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투사들도 훔치려드는 중국의 뻔뻔한 동북공정

항일 독립투사들도 훔치려드는 중국의 뻔뻔한 동북공정 < 사회 < 기사본문 - 리버티코리아포스트 | 늘 깨어있는 언론 (lkp.news)

  • 기자명 이화종 기자 
  •  입력 2022.01.07 13:39
  •  수정 2022.01.0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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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교수 중국 포털 바이두의 역사 왜곡 지적···독립운동가들 민족·국적 왜곡

윤봉길, 이봉창, 김원봉, 안재홍 선생의 국적은 조선으로 표기

대만 인정 못하니 변변한 항일 투사 하나 없는 중국공산당

 

1932년 1월 8일의 의거 앞둔 이봉창 의사가 수류탄을 들고 있다 / 사진 = 보훈처
리버티코리아포스트 = 이화종 기자
 
 

이봉창 의사 의거 90주년인 1월 8일을 앞두고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중국의 바이두의 역사 왜곡을 지적했다. 이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궁성으로 돌아가는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지만 실패하고 그해 순국했다.

서경덕 교수는 7일 "(중국 포털)바이두에서 이봉창 의사를 검색한 결과 국적은 조선, 민족은 조선족으로 표기됐다"라며 "조선을 클릭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개 페이지로 이동한다"라고 밝혔다. 서교수는 "이 같은 오류와 왜곡을 우리가 바로잡지 않는 것은 후손된 도리가 아니다"라며 "바이두 측에 지속해서 항의 메일을 보내고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교수는 이봉창 의사를 소개하는 우리말, 영어, 중국어 영상과 카드뉴스를 제작해 바이두측에 전달할 계획이다. 서교수는 지난달 30일 시인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 민족을 조선족으로 표기한 바이두 측에 항의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바이두는 윤봉길, 이봉창, 김원봉, 안재홍 선생의 국적은 조선으로 표기한다.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개페이지로 이동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미 1919년 4월11일 상하이에 수립됐기 때문에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 볼 수 있다. 바이두의 민족 관련 표기도 문제다. 바이두는 김규식, 김원봉, 민종식, 민영환, 박은식, 손병희, 신규식, 신채호, 안재홍, 양기탁, 여운형, 유인석, 윤봉길, 이범진, 이봉창, 이상재, 이상설, 조병세, 최익현, 황연 선생 등을 조선족으로 표기했다. 

 

문제는 조선족을 누르면 '주로 지린성·헤이룽장성·랴오닝성 등 동북3성에 분포 돼 있으며 두만강, 압록강, 목단강, 송화강 유역 등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라고 중국 내 소수민족처럼 표기하고 있다. 우리는 물론 북한, 중국내 우리민족 모두를 다른 민족처럼 분류하는 망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민족족군'이라는 표현을 써서 마치 다른 민족들이 한 개의 원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 

 

우리나라와 북한, 중국동북삼성의 우리민족들은 모두 한민족(=조선족)으로 같은 민족이 여러 개의 나라에 흩어져 사는 것이다. 바이두식으로 나누기 시작하면 교포들과 사할린으로 강제이주된 우리민족(카레이스키)도 모두 별도의 민족으로 표기해야 하는 해괴한 분류가 이뤄진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채 100년도 안된 역사적 사건들까지도 왜곡할 정도로 뻔뻔해지고 있다. 대만과 쟝제스, 국민당을 인정 못하는 중국은 2차대전 전국이 일제에 유린당했어도 변변한 항일투사 하나 없는 상황이다. 중국공산당이 우리 독일운동가들도 훔치려 하고 있다.

 

조선일보

입력 2018.03.26 03:04

북방사 탐구·대응 방향 주도해온 역사학자 김정배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과 중국의 북방사 인식' 펴내… "고구려·발해사 정치적 타협 안 돼"

원로 한국고대사학자인 김정배(78) 고려대 명예교수는 우리 북방사(北方史) 탐구와 대응의 최전선에 서왔다. 김 교수는 1990년대엔 연해주의 발해 유적 발굴을 주도했고, 2000년대 들어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포함하는 동북공정을 추진하자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으로 그 허구성을 밝히는 활동을 이끌었다.

