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월 고침

 

14/ 바. 우수하 들에 세운 임검성

 

 

이조선 숙종 2 년(1676) 북애노인은 <규원사화/단군기.제1세왕검>에서 조선의 건국시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했다. 지금의 만주 길림땅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 곧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 소밀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예전의 속말수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이 있었고 이들이 속수의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대大씨가 일어나는 길잡이가 되었다. 말갈이란 옛날 숙신의 후예이며 또 단군의 자손이다. 소밀.속말.속말은 모두 소머리란 뜻이며 음이 서로 비슷하다.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거의 와전되었으나 그 뜻은 잃지 않았다.

於是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 牛首河之原 曰任檢城 今滿州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末之水 及大氏之興 爲其先駈 蓋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 蓋蘇密涑沫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일연국사가 1280 년 경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삼국유사/기이.고조선.왕검조선>에도 위와 비슷한 내용이 전해진다.

 

<위서>에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고와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에는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란 이가 있어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었다. ...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고 한다. 그리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가 즉위한 지 50 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년이다. 그러니 50 년은 정사요 경인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또한 왕검조선이 도읍을 옮긴 연혁도 설명되어 있다.   

 

<규원사화>

우수하 가에서 산 지 10 년이 되어 도읍을 백산 남쪽, 패수의 북쪽으로 옮겼다. 이곳이 평양이며 제 2 의 임검성이다. 지금의 속말 땅은 들이 넓기는 하나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 농사짓기가 남쪽 땅보다 좋지 않았다. 또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남쪽과의 교통이 몹시 불편했다. 이것이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다. 청평이 `단군 때에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겨 나라를 새롭게 했는데 두 번째 천도는 패수浿水 북쪽, 곧 발해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가 바로 그곳이다`고 했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 浿水之北 曰平陽卽第二任儉城也 蓋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 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綠府地 神州是也

 

<삼국유사>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 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그는 일천오백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렷다.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는 천구백팔세였다고 한다. 

 

그러면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의 첫도읍이라는 북애노인의 임검성.소밀성이나 <위서>의 아사달, <고기>의 평양성 위치는 대체 어디일까? 

 

우선 북애노인이 비정한 만주 소밀성은 임검성.아사달.평양성 등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초라 할 수 있다.  아래는 중국 25 번째 정사 <청사고/지리지> 길림성 쌍양현 기록이다. 

 

雙陽縣 省西195裡 明依爾們蘇完河二衛 宣統二年 析吉林西界長春東界伊統北界置 治蘇斡延 ...西南黑頂子 南土頂子將軍嶺光僻山 雙陽河出焉 東南驛馬河 自盤石緣界 合杜帶雙陽放牛溝河入長春 西北霧海河從之 舊設站一蘇斡延 官商路三 南皇營 東南瓦家子鎭 竝達盤石 北奢嶺口達長春

 

쌍양현은 길림성 서쪽 195 리 떨어져 있다. 명나라는 이의문.소완하위를 설치했다. 선통2년(1876) 길림 서쪽, 장춘 동쪽,이통 북쪽을 갈라 설치했으며 치소는 소알연이다. ... 서남쪽으로 흑정자, 남쪽엔 토정자.장군령.광벽산이 있고 광벽산에서 쌍양하가 발원한다. 동남쪽에 있는 반석현에서 역마하가 흘러오는데 두대.쌍양.방우.구하 등과 합류하여 장춘으로 흘러간다. 서북쪽에서는 무해하가 흘러와 합류한다. 옛참은 소알연 하나가 있고 세 개의 주요도로는 남쪽으로 황영, 동남쪽으로 와가자진을 지나 반석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사령구를 지나 장춘에 이른다.

 

치소가 소알연이고 소완하가 흐른다는데 소알연.소완의 음이 혹 소밀.소머리.속말.우수하 등의 음이나 뜻이 같거나 비슷한지 여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남쪽에 있다는 황영皇營은 의미심장하다. <청사고/지리지> 직예.봉천.길림 3 성 지역에서 황제 황皇 글자를 쓰는 지명이 아예 없을 뿐만 아니라 직예.봉천 지역도 아니고 동북쪽 산 깊은 벽촌인 길림성 지역에서 지명에 남겨질 정도로 황제국을 자처한 국가는 진국발해가 있었고 상고 시대의 왕검조선 정도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쌍양현에서 동쪽으로 195 리 떨어진 길림부는 서남쪽에 온덕형溫德亨 곧 망제산이 있고 장백산을 제사지내는 전사殿祀가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吉林府 ...明烏拉等衛 後屬扈倫族之烏拉部 本吉林烏拉 一曰烏拉鷄林 又名船廠 淸初隸寧古塔將軍 ...西南至京師2300裡 距

            盛京820餘裏 ...西南溫德亨 亦望祭山有殿祠長白 ...東南松花江自額穆入 右合海靑溝 左溫德亨河 ...城北70裡本烏拉

            國 ...太祖先後克其宜罕山.臨河 ...遂平之 柳邊四圍長622裏 ...曰柳條邊 亦新邊 ...

 

또한 쌍양현에서 서쪽으로 45 리 떨어진 장춘부는 옛 부여국 땅이라 기록되어 있고 길림부에서 서북쪽으로 360 리 떨어진 농안현은 옛 부여국 도읍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長春府 ...省西240裡 古扶餘國地 明初三萬衛 後屬蒙古科爾沁部 ...南伊通河...東驛馬河自雙陽緣界...在府西北與東淸接

           日俄戰後 長春以北屬我之東淸 以南屬日本南滿鐵道會社 俄站寬城子曰長春驛 商埠 光緖31年中日約開

農安縣 ... 省西北三百六十裡 古扶餘國都 ...

 

또 길림부에서 서남쪽으로 280 리 떨어진 이통주는 발해 곧 진震국 장령부 땅이라 한다. 

伊通州 ...省西南280裡 渤海長嶺府地 ...又西小伊通河自奉天東平錯入 爲新開河入懷德 太平下從之 又西  東遼河自西豊入

           右合大小雅哈河入奉化 昭蘇太及條子下亦入焉 左納陽斯河一曰赫爾蘇河 ...又西淸河入爲葉赫河 入開原 ...北達長春

           ...西赫爾蘇站達奉天奉化 西南蓮花街達昌圖

 

결국 길림성의 쌍양현.장춘부.길림부.이통주 등의 지역은 왕검조선, 부여, 진국발해 등 영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서남쪽으로 경사 곧 지금의 북경까지 2300 리, 성경 심양 승덕현까지는 820 리  떨어져 있는 길림성.부 위치는 어디인가? 

 

 

- <성경통지>에 실린 <성경지여전도-이하 성경도>

 1684 년 청국인 동병충 등이 편찬하여 1778 에는 아규 등이 수정.증보하였음

 

 

 

위 <성경도>에 묘사되어 있듯 동요하 발원지인 백산대맥 너머 지역이다. 인평대군은 북경을 떠나 요양까지 1540 리를 걸었고 성경 심양은 요양에서 120 리 떨어져 있다고 하니 북경부터 심양까지는 1660 리인 셈이다. 다시 길림부까지는 820 리를 더하여 2480 리가 된다. 결국 180 리 차이는 아마도 요택을 남.북쪽으로 건너는 차이일 것이다.    

 

북애노인의 소알연과 일연국사의 서경을 현 <중국전도>에 표시하면 대략 아래와 같을 것이다. 

 

 

 

 

따라서 일연국사가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경인년에 도읍한 평양성을 지금의 서경이라고 주석한 것은 대실수였다. 서경은 고구려 평양성이였으며 낙랑군의 중심 지역이였고 그 이전은 서기전 3 세기 경의 부왕과 이후 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부.준왕의 조선은 조선 북쪽에 위치하였고 왕검조선에서 단군 제위를 물려받은 단군부여의 남쪽 제후국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북애노인은 일연국사의 평양성.서경 비정을 부정한 것이고 당시 이조선의 국경 바깥 지역인 만주땅 속말강이 흐르는소밀성을 태백산.우수하.임검성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규원사화>가 저술된 1675 년으로부터 약 250 여 년 후 청국인 조이손은 <청사고/지리지>에서 온덕향.망제산.옛부여땅.부여국도.진국장령부.황영 등이 있었다는 길림부.쌍양현.농안현.이통주 등을 설명하였으니 북애노인의 지리 인식이 정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애노인이 속말速沫을 소밀과 같은 음가로 또 우수牛首의 뜻인 소머리로 새긴 것은 탁견이라 생각한다. <청/지>의 쌍양현 치소 소알연은 당연히 소밀에서 파생된 음가일 것이다. 

 

따라서 2004 년 중국 유국상이 발표한 요하문명 발굴 조사 보고서에 언급된 유적.유물은 마땅히 환웅천왕의 신시 곧 고조선과 왕검조선의 유적이고 유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우수하.속말강 지역 신석기문화 유적.유물 발굴지 분포도

  원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1900 년 양수경은 일본이 저지른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변조.위작을 동의하여 자신도 거란.요국 시기의 황하를 변조.위작하였고 이후 1980 년 담기양의 역대국지도에 그대로 이어졌고 이러한 변조.위작 지리가 고대부터 변함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중국의 동북공정 실체다.

 

이러한 지리이기 때문에 국사를 제대로 이해하겠다면 역대 국경 지리를 반드시 검증해야 하는 것이다.    

2024, 3 월 고침

13/ 마. 고려 압록수

 

거의 모든 사람이 고려 시기나 이조선 시기의 압록수가 같다고 인식한다. 또 인하대고조선 연구소 윤한택 등의 주장과 같이  고려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였고 고려 천리장성도 지금의 요동 철령 부근에 쌓은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 근거로 <삼국유사/흥법> 순도조려 기록을 거론한다.   

 

按麗時都安市城 一名安丁忽 在遼水之北 遼水一名鴨淥 今云安民江

 

그러면 과연 고려 압록수가 지금의 요하였으며 또 이조선의 압록수도 지금의 요하였을까? 아래는 고려 말 명국에서 철령위를 압록강 가까이 설치하는 것에 대한 권근의 진정 내용이다. 

 

권근의 철령.쌍성 관련 진정전 陳情箋 <동문선 권40>  
신(권근)은 아룁니다.
 홍무 21 년 2 월 15 일에 배신 문하평리 설장수가 경사에서 돌아오니, 호부에서 발행한 성지를 공경히 받들었습니다. `그 철령의 이동.이북.이서가 원래 개원에 속한 것이니 소관 군민은 그대로 요동에 붙이도록 하라.`하였으니 신은 일국의 신민과 더불어 놀랍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우러러 소회를 아뢰는 것입니다.
...

말씀하신 철령 이북은 문.고.화.정.함 등의 여러 주를 지나 공험진에 이르기까지는 자고로 본국의 땅이였는데, 요 건통 7 년에 동여진사람들이 난리를 일으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차지하므로 예왕이 요국에 고하고 토벌하기를 청하여 군사를 보내어 잃은 땅을 회복하게 됨에 함주.공험진 등의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원나라 지정의 초기 무오 년간에 이르러 몽고 보지관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수복할 때에, 본국 정주 반민 탁청과 용진현 사람 조휘가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가서 항복하면서 지금 조정의 요동 함주로 부근인 심주에 쌍성현이 있음을 들어 알고 본국 함주 근처인 화주에 옛날에 쌓았던 조그마한 성 둘이 있으므로, 인하여 모호하게 주청하여 드디어 화주를 쌍성으로 잘못 일컫고, 조휘를 쌍성총관으로 탁청을 쌍성천호로 삼았는데, 지정 16 년에 이르러 원조에 주달하여 상항의 총관.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의 땅을 다시 본국에 소속되게 하여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고 인민을 관할하고 있사오니, 반적으로 말미암아 침삭당했던 땅을 대국에 호소하여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지금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로에 속한 것이니, 그대로 요동에 붙이게 하라는 명을 공경히 받들어 보았으나, 이 철령의 산은 왕경과 겨우 3 백리의 거리이며, 공험의 진은 변방의 경계로 한정된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

 

 

즉 명국 주원장이 설치하려는 철령위가 고려 영역인 쌍성이니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설치하려는 철령위 북쪽도 고려 에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을 설치한 지역이였고 동쪽으로 공험진까지도 고려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고려 압록수는 어디에 있었고 윤관이 쌓은 9 성  즉 공험진을 비롯하여 영주.웅주.복주.길주 등의 위치는 어디일까?

 

 

 

주원장이 설치하려는 철령위는 요동 지역이기는 하지만 고려 압록수 변에 바짝 붙어 있는 곳이였기 때문에 반대하였던 것 이니 고려 압록수도 당연히 요동 지역의 철령 동쪽에 흘렀을 것이다. 고려의 반대를 수용했음인지 주원장은 처음 지목한 곳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옮겨 철령위를 설치했다. 

 

결국 고려 압록수는 명국이 설치한 철령 동남쪽에 있어야 하고 그곳에는 심양 승덕현과 요양주 부근을 흐르는 혼하渾河.태자하 두 강이 흘렀으니 고려 국경도 두 강을 잇는 자연적인 경계였을 것이며 혼하.태자하 곧 <한서/지리지> 현토군 고구려현의 요수와 요동군 요양현의 대량수를 고구려에서도 서압록.동압록이라 하였음을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국천왕 기사에서 추단할 수 있다.

 

十三年 ... 令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四部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力由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以卑辭 重禮聘之 ...

13 년(서기191년) ... 너희 사부는 각기 현량한 재하의 사람을 천거하라. 이에 사부는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다. 왕은 불러들여 국정을 위촉하니 안류는 왕에게 말하기를 `소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진실로 대정에 참여하기 부족합니다. 서압록곡 좌물촌에 을파소란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 을소의 손자로서 성품이 굳세고 지려가 깊으나 세상에 쓰여지지 않으므로 농사에 진력하여 살고 있으니 대왕이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안될 것입니다.`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어 겸손한 언사와 중한 예로써 맞이하여 ...

