망의 천조현(泉調縣)이다. 고수(沽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청하(清河)와 합류하는데 지금 청수(清水)라는 것은 없다. 기(淇) 장(漳) 원(洹) 구(滱) 역(易) 래(淶) 유(濡) 고(沽) 호타(滹沱) 등의 강은 모두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래서 수경에서는 (청하를) 派河尾라고 한 것이다.

 

• 포구수(鮑丘水)

[수경]
鮑丘水從塞外來, 南過漁陽縣東.
포구수(鮑丘水)는 새(塞) 밖으로부터 와서 남쪽으로 어양현 동쪽을 지난다.

 

[주]
鮑丘水出禦夷北塞中, 南流逕九莊嶺東, 俗謂之大榆河.
포구수(鮑丘水)는 어이진(禦夷鎭) 북쪽  새(塞) 가운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구장령(九莊嶺) 동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대유하(大榆河)라고 한다.

 

又南, 逕鎮東南九十里西密雲戍西. 又南, 左合道人溪水. 水出北川, 南流逕孔山西, 又厯密雲戍東, 左合孟廣?水. 水出?下, ?甚層峻, 峨峨冠衆山之表. 其水西逕孔山南, 上有洞穴開明, 故土俗以孔山流稱. ?水又西南至密雲戍東, 西注道人水, 亂流西南, 逕密雲戍城南, 右㑹大榆河. 有東密雲, 故是城言西矣. 大榆河又東南流, 白楊泉水注之. 北發白楊溪 望離, 右注大榆河, 又東南, 龍芻溪水自坎注之.
또 남으로 흘러 어이진(鎮) 동남쪽 90리의 서밀운(西密雲)의 수비성(戍) 서쪽을 지난다. 또한 남쪽으로 흐르다가 왼쪽에서 도인계수(道人溪水)와 합류한다.
도인계수(水)는 북천(北川)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공산(孔山) 서쪽을 지나고 나서, 또한 (서)밀운의 수비성 동쪽을 지나는데, 왼쪽에서 맹광형수(孟廣?水)가 합류한다. 맹광형수(水)는 형산(?)의 아래를 나오는데 형산(?)은 심히 험준하여 여러 산의 봉우리 중에 드러난다. 맹광형수(其水)는 서쪽으로 흘러 공산(孔山) 남쪽을 지나는데, 상류에는 굴로 된 통로(洞穴)가 열여 밝다. 그래서 토속에서는 공산(孔山)으로 맹광형수(流)를 칭한다. 맹광형수(?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서)밀운의 수비성 동쪽에 이르러 서쪽으로 도인계수(道人水)로 들어간다. (이때) 난류가 일어 서남쪽으로 흘러 (서)밀운의 수비성 남쪽을 지나는데 오른쪽으로 대유하(大榆河)와 합하여진다. 동밀운(東密雲)이 있으므로 이 성을 서밀운이라 한 것이다.
대유하(大榆河)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백양천수(白楊泉水)가 (대유하)로 들어간다. 북쪽에서 백양계(白楊溪)와 망리(望離) 등의 강들이 발생(發)하여 오른쪽으로 대유하(大榆河)로 들어간다.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용추계수(龍芻溪水)가 自坎하여 대유하(之)로 들어간다.

 

大榆河又東南出峽, 逕安州 舊漁陽郡之滑鹽縣南, 左合縣之北溪水. 水出縣北廣長塹南, 太和中, 掘此以防北狄. 其水南流逕滑鹽縣故城東, 王莽更名匡徳也. 漢明帝改曰鹽田. 右承治, 世謂之斛鹽城, 西北去禦夷鎮二百里, 南注鮑丘水.
대유하(大榆河)는 또한 동남으로 흘러 골짜기를 나와서 안주(安州) 즉 옛날 어양군(漁陽郡) 활염현(滑鹽縣)의 남쪽을 지나며, 왼쪽으로 활염현(縣)의 북계수(北溪水)와 합류한다.
북계수(水)는 활염현(縣)의 북쪽에 있는 광장참(廣長塹)의 남쪽을 나오는데, 태화(太和) 년간에 북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판 것이다. 북계수(其水)는 남쪽으로 흘러 활염현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광덕현(匡徳縣)으로 바꾸었고 한(漢)의 명제(明帝)는 염전현(鹽田縣)으로 바꾸었다. 오른쪽으로 승치(承治)가 있는데 세간에서는 곡염성(斛鹽城)이라고 하며 서북쪽으로 어이진까지 200리이다.
(북계수는) 남쪽으로 포구수로 들어간다.

 

又南逕傂奚縣故城東, 王莽更之曰敦徳也. 鮑丘水又西南, 逕獷平縣故城東, 王莽之所謂平獷也. 又南合三城水, 水出臼里山, 西逕三城, 謂之三城水, 又逕香陘山, 山上悉生槀本香, 世故名焉. 又西逕石窟南. 窟内寛廣, 行者依焉. 窟内有水, 淵而不流, 栖薄者取給焉. 又西北逕伏凌山南, 與石門水合. 水出伏凌山, 山髙峻, 巖鄣寒深, 隂崖積雪, 凝冰夏結, 事同《離騷》峨峨之詠, 故世人因以名山也. 一水西南流注之, 是水有桑谷之名, 盖沿出桑溪故也. 又西南逕獷平城東南, 而右注鮑丘水.
(포구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치해현(傂奚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은 이름을 돈덕현(敦徳縣)이라고 고쳤다. 포구수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광평현(獷平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은 평광현(平獷縣)이라고 고쳤다. 또한 남쪽으로 흘러 (왼쪽에서?)  삼성수(三城水)가 합류한다.

삼성수(水)는 구리산(臼里山)에서 나오는데, 서쪽으로 흘러 삼성(三城)을 지나므로 삼성수(三城水)라고 한다. 또한 (삼성수)는 향형산(香陘山)을 지나는데 향형산 위에는 모두 고본(藁本) 의 냄새가 나므로 세간에서는 이름을 향형산이라 한 것이다. (삼성수는) 또한 서쪽으로 흘러 석굴(石窟) 남쪽을 지난다. 굴 아는 아주 넓은데 나그네가 의지하는 곳이다. 굴 안에 물이 있는데 연못이라서 흐르지 않는데 머무는 사람이 취하기에 넉넉하다. (삼성수는) 또한 서북쪽으로 흘러 복릉산(伏凌山) 남쪽을 거치는데 석문수(石門水)와 합하여진다. (석문수는) 복릉산(伏凌山)을 나오는데 산이 높고 험하며 바위가 가로 막아 차고 깊으며 그늘진 낭떨어지는 눈이 쌓이고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 똑 같은 사실을 리소(離騷)에서도 읊었는데 따라서 세간에서는 이것으로 인하여 산을 이름 지은 것이다. 한 물줄기가 있어 서남쪽으로 흘러 석문수(之)로 들어가며 이 물은 상곡수(桑谷水)라는 이름이 있는데 모두 상계(桑溪) 를 나와 따라 흐르므로 상곡수라 한 것이다(故也).
(삼성수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광평성(獷平城) 동남쪽을 지나고, 오른쪽에서 포구수(鮑丘水)로 들어간다.

 

鮑丘水又東南, 逕漁陽縣故城南, 漁陽郡治也. 秦始皇二十二年置, 王莽更名通潞, 縣曰得漁.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어양현 옛 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어양군의 치소이다. 진(秦)의 시황(始皇) 22년에 설치하였는데 왕망은 이름을 바꾸어 어양군을 통로군(通潞郡)이라 하였고 어양현을 득어현(得漁縣)이라 하였다.

鮑丘水又西南流, 公孫瓉既害劉虞, 烏丸思劉氏之徳, 迎其子和, 合衆十萬, 破瓉于是水之上, 斬首一萬.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흐른다. 공손찬(公孫瓉)은 이미 류우(劉虞)을 죽였는데 오환(烏丸)이 류씨(劉氏)의 덕을 생각하여 그 아들 화(和)를 맞이하였다. (오환과 화의 군사가) 합하여 1만인데 공손찬을 이 강에서 깨뜨렸으며 목을 벤 자가 1만이다.

 

鮑丘水又西南厯狐奴城東, 又西南流注于沽河, 亂流而南.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호노성(狐奴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난류(亂流)가 생기고 난 뒤 남쪽으로 흐른다.

 

[수경]
又南過潞縣西
(포구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漁陽郡) 로현(潞縣) 서쪽을 지난다.

 

[주]
鮑丘水入潞, 通得潞河之稱矣. 髙梁水注之, 水首受㶟水于戾陵堰, 水北有梁山, 山有燕剌王旦之陵, 故以戾陵名堰. 水自堰枝分, 東逕梁山南, 又東北逕劉靖碑北. 其詞云..魏 使持節 都督河 北道諸軍事 征北將軍 建城鄉侯 沛國劉靖, 字文恭, 登梁山以觀源流, 相㶟水以度形勢, 嘉武安之通渠, 羨秦民之殷富., 乃使帳下丁鴻督軍士千人, 以嘉平二年, 立遏于水, 導髙梁河, 造戾陵遏, 開車箱渠. 其遏表云..髙梁河水者, 出自并州, 潞河 之别源也 長岸峻固, 直截中流, 積石籠以為主遏, 髙一丈, 東西長三十丈, 南北廣七十餘步. 依北岸立水門, 門廣四丈, 立水十丈. 山水暴發, 則乗遏東下, 平流守常 則自門北入, 灌田嵗二千頃, 凡所封地百餘萬畮. 至景元三年辛酉, 詔書以民食轉廣, 陸廢不贍, 遣謁者樊晨, 更制水門, 限田千頃, 刻地四千三百一十六頃, 出給郡縣, 改定田五千九百三十頃. 水流乗車箱渠, 自薊西北逕昌平, 東盡漁陽潞縣, 凡所潤含, 四五百里, 所灌田萬有餘頃. 髙下孔齊, 原隰厎平, 疏之斯漑, 決之斯散, 導渠口以為濤門, 灑滮池以為甘澤, 施加于當時, 敷被于後世. 晉元康四年, 君少子驍騎將軍 平鄉侯弘, 受命使持節 監幽州諸軍事, 領䕶烏丸校尉 寧朔將軍. 遏立積三十六載, 至五年夏六月, 洪水暴出, 毁損四分之三, 剰北岸七十餘丈. 上渠車箱, 所在漫溢. 追惟前立遏之勲, 親臨山川, 指授規略, 命司馬 闗内侯逢惲内外將士二千人, 起長岸, 立石渠, 脩主遏, 治水門, 門廣四丈, 立水五尺. 興復載利, 通塞之宜, 準遵舊制. 凡用功四萬有餘焉. 諸部王侯, 不召而自至, 繦負而事者盖數千人. 《詩》載經始勿亟, 《易》稱民忘其勞, 斯之謂乎? 于是二府文武之士, 感秦國思鄭渠之績, 魏人置豹祀之義, 乃遐慕仁政, 追述成功. 元康五年十月十一日, 刋石立表, 以紀勲烈, 并記遏制度, 永為後式焉. 事見其碑辭. 又東南流逕薊縣北. 又東至潞縣, 注于鮑丘水.
포구수(鮑丘水)는 어양군 로현(潞縣)으로 들어가므로 로하(潞河)라고 칭함을 얻었다.
고량수(髙梁水) 가 포구수로 들어가는데 고량수(水)의 상류(首)는 루수(㶟水)를 려릉언(戾陵堰)에서 받는다. 고량수(水)의 북쪽에는 량산(梁山)이 있는데, 량산에는 연랄왕(燕剌王) 류단(劉旦)의 무덤이 있으므로 려릉(戾陵)을 언(堰)이라 이름하였다. 고량수(水)는 려릉언(堰)에서 나위어 동쪽으로 흘러 량산(梁山) 남쪽을 지나고,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류정비(劉靖碑)의 북쪽을 지난다. 그 비문에 말하기를 ‘위(魏) 사지절(使持節) 도독하북도제군사(都督河北道諸軍事) 정북장군(征北將軍) 건성향후(建城鄉侯) 패국류정(沛國劉靖)은 자(字)가 문공(文恭)인데, 량산(梁山)에 올라 (고량수의) 원류를 바라보니 루수(㶟水)와 같이 그 형세가 상응하였다. 무안(武安)이 물길을 연 것과 진(秦)의 백성들이 부유한 것을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이에 장(帳)아래 정홍(丁鴻)과 독군사(督軍士) 1천명으로 하여금 가평(嘉平) 2년에 (고량수에) 막음(遏, 堨)을 설치하였는데 고량하(髙梁河)를 인도하여 낸 것이다. 려릉(戾陵)에 막음(遏)을 짓고 차상거(車箱渠)를 열었다. 그 막음(遏)의 표에 말하기를 ‘고량하(髙梁河)의 물은 병주(并州)로부터 나오는데 로하(潞河)의 다른 발원지이며, 긴 언덕이 험준하고 견고하여 (강물을) 곧게 끊어 가운데로 흐르므로 돌을 길게 쌓아 주막음(主遏)으로 하였다. 높이는 1 장(丈)이고 동서로 길이가 13 장(丈)이며 남북으로 너비가 70여 보이다.  북쪽 언덕을 의지하여 수문(水門)을 세웠는데 이 문의 너비는 4 장이고 립수(立水, 수문이 물에 잠기는 높이?)가 10 장이다. 산의 물이 햇빛을 받아 발하니 막음(遏)을 타 올라 동쪽으로 내려온다. 항상 평평한 흐름을 유지하여 수문으로부터 북쪽으로 들어가서 해마다 밭 2000 경(頃)에 물을 대는데 무릇 봉지가 100만여 이랑이다. 경원(景元)  3년 신유(辛酉)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백성으로 널리 먹게 하였고 넉넉함이 없음을 폐하지 않았다. 알자(謁者) 번신(樊晨)을 보내 수문(水門)을 고쳐 밭 1000 경(頃)으로 제한하고 각지(刻地)를 4316경(頃)으로 하니 출급(出給)되는 군현을 개정하여 밭 5930경으로 하였다. 물이 흘러 차상거(車箱渠)를 올라 계(薊)의 서북쪽으로부터 창평(昌平)을 지나 동쪽으로 어양군(漁陽郡)로현(潞縣)에 이르니 무릇 물의 덕택을 본 곳이 4~5백리이고, 밭에 물을 댄 곳이 1만여 경이다. 髙下孔齊, 原隰厎平, 疏之斯漑, 決之斯散, 導渠口以為濤門, 灑滮池以為甘澤, 施加于當時, 敷被于後世. 진(晉) 원강(元康)  4년, 군소자효기장군(君少子驍騎將軍) 평향후(平鄉侯) 홍(弘)은 사지절(使持節) 감유주제군사(監幽州諸軍事)의 명을 받아 호오환교위(䕶烏丸校尉) 녕삭장군(寧朔將軍)을 다스렸다. 막음(遏)으로 쌓은 것이 36재(載)이다. 5년 여름 6월에 이르러 홍수가 났는데, 75%가 훼손되었고 북쪽 언덕의 70여 장(丈)만 남았다. 上渠車箱, 所在漫溢. 追惟前立遏之勲, 親臨山川, 指授規略, 命司馬 闗内侯逢惲内外將士二千人, 起長岸, 立石渠, 脩主遏, 治水門, 門廣四丈, 立水五尺. 興復載利, 通塞之宜, 準遵舊制. 凡用功四萬有餘焉. 諸部王侯, 不召而自至, 繦負而事者盖數千人. 《詩》載經始勿亟, 《易》稱民忘其勞, 斯之謂乎? 于是二府文武之士, 感秦國思鄭渠之績, 魏人置豹祀之義, 乃遐慕仁政, 追述成功. 元康五年十月十一日, 刋石立表, 以紀勲烈, 并記遏制度, 永為後式焉. 事見其碑辭.
(고량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광양군) 계현(薊縣)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로현(潞縣)에 이르러 포구수(鮑丘水)로 들어간다.

 

又南逕潞縣故城西, 王莽之通潞亭也. 漢光武遣呉漢, 耿弇等破銅馬 五幡于潞東, 謂是縣也. 屈而東南流, 逕潞城南. 世祖拜彭寵為漁陽太守, 治此. 寵叛, 光武遣㳺擊將軍鄧隆伐之, 軍于是水之南. 光武䇿其必敗, 果為寵所破, 遺壁故壘存焉.
(포구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로현(潞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왕망의 통로정(通潞亭)이다.
한(漢) 광무(光武)가 오한(呉漢)과 경감(耿弇) 등을 보내 동마(銅馬)와 오번(五幡)을 로(潞)의 동쪽에서 파하였는데 이 현이라고 말하여진다.
(포구수는) 굽이돌아 동남쪽으로 흘러 로성(潞城) 남쪽을 지난다.
(후한의) 세조(世祖)는 팽총(彭寵)을 어양태수(漁陽太守)로 삼고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팽총이 배반하자 광무(光武)는 유격장군(㳺擊將軍) 등륭(鄧隆)을 보내 정벌하였는데 포구수(是水)의 남쪽에 진영을 설치하였었다. 광무는 반드시 패배시킬 것을 채찍질하여 팽총을 파하였는데 벼랑의 옛 진영이 남아있다.

 

鮑丘水又東南入夏澤. 澤南紆曲渚十餘里, 北佩謙澤, 眇望無垠也.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동남으로 흘러 하택(夏澤)으로 들어간다. 하택(澤)의 남쪽의 굽은 연못가가가 10여리이고 북쪽으로 겸택(謙澤)을 둘러쌓고 있으니 한쪽 눈으로 봐도 제한이 없다. 

 

[수경]
又南至雍奴縣北, 屈東入于海
(포구수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옹노현(雍奴縣) 북쪽에 도달하여 굽이돌아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주]
鮑丘水自雍奴縣故城西北, 舊分笥溝水東出. 今笥溝水斷, 衆川東注, 混同一瀆,東逕其縣北. 又東與泃河, 合水出右北平無終縣 西山 白楊谷. 西北流逕平谷縣, 屈西南流獨樂水入焉. 水出北抱犢固, 南逕平谷縣故城東. 後漢建武元年, 光武遣十二將, 追大槍 五幡, 及平谷, 大破之于是縣也. 其水南流入于泃. 泃水又左合盤山水, 水出山上, 其山峻險, 人跡罕交. 去山三十許里, 望山上水, 可髙二十餘里, 素湍皓然, 頺波厯溪, 沿流而下, 自西北轉注于泃水. 泃水又東南逕平谷縣故城東南, 與洳河㑹. 水出北山, 山在傂奚縣故城東南. 東南流逕博陸故城北, 又屈逕其城東, 世謂之平陸城, 非也. 漢武帝璽書封大司馬霍光為侯國. 文穎曰..博大陸平, 取其嘉名而無其縣. 食邑北海 河東. 薛瓉曰..按漁陽有博陸城, 謂此也. 今城在且居山之陽 處 平陸之上, 帀帶川流, 面據四水, 文氏所謂無縣目嘉美名也. 洳水又東南流, 逕平谷縣故城西, 而東南流注于泃河.
포구수(鮑丘水)는 옹노현(雍奴縣) 옛 성의 서북쪽으로부터 옛날에는 나뉘어져 있었던 사구수(笥溝水)의 동쪽을 나온다.
지금 사구수(笥溝水)는 끊겼는데, 여러 하천들이 동쪽으로 물을 대고 하나로 섞여서 하나의 도랑(瀆)이 되어 동쪽으로 옹노현(其縣) 북쪽을 지난다.
또한 동쪽에서 구하(泃河)가 (포구수로) 합류한다.
구하(水)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 서쪽에 있는 산의 백양곡(白楊谷)에서 나온다. (구하는) 서북쪽으로 흘러 어양군 평곡현(平谷縣)을 지나, 굽이돌아 서남쪽으로 흘러 독악수(獨樂水)가 (구하로) 들어간다. 독악수(水)는 북포독고(北抱犢固)에서 나오는데, 남쪽으로 흘러 평곡현(平谷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난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원년 광무(光武)가 12 장군을 보내 대창(大槍)과 오번(五幡)을 쫓았는데 평곡에 이르러 크게 그들을 파한 곳이 이 縣이다. 독악수(其水)는 남족으로 흘러 구하(泃河)로 들어간다.
구수(泃水)는 또한 왼쪽에서 반산수(盤山水)와 합류하는데 반산수(水)는 산 위에서 나온다. 그 산은 험준하여 인적이 드물다(罕交). 산에서 30리 정도 가면 망산(望山) 위에 물이 있는데 높이가 가히 20여리 이다. 흰 여울이 일어 물결이 떨어져 시내(溪)를 지나 그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데 서북쪽으로부터 돌아서 구수(泃水)로 들어간다.
구수(泃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평곡현(平谷縣) 옛 성의 동남쪽을 지나서 여하(洳河)와 합류한다. 여하(水)는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북산은 (어양군) 치해현(傂奚縣)  옛 성 동남쪽에 있다. 여하는 동남쪽으로 흘러 박륙(博陸) 옛 성의 북쪽을 지나고, 굽이돌아 박륙의 성 동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평륙성(平陸城)이라고 하지만 틀렸다. 한(漢) 무제(武帝)가 새서(璽書)를 내려 대사마(大司馬) 곽광(霍光)을 후국(侯國)에 봉하였다. 문영(文穎)은 말하기를 ‘넓고 큰 육지가 평평하니 그 아름다움을 취하여 이름하였으므로 그러한 현의 이름은 없다. 북해(北海)와 하동(河東)을 식읍으로 하였다’고 하였다. 설찬(薛瓉)은 말하기를 ‘생각해보니, 어양(漁陽)에는 박륙성(博陸城)이 있는데 이것을 말함이다. 지금 성은 차거산(且居山)의 남쪽에 있는데 평평한 육지 위에 위치하여 하천들이 띠처럼 두루 돌아 흐르며 (차거산의) 면들이 4개의 물에 의지하였는데 문영이 말하는 그러한 현은 없고 아름다운 이름을 취한 것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여수(洳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평곡현(平谷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서, 동남쪽으로 흘러 구하로 들어간다.