김정배 교수가 최근 펴낸 '한국과 중국의 북방사 인식'(세창출판사)은 이런 경험을 생생하게 복기하면서 한국사에서 북방사가 갖는 의미, 북한·중국·러시아 등 관련국의 논리, 한국의 대응 방향을 정리한 책이다. 김 교수는 "고구려·발해사의 현장을 먼저 밟고 고민했던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정배 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후속 연구자를 많이 키우는 일”이라고 했다. /이명원 기자

김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로 갔던 1980년대 초 중국 학자들이 발해를 말갈족 역사, 당나라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알게 됐다. 이는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 정사(正史)가 발해를 자기 역사로 생각하지 않아 본기(本紀)가 아닌 북적열전(北狄列傳)에 기록한 것과 다르고 설득력도 떨어졌다. 그런데 1993~1994년 연해주 크라스키노·코르사코프카의 발해 유적 발굴에 참여한 러시아 학자들도 중국 학계의 영향으로 발해를 말갈족 국가로 간주했다. 하지만 발해 유적에서 나온 유물이 고구려·통일신라와 관련성을 보여주자 그들의 인식은 점차 바뀌었다. 김 교수는 "연해주 발굴은 한국 학자들이 발해 유적을 직접 접함으로써 발해사 연구에 발언권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큰 성과"라고 말했다.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처음 포함한 것은 1940년대 김육불의 '동북통사(東北通史)'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주장은 중국에서도 영향력 없는 소수설이었다. 곽말약·전백찬 등 중국 학계를 이끄는 석학은 '고구려는 한국사'라고 했고, 모택동·주은래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초까지 "광개토대왕비는 한국사"라던 중국 학자가 '중국고구려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중국이 소수민족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앞세우면서 '청나라 영토에서 이뤄진 역사 활동은 중국사'라는 역사지리학자 담기양의 강역(疆域) 이론이 표준이 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동북공정은 학문적 토대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한국 역사서는 물론이고 중국 정사들 역시 고구려를 신라·백제와 함께 '해동삼국(海東三國)' '삼국'으로 서술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중국 학계와 교류는 계속하면서도 고구려·발해사는 정치적으로 타협하면 안 되고 학문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북공정은 한국의 고대사 인식 체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발해가 주목받으면서 통일신라와 발해를 대등하게 보는 학계 일부의 '남북국 시대론'이 힘을 받았다.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는 북한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며 '후기신라론(論)'을 펴고 있다. 이에 대해 김 교수 는 "발해사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좋지만 삼국통일을 부정하면 고구려사까지 중국에 넘겨줄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은 '일통삼한(一統三韓)' '삼한위일가(三韓爲一家)'라는 우리의 전통적 역사 인식과 어긋난다. 김 교수는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도 담고 한국고대사의 외연도 넓히는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역사 체계가 적절하다"고 말했다.

 

김정배 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후속 연구자를 많이 키우는 일”이라고 했다. /이명원 기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26/2018032600133.html

 

고조선이 중국의 지방정권? 한술 더 뜬 중국의 역사 왜곡

 

동북아역사재단 '연구동향'서 분석
"殷 유민, 고조선·삼한 세워" 억지


"고조선은 처음부터 중국 주(周)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 삼한은 은(殷)나라의 유민이 한반도로 망명해 성립한 나라였다. 결국 고조선과 삼한 전 영토가 중국사의 일부였다." 한국 상고사에 대한 최근 중국 학계의 인식이다.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왜곡했던 중국의 동북공정(2002~2006) 이후, 한국사의 첫 국가인 고조선에 대한 중국 학계의 왜곡 또한 심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동북아역사재단 한중관계연구소는 남북한과 중국·일본 학계의 2000년 이후 고조선 연구에 대해 분석해 지난 21일 출간한 연구서 '고조선사 연구동향'에서 이같이 밝혔다.

북한이 1993년 발굴해 높이 22m, 너비 50m 규모로 다시 쌓은 단군릉의 모습. /조선일보 DB

'한국사는 처음부터 중국사의 일부로서 시작했다'는 이 같은 인식은 지난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한국사는 중국사의 일부였다'고 발언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 논리는 고대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고, 북한 정권 붕괴 시 점령할 수 있다는 역사적 명분을 쌓으려는 의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책에서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중국의 고조선사 연구에 '단군조선의 부정' '기자조선의 역사화' '중화 역사로서의 고조선사'라는 세 가지 연구 경향이 있다고 짚었다. 단군은 신화이기 때문에 기자(箕子) 이전의 고조선은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단군신화 역시 중국 황제(黃帝) 신화나 곰 토템의 아류라는 것. 이어 중국에서조차 일찍이 근대 역사학의 대가 구제강(顧�剛) 등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판정된 '기자동래설', 즉 은나라의 유민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무리하게 부활시키고 있다. 조 교수는 "우리 학계가 이미 체계화하고 반론을 제기한 내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족(漢族) 중심주의' '중화민족주의'와 연결되는 연구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한 학계의 대응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고조선사 연구동향' 필자들의 분석이다. 북한의 고조선사 연구는 과장이 심해 오히려 중국 측의 왜곡 빌미가 되고 있다. 1993년 평양 '단군릉 발굴'을 기점으로 '고조선 건국 시점은 기원전 3000년대이며 대동강문화는 세계 5대 문명의 하나'라고 하는 북한의 지나친 주장이 국제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학계는 '고조선사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김정배 전 고려대 총장)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박준형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은 "최근 들어 고조선사의 양적 연구는 늘어났으나 획기적인 연구가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박선미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고조선사의 큰 틀에 대한 논의, 쟁점별 심화 연구, 국제적 공동 연구의 추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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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중국의 동북공정…"신라 뺀 韓고대사는 중국사"