 

결국 명국 지리지에서는 혼하.태자하라 기록된 고려의 서압록.동압록 지역에 쌍성화주와 정주.문주.고주 등이 설치된 것이고 권근으로부터 250 여 년 전인 고려 예종 시기에는 서압록.동압록의 발원지인 동쪽 개마대산을 넘어 동북쪽에 위치한 선춘령까지의 지역을 윤관.오연총.척준경 등이 17 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쫓아내고 함주.영주.복주.길주.영주.공험진 등 9 성을 쌓았던 것이다.

 

아래는 명국 말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다.

 

- <조선도>

주) 명대 모원의가 역대 군사관계 서적 2,000여 종을 모아 1621년(천계 1)에 완성했다. 〈병결평 兵訣評〉 18권, 〈전략고 戰略考〉 31권, 〈진련제 陳練制〉 41권, 〈군자승 軍資乘〉 55권, 〈점도재 占度載〉 96권으로 이루어져 모두 240권이다. 각 부분마다 그림과 해설이 있으며, 사료가 매우 풍부하다.( 출처:다음백과)

 

 

아래는 이해하기 쉽게 추기한 것이다. 

 

 

 

결국 위 <조선도>의 묘사범위는 아래 적색 실선 삼각형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도>를 보면 황하.요하가 묘사되어 있지 않고 심양.요양이 표시되고 그 동쪽에 압록강이 그려져 있어 어리둥절할 수 있겠다. 그러나 권근의 상문과 위 모사도를 보아야 고려 압록수가 요하 동쪽에 흐른 혼하.태자하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평대군이 요택.요하를 건너 우장.해성을 지나 도착한 요양 남북쪽 지역을 흐른 태자하.혼하는 고구려.고려 시기에는 동압록.서압록으로 불렸다는 얘기다. 이러한 연유로 일연국사도 <삼국유사/흥법>조에서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인데 지금은 안민강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이조선 시기들어 압록은 동남쪽으로 450 리 옮겨졌고 고려 압록 지역에 설치된 지명까지도 덩달아 450 리 동남쪽으로 옮겨지며 화주.고주.문주 등은 사라졌고 정주.귀주.인주 등 일부만 전해졌다. 

다. 요서백제

 

인평대군이 산해관을 경유하여 광녕에 이를 때까지의 500 리 로정은 한 시기 요서군의 동쪽 변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올라 요동군 서쪽 지점으로 들어선 것이다. 중국 정사급 지리 기록에는 이곳 요서군 지역에 백제가 설치한 백제군白濟郡 또는 진평군 진평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서/고구려전>

백제국은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모두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고, 백제도 요서를 빼앗아 차지하였다. 백제의 치소를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하였다.

 

<양서>

마한에는 54 개 나라가 있었는데 백제는 그 가운데의 한 나라이었다. 나중에 점차 강대해져 여러 작은 나라들을 겸병하였다. 그 나라는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동진 때 요서.진평 2 군을 빼앗아 차지하여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구당서>

백제의 땅은 장안의 동쪽 6200 리 되는 곳에 있다. 동북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그 나라의 왕이 사는 곳은 동.서 두 성에 있다. 

 

<통고>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진평(당나라 유성과 북평 일대다)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진나라 이래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1 천 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태평환우기>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바로 왜국에 이른다. 진 이래 대대로 번국의 작위를 받았으며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위와 같이 동진 말 즉 서기전 300 년 전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백제군 또는 진평군 진평현은 어디일까? 백제와 요서군이 관련된 아래 기록들을 미루어 보면 대략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서/재기/모용황>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狹湊都城 恐方將?國家深害 宜分其兄弟宗屬 徙于西境諸城 撫之以恩檢之以法        

고구려.백제 및 우문.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를 옮겼는데 의를 내세워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 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럽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종속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위 기록은 서기 344 년 모용선비가 세운 연국 기실참군 봉유가 모용황에게 진언한 봉표 일부다. 모용황은 342 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의 항복을 받고 미천왕 시신과 남녀포로 5 만여 명 및 부고에 있던 수많은 보물을 빼앗았다. 따라서 고구려가 옮겼다는 병세란 당연히 포로일 것이고 백제 역시 요서 지역에 있던 백제 병사일 것이다. 그러면 당시 모용황은 어디에 있었을까? 

 

- <역대여지험요도/전한강역도>, 1900 년경 청국인 양수경 제작 

 

 

 

위와 같이 모용황의 용성 화룡궁은 요서군 유성현의 북쪽이고 서쪽에 백랑수.대릉하가 흘러야 한다. 그리고 위 <험여/전한강역도>는 아래 모사도의 적색 실선 내 지역을 묘사한 것이다.

 

 

 

결국 백제는 당시 바다로 기록된 지금의 란하 하류를 서쪽으로 건너기만 하면 요서군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북쪽에 는 한나라 요동군과 말갈 곧 추정 남옥저와 고구려가 있고 동쪽에는 낙랑군이 있으니 서쪽으로 바다를 건넜던 것이다. 한편 봉유가 봉표를 올리고 2 년 후인 346 년에는 백제와 함께 부여도 등장한다.  

 

 <자치통감/ 진기/ ?종성황제 하 영화2년>

永和二年 春 正月...初 夫餘居于鹿山?百?所侵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 燕王?遣世子俊?慕容?慕容恪慕?根三?? 萬七千??夫? 俊居中指수? 事皆以任恪 遂拔夫?? 其王玄及部落五萬?口 而? ?以玄????? 妻以女 

346 년 봄 정월...처음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모용각,모여근 등 세 장군과 만 칠천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토록하엿다. 준은 영내에서 지시를 하였고 군사의 일은 모용각에게 일임하여 드디어 부여를 소탕하여 그 왕 현과 부락 오만여 구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 현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었다.  

 

녹산에 거주하였다는 부여는 서기 285 년 선비 모용외에게 격파된 부여인 것으로 보이며 백제가 녹산에 있던 부여를 공격하고 재차 모용황이 공격했다는 얘기다. 

 

이후 선비 모용씨 지역은 탁발선비의 공격을 받아 사라진다. 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굴곡지며 흐르는 오르도스 지역에서 굴기한 탁발선비가 3 세기 초 흉노 유연을 격파하고 음산 일대를 장악하여 315 년 대代를 세웠으나 곧 쇠락하였고 이후 다시 굴기하여 낙양.장안 지역을 차지하여 국호를 위魏로 개칭하였다. 조조가 세운 조위曺魏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北魏 또는 원위元魏라 한다. 384 년 동진과 전진이 대결한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한 틈을 메꾸며 화북 전지역을 장악하였다. 이후 북위는 북진하여 요서군 남쪽 비여.유성현 지역으로 쫓겨난 모용선비의 후연을 탈취한 풍발.풍홍의 북연 도성 용성을 격파하고 이 지역에 평주와 영주를 설치했다. 이때 영주 지역에서 생포한 조선민 3 만 구를 남쪽 평주 지역으로 옮기고 조선현을 설치한다.   

 

<위서/지형지>

평주 북평군 

朝鮮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 復置 屬焉昌新 前漢屬涿 後漢晉屬遼東 後屬 有盧龍山

조선현 전후한과 진 시기 낙랑군에 속한 현이고 후에 폐현됐다. 432 년 조선민을 비여현으로 옮겨 다시 설치했고 창신현을 병합했다. 창신현은 전한 시기 탁군 속현이였고 후한.진 시기에는 요동군 속현이였다가 후에 조선현에 병합되었다. 노룡산이 있다. 

 

위 기록의 조선민은 선비족 모용외.모용황에게 끌려왔던 부여.고구려.백제의 백성일 것이다. 조선현 위치는 청 말기 1900 년 경 양수경이 편찬한 <역대연혁지도/북위형세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역대연혁지지도/북위형세도> 1900 년 경 청국인 양수경 

 

 

 

아래는 1980 년 담기양이 편찬했다는 <중국역사지도집/동진16국남북조> 추정도다. 

 

 

 

 

 

두 추정도에 표시된 난수濡水.란하와 진장성 경유지와 동단 묘사는 대략 중국 정사 기록과 일치한다. 의외라 생각되겠지만 당연한 것이다. 즉 양수경 이후 현재까지 란하 유역만을 묘사할 때 만큼은 일본의 지리 변조.이동 사실을 묵인하여야 하고 변조 후의 지리가 고대부터였다는 주장 곧 동북공정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중국인으로서도 원래의 란하 유역 지리를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 <중국전도>에는 삭제되어 있는 원래의 난수.란하와 유역의 지리를 대략이나마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누차 제시했듯이 원래의 란하와 일본 변조, 중국 묵인한 지금의 란하는 아래와 같다. 

 

 

 

 결국 1900 년 <험요도>를 간행한 양수경이나 1980 년 <중국역사지도집>을 간행한 담기양 등도 북경 이동 지역의 전통적인 유주.평주.영주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요서백제 위치와 관련된 <요사/지리지>중경대정부 서문 기록을 보겠다. 

 

中京道大定府 虞爲營州夏屬冀州周在幽州之分 秦郡天下是爲遼西 漢爲新安平縣漢末步奚居之 幅員千裏多大山深穀唨險足以自固魏武北征從兵大戰 降者二十餘萬 去之松漠 其後拓拔氏乘遼建牙於此 當饒樂河水之南溫兪河水之北 唐太宗伐高麗 駐蹕於此 部帥蘇文從征有功 奚長可度率衆內附 力量饒樂都督府 咸通以後挈丹始大 奚族不敢復抗 太祖建國...중략...有七金山馬孟山雙山松山土河 統州十縣九 大定縣白( )故地...

중경도 대정부는 우 시기에는 영주, 하 시기는 기주, 주 시기에는 유주라 하였고 진 시기의 군제 하에서는 요서군이라 하였으며 한 시기에는 신안평현으로, 한 말에는 해족이 거주하였다. 폭원이 천 리에 이르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험하여 지키기가 쉬웠다. 위나라 조조가 북벌하여 큰 싸움에서 20 여만 명을 포획하니 송막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탁발씨가 지휘소를 세웠으니 요락하수의 남쪽이며 온유하수의 북쪽 땅이다. 당 태종이 고려를 침공할 때 주필하던 곳이였고 당시 부의 우두머리 소문이 이 전역을 종군하여 자못 공이 있었다. 해족의 장 가도가 족속을 이끌고 내부하니 살펴 요락도독부를 맡겼다. 함통(860~873) 이후 거란이 세력을 키우니 해족은 다시는 항거하지 못했다. 태조(907~925)가 건국하고....중략....칠금산.마맹산.쌍산.송산이 있고 토하가 흐르며 10 주와 9 현을 통할한다. 대정현은 옛 백( )의 땅이다... 

 

 

위와 같이 거란.요국의 중경 대정부 치소인 대정현이 옛 白( ) 땅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옛 백( ) 땅`의 괄호 안은 대체 어떤 글자가 합당할까? 서기전 202 년 전한부터 916 년 거란.요국 건국까지 1100 여 년 동안 요서군의 북쪽 관내 지역에 `백( )`이라는 종족 혹 국명은 백제百濟 외에는 없다. 즉 백제군이고 요서백제이고 진평군진평현이다.  

 

이번엔 <명사/지리지> 북평행도지휘사사 대녕위 대정현 기록을 보자.  

 

<명사/지리지> 北平行都指揮使司 

本大寧都指揮使司 洪武29年9月置 治大寧衛 ...領衛10.....西南距北平布政司八百裏 ...  大寧衛...治大定縣 ...改左右後3衛爲營州左右中3護衛...南有土河...  會州衛   ...西北有馬孟山...土河之源出焉 下流合於漌河 又南入於遼水...

북평행도지휘사사 본래 대녕도지휘사사였고 1396년9월 설치. 대녕위에 치소가 있으며...10 개 위를 통령하고...서남쪽으로 북평포정사까지 거리는 800 리이다  ... 대녕위 ... 대정현에 치소가 있고 ... 좌.우.중 3 개 위를 영주좌.우.중 3 호위로 개칭 ... 남쪽에 토하가 있고 ... 회주위 ... 서북쪽에 마맹산이 있다 ... 토하의 발원지이며 하류는 근(潢의 오기)하로 합쳐지고 또 남쪽으로 흘러 요수로 들어간다.

 

청국 정사에는 대정현.대녕위와 관련된 대녕성이 기록되어 있다.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승덕부

평천현  府東150裡 ...老合河古託紇臣水 俗省曰老河 出喀喇沁右翼南190裡永安山 ...又東北合昆都倫河入建昌 大寧城東北80裡 州判駐 ...

열하 승덕부에서 동쪽으로 150 리 떨어져 있다. ... 노합하 곧 옛탁흘신수이며 속칭 노하가 객라심우익 남쪽 190 리 떨어진 영안산에서 발원한다. ... 또 동북쪽으로 흘러 곤도륜하와 합류한 후 건창현을 경유한다. 대녕성(은 평천현에서) 동북 8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주판이 통령한다. 

 

결국 <요사/지리지>의 옛 백( )땅이라는 대정현 위치는 명 시기 북평행도사사.대녕도사사에 속한 대녕위.영주호위 치소인 대정현이고 그 위치는 청 시기 직예성 승덕부 평천현에서 동북쪽으로 80 리 떨어졌다는 대녕성일 수 밖에 없다. 한 시기 요서군 지역과 요.명.청 시기 대정현.대녕위.대녕성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고지도로는 일본 육군참모부 간행했을 것으로 보이는 아래 <왜황도>다.