 

泃河又南逕紻城東, 而南合五百溝水, 水出七山北, 東逕平谷縣之紻城南, 東入于泃河. 泃河又東南, 逕臨泃城北, 屈而歴其城東, 側城南出. 竹書紀年, 梁恵成王十六年, 齊師及燕戰于泃水, 齊師遁, 即是水也. 泃水又南, 入鮑丘水.
구하(泃河)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앙성(紻城)의 동쪽을 지나서 남쪽으로 흘러 오백구수(五百溝水)와 합류한다.
오백구수(水)는 칠산(七山) 북쪽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평곡현(平谷縣)의 앙성(紻城) 남쪽을 지난 후에 동쪽으로 흘러 구하(泃河)로 들어간다.
구하(泃河)는 또한 동남으로 흘러 림구성(臨泃城)  북쪽을 지나 굽이돌아 그 성의 동쪽을 지난 후 성 옆의 남쪽으로 나온다. 죽서기년에
말하기를 량혜성왕(梁恵成王)  16년, 제(齊)의 장수(師)가 연(燕)에게 가서 구수(泃水)에서 전쟁하였는데 제(齊)의 장수가 피하였다고 하였은 즉 이 물이다.
구수(泃水)는 또한 남으로 흘러 포구수(鮑丘水)로 들어간다.

 

鮑丘水又東合泉州渠口故瀆, 上承滹沱水于泉州縣, 故以泉州為名. 北逕泉州縣東,又北, 逕雍奴縣東, 西去雍奴故城百二十里. 自滹沱北入, 其下厯水澤百八十里, 入鮑丘河, 謂之泉州口. 陳夀魏志曰..曹太祖以蹋頓擾邉, 將征之, 從泃口鑿渠, 逕雍奴泉州以通河海者也. 今無水.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천주거구(泉州渠口) 즉 옛날 도랑(瀆)과 동쪽으로 합류하는데, 호타수(滹沱水)를 천주현(泉州縣)에서 위에서 이어받기에(上承) 그래서 천주(泉州)를 강이름으로 하였다.
(천주거구)는 북쪽으로 흘러 천주현(泉州縣) 동쪽을 지나며, 또한 북쪽으로 흘러 옹노현(雍奴縣) 동쪽을 지나는데, 옛 옹노성(雍奴城)이 서쪽으로 120리 떨어져 있다. (천주거구는) 호타하(滹沱河)로부터 북쪽으로 들어가는데 그 아래로 수택(水澤)을 지나 180리를 간 후에 포구하(鮑丘河)로 들어간다. 이것을 말하기를 천주구(泉州口)라고 한다. 진수(陳夀)의 삼국지 위지에서 말하기를 조태조(曹太祖)가 답돈(蹋頓)이 변방을 어지럽히므로 그를 정벌하러 갈때에 구하(泃河)의 구(口)로부터 도랑을 팠는데 옹노(雍奴)와 천주(泉州)를 지나 강과 바다를 통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그런 도랑은 없다.

 

鮑丘水又東, 庚水注之. 水出右北平徐無縣北塞中, 而南流, 厯徐無山, 得黒牛谷水, 又得沙谷水, 竝西出山, 東流注庚水. 昔田子泰避難居之, 衆至五千家. 《開山圗》曰..山出不灰之木, 生火之石. 按注云, 其木色黒, 似炭而無葉, 有石, 赤色如丹, 以二石相磨, 則火發, 以然無灰之木, 可以終身, 今則無之. 其水又逕徐無縣故城東, 王莽之北順亭也. 魏土地記曰..右北平城東北百一十里有徐無城. 其水又西南, 與周盧溪水合, 水出徐無山, 東南流, 注庚水. 庚水又西南流, 灅水注之.水出右北平俊靡縣, 王莽之俊麻也. 東南流, 世謂之車軬水. 又東南流, 與温泉水合. 水出北山温溪, 即温源也. 養疾者不能澡其炎漂, 以其過灼故也. 魏土地記曰..徐無城東有温湯, 即此也. 其水南流百步, 便伏流入于地下, 水盛則通注灅水. 又東南逕石門峽, 山髙嶄絶, 壁立洞開, 俗謂之石門口. 漢中平四年, 漁陽張純反, 殺右北平太守劉政, 遼東太守陽紘. 中平五年, 詔中郎將孟益率公孫瓉討純, 戰于石門, 大破之. 灅水又東南流, 謂之北黄水, 又屈而為南黄水, 又西南逕無終山, 即帛仲理所合神丹處也, 又于是山, 作金五千斤以救百姓. 山有陽翁伯玉田, 在縣西北, 有陽公壇社, 即陽公之故居也.《搜神記》曰..雍伯, 洛陽人, 至性篤孝, 父母終殁, 葬之于無終山. 山髙八十里, 而上無水, 雍伯置飲焉. 有人就飲, 與石一斗, 令種之, 玉生其田. 北平徐氏有女, 雍伯求之, 要以白璧一雙. 媒者致命, 伯至玉田, 求得五雙. 徐氏妻之, 遂即家焉. 《陽氏譜叙》言..翁伯是周景王之孫, 食采陽樊. 春秋之末, 爰宅無終, 因陽樊而易氏焉. 愛人博施, 天祚玉田. 其碑文云..居于縣北六十里翁同之山, 後潞徙于西山之下, 陽公又遷居焉, 而受玉田之賜. 情不好寳, 玉田自去, 今猶謂之為玉田陽. 干寳曰..于種石處, 四角作大石柱, 各一丈, 中央一頃之地, 名曰玉田, 至今相傳云..玉田之掲, 起于此矣, 而今不知所在, 同于《譜敘》自去文矣. 藍水注之, 水出北山, 東流屈而南, 逕無終縣故城東.故城, 無終子國也. 春秋襄公四年, 無終子嘉父使孟樂如晉, 因魏絳納虎豹之皮, 請和諸戎. 是也, 故燕地矣. 秦始皇二十二年, 滅燕, 置右北平郡治此, 王莽之所謂北順也. 漢世, 李廣為郡, 出遇伏石, 謂虎也, 射之飲羽, 即此處矣. 魏土地記曰..右北平城西北百三十里, 有無終城. 其水又南入灅水, 灅水又西南, 入于庚水. 地理志曰..灅水出俊靡縣, 南至無終, 東入庚水. 庚水 世亦謂之為拓水也. 南逕燕山下, 懸巖之側, 有石鼓, 去地百餘丈, 望若數百石囷, 有石梁貫之, 鼓之東南, 有石援桴, 狀同擊勢, 耆舊言, 燕山石鼓鳴則土有兵. 庚水又南, 逕北平城西, 而南入鮑丘水, 謂之拓口.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경수(庚水)가 포구수(之)로 들어간다.
경수(水)는 우북평군(右北平郡) 서무현(徐無縣) 북쪽 새(塞) 가운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서무산(徐無山)을 지나다가 흑우곡수(黒牛谷水)와 만나고 또한 사곡수(沙谷水)와도 만나는데 (이 두 개의 강은) 모두 서쪽으로 산을 나와(竝西出山) 동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로 들어간다. 옛날 전자태(田子泰)가 난을 피하여 그곳에 살았었는데 같이 온 무리가 5000가구이다. 《개산도》에서 말하기를 ‘산에서는 재가 되지 않는 나무가 나오고 불을 내는 돌이 난다’고 하였다. (그 책의) 按注에서 말하기를 그 나무의 색은 검으며 숯과 비슷하고 잎이 없다고 하고, 돌이 있는데 색이 붉어 주사와 같고 두 개의 돌을 서로 갈면 불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以然無灰之木, 可以終身, 今則無之.
경수(其水)는 또한 우북평군 서무현(徐無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왕방의 북순정(北順亭)이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우북평성(右北平城) 동북쪽 110리에 서무성(徐無城)이 있다’고 하였다. 경수(其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주로계수(周盧溪水)와 합류하는데 주로계수(水)는 서무산(徐無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로 들어간다.
경수(庚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류수(灅水) 가 경수(之)로 들어간다. 류수(水)는 우북평군(右北平郡) 준미현(俊靡縣)에서 나오는데 왕망이 준마(俊麻)로 고쳤다. (류수는)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세간에서는 거분수(車軬水)라고 한다. (류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온천수(温泉水)와 합류한다. 온천수(水)는 북산(北山) 온계(温溪)에서 나오는데 즉 온원(温源)이다. 養疾者不能澡其炎漂, 以其過灼故也.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서무성(徐無城) 동쪽에는 온탕(温湯)이 이다고 했는데 즉 이것(온원 온천수)이다. 온천수(其水)는 남쪽으로 100보를 흐르다가 물길을 아래로 바꾸어 지하로 흐르며 물이 많자져서 통하여 류수(灅水)로 들어간다. (류수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석문(石門)의 골짜기(峽)를 지나는데, 산이 매우 높아 절벽같고, 절벽은 통로처럼 열려 있으니 세간에서 말하기를 석문구(石門口)라고 한다. 한(漢) 중평(中平) 4년에 어양(漁陽)의 장순(張純)이 배반하여 우북평 태수 류정(劉政)과 요동태수 양굉(陽紘)을 죽였다. 중평(中平) 5년에 중랑장(中郎將) 맹익(孟益)에게 공손찬(公孫瓉)을 거느리고 장순(純)을 토평하라고 조서를 내려 석문에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류수(灅水)는 또한 동남으로 흐르는데 북황수(北黄水)라고도 한다. (류수는) 또한 굽이돌아 남황수(南黄水)가 되어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우북평군 무종현의) 무종산(無終山)을 지나는데, 즉 백중리(帛仲理)가 신단(神丹)과 합한 곳이 있는데 곧 이 산이다.  (백중리는) 금 5천근으로 백성을 구했다. 무종산(山)에는 양옹백(陽翁伯)의 옥전(玉田)이 무종현(縣)의 서북쪽에 있고, 양공(陽公)의 단사(壇社) 즉 양공(陽公)이 옛날에 거하던 곳이 있다. 《수신기》에서 말하기를 ‘양옹백(雍伯)은 락양(洛陽) 사람으로 지극한 효성에 도달하여 부모가 죽으매 무종산(無終山)에 장사지냈다. 무종산(山)은 높이가 80리로 그 위로는 물이 없어 양옥백이 마실것을 설치하였다. 사람이 물을 마시러 가서 돌 1되로 파종하매 옥이 그 밭에서 생겨났다. 북평(北平)의 서씨(徐氏)에게 딸이 있었는데 양옥백이 그 딸을 구하니, (서씨는) 백벽(白璧) 1쌍을 요구하여 중매자를 보내었다. 양옥백이 옥전에 이르러 5쌍을 구하여 얻어서 서씨의 딸을 아내로 삼아 드디어 가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양씨보서》에 말하기를 ‘양옥백은 주(周) 경왕(景王)의 자손인데 양번(陽樊)을 식읍으로 삼았었는데 춘추시대 말기에 무종(無終)에서 살았다. 그래서 양번(陽樊)을 성씨로 삼았다. 사람을 사랑하기를 널리 베푸니 하늘이 옥전을 지어줬다’고 하였다. 그 비문에 말하기를 ‘(양옹백은) 무종현 북쪽 60리 옹동산(翁同之山)에 살았었는데 후에 서산(西山)의 아래로 이사하였고 양공(陽公)은 또한 옮겨 살았는데 옥전(玉田)을 부여받았다. 보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옥전이 스스로 (그에게) 갔기에 지금 오히려 그것을 이름하여 옥전양(玉田陽)이라 한다’고 하였다. 간보(干寳)가 말하기를 ‘돌을 파종한 곳에 4각형의 근 돌기둥을 세웠는데 각기 1장이고 (돌기둥) 중앙은 1경의 땅이며 이름하기를 옥전이라 하였다. 지금 전하기를 옥전(玉田)의 게(掲)라 하는데 여기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위치를 알 수 없는데 《양씨보서》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
람수(藍水)가 류수(之)로 들어간다. 람수(水)는 북산(北山) 나와서 동으로 흘러 돌아 흐르다가 남쪽으로 흘러 무종현(無終縣) 옛 성을 지나는데, 옛 성은 무종자국(無終子國)이다. 춘추(春秋) 양공(襄公)  4년에 무종자국(無終子國)의 가부(嘉父)가 맹악(孟樂)을 진(晉)으로 보내어 위강(魏絳)을 매게로 하여 범과 표범의 가죽을 공납하게 함으로써 모든 융(戎)과 화친하게 하도록 했던 나라가 이것이며,  옛 연(燕)의 땅이다. 진(秦) 시황(始皇) 22년에 연(燕)을 멸하고 우북평군을 두어 그곳을 다스렸는데 왕망은 북순(北順)이라 고쳤다. 한(漢) 때에는 리광(李廣)으로 우북평군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우복석이 나는데 호(虎)라고 하며 그것을 쏘며 깃털을 바신다고 하는 바로 그곳이다(出遇伏石, 謂虎也, 射之飲羽, 即此處矣).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우북평성(右北平城) 서북쪽 130리에 무종성(無終城)이 있는데 그 강줄기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류수(灅水)로 들어가며, 류수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류수(灅水)는 우북평군 준미현(俊靡縣)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무종에 이르러 동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경수는 세간에서 척수(拓水)라고도 한다. (경수는?) 남쪽으로 흘러 연산(燕山) 아래를 지나는데, 매달려 있는 바위의 옆에 돌로된 북이 있다. 이 북은 땅에서 100장(丈)정도의 높이에 있고 100개의 돌을 매달아 놓은 것 같이 보이며 돌을 들보로 뚫어 (매달아) 놓았다. 돌로된 북의 동남쪽에는 돌로 된 원부(援桴)가 있는데 모양이 격세(擊勢)와 같다. 노인들이 예부터 말하기를 연산(燕山)의 돌북이 울면 땅에 병사들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경수(庚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북평성(北平城) 서쪽을 지난 후에 또 남쪽으로 흘러 포구수로 들어가는데 이 곳을 척구(拓口)라 한다.

 

鮑丘水又東, 逕右北平郡故城南. 魏土地記曰..薊城東北三百里有右北平城.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동쪽으로 흘러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옛 성 남쪽을 지난다. 위씨토지기에서 말하기를 계성(薊城) 동북쪽 300리에 우북평성(右北平城)이 있다고 한다.

 

鮑丘水又東, 巨梁水注之. 水出土垠縣北陳宫山, 西南流逕觀雞山, 謂之觀雞水.水東有觀雞寺, 寺内起大堂, 甚髙廣, 可容千僧. 下悉結石為之, 上加塗塈. 基内疎通, 枝經脈散. 基側室外, 四出爨火, 炎勢内流, 一堂盡温. 盖以此土寒嚴, 霜氣肅猛, 出家沙門, 率皆貧薄, 施主慮闕道業, 故崇斯構, 是以志道者多栖託焉. 其水又西南流, 右合區落水. 水出縣北山, 東南流入巨梁水. 巨梁水又南, 逕土垠縣故城西, 左㑹寒渡水. 水出縣東北, 西南流至縣, 右注梁河. 梁河又南, 澗于水注之. 水出東北山, 西南流, 逕土垠縣故城東, 西南流, 入巨梁水. 巨梁水又東南, 右合五里水, 水發北平城東北五里, 山故世以五里名溝. 一名田繼泉, 西流, 南屈逕北平城東, 東南流注巨梁河, 亂流入于鮑丘水. 自是水之南, 南極滹沱, 西至泉州 雍奴, 東極于海, 謂之雍奴藪. 其澤野有九十九淀, 枝流條分, 往往逕通, 非惟梁河, 鮑丘歸海者也.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거량수(巨梁水)가 포구수(之)로 들어간다.
거량수(水)는 우북평군 토은현(土垠縣) 북쪽 진궁산(陳宫山)에서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관계산(觀雞山)을 지나며 (이곳을 지나는 거량수를) 관계수(觀雞水)라고 한다. 관계수(水) 동쪽에는 관계사(觀雞寺)가 있는데 관계사 안에는 대당(大堂)이 솟아 있어 심히 높고 넓으며 가히 1000명의 중들이 살고 있다. (대당)의 아래는 모두 돌로 엮어 만들었고 위는 흙으로 벽을 만들었으며 대당의 바닦(基) 안에는 소통하게 하여 (소통하는) 가지(枝)가 서로 흩어져 있다. (대당의) 바닦(基) 옆의 실외에 사방으로 불을 때어 나가는데 불줄기가 안으로 흘러 모든 대당이 따뜻해진다.  盖以此土寒嚴, 霜氣肅猛, 出家沙門, 率皆貧薄, 施主慮闕道業, 故崇斯構, 是以志道者多栖託焉.
거량수(其水)는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구락수(區落水)와 합류한다. 구락수(水)는 토은현(縣) 북산(北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거량수(巨梁水)로 들어간다. 거량수(巨梁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토은현(土垠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 왼쪽으로 한도수(寒渡水)와 모인다. 한도수(水)는 토은현(縣) 동북에서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토은현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량하(梁河)로 들어간다. 량하(梁河) 는 또한 남쪽으로 흐르다가 간우수(澗于水)가 량하(之)로 들어간다. 량하(水)는 동북쪽 산에서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토은현(土垠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거량수(巨梁水)로 들어간다. 거량수(巨梁水)는 또한 동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오리수(五里水)와 합류한다. 오리수(水)는 북평성(北平城) 동북 50리에서 발하는데, 산이 옛날에 5리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며 또다른 이름은 전계천(田繼泉)이다. (오리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남쪽으로 돌아 북평성(北平城) 동쪽을 지나고, 동남쪽으로 흘러 거량하(巨梁河)로 들어가는데, 난류가 일어 포구수(鮑丘水)로 들어간다. 이 물(포구수와 거량하가 합하여 지는 곳)의 남쪽으로부터 남쪽의 끝은 호타하(滹沱河)이고 서쪽으로는 천주(泉州)와 옹노(雍奴)에 이르며 동쪽 끝은 바다인데 이 곳을 옹노늪(雍奴藪)라고 한다. 옹노늪의 벌판은 99개의 얕은 물(淀)이 있고 작은 물줄기가 곁가지로 나뉘어 이따금 서로 합쳐 흐르기도 하는데 거량하(梁河)라고 하지는 않고 포구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非惟梁河, 鮑丘歸海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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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영토 남북사천리’

중국의 명청(明淸, 1368~1910)시대를 대표하는 모든 총서 사서 지리지에는 조선 영토를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문헌을 12개만 골라 시대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1461) ② 『수역주자록(殊域周咨录)』(1574) ③ 『함빈록(咸宾录)』1598, ④ 『황명경세문(皇明經世文)』 (1643) ⑤『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1658) ⑥『대청일통지(大清 一統志)』 1743, ⑦『사고전서(四庫全書) 조선부(朝鲜赋)』(1781) ⑨『사고전서 외사이관고총서(外四夷馆考总叙)』(1781) ⑩『사고전서 정계양잡저(鄭開陽雜著) 조선도설(朝鮮圖說)』(1781) ⑪ 『광여도전서(廣輿圖全書)』(1785) ⑫『동번기요(東藩纪要)』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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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府  總督兼將軍 民政提法交涉度支 鹽運司勸業道 副都統駐 順治十四年四月 於盛京城內置府 設府尹

 

위 문구에 나오는    은 청나라 옹정제 때 광서포정사의 상소에 따라 전국의 주,현을 沖.繁. 疲. 4종류로 나누어 그 지역 관리를 뽑을 때 참고.

교통이 빈번한 곳을 이라 하고,

행정업무가 많은 곳을 이라 하고,

세금으로 받는 쌀 체납이 많은 곳을 라고 하고,

풍속이 불순하고 범죄사건이 많은 곳을 이라 표시함.

봉천부는 4가지가 모두 해당되므로 상당히 크고 번잡한 곳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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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지리지>

耀州 ...本渤海椒州 故縣五 椒山.貉領.기泉.尖山.巖淵 皆廢 戶七百 隸海州 東北至海州二百裏 統縣一 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一百二十裏

요주...본래는 발해 초주였으며 초산.맥령.기천.첨산.암연현 등 5 개 현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모두 폐현되었다. 호 수는 700 호이며 요주는 해주에 예속.통제를 받는다. 동북쪽으로 200 리 떨어진 곳에 해주가 있으며 속현은 하나로 암연현을 설치했는데 (암연현의) 동쪽 경계 바깥은 신라 땅이다. 옛 평양성은 암연현 서남쪽에 있고 (옛 평양성에서?) 동북쪽으로 해주까지는 120 리다. 

