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대가 <전라도천년사> 발간 저지와 관련하여 강연한다고 한다.

`한4군이 갈석에서 대동강으로?`이라는 글귀를 보면 그의 강연을 듣지 않아도 대략 어떤 얘기를 하겠는지 짐작하겠다.

 

 

복기대는 고려의 북쪽 국경선과 천리장성 위치를 지금의 요하부근까지로 주장하며 지금의 압록강 하류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뻗으며 쌓였었다고 주장하는 한국사학계를 비난하고 고구려 평양성 위치도 지금의 요동 요양 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즉 고려.거란 시기의 요하가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복기대의 스승 윤내현도 전한 시기의 대요수가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하며 윤내현에게 영향을 준 리지린도 전한 시기 현토군 고구려현을 경유한 요수 곧 <수경주>의 소요수를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복기대 등 중국 요녕.길림 지역에서 역사학을 수학한 자들은 거의 대부분 동북공정 논리에 포획되어 있다. 복기대의 스승 윤내현에게 영향을 준 북조선의 리지린도 마찬가지다.

 

 

사실 쓰레기수준의 국사편찬위보다는 약간 진척된 일면이 있지만 지금의 요하를 전한 시기부터의 대요수 또는 요수라고 인식하는 것은 한국강단사학계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결국 그들도 명백한 식민사관.동북공정 논리 홍보자들이다.  

 

하지만 준왕조선 시기는 물론이고 삼국.고려.이조선.대한제국 시기까지도 대요수.요하는 지금의 란하 중류 지점의 서북쪽 본류 일부와 정북쪽 지류였었고 물음표 모습의 지금의 란하 상류는 별개의 물길인 난수였다.

 

 

따라서 고려 서북 국경 중 남쪽은 요동의 요양 동쪽에 흐르는 태자하였고 북쪽은 요양에서 북쪽으로 240 리 떨어진 명 시기의 철령위 동쪽인 혼하 부근까지였으니 지금의 란하 중류의 동쪽 지류인 폭하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1873 년경부터 일본 명치유신 3 걸 중 1 인인 서향융성은 지금의 란하 본류 중류 부분인 동남류한 황하와 요하의 이름을 동북쪽, 동쪽으로 각각 3000 여 리 씩 옮겨 지금의 서요하와 지금의 요하로 표시한 엉터리 습작지도를 간행.선전하였었다. 그 증거가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다.

 

- 일본공식관찬지도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 년 일본 육군참모부 간행

주) 1- 란하 2- 황하 3- 요하 4- 흑룡강 5- 바다.灣 6- 갈석산 7- 백두산 8- 이조선압록강 9 - ? 10- ? 혹 大토람산

 

 

 

결국 요하 동쪽에 흘렀던 고려의 압록강이나 이조선의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낙착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왕검조선부터 대한제국까지 4300 여 년 동안의 조선 서쪽 강역은 훈죽.동호.산융.선비.거란.몽고.여진.만주족의 땅으로 둔갑되고 백제.신라.고려.이조선.대한제국의 영역은 지금의 압록강 남쪽으로 쑤셔넣어지게 되는 것이다. 소위 요하문명까지도 중국인의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식민사관의 핵심 논리이고 동북공정 논리도 이러한 식민사관 핵심 논리에 터잡은 것이다. 결국 이조선.대한제국의 서북강역이 청국 영역으로 둔갑되는 것이고 종내는 이러한 지리는 왕검조선 시대부터였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북공정은 이조선 서북강역인 장물땅을 앞으로도 영원히 차지하려는 장물아비 심보일 뿐이며 일본의 조작지리 곧 식민사관 논리가 밝혀지는 것을 땅속으로 묻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기대.윤내현.리지린 등의 주장은 민족사관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외려 식민사관과 동북공정 논리를 한국인 스스로 굳혀주는 반민족행위임이 명백한 것이다.

 

윤내현이 전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갈석산.진장성동단 지점이라는 주장은 대단히 무지무식한 해석이다. 갈석산 부근은 전.후한.서진 시기의 요서군 지역이였고 윤내현이 낙랑군 위치라며 인용한 <진서/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 기록은 서진西晉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진 낙랑군 지역을 유지하지 못하고 낙랑군의 서남쪽 후방인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300 리 떨어진 요서군 지역으로 옮긴 교치 기록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요서군에 낙랑군이 설치되었었다고 인식할 수가 있단 말인가?

 

 

위와 같이 서기전 202 년 전한 시기부터 청국이 멸망하고 중국 봉천에 터잡은 동북군벌 장작림이 일본에 쫓겨갈 때까지인 1931 년까지 약 2100 여 년 동안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 등 5 군과 이후의 평주.영주.영평부 등의 위치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 서쪽 지역이였고 요동군은 지금의 란하 중류에 2 개의 승덕이 표시된 지역이였다. 서기전 108 년 설치되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졌다는 낙랑군 위치는 당연히 지금의 관성.쌍산자.건창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를 서향융성이란 놈이 일본 육군참모부와 밀정들을 동원하여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1 물길로 변조하고 황하.요하를 동북.동쪽으로 대략 3000 여 리 이동시켜 지금의 서요하와 요하를 표시한 엉터리 습작지도를 간행.선전하였고 이러한 기획은 1932 년 만주국지도에서 공식화되었다.

 

신채호가 피를 토하며 써내려간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의 핵심 구절은 `고대의 요하는 란하`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라는 단 2 개의 구절일 수 밖에 없는데 어찌 그 해성을 지금의 란하 중류 반가구수고 동쪽 강안 지점이 아니라 지금의 요동 해성이라 할 수가 있는가?

 

신채호의 역사인식을 숭모했다는 정인보나 정인보의 영향을 받았을 북조선의 리지린은 서기전 3 세기의 준왕조선도 아니고 어떻게 서기전 24 세기의 왕검조선의 왕검성을 지금의 요동 해성.개평이라 할 수 있는가?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가 패수를 란하라 한 구절을 보지도 못했단 말인가? 이조선 숙종 2년 <규원사화>를 서술한 북애노인이 단군조선의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했고 지금 곧 1676 년 경 만주 길림땅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 곧 그 땅이라고 단정한 구절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래 고지도는 현재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정확한 지도일 것이다.  

 

-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 (1751) 간행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고지도 자료,<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제목

 

 

위 <백산대맥도>의 묘사 범위는 마땅히 아래의 적색 실선 지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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