 

 

 

 

위 고지도를 통하여 조조에 이어 탁발선비의 북위가 해족을 공격하기 위해 지휘소를 세웠다는 요락하수.온유하수는 아래 기록과 같이 청 시기 직예성의 적봉직예주와 열하구 승덕부 사이에 흐르는 영금하와 열하임을 알 수 있고 노합하와 대릉하가 동북 방향으로 흘러 각각 황하 중류와 황하 하류로 흘러든 정황도 충분히 구별.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적봉직예주 ...西南距省治1320裡...領縣1 潢河自圍場入 州北200餘裡之巴林旗 東南老哈河 自平泉逕東南隅 納伯爾克河 

                   北入建 英金河古饒樂水...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인 보정부까지는 1320 리이다. ... 거느리는 현은 하나이다. 황하는 적봉에서 북쪽으

                   로 200 여리 떨어진 파림기 위장에서 흘러오며 동남쪽에는 평천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백이극하를 받아들인 노

                   합하가 있는데 북쪽으로 흘러 건창현으로 흘러들어간다. 영금하는 옛 요락수인데... 

 

승덕부  ...康熙42年(1702) 建避暑山莊於熱河...西南省治780裡...熱河古武列水...欒河自欒平入合之

                강희42년 피서산장을 열하에 세웠다. ...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까지 780 리다. ... 열하 곧 옛무열수가 흐른다.

                란평에서 흘러오는 란하로 합류한다.  

 

 

청 시기의 대릉하 곧 한.당 시기의 백랑수 중류 남쪽 지점이 한 시기 요서군의 북쪽 지역에 설치된 유성현이였고 전연 모용황은 용성현으로 개칭하고 화룡궁을 쌓은 곳이다. 또한 명 시기 대녕위를 영주호위로 개칭한 연유도 북위가 이곳 화룡궁.화룡성이 있는 유성.용성현에 영주를 설치하고 영주와 창려군의 치소로 삼은 전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서/지형지>  영주營州

治和龍城 ... 領郡六 ... 昌黎郡 ... 龍城(縣)眞君八年倂柳城... 建德郡 ... 廣都(縣)眞君八年倂白狼 ... 遼東郡 ... 襄平(縣) ... 有靑山 ... 樂浪郡 ... 治連城 ... 帶方(縣) ... 冀陽郡 ... 平剛.柳城(縣) 營丘郡 ...

 

북위가 설치한 영주에는 창려.건덕.요동.낙랑.기양.영구 등 6 군이 속했고 창려군은 한 시기 요서군 유성현을, 건덕군의 광도현은 한 시기 우북평군 백랑현이였을 곳을 병합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사/지리지>에서 대정부 대정현 지역을 요서군 지역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하여 어양군을 흘러내린 고하의 하류에서 동쪽으로 난수.란하까지 이어지는 인위적으로 개통한 신하로 흘러드는 봉대수의 발원지인 신안평현이라 설명한 것은 오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후금.청국을 세운 만주족이 한족 명국을 멸망시킨 후 편찬한 <만주원류고>에도 요서백제지에 대한 기록을 취합.분석해 놓았다.   

 

<흠정만주원류고> 부족3 백제

<통고>에는 또 `남쪽으로 신라와 접해 있다`고 하고, <당회요>에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른다`고 하였는바, 백제의 지경을 상고해 보니.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금주.의주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해.개에 걸쳐 있고, 동남쪽으로 조선의 황해.충청.전라도의 제도에서 끝이 나,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쭉하다. 따라서 유성과 북평을 기준으로 신라가 있는 곳을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게 되지만 경상과 웅진을 기준으로 이를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있게 된다. 또 북위 때 백제가 물길과 공모해서 힘을 합해 고구려를 취하려고 했던 것을 보더라도 동북쪽이 역시 물길과 인접해 있었던 것이다.                                                                                             <흠정만류원류고> 장진근 역주 146 쪽

 

위 기록과 같이 18 세기 말의 만주족은 요서백제 위치를 <요사><명사><청사고> 지리지에서 설명한 토하.노합하가 동북류하여 황하 중류로 흘러드는 대정현.대녕위.건창현 보다 훨씬 동북쪽인 대릉하.황하 하류 지역인 의주.금주.광녕 지역으로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광녕 등의 남쪽으로 걸쳐 있다는 해.개는 해성과 개평을 지목한 것으로 이곳은 패.대수의 남족 지역이니 당연히 백제의 초도 위례성.북한성이며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남평양성일 것이다. 

 

결국 거란 역사를 편찬한 몽고족과 만주족이 인식하는 요서백제 추정지는 동.서 방향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어쨋든 5 세기의 위진 남북조 시기의 <송서><양서> 부터 18 세기 말에 편찬된 <만주원류고>까지 대략 1300 여 년 동안 중국 정사급 기록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백제의 요서군 지역 진출과 경략이 망상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백제본기> 개로왕 18 년(472) 기록에는 사사로이 임명한 북위로 보내는 사신의 직함을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라 하였고 그 상표문 중에 `풍족의 사마는 조축의 생각이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천위가 한 번 거둥하면 정벌이 있고 싸움은 없을 것이며 신도 비록 불민하나 온힘을 다하여 마땅히 부하를 거느리고 성풍을 이어 향응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여기에서 말한 대방과 낙랑의 여러 군은 500 여 년 전 한.조위 등에서 설치한 만.우거가 잠시 점거한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 부근의 대방.낙랑군을 말한 것이 이 아니다.

 

개로왕이 언급한 풍족이란 모용선비가 중원에서 쫓겨온 후연을 탈취한 풍발.풍홍의 북연을 말한 것이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 24 년(436) 기록과 같이 북위가 북정하여 북연의 백랑성을 공격하고 승리하자 장수왕은 장수 갈로맹광을 북연 도읍 용성 화룡궁으로 보내 전후 80 여 리에 이르는 풍홍과 용성 호구를 요동을 거쳐 고구려로 데려갔지만 용성 부근에 남은 북연 백성이 조축의 생각이 있고 즉 주인인 풍홍을 따를 것이고 낙랑의 여러 군이 고향을 생각한다는 것 역시 용성 부근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의 위시한 여러 군 백성들이 옛 풍홍을 잊지 않아 북위를 맞이하려는 군세가 상당하니 속히 용성으로 군사를 보내 고구려 영향력을 말끔하게 제거해달라는 얘기다. 

 

결국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 지역에서 굴기한 백제는 서진말인 서기 310 년대 부터 서쪽에 있는 바다 곧 지금의 란하 최하류를 건너 요서군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344 년에는 선비족 모용황 도성인 용성에 부여.고구려와 함께 포로 신분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436 년 풍홍이 고구려로 납치된 후로는 풍홍의 화룡성 지역까지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대방 외 여러 군을 설치하였을 것이다. 

 

이제 동성왕 10 년(488년) 기록을 보자.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위나라가 보낸 병사가 우리를 공격했지만 우리에게 패했다.

 

백제가 북위 병사를 패배시켰다는 기록인데 마땅히 북연 풍홍의 도성 용성.화룡궁 지역을 포함하여 서남쪽에 있는 대정현.대녕위.대녕성 지역까지를 차지한 요서백제의 기사다. 탁발선비 북위는 요서군의 북쪽 지역 유성현 일대의 모용선비 지역까지만 정벌하였을 뿐이지 고구려 영역은 커녕 요택을 건너지도 못했다. 

 

아래는 요서백제와 관련한 선학들의 인식이다.

 

신경준 (1770년 與地考)
최치원이 당나라 대사시중에게 보내는 시에 나오는 백제가 대륙 동해안을 뒤흔들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백제의 백제의 요서 영유는 사실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누락된 것이라고 봄


신채호 (1931년 조선상고사)
근구수왕때 중국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 등의 지방을 점령하였던 것이며 북조계의 사서에 기록이 없는 것은 북조사관들의 태도 때문임. 백제가 멸망할 때에도 요서에 백제군이 있었다고 봄.

 

김세익 (1967년 력사과학 , 1991년 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
백제의 요서진출을 3세기 말로 보고, 6세기 초중엽에 걸쳐서 요서지역에 진평군을 두고 다스렸고,
백제군의 위치는 대릉하, 소릉하의 하류유역에서 란하의 하류유역으로 봄.

 

 

 

라. 월지장

 

최치원과 신채호는 백제가 서국의 동해안 곧 산동.강소.절강 등의 해안 지역을 점령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 인식한 것이다. <구당서>에도 백제의 땅이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 월주越州도 강소.절강 지역일 수는 없다.

 

<청사고/지리지> 기록에는 직예성 준화직예주 풍윤현에 월지장越支場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豊潤 ...州東南百裡 改예同玉田  海南二百裡...薊運河自玉田緣界...越支場 南百裡 大使駐...

풍윤...(준화직예)주에서 동남쪽으로 100 리 떨어진 곳이다. (옥전과 같이 고쳐 예속시켰고)? 남쪽으로 200 리 떨어져 바다가 있고 ...계운하가 옥전 부근 경계에서 흘러온다. ... 월지장은 남쪽으로 100 리 떨어진 곳인데 대사가 주재한다.

  

풍윤현에서 남쪽으로 100 리 떨어지고 대사大使가 머무른다는 월지장越支場은 발해 연안의 습지대고 대략 지금의 당산 부근으로 보인다. 월지장은 청국이 주.현 지역 내에 설치한 시설 관명인 주판州判.통판通判.주부主簿.순사巡司.유격遊擊.부장副將 등과는 성격이 판이한 대사大使가 주재駐在하였다. 아마도 고대부터 전해지거나 특수한 직무와 관련된 직명으로 보이며 월지장 위치도 요서백제지와도 멀지 않다. 

 

아마도 <구당서>의 그 월주일 것이다. 

 

2024, 3 월 고침

 

가. 개평蓋平.백제위례성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도 기록이다.   

 

京都上

古朝鮮馬韓之域 北鎭華山有龍盤虎踞之勢 南以漢江爲襟帶 左控闢?嶺 右環渤海 其形勝甲於東方 誠山河百二之地也 百濟中葉自漢山而徙居未幾播遷南土 高麗肅宗置南京 有時來巡...

옛조선과 마한 강역이다. 북쪽 진 화산은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형세이고 남쪽은 한강이 옷깃처럼 띠를 이루고 있고 왼쪽은 ?령이 관처럼 막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발해가 둘러쌓아 그 형승은 동방에서 이루어진 백두 곳의 땅 중 으뜸이다. 백제 중엽 한산에서 남쪽 땅으로 옮겨갔는데 고려 숙종이 남경을 설치하고 때마다 순행했다.

 

한국인들은 위의 경도를 지금의 서울로 이해한다. 또한 서울 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을 고대국 백제의 한수라고, 또 서울 지역이 마한 땅이였다고 즉답한다. 그런데  왜 <승람> 기록에는 서울 오른쪽 곧 서쪽에 발해가 있다고 하였을까? 서해西海 또는 황해黃海를 발해라고도 생각했다는 얘기인가? 과연 지금 서울이 고려 시기 남경이였는가?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기록을 보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이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해변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열 사람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거하고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혔으니 천험지리가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을 정함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드디어 아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대浿帶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 2 년 봄 정월에 왕은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와 연접해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거짓이 많으니 마땅히 무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쌓아서 막고 지킬 계획을 세우시오`하였다.

... 4 년... 가을 8 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어 수호하였다.

... 8 년 봄 2월에 말갈적 3000 명이 위례성을 포위해 오니 왕은 성문을 닫고 출전하지 않았다. ...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난날에 빙문과 우호를 맺어 한집안같이 여겼는데, 지금 우리 땅 가까이에 성.책을 세우니 혹시 잠식할 모의가 있는 것이 아니오. 만약 구호를 변치않아 성을 헐고 책을 부수어버린다면 의심을 할 바 없으나 그렇지 않다면 한 번 싸워 승부를 결정합시다`하니 왕은 회답하기를 `험을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니 어찌 감히 이로써 우호에 변함이 있겠는가 마땅히 집사는 의심하지 마시오. 만약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출동한다면 소국도 역시 대응할 것이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더불어 화평을 잃게 되었다.

10 년 가을 9 월에 왕은 사냥을 나가 신록을 잡아서 마한으로 보냈다. 겨울 10 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구하니 왕은 군사 200 명을 보내어 곤미천 위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

11 년 여름 4 월에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책을 습격하게 하여 쳐부수고 100 여 명을 죽이거나 약탈하였다.

...13 년 ... 여름 5 월에 왕은 신하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서 강토를 침략하므로 편한 날이 없는데 하물며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편안치 않아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할 것이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니 토지가 매우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하여 길이 안전할 계책을 도모할 것이다` 하였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 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를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였는데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에 한하며, 서로는 대해에 이르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 월에 성궐을 세웠다. 

14 년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 월에 왕은 부락을 순무하여 농사를 권장하였다. 가을 7 월에 한강의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주1)

 

 

위와 같이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수시로 침입하였고 동쪽에 있는 낙랑군과도 껄끄러운 관계였다. 첫도읍 위례성 북쪽에 는 패수.대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한수가 있었다. 얼마후 온조왕은 낙랑군을 피하여 한수를 건너 기름진 땅으로 천도했다. 당시 강역은 북쪽은 패수부터 남쪽으로 웅천까지, 서쪽으로는 대해, 동쪽은 주양까지라 한다. 그러면 서쪽 대해는 발해일까?  