<요사/지리지> 상경도

上京道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新莽曰北安平

<금사/지리지.동경로>

東京路, 府一, 領節鎮一, 刺郡四, 縣十七, 鎮五. 【皇統四年二月, 立東京新宫, 寢殿曰保寧, 宴殿曰嘉恵, 前後正門曰天華 曰乾貞. 七月, 建宗廟, 有孝寧宫. 七年, 建御容殿.】 
遼陽府, 中, 東京留守司. 本渤海遼陽故城, 遼完葺之, 郡名東平. 天顯三年, 陞為南京, 府曰遼陽. 十三年, 更為東京. 太宗天㑹十年, 改南京路平州軍帥司為東南路都統司之時, 嘗治於此, 以鎮髙麗. 【後置兵馬都部署司, 天徳二年, 改為本路都總管府, 後更置留守司. 産 白兎 師姑布 䑕毫 白鼠皮 人參 白附子.】 戸四萬六百四. 縣四, 鎮一.  遼陽. 【倚. 東梁河, 國名烏勒呼必喇(兀魯忽必剌), 俗名太子河.】 鶴野. 鎮一. 【長宜, 哈斯罕在其地】 宜豐. 【遼舊衍州安廣軍, 皇統三年廢為縣. 有東梁河】 石城. 【興定三年九月, 以縣之靈巖寺為巖州, 名其倚郭縣名東安, 署行省.】
澄州, 南海軍刺史, 下. 本遼海州, 天徳三年改州名. 户一萬一千九百三十五. 縣二,鎮一.  臨溟. 鎮一 【新昌】. 析木. 【遼銅州廣利軍 附郭 析木縣也, 皇統三年廢州來屬. 有沙河.】 
瀋州, 昭徳軍刺史, 中. 本遼定理府地, 遼太宗時置軍曰興遼, 後為昭徳軍, 置節度.明昌四年, 改為刺史, 與 通 貴徳 澄 三州皆隸東京. 户三萬六千八百九十二, 縣五. 樂郊. 【遼太祖俘三河之民建三河縣於此, 後改今名. 有渾河.】 章義. 【遼舊廣州, 皇統三年降為縣來屬. 有 遼河 東梁河 遼河大口.】 遼濵. 【遼舊遼州東平軍, 遼太宗改為始平軍, 皇統三年廢為縣. 有遼河. 】 挹樓. 【遼舊興州興中軍常安縣, 遼嘗置定理府刺史於此, 本挹樓故地, 大定二十九年章宗更名. 有 范河 清河國名奎必喇(叩隈必喇).】 䨇城. 【遼䨇州保安軍也, 皇統三年降為縣, 章宗時廢.】
貴徳州, 刺史, 下. 遼貴徳州寧逺軍, 國初廢軍, 降為刺郡. 戸二萬八百九十六. 縣二.貴徳 【倚. 有范河.】 奉集 【遼集州懐逺軍奉集縣, 本渤海舊縣. 有渾河】 
葢州, 奉國軍節度使, 下. 本髙麗蓋葛牟城, 遼辰州. 明昌四年, 罷哈斯罕, 建辰州遼海軍節度使. 六年, 以與陳同音, 更取蓋葛牟為名. 户一萬八千四百五十六. 縣四 鎭二. 湯池. 【遼鐵州建武軍湯池縣】 鎮一【神鄉】 建安. 【遼縣】 鎮一【大寧】 秀巖. 【本大寧鎮, 明昌四年陞. 太和四年廢為鎮, 貞祐四年復陞置.】  熊岳. 【遼盧州玄徳軍熊岳縣. 遼屬南女直湯河司】 
復州,下, 刺史. 遼懷逺軍節度, 明昌四年降為刺史.【舊貢鹿筋, 大定八年罷之.】 戸一萬三千九百五十. 縣二 鎮一. 永康【倚舊名永寧大定七年更】 化成【遼蘇州安復軍本髙麗地興宗置皇統三年降為縣來屬貞祐四年五月陞為金州興定二年陞為防禦】 鎮一【歸勝】 
來逺州下舊來逺城本遼熟女直地大定二十二年升為軍後為州 
國初置統軍司天徳二年置總管府貞元元年與海蘭路總管竝為尹兼本路兵馬都總管【此路皆明安戸】 

<명사/지리지>

北平行都指揮使司

本大寧都指揮使司 洪武29年9月置 治大寧衛 ...領衛10.....西南距北平布政司八百裏

북평행도지휘사사 본래 대녕도지휘사사였고 1396년9월 설치. 대녕위에 치소가 있으며...10 개 위를 통령하고...서남쪽으로 북평포정사까지 거리는 800 리이다.

大寧衛...治大定縣 ...洪武20年8月置衛 9月分置左右中三衛 尋又置前後2衛 28年4月改左右後3衛爲營州左右中3護衛...南有土河...

대녕위...대정현에 치소가 있고...1387년8월 설치하였고 9 월에 좌.우.중 3 개 위를 설치하였다. 얼마 후 또 전.후 2 개 위를 치하고 1395년4월 좌.우.후 3 개 위를 영주 좌.우.중 3 개 호위로 개칭하였다...남쪽에 토하가 있다.

會州衛   洪武20年9月置 永樂元年廢...西北有馬孟山...土河之源出焉 下流合於근河 又南入於遼水...

회주위 1385년9월 설치하고 영락원년에 폐했다...서북쪽에 마맹산이 있고...토하의 발원지이며 하류에서 근하로 합쳐지고 또 남쪽으로 흘러 요수로 들어간다.

 

營州中屯衛 元龍山縣屬大寧路...永樂元年3月徙治平穀縣西屬大寧都司 南有柳河...

영주중둔위   원시기 용산현으로 대녕로에 속했다...영락원년3월 평곡현 서쪽으로 옮기고 대녕도사에 속하게 했고 남쪽에 유하가 있다.

營州前屯衛 元興州屬上都路...南有老河 源出馬孟山流經此 又經行都司城南 東北入於潢河...

영주전둔위 원시기 흥주이며 상도로에 속했다...남쪽에 노하가 마맹산에서 발원하여 전둔위를 지나 행도사성의 남쪽을 지난 후  동북쪽으로 흘러 황하로 합쳐진다.

 

遼東都指揮使司 元置遼陽等處行中書省 治遼陽路 弘武4年7月置定遼都衛...8年10月改都衛爲遼東都指揮使司治定遼中衛...東至鴨綠江...西至山海關 南至旅順海口 北至開原...京師1700裏

요동도지휘사사 원시기에 요양등처행중서성을 설치하고 요양로에 치소를 두었는데 1371년 7 월 정요도위를 설치했다...1375년 10 월 도위를  요동도지휘사사로 개칭하고 정요중위에 치소를 두었다... 동쪽으로는 압록강, 서쪽으로는 산해관까지, 남쪽으로는 여순해구,북쪽으로는 개원까지를 통령했다... 경사까지는 1700 리 떨어져 있다.  

定遼中衛    ...治遼陽縣...西南有首山南有千山 又東南有安平山山有鐵場 又西有遼河自塞外流入至海州衛入海 又西北有渾河 一名小遼水 東北有太子河一名大梁水又東梁水 下流俱入於遼水 又東有鴨綠江東南入海 又東有鳳凰城在鳳凰山東南  成化17年築爲朝鮮入貢之道 又南有鎭江保城 又連山關亦在東南

정요중위  ...요양현에 치소를 두었고...서남쪽에는 수산이, 남쪽에는 천산이 있다. 또 동남쪽에는 안평산이 있는데 철장이 있다. 또 서쪽에는 요하가 새외에서 흘러와 해주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서북쪽에는 혼하 일명 소요수가 있고 동북쪽에는 태자하 일명 대량수.동량수가 있는데 하류에서 모두 요수로 합쳐진다. 또 동쪽에는 압록강이 있는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동쪽에는 봉황성이 있는데 봉황산 동남쪽에 있다. 성화 17 년 조선의 입공로를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다. 또 남쪽에는 진강보성이, 또 연산관도 동남쪽에 있었다.

철령위 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 二十六年四月遷古嚚州之地 卽今治也 西有遼河 南有泛河 又南有小淸河 俱流入於遼河 ...東南有奉集縣 卽古鐵嶺城也 接高麗界 ... 南距都司二百四十裏

홍무 21 년 3 월 옛철령성에 설치. 26 년 4 월 옛 은주땅으로 옮김. 곧 지금의 치소다. 서쪽에는 요하가 있고 남쪽에는 범하 또 소청하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든다. ...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옛 철령성이며 고려와 경계다. ... 남쪽으로 도사(요양현)까지는 240 리 떨어져 있다.

蓋州衛 屬遼陽路 洪武四年廢 ... 東北有石城山 ... 又東有駐蹕山 西濱海 有連雲島 上有關 又東有泥河 ... 又西北有梁房口關 海運之舟由此入遼河 旁有鹽場 又東有石門關 西有鹽場 東有鐵場 北距都司二百四十裏

 

 

<청사고/지리지>

 

1914년 중화민국 국무원은 청사관을 개관하여 자오얼쉰[趙爾巽]을 관장으로 삼고 커사오민[柯劭忞]·우팅셰[吳廷燮]를 비롯해 68명의 학자에게 편찬을 맡겼다. 주로 〈명사 明史〉의 체재를 모방했다. 1917년 장쉰[張勳]의 복벽사건(선통제 푸이를 옹립하여 청조 회복을 기도한 사건)으로 여러 달 폐관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다. 이후 국가 재정의 궁핍으로 경비가 삭감되고 편찬관도 줄어드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27년 8월 불완전하나마 완성되었다. 기간은 15년 걸렸지만 실제로 사업을 벌인 기간은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교간 사업 도중 자오얼쉰이 병으로 죽자 커사오민이 관장대리가 되었는데, 도리어 위안진카이[袁金鎧]의 심복으로 입관한 진량[金梁]이 실권을 장악했다. 진량은 시국의 혼란을 틈타 독단적인 전횡을 일삼아 비난받았다.

 

직예

北至內蒙古阿巴噶右翼旗界 一千二百裡 東至奉天寧遠州界 六百八十裡 南至河南蘭封縣界 一千四百三十裡 西至山西廣寧縣界 五百五十裡     

保定府...直隸省治..東北距京師350裡

順天府 明初曰北平府 後建北京 復改 自遼以來皆都此 正統6年始定曰京師 領州6縣25...

순천부 명초에는 북평부라 하였고 후에 북경을 건설하고 이름을 다시 고쳤다. 요 이래 모두 이곳에 도읍하였다. 1441년 비로소 경사라 정하였다. 주와 25 현을 통령했다.
  密雲...府東北130裡...縣南密雲山 東九松山舊曰九莊嶺 西有沽河自欒平入...是爲白河...潮河亦自欒平入...俗亦潮? 古北口

            關  副都統巡司駐...
밀운... 순천부 치소에서 동북쪽 130 리 떨어져 있고 현 남쪽에는 밀운산, 동쪽에는 구송산 즉 옛 구장령이 있으며 서쪽에는 고하가  란평에서 흘러온다...백하라 하며...조하 역시 란평에서 흘러오고...세상에서는 조백하라 한다. 고북구관이 있는데 부도통.순사 주재

獨石口 明初爲開平衛  順治初爲上北路 隸宣府鎭 東北二百五十裡 康熙中置縣丞 曰獨石口...東南有大小石門山太保山白河古沽水...下流會潮楡諸水爲北運河  上都河古濡水 出口東北巴顔屯圖固爾山 合三道河 西北入多倫口下流爲란(水+欒)河至樂亭入海 行二千一百裡有奇...

독석구  명나라 초기에는 개평위였었고 순치(1644~1661) 초에는 상북로 선부진에 속하여 (선부진에서) 동북쪽으로 250 리 지점에 있다. 강희(1662~1721) 중 현승을 두었었고 독석구라 하였다. ... (독석구의) 동남쪽에는...백하 곧 옛 고수가 있고...하류에서 조하.유하 등과 합하여 북운하로 불려진다. (또) 상도하가 있는데 옛 난(濡:머리감을 난,젖을 유로 읽지 않는다)수인데 ... 다륜에서 삼도하와 합쳐지고 아래로 흘러 란하로 불리며 낙정현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길이는 2100 리다. 유기(? 기이하다? 2100 리가 의심된다?)

 

승덕부  ...康熙42年(1702) 建避暑山莊於熱河...西南省治780裡...熱河古武列水...欒河自欒平入合之...란평현  府西南60裡 ... 西림계...西北欒河自豊寧入...潮河自豊寧入 西南沽河自獨石口入...평천현  府東150裡 ...老合河古託紇臣水 俗省曰老河 出喀喇沁右翼南190裡永安山 亦曰察罕河 與...又東北合昆都倫河 入建昌大寧城東北80裡...

 (평천현에 흐르는)노합하는 객라심우익 남쪽 190 리 떨어진 영안산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대녕성 동북쪽 80 리  떨어진 건창현으로 흘러 들어간다.

  풍녕현  府西北260裡...東有熱河西源...北上都河自多倫口入 納小欒河 曰란(水+欒)河...潮河古혁(水+血)水 一曰飽丘水...

  란평현  府西南60裡 ... 西림계산...西北欒河自豊寧入...潮河自豊寧入 西南沽河自獨石口入...

 

조양부 ... 明 營州衛...置朝陽縣 光緖30年(1904)以墾地多熟 升府 以建昌隸之... 西南距省治1420裡... 西北潢河自內蒙古阿魯科爾沁旗入 西南大凌河自建昌入 合南土河 逕西平房西 左合卑克努河 察罕河 又東合布爾葛蘇台河 又東至龍城 曰三座塔城 左合固都河 凉水河至金敎寺東北 左合土河 入盛京義州            

...명 시기엔 영주위가 설치되었고... 조양현을 설치하고 1904 년엔 땅을 개간하여 수확이 늘자 부로 승격시키고 건창현을 속하게 하였다. ...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인 보정부까지는 1420 리이며...서북쪽 내몽고 아로과이심기에서 황하가 흘러들어 오고,  서남쪽 건창현에서는 대릉하가 흘러와 남토하와 합치고 서평방 서쪽을 지난다. 왼쪽으로는 비극노하 찰한하 또 동쪽으로는 포이갈소태하와 합쳐 동쪽으로 흘러 일명 삼좌탑성인 용성에 이르며 왼쪽으로 고도하 양수하가 흘러들고 금교사 동북쪽에 이르러서는 왼쪽으로 토하와 합쳐진 후 성경 즉 봉천성 금주부 의주로 흘러든다.
  건창현  府西南260裡... 東有布古圖山 漢白狼山 白狼水出焉 今曰大凌河 ... 東入朝陽... 北有潢河自赤峰 會老哈河 自平泉入 合伯

               爾克河 錯出復入 英金河亦自縣來會 復合落馬河 東北至穀口 乾隆8年(1743) 更名敖漢玉瀑 與潢河 東入朝陽  柳邊北首朝

               陽 訖臨楡 ...           

조양현에서 서남쪽으로 260 리 떨어져 있다. ... 동쪽에 포고도산이 있는데 한 시기 백랑산이며 백랑수가 발원하는데 지금의 대릉하이다. ... 동쪽으로 흘러 조양으로 들어가며 ... 북쪽에 적봉으로부터 황하가 흘러들어와 평천에서 흘러오는 노합하와 합쳐지고 백이극하와 합쳐지며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흐르다가 다시 합쳐진다. 영금하도  적봉현에서 흘러오며 락마하와 합치고 동북쪽으로 흘러 곡구에 이르며 1743 년 오한옥폭으로 개치되었고 황하로 흘러든 후 동쪽으로 흘러 조양으로 들어간다. 유변 지역의 북쪽에는 조양으로 흘러들고 남쪽은 임유현으로 물이 모인다.

적봉직예주 ...西南距省治1320裡...領縣1 潢河自圍場入 州北200餘裡之巴林旗 東南老哈河 自平泉逕東南隅 納伯爾克河 入建

               英金河古饒樂水...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인 보정부까지는 1320 리이다. ... 거느리는 현은 하나이다. 황하는 적봉에서 북쪽으로 200 여리 떨어진 파림기 위장에서 흘러오며 동남쪽에는 평천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백이극하를 받아들인 노합하가 있는데 북쪽으로 흘러 건창현으로 흘러들어간다. 영금하는 옛 요락수인데... 

 

영평부 ...西距省治830裡... 

  노룡 東南陽山 西南孤竹城 欒河自遷安入合靑龍河

  천안 府西北40裡 ...欒河自承德府入 合黃花川河瀑河 又南 左得鐵門關水入潘家口古盧龍塞也 ...

  임유 府東北170裡 ... 以明山海衛置山海關 今東問古楡關 ...北有角山 長城枕其上...

  창려 府東南70裡 ...欒河自欒州入

  란주 府西南45裡 ...欒河自盧龍入

  락정 府南少東120裡 ...欒河自昌黎入

 

奉天省

금주부...省西南490裡...

  금현... 附府...東大凌河 西小凌河 右受女兒河 皆南入海...

  의주    府北90裡 ...大凌河導源直隸朝陽 東流入邊 逕州北 屈南流入錦縣

  영원주 府西南100裡

 

봉천부...奉天省治 西南距京師1470승덕...渾河在南...

    요양...府南120裡...北太子河...

    철령...府北130裡...遼河在西...

흥경부

   臨江縣   府東南 590 里 明 鴨綠江部 光緖 28 年 分通和縣地 設治帽兒山 置縣隸興京同知

봉황성직예구

수암주岫巖州 口西北一百八十裡 ... 南羅圈背嶺 西北分水嶺 ... 北偏嶺口莽溝接海城

長白府   省東南 980 里 明 建州衛地 鴨綠江部 光緖 33 年 分臨江縣及吉林長白山北麓地 設治塔甸 置府

   安圖縣   府東北 400 里 明 建州左衛地 宣通元年 以府東圖們江源地 設治紅旗河口 置縣隸府 長白山在西

吉林省

延吉府    省東南 760 里 東南路道駐 明錫燐布爾哈通愛丹3衛 靑初 爲南荒圍長 光緖 7 年 弛墾 置延吉口 宣通元年 和龍縣 省東南800里

             明새金河衛地 光緖 11年吉.韓通商 和龍谷與光齋谷西步江互市 28年置分防經歷 屬延吉 宣通 2年改隸東南路道

연길은 길림성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760 리 지점에 있고, 동남로도가 주재하며, 명나라 시기에는 석린.포이합통.애란 3 위 지역이였다. 청 초기에는 남쪽 황위장이라 이름하였고 광서 7 년(1882 년)에 개간을 시작.허락하며 연길구를 설치하였고, 선통 원년(1909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敦化縣 省東南 470 里 古邑婁國 明建州左衛 後屬窩集部之赫席赫路 淸始朝居鄂多리(口+里)城 卽此 初爲額穆赫索羅연地 光緖 8 年 建新城置 隸吉林 宣統元年 改隸東南路道  

돈화현 (길림)성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470 리 떨어져 있고 옛 숙신국 땅이다. 명나라 시기에는 건주좌위 땅이였고 후에는 와집부 혁석혁로에 속했다. 청나라 시조가 거처했다는 악다리성이 바로 이곳이다. 초에는 액목혁색라연 땅이라 했다. 광서 8 년(서기 1882 년)에 신성을 축성하여 현을 설치하고 길림(府)에 예속시키고 선통 원년 (서기 1909 년)에 동남로도에 고쳐서 예속시켰다

 

 

 

 

 

<사기>

 7 항우본기

徙燕王韓廣爲遼東王. 集解徐廣曰:都無終. 燕將臧荼從楚救趙, 因從入關, 故立荼爲燕王, 都薊.

연왕 한광을 옮기어 요동왕으로 삼았다. (집해 : 서광이 말하기를 요동의 도읍은 무종이다.) 연의 장수 장다는 초를 따라 조를 구원하였고, 이어서 함게 관중에 들어간 까닭에 장다를 세워 연왕으로 삼고, 계에 도읍하도록 하였다.

 8 고조본기

燕將臧荼爲燕王, 都薊. 故燕王韓廣徙王遼東. 廣不聽, 臧荼攻殺之無終. ……  

(206)연의 장수 장다를 연왕으로 삼았다. 도읍은 계로 하였다. 그러므로 연왕 한광은 옮겨 요동왕으로 가게 하니, 한광이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장다는 한광을 무종에서 공격하여 죽이고 그 땅을 아울러 왕이 되었다.

 

  

<한서/지리지>

 

漁陽郡 漁陽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入海 行七百五十里

右北平郡 無終 故無終子國 浭水西至雍奴入海 過郡二行六百五十里

 

遼西郡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海陽 龍鮮水東入封大水 封大水綏虛水皆南入海

新安平 夷水東入塞外

令支 有孤竹城

肥如 玄水出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陽樂

臨兪 兪水首受白浪 東入塞外 又有候水北入兪

㒍 下官水南入海 又揭石水賓水皆南入官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玄兎郡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麗莽曰下句麗 屬幽州 

           西蓋馬 馬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후한서/군국지>

廣陽郡 高帝置 ...葪本燕國 刺史治(一)

(一)漢官曰 洛陽東北二千里

上谷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二百里

漁陽 秦置 洛陽東北二千里

右北平郡 秦置 洛陽東北二千三百里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一)...