   

 

中연호로 된 발해역사서 출간…이상훈 교수 확인 

 
동북고대민족역사편년총서. 부여(왼쪽부터), 고구려, 백제, 발해, 거란 편년총서. [이상훈 교수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지난해 부여,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중국 연호로 정리한 역사서를 펴낸 중국 과학출판사가 발해와 거란의 역사도 같은 방식으로 서술한 사서를 출간한 사실이 확인됐다.

 

중국이 국경 내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 했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지 10년이 흘렀으나, 역사 왜곡 작업을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는 중국에서 '동북고대민족역사편년총서'(東北古代民族歷史編年叢書, 이하 편년총서)의 4∼5번째 책인 '발해역사편년'(渤海歷史編年)과 '거란역사편년'(契丹歷史編年)이 지난 3월 발간됐다고 13일 밝혔다.

 

이 책들은 기존에 나온 편년총서와 마찬가지로 중국 연호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한국 사료보다 중국 사료를 중시한 점이 특징이다.

 

또 서문에 "이전 프로젝트의 총결산으로 향후 연구의 기초로서 동북아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문장이 있어 서적 편찬이 동북공정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471쪽 분량의 '발해역사편년'은 편년 외에 잡편(雜篇)이라는 장을 따로 할애해 관련 자료를 망라했고, 발해·중국 중원 왕조·일본·신라·고려 순으로 연호를 나열한 '발해 연호 대조표'를 부록으로 실었다.

 

이 교수는 "중국 연호와 신라 연호 사이에 일본 연호를 배치해 의도적으로 발해와 신라 역사를 분리했다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거란의 역사가 편년총서로 출간된 데 대해 "발해가 멸망한 뒤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거란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고 본 것 같다"며 "거란역사편년에서 거란이 가장 강성했던 10∼12세기 요나라 역사는 거의 다루지 않고 고대사에만 집중한 점도 이상하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장웨이궁(姜維公) 중국 창춘사범대 교수의 주도로 출간이 이뤄진 편년총서는 신라를 제외한 한국 주요 고대국가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로 인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와 백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발해의 영토를 차지한 거란의 역사를 중국 시각에 맞춰 해석하는 기반이 완성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게다가 '백제역사편년'에서 장웨이궁 교수가 "백제 멸망 이후 당 왕조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백제 유민 상당수가 중국으로 이주했으므로 백제사와 중국사는 엄밀히 나눌 수 없다"고 밝힌 점으로 미뤄 앞으로 중국의 아전인수식 역사 해석의 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교수는 "편년총서는 중국에서 동북아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공부할 때 보는 기초 자료가 될 것"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각종 교양서가 출간되고, 역사 드라마가 제작될 가능성도 크다"고 우려했다.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09/13 03:00 송고

 

[기고] ‘중화문명선전공정’이 시작된다 / 우실하

 

등록 : 2015-04-13 19:02

 
올 3월에 열린(3월3~15일) 중국 최대의 정치행사인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제안들이 건의되고 의결되었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정치, 경제적 정책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양회는 정치, 경제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의 정책이 건의되고 결정되는 매우 중요한 회의이다. 여기에서 건의된 안건들은 대부분 실행된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소장이자 전인대 대표인 왕웨이는 ‘제12차 전인대 3차회의’에서 ‘중화문명선전공정’(中華文明宣傳工程)을 제안하였다. 핵심적인 내용은 “국민들이 5000년 중화문명을 확실히 이해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으면서 중화문명 5000년의 찬란한 역사가 드러났는데, 아직도 많은 중국인과 국내외 학계에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선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왕웨이 소장은 5000년 중화문명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중화문명선전공정을 제안하고, 이를 위한 5가지 구체적인 기획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첫째, 중화문명 초기의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를 보여줄 티브이 특집프로그램 ‘중화문명의 형성’을 100회 정도의 연속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것. 둘째, 중화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대중서’ 형태로 지속적으로 출판하여 총서로 만들 것. 셋째, 중화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형 사진도록 <중화문명> 시리즈를 만들 것. 넷째, 중화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소개하는 ‘대학교, 중고등학교, 초등학교의 교재와 보조교재’를 편찬할 것. 다섯째, 중화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국내외에 전시·소개하는 ‘중화 조기문명 문물순회전’(中華早期文明文物巡廻展)을 실시할 것.