 

한국역사학계는 당연히 발해를 오기라고 주장할 것이고 한수는 지금의 한강이라고 단정할 것이다. 학계가 그렇게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와 이유는 아마도 비류.온조 형제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건넜다는 패수.대수를 한반도 평양을 흐르는 대동강과 예성강이라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2000 여 년 동안의 중국 정사 기록에도 패수가 면면히 기록되어 있다. 즉 중국 영역에 패수가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 패수가 바다로 흘러들었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상은 한.당 시기의 염난수였으며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되어 불린 요하의 하류인 만灣이였고 그 염난수.요하는 지금의 란하 위치를 흘러내렸다. 따라서 요동군 동쪽 경계 바깥 지역이고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에 흐르는 패수는 지금의 한반도 대동강일 수가 없다. 마땅히 지금의 란하 하류의 동쪽 작은 지류였다.      

 

 

 

 

그 패수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패수는 평양의 대동강이니 본래 상흠의 <수경>에는 잘못이 없었는데, 역도원이 잘못 의혹을 만들어서 후인으로 하여금 따로 다른 물을 찾게 했다. ...연나라가 조선과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고 했으니, 만일 대동강을 패수라고 한다면 어찌 다시 조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왕검은 평양이니, 위만이 대동강을 이미 건너서 평양에 다시 도읍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것이 이미 분명하지 않은가? ... 증지는 지금의 증산현이요, 염난수는 지금의 파저강이며, 서안평은 용만에서 물 건너 땅이니, 옛 현의 이름이다. 백산은 옛 개마대산이니 우리 나라에서는 백두산이라고 했다. 반고가 지은 <조선열전>에서는 <사기>의 글을 그대로 써서 개정한 것이 없으나 <지리지>를 지으면서 비로소 두 물을 구별했으니, 이는 대개 그 학술이 상흠의 연원과 같은 까닭이다. 장안은 조선의 습수와 산수와 열수가 있으니, 세 물이 합해서 열수가 되었다고 했다. 

 

위는 장지연이 <임나고><백두산정계비고>를 첨부하고 이민수가 옮겨 출간한 <아방강역고/패수변>의 글이다. 패수를 평양의 대동강이라 했다가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것이 이미 분명하지 않은가라는 글을 과연 정약용의 글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강역고>에 <임나고> 등을 첨부하여 역주한 장지연도 위 글에 이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중동中東 역사에 대동강은 모두 패수라고 했으나, 여기에서 열수라고 한 것은 그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지지>에는 지금의 한수도 세 근원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강릉 오대산에서 나와서 금장강錦障江이 되었고, 둘째는 회양 금강산에서 나와서 소양강이 되었으며 , 세째는 보은 속리산에서 나와 달천이 되었다. 또 임진강과 합류했으니, 열수는 한강인데, 패수가 어찌 두 이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위 두 글에 이어 정체 불명의 어떤 이가 아래와 같이 사서의 패수.대동강 문장을 나열하였다. 

 

이로부터 내려오면서 사전史傳에 기록된 바로는 모두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북사> 고구려가 평양성에 도읍하니, 산의 굽고 돈 것을 따라서 남쪽으로 패수에 임했다.

<수서>... 

<당서> 소정방이 패강에서 오랑캐 군사를 물리쳐서 마읍산은 빼앗고, 평양성을 드디어 포위했다.

<일통지> 대통강大通江은 평양성 동쪽에 있는데 옛 이름은 패수로서, 그 가운데에 조천석이 있었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오랑캐 군사를 패강에서 물리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김부식>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겠는가. <당서>에 의하면 평양성은 한 낙랑군으로서, 산을 따라 굽이 돌아서 부곽이 되고, 남쪽으로 패수를 끝으로 했다고 했다. 또한 <지>에 보면, 등주 동북쪽을 바다로 가다가 바닷가의 남쪽 곁으로 패강 어구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의 서북쪽에 이르렀다고 했다. 또 수의 양제가 동쪽을 정벌하면서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창해도군은 배를 타고 1000 리에 걸쳐 패강을 가로질러 멀리 평양으로 나오라.`했으니, 이로써 살펴보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라는 것이 명확하다.

 

 

글 순서로 보아 장지연은 정약용의 압록강 비정에 대해 논리적인 비평을 해야 했는데 중동이라는 정체 모호자를 끌어들어 모두 패수를 대동강이라 했다는 결론을 먼저 내린 후 패수와는 아무 관계없는 장안의 열수 해설을 인용하였고 열수를 한강이라 오판한 것도 모자라 열수는 패수가 아니라며 뜬금없는 결론을 내렸다. 대체 무슨 논증을 이런 식으로 하는가? 게다가 불명한 삼자도 <김부식> 등의 글을 인용하는 것 만으로 대동강이 패수인 것이 명확하다는 결론을 유도하려 하였다.  

 

하지만 정약용은 대동강이 아니라 압록강을 패수라고 주장한 것이고 대동강이 흐른다는 평양 위치도 정약용은 물론이고 이조선 시기의 모든 선학들은 지금의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쌍산자 부근 지점으로 당연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 인식은 당연히 김부식을 위시한 고려 선학들의 지리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패수를 압록강이라 추정한 것은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을 흐른 물길을 낙랑군의 중심 지역을 흘렀을 820 리 길이의 열수로 추정한 것이기 때문에 명백한 오류다. 

 

이러한 지리를 개략적으로 설명한 기록이 양성지 상문 중에 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한도가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겨우 30 일 거리라  하였으니 양성지는 한도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그 한도란 대체 어디서 유래된 것이며 그 위치는 어디였을까? 

 

인평대군은 음력 10 월 29 일 연도 즉 북경을 떠나 삼하현, 산해관, 우장 등에서 쉰 3 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걸어 12 월 1 일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했다. 북경에서 30 일 거리는 봉황성이였고 의주는 32 일 거리다. 결국 한도는 압록강 바깥 명나라 영역에 있었고 동팔참 지역은 아니라는 얘기다. 결국 요양의 북쪽 혹은 남쪽에 한도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한 위치의 한도를 설명한 기록이 뜻밖에도 거란.요국 정사인 <요사/지리지> 동경도다.  

 

<요사/지리지> 동경도

... <大東丹國新建南京碑銘> 在宮門之南 外城謂之漢城 ...

辰州 ...高麗蓋牟城 唐太宗會李世적勣攻破蓋牟城 卽此 渤海改爲蓋州 又改辰州 以辰韓得名 井邑騈列 最爲沖

        會 ... 統縣一 建縣 ...

盧州 ...本渤海杉盧郡 故縣五 ... 漢陽 ... 統縣一熊嶽縣 西至海十五裏 傍海有熊嶽山 ...

海州 ...本沃沮國地 高麗爲沙卑城 李世적勣嘗攻焉 渤海南京南海府 ... 都督沃晴椒三州 ... 太平中大延琳叛 南海城堅守

        經歲不下...

耀州 ...本渤海椒州 故縣五 椒山 ... 巖淵 皆廢 ... 統縣一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一百二十裏

 

.. 대동단국 남경을 새로 설치한 것을 기념한 비명에 궁문 남쪽에 한성이라 불리는 외성이 있다. ...

진주 ... 고구려 개모성이다. 당태종이 이세적과 만나 공파한 개모성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개주를 설치했다가 진주로 고쳤다. 진한에서 따온 명칭이고 마을이 크게 들어서 있고 번창한 곳이며 건안현을 통령한다. ...

로주 ... 본리 발해 삼로군이며 옛 현은 5 이였고 ... 한양 ... 이였다. 웅악현을 통령한다. 서쪽으로 바다까지는 15 리이고 바다 옆에 웅악산이 있다. ...

해주 ... 본래 옥저국땅이다. 고구려 사비성이 있었고 이세적이 공격했던 곳이였으며 발해는 남경남해부를 설치했다. ... 옥.청.초 3 주를 통령하고 ... 태평 기간에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켜 남해성을 견고하게 지켰으니 해가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

요주 ... 본래 발해 초주였고 5 개 현을 다스렸고 ... 암연 등이였고 모두 폐했다. 통령하는 현은 암연 1 개 현이다. 동쪽은 신라와 경계하였고 옛 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 동북쪽으로 해주까지는 120 리 떨어졌다. 

 

 

위와 같이 고구려의 개모성.사비성.평양성, 발해가 설치한 진주.개주.한양현.암연현 및 옥저국 땅이였고 신라의 서쪽 경계였던 지역에 거란도 한성.건안현.웅악현.암연현 등을 설치했다고 한다. 거란.요국은 황하 곧 요동군을 흐르는 1250 리 길이 대요수 유역이 그들의 터전이였다. 진국발해가 쇠약해 지는 기미를 눈치채고 동쪽으로 염난수 곧 요하를 건너 진국발해를 공격하여 결국 무너트리고 한.당 시기의 요동군 요양현에 동경요양부를 설치한 것이다. 결국 거란.요국은 요동 지역의 옛 지명을 습용했음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한성.한양 지명을 사용하지 않았고 <요사/지리지>에는 한성이 백제 도읍이라는 연혁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진국발해가 설치했다는 한양현.암연현과 거란.요국이 설치한 웅악현은 백제의 한성.웅진과 관련된 지명일 것이라는 추정 외에는 달리 연원을 추적할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30 일 정의 한도는  위치는 요양 동쪽 방향의 동팔참 중 7 번째인 봉황성과 요양에서 남쪽으로 요하를 따라 내려가면서 있는 개주蓋州(주2) 남쪽에 설치된 한양.웅악현과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는 옛 평양성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비록 평양성 곁을 흐르는 대동강을 패수.패강으로 잘못 이해했지만 김부식이 언급한 평양.낙랑군.등주.초도.신라서북.창해도 등의 위치도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 지역으로 인식하고 설명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패수는 <삼국사기/신라본기> 성덕왕 34 년(736) 2월 기록에는 패강으로도 기록되었다.

正月... 遣金義忠入唐賀正 二月 副使金榮在唐身死 贈光祿小卿 義忠廻 敕賜浿江以南地

정월에 김의충을 당에 보내어 신년을 축하하였다. 2 월에 부사 김영이 당에서 죽으니 공록소경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돌아오는 편에 칙지로써 패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

 

당 현종이 신라가 진국발해를 공격하면 패강 남쪽 땅을 주겠다는 약속의 이행 선언일 뿐이고 통신라를 이미 패강 즉 패수 남쪽인 거란.요국 강역의 동경요양부 관내 요주 암연현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로써 <한국통사>를 저술한 박은식 서문에 나타난 위례성 관련 내용인데 쌩뚱맞은 것이 아니라 정확한 역사 지리 인식의 산물이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재앙이 닥쳐왔을 때 태어나 나라 망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차마 죽지 못하고 마침내 도망쳐 나왔다. 경술년(1910) 모월 모일 아침에 한성을 떠나 저녁에 압록강을 건너 다시 북쪽으로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가 위례성(慰禮城)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머물렀다. (박은식이 환인현으로 망명한 것은 졸본성-현재 오녀산성일 것이다) 고금을 살펴보니 허전한 느낌이 들고 안타까워 오랫동안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역 땅에 도망와 있으니 사람을 대하기가 점점 부그러워지고 길가 아이들과 시장 사람들조차 모두 나를 망국노라 욕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비록 넓다고는 하나 이런 욕을 짊어지고 어디로 돌아가리오. 때는 혼하(渾河)에 가을이 저물어 쑥은 꺾어지고 풀들은 시들었으며, 원숭이도 슬피 울고 부엉이도 울어댄다.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런 정경을 바라보고 더울 서글퍼져 견딜 수가 없다.

 

1910 년 압록강을 건너 북쪽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 위례성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머물렀다는 얘기가 한반도에서 가능한 얘기이겠는가? 더구나 위례성을 바라본 후 다시 조국땅을 밟았다는 얘기도 없이 곧바로 청나라 봉천성 봉천부 무순현.성경 심양 승덕현.요중현을 경유하여 해성현에서 요하로 합류한 혼하를 바라보았는데?

 

한편 1770 년 대에 편찬된 <만주원류고>에 실린 당 현종 시기 재상을 역임한 장구령(673~740) 문집에 있다는 `여신라김흥광칙` 글이다.   

 

경이 패강에 군영을 설치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은 발해의 요충지와 마주 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록산과도 마주 바라보고 있어 여전히 원대한 계책이요 원래부터 좋은 계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더욱이 저 조그만 발해가 오래전에 벌써 주벌을 모면한 점을 경이 매양 미워하고 있는데 이 점은 매우 가상하다 아니할 수 없다.

                                                                                    <만주원류고/부족4/신라> 장진근역 177 쪽

 

당 시기 요동군 지역을 차지하고 남경을 설치한 진국발해를 남침을 경계하는 신라의 패강 군영은 당연히 백제 초도 위례성 북쪽의 패.대수의 패수에 설치한 군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패수여야만 북쪽의 진국 남경남해부는 물론이고 서쪽으로 요하 하류인 만灣 건너에 있는 당 평주 노룡 지역 곧 한 시기 요서군 비여현 지역을 차지하고 발호한 안록산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요사/지리지> 요주 암연현 기록의 옛평양성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평양성을 표현한 것이며 고구려 장수태왕 시기 점령한 백제 한성을 말한 것이다. 

 

 

 

 

 

주1)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 南行 ... 遂至漢山 ... 十臣諫曰 惟次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唨

               大海 ...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 扶餘 ...