(一)魏氏春秋曰 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 因名之水小水貊

玄兎郡 武 洛陽東北四千里

樂浪郡  洛陽東北五千里

遼東屬國...洛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一) 屬遼西 賓徒 故屬遼西 徒河 屬遼西 無慮 有無慮山 險瀆(二) 房

  ... (二) 史記曰 王險衛滿所都

 

<후한서/동이열전> 동옥저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蓋馬縣名屬玄兎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卽王險城也 東濱大海 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 其地東西夾南北長 可折方千里 土肥美 背山向海 宜五穀善田種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한.왜조의 내용이며 아래 원문은 대방군에서 왜국 야마대여왕국까지의 로정 설명이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 ...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渡一海 千餘里至對馬國 ... 又南渡一海名曰澣海 至一大國 ...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 ... 東南陸行五百里到伊都國 ... 郡使往來常所駐 東南奴國百里 ... 東行不彌國百里 ... 南至投馬國 水行二十日 ... 可五萬餘戶 ...  南至邪馬臺國 女王之所都 水行十日 陸行一月 ... 可七萬餘戶 自女王國以北 其戶數道裏可得略載 其與旁國遠絶 不可得詳

왜인은 대방(군)의 동남쪽 큰 바다에 산다. (대방)군에서 왜까지는 해안을 돌아 뱃길로 남쪽으로 또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한국을 지나면 구야한국의 북안에 도착하는데 여기까지가 7000 여 리다. 바다를 건너 천여리 가면 대마국에 도착하고 ... 또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는데 한해라고 하며 이 한해를 건너면 일대국에 도착한다. ... 또 남쪽으로 바닷길 1000 여리를 가면 말로국에 이르고 ... 동남쪽으로 육로로 500 리에 이도국이 있는데 (대방)군의 사신들이 왕래할 때 항상 머무는 곳이다. 동남쪽으로 100 리 가면 노국이 이르고 ... 동쪽으로 백리 가면 불미국에 이르고 ... 남쪽으로 뱃실 20 일 걸려 두마국에 이르며 5 만 여 호쯤된다. ... 남쪽으로 뱃길 10 일과 육로 1 개월 쯤가면 여왕이 도읍하는 야마대국에 이른다.  대략 7 만 여 호쯤된다. 여왕국의 북쪽 지역은 그 호수와 리 수를 대략적이나마 기록할 수 있지만 그 밖의 나라들은 멀고 끊기는 곳도 많아 상세한 것을 얻기 힘들다.   

 

<진서/지리지>

樂浪郡 漢置 統縣六 ...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수서/지리지>

상곡군 수성遂城현

        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五郡十一縣 龍城廣興定荒屬昌黎郡 石城廣都屬建德郡 襄平新昌屬遼東郡

        永樂屬樂浪郡 富平帶方永安屬營丘郡 後齊唯留昌黎一郡 領永樂新昌二縣餘竝省 開皇元年州移 三年郡廢 十八年

        改爲遂城

북평군 노룡盧龍현

      ... 盧龍 舊置北平郡 領新昌朝鮮二縣 後齊省朝鮮入新昌 又省遼西郡竝所領海陽縣入肥如 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

      十八年改名盧龍 大業初置北平郡

 

<구당서/지리지>

계주 옥전玉田현

       漢無終縣屬右北平郡 乾封二年於廢無終縣置 名無終屬幽州 萬世通天二年改爲玉田 神龍元年割屬營州 開元四年還

       屬幽州 八年又割屬營州十一年又屬葪州

 

<통전/변방문.동이하.고구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裁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尙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卽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 又平壤城東北有魯陽山 魯城在其上 西南二十里有葦山 南臨浿水 其大遼水源出靺鞨國西南山 南流至安市 小遼水源出遼山 西南流與大梁水會 大梁水在國西 出塞外 西南流注小遼水 
馬紫水一名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 故俗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卽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入海 高麗之中此水最大 波瀾淸澈所經鎭濟 皆貯大船 其國恃此以爲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遼水東南四百八十里 漢樂浪玄兎郡之地 自後漢及魏爲公孫氏所據 至淵滅 西晉永嘉以後 復合入高麗 其不耐屯有帶方安市平郭安平居就文城皆漢二郡諸縣 則朝鮮濊貊沃沮之地마자수 일명 압록수는 동북쪽 말갈 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물빛이 오리 머리색과 같아 이름을 얻었다. 요동에서 500 리 떨어졌는데 국내성 남쪽으로 지나고 서쪽에서 염난수와 합쳐진 후 서남쪽으로 흘러 안평성을 지난 후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 가장 크고 파도가 일 정도로 넓고 맑은데 건너는 진에는 모두 대선을 정박시켜 놓았고 고구려에서는 하늘이 만든 참으로 여겼으며 강폭은 300 보에 이르렀다. (압록수)는 평양성에서 서북쪽으로 450 리 떨어져 있고 요수에서 동남쪽으로 480 리 떨어져 있다. 한 시기의 낙랑.현토군 땅이며 후한 시기로부터 (조)위 시기까지 공손씨가 점거하여 연에 이르러 멸망하였다. 서진 영가 이후 고구려가 다시 찾았다. 그 곳은 불내.둔유.대방.안시.평곽.안평.거취.문성은 모두 한나라 2 군의 제현 지역이며 조선.예맥.옥저 땅이였다.   

 

 

<백두산정계비>

주) 1909 년 5 월 중 일본 측량기사 오오타 일행이 백두산정계비 앞에서

 

 

 

<광개토왕릉비>

 

 

<낙랑군 점제현신사비>

 

 

 

 

 

<고려사>

1088 년 9 월 고려 선종은 태복소경 김선석을 遼나라에 파견하여 그들의 각장 설치계획 파기를 요구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문제를 재삼 제기하는 것이 비록 예절에 어긋나는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나 지난날 보낸 글월에서 우리나라 전체 백성들의 의사를 이미 밝혔고, 여러 번 보낸 사절을 통하여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염원을 묵살하니 어찌 다시 말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다행히 당신처럼 공정한 임금을 만나 다시 한 번 우리의 심정을 말하노니, 삼가 돌이켜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집정하였을 때에 책명을 보내 관작을 주었으므로 황태후의 성덕을 칭송하고 공물을 보냈더니 우리의 성의를 표창하기 위하여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하여 요동성 서부는 거란에 붙이고 개사수 동부는 우리의 영토로 확정했던 것이다.

 

또한 귀국 성종의 통화 12 년(994)에 예방사절을 보냈을 때에 정위 고량이 다음과 같은 천보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고려국왕 왕치에게 이 글을 보낸다. 동경 유수 소손녕의 보고에 의하여 당신이 9 월 초에 장정들을 동원하여 성책을 수축하려 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10 월 상순에 벌써 준공했다고 하니 당신은 특출한 재능으로 모든 사물에 정통하며 우발에 대한 태도가 성실하다는 것을 알겠다. 이에 멀리 공물을 보낸다. 금번에 농한기를 이용하여 먼 지방에 있는 장정들을 모아 중요한 나루터에 성책을 쌓음으로써 광막한 들판에 침입하는 도적들을 방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며, 현 정세에 매우 적절한 조치다. 더군다나 저 여진이 제때에 황하를 입음으로써 나의위신에 눌려 감히 딴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 성책 수축 공사를 빨리 끝내도록 노력하여 양국의 영원한 안전을 기할 것이다.``

 

이 조서의 간곡한 내용을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 우리의 대신 서희가 국경문제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귀국의 동경 유수 소손녕이 명령을 받들고 와서 상의함으로써 각각 양쪽 경계를 맡아서 모든 성들을 구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공진을 압록강 구당사로 안문에 파견하여 낮에는 동쪽 강변을 감시하고 밤이 되면 내성에 들어가 자면서 귀국의 힘을 입어 점차 좀도적이 제거되고, 그 후부터 경비를 하지 않아도 변방 정세가 더욱 좋아졌다. 

 

아직 성종의 조서에 먹도 채 마르지 않았고, 황태후의 자상한 말씀이 어젯일 같은데 갑인년(1014)에는 하천에 선박을 비치하여 통로를 열었고, 을묘년(1015)에는 우리 고을 성내에 들어와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을미(1055)에는 궁구란자를 설치하고 정자를 만들었다가 병신년(1056)에 우리의 요구에 따라 철거하고 우리에게 보낸 조서에는 <기타 세세한 문제도 일정한 약속을 지키게 하겠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또 임인년(1062)에는 의주,선주 남쪽에 매매원을 설치하려고 하였을 때 우리가 여러 차례에 걸쳐 문제를 제기한 즉 기존 시설을 보수하고 새로 설치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갑인년(1074)에 또 다시 정융성 북쪽에 새로 탐수암을 설치하니 우리가 이것의 철훼를 요구하였다. 이에 시설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우리나라가 대대로 귀국을 성의껏 대접하였고, 해마다 사절과 공납을 보냈으며, 몇 번이나 사신을 시켜 글월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탐수암,성책,다리 등 일체 시설을 철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 새로운 시장을 설치하려고 하니, 이는 귀국 선대 임금들의 유지에 어긋나는 것이며 우리의 간곡한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때문에 수천리 길을 우리 사신이 계속 오가며 90 년 동안 가져다준 공납도 보람없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분개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새로 조상의 뒤를 이은 이래 우발으로서의 임무를 삼가 지키면서 나의 성의를 다하려는 이때, 어찌 사소한 이속을 도모하기 위해 그같은 시설을 경영하고 있겠는가? 영토가 귀국과 연결되어 있어 선린정책을 쓰려고 약속하였지만 이 좁은 지역에 각장을 설치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하란 말인가. 그런 까닭에 글월을 빈번히 띄웠는데도 당신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위로는 하늘이 두렵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바라건대 당신은 지방 관리들의 잘못된 의견을 물리치고 우방의 중대한 관심사를 고려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들판에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어 자기 생업에 안착하도록 함으로써 우리 백성들을 경동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의 호의를 잊지 않겠다.`

 

이 편지를 받은 거란은 김선석에게 답신을 주어 고려로 돌려보냈다. 그 회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각장 설치를 정지하라는 항의서한을 여러 번 받았다. 이 같은 사소한 일로 그렇게 여러 말을 할 까닭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시일에 적당하게 처리하려고 한다. 더군다나 아직 설치할 기일도 정하지 않았으니 부디 안심하고 성의를 다할 것이며, 심각한 의구심을 풀고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기 바란다.`

 

거란은 이 편지를 보낸 후 고려 조정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여 양 2천 마리, 수레 23 대, 말 3 필을 보내왔다.

 

숙종 정축 2년(1097)  12월 계사일에 요나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 이상(李湘) 등을 시켜 왕에게 옥책(玉冊), 옥인(玉印), 면류관, 수례, 장복(章服), 안마(鞍馬), 피륙 등등 물품을 보내왔다. 책문(冊文)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하늘의 도움과 조상의 유훈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가 이미 43년이나 되었다. 안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로 제후(諸侯)를 무마하여 다 옳은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귀국은 동방에 사직(社稷)을 세워 그 지역이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다. 우리의 연호를 물어 가고 공물을 보내왔다. ......" 

高麗史 地理一

 

惟我海東三面阻海一隅連陸輻員之廣幾於萬里.高麗太祖興於高勾麗之地降羅滅濟定都開京三韓之地歸于一統. 然東方初定未遑經理至二十三年始改諸州府郡縣名成宗又改州府郡縣及關驛江浦之號遂分境內爲十道就十二州各置節度使. 其十道一曰關內二曰中原三曰河南四曰江南五曰嶺南六曰嶺東七曰山南八曰海陽九曰朔方十曰浿西其所管州郡共五百八十餘. 東國地理之盛極於此矣顯宗初廢節度使置五都護七十五道安撫使尋罷安撫使置四都護八牧. 自是以後定爲五道兩界曰楊廣曰慶尙曰全羅曰交州曰西海曰東界曰北界. 惣京四牧八府十五郡一百二十九縣三百三十五鎭二十九其四履 西北自唐以來以鴨綠爲限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勾麗而東北過之. 今略據沿革之見於史策者作地理志. 

 

 

地理

 

王京開城府本高勾麗扶蘇岬新羅改松嶽郡太祖二年定都于松嶽之陽爲開州創宮闕.[會慶殿後改承慶; 膺乾殿改奉元; 長齡殿改千齡; 含慶殿改向福; 乾明殿改儲祥; 明慶殿改金明; 乾德殿改大觀; 文德殿改修文; 延英殿改集賢; 宣政殿改廣仁; 宣明殿改穆淸; 舍元殿改靜德; 萬壽殿改永壽; 重光殿改康安; 宴親殿改睦親; 五星殿改靈憲; 慈和殿改集禧; 正陽宮改書和; 壽春宮改麗正; 朢雲樓改觀祥; 宜春樓改韶暉; 神鳳門改儀鳳; 春德門改棣通; 大初門改泰定; 閶闔門改雲龍; 會日門改利賓; 昌德門改興禮; 開慶門改皇極; 金馬門改延水; 天福門改紫宸; 通天門改永通; 景陽門改陽和; 安祐門改純祐; 左右承天門改通嘉; 左右宣慶門改敷祐; 左右延祐門改奉明; 延守門改敎化; 長寧門改朝仁; 宣化門改通仁; 興泰門改芬芳; 陽春門改廣陽; 大平門改重化; 百福門改保化; 通慶門改成德; 東化門改慶度; 西化門改向成; 大淸門改淸泰; 永安門改興安.] 立市廛辨坊里分五部. 光宗十一年改開京爲皇都成宗六年更定五部坊里十四年爲開城府管赤縣六畿縣七. 顯宗九年罷府置縣令管貞州德水江陰三縣又長湍縣令管松林臨津免山臨江積城坡平麻田七縣俱直隸尙書都省謂之京畿. 十五年又定京城五部坊里[東部坊七里七十曰安定坊奉香坊令昌坊松令坊楊堤坊倉令坊弘仁坊南部坊五里七十一曰德水坊德豐坊安興坊德山坊安申坊西部坊五里八十一曰森松坊五正坊乾福坊鎭安坊香川坊北部坊十里四十七曰正元坊法王坊興國坊五冠坊慈雲坊王輪坊堤上坊舍乃坊師子岩坊內天王坊中部坊八里七十五曰南溪坊興元坊弘道坊鸎溪坊由岩坊變羊坊廣德坊星化坊.]二十年京都羅城成.[王初卽位徵丁夫三十萬四千四百人築之至是功畢. 城周二萬九千七百步羅閣一萬三千*閒大門四中門八小門十三曰紫安曰安和曰成道曰靈昌曰安定曰崇仁曰弘仁曰宣旗曰德山曰長覇曰德豐曰永同曰會賓曰仙溪曰泰安曰鸎溪曰仙嚴曰光德曰乾福曰昌信曰保泰曰宣義曰狻猊曰永平曰通德. 又皇城二千六百*閒門二十曰廣化曰通陽曰朱雀曰南薰曰安祥曰歸仁曰迎秋曰宣義曰長平曰通德曰乾化曰金耀曰泰和曰上東曰和平曰朝宗曰宣仁曰靑陽曰玄武曰北小門. 一云丁夫二十三萬八千九百三十八人工匠八千四百五十人城周一萬六百六十步高二十七尺厚十二尺廊屋四千九百一十*.] 文宗十六年復知開城府事都省所掌十一縣皆屬焉. 又割西海道平州任內牛峯郡以隸之. 忠烈王三十四年設府尹以下官掌都城內別置開城縣掌城外. 恭愍王七年修松都外城恭讓王二年分京畿爲左右道以長湍. 臨江免山臨津松林麻田積城坡平爲左道; 開城江陰海豐德水牛峯爲右道. 又依文宗舊制[文宗二十三年正月以楊廣道漢陽沙川交河高峯豐壤深岳幸州海等州見州抱州峯城金浦陽川富平童城石泉荒調黃魚富原果州仁州安山衿州南陽守安交州道永興兎山安峽僧嶺朔嶺鐵原西海道延安白州平州俠州新恩牛峯通津安州鳳州瑞興等州縣屬京畿.]以楊廣道漢陽南陽仁州安山交河陽川衿州果州抱州瑞原高峯交州道鐵原永平伊川安峽漣州朔寧屬左道以楊廣道富平江華喬桐金浦通津西海道延安平州白州谷州遂安載寧瑞興新恩俠溪屬右道各置都觀察黜陟使以首領官佐之.王都鎭山松嶽[一名崧岳巓有神祠.]又有龍岫山進鳳山東江[在貞州.]西江[卽禮成江.]碧瀾渡屬郡一縣十二. 

 

 

 開城府

惟我海東三面阻海一隅連陸輻員之廣幾於萬里.高麗太祖興於高勾麗之地降羅滅濟定都開京三韓之地歸于一統.然東方初定未遑經理至二十三年始改諸州府郡縣名成宗又改州府郡縣及關驛江浦之號遂分境內爲十道就十二州各置節度使.其十道一曰關內二曰中原三曰河南四曰江南五曰嶺南六曰嶺東七曰山南八曰海陽九曰朔方十曰浿西其所管州郡共五百八十餘.東國地理之盛極於此矣顯宗初廢節度使置五都護七十五道安撫使尋罷安撫使置四都護八牧.自是以後定爲五道兩界曰楊廣曰慶尙曰全羅曰交州曰西海曰東界曰北界. 惣京四牧八府十五郡一百二十九縣三百三十五鎭二十九其四履西北自唐以來以鴨綠爲限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盖西北所至不及高勾麗而東北過之.今略據沿革之見於史策者作地理志.

王京 開城府 本高勾麗扶蘇岬 新羅改松嶽郡 太祖二年定都于松嶽之陽爲開州 創宮闕. 

 

開城縣本高勾麗冬比忽新羅景德王十五年改爲開城郡.顯宗九年罷開城府置開城縣令管貞州德水江陰三縣直隸尙書都省.忠烈王三十四年以開城府掌都城內別置開城縣掌城外.有井名曰大井[世傳懿祖娶龍女初到開城山麓以銀盂掘地水隨涌因以爲井.]有歧平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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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지리지 / 평안도

지리지 / 평안도

 

평안도(平安道)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삼국(三國) 시대에는 고구려의 소유(所有)이었는데, 보장왕(寶藏王) 27년 무진당나라 고종(高宗) 총장(摠章) 원년.】신라 문무왕(文武王)당나라 장수 이적(李勣)과 더불어 이를 멸(滅)하고 드디어 그 땅을 병합하였다. 효공왕(孝恭王) 9년 을축당나라 애제(哀帝) 천우(天祐) 2년.】궁예(弓裔)철원(鐵原)에 웅거하여 스스로 후고려왕(後高麗王)이라 일컫고 패서(浿西) 13진(鎭)으로 분정(分定)하였는데,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라 패서도(浿西道), 또는 북계(北界)라고 칭하였다. 숙종(肅宗) 7년 임오송나라 건중정국(建中靖國) 2년.】서북면(西北面)이라 칭하고, 고려 말에 황주목(黃州牧)·안악군(安岳郡)·철화현(鐵和縣)·장명진(長命鎭)을 내속(來屬)시켰다가, 홍무(洪武) 무진년에 다시 서해도(西海道)에 붙이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평안도(平安道)로 고치고, 16년 병신에 영길도(永吉道)·갑산군(甲山郡)·서면(西面)·여연(閭延) 등의 땅이 본도(本道)와의 거리가 너무 멀므로, 소훈두(小薰頭) 이서(以西)를 떼어 여연군(閭延郡)으로 삼고 내속(來屬)시켰다.
 
동쪽으로 함길도 고원(高原)에, 서쪽으로 바다에, 남쪽으로 황해도 황주(黃州)에, 북쪽으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데, 동서(東西)가 3백 23리, 남북(南北)이 4백 23리이다.

 

관할[所管]은 유수(留守)가 1,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 목(牧)이 3, 도호부(都護府)가 5, 군(郡)이 21, 현(縣)이 14이다.
명산(名山)은 대성산(大城山)평양(平壤). 】·묵방산(墨方山)개천(价川). 】·묘향산(妙香山)희천(熙川). 】천마산(天磨山)정녕(定寧). 】·천성산(天聖山)은산(殷山). 】향적산(香積山)태천(泰川). 】이다.

 

대천(大川)은 대동강(大同江)이니, 곧 옛 패강(浿江)이다.《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 동북쪽에 노양산(魯陽山)이 있고,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으며, 서남쪽 20리에 위산(葦山)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臨)한다.”고 하였다. 】왕성강(王城江)【중사(中祀)에 실리어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희천군(熙川郡) 가막동(加莫洞)에서 시작하여 묘향산(妙香山) 동쪽을 둘러서 덕천(德川)·개천(价川)·순천(順川)·은산(殷山)·성천(成川)·자산(慈山)을 지나 강동(江東)에 이르고, 그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북쪽 문음산(文音山)에서 시작하여 곡산(谷山)·수안(遂安)·상원(祥原)·삼등(三登)을 지나 강동(江東)에 이르러서, 두 갈래의 물이 합류(合流)하여 평양부(平壤府) 지경으로 들어가서 성(城) 동쪽을 안고 흘러 대동강(大同江)이 되고, 9리를 더 가서 마둔진(亇屯津)이 되었으니, 옛 이름은 구진 익수(九津溺水)이다.【소사(小祀)에 실리어 있다. 】모두 배가 있어서 사람을 건네준다. 강서(江西)를 지나 용강현(龍岡縣) 남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청천강(淸川江)안주(安州)에 있는데, 살수(薩水)라고도 한다.【곧 수나라 장수[隋將] 우문 술(宇文述) 등이 패(敗)한 곳이다. 】그 근원은 희천군(熙川郡)영원진(寧遠鎭)으로부터 나와서 강계(江界) 적유현(狄踰峴)의 물과 합하여, 희천군 동쪽 묘향산을 둘러서 영변(寧邊) 동쪽을 지나, 주성(州城) 북쪽에 이르러 청천강이 되고, 안융(安戎)5187) 노근강(老斤江)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소사(小祀)에 실리어 있다. 】

 

박천강(博川江)박천(博川)에 있는데, 옛 이름은 대녕강(大寧江)이다. 그 근원은 삭주(朔州) 천마산(天磨山)으로부터 나와서 태천(泰川)·운산(雲山)·영변(寧邊)을 지나, 군(郡) 옛성[古城] 서쪽에 이르러 박천강이 되어 안주강(安州江) 하류로 들어간다.

