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Hi-story]

김부식이 홀대한 가야, 유네스코는 왜 세계유산으로 대접했을까입력 : 2023.09.24 08:00

히스토리텔러 기자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9240800021


 

 

히스토리텔러 이기환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한반도 남부 중앙 지역에 산재한 고분군을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가야로 인식합니다. 아래는 그 주요 기사입니다.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 제왕의 사적을 기록한 ‘본기’에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는 마련했지만 <가야본기>는 빼놓았다. 그래서 <사국사기>가 아닌 <삼국사기>가 되었다.

 

다만 ‘신라본기’에 종종 ‘가야국’ 이야기를 끼워 넣었습니다. 기원후 77년(탈해왕 21) ‘가야와의 황산진 전투’를 시작으로 “지원군을 보내 가야를 공격하는 포상8국을 물리쳤다”(209), “가야가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212)는 기사가 보입니다.

또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을 격퇴했다”(481), “가야국 왕이 혼인을 청했다(522)”, “법흥왕이 변방 순행 중 가야국 왕을 만났다”(524)는 내용도 있네요. 급기야 “532년(법흥왕 19) 금관국왕 김구해가 항복했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김구해는 김유신(595~673)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이후 “554년(진흥왕 15)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562년(진흥왕 23) 9월 배반한 가야를 토벌했다”는 가야의 멸망소식을 전합니다.

 

<삼국사기> ‘잡지·지리’는 ‘김해소경’을 설명하면서 ‘금관국’의 역사를 요약 소개합니다.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가락국 혹은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10대 구해왕에 이르렀고, 532년 항복하여….”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전은 “김유신의 12대조인 수로왕이 기원후 42년 가야를 건국하고, 후에 금관국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부연설명 했습니다. 제법 구체적이죠. 금관가야 만이 아닙니다.

‘대가야국’ 이야기도 <삼국사기> ‘잡지·지리’에 나옵니다.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멸망시키고….”

 

이상하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10대 500년 이어간 금관국과, 16대 520년 존속한 대가야가 분명히 존재했죠.

그쯤되면 ‘금관국본기’, ‘대가야국본기’ 등은 아니더라도 ‘가야본기’ 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은 왜 ‘가야’의 역사를 무시한 걸까요. 일반적인 설명은 이거죠.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삼국과 같이 통일된 하나의 고대 국가를 이룬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한반도 남부 중앙 지역이 <삼국사기/신라본기> 기록의 금관국.대가야 영역이였을까요?

<삼국사기> 내용으로 보아 금관국.대가야 등의 영역은 서쪽의 백제와 동쪽의 신라 사이 지역일 수 밖에 없고 그 외라면 당연히 백제.신라의 부근일 것인데 과연 금관국.대가야 영역이 지금의 경상.전라도 지역이였는가라는 말입니다.

 

나는 김부식이 인식한 금관국.대가야 영역은 한반도 남부의 중앙 지역이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왜일까요?

 

백제와 신라의 흥망지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대릉하 서쪽 상류와 동쪽 하류 지역이고 또한 고구려의 서쪽 국경 지역인 한.진.수.당 시기의 요동이 지금의 란하 중류 2 개의 승덕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부식은 고려 송도에서 <삼국사기>를 저술했을 것이고 묘청의 반란군을 서경에서 패퇴시켰을 것인데 그 송도.서경 위치도 한반도 중앙의 개경.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대릉하 중.상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백제 흥망지는 전국시대 연국과 시황의 진 그리고 유방의 서한이 설치한 요동군 동쪽 지역의 남쪽 지역이였고 요동군 동쪽 끝 지역과 이어져 설치된 낙랑군의 서쪽 지역입니다. 요동.낙랑 2 군 위치와 관련하여 대략적이지만 정확한 기록은 중국 정사 <후한서/군국지> 요동.현토.낙랑 3 개 군 주석입니다.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각각 3600 리,4000 리, 5000 리 떨어진 곳이 지금의 란하 중류와 동쪽 강안 지역이였고 그곳으로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및 820 리 길이 열수가 흘러내렸습니다. 신라는 당연히 낙랑군의 동쪽에 위치하였었습니다. 백제.신라가 흥망한 마한.진한 위치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이였고 그 동쪽인 지금의 요하 하류 유역이 진한 영역이였습니다.

 

지리가 그러했기 때문에 <신증동국여지승람/경사>에 마한고지인 백제 강역의 오른쪽 곧 서쪽에는 발해가 있다는 고려 시기의 기록이 수정되지 않고 전해진 것입니다. 이때 한국의 역사가들이 밝혀야 할 것은 당연히 발해입니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券之一 京都上

古朝鮮馬韓之域 北鎭華山有龍盤虎踞之勢 南以漢江爲襟帶左控關嶺 右環渤海 其形勝甲於東方誠山河百二之地也

百濟中葉自漢山而徙居末幾播遷南土 高麗肅宗雖置南京有時來巡 而巳皆不足以當形勝之勝

 

 

위 기록의 발해는 요동군을 경유하는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염난수가 합류한 후 이루어진 만灣이고 이 만이 지금의 란하 최하류였으며 남쪽의 발해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백제 흥망지는 중국 하북성 동쪽 끝 지역을 흐르는 지금의 란하 하류의 동쪽 강안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서진 말인 서기 300 년 경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할 때 백제는 서쪽으로 만灣인 지금의 란하 하류를 건너 요서 지역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 1612 년 명국인 모원의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

 

 

 

그러면 백제의 동쪽과 신라의 서쪽 및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을 가야를 한반도의 남부 중앙 지역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신라 융성기인 진흥왕 시기부터 동남쪽으로 곧 지금의 요동을 거쳐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점거하였을 것입니다. 금관국.남가야.대야국 등이 이 시기에 복속되었지만 그 가야의 남쪽 경계가 지금의 어느 지역까지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사 <후한서><삼국지> 열전 기록에 의하면 3 세기까지에는 대략 한반도 전체가 변진 12 국의 영역으로 설명.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한반도 남부 중앙의 고분군 지역을 가야 영역이라 명토박기에는 서국과 우리 동국의 사서 기록으로는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며 따라서 성급한 결론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백제.신라의 흥망지를 한반도 남부의 서쪽과 동쪽으로 인식하는 것도 무지무식한 해석일 수 밖에 없고 명백한 조작.식민사관일 수 밖에 없고 동시에 동북공정 논리를 선전.홍보하는 짓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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