 

 

이 외에도 도굴범들은 일벌백계하고 문화재관리 관련법의 집행을 엄격하게 집행할 것 등도 건의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요서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새로운 요하문명의 등장으로, 중국은 ‘중화문명 5000년’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중국학계는 요하문명의 주도세력이 중화민족의 조상이라는 황제족이라고 보고 있다. 요하문명의 꽃으로 불리는 홍산문화 후기(기원전 3500~3000년)에 이미 ‘초기 국가단계’ 혹은 ‘초기 문명단계’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필자는 요하문명은 중국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공통의 시원문명’이라고 본다. 많은 요소들이 고대 한반도, 일본, 몽골 등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요하문명의 새로운 발견 이후, 상고사와 고대사를 재정립하려는 ‘동북공정 → 중화문명탐원공정 → 국사수정공정(國史修訂工程) → 중화문명선전공정’ 등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기껏 발굴해 놓은 한반도 최대의 청동기 주거유적지인 춘천 중도 유적지를 덮고 그 위에 레고랜드라는 외국계 놀이공원을 만들고 있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유적지의 34.8%만 발굴했는데도 917기의 주거지와 100여개의 지석묘(고인돌)가 발견된 곳에!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양학과 교수·중국 내몽고 적봉대학 홍산문화연구원 방문교수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찬란한 5000년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대한민국 정부는 5000년 찬란한 역사를 밝히고 알리려는 국가 기획이나 계획이 있습니까?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양학과 교수·중국 내몽고 적봉대학 홍산문화연구원 방문교수

 

 

 

 

 

 

 

[국감브리핑]

 

"지안 고구려비, 동북공정 역사왜곡 악용 우려"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 "동북아역사재단, 실물연구는 커녕 탁본조차 구하지 못해"

 

(서울=뉴스1) 안준영 기자 | 2014.10.13 18:35:17 송고

 

 

중국 지안 고구려비를 현지 전문가들이 살펴보고 있다. /뉴스1 © News1

지난 2012년 7월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발견된 지안 고구려비가 고구려사를 복원하는 획기적인 금석문임인데도 우리 정부가 실물은 커녕 탁본조차 구경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중국 현지 지안 고구려비 연구팀이 동북공정 주도 학자들로 채워져 역사왜곡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13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지안 고구려비가 고구려사 연구를 위한 중요 자료임에도 여전히 의문 투성이"라며 "그런데도 우리 고대사 연구 컨트롤타워인 동북아역사재단은 실물연구는 커녕 탁본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건립시기가 광개토대왕 때인지 장수왕 때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며 "또한 비문에 적혀 있는 218자의 내용은 무엇인지 또 중국 측에서 판독에 성공했다던 156자의 내용이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 전혀 파악된 바 없다"고 강조했다.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시 마셴향 마셴촌에서 발견된 지안 고구려비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구려 비석으로 추정된다.

이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4월 29일 김학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직접 현지를 방문해 중국 측에 탁본을 제공해 줄 것과 공동연구 진행을 제안했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는 상태다.

중국 정부는 지안 고구려비를 지안 고구려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데 사진 촬영은 물론 박물관 안에서 메모를 하는 것조차 막고 있다. 관람객들은 비문 내용이 보이지 않는 먼 발치에서 감상만 하도록 통제받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지안 고구려비가 동북공정의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현재 비석을 조사하는 중국 측 연구원들은 과거 동북공정의 중심에서 활약했던 이들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고구려비를 연구할지 의문시된다고 이 의원은 설명했다. 자칫 비문 조작 가능성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실제 지안 고구려비 관련 중국 측 보고서에는 고구려를 중국 고대종족의 하나인 '고이족'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고구려가 중국의 한 무제가 고조선 영토에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인 현토군 관할 아래 세워진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종훈 의원은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한 고구려 역사 왜곡을 막고 비석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탁본 확보 및 실물연구를 비롯한 한·중 공동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andrew@
[단독] 마오쩌둥 '요동은 원래 조선 땅' 발언 확인