 

압록강의주(義州) 서쪽에 있는데, 옛 이름은 청하(靑河), 또는 용만(龍灣)이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나와서 수백여 리를 흘러 함길도 갑산군(甲山郡)을 지나고, 여연(閭延)·강계(江界)·이산(理山)을 거쳐서 독로강(禿魯江) 물과 합하여, 벽동(碧潼)·창성(昌城)·소삭주(小朔州)를 지나, 주(州)의 성(城) 서쪽에 이르러 압록강이 되고, 암림곶(暗林串)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중사(中祀)에 실리어 있다. 
 
신(臣)이 상고하건대,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멀리 지키기가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遼東) 고새(故塞)를 수축하였는데,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위만(衛滿)패수를 건너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격파(擊破)하였다.” 하였으며, 또 상고하건대,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낙랑군(樂浪郡)은 산의 둘레를 따라 성바퀴를 삼았는데, 남쪽으로 패수 가에 임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해행(海行)하여 남쪽으로 바닷가를 끼고 패강(浿江) 어귀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新羅)의 서북(西北)을 얻었다.” 하였고, 또 수(隋) 양제(煬帝)의 동정 조서(東征詔書)에 말하기를, “창해(滄海)를 배로 천리(千里)를 가서 패강을 가로 질러가면 평양에 이른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지금의 대동강패수가 됨이 명백하다. 그런데, 《문헌통고》패수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압록강을 가리키어 패수라 한 듯하니, 대개 전해 듣기를 잘못한 것이다.

 

호수가 4만 1천 1백 67호, 인구가 10만 5천 4백 44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천 8백 78명, 익군(翼軍)이 1만 4천 53명, 선군(船軍)이 3천 4백 90명, 수성군(守城軍)이 7백 89명이다.
 

 

고려사

개설            

고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인물 등의 내용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관찬사서로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고려사』는 조선 건국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과 아울러 이전 왕조인 고려의 무신정권기∼우왕·창왕기까지의 폐정을 권계하고 교훈을 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편찬되었지만,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인 서술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서지적 사항            

총 139권 75책. 전체 구성은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 있다.

『고려사』가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454년(단종 2)에 간행되어 널리 반포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는 현전하지 않는다. 이듬해인 1455년 을해자(乙亥字)로 인쇄된 주자본(鑄字本)과 그 뒤(중종 연간) 을해자를 복각한 목판본이 세간에 전해 내려왔다.

1908년 일본의 국서간행회에서 활판본(活版本)을 3책으로 간행하였다. 1955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는 동대학교 도서관 소장 최한기(崔漢綺) 수택본(手澤本)을 3책으로 영인하고, 색인 1책을 인쇄하여 출판했다. 1972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을해자 인본(印本)과 궐본인 세가의 권19∼21, 권31, 지의 권27·28·31·33·35·37을 을해자의 복각 목판본으로 보충하여 영인하였다. 또한 1971년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실에서 11책과 색인 1책으로 국역(國譯) 간행하였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1613년(광해군 5) 목판본이 2010년 9월 20일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편찬의 연원은 고려 말기 이제현(李齊賢)·안축(安軸)·이인복(李仁復) 등이 편찬하고자 시도한 『국사(國史)』에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이제현이 태조에서 숙종까지의 본기(本紀)만을 편찬했을 뿐 그 나머지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그 본기의 내용은 현전하지 않으나, 다만 각 왕의 본기 말미에 써 붙였던 사찬(史贊)이 『익재난고(益齋亂藁)』와 『고려사』·『고려사절요』등에 전하고 있다.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성계는 1392년(원년) 10월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에게 고려시대 역사의 편찬을 명했다. 이에 따라 1395년(태조 4) 정월에 정도전·정총에 의하여 편년체(編年體)로 서술된 37권의『고려국사(高麗國史)』가 편찬되었다. 이 책도 현전하지 않으나, 『태조실록』과 『동문선』에 정도전이 쓴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과, 정총이 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가 수록되어 그 편찬 체재와 편찬 시의 기본원칙 등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고려국사』는 단시일에 편찬되고 또 찬자인 개국공신들의 주관이 개입되었다 하여 비판받았고, 태종이 즉위한 이후 조선 건국 과정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에 태종은 1414년(태종 14)에 하륜(河崙)·남재(南在)·이숙번(李叔蕃)·변계량(卞季良) 등에게 개수(改修)를 명하였다. 그러나 1416년(태종 16) 개수의 책임자인 하륜이 사망함으로써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뒤 세종은 『고려국사』의 공민왕 이후 기사 서술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1419년(세종 원년) 9월 유관(柳觀)·변계량(卞季良)에게 개수를 명해, 1421년(세종 3) 정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때에 공민왕 이후의 기사 중 고려 사신(史臣)의 사초(史草) 및 다른 내용들과 ‘고려의 왕실 용어로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일치하는 것’ 중에서 정도전 등이 미처 고치지 못했던 것을 전부 개서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반포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개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역시 참칭(僭稱)의 개서 문제에 있었다.

1423년(세종 5) 유관과 윤회(尹淮)에게 제2차 개수 작업에서 문제가 되었던 참칭한 용어라도 실록을 대조하여 당시 썼던 용어를 그대로 직서(直敍)하도록 하여 1424년(세종 6) 8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를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라 칭하였다. 그러나 참칭한 용어의 직서를 강경히 반대하는 변계량의 주장으로 반포가 중지되었다.

제4차의 고려사 편찬은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세종 24) 사이에 신개(申槩)와 권제(權踶)에 의해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 완성되어 왕에게 바쳐졌다. 이 때 개수된 내용은 소략한 내용의 보충과 개칭된 용어의 직서에 관한 것이었다. 이 『고려사전문』은 1448년(세종 30)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출했으나, 교정 과정에서 역사기술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반포가 중지되었다. 이 책의 문제점은 권제가 남의 청탁을 받고 고쳐 쓴 점과 자신의 조상에 대한 기술이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것 등이었다.『고려사전문』은 편년체의 역사서로서 내용이 크게 보완 시정된 것이었으나, 공정하지 못한 점이 일부 있다고 하여 끝내 반포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세종은 1446년(세종 28) 10월 『고려사전문』의 고려 말기 기사에서 태조 이성계의 선대 도조(度祖)·환조(桓祖)로부터 태조에 이르는 기록에서 빠진 내용들을 발견하고, 1449년(세종 31) 정월 우찬성 김종서(金宗瑞), 이조판서 정인지(鄭麟趾),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齊) 등에게 개찬을 명하였다. 이 때에는 사체(史體)의 문제가 새로이 제기되었다. 이에 세자(뒤에 문종)와 함께 왕에게 건의해 편년체에서 새로이 기전체로 편찬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이리하여 1451년(문종 원년) 8월 김종서 등에 의해 태조∼공양왕까지 32명의 왕의 연대기인 세가 46권, 천문지(天文志)∼형법지(刑法志)까지 10조목의 지 39권, 연표 2권, 1,008명의 열전 50권, 목록 2권을 합해 총 139권의 『고려사』가 편찬되었다. 이로써 전왕조사(前王朝史)를 정리하려는 노력은『고려국사』편찬으로부터 시작해 57년 만에『고려사』로 마무리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왕조가 건국된 이후 전대사를 방대하게 정리한 것은『고려사』가 지나간 역사에 대한 정리뿐만 아니라, 고려 군신들의 자취를 참고로 하여 새로운 조선 왕조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바로 인쇄되지 못하고 1454년(단종 2) 10월 정인지의 이름으로 인쇄 반포되었다.

내용            

여러 차례의 개찬 과정에서『고려사』는 내용이 크게 보완되었다. 즉 고려시대의 『실록(實錄)』·『동문수(東文粹)』·『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제가잡록(諸家雜錄)』·『금구집(金龜集)』·『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의 자료가 새로이 이용되었다. 그 편찬 체재가 기전체였으므로 반복되는 기사도 모두 실을 수 있었다. 천문(天文)과 오행(五行)의 변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그 단적인 예이다. 따라서 그 당시에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빠뜨리지 않고 거의 모두 수록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고려국사』이래의 편찬 과정에서 크게 문제되었던 인물 평가에도 객관적인 서술로 개서되었다. 한 개인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자료가 있을 때는 이를 모두 기재하였다. 예컨대 고려 말에 의리를 지킨 정몽주(鄭夢周)·김진양(金震陽)등을 충신으로 기록하여, 조선 건국자와 견해를 달리한 인물 평가에 상당히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고려사』편찬에 참여한 인사들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고려사』에는 수사관(修史官) 32인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이 수효보다 훨씬 상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종서·유성원(柳誠源)·박팽년(朴彭年)·허후(許詡) 등은 이후의 사건으로 인해 명단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편찬의 역할에서 기사를 빼거나 보태는 작업은 고위책임자였던 김종서·정인지·허후·김조(金銚)·이선제·정창손(鄭昌孫)·신석조(辛碩祖) 등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열전은 최항(崔恒)·박팽년·신숙주(申叔舟)·유성원·이극감(李克堪) 등이었고, 세가와 지·연표는 노숙동(盧叔仝)·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이예(李芮)·윤기견(尹起畎)·윤자운(尹子雲)·양성지(梁誠之) 등이 담당하였다.

『고려사』에 실려 있는 범례 5조를 보면 세가·지·표(表)·열전·논찬에 대한 서술원칙을 알 수 있다.

(1) 세가

세가의 편찬 원칙으로 왕기(王紀)는 제후의 격에 맞는 세가로 하여 명분을 바로잡고, 세가를 쓰는 법은 『한서(漢書)』와 『원사(元史)』의 서술 원칙에 따라 사실과 언사(言辭)를 모두 기술한다는 것이다. 그 명칭을 『삼국사기』의 ‘본기(本紀)’와 달리 ‘세가’로 정한 것은 주자학적 명분론과 대명의식(對明意識)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세가를 기술하는 데 모범이 된 사서는 『원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宗)이나 폐하(陛下)·태후(太后)·태자(太子)·절목(節目)·제조(制詔)를 칭한 경우는 비록 참유(僭踰)한 것이지만, 당시에 칭했던 대로 기록해서 사실을 보존한다고 쓰고 있다. 고려 말엽 민지(閔漬)·정가신(鄭可臣)·이제현 등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정도전·변계량 등은 이를 제후국의 칭호에 맞도록 낮춰 썼었다. 그러나 이제 당시의 기록대로 직서한다는 원칙이 세종의 판단과 젊은 수사관들의 요청에 의해 채택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주성 회복을 위한 문화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원구(圓丘)에서의 제천, 적전(籍田)·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 매년 치러지는 행사는 첫 기사만 쓰되, 왕이 직접 참여한 경우는 반드시 기록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고려 왕실의 세계(世系)는 황주량(黃周亮)이 찬한 실록에 의거해 삼대(三代)를 추증한 것을 사실로 취해 쓰고, 다른 기록에 전하는 것은 별도로 첨부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태조의 세계는 목록 앞에 별도로 붙이는 특이한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고려사』가 기준으로 삼은『원사』와는 다른 점이다. 세계에서 정사(正史)인 실록 기사를 따르면서도 이와 다른 내용을 전하는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이나 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의 이설(異說)까지도 싣고 있어, 『고려사』 편찬자의 문헌 중시의 서술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2) 지

지의 기술원칙은 사실을 분류해 싣는『원사』에 의거한다는 것과『고금상정예문』·『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및 여러 사람의 잡록을 취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실제 『고려사』의 지는 천문지 3권, 역지(曆志) 3권, 오행지(五行志) 3권, 예지(禮志) 11권, 악지(樂志) 2권, 여복지(輿服志) 1권, 선거지(選擧志) 3권, 백관지(百官志) 2권, 병지(兵志) 3권, 형법지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원사』와『송사』를 참조해 지를 설정하였다. 예지가 분량이 많은 것은『고금상정예문』의 자료를 옮긴 데에 기인하며, 형법지는 주로『식목편수록』의 자료를 바탕으로 기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에는 각기 그 서문이 있고, 지는 다시 세부 내용별로 항목을 구분해 저술하였다. 항목별로는 먼저 연월이 없는 일반적인 기사를 싣고 뒤에 연월이 기록된 구체적인 역사 사실을 기술하였다. 서문과 각 항목의 일반적인 기사는『고려사』편찬자가 쓴 문장인데 자료로서의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편찬자의 역사의식과 고려사에 대한 이해 태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체로『고려사』편찬자는 고려의 통치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했다고 파악하고, 초기로부터 발전해오다가 무신정권을 계기로 통치제도가 붕괴되어 말기에 이른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3) 표

표의 범례에서는『삼국사기』에 따라 오직 연표만을 작성한다고 밝혔다. 실제『고려사』연표의 서문도『삼국사기』의 것을 참고하였다.『고려사』연표 서문에서 태조가 신라를 항복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켜 삼한을 통합했다는 서술은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밝힌 것이다.

연표에는 중국과 우리나라 연표를 대조하면서, 우리나라 연표의 난에는 왕의 즉위 사실, 외국 연호(年號)의 사용, 왕을 책봉하기 위해 온 책봉사의 기사, 반역자의 기록, 집정무신의 교체 사실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가에서 기술되지 않고 반역(叛逆) 열전에 기술된 우왕과 창왕을, 연표에서는 원년 이하 재위 연표를 다른 왕과 똑같이 하고, 단지 신우(辛禑)·신창(辛昌)으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세가·열전과 연표가 서로 다른 사람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연표가 가지는 특수성에서 찾을 수 있다.

(4) 열전

열전의 범례에서는 열전의 구성 순서와 특별한 업적이 없는 경우에는 부자(父子)를 같은 전(傳)에 합쳐 싣었다고 하였다. 또한 우왕·창왕은 역적인 신돈(辛旽)의 자손이므로 이들 16년간의 역사는 『한서』 왕망전(王莽傳)의 예에 따라 열전에 써서 역적을 토죄하는 뜻을 밝힌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열전은 후비전(后妃傳) 2권, 종실전(宗室傳) 2권, 제신전(諸臣傳) 29권, 양리전(良吏傳) 1권, 충의전(忠義傳)·효우전(孝友傳)·열녀전(烈女傳)·방기전(方技傳)·환자전(宦者傳)·혹리전(酷吏傳) 1권, 폐행전(嬖幸傳) 2권, 간신전(奸臣傳) 2권, 반역전(叛逆傳) 11권의 총 50권으로서『고려사』전체의 3분의 1이 넘는다.

770인이 입전(立傳)되었고, 다시 238인이 곁들여져 모두 1,008인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 거대한 전기집이다. 실제 열전의 분류 방식은『원사』와 가장 가까우며, 또한『송사』도 참조하였다. 우왕·창왕을 반역 열전에 넣은 것은 고려 말기 조선 건국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조선건국의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사실대로 기술한다는 원칙이 이 경우에 소홀해진 면이 있다.

열전에도『고려사』찬자들이 직접 쓴 서문이 있어 이를 통해 그들의 역사관과『고려사』에 대한 인식 태도를 알 수 있다.

(5) 논찬

논찬(論贊)의 원칙을 밝힌 범례에서는, 중국의 역대 사서에는 기·전·표·지의 말미에 찬자들이 사론(史論)을 썼지만, 여기에서는『원사』에서 논찬을 쓰지 않는 방식을 취하되 남아 있는 이제현 등의 찬(贊)을 세가에만 인용했다고 쓰고 있다. 실제 태조에서 숙종까지는 이제현의 찬(15편)을, 이후의 왕은 당시 고려실록 편찬자들의 찬(4편)과 정도전·정총 등의 ‘사신찬(史臣贊)’(14편)을 인용해 총 33편의 찬을 세가에만 싣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고려사』찬자들이 쓴 유일한 사론이 세계 말미에 붙여졌다.

또한 조칙(詔勅)과 상소문은 그 내용을 분류해 각 지에 싣고 나머지는 세가와 열전에 실었다는 원칙 및 유가(儒家)의 문집과 잡록의 사적 중 내용이 있는 것은 뽑아 보탰으며, 제(制)·조(詔)나 표·책의 글 중 내용이 없는 허사는 삭제했다는 원칙을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직서주의를 원칙으로 삼으면서도 고려 국왕의 연대 표기에서는 왕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칭했던 전통적인 관례가 유교명분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그 다음해를 원년으로 기술하였다. 이러한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에 의한 기술은 당시의 금석문(金石文) 기록이나 문집의 기록과 1년의 연대 차이를 가져왔다. 또한 기전체로 사건 내용을 분류하여 기록함으로써 열전·지에서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지 않거나 잘못 기록한 예도 적지 않다.

지는 편찬자들의 역사인식의 한계성으로 인해 고려의 정치제도와 풍속 등의 기술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즉 그것의 밑바탕에는 당·송나라 제도, 그리고 전통적인 유제(遺制)가 깔려 있는데,『원사』를 기준으로 하여 서술함으로써 전통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나라 제도의 수용만으로 이해하였다. 형법지·식화지·병지들의 서문과 연월의 기록이 없는 기사의 서술에 있어서 사실과 다른 기술을 한 것은 이러한 예에 해당된다. 또한 지 가운데 예지 등은 평면적인 기술을 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는 당시 남아 있던『고금상정예문』을 그대로 전재한 데서 생긴 것으로 이해된다.

열전은『원사』를 준거로 하여 편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은일전(隱逸傳)과 석로전(釋老傳)을 설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이를 설정하지 않은 것은 젊은 수사관들의 인생관·종교관의 편협성과 조선왕조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유교국가였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도교와 불교에 관련된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입전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많은 문화 내용을 전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열전이나 지의 서술을 위해 민간 자료를 수집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사료집으로서의 커다란 결함으로 지적된다. 비문이나 고문서·문집 등을 수집하려고 했다면, 현재의『고려사』보다 훨씬 풍부한 자료를 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의의와 평가

『고려사』편찬자들의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관은 초기에는 당나라의 정치·군사·토지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된 국가체제를 성립시켰으나, 무신정권으로 국가제도가 무너짐으로써 고려사회는 파탄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신정권의 폐단은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왕조가 건국-쇠퇴-멸망한다고 본 점에서 왕조순환사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기술한 것은 조선 왕조의 건국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숭문주의(崇文主義)에 따른 무신에 대한 지나친 비판이라는 지적도 있다.

또한 그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을 왕과 왕의 정치를 보필하는 신하, 그리고 통치제도로 파악하였다. 이는 편년체를 쓴 역사가들의 역사관에 비해 역사를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려 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역사관은 비록 지배자 중심으로 역사를 보았지만, 신하는 충직하고 현명한 자가 발탁되어야 한다고 본 점에서 고대의 군주 중심의 권위주의적 역사관보다 한층 발전된 것이었다. 요컨대 국가를 유지하려면 군주가 좋은 정치를 해야 하고, 좋은 정치를 하려면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여야 하며, 국가를 유지하려면 군주는 외교관계를 잘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찬자들의 역사관은 수사관의 공통적인 역사관으로서 넓게 말해 유교사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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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요약 

55권 2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목활자본이다. 원래의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 50권으로 완성했다. 이 책은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1499년 임사홍·성현 등에 의해 2차에 걸쳐 교정과 보충이 이루어졌고 중종대에 새로 증보하였다. 권별 수록 내용은 권1·2는 경도 상·하, 권3은 한성부, 권4·5는 개성부 상·하, 권6~13은 경기도, 권14~20은 충청도, 권21~32는 경상도, 권33~40은 전라도, 권41~43은 황해도, 권44~47은 강원도, 권48~50은 함경도, 권51~55는 평안도이다. 경도 앞에는 <팔도총도>, 각 도의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 전기의 사회와 지역 사정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이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55권 25책. 목활자본. 현전하는 것은 대부분 임진왜란 후 1611년(광해군 3)에 다시 간행한 목판본이다. 원래의 〈동국여지승람〉은 세종대에 편찬된 지리지 이후에 변경된 사항을 바로잡기 위하여 세조대부터 시작하여 1477년에 양성지 등이 완성한 〈팔도지리지〉에 우리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첨가하여 1481년(성종 12)에 50권으로 완성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속활자인 계축자(癸丑字)로 인쇄한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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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485년(성종 16) 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해, 1499년(연산군 5) 임사홍·성현 등에 의해 2차에 걸쳐 교정과 보충이 이루어졌으며, 중종대에는 새로운 보충 작업이 시도되었다. 제1책의 서두에는 이행의 진전문·서문·교수관원직명과 옛 구본 〈동국여지승람〉의 노사신(盧思愼)의 진전문, 서거정의 서문·교수관원직명·찬수관 및 목록이 있다. 책 끝에는 3차·2차·1차 수교를 담당했던 홍언필·임사홍·김종직의 발문이 실려 있어 수교 과정을 살필 수 있다.

 

권별 수록 내용은 권1·2는 경도 상·하(下), 권3은 한성부, 권4·5는 개성부 상·하(下), 권6~13은 경기도, 권14~20은 충청도, 권21~32는 경상도, 권33~40은 전라도, 권41~43은 황해도, 권44~47은 강원도, 권48~50은 함경도, 권51~55는 평안도이며, 목록에 좌·우도 등이 구분되어 있다.