               國家屬於琉留 ... 不如奉母氏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

            13 년 夏 5 月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

            18 년 冬10月    靺鞨掩至 王帥兵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43 년 冬10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다루왕   3 년 冬10月    東部屹于與靺鞨戰 於馬首山西克之 殺獲甚衆

              4 년 秋 8 月    高木城昆優與靺鞨戰 大克 斬首 二百餘級

              7 년 秋 9 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燒百姓廬屋 

             28년 秋 8 月    靺鞨侵北鄙

             29년 春 2 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 靺鞨

기루왕  32년 秋 7 月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49년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救之

초고왕  49 년 秋 9 月   命北部眞果 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10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王薨

 

주2)

<명사/지리지>

蓋州衛 屬遼陽路 洪武四年廢 ... 東北有石城山 ... 又東有駐蹕山 西濱海 有連雲島 上有關 又東有泥河 ... 又西北有梁房口關 海運之舟由此入遼河 旁有鹽場 又東有石門關 西有鹽場 東有鐵場 北距都司二百四十裏

<청사고/지리지>

蓋平 府西南三百六十裡 明置蓋州衛 ... 又西南六十裡有熊嶽防守尉 故遼城也 ... 東棉羊山 縣東南諸山皆發脈於此 西濱蓋州灣 北淤泥河 南蓋州熊嶽河 ... 

<금사/지리지>

葢州, 奉國軍節度使, 下. 本髙麗蓋葛牟城, 遼辰州. 明昌四年, 罷哈斯罕, 建辰州遼海軍節度使. 六年, 以與陳同音, 更取蓋葛牟為名. 户一萬八千四百五十六. 縣四 鎭二. 湯池. 【遼鐵州建武軍湯池縣】 鎮一【神鄉】 建安. 【遼縣】 鎮一【大寧】 秀巖. 【本大寧鎮, 明昌四年陞. 太和四年廢為鎮, 貞祐四年復陞置.】  熊岳. 【遼盧州玄徳軍熊岳縣. 遼屬南女直湯河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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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월 고침

 

나. 개주開州 봉황산

아래는 양성지의 상문 중 일부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2 년(1481) 10 월 17 일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생각건대, 자고로 천하 국가의 사세(事勢)는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혹 알지 못하기도 하고 비록 이미 알아도 또 〈어떻게〉 하지 못하니, 이것이 모두 잘못된 일중의 큰 것입니다. 일을 먼저 도모한다면 어찌 잘 다스리고 오랫동안 안전하기가 어렵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중국이 장차 개주(開州)에 위(衛)를 설치하려 한다 하는데, 신이 거듭 생각해 보니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는데, 산세가 우뚝하고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으며, 3면이 대단히 험하고 1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통하는 이른바 자연히 이루어진 지역이므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고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 태종(太宗)이 주둔하여 고려(高麗)를 정벌하였고, 또 요(遼)나라의 유민(遺民)이 여기에 근거하여 부흥(復興)을 도모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누가 우리 나라와 관계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북쪽으로는 산로(山路)로 심양(瀋陽)·철령(鐵嶺)·개원(開元)을 가리켜 야인(野人)과 연접(連接)하였고,남쪽으로는 해도(海道)로 해개(海蓋)·금복(金復)을 가리켜서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요동(遼東)·광녕(廣寧)·금주(錦州)·서주(瑞州)를 가리켜 연주(燕州)·계주(薊州)로 통하니, 저들에게는 유주(維州)의 이로움이 있고, 우리에게는 한중(漢中)의 세가 있는 실로 동도(東道) 요충(要衝)의 땅입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 <왜청도> 봉황산 부분도

 

 

 

-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편찬한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추정

  소장: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고지도/`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2024, 3 월 고침

9/ 4. 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으로 

 

인평대군은 11월 23 일 요양을 떠나 청국 국경 관문인 책문으로 향했다. 요양에서 봉황성 책문까지 310 리 길은 험한 산길이고 요양에서 의주까지는 450 리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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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 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의주용만관 80/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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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요양부터 의주까지의 전체 로정의 일기다. 

 

23일(정묘)

밤에 큰눈이 내려 행차가 떠나지 못했는데, 평명에 조금 개었다.

돌아갈 생각이 화살 같아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출발을 재촉하여 쌍참(雙驂)을 멍에했다. 사시에 냉정(冷井)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눈이 하늘을 덮어 대낮이 밤처럼 어둡다. 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으나, 한양(漢陽)에서 연산(燕山)에 이르기까지 냉정(冷井)이 중간이 되니 이미 고국에 절반이나 이른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했다. 미시에 떠나 옥상령(玉祥嶺)을 넘었다. 삼류하(三流河)를 얼음 위로 건넜다. 저물녘에 낭자산(狼子山)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는데,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종일토록 눈을 무릅쓰고 길을 걸었더니 인마가 모두 굶주리고 피곤했다. 이튿날 새벽에 큰 고개를 넘을 생각을 하니, 매우 근심스럽다. 초저녁에 역관 양효원(梁孝元)이 진동보(鎭東堡)로부터 돌아와서 소상하게 말했다. 동지사는 오늘 연산(連山)에서 자고 내일 첨수(甜水)에 이른다고 하며, 이어 천서(天書 임금이 보내는 글)와 가신(家信)을 올렸다. 나라가 무사하고 집이 편안함을 자세히 알았다. 마음이 너무나 기뻐서 바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칠 것 같기도 하다. 두 보(杜甫)의 시(詩)에 ‘집에서 온 편지가 만금의 값어치가 있다.[家書抵萬金]’라고 한 것이 실로 빈말이 아니었다.

이날은 아침에 30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24일(무진)

흐렸다가 동틀 무렵에 눈이 개었다.

조반을 먹고 늦게 떠났다. 차량(車輛)과 가교(駕轎)는 험한 곳을 피해서 길을 갔다. 달려서 청석령(靑石嶺) 밑에 이르렀다. 고개 오른편에 암혈(巖穴)이 있고,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의지하여 내려가게 되어 있으니, 이는 바로 석웅황(石雄黃)을 캐는 곳이다. 고갯길은 전부터 험악한 데다가 이제 눈이 말의 무릎까지 차서 개 이빨 같은 악석(惡石)을 가리우고 있는데, 초행하는 사람은 그 험한 것을 알지 못한다. 오시에 첨수참(甜水站)의 북문(北門)에 이르렀다. 동지사 역관(冬至使譯官) 이형백(李馨白)ㆍ김진립(金晉立)이 와서 뵈었다. 성문(城門)에 들어가서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동지사의 일행 중 마부와 말이 먼저 이르렀다. 성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두 상인(商人)이었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른다고 했다. 상고배가 이처럼 혼잡을 이루기는 근래에 없는 일이었다. 해질 무렵에 동지 정사(冬至正使)인 판서 윤강(尹絳), 부사 참의 이석(李晳), 서장관 지평 곽제화(郭齊華)가 와서 만났다. 친구와 만나 다정한 말을 나누노라니 시름에 찬 나그네 회포가 시원하게 풀려짐을 느꼈다. 헤어졌던 수역 지사(首譯知事) 박경생(朴庚生) 이하 사람들이 일제히 와서 뵈었다. 돌아오는 길에 풍윤현(豐潤縣)에서 국화분(菊花盆)을 가지고 올 것을 분명히 부탁했다.

이날 35리를 갔다.

 

25일(기사)

맑음. 이른 아침에 윤 판서 이하가 와서 하직하므로,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것도 몰랐다. 늦게 떠나 돌이켜 보니, 자준(子俊 판서 윤강의 자)의 행차가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자연히 마음이 우울해졌다. 자준의 마음은 필시 나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다. 성 서쪽의 큰 내는 급한 여울인데, 얼음장이 물 위를 덮어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말을 언덕 위에 세우고 막하의 모든 사람, 역졸들까지도 모두 말을 타고 건너게 했다. 사시에 회령령(會寧嶺)을 넘고 벽동 천변(碧洞川邊)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적설(積雪)이 말 배[馬腹]까지 찼다. 저녁에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26일(경오)

맑음. 밤중에 먼저 전사립(田士立)을 책문(柵門)으로 보내어 의주서 맞이하는 인마가 들어오고 있는지 여부를 탐지케 했다.

일찍 길을 떠났다. 사시에 나장탑(羅將塔)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진이보(鎭夷堡)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날씨가 몹시 찼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날이 저물 때 선래군관(先來軍官) 최귀현(崔貴賢)이 하인 강적(江赤)을 데리고 서울로부터 달려와서 천서(天書)와 가신을 바쳤다. 낭산(狼山) 이후로 자주 집 소식을 듣고 또한 고국의 진미를 맛보니 나그네의 회포에 위안이 되었다. 사행(使行)의 많은 사람이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번번이 사고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면하게 되어 상하가 모두 기뻐했다. 유독 홍여한(洪汝漢)이 자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마부(馬夫) 한 사람이 어머니의 상(喪)에 간 것이 가장 가련한 일이었다. 최귀현에게 따뜻한 말로 위안해 주면서 이어 왕복한 소식을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10일에 압록강을 건너 가산(嘉山)에 이르러서, 이면(李㴐)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어서 떠나가지 못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파발을 달려 14일에 입경(入京)했습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하셔서 특별히 술과 음식을 주시고 돌아갈 것을 허락하셨는데, 김여준(金汝俊)은 병이 중하여 서울에 머물러 있고, 혼자서 강적(江赤)을 데리고 16일 다시 서울을 떠나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했다. 저녁때가 되자, 자진(子珍)과 성서(聖瑞)가 와서 임금이 만안(萬安)하심을 하례했다. 서울서 온 감귤(柑橘)ㆍ청어(靑魚)ㆍ은어(銀魚)로 안주를 만들고, 의주에서 보내온 향기로운 술을 잔에 가득 따라 부어 취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변방에서 얻기 어려운 경지였다. 화각(畫角)이 두 번 울리고 인마가 떠났다. 행중에 엄명을 내려 먼저 객점(客店)에 드는 일을 금하였는 데도 이에 따르지 않는 자가 많으니, 너무나 분개할 일이다. 오늘은 비밀히 군관 김여로(金汝老)를 보내어 남몰래 먼저 가서 객점(客店)에 이른 자 14명을 붙잡아 중장(重杖)을 쳤다. 그리고 원역(員役) 중에서 종을 제어하지 못한 잘못으로 장(杖)을 받은 자도 있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 모두 30리씩 갔다.

 

29일(계유)

맑음. 새벽에 떠났다. 8리쯤 앞으로 나갔는데, 부사를 배행(陪行)하는 당상 역관(堂上譯官) 박이절(朴而嶻)이 달려와서 급히 고하기를,“선래군관(先來軍官) 이면(李㴐)의 종이 염초(焰焇)를 수레 속에 감추어 실었습니다. 고용(雇用)한 차부(車夫)는 통원보(通元堡) 사람인데, 좋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장(城將)에게 이 사실을 고발해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좋은 대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했다. 그러나 일이 이미 벌어졌으니, 선후책(善後策)을 강구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요행을 바랄 뿐이었다. 또 5리를 가서 책문에 이르렀다. 먼저 도착한 인마가 모두 책문을 나가지 못하고 한데 모여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교자(轎子)를 책문 앞에 내려놓았다. 성장(城將)이 손에 작은 염초 덩어리 하나를 쥐고서 말하기를 ‘이제 고발로 인해서 금물(禁物)을 이미 적발했습니다. 일행의 짐을 모조리 수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궁극한 곤경에 빠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무슨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좋은 말로 설득하고 있을 즈음에 먼저 온 인마가 모두 샅샅이 수색을 당했다. 그야말로 백인(白刄)으로 서로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금물(禁物)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품목을 일일이 기록하고 연경(燕京)에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마다 실색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내가 생각건대 이는 근년에 없었던 일이므로 그들이 하는 대로 버려둘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인마를 뒤로 물리치고 말안장을 내리고 밥을 짓게 하여 그 형적(形跡)을 감추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역관을 보내서 엄격히 항의(抗議)하게 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갈수록 횡포를 부려 사람으로 하여금 분함을 금치 못하게 했다. 붙잡혀 있는 쇄마부(刷馬夫) 다섯 사람을 교자(轎子) 앞으로 끌어다가 갑자기 중장(重杖)을 치고, 저네들과 다시 말하지 못하게 했다. 광록소경과 성장(城將)이 이와 같은 불평의 기색을 보자 도리어 불안스럽게 여기면서 수색을 늦추고 인마를 나가게 하는 한편 부드러운 낯빛으로 와서 위로하기를, “이 물건들이 비록 금령(禁令)에 저촉되기는 하지만, 가죽은 무두질해서 만든 것이고 금ㆍ은(金銀)은 녹여서 가공(加工)한 것입니다. 대개 중요하기는 하나 그 죄는 중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했다. 다시 광록소경과 작별했는데, 상품(上品) 은장도(銀粧刀)를 예물로 주었다. 채찍을 휘둘러 책문을 나왔다. 이는 필시 만시(灣市)에서 남아 있던 재앙이 억울하게도 사행(使行)에 미친 것이다. 그 노갑이을(怒甲移乙 갑에게서 성난 것을 을에게 분풀이하는 것)하는 소행이 더욱 통탄스럽다. 다섯 죄인은 차원(差員)인 희천(煕川) 원을 시켜 압송해서 가게 했다. 오시에 대룡산(大龍山)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대동(大同)의 우졸(郵卒)이 말 두 필을 끌고 와서 뵈었다. 오늘 아침에 벌어졌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털이 위로 뻗친다. 이것은 실로 요동을 드나든지 20년 동안 일찍이 없었던 치욕이었다. 붙잡힌 다섯 놈은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아침 수색에서 자진(子珍)의 종이 붙잡힌 것을 내가 주선해서 간신히 무사하게 만들었다. 자진이 찾아와서 간곡하게 사례했다. 성서(聖瑞)가 뒤를 이어 와서 일을 상의했다. 상통사(上通事) 최진남(崔振南)에게 일행 속에 금물(禁物)을 감추어 오는 자를 적발하여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10대를 쳤다. 비록 체례(體例)에 의해서 벌이 행하여진 것이지만, 어찌 다만 그의 허물이겠는가. 10여 년을 두고 금령(禁令)을 범한 것이 이제 비로소 발각된 것이다. 관서(關西) 음우(陰雨)의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이 한스럽다. 저녁에 유전(柳田)에 이르러 노숙(露宿)했다. 의주중군(義州中軍) 장우길(張友吉)ㆍ동지(同知) 박희복(朴希復)ㆍ미관첨사(彌串僉使) 장사민(張士敏)ㆍ건천권관(乾川權管) 김수창(金壽昌)ㆍ전 권관(權管) 김준철(金俊哲)이 와서 뵈었다. 의주 포수가 노루 두 마리를 바쳤다. 초저녁에 자진(子珍)이 찾아왔다. 들에 천막을 쳤지만 날씨가 차지 않았다. 노루를 굽고 술을 데워 마시면서 무릎을 맞대고 정답게 담화를 나누다가 밤이 깊은 뒤에 헤어졌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다 같이 30리씩 갔다.