한겨레 | 입력 2014.02.28. 08:30 | 수정 2014.02.28. 10:20

 

[한겨레]이종석 전 장관, 중국쪽 1차 사료 공개

 

북-중 국경 획정 와중에 여러 번 밝혀

"조선 사람 압록강변까지 내쫓겨"

김일성에 "역사서에 꼭 쓰라" 말하기도

저우언라이도 "중 속국설 터무니 없다"

고구려·발해 중 고대사 편입하려는

'동북공정' 근본부터 흔들리는 셈

 

북한과 중국이 국경 획정 협상을 하던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중국 최고지도자인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가 '요동 지방은 원래 조선 땅이었으나 고대 왕조가 조선민족을 압록강변까지 내몰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중국 쪽 1차 사료로 27일 확인됐다. 이는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 주장해온 중국의 국가 차원 연구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의 근본을 흔드는 발언이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최근 펴낸 연구서 <북한-중국 국경 획정에 관한 연구>(세종연구소 펴냄)에서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가 김일성 수상 등 북한 대표단과 만나 이런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고 밝혔다.

마오 주석은 북-중 국경조약 체결 직후인 1964년 10월 베이징을 찾은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북한 대표단을 만나 "당신들의 경계는 요하 동쪽(요동)인데, 봉건주의가 조선 사람들을 압록강변으로 내몬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오 주석의 이런 발언은 1964년 10월 중국 외교부가 펴낸 <모택동접견외빈담화기록휘편> 제11책에 실려 있다.

마오 주석은 이에 앞서 1958년 11월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 수상 등 북한 대표단과 만나서도 "당신들 선조는 당신들의 영토가 요하를 경계로 한다고 말했으며, 당신들은 현재 당신들의 압록강변까지 밀려서 쫓겨왔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이 역사를 기술할 때 이것을 써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1958년 11월 중국 외교부가 펴낸 <모택동접견외빈담화기록휘편> 제4책에 실려 있다.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의 발언은 좀더 직설적이다. 저우 총리는 1963년 6월28일 베이징을 찾은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나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으며 심지어 예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라고 밝혔다. 저우 총리의 이 발언은 1963년 6월28일 중국 외교부가 펴낸 <외사공작통보>에 실려 있다.

마오 주석이 요동 지방이 애초 고구려·발해 등 조선 선조들의 영토였으나 당 등 중국 봉건왕조의 침략으로 빼앗긴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중국 쪽 1차 사료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종석 연구위원은 연구서 및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마오와 저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자 1976년까지 통치한 최고지도자들"이라며 "이들이 고구려와 발해를 조선민족이 세운 고대국가로 인식했으며, 그 역사를 조선의 역사로 규정했다"고 짚었다. 이어 "두 (최고)지도자가 동일 주제를 언급하며 거의 같은 용어와 문구를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당시 중국 정부의 정리된 공식 방침이었으리라 추정된다"며 "두 중국 지도자의 발언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반박할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동북공정'을 국가 차원의 연구 프로젝트로 격상시켜 '고구려는 우리나라(중국) 고대에 하나의 지방정권이었고, 국민은 주로 한족 이주민을 위주로 하였다'거나 '고구려는 우리나라(중국) 동북지역의 오래된 소수민족 중 하나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발해를 중국 고대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 애써왔다. 2000년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이 중국사회과학원의 '동북공정' 연구계획을 비준·승인했으며, 2002년 2월 중국 사회과학원과 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 등 세 성이 공동으로 1500만위안(22억5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동북 변경의 역사와 현상 연구 공정'(동북공정)을 출범시켰다.

한편, 1964년 10월 마오 주석을 만난 북한의 박금철 당시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마오 주석의 요동 영토 관련 발언을 듣고는 "양국 간 국경은 1962년에 이미 해결됐습니다. 주은래 총리가 아주 분명하게 백두산과 천지 문제를 모두 합리적으로 해결했습니다"라며 "현재의 국경선에 우리는 만족합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두고 북한의 우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북-중은 1962년 10월12일 압록강·두만강을 공동 이용하며 백두산 천지 영유권을 분할(북 54.5% 중 45.5%)하는 등 이전보다 북쪽에 유리하게 정리된 북-중 국경조약을 체결했으며, 그해 12월11일 이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이제훈 기자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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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저우라이언,周恩來)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주은래(周恩來) 총리의 六無

 

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중국과 조선,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 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 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주은래(저우라이언,周恩來)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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