 

경도 앞에는 〈팔도총도 八道總圖〉, 각 도의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정확한 정보의 전달을 목적으로 한 사실적인 지도라기보다 제례와 관련된 내용을 위주로 한 생략된 지도로서 사실적인 가치는 높지 않다. 그러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함으로써 지역에 대한 공간적 인식 증대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내용은 각 도의 연혁과 관원을 개괄한 후 진관 소속별로 목·부·군·현의 건치연혁 및 관원·군명·성씨·풍속·형승·산천·토산·성곽·봉수·궁실·누정·학교·역원·창고·불우·사묘·능묘·고적·명환·인물·우거·효자·열녀·제영 등의 조목 아래 해당 내용을 나열식으로 기술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팔도총도〉, 규장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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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1차본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기록한 후, 새로 증보된 내용은 각 항목의 끝에 '신증'이라 밝히고 첨기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전기의 사회와 지역 사정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이다. 더욱이 간행본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널리 보급되어 조선 후기까지도 이 책이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이 책은 경제·군사·행정적인 측면보다 인물·예속·시문 등이 강화되어 있어 조선 사회의 유교적·문화적 성격으로의 변모를 보여주며, 세종대의 지리지와 대조를 보이고 있다.

 

 

 

 

1906년에 일본인 후지가미[淵上貞助]가, 1912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활판본으로, 1960년대에 동국문화사에서, 1983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축소 영인본을 간행했으며, 1969년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총 7권으로 한글 번역본과 색인을 간행했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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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다른 표기 언어 Ch'ingshihkao , 淸史稿                        

536권. 24사(史)를 이을 계획으로 관(官)에서 편찬한 기전체의 청조사이다.

1914년 중화민국 국무원은 청사관을 개관하여 자오얼쉰[趙爾巽]을 관장으로 삼고 커사오민[柯劭忞]·우팅셰[吳廷燮]를 비롯해 68명의 학자에게 편찬을 맡겼다.

주로 〈명사 明史〉의 체재를 모방했다. 1917년 장쉰[張勳]의 복벽사건(선통제 푸이를 옹립하여 청조 회복을 기도한 사건)으로 여러 달 폐관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다. 이후 국가 재정의 궁핍으로 경비가 삭감되고 편찬관도 줄어드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27년 8월 불완전하나마 완성되었다. 기간은 15년 걸렸지만 실제로 사업을 벌인 기간은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교간 사업 도중 자오얼쉰이 병으로 죽자 커사오민이 관장대리가 되었는데, 도리어 위안진카이[袁金鎧]의 심복으로 입관한 진량[金梁]이 실권을 장악했다. 진량은 시국의 혼란을 틈타 독단적인 전횡을 일삼아 비난받았다.

원본에 의해 활자가 인쇄된 것을 관내본이라 하고, 진량이 일부를 고쳐서 인쇄한 것을 관외본(위본)이라고 한다. 양자는 모두 본기 25권, 지(志) 142권, 표(表) 53권, 열전 316권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용에 차이가 적지 않다. 본문만 비교해 보아도 관외본은 장쉰·장뱌오[張彪]·캉유웨이[康有爲]의 3전을 추가하고 예문지 서문을 바꾸었으며, 다른 곳에서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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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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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사
이름 저자 권수
사기 전한·사마천 130
한서 후한·반고 100
후한서 유송·범엽 120
삼국지 서진·진수 65
진서(晉書) ·방현령 130
송서 ·심약 100
남제서 양·소자현 59
양서 당·요사렴 56
진서(陳書) 당·요사렴 36
위서 북제·위수 114
북제서 당·이백약 50
주서 당·영호덕분 50
수서 당·위징 85
남사 당·이연수 80
북사 당·이연수 100
구당서 후진·유후 200
신당서 ·구양수 225
구오대사 송·설거정 150
신오대사 송·구양수 74
송사 ·토크토 496
요사 원·토크토 등 116
금사 원·토크토 등 135
원사 ·송렴 210
명사 ·장정옥 332
신원사* 중화민국·커샤오민 257
청사고* 중화민국·자오얼쑨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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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淸史稿)는 중국신해혁명에 의한 중화민국 성립 후 조이손(趙爾巽)이 중심이 되어 약 100여명의 학자들과 함께 편찬한 이십사사를 잇는 청나라 1대를 다룬 기전체 역사서이다. 이십오사, 이십육사라고 칭하는 경우에는 이 책이 포함된다. 여기에서는 청나라 원고를 바탕으로 전후 중화민국의 국민정부에 의해 편찬된 청사 및 중화인민공화국이 새롭게 편찬을 한 청사도 있다.

개요[편집]

전서 536권으로 본기 25권, 지 142권, 표 53권, 열전 31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 태조 누르하치가 건국 즉위 한 1616년부터 신해혁명으로 청조의 막이 내리는 1911년까지의 합계 296년에 이르는 역사가 기록되고 있다(다만, 관외책은 일부의 권의 첨삭을 해 529권으로 재편되었다). 특징적인 면으로서 방교지(邦交志)나 교통지(交通志)가 들어가 있다. 다만, 편찬시의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침착한 편찬을 하지 못했고 잘못된 부분이 있고, 한편으로, 혁명 후도 자금성 등에 남겨진 행정 자료 등이 귀중한 내부 자료로부터의 인용도 포함되어 있어 평가가 나뉘고 있다.

 

 

读史方舆纪要》摘要之三——山东(四)(2008-07-04 17:36:20)转载标签: 整理/摘要 分类: 青燈青史  
중국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의 고조() 편찬한 중국 역사 지리서. 고대에서 명나라 이르는 지리적 연혁 기재하였다. 1659년에 집필 시작하여 1678년에 완성하였다. 모두 130권이다 

 

八、朝鲜:

在辽东都司东千八百里。东至海七百七十里,南至海千三百里,西南至海八百里,西北至鸭渌江七百五十里,北至女真界千四百里。自其国都至京师三千五百里,至江南江宁府四千里。

 

 

 

古朝鲜国,箕子所封。战国时,燕略属真番、朝鲜,为置吏筑障塞,遂为燕地。秦为辽东外徼。汉初属燕国,燕王卢绾叛入匈奴,燕人卫满窃据其地。武帝定朝鲜,为真番、临屯、乐浪、玄菟四郡。昭帝并为乐浪、玄菟二郡。

 

 

 

后汉末,为公孙度所据。至公孙渊,魏灭之。晋永嘉末,没于高丽。

 

高丽者,扶余别种,《东夷传》云:即高句骊也。其族有五:一消奴部,一绝奴部,一顺奴部,一灌奴部,一桂娄部。其后桂娄亦名内部,又曰黄部。绝奴亦名北部,又曰后部。顺奴亦名东部,又曰左部。灌奴亦名南部,又曰前部。消奴亦名西部,又曰右部。各有耨萨主之。耨萨盖酋名也。大抵东汉时,高句骊部落渐盛,后遂建国,仍号高句骊,以高为氏。三国魏正始七年,幽州刺史丘俭讨破之,寻复据其地。晋咸康八年,其王高钊为慕容燕所破,至曾孙琏益强。宋元嘉十二年,琏遣使入贡于魏,魏封为高句骊王,居平壤城,即汉乐浪郡地。齐永昭九年,琏卒,寿百余岁,子云嗣,请命于魏。明年,魏主宏册云督辽海诸军事,辽东公,高句丽王。梁天监十八年,云卒,子安立,遣使入贡于梁,梁以安为宁东将军,高句丽王。后亦臣附于东魏、高齐。隋开皇十七年,高丽王汤谋治兵拒隋,隋主赐玺书责其称藩,汤受命。会卒,子元嗣,隋仍封为王。明年,元帅之众寇辽西,隋营州总管韦冲却之。隋因伐高丽,元遣使谢罪,乃罢兵。大业七年,讨高丽。明年,发二十四军分道并进,总集平壤,不能克。九年,复伐高丽。十年,复伐之。凡四伐而不能克。唐武德四年,高句丽王建武遣使入贡,建武即元之弟也。七年,册建武为辽东郡王。贞观十六年,高丽东部大人泉盖苏文弑其王建武,改立其弟子臧。十八年,伐高丽,明年,亲往征之,诸军分道并进,克辽东等数城而还。自是数遣军伐高丽。总章初,李攻高丽,拔平壤,置安东都护府,由此高氏灭。

 

仪凤初,新罗据其地。

 

开元以后,并于勃海大氏。天初,大氏衰,有眇僧躬者,聚众据开州称王,号大封国,遂有高丽故地。五代梁龙德二年,高丽人王建者,起兵为海军统帅,袭杀躬,自称高丽王。唐清泰末,建引兵击破新罗百济,而并其地,于是东夷诸国皆附之,地益拓,建都松岳,即开州也,谓之东京,而以平壤为西京。又置六府九节度,百二十郡,以理其地。晋开运二年,建卒,子武代立,自后子孙遣使朝贡于宋,亦朝贡于契丹及金。宋嘉定十二年,高丽王暾附于蒙古,既而中绝。绍定五年,蒙古主窝阔台遣兵伐高丽,其王暾复请降,因置京府县达鲁花赤七十二人监其国,端平初,悉为高丽所杀。自是四遣兵攻之,拔其城十有四,大抵旋服旋畔。景定初,忽必烈以高丽世子倎袭封高丽国王,倎寻更名植。元至元中,其西京内属,因置东宁路总管府,画慈悲岭为界大德三年,又置征东等处行中书,寻罢。至治三年复置,命其王为左丞相。至正之季,始二于元。及明洪武二年,高丽王王颛表贺即位,诏封高丽国王。二十五年,其王瑶昏缪众推门下侍郎李成桂主国事,诏从其自为声教,

 

成桂更名旦,徙居汉城,遣使请改国号,诏更号朝鲜,自是王氏始绝,李氏世有其地,称藩岁奉贡献。万历二十年,为日本所侵掠,国几亡,王师入援,久之,国始定,然自是浸弱矣。其国中分为八道,八道中,则忠清、庆尚、全罗三道,地广物繁,州县雄巨,最为富庶。且俗尚诗书,人才之出,比诸道倍多。平安、咸镜二道,北接,俗尚弓马,兵卒精强,亦地势使然也。江原、黄梅,居京畿左右,差为狭小。而京畿在诸道之中,襟带山海,称为雄胜。其地东西二千里,南北四千里八道分统郡凡四十一、府凡三十三、州凡三十八、县凡七十。



1、京畿道:

治王京。朝鲜都也,亦曰汉城。明初,高丽王旦自开州徙此,居七道之中,称为四塞,领郡三,曰杨根、丰德、水城。府三,曰汉城、开城、长湍。州七,曰杨州、广州、润州、骊州、果州、谷州、坡州。县三,曰交河、三登、土山。

开州城


在王京西南二百里,高丽所置州也左溪右山,称为险固,亦曰松岳。唐天初,眇僧躬据此。朱梁贞明五年,入贡于淮南杨隆演。后唐清泰末,王建杀躬而代之,煮于此,( ???/// 175`8)  谓之东京,亦曰开京。宋大中祥符三年,高丽臣康肇弑其主诵,立诵兄询而相之。契丹主隆绪讨高丽,渡鸭渌江,康肇战败,退保钢州,契丹进擒肇等,追亡数十里,钢、霍、贵、宁等州皆降。进攻开京,询弃城走平州,契丹遂焚开京宫室府库,民庐俱尽。兵还,询复葺开京而居之,诸城亦复归高丽,今曰开城府。

丸都城

在王京东北。昔时高句骊依险为城,谓之丸都,旁多大山深谷。陈寿曰:汉建安中,高丽王伊奚模更作新都于丸都山下。魏正始七年,幽州刺史丘俭以高句骊数侵叛,督诸军出玄菟讨之,高句骊王位宫败走,俭悬车束马以上丸都,屠其城,既而复都于此。晋咸康八年,时高句丽与慕容接境,谋击之,高骊以重兵备北道,潜将劲兵四万趋南道,出其不意,高丽王钊败遁,遂入丸都,毁其城,大掠而还。《唐志》:自鸭渌江口舟行百余里,乃小舫溯流,东北行,凡五百三十里,而至丸都城。

神嵩山
在开城府北。五代时,王建依此山为都,因名其城为松岳。《志》云:朝鲜有三都,谓平壤、汉城及松岳也。又有平山岭,在开城府西一里,其土色皆赤。

江华岛

在开城南海中。元时,高丽王植庶族承化侯居此图经》:今有江华府,盖以岛名。(桓某按:倭犯朝鲜,取京畿道。义兵将金千镒复江华岛,时倭水师几为李舜臣剿灭,无力取之,千镒因四出游击,汉城之倭人人自危。)

杨花渡
在王京西南,汉江之滨。朝鲜各道馈饷,皆聚于此。或曰即临津渡也。万历中,倭渡临津,掠开城,既而李如松驻闻城,遣别将查大受据临津,为东西策应,即此。(桓某按:时朝鲜都元帅金命元以兵万余守临津江北岸,与副元帅韩应寅不协,倭小西行长、加藤清正等伪退诱之,朝军追至江南,中倭之伏,溃败,倭因渡江,陷开城。)

汉江
在王京南十里。源出金刚、五台二山,合流入海,王城恃以为险。江之南即古百济国地也。万历中,李如松援朝鲜,倭弃王城遁,如松入城,以兵临汉江尾倭后,欲乘其惰归击之,不果。(桓某按:倭犯朝鲜,径进至汉江,朝鲜三道巡边使申砬以精骑背汉水,阵于忠州城北弹琴台,及战,马为倭铁炮所惊,朝军溃败,砬死之。)

碧蹄馆
在王京西三十里。其东有桥曰大石桥,万历中,李如松与倭战处。(桓某按:时明查大受部为倭小早川隆景、立花宗茂等大军所困,李如松以轻兵赴救,激斗半日,杨元复来援,乃出,然杀倭过当。)

2、江原道:
治江陵府,在王京东面。本秽貊地,汉为临屯境,领郡七:曰忤城、平海、通川、宁越、松岳、旌善、高城,府五:曰江陵、淮阳、三陟、襄阳、铁原。州四:曰原州、江州、槐州、冥州,县十:曰平康、安昌、烈山、麒麟、酒泉、丹城、蹄麟、蔚珍、瑞和、歙谷,是也。

3、黄海道:
治黄州,在王京西面。古朝鲜地。领郡三:曰遂安、延安、平。,音男。府三:曰平山、瑞兴、承天,州五:曰黄州、白州、海州、爱州、仁州,县八:曰安岳、三和、龙冈、咸从、江西、牛峰、文化、长渊。(桓某按:倭犯朝鲜,黑田长政据黄海道,课民以重税,朝鲜李廷馣聚义兵取延安城,长政再攻之而不能下,遁走,并弃海州。)

4、全罗道:
治全州,在王京西南面。本马韩地,后为百济国。唐显庆五年,苏定方伐百济,擒其王,置熊津等五都督府,后并于新罗。五代时,高丽兼有其地。《图经》:朝鲜地界,正北从长白山发脉,南跨全罗界,西南尽于海。日本对马诸岛,偏在朝鲜海洋之东南,与庆尚之釜山相对,倭船止抵釜山,不能越全罗至西海,故八道之中,惟全罗一道,直北正南,其迤西则与辽东对峙。日本所以隔绝辽、蓟,不通海道者,恃有朝鲜。而朝鲜所以保固边陲,控御诸夷者,恃有全罗也。《志》云:全罗之地,南滨大海,东接庆尚,为朝鲜门户,倭犯朝鲜,此其必由之道也。领郡三:曰灵岩、古阜、珍岛。府二:曰全州、南原,州四:曰罗州、济州、光州、昴州,县二十三:曰万顷、茂长、镇安、扶安、全渠、康津、兴德、黄成、乐安、昌平、济南、会宁、大江、临波、古皋、南阳、富顺、扶宁、麻仁、绪城、海南、神云、移安。(桓某按:万历中,倭犯朝鲜,唯全罗道未陷。倭小早川隆景自锦山南下,安国寺惠琼自洛东江西进,欲会攻全罗道,时朝鲜义兵大起,义兵郭再佑破惠琼于洛东江,官兵权慄破隆景偏师于梨峙,高敬命、赵宪等义兵再攻锦山,隆景不敢出,全罗道因全,李舜臣水师后勤得继。)

南原城
在全州东南,与全州相犄角,为王京要隘。万历中,倭陷南原,遂犯全罗,进逼王京,李如松谓全罗饶沃,南原尤其咽喉,是也。其相近者有云峰城,亦为冲要。(桓某按:倭复犯朝鲜,宇喜多秀家以大军围南原,明将杨元苦守数日,不敌而走。倭屠之,备极惨酷。)

任存城
在全州西,古百济所置城也。唐龙朔初,百济余众复叛,刘仁轨破之于熊津江口,其众释百济府城之围,退保任存城。任存,百济西部也,依任存山而名。三年,仁轨遣兵攻任存城,拔之。又真岘城,在全州北,唐龙朔二年,时刘仁轨既解百济府城之围,还军熊津城,有诏班师。仁轨曰:今以一城之地,居敌中央,动足辄为所擒。正宜坚守观变,乘便取之,不可动也。于是出兵掩其支罗城,拔之。并拔其尹城、大山、沙井等栅。时敌以真岘险要,加兵守之,仁轨复伺其懈,引兵袭据之,遂通新罗运粮之路。《唐书》:支罗、真岘诸城,俱在熊津之东。

周留城
在全州西。又西北有加林城。唐龙朔三年,百济故将福信等据周留城,刘仁轨既拔真岘,诸将以加林水陆之冲,欲先攻之。仁轨曰:加林险固,攻之不易,周留彼之巢穴,宜先取之。遂定计自熊津进破百济之众于白江口,趋周留城,拔之。

熊津城
在全州西北,即熊津江口,百济之险要也,置城于此,为五方之一。唐显庆五年,苏定方讨百济,自成山济海,百济据熊津江口以拒之,定方击破之,直趋其都城,遂克之。唐亦置熊津都督府,以守其地。龙朔初,百济复叛,围百济府城,诏刘仁轨赴援,仁轨转斗而前,所向皆下。百济立两栅于熊津江口,仁轨击破之,府城之围遂解,仁轨因驻守于此。既而再破百济余众于熊津之东,复平百济。或曰:今汉江口,即古置城处云。

白江
在熊津东南,亦接大海,达全州西界。唐龙朔三年,刘仁轨引舟师自熊津趣周留城,时百济请援于倭,至白江口,遇倭兵,仁轨四战皆捷,焚其舟四百余,进拔周留,遂平百济。是也。

7、咸镜道:

治咸兴府,在王京之东北面。本沃沮高句丽之地。今领郡三:曰端川、蜀莫、宁远。府五:曰咸兴、镜城、会宁、永兴、安边。州有八:曰延州、德州、开州、惠州、苏州、合州、燕州、隋州。县一,曰利城。(桓某按:倭犯朝鲜,加藤清正略咸镜道,咸镜北兵使韩克诚率劲骑与战于吉州,清正初战不利,据守海汀沧,是夜围朝鲜军,独阙一路,通于沼泽。及旦,四面进击,朝鲜军溃入沼泽,克诚仅以身免。清正因陷咸镜道,并越图门江,败建州女真一部。宇喜多秀家以明援将至,令加藤清正弃咸镜道,朝鲜义兵将郑文孚三败倭兵于吉州,号北关三大捷,复与清正鏖战,追败其军。)

大行城
亦在咸兴府西南境。唐乾封三年,李等败高丽于薛贺水,进拔大行城,于是诸军皆会,又进至鸭渌栅云。

高句骊城
在咸兴府东北。汉县,为玄菟郡治,后汉因之。《志》云:县本高句骊国地,其国又在玄菟东北,分为五部,汉灭朝鲜,开高句骊地,仍封其种人为高句骊侯。建武中,改封为王,和帝元兴以后,屡犯辽东玄菟塞。延光中,稍葺伏。《后汉书》:武帝以沃沮为玄菟郡,后为夷貊所侵,徙郡高句丽西北,更以沃沮为县,属乐浪东部都尉。建安中,公孙康击破高丽国,高丽王伊夷模兄拔奇诣康降,还住沸流水。伊夷模更作新国都于丸都之下,拔奇遂住辽东。今考咸兴府在朝鲜东北境,又东迫于海,在咸兴东北者当是故沃沮城。而高句丽则在咸兴府西苏州开州县,至伊夷模又南徙也。《后汉纪》:高句丽在辽东东千里,南与朝鲜接,东与沃沮接。是也。晋玄菟郡仍治高句丽县,非故治也。

8、平安道:
治平壤府,朝鲜西京也。东南去王京五百余里汉曰乐浪郡,后为高丽王所都。亦曰长安城,一名王险城。唐平高丽,置安东都护府于此后没于勃海辽志》:唐中宗赐勃海大氏所都名曰忽汗州,即故平壤城也寻自号为中京显德府,阿保机攻拔之,以为东丹王国。五代时,高丽复取之,为西京。元至元六年,其臣李延龄等以西京府州县六十余城来属,因改西京为东宁府,升东宁路,割静州、义州、麟州、威远镇属婆娑府,余俱领于东宁,其城治类皆废毁,仅有空名耳。元末复归于朝鲜。今领郡十一,曰嘉山、价川、郭山、云兴、熙川、宣川、江东、慈山、龙川、顺川、博川;府九,曰平壤、成川、定远、吕城、合兰、广利、见仁、宁边、江界;州十六,曰安州、定州、平州、义州、钢州、铁州、灵州、朔州、抚州、宿州、渭州、买州、青州、升州、常州、银州;县六,曰土山、德川、阳德、江东、中和、泰州。