 

1일(갑술)

아침에 눈이 내리고 저녁에 흐렸다.
인마가 밤에 떠나는데, 청마(淸馬) 세 필이 별안간 보이지 않았다. 사면이 모두 다북쑥뿐이니 도적이 있을 리 없다. 괴이한 일이다. 새벽에 떠났다. 오시에 갑목(甲木)의 비석 곁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말 먹이는 사람들이 탕참산(湯站山) 골짜기에서 잃어버린 말을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 곤장을 쳐서 경계했다. 백마(白馬)에 귀양와 있는 사람 김진창(金振昌)은 전에 관하(管下)의 아전이었는데, 와서 뵈었다. 책문에서 붙잡힌 죄인 중에 정범(正犯) 두 사람은 도피했다. 그러므로 차범(次犯) 두 사람을 잡아서 수를 채웠더니 밤낮으로 원통함을 호소했다. 정범을 오늘에야 찾아내게 되어 차범 두 명을 석방했다. 점점 고국에 가까워오니 돌아갈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눈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신시에 삼강을 얼음 위로 건넜다. 과섭차원(過涉差員)으로는, 중강의 북쪽은 옥강만호(玉江萬戶) 이국립(李國立)ㆍ남쪽은 방산만호(方山萬戶) 김윤성(金胤晟)이고, 압록강의 북쪽은 수구만호(水口萬戶) 김천일(金千鎰)ㆍ남쪽은 인산첨사(麟山僉使) 권진명(權震鳴)이었다. 강안에서 만윤(灣尹) 김휘(金徽)가 의장(儀仗)을 거느리고 나와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인마를 점고하였다. 용만의 남문(南門)으로 들어가서 용만관(龍灣館)에 유숙했다. 반년 동안 이역에서 무한한 고생을 하다가 고국땅으로 돌아왔다. 술잔을 기울여서 회포를 푸니, 그 기쁨은 말하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각무차원(各務差員)은, 청북도차원(淸北都差員) 정주(定州) 원 김경(金鏡), 지응차원(支應差員) 선천(宣川) 원 정한기(鄭漢驥), 역마차원(驛馬差員) 어천독우(魚川督郵) 김징(金澄)이다. 참(站) 위에 나와 접대하는 것은 태천(泰川) 원 홍경우(洪儆禹)이다. 부사ㆍ서장관과 함께 계본(啓本 임금께 상주하는 글)을 의논해서 만들었다. 금법(禁法)을 범한 죄인을 용만 옥에 굳게 가두었다. 용만으로 돌아온 일을 상주하는 계본을 보내는 파발 편에 임금에게 올리는 편지와 가신(家信)을 부치느라 새벽 닭이 두 홰를 우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책문에서의 난감한 일도 마무리 짓고 대군일행은 마침내 의주에 도착했다. 

 

가. 동팔참

 

아래는 북경부터 압록강 의주까지 1990 리 로정이 묘사된 고지도 <대청광여도>라 하는데 일본인이 교정하였다 하니 원도와 구별하여 <왜청도>라 하겠다. 

 

- <왜청도> 

   강희년간(1663~1722)에 채방병이 판각한 것을 1785 년 일본인 장구보적수(나가쿠보 세키스이)가 교정.

   영국도서관 소장

 

 

- 연산관 부근

 

주) 1~8 위치는 요양.낭자산.첨수참.연사관.진이보.진동보.봉황성.탕참 등 동팔참 위치.

 

 

 

요양에서 압록강까지 450 리 지역에는 요양.낭자산.첨수참.연산관  4 참과 진이보(통원보), 진동보(사열참), 봉황성(송참.개주), 탕참  4 참을 합하여 팔참이 있었다. 청국 기준인지 동東자가 첨부되어 동팔참이라 하였다. 참站은 사신.상인.행려자들의 숙박 편의를 위하여 설치한 시설이며 탕참은 이조선의 공지 지역이고 책문과 압록강 사이가 길지 않기 때문에 운영되지 않았다.

아래는 동팔참 지역을 거쳐 연경길을 오갔던 선학들의 지리 인식과 감회를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다. 

 

최부 <금남표해록>1488

해주.요동 등지의 사람들은 반은 중국인이고, 반은 우리나라 사람이고, 반은 여진 사람이었다. ... 석문령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 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과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대개 우리 나라 사람과 같았다.

荷谷 허봉 선조 원년(1567) 진하 부사

동팔참의 땅은 산동에 예속되어 요동의 외요가 되며, 산천은 우리나라와 꼭 같아서 준엄한 영과 큰 하수가 많다.

 

김정중 <연행록>

회령령, 회정길, 여기부터 마을 모양과 물맛이 자못 우리 나라와 같은 느낌이 든다. 연산관은 옛 鵝골關이다. 원발점에 들어가 말을 쉬게하고 좌우의 가게를 찾았다. 가는 곳마다 가게 주인이 한 잔의 차를 내어 들기를 권하니, 제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예절이 있다. 문 위 춘첩자가 있는데, `문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복을 받고 호는 동.서.남.북의 재물을 들이다`는 글귀가 우리 나라의 저자문에 붙은 축어와 비슷하다.

권협 <연행록>

분수령 이북의 지세는 북쪽에서 내려와 골짜기의 여러 물이 모두 태자하에 모여서 서쪽 혼하로 들어가고, 분수령 이남의 물은 모두 팔도하로 모였으니, 분수령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김창업 <노가재연행록>

분수령은 평탄하며 서쪽 물은 요하로 들어가고 동쪽 물은 중강으로 들어가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 금주.복주.해주.개주 등 요동의 모든 산은 여기에서 나아간 산맥이다.

 

김순협 <오우당연행록>

대개 송참부터 이 곳(분수령)까지의 120 리 사이는 비록 봉교나 골수와 같이 높고 큰 산들은 없어도 여러 험한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연이어져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도 마을을 열 만한 곳이 없다.

 

홍대용 <당헌연기>

책문은 변방의 황폐하고 궁벽한 지방으로 습속이 유치하고 사나우며, 입고 먹는 것을 오로지 조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행이 도착할 때마다 땔나무 같은 모든 물건의 값이 때를 틈타서 마구 뛰어오르고 방세도 매우 비싸게 받는다. 의주 사람들과는 이웃처럼 친숙하게 지내며 우리 나라 사정을 잘 알고 있어, 이해 타산에 밝고 교활한 것이 모두 우리 나라 풍속 그대로다. ... 북쪽 풍속은 사람을 비켜 세우는 법이 없는데, 오직 봉성 사람들만은 우리 나라 사정을 익히 알고 있어서 성장이 자나갈 때면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소리질러 길 아래로 비켜 세웠다. ... 책문을 열자 수백 명의 청인과 산서 상인이 몰려 나왔다.

유득공 <연대재유록>

책문의 호인은 사납고 거세어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매우 무례한데, 이 두 사람은 사람을 대접할 때에 예의가 매우 정성스럽고 도타우니, 풍속이 변방과 크게 다름을 알겠다.

 

김경선 서장관 <연원직지> 1832

책문에서 영수사까지로 하루 2 참씩 합하여 8 참이 되어 이름지은 것이다. 팔참 사이는 높은 산과 험한 고개, 큰 내와 깊은 숲이 많아 길이 매우 험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수레를 뒤집을 염려가 있다. 대개 그 난립한 산 중간에 널려 있는 들판이 많다. ... 고려촌은 요동들 첫머리에 있는 촌으로 촌가 수십 호가 있다. 동녕위의 옛터로 고려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崔認齋(이름은 晛 1563~1640)의 기록에는 `고려촌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고려말을 하고 차차 자라면서 의상과 관복은 고려 것을 많이 쓴다.`고 했는데 지금 보기에는 촌락이 매우 쇠잔하여 그 사람들이 아직도 고려의 후손인지 알 수 없다. 대개 동서로는 여기서(신요동)부터 산해관까지 이르고 남북으로는 의산醫山에서 시작하여 바다 가까이 이르러 그 길고 넓게 뻗친 것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천지가 큰 것을 알게 된다.

 

요양부터 책문까지는 인평대군 당시에는 청국 영역이였지만 고구려.고려 시기에는 요양 동쪽의 태자하와 북쪽 심양 부근의  혼하를 잇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인 경계선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기록에는 서압록이 보이는데 서압록은 요양 북쪽에 흐르는 혼하였던 것 같고 압록은 요양 남쪽의 태자하였던 것 같다. 

 

이처럼 인평대군이 청국 영역을 지나면서 건넌 요택.요하 및 요동 요양은 지금의 란하 중류와 동쪽 지역이였기 때문에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은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24,3 월 고침

8/ 라) 요하

 

인평대군 시기의 황하가 지금의 어느 지역을 흐르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증하였다고 판단한다. 이제는 요하가 대체 어떤 물길이였는지 살펴보겠다.

 

중국 정사나 정사급 지리 기록에서 후학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요수.대요수.소요수.요하 등으로 불린 물길들이다. 대표적으로 <관자><설원> 기록의 요수, <한서/지리지>의 대요수.요수, <수경주>의 대요수와 소요수 및 <요사/지리지>의 요하 등일 것이다. 

 

사실 요수를 난수로, 대요수를 황하, 염난수를 요하 등으로 개칭하는 것은 지리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고대부터 진시황 시기까지의 요수와 한.당 시기의 대요수 및 송.청 시기의 요하는 국경 지역을 흐르는 일반적인 의미의 요수가 유방의 전한 시기에 동북쪽으로 300 리 쯤, 거란.요국 시기에 다시 동쪽으로 200 리 쯤 옮겨진 것으로 요수.대요수.요하는 전혀 다른 물길이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그 의미는 당연히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진시황 시기 요수가 흐르는 요동군은 지형.지리적으로 남쪽에는 갈석과 진장성 동단이 있고 요수의 최하류가 흘렀으며 동쪽으로는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따라 북쪽으로 오르며 연장성 동단이 있다는 양평 부근까지였으니 남북으로 길고 동서 폭은 좁은 모양이였다.  반면에 전한에서는 갈석.진장성동단 지역을 요서군으로 재편하고 요동군은 진시황 시기의 요동군 북쪽 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명명된 대요수가 흐르는 지역과 동쪽으로 만번한 혹은 진고공지 또는 상하장 지역까지를 포함시켜 요동군을 설치했으니 <후한서/군국지> 요서.요동 2 군 주석과 같이 두 군 치소 사이의 거리는 300 리 쯤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만번한은 서기전 283 년 경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1000 여 리 쫓아낼 때 조선의 서쪽 영역 일부를 점거한 곳인데 전한 초에 그 경계를 약간 후퇴시켜 패수로 정했다는 지역이다. 즉 전한 시기 패수의 서쪽이 요동군이고 그 동쪽은 낙랑군 영역이였다. 

 

한편 이 시기의 지리를 기록한 반고는 이전까지의 요수를 난수濡水 로 새롭게 편제된 요동군 지역으로 흘러내리는 큰물길들을 대요수.염난수.요수 등으로 명명.기록하였다.     

 

<한서/지리지>

요서군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요서군 비여현 玄水出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요동군 망평현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

현토군 고구려현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隧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현토군 서개마현 馬眥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앞에서 대요수.황하에 대해서 설명했으니 현토.요동 2 개 군 지역을 경유하였다는 염난수와 요수가 남았다. 위 모사도에 보이듯이 염난수는 대요수 동쪽에, 요수는 염난수 동쪽에 흘러내렸고 대요수.요수 모두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로 흘러들어갔을 수 밖에 없다. 즉 <한서/지리지>에는 대요수 길이를 1250 리라 하였고 대요수는 요동군 안시현, 염난수는 요동군 서안평현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되었고 요동군 북쪽 지역의 물길들 발원지 위치가 위도상으로는 비슷하니 결국 대요수는 염난수의 서쪽 지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염난수가 서안평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설명과 요수가 요수현을 지나 대요수로 합류한다는 기록은 명백한 모순이다. 

 

반고가 염난수를 대요수보다 900 리 쯤 길다고 설명한 이유는 아마도 3 물길이 경유한 요동군의 남쪽에 있는 바다의 남북 길이 곧 실정황 만灣을 염난수의 하류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위 모사도에서 염난수로 지목.표시한 물길은 염난수 상류의 3 개 지류 동요하.신요하.서요하 중 동요하를 지목한 것인데 지목한 이유는 대요수와 염난수 동요하 사이에 표시된 2 개의 물길이 혹 신요하.서요하이더라도 어느 것인지 확신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도 반고는 동요하가 아닌 서요하.신요하 중 더 긴 물길의 길이와 요동군 남쪽의 바다 곧 만灣이며 염난수 하류 길이를 합산하여 2100 리라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겠다. 

