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김상윤의 '전라도천년사' 톺아보기(10)] 일제의 한사군ㆍ낙랑군 날조와 술수 글에 아래의 댓글을 올리려니 스팸성 댓글이라 하며 등록을 금지하더군요.

 

`` 한반도에는 낙랑군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심백강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그가 낙랑군.갈석산 및 진장성 동단 등의 위치를 호타하 북쪽의 서수현 수성진이라 한 것은 너무 무지무식하고 무리한 추측이다. 즉 망상질이다.``

 

답답한 아침입니다.

 

 

아래는 1900 년 이후 대한인들이 서국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추정한 정황을 표시한 추정도입니다.

 

 

하지만 위 표시는 부정확합니다. 아래와 같아야 합니다.

 

 

즉 이병도.심백강을 제외한 1910 년대 신채호, 1930 년대 정인보, 1960 년대 리지린, 1980 년대 윤내현 등의 주장 지점을 잘못 표시하였습니다.

 

어쨋든 심백강은 낙랑군 위치를 지금의 북경 아래 지점이라고 하였는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서국 정사 <후한서/군국지>의 광양.어양.우북평.요서.요동.현토.낙랑 등 7 개 군의 주석에는 낙양으로부터의 방향과 떨어진 리 수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2000 리 떨어진 곳이 지금의 북경인 광양군이고, 어양군도 2000 리, 우북평군은 2300 리, 요서군은 3300 리, 요동군은 3600 리, 현토군은 4000 리, 낙랑군은 5000 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의 북경과 지금의 계현 및 옥전이 한 시기의 광양.어양.우북평 등 3 군 지역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북평군에서도 동북쪽으로 2800 리 떨어졌다는 낙랑군이 오히려 거꾸로 북경 서남쪽일 수가 있겠습니까? 명백한 망상질이지요. 심백강은 기본 사료보다는 후대의 해석 사료를 더 신뢰하나 봅니다.

 

또한 안경전.황순종은 패수를 어양군을 흐른 750 리 길이 고수의 동쪽 지류인 포수구 곧 지금의 조하潮河라고 하는데 서기전 3 세기의 부.준왕 조선에는 조선하朝鮮河가 흘렀을 것이라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였나 봅니다.

 

한편 위 추정정황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채호가 추정한 요하.패수.낙랑군 위치입니다.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주장한 신채호가 낙랑군을 지금의 개평이라 주장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즉 완전 무식질의 추정정황도입니다.

 

이러한 무식질의 연유는 1873 년 일본 명치왕과 서향융성이 아래와 같은 청국 동북 지리의 동쪽으로의 확산.조작과 그 결과 이조선 지리 축소.조작이 있었던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채호가 고대의 요하를 란하라 한 이유는 일본놈들이 뜬금없이 고대부터 당시까지의 요하를 란하로 부른다는 뜻이였을 것입니다. 신채호도 일본놈들이 왜 요하를 란하라 하는지는 짐작했겠지만 어떠한 수법을 썻는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어쨋든 당시의 란하가 요하이기 때문에 한나라가 설치한 요동군도 당연히 당시 일본놈들이 부르기 시작한 란하 곧 지금의 란하 란하 중류 동서쪽 양변에 설치되었다는 얘기이고 패수는 당연히 요동군의 동쪽 끝 바깥 지역을 흘렀으니 그곳은 1911 년 멸망한 청국이 설치한 해성현 지역이고 그곳을 흐른 헌우락 곧 당시의 청국 어니하라 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역시 1910 년대의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입니다. 즉 계연수는 패수를 당시의 란하라 하여 약간 과장되게 추정하였지만 신채호의 요하 단정의 경우와 같이 당시 청국 영역의 어느 물길로도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콕짚어 명토박은 것입니다.

 

서기전 108 년에 설치했다는 낙랑군은 당연히 청국의 해성현 헌우락 곧 어니하의 동쪽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대략 지금의 작은승덕 동남쪽 지역입니다.

 

 

한편 지금의 개평 지역에 준왕조선의 왕검성이 있었다고 처음 주장한 자는 1930 년대의 정인보였습니다. 정인보는 험독.왕검성.평양성 3 개 지명을 1 개 위치로 잘못 이해하였고 정인보의 주장을 답습한 자가 북조선의 리지린이였습니다. 리지린의 연구에 자극받은 남한의 윤내현은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장성동단인 산해관과 서남쪽에 있는 갈석산 지역이라고 하였습니다.

 

낙랑군 설치로부터 무려 380 여 년이나 지난 서기 265 년 조위로 부터 선양받은 사마씨의 진晉이 원래 위치의 낙랑군을 유지하지 못하여 서남쪽 후방인 요하의 최하류를 건너 장성동단 지점이며 갈석산이 있는 요서군의 남쪽 지역으로 쫓겨나 간신히 낙랑군 태수 도장이나 건사한 자들이 거처한 곳을 지목하였으니 말이죠. 명백한 실수입니다.

 

지금의 갈석산과 진장성 동단 지역은 준왕조선의 왕검성 남쪽에 있었던 마한.백제의 흥망지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실수에 더해서 정인보.리지린 및 윤내현 등은 1873 년 경부터 일본 명치왕과 서향융성이 청국 직예.봉천.길림.흑룡강 등 4 성 지역의 지리를 동쪽으로 최소 500 리에서 최대 만 여리 까지 뻥튀기 조작질한 내용을 모르고 지금의 중국전도 표시와 똑같은 일본육군참모부에서 습작한 조작지도를 토대로 주장한 셈이니 안타깝고도 너무 한심합니다.

 

물론 대한반도 평양 지역이 패수.왕검성 등이라 주장하는 이병도 등이나 지금의 노태돈.송호정 등등은 서국 정사급 지리지 기록의 주요 의문점들을 깨끗하게 묻어두고 일본놈의 지리 조작질 결과를 역사지리의 진실로 받아들인 민족반역자들이고 시궁창쓰레기 개잡것들입니다.

 

어쨋든 2 개 지명에 불과한 패수.왕검성 즉 낙랑군 설치 위치 추정조차도 설왕설래하는 대단한 한국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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