王险城
即平壤城。应劭曰:箕子故都也。薛瓒曰:王险在乐浪郡,浿水之东。汉初,燕人卫满渡浿水,居上下障,都王险。武帝元封二年,其孙右渠拒命,遣楼船将军杨仆自齐浮勃海,左将军荀彘出辽东诛之,取其地,改置朝鲜县乐浪郡治焉晋永嘉已后,没于高丽。义熙末,其王高琏居平壤城,亦曰长安城。隋大业八年,伐高丽,分军出朝鲜道,谓此。《隋书》:平壤城东西六里,随山屈曲,南临浿水。开皇十八年,伐高丽,命周罗侯将水军自东莱泛海趋平壤,不能达而还。大业八年,诏左右各十二军分道伐高丽,总集平壤。明年,复遣宇文述等趋平壤,述不克至。唐贞观十八年,伐高丽,命张亮以舟师自海道趋平壤,明年,拔辽东诸城,攻安市未下。江夏王道宗请以精卒乘虚取平壤,既而降将高延寿,亦请自乌骨城直取平壤,不果。龙朔初,命苏定方等讨高丽,进围平壤,不能拔。总章三年,李征高丽,拔其平壤,而高丽亡。杜佑曰:平壤即王险城也。五代时,王建据高丽,始谓之西京上下障,乐浪旧有长城,燕所筑,谓之云障云(桓某按:倭犯朝鲜,明将祖承训轻兵入援,急袭平壤,几克,寻为倭兵铁炮所败。李如松率大军来援,以一部取城外高阜牡丹台,余众猛攻平壤,克其外城,小西行长遁走。)

义州城
在平壤西北四百二十里。《志》云:义州西南为龙川郡,皆滨鸭渌江,万历二十年,朝鲜王李公以关白之乱,走义州请内属,即此。又铁州城,亦在平壤西北,唐所置州也。元亦置铁州,领定戎一镇,今仍曰铁州。又西北曰灵州,亦唐置,元因之,今仍旧。又熙州城,在铁州东北,唐置,元因之,今曰熙川郡。又东曰抚州,亦唐置,元因之,今仍旧。

郭州城
在平壤西北,亦唐置,勃海因之,后属于契丹。《载记》:初,契丹以鸭渌江北予高丽,高丽筑兴、铁、通、龙、龟、郭等州,凡六城。宋大中祥符五年,契丹怒高丽擅弑立,又不入朝,议复取六州地。有女真人告契丹,谓自开京东马行七日,有大寨,广若开京,凡旁邑所贡珍异皆在焉。其胜、罗等州之南,亦有二寨,所积如之。若大军自女真北渡鸭渌江,并大河而上,至郭州,与大路会,高丽可取也。七年,契丹遣耶律世良、萧屈烈,与高丽战于郭州,破之。元亦置郭州于此,今曰郭山府。

辱夷城
在平壤西北。唐总章元年,李等败高丽于鸭渌栅,追奔二百余里,拔辱夷城,遂进围平壤,高丽平。是也。又伐奴城,亦在平壤西北,唐咸亨二年,行军总管李谨行破高丽叛者于瓠芦河西,其妻刘氏留伐奴城,高丽引来攻,刘氏拒却之。或曰:城在营州境内,恐误。

马邑山
在平壤西南。唐显庆五年,苏定方破高丽军于浿江,夺马邑山,遂围平壤,即此。又盖马大山,在平壤城西。《汉志》:玄菟郡有西盖马县,山盖因以名。又有鲁阳山,在平壤城东北,上有鲁城。

大通江
在平壤城东。亦曰大同江,旧名浿水。《史记》:秦修辽东故塞,至浿水为界。汉初,燕人卫满亡命,东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障,稍役属其真番朝鲜蛮夷及燕亡命者王之。元封三年,荀彘自辽东击朝鲜,破其浿水上军,乃至王险城下。《汉志》:乐浪郡有浿水县。浿,音普大反。浿水西至增地县入海,王险城盖在浿水之阳。《水经》云:浿水出乐浪镂方县,东南过临浿县,东入海,误矣。隋大业八年,伐高丽,来护儿率江淮水军自东莱浮海先进,入自浿水,去平壤城六十里,寻为高丽所败,还屯海浦。唐龙朔元年,苏定方伐高丽,败其兵于浿水江,遂趋平壤。明万历二十一年,李如松援朝鲜,至平壤,倭悉力拒守,如松度地形东南并临江,西枕山陡立,惟迤北牡丹峰高耸,最要害。如松乃遣将攻牡丹峰,督兵四面登城,遂克之。既而如松驻开城,别将杨元军平壤,扼大同江以通饷馈,是也。

(桓某按:倭犯朝鲜,抵大同江南,朝鲜都元帅金命元等逆袭之,先胜后败,自水浅处涉归。倭知水浅,遂济江,陷平壤。)

清川江
在安州城东。西南流入海,亦名萨水。隋大业八年,宇文述等击高丽,渡鸭渌水,追击其大臣乙支文德,东济萨水,去平壤城三十里,因山为营。平壤险固,不能猝拔,引还至萨水,军半济,为高丽所击,诸军皆溃,将士奔还,一日夜至鸭渌水,行四百五十里。今亦谓之大宁江。《志》云:平壤、黄州,西隔大宁江,东阻大通江,所谓两江之中也。

也水
在平壤西境。唐龙朔初,庞孝恭等击高丽,以岭南兵壁于水,为盖苏文所攻,一军尽没。或谓之陀水。宋大禧二年,契丹伐高丽,战于茶、陀二水,败而还。《志》云:二水俱在平壤西北。



九、女真:

在辽东都司东北千七百余里。自其国混同江至京师三千五百里,至江南江宁府四千六百里。其地东濒海,南邻朝鲜,西接兀良哈,北至北海。古曰肃慎,后汉曰挹娄,元魏曰勿吉,隋曰。其种分为七部:一粟末部,与高丽接。二伯咄部,在粟末之北。三安车骨部,在伯咄东北。四拂涅部,在伯咄之东。五号室部,又在拂涅之东。六黑水部,在安车骨西北。七白山部,在粟末东南。白山、粟末皆近边,惟黑水居极北,尤强盛。开皇十八年,高丽王汤帅之众万余寇辽西。唐贞观二年,黑水渠长阿固郎来朝,因置燕州授之。开元十四年,黑水遣使入见,以其国为黑水州。寻又置勃利州及黑水府,以部长为都督。贞观以后,勃海盛强,黑水后服焉。五代初,契丹灭勃海,黑水因附于契丹,复有黑水故地。契丹迁其豪数千家于辽阳南合苏馆,是为熟女真,亦曰南女真。其界外野处不入辽东籍者,为生女真,亦曰北女真。又极边远者,号黄头女真。而黄头勇敢者则谓之回霸。后避契丹兴宗讳,改真曰直。生女直日强,建国曰金,既灭辽,以所兴地为上京会宁府,领曷懒等路。金末,城邑多毁于兵火。元因其土地旷远,人民散居,设军民万户府五,抚镇北边,一曰桃温,一曰胡里改,一曰斡朵怜,一曰脱斡怜,一曰孛苦江,分领混同江南北水达达及女真之人,各仍旧俗,无市井城郭,逐水草为居。复置合兰府水达达等路,以统摄之。明永乐二年,部族渐来归附,置建州等九卫。明年,复置毛怜等六卫。四年,置古贲河等三十九卫。五年,置阿古河等三十一卫。六年,又置纳木河等三十卫。七年,置卜鲁兀等十七卫,并置儿于都司以统之。八年,又增置木兴河等十一卫。明年,复置督罕河一卫。十年,置建州江等十三卫。十一年,置斡朵轮一卫。十二年,置哈儿分等十二卫。十三年,又置渚冬河等四卫。十四年,置吉滩河等二卫。十五年,置阿贡同真等四卫,凡卫一百八十。又置兀者托温等千户所二十,及地面城、站等凡五十八处,以授其大小酋长,盖悉境皆奉朝贡矣。正统中,复置建州右等五卫。自是数有增置。万历中,有卫三百八十四、所二十四、站七、地面七、寨一,曰黑龙江忽里平寨。其间种族互相吞噬,或存或否,惟建州最强。天顺三年,建州酋董山叛,降朝鲜。成化二年,寇辽东。十四年,建州夷复寇辽东。诏遣马文升抚定之。十五年,陈钺等讨建州。既而建州复寇辽东,久之始顺命。说者谓:建州之地,独居诸部族中,据要害,东接毛怜野人、黑龙江诸夷,东北杂兀者诸卫,西北邻兀良哈,背枕长白山,面临鸭渌江,有山四面斗绝。建州结老寨于此,左曰董古寨,右曰新河寨,前曰阎王、牛、毛、甘孤里、古坟、板桥等六寨,逼近开元。而开元所恃为屏蔽者,惟在北关,其清河、抚顺及三岔、抚安、柴河、靖安、白家冲、松子等堡,皆开元以南、辽沈以北,肘腋要害也。从老寨西袭则抚顺关,北掠则靖安堡,南叩则鸦鹘关,东扰则晾马佃。若渡浑河,过五岭关,则至抚顺。越二道关,抵三岔堡,则至靖安。若由甘孤里而古坟而板桥而柳木而卜余,则向晾马佃及鸦鹘关一带矣。盖卜余为建州第一关隘,由东南路向建州,卜余寨其必争之险也。《志》云:建州阻万山中,林木参天,蹊径盘错,有五岭、喜昌、石门为险厄,若纵横四出,犄角前进,往往可鎰志。若自辽阳向建州,则镇江、宽奠、阳、清河,皆有径可前。由沈阳向建州,则抚顺为大路。由铁岭向建州,则三岔为要途。由开元而进,则东川亦捷径也。建州而外,居开元东北者,谓之海西。居建州之东者,谓之毛怜,亦曰野人,皆黑水苗裔。又近开元北边松花江者,谓之山夷。其种皆倚山作寨,或谓之熟女真种。北抵黑龙江者,谓之江夷,或以为生女真种。其灰扒、兀剌等族,类皆江夷种也。诸族之中,以海西、毛怜、建州为最大,后毛怜渐微。大约自沈阳、抚顺关而北者,其地多属于海西。自阳、清河堡而抵鸭渌江,其地皆属于建州。其后,海西亦折而入于建州矣。建州盖勃海之苗裔云。

废会宁城
一名海古城。西南接三万卫界,即勃海上京龙泉府之地也。女真初起于此。阿骨打既灭辽,置会宁州,完颜晟升为会宁府,建上京,兼置会宁县为府治。海陵帝废上京,寻复旧。元废。又曲江城,在会宁府东北。金大定七年,置镇东县,属会宁府,寻改治曲江。又有宜春城,亦大定七年置,属会宁府,元初与府俱废。

肇州城

金志》云:在会宁西五百里鸭子河、黑龙江之侧,旧名出河店。宋政和四年,女真取宁江州,辽人使其将萧嗣先等发兵,屯出河店,阿骨打御之,至混同江。辽兵方坏凌道,阿骨打击走之。遂帅众继进,登岸大破辽兵于此。完颜晟因置肇州,谓肇基王迹者也。亦曰武兴军,治始兴县。金末废。

黄龙府城
在会宁西北。《辽志》:在勃海扶余府。阿保机末,有黄龙见于此,因名。石晋开运三年,契丹以晋主重贵为负义侯,置于黄龙府。《五代史》:自幽州行十余日,过平州,出渝关,行沙碛中七、八日,至锦州。又行五、六日,过海北州。又行十余日,渡辽水,至勃海铁州。又行七、八日,过南海府,遂至黄龙府。府北至混同江一百三十里。宋开宝四年,契丹主贤以军将燕颇叛,府废,改曰龙州,俗仍谓之黄龙府。政和五年,阿骨打将攻辽黄龙府,进薄益州,又败辽兵于达鲁古城,逐北至阿娄关。既而阿骨打次混同江,乘马以济,遂克黄龙府,后因改府为济州,兼置利涉军。绍兴中,岳武穆尝言:直抵黄龙,与诸军痛饮。盖以北狩拟于石晋之祸也。金天德四年,又升为济州路。大定二十九年,改曰隆州。贞初,又升为龙安府,治利涉县。时蒙古兵起,辽人耶律留寄聚众隆安,至十余万,遣使附蒙古。金人讨之,为所败,遂自立为辽王。元初以其地并入开元路。

五国头城
在会宁府东北。自此而东,分为五国,因名。《辽金纪事》:海东青出于女真东北铁諪五国,辽主延禧酷爱之。每岁天寒,发使趣女真,以海东青入贡,发甲马数百取之。五国索于巢穴中,往往战争而得。国人厌苦。《宋史》:建炎二年,金人徙二帝于韩州之五国城,去其上京千里云。韩州,见三万卫。

混同江
在会宁西南。旧《志》:在开元北千五百里,源出长白山。一名粟末河,粟末所居也。江面阔三里余,经会宁之西,东北流达五国头城北,又北合松花江,东入海。《宋史》:金乌古乃时,自东沫江之北、宁江之东,地方千余里。东沫,即粟末之讹也。胡三省云:金人谓鸭渌江为混同江。

松花江
在会宁东南。旧《志》:在开元东北千里。本名宋瓦江。亦出长白山,东北流经会宁府之东。其北则有忽剌温江诸水流入焉,南则有灰扒江诸水流入焉。下流合于混同江。

黑龙江
旧《志》:在开元北一千五百里,源出北山,黑水旧居此。南流入松花江。或云:混同江北流,经灰扒地名灰扒江,过兀剌亦地名兀剌江。又北至海西苦兀东入海。通名乌龙江。兀剌,即忽剌之讹也。又境内有泼猪江,或曰即黑龙江之别名。又上木江,《志》云:在开元东北千余里,亦出长白山,流经女真北山,东入海。又阿速江,在开元东北千六百里,下流亦入松花江。

金水河
在会宁西。一名按出虎水。女真谓金为按出虎,以水源于此,谓之金源,因建国号曰金。其水西北流,与来流水合,西流入于混同江。《一统志》:金水河出黄龙府东山,北流入松花江。误。

苏子河
在建州西近塞。永乐间,建州酋李满住款塞,驻牧苏子河,为边患。

爻剌屯
黄龙府东。辽主延禧讨金,先进至斡怜泺。金主阿骨打行次爻剌,议深沟高垒以待之。会辽将耶律章奴作乱,辽主引还,金人追败之于护步答冈。盖在混同江之西。



十、东夷诸种:

1、勃海:
亦遗种,隋时粟末部也。初附高丽。唐灭高丽,勃海大氏徙居营州,寻保挹娄之东牟山,高丽、稍稍归之。武后万岁通天中,为契丹李尽忠所逼,有乞乞仲象者,度辽水自固,武后置勃海都督府授之,又封为振国公,子祚荣遂盛强,并有扶余、沃沮、弁韩、朝鲜诸国,地方五千里,建都邑,自称振国王。睿宗先天初,拜为勃海郡王,所都赐名忽汗州。开元七年,武艺袭位,益强,其后皆称王改元,然仍羁属于唐。又数传至夷震,地益拓,徙居忽汗河东,去旧国三百里,称勃海国王,寻僭号,拟建宫阙,以勃海故地为上京龙泉府。忽汗州即平壤城也,为中京显德府,貊故地为东京龙原府,沃沮故地为南京南海府,高丽故地为西京鸭渌府,分统十五府,六十三州,为辽东盛国。其后浸衰,契丹阿保机建国,攻勃海,拔忽汗州,俘其王大讠巽,勃海遂灭。

2、挹娄:
即肃慎。《后汉书》曰:在夫余东北千余里,东滨大海,南与北沃沮接,不知其北所极。在不咸山北,去夫余□□□行,西接寇漫汗国,北接□□□,广袤数千里,人众虽少,而多勇力,处山险善射。又其国东北有山出石,利于铁,取为弓,长四尺,矢用苦,长尺八寸,所谓肃慎氏之苦矢石也。其后即为女真云。

3、夫余:
旧《志》:夫余在玄菟北千里,南接高丽,东接挹娄,西接鲜卑。有鹿山,其王所居也。王莽时,班符命东出玄菟、乐浪、高句骊、夫余,后汉时,屡为辽东边患。又为高句骊所驱率,犯玄菟、辽东诸边境。《东夷传》:永初五年,夫余寇乐浪。建光元年,夫余顺命助汉,击败高句骊、貊。永康元年,复寇玄菟。晋太康六年,鲜卑慕容东击夫余,夫余王依虑自杀,子弟走保沃沮,平其国城,驱万余人而归。明年,依虑子依罗复还旧国。永和二年时,夫余为百济所侵,西徙近燕。慕容遣其子袭之,禽其王玄及部落五万余口而还。其国盖自是灭亡,地属高丽。隋大业八年,伐高丽,分遣宇文述出扶余道。唐乾封二年,薛仁贵破高丽于金山,进拔夫余城。夫余川中四十余城皆望风降下。金山,即辽东三万卫西北之金山也,后属于勃海。后唐天成初,契丹拔勃海之扶余城,命其长子镇之,曰东丹国。《辽志》:黄龙府本勃海扶余府,又通州安远军本扶余王国城。是也。夫,亦作扶。通州,详见铁岭卫归仁城。

4、貊:
服虔曰:貊在辰韩北,高丽、沃沮之南,东穷大海。汉元朔初,其君南闾降汉,因置苍海郡,三年罢。陈寿曰:夫余国有故城,名城。盖本貊地,今不耐亦其种云。

5、百济:
今朝鲜之全罗道即其地,西海至越州,南渡海至倭国,王居东西两城外,置六带方,管十郡。《地志》:东夷有三韩国,曰马韩、辰韩、弁韩。马韩在西,凡五十四国,百济居一焉。陈寿曰:三韩凡七十八国,百济其一也。后渐强大,兼诸小国,与高句丽相匹,俱在辽东之东千余里。李延寿曰:百济之先,以百家济海,后遂以百济名国。晋世高丽略有辽东,百济亦分据其地,置辽西、晋平二郡。萧齐永明六年,后魏遣兵击百济,为百济所败。八年,齐以其王牟大为镇东将军百济王。隋开皇十八年,遣使请伐高丽,愿为军导,高丽觉之,以兵侵掠其境。《隋书》:百济出自东明,后有仇台者立,始强盛。杜佑曰:百济南接新罗,北距高丽千余里,西限大海,处小海之南,有五部,分统三十七郡,二百城。唐武德四年,册百济王扶余璋为带方郡王,其后党于高丽,与新罗相仇,显庆五年击平之。诏以其地置熊津、马韩、东明、金涟、德安等五都督府,又以百济城为带方州,置刺史治焉。《唐史》:百济本夫余别种,其王亦姓扶余氏,滨海之阳,直京师六千里而嬴,仪凤以后,百济之地,附于新罗,其支属共保海滨,仍曰百济。

6、新罗:
朝鲜之庆尚道即其地,弁韩苗裔也。李延寿曰:新罗本辰韩种,在高丽东南。亦曰秦韩,相传秦世亡人避役,东适马韩,马韩割东界居之,故名。秦韩始有六国,稍分十二,新罗其一也。或称魏丘俭破高丽,高丽奔沃沮,后复国,其留者为新罗,兼有沃沮、不耐、韩之地。其王本百济人,自海逃入新罗,遂王其国,附庸百济,后强盛,与百济为敌。杜佑曰:新罗本辰韩种,魏时为新卢国,晋、宋曰新罗,其国在百济东南五百余里。唐武德四年,册新罗王金真平为乐浪郡王。显庆中,屡为高丽百济所攻,唐为遣兵平百济。龙朔初,以其国为鸡林大都督府,授其酋金法敏为都督。上元初,新罗据百济故地,又招纳高丽叛众,遣兵讨之,复请降。仪凤以后,复西据高丽故城,唐不能讨。自是仅羁属于唐而已。开元以后,其地多为勃海所并。

5、庆尚道:
治庆州,在王京东南。本辰韩地,后为新罗国。滨海与日本相对,为朝鲜之屏蔽。领郡七:曰蔚山、咸阳、熊川、陕川、永川、梁山、清道,府六:曰金海、善山、宁海、密阳、安东、昌原,州五:曰庆州、泗州、尚州、晋州、蔚州,县十二:曰东莱、清河、义城、义兴、闻庆、巨济、昌宁、三嘉、安阴、山阴、高灵、守城。

 

山城
在庆州西北,即蔚山郡也。南有岛山,不甚高,而城皆依山险,中有江,通釜山寨,陆路则由彦阳监通釜山。万历二十五年,倭屯蔚山,大帅麻贵攻之不克,既而倭益筑城寨,据守于此,谓之东路。麻贵复进师逼之,据险收其禾稼,倭诡却以诱之,贵为所败。

顺天城
在庆州西南。万历二十六年,倭酋据此,谓之西路。《朝鲜纪事》:倭酋行长据粟林,曳桥建寨数重,凭顺天城,与南海营相望,负山襟水,最为扼塞,大帅刘纟廷攻之不能克。

泗州城
在庆州西。或曰:即古泗城也。唐龙朔初,百济复叛,与刘仁愿等相持,诏新罗应援。新罗将金钦将兵至古泗,为百济所邀败,自葛岭遁还。今泗州相近有葛岭道云。万历中,倭据泗州,谓之中路,北倚晋江,南通大海,为东西声援,大帅董一元克之,寻复败还。