 

또 요수는 염난수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렀고 대요수보다 염난수가 훨씬 길기 때문에 염난수 서쪽에 흐르는 대요수로 합류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된 이유는 아마도 요동군의 가운데에 위치한 요택도 바다로 인식하고 염난수가 대요수보다는 위도상으로는 더 북쪽에서 요택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전한 정사인 <한서/지리지>에서 염난수를 1 개 문장으로 극히 짧게 언급.설명되었을 뿐이고 이후 명국 정사 <명사/지리지>까지 역대국 어느 지리지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길만 다룬 지리지 <수경주>에서도 대요수.요수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명사/지리지> 요동지휘사사 삼만위 기록에서 겨우 요하를 분수동령.분수서령과 서쪽의 대청하, 동쪽의 소청하가 합류하는 물길로 설명한 것이 전부이고 요하를 제외한 두 산과 두 물길은 명 시기에만 통용된 명칭이였다. 결국 근거지가 염난수.요하 유역에 가까운 만주족.청국의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에서 염난수 상류부터의 전모가 드러난 셈이다.주1) 그리고 <청사고/지리지> 기록에서도 염난수.요하의 상류 지류 3 개 중 동요하만 상세하게 설명하였고 서요하.신요하는 명칭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어쨋든 <청/지>에 의하면 염난수 상류의 동쪽 지류인 청 시기의 동요하는 봉천성 해룡부 서안현 동쪽에 있는 고열눌와집 전심호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서안현 남쪽을 지난 후 서북쪽으로 휘어 서풍현 동북쪽 끝 지역을 지나 길림성 이통주로 흘러갔고 이후 다시 봉천성 지역 창도부 봉화현 지역으로 흘러와 회덕현과의  경계 지역을 지나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휘어 요원주로 흘러들어 이곳에서 다른 상류 지류인 서요하 곧 서랍목륜하와 신요하 곧대포소도하와 합류한 후부터 요하로 불리며 강평현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봉천부 개원현을 지난 이후 서남쪽으로 꺽이어 흐르며 철령,법고직예구,신민부,해성현 등을 차례대로 지나 바다로 들어갔다.

 
간명하게 언급하려 했지만 숨이 찰 지경이고 그것도 동요하와 3 개 지류가 합류한 이후만의 기록이다. 서기 80 년 경 반고가 그 길이를 대요수 길이의 두 배에 이르는 2100 리라고 했으니 그 설명도 오죽하겠는가! 
 
결국 인평대군 일행은 광녕을 출발하여 요택을 지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대요수.황하를 건넌 셈이고 요택을 다 지나 동쪽 끝에 이르러 옛 염난수인 요하를 건넌 것이다. <청/지>에서조차 대요수.황하를 동사하라며 황하와는 별개의 물길처럼 기록하였고 물길 반 땅 반일 정도로 반복해서 물길 200 리를 건너야 했으니 사이사이 흐르는 어느 물길도 대요수.황하 본류라 지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대요수.황하는 청 시기의  직예성과 봉천성을 흘렀고 염난수.요하는 봉천성과 길림성을 경유한 물길이라고 명확히 구분 인식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4000 여 년 이상의 우리 국사 현장을 정확히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검증차원에서 이조선에서 제작한 고지도를 보겠다. 
 

 - 무제목 고지도,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편찬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측하며 한국보물 1537 호로 지정된 <서북피아양계만리

   일람지도>의 원본으로 추정함.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고지도.[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위 <백산대맥도>에 요하라 추기한 물길이 옛 염난수이고 요하인데 발원지와 경유지 및 입해처의 지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위 이조선 고지도와 일치하는 청국 고지도가 아래 <성경지여전도>다. 

 

- <성경지여전도>

1684 년 청국 동병충 등이 초판한 후 최종 증보는 1778 년임.

 

 

 

위 <성경지여전도>의 요하 묘사는 <백산대맥도>의 것보다는 대략 뚜렷하고 더 정확하다. 특히 동요하와 합류하는 지류가 1 개 물길이고 그 발원지부터 합류지까지의 길이가 동요하보다 훨씬 길게 묘사되어 있다. 기록에는 신요하.서요하 2 개 지류가 언급되었다.  

 

또한 <청/지>에서 요하 발원지라는 고열눌와집과 서북.동남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동서 1000 리 뻗어있다는 장백산 곧 이조선 홍문관 화사들의 백산매맥 및 정약용이 저술한 <강역고/백산보白山譜>의 백산이 두 고지도에 정확하고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열눌와집은 <청사고/지리지>와 <강역고/백산보>에서 서북쪽으로부터 이어진 산의 맥이 몽고평원 아래를 지난 후 솟아올라 차례대로 장백산맥.고열눌와집.납로와집.용강산맥.장백산 등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맥군山脈群 중의 중간 지점의 산림이다. 고열눌와집의 남쪽으로는 전한 시기 요산에서 발원하는 요수 곧 청 시기 혼하의 발원지인 납로와집이 있다. 

 

<성경지여전도>에서 특이한 점은 <청사고/지리지> 기록과는 다르게 장백산을 이조선의 백산 서쪽에 별개의 산으로 표시한 점이다. 이는 정약용의 <강역고/백산보> 기록과도 일치한다. 결국 <성경지>가 편찬된 18 세기 말에는 만주족.청국인들도 저들의 근거지인 장백산이 이조선의 백산이 아니라는 것쯤은 상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반증일 것이다.  

 

 

 

 
 
주1)
<청사고/지리지>
길림성 길림부... 西南至京師二千三百裡 이통주 ...省西偏南二百八十裡 渤海長嶺府地 ...  東遼河自西豊... 入奉化
봉천성 해룡부 ...東北六百裡 ... 西納噜窩集果爾敏珠敦 與興京分山脈 唐謂之長嶺 東平縣 ... 府西六十裡 ... 東北庫열訥窩集 山脈連綿餘果勒敏珠敦接...東北...赴吉林伊通 西豊縣 ... 府西二百二十裡 ... 東北東遼河自西安入 北入吉林伊通 名赫爾蘇河 ... 南由...赴開原 西南由平嶺赴鐵嶺 西安縣 ... 府西北 百六十裡 庫열訥窩集在東 與東平分山脈 東遼河導源窩集之轉心湖 西逕縣南 屈西北入吉林 ...東由...赴東平 南由...赴西豊 北由...赴吉林伊通 柳河縣 ... 府西南一百二十裡 ... 南龍岡 與通化分山脈 ... 南由...赴通化 西由...赴開原 西南由...赴興京
봉천성 창도 ... 省東北二百四十裡 ... 遼河自遼源入 南入開原... 遼源州 ... 府西北二百四十裡 ... 東北有東西蛤拉巴山 內興安嶺山脈自烏珠穆沁旗東出 伏行蒙古平原中 至是特起二山 由是山脈行於東遼河外 至源爲庫열訥窩集 卽長白山脈也 西遼河卽西喇木倫河導源克什克騰旗 新遼河卽大布蘇圖河 導源箚魯特旗 俱自科爾沁左翼中旗入 合流至三江口 東遼河自懷德入 西南流來匯 以下統名遼河 入昌圖 州治居西遼河西...西南...赴康平 北...赴吉林長春 東北...赴懷德 南...赴府 西北...赴恌南 ... 奉化 府東北一百四十裡 ... 東遼河自吉林伊通州赫爾蘇邊問入 北流 屈西南入遼河 ... 懷德 ... 府東北三百裡 ... 西以東遼河與奉化界 東界吉林 西北蛤拉巴 ... 夾城南北三道岡水 南香水河 西北朝陽山水 皆西入東遼河 東南新開河 北入吉林長春 ... 康平 府西一百二十裡 ... 遼河自遼源入 ... 會牛莽牛河注之 入開原 ... 東南...入開原...入府 ... 迤西至靑溝達熱河綏東 

봉천성 봉천부 ... 西南至京師一千四百七十裡 ... 開原...府東北三百裡 ... 西北遼河自康平 ... 鐵嶺...府北一百三十裡 ... 遼河在西自開原東南流入 屈西南流入法庫境

봉천성 법고직예구 ... 省西北一百六十裡 ... 遼河自鐵嶺入 北流屈西流 逕口南入新民

봉천성 신민부 ... 省西一百二十裡 ... 遼河自法庫 屈西南逕古城
봉천성 봉천부 해성현...府南二百四十裡 ... 遼河在西 渾河自遼中入 ... 左匯太子河 西流入之 名三岔河 ... 南入海州河 西入遼河
 

 

 

 

 

2024. 3 월 고침

 

 7/ 다) 석랍목릉하.황하.동사하

 

추가로 <왜황도>의 황하 발원지 부분도를 제시한다.  

 

 

 

황하와 관련한 중국 25 번째 정사 <청사고/지리지> 기록은 아래와 같다.

 

직예성 

다륜약이구...北有錫拉穆楞河 自內蒙古克什克騰旗入 合碧七克碧落拜察諸河 北入巴林旗......
                  북쪽에 석랍목릉하가 있는데 내몽고극심극등기에서 흘러와 벽칠극.벽락.배찰하 등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
                  파림기를 경유한다.

적봉직예주 西南距省治1320裡...領縣1潢河自圍場入 州北200餘裡之巴林旗 東南老哈河 自平泉逕東南隅 納伯爾克河北入

                   建昌 英金河古饒樂水...又東合卓索河入建昌...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인 보정부까지는 1320 리이다. ... 거느리는 현은 하나이다. 황하는 적봉에서 북쪽으로

                  200 여리 떨어진 파림기 위장에서 흘러오며 동남쪽에는 평천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백이극하를 받아들인 노합

                  하가 북쪽으로 흘러 건창현으로 흘러들어간다. 영금하는 옛 요락수인데...또 동쪽으로 흘러 탁색하를 받아들인

                  후 건창으로 흘러간다.

조양부... 明 營州衛...置朝陽縣 光緖30年以墾地多熟 升府 以建昌隸之... 西南距省治1420裡... 西北潢河 自內蒙古阿魯科爾

          沁旗入 西南大凌河自建昌入 合南土河 逕西平房西...又東至龍城 一曰三座塔城...至金敎寺 東北 左合土河 入盛京義

          州 ...

          명 시기엔 영주위가 설치된 곳이다. ... 조양현을 설치하고 1904 년엔 땅을 개간하여 수확이 늘자 부로 승격시키고 건

          창현을 두어 소속시켰다. ...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인 보정부까지는 1420 리이며...서북쪽 내몽고 아로과이심기에

          서 황하가 흘러들어 오고, 서남쪽 건창현에서는 대릉하가 흘러와 남토하와 합치고 서평방 서쪽을 지난다...또 동쪽으

          로 흘러 일명 삼좌탑성인 용성에 이르고...금교사 동북쪽에 이르러서는 왼쪽으로 토하와 합쳐진 후 성경 의주로 흘러

          든다.

건창현 府西南260裡... 東有布古圖山 漢白狼山 白狼水出焉 今曰大凌河 ... 東入朝陽... 北有潢河自赤峰入 會老哈河 河自平

            泉入合伯爾克河 錯出復入 英金河亦自縣來會 復合落馬河 東北至穀口 乾隆8年更名敖漢 玉瀑 與潢河會 又東入朝陽

            柳邊北首朝陽 南訖臨楡 ... 

            조양부에서 서남쪽으로 260 리 떨어져 있다. ... 동쪽에 포고도산이 있는데 한 시기 백랑산이며 백랑수가 발원하는

            데 지금의 대릉하이다. ... 동쪽으로 흘러 조양으로 들어가며 ... 북쪽 적봉으로부터 황하가 흘러들어와 평천에서 흘

            러오는 노합하와 합쳐지고 백이극하와 합쳐지며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흐르다가 다시 합쳐진다. 영금하도 (적봉)현에

            서 흘러오며 락마하와 합치고 동북쪽으로 흘러 곡구에 이르며 1743 년 오한옥폭으로 개칭되었고 황하로 흘러든 후

            동쪽으로 흘러 조양으로 들어간다. 물길은 유변 지역의 북쪽에는 조양으로 흘러 들고 남쪽은 임유현으로 모인다.

봉천성

신민부 ...省西一百二十裡 瀋陽中衛與廣寧左衛地

               봉천성에서 서쪽으로 120 리 떨어져 있고 명 시기에는 심양중위와 광녕좌위 땅이다.

진안현 ...府西 一百五十裡  明 廣寧衛 鎭安堡 ... 東沙河導源直隸綏東 南流 右受老河 入盤山曰南沙河 ...

               신민부에서 서쪽으로 150 리 떨어진 곳이고 명 시기의 광녕위 진안보 위치다. ... 동사하가 직예 수동에서 흘러오

               는데 남쪽으로 흐르며 오른쪽의 노하를 받아들이고 반산으로 흘러가는데 남사하라고 한다.

금주부 반산구 ... 明廣寧盤山驛... 分遼水自遼中冷家口西南入 逕口南入海 西南沙河東沙河西沙河皆南入海

                       명 시기 광녕 반산역이다. 분요수가 요중현 냉가구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온다. 반산구를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서남쪽에 흐르는 사하.동사하.서사하 모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위와 같이 <청/지>에 기록된 황하는 직예성의 북쪽 끝 바깥 지역에서 발원하여 짧은 지역을 동북류하였지만 이내 크게 휘어 동남쪽으로 흘러 직예성 영역의 적봉.건창.조양과 봉천성 남쪽의 서쪽 끝 지역인 신민부 진안현을 지나 또 한번 크게 휘어 정남쪽으로 흘러 금주부 반산구를 지나 바다로 들어갔다. 발원지에서는 석랍목릉하 錫拉穆楞河로, 하류인 봉천성 진안현 지역에서는 동사하로 기록되었다.

 

즉 석랍목릉하.황하.동사하는 아래 추기한 짙은 청색 실선과 흘렀다.     

 

 

 

 

결국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곧 <왜황도>에 묘사된 황하는 청 시기의 황하가 아니다. 