晋州城
在粤州西南。万历二十六年,大帅董一元击泗州,倭进取晋州,乘胜渡江南,毁永春、昆阳二寨,倭退保泗州老营,一元夺其城,进逼新寨。寨三面临江,一面通陆,引海为濠,海艘泊寨下千计。又筑金海、固城二寨,为左右翼,中通海阳仓,一元攻之不克,败还晋州。又有咸阳城,在晋州西北,朝鲜之咸阳县也。万历中,倭犯咸阳、晋州,即此。桓某按:晋州东南有玉浦、合浦、赤珍浦、泗川、唐浦、唐项浦等,皆朝鲜李舜臣破倭水师处。又露梁湾,倭欲还师,明、朝水师聚歼岛津义弘部,邓子龙、李舜臣殉难处也。隔海为倭对马岛。倭首犯朝鲜,水师屡败于李舜臣。倭宇喜多秀家遣细川忠兴等陷晋州以入全罗道,朝鲜晋州牧使金时敏死守四昼夜,忠兴以朝鲜援军大集,遁走。明援既至,倭退屯釜山,加藤清正寻以九万众围攻晋州,欲雪前耻,朝鲜义兵将金千镒聚义兵等死守七日,城陷,倭尽屠其民,悉焚其宅,推平其墙,填塞其井,使为丘墟。)

七重城
在庆州北境,境内又有买肖城。唐上元二年,新罗拒命,遣刘仁轨讨之,大破之于七重城,诏以李谨行为安东镇抚大使,屯新罗之买肖城,以经略之。新罗屡败,乃遣使入贡,且谢罪云。

岛山
在蔚山南。万历二十五年,麻贵等攻蔚山倭,倭悉走岛山,于山前连筑三寨拒守。岛山视蔚山城高,倭又于上新筑石城,坚甚,官军攻之不克,寻溃还。

釜山
《志》云:在朝鲜东莱县南二十一里,西北去王京千四百里,滨大海,与日本对马岛相望,扬帆半日可至。其东有东来、机张、西生、林郎、五浦为左臂,西有安骨、安窟、嘉德、熊川、森浦、巨济、闲山、德桥、金海、竹岛、龙堂为右臂,联络犄角,可攻可守。万历二十年,倭酋平秀吉遣其党行长等拥舟师逼釜山镇,陷庆尚道,寻入王京。既而弃王京,还屯据釜山,增筑西生、机张等处,分兵拒守,而以釜山为根本,官兵攻之不能克,久之,始解去。《图经》云:釜山去南原府七百里,是也。(桓某按:倭犯朝鲜,自釜山登陆,釜山佥事郑拨据守,死之,倭屠其城。后李舜臣水师至釜山,与倭九鬼嘉隆、藤堂高虎激战,倭据守不出,舜臣击沉其船百二十艘而去。)

竹岛
在庆州境西南滨海。万历二十五年,倭泊于釜山,往来竹岛,渐逼梁山、熊川,既而夺梁山,遂入庆州。又巨济岛,在竹岛东滨海,朝鲜置巨济县,兼置水军营于此,冲险次于釜山。(桓某按:倭犯朝鲜,连陷数城,庆尚道水军右使元均丧胆,悉沉其战舰于巨济岛。)

 

闲山岛
在庆州西南境,朝鲜西海水口也。右嶂全罗道之南原府,为全罗外藩,一失守,则沿海无备,天津、登、莱,皆可扬帆而至。其相近者又有山岛,万历二十五年,倭入庆州,侵闲山,夜袭山岛,官军溃走,遂失闲山,倭进围南原,陷之。《一统志》全州南海中有阑山岛,即闲山矣。(桓某按:倭犯朝鲜,朝鲜李舜臣诱倭胁坂安治水师至闲山岛北,率板屋船以鹤翼阵围而歼之。)

甘浦
在庆州东二十里。《图经》:甘浦相近者有长浦。又安骨浦,在熊川郡南二十里,其相近者,又有天城浦。(桓某按:倭犯朝鲜,九鬼嘉隆、加藤嘉明率水师驻安骨浦,朝鲜李舜臣分其舰为数队,轮番炮击,倭船炮不及,悉没。)

6、忠清道:
治忠州,在王京南面。本马韩旧壤。《志》云:王京居八道之中,东隘为乌岭忠州,西隘为南原全州。又云:王京为朝鲜都会,咸镜、忠清为犄角,并称天险。今领郡四:曰清风、温阳、天安、临川,州九:曰忠州、清州、公州、矜州、靖州、幸州、兴州、礼州、洪州,县七曰:永春、报恩、连山、扶余、石城、燕岐、保宁。(桓某按:倭犯朝鲜,忠清道陷落。既而朝鲜赵宪以义兵,灵圭以僧兵会官兵,共取清州,宪以弱兵诱倭,歼其一部,倭蜂须贺家政夜遁,宪复清州。权慄复据秃山、幸州,倭宇喜多秀家以幸州俯瞰汉城,为孔道咽喉,率数万众临之,州阻山负河,本为险固,慄复置两栅于州外,倭轮番冲击,不能下。)

稷山
在忠州西,有稷山监。万历二十五年,倭陷全罗,引而北,麻贵发兵守稷山,以遏其锋。又有青山,与稷山相近。《志》云:稷山之南,即天安郡城南,下全州之要道也。(桓某按:倭再犯朝鲜,陷全罗,全歼朝鲜水师于漆川梁,朝鲜宣祖惶怖,欲弃汉城走,及闻明将解生等破倭黑田长政于稷山,乃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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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淸一統志 卷四百二十一


京畿道治國城朝鮮都也亦曰漢城明初髙麗王旦自開州徙此居七道之中稱為四塞 領郡三曰楊根豐徳水城 府三曰漢城開城長湍 州七曰楊州廣州潤州驪州果州谷州波州 縣三曰交河三登土山

 

江原道治江陵府在國城東面本濊貊地漢為臨屯境 領郡七曰忤城平海通川寧越松岳旌善髙城府五曰江陵淮陽山陟襄陽鐡原州四曰原州江州槐州㝠州縣十曰平康安昌烈山麒麟洒泉丹城蹄麟蔚珍瑞和歙各

 

黄海道治黄州在國城西面古髙麗馬韓舊地領郡三曰遂安延平平? 府三曰平山瑞典承天 州五曰黄州白州海州愛州仁州 縣八曰安岳三和龍岡咸從江西牛峯文化長淵

 

全羅道治全州在國城南面本弁韓地後為百濟國唐顯慶五年蘇定方伐百濟擒其王置熊津等五都督府後并於新羅五代時髙麗兼有其地圖經朝鮮地界正北從長白山發脈南跨全羅界西南盡於海日本對馬諸島偏在朝鮮海洋之東南與慶尚之釡山相對倭船止抵釡山不能越全羅至西海故八道之中惟全羅一道直北正南其迤西則於連東對峙日本所以隔絶遼薊不通海道者恃有朝鮮而朝鮮所以保固邊陲控禦諸島者恃有全羅也志云全羅之地南濱大海東接慶尚為朝鮮門户倭犯朝鮮此其必由之道也 領郡三曰靈巖古阜珍島府二曰全州南原州四曰羅州濟州光州昂州縣二十三曰萬頃茂長鎮安扶安全渠康津興徳黄成樂安昌平濟南㑹寧大江臨波古臯南陽富順扶寧麻仁緒城海南神靈移安

 

慶尚道治慶州在國城東南面本辰韓地後為新羅國濱海與日本相對為朝鮮之屏蔽

領郡七曰蔚山咸陽熊川陜川永州梁山清道府六曰金海善山寧海密陽安東昌原州五曰慶州泗州尚州晉州蔚州縣十二曰東萊清河義興聞慶巨濟昌寧三嘉安隂義城山隂髙靈守城

 

忠清道治忠州在國城西南面本馬韓舊地王京居八道之中東隘為烏嶺忠州西隘為南原全州志云王居為朝鮮都㑹咸鏡忠清為犄角並稱天險 領郡四曰清風温陽天安臨川州九曰忠州清州公州矜州靖州幸州興州禮州洪州縣七曰水春報恩連山扶餘石城燕岐保寧

 

咸鏡道咸興府在國城東北面本髙句驪地 領郡三曰端州蜀莫寕逺府五曰咸興鏡城㑹寧永興安邉州八曰延州徳州開州恵州蘇州合州燕州隋州縣一曰利城

 

平安道治平壤府朝鮮西境也東南去國城五百餘里漢曰樂浪郡 後為髙句驪王所都亦曰長安城一名王險城唐平髙麗置安東都䕶府於此後没於渤海五代時髙麗復取之為西京元至元六年其臣李延齡等以西京府州縣六十餘城來屬因改西京為東寧府升東寧路割静州義州麟州威逺鎮屬婆娑府餘俱領於東寧其城治類皆廢燬僅存空名耳元末復歸於朝鮮 領郡十一曰 嘉山价川郭山雲興熙川宣川江東慈山龍川順川摶川 府九曰平壤成川定逺昌城合蘭廣利見仁寧邉江界 州十六曰安州定州平州義州鋼州鐡州靈州朔州撫州宿州滑州買州青州昇州常州銀州縣六曰土山徳川陽徳江東中和泰州

 

含資城在國城南境漢樂浪郡属縣也 後漢因之晉改屬帶方郡 漢志注縣有水西至帶方入海 隋大業中伐髙麗分軍出含資道葢以漢縣為名耳

豐徳城在國城南朝鮮置豐徳郡於此明萬厯二十年倭自釡山潛渡臨津分兵陷豐徳諸郡朝鮮王李昖倉卒棄國城奔平壤即此

孟州城在國城西唐置孟州領三登一縣椒島椵島寧徳三鎮今州廢縣存

吞列城在國城東南漢縣屬樂浪郡後漢省漢志注列水出分黎山西至黏蟬入海行八百二十里 又有列口城亦在國城西南漢縣屬樂浪郡後漢省晉復置屬帶方郡胡三省曰冽水入海之口也漢元封二年楊僕擊朝鮮先至冽口張宴曰朝鮮有濕水冽水汕水三水合流為冽口是也

丸都城在國城東北晉時髙句驪依險為城謂之丸都旁多大山深谷通典漢建安中髙麗王伊夷模更作新都於丸都山下在沸流水之東魏正始七年幽州刺史毋邱險以髙句驪數侵叛督諸軍出元菟討之髙句驪王位宫敗走儉追至頳硯懸車束馬以上丸都屠其城既而復都於此晉咸康八年髙句驪與慕容皝接境皝謀擊之髙麗以重兵備北道皝潛將勁兵四萬趣南道出其不意髙麗王釗敗遁遂入丸都毁其城大掠而還唐志自鴨渌江口舟行百餘里以小舫泝流東北行凡五百二十里而至丸都城

臨屯城在國城西南漢元封二年置臨屯郡治東暆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領十五縣昭帝時郡廢漢志東暆縣屬樂浪郡是也後漢并廢縣又

真番城在國城西北漢元封二年置真番郡治霅去長安六千六百四十里領十五縣昭帝時亦并入樂浪郡按霅縣漢志不載徐廣曰遼東郡有畨汗縣疑即真畨

開州城在國城西南二百里髙麗所置州也左溪右山稱為險固亦曰松岳唐天祐初眇僧躬又據此朱梁貞明五年入貢於淮南楊隆演後唐清泰末王建殺躬又而代之仍都于此謂之東京亦曰開京宋大中祥符三年髙麗臣康肇戕其主誦立誦兄詢而相之遼主隆緒討髙麗渡鴨渌江康肇戰敗退保鋼州遼人進擒肇等追亡數十里鋼霍貴寧等州皆降進攻開京詢棄城走平州遼人遂焚開京宫室府庫民廬俱盡兵還詢復葺開京而居之諸城亦復歸髙麗今曰開城府

平山城在黄州東北百里或曰舊名甑山府西接黄州東連平壤其相近者有瓊山今為平山府

海州城在黄州西南二百餘里以濱海而名又東北即安岳縣也志云境內有安岳三和龍岡成從江西五縣長命一鎮今俱屬黄州皆唐置元因而不改

南原城在全州東南與全州相犄角為國城要隘明萬厯中倭陷南原遂犯全羅進逼國城李如松謂全羅饒沃南原尤其咽喉是也其相近者有雲峯城亦為衝要

濟州城在南原府南海島中亦曰濟州島朝鮮置州於此志云朝鮮之濟州猶中國之瓊州或曰即故躭羅也元大徳五年置躭羅軍總管府又沿海立水驛自躭至鴨渌江并楊村梅口凡三十所今仍曰濟州

又 珍島城在濟州西海中島上亦曰珍島郡宋咸淳六年髙麗叛人裴仲孫立髙麗王植庶族子承化侯為王竄入珍島蒙古討平之

大江城在南原府東南朝鮮所置縣也又東接慶尚之晉州萬厯中倭屯釡浦李如松分遣諸將屯大江忠州以扼之既而倭從釡山移西生浦劉綎留鎮朝鮮分屯慶尚及大江葢扼要處也

南陽城在南原府西北朝鮮之南陽縣也明萬厯二十三年李如松命將守南原分兵屯禦於此俱拔城在全州南北史百濟都俱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光城北方曰熊津城是也唐顯慶五年蘇定方下百濟留劉仁願守百濟府城即俱拔城也處仁城在全州西宋紹定六年蒙古主鄂格台遣將薩里台攻髙麗至國城南攻其處仁城即此

又 黨項城在全州東北唐貞觀十二年百濟與髙麗連和伐新羅取四十餘城又謀取黨項城絶其貢道云舊諤格台舊作窩濶台薩里台 作撒禮塔今俱改正任存城在全州西古百濟所置城池唐龍朔初百濟餘衆叛劉仁軌破之於熊津江口其衆釋百濟府城之圍退保任存城任存百濟西部也依任存山而名三年仁遣兵攻任存城拔之又真峴城在全州北唐龍朔二年劉仁軌既解百濟府城之圍還軍熊津城有詔班師仁軌曰今以一城之地居敵中央動足輒為擒擄正宜堅守觀變乗便取之不可動也於是出兵掩其支羅城拔之并拔其尹城大山沙井等柵時敵以真峴險要加兵守之仁軌復伺其懈引兵襲據之遂通新羅運糧之路唐書支羅真峴諸城俱在熊津之東周留城在全州西又西北有加林城唐龍朔三年百濟故將福信等據周留城劉仁軌既拔真峴諸將以加林水陸之衝欲先攻之仁軌曰加林險固攻之不易周留虜之巢穴宜先取之遂定計自熊津進破百濟之衆於白江口趨周留城拔之熊津城在全州西北即熊津江口百濟之險要也唐顯慶五年蘇定方討百濟自成山濟海百濟據守熊津江口定方擊破之直趨其都城遂克之置熊津都督府以守其地龍朔初年百濟復叛圉百濟府城詔劉仁軌赴援仁軌轉而前所向皆下百濟立兩柵於熊津江口仁軌擊破之府城之圍遂解仁軌因駐守於此既而再破百濟餘衆於熊津之東復平百濟或曰今漢江口即古置城處

云 蔚山城在慶州西北即蔚山郡也南有島山不甚髙而城皆依山險中有江通釡山寨陸路則由彦陽監通釡山明萬厯二十五年倭屯蔚山大師麻貴攻之不克既而倭益築城寨據守於此謂之東路麻貴遂進師逼之據險收其禾稼倭詭却以誘之貴為所敗順天城在慶州西南明萬厯二十六年倭酋據此為之西路朝鮮紀事倭酋行長據粟林臾橋建寨數重慿順天城與南海營相望負山水最為扼隘太師劉綎攻之不能克泗州城在慶州西或曰即古泗城也唐龍朔初百濟復叛與劉仁願等相持詔新羅應援新羅將金欽將兵至古泗為百濟所邀敗自葛嶺遁還今泗州相近有葛嶺道云明萬厯中倭據泗州謂之中路北倚晉江南通大海為東西聲援大帥董一元克之尋復敗還

晉州城在慶州西南明萬厯二十六年大帥董一元擊泗州倭進取晉州乗勝渡江南燬永春昆陽二寨侫退保泗州老營一元奪其城進逼新寨寨三面臨江一面逼陸引海為濠海艘泊砦下千計又築金海固城二砦為左右翼中通海陽倉一元攻之不克敗還晉州

又有咸陽城在晉州西北朝鮮之咸陽縣也萬厯中倭犯咸陽晉州即此梁山城在蔚山城東南朝鮮之梁山郡也明萬厯中麻貴攻蔚山遣别將屯此以絶釡山彦楊之援又有永川郡在梁山東南又東與慶州接界昌寧城在晉州東朝鮮所置縣也南濱晉江江之南為固城縣縣南有唐浦為海濱津要處

安東城在慶州西朝鮮之安東府也志云府當馬嶺之南為東出慶州之道又義城在安東城西朝鮮之義城縣也亦曰宜城明萬厯二十五年督臣邢玠等議攻倭酋青正於慶州分兵屯義城東接慶尚西阨全羅云七重城在慶州北境內又有買肖城唐上元二年新羅拒命遣劉仁討之大破之於七重城詔以李謹行為安東鎮撫大使屯新羅之買肖城以經畧之新羅屡敗乃遣使入貢且謝得罪陜川城在慶州東北朝鮮之陜川郡也明萬厯二十二年李如松復王京分兵屯禦於此又東南曰熊川郡東濱大海

公州城在忠州西南境其東近全羅之南原府明萬厯二十五年倭入南原麻貴發兵屯公州以拒之即此

又清州城在忠州西其東接天安郡郡西南接公州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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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서집성> 압록강부휘고 - 대총강鴨綠江部彙考

 

   奉天府東南之鴨綠江

 

   鴨綠江, 即《唐書》之馬訾水, 一曰益州江, 又曰靉江。以色如鴨頭, 故名鴨綠, 在今奉天府遼陽 州東五百六十里。源出長白山之潭, 西南流與佟家江會, 繞鳳凰城之東南, 行五百餘里, 入于海, 其 東朝鮮界。

 

   

 

   按《唐書 · 高麗傳》﹕ 高麗有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綠。水歷國內城西, 與鹽難 水合, 又西南至安市, 入於海。而平壤在鴨綠東南, 以巨艫濟人, 因恃以為塹。按《性理》﹕朱子曰 ﹕ "女起處, 有鴨綠江。" 《傳》云﹕"天下有三處大水, 曰黃河, 曰長江, 並鴨綠, 是也。

今按 《書經》、《大全》、《禹貢》載壺口 註引朱子之言,  三大水指混同江,  此又以指鴨綠, 然混 同自長白北流, 受諾尼江, 東折北, 受黑龍江, 南受烏蘇哩江, 然後東注入海。其間小河, 自南自北, 奔 趨此水者, 不啻數十, 經行三千餘里, 而後入海, 以此配江河三大水, 信然。若鴨綠, 則亦源自長 白,  南流入海, 其西奉天鳳凰城之地, 其東則朝鮮之界, 其長不過數百里, 非混同可並也。朱子 生於南宋, 二水皆得於傳聞, 未嘗親歷, 然以此見天下有三大水之名, 其來久矣

 

   按 《明一統志》﹕ 鴨綠江, 在都司城東五百六十里。唐太宗征高麗, 耀兵於鴨綠水, 即此。《全遼志》﹕ 鴨綠江, 在遼陽城東五百三十里, 又名馬訾水。源出靺鞨長白山, 水色如鴨頭,  故名 。由夾州城, 西南流與禿魯江合流, 至艾州, 與豬婆江同流入於海。

 

 

 

   按 《盛京通志》﹕ 烏喇境內有長白山。其有潭, 週圍八十里, 南流鴨綠江。鴨綠江,即益州江, 或呼靉江。按《唐書》﹕ 馬訾水出白山, 色若鴨頭, 故名鴨綠。西與鹽難水合, 又西南至安市, 入海。今按, 長白山南諸泉, 南注匯大江, 西南流與佟家江, 會行五百餘里, 繞鳳凰城之東南入於海江之東, 南朝鮮界。珠魯木克善峰有二, 在長白山南。兩子山, 俱長白山南麓。一榦西南指者, 而峰巒相續。其東, 鴨綠江, 其西, 即通加江。山盡處, 兩江合流入海。

   大蟲江,《明一統志》云﹕ 在都司城東南四百里, 源出龍鳳山, 南流入鴨綠江。今鳳凰城界內, 有 龍鳳臺山, 不聞有大蟲江。南流入鴨綠者, 有佟家江, 或亦名稱之異也。

 

    靉河, 在烏喇城西南., 源出分水嶺。西流繞鳳凰城西, 南入鴨綠江。

 

   佟家江, 在長白山南, 源出分水嶺, 又曰黑林嶺。其南, 有三泉自谷中出, 佟家江。西南流受 哈爾民等諸河。鴨綠江自東來會, 南入於海。

 

 

  鴨綠江部藝文

 

   瞷鴨綠江        明王之誥

 

   祈連城畔草芊綿, 鴨綠津頭生暮煙。

   對岸鳥鳴分異域, 隔江人語戴同天。

   皇仁本自無私覆, 海國從來奉朔虔。

   分付邊人封守, 莫樵牧擾東田。

 

 

   鴨綠江部紀事

 

   《唐書 · 高麗傳》﹕ 貞觀十九年, 帝自將征高麗。程名振總管, 攻(沙早)[卑沙]城, 夜入其西城, 潰虜其口八千游兵,鴨綠上。

 

   《元萬頃傳》﹕ 萬頃起家通事舍人, 從李勣征高麗, 管書記。使萬頃草檄讓高麗, 而譏其不知守 鴨 綠之險, 莫離支報曰﹕ "謹聞命。" 徙兵固守, 軍不得入。高宗聞之, 投萬頃嶺外。

 

   《遼史 · 太祖本紀》﹕ 九年冬十月戊申, 釣魚於鴨綠江。

[출처] 청대에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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