현 <중전전도>에 <청/지> 기록대로 황하를 표시하면 아래의 짙은 청색 실선과 같이 흘러야 한다. 흐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왜? 

옅은 녹색으로 추기한 영문자 y 모습의 산맥이 있고 또 서북쪽으로 있는 몽고평원에도 낮은 산들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물길이 다륜에서 적봉으로 또 적봉에서 북진 곧 청 시기의 광녕으로는 절대로 흐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산맥을 중국 고문헌인 <산해경>에서 불함산이라 명명한 이후부터 <후한서/열전.동옥저>의 개마대산, <북사/물길전>의 도태산, <당서/흑수말갈전>의 태백산.도태산,  <괄지지>의 백산, <명일통지>의 장백산, <성경지>의 장백산 등으로 면면히 기록되어 왔다. 또한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창도부 요원주 기록에는 장백산맥이라며 내흥안령산맥이 있는 오주목심기에서 동쪽으로 뻗어 몽고평원을 복행하던 끝에 솟은 동.서합라파산이 동요하 바깥 지역으로 이어져 동요하 발원지인 고열눌와집에 이르는데 이것이 장백산맥이라 하였고 이후 해룡부의 고열눌와집.납로와집으로, 흥경부의 용강산맥으로, 장백부의 장백산으로 이어진다고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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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월 고침

 

6/ 3. 요택을 건너다

 

인평대군은 1656 년 음력 11 월 17 일 아침 광녕을 떠나 요택을 가로질러 동쪽 끝에 흐르는 요하를 건넜다. 닷새째 날 저녁에 요양에 도착했고 광녕부터는 340 리, 연경부터는 1540 리 떨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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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녕 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우장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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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세기 중반 광녕에서 동쪽으로 요택.요하를 가로지르는 정황이 어떤지 11 월 17,18, 19,20 일 일기를 보자.

 

17 일 (신유)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갰다. 밤에 떠났다.

오시에 반산역에 이르러 연못 가에서 얼음을 깨고 점심을 넉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고평관에 이르러 여염집에 유숙했다. 여기는 참이 아니기 때문에 시초를 받지 못했다. 땔나무를 베어서 썼다. 지난번 관을 나올 때는 날씨가 몹시 찼지만 그 후 좀 따뜻해져서 극심한 추위를 면했다. 고평역은 좁고도 누추해서 처음에는 노숙할 생각을 했으나, 때마침 삭풍이 저물녘에 심하게 불어서 할 수 없이 촌가에 투숙했는데 괴로움이 형언할 수 없다. 어제 낮 여양에 이르렀을 때 사람마다 그곳에 머물러 말을 쉐게 하고 이튿날 흑어구의 길을 따라 고평에 이르고자 했으니, 이는 대개 지름길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 길이 비록 광녕대로를 가는 데 비해서 한나절 정도 시간이 단축된다고는 하나, 그래도 1 백 2, 30 리 길이 되어 요사이 같은 짧은 해로는 반드시 밤을 새워 온종일 가야만 고평에 도달할 수가 있다. 더구나 이 길은 여름에는 진창이고, 겨울에는 빙판이어서 말이 미끄러져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워 온갖 애로가 겹친 곳이다. 광녕 대로는 비록 멀리 돌아가는 길이기는 하나, 여러 참이 있어서 숙식이 편리하다. 그래서 중론에 따르지 않고 대로를 따라서 온 것이다. 이 역에 이르러서 지름길의 형편을 물으니, 요사이는 인적이 통하지 못한다고 했다. 만일 중론에 따랐어라면 중도에서 반드시 크게 낭패할 뻔했다. 옛사람이 경계하는 바, `급하게 서두르면 도리어 이루지 못한다`라는 것이 진실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날은 아침에 50 리, 저녁에 40 리를 갔다.

 

18 일 (임술)

맑음. 아침 일찍 떠났다.

사시에 평안보(平安堡)에 이르러 긴 장벽(墻壁) 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녁에 사령역(沙嶺驛) 성 북쪽 연못 가에서 노숙했다. 부사와 서장관을 권해서 성안으로 보냈는데, 연못에서 성까지 거리가 5리 밖에 안 됐다. 겨울날이라 들에서 거처하는 것이 좋을 것은 없으나, 사령(沙嶺)의 촌가가 좁고 누추하며 날씨가 심히 차지 않기 때문에 노숙한 것이다. 막하 사람들을 모아 저물어 가는 제방에서 얼음장이 떠다니는 것을 구경했다. 밤의 장막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꿩을 굽는 것도 객중의 흥취하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참(站)이 아니므로, 시초를 받지 못했다. 땔나무를 베어서 쓰게 했다.

이날은 아침에 30리, 저녁에 25리를 갔다.

 

19 일 (계해)

맑음. 새벽에 떠났다.

오시에 얼음 위로 삼차하三叉河를 건넜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서장관이 찾아왔다. 어제밤 성안에 들어가 유숙한 사람들은 많은 실물失物을 했고, 연못 가에서 노숙한 사람들은 안온하게 밤을 지냈으니, 이것도 또한 조물주가 시기해서일까. 저녁에 우가장에 이르러 동관리 객관에 유숙했다. 삼차하를 건너서 우장에 이르니, 고국이 점점 가까워진다. 나그네 회포를 위안할 수 있었다. 하정이 비로소 제공되었다. 포주包廚를 계속할 수 있어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이날은 아침에 40 리, 저녁에 25 리를 갔다.

 

 
20 일 (갑자)
맑음. 인마(人馬)가 모두 피곤하기 때문에 머물렀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호행 광록소경이 사냥해서 잡은 노루 한 마리와 꿩 두 마리를 가지고 보러 왔다. 답례로 세연(細煙 가늘게 썬 담배)을 주었다. 자진(子珍)이 산관(山關)에 찾아왔다. 마패ㆍ아역 및 광녕 갑군(廣寧甲軍) 10명이 우장에 체부하고 작별하고 돌아갔다. 신분에 따라 차이 있게 예물을 분배해 주었으니, 이는 관례이다. 어제 오후 도중에서 만주 사람 하나가 말을 달려서 사행(使行)의 선두를 가로질러 갔다. 전구(前驅)가 소리 질러 금했으나, 말에서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욕설을 퍼붓고 달아났다. 막하의 사람들이 모두 격분했다. 돌기(突騎)로 쫓게 하였는데, 그는 궁지에 몰리게 되자 칼을 뽑아서 휘둘렀다. 그의 양손을 등뒤로 묶어 와서 성장(城將)에게 넘겨주었다. 성장은 우리나라 사람을 입증시키고 중장(重杖)을 쳐서 사람들을 경계했다. 우장(牛庄) 아역 강가부(姜加富)가 와서 뵈었다. 두 차례에 걸쳐 먼저 간 사람들의 우장을 통과한 날짜를 물으니, 선래군관(先來軍官)은 이달 5일에 통과했고, 양효원(梁孝元)은 보름날에 지나갔다고 하다.
 
 
 
21 일 (을축)
맑음. 새벽에 떠났다.
우장 아역(牛庄衙譯) 강가부, 그리고 마패 한 사람이 갑군 10명을 거느리고 호행했다. 사시에 경가장(耿家庄)을 통과하고, 경가장으로부터 5리쯤 되는 냇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사령(沙嶺) 북쪽은 날씨가 차지 않고 들에 한 점의 눈도 없어서 삼동(三冬)의 여정이 겨우 그 괴로움을 면할 수 있었는데, 일단 삼차하를 건너니 눈이 들에 가득히 쌓이고 일기가 매우 차서 사람들이 심히 괴로워했다. 요동의 추위가 어찌 연새(燕塞 중국의 북쪽 변방을 말함)보다 배나 더할 수 있단 말인가. 오시에 떠나서 쌍묘자(雙廟子)에 이르니, 우장의 마패 한 사람이 심양(瀋陽)에 가서 아들 장가를 들이고 돌아오는 길에 사행(使行)과 만났는데, 그는 용만(龍灣)에서 양식을 실은 인마(人馬)가 요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오늘밤만 지내면 고향 소식을 듣게 된다고 해서 기뻐 날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저물녘에 필관포(畢管鋪)에 이르러 촌가에 유숙했다. 하정이 제공되었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22 일 (병인)
흐림. 용만 사람이 요동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으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집 소식을 알고 싶어 밤중에 역관 서효남(徐孝男)을 먼저 달려서 보냈다. 새벽에 길을 떠났다. 보각사(普覺寺) 앞 들판에 이르니, 하인 명남(命男)이 꿩 한 마리를 잡았다. 사시에 남사하보(南沙河堡) 냇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오시에 수산령(首山嶺)에 올랐다. 만윤(灣尹)의 군관 전사립(田士立)이 서 역관(徐譯官)을 만나서 비로소 사행이 요동에 이르렀음을 알고 달려왔다. 교자 앞에 이르러 다만 저보(邸報 관보(官報))만을 바쳤으니, 고향 소식이 아직도 의주에 도착하지 못한 때문이다. 고향 소식은 비록 듣지 못했어도 저보를 자세히 보아 국가가 편안함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고국의 여러 가지 소식과 도강(渡江 압록강을 건너는 것)한 날짜 등을 물었더니, ‘온 나라가 모두 편안해서 더 말씀 드릴 것이 없고, 10일에 도강하였습니다. 선래군관(先來軍官)들도 무사히 마전곤(馬轉滾)을 지나갔으며, 동지사(冬至使)가 보름경에 의주에 도착합니다.’ 한다. 일행은 모두 환성을 올렸다.
날이 저물어서 얼음 위로 태자하(太子河)를 건너서 요양(遼陽) 새성(城) 밖 천총의 집에 유숙했는데, 전사립이 기백(箕伯 평안 감사) 유심(柳淰)ㆍ만윤(灣尹) 김휘(金徽)의 문장(文狀) 및 쌀과 진찬(珍饌)을 올렸다. 골고루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역(異域)에서 주린 나머지 고국의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되니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정이 제공되었다.
이날은 아침에 40리, 저녁에 30리를 갔다.

 

 

대릉하가 연경.의주 사이의 꼭 절반이라 했으니 이미 청국 영역 반을 지났고 연경길에서 가장 고생이 심하다는 요택을 건너고 삼차하 곧 요하까지 건넜으니 압록강은 목전이라 기뻐할 만 하겠다.  

 

가) 요택

 

광녕에서 요양까지는 동쪽과 북쪽의 두 길이 있다. 동쪽으로 요택.요하를 가로질러 건너는 길과 요택을 피하여 북쪽으로 오른 후 황하.요하를 건넌 후 동남쪽으로 내려오며 심양을 거쳐 요양에 이르는 길이다. 

 

겨울 초입이라 광녕부터 우장까지 요택을 가로지르는 210 리 길이나 요하 물줄기 마저도 얼어 그 위로 건너야 했지만 날씨는 안온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겨울보다는 가을철에 요택을 건너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연경으로 향할 때인  9 월 3, 4, 5 일 일기를 보자. 

 

- 연경 행로

3 일(무신)

맑음. 방물은 이미 수레로 운반했다. 거기에 실은 것은 쇄마 및 향부.운부에서 보내는 물건이다. 장사치들은 뒤에 떨어져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편에 조정에 올리는 글과 장계를 부치고, 집에도 편지를 보냈다. 늦게 떠나서 성 뒤로 해서 삼하보를 지나 삼차하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성은 삼차하 언덕에 있는데, 폐허가 되어서 사람이 없고, 냇가에 오직 뱃사공 한두 집만이 살고 있었다. `삼차`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요동의 태자하, 심양의 혼하와 두을비성의 요하가 모두 북막으로부터 흘러서 요좌로 들어가서, 세 줄기가 여기에서 합류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광록도 앞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나, 세 물의 근원은 자세하지 않다.

두을비는 심양 서쪽 백 리 밖 요하 북쪽 언덕에 있으니, 역시 청 나라 사람이 명 나라 군사와 대진했던 곳이다. 산해관 머리 만리장성 밖에 있는 큰 사막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의 옛터가 있고, 5 리마다 돈대 하나 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와 이적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 한 줄기는 건주의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보.무순보 등지로 해서 개원위.철령위 등을 지나 요하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보에 이르렀고, 한 가닥은 섬서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대동부 등지로 해서 큰 사막을 거쳐 의무려 뒤로 꾸불거리다가 임녕보.진원보.진녕보 등을 지나 고평역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그 터뿐이요, 임녕 근처에는 풀숲 사이에 분첩이 간간이 있었다.

산해 장성은 곧 조룡(진시황)이 쌓은 것이지만, 이 두 줄기 장성은 어느 시대에 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장으로부터 광녕에 이르기까지 200 여 리 사이는 큰 들판이 모두 진흙수렁으로서 당조唐朝의 이른바 `요택에 장마가 지면 육지로 배가 다닐 지경이다`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행려들이 다니지 못한다.

만력(1573~1620년) 연간에 영원백 이성량이 이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민정을 크게 동원하여 우장으로부터 광녕까지 큰 둑을 쌓았는데, 높이와 너비가 모두 두어 길이나 된다. 둑 북쪽에서 흙을 파온 곳은 호壕가 되었는데, 이 호로는 배가 다니고, 둑으로는 수레가 다닐 만하여 백성들이 몹시 편하게 여겼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후로는 다시 수리를 하지 않아 간간이 무너졌고 해자(濠)의 물이 넘쳐 흘렀다. 남아 있는 둑도 몹시 좁아서 말 한 필도 다니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매양 장마철을 당하면 굽이마다 물이 막히고 곳곳에 수렁이며, 또 모기가 떼를 지어 사람이 왕래할 수가 없으나 이러한 깊은 가을에는 겨우 통행할 수가 있었다. 참으로 요좌遼左는 죄인이나 살 땅이다. 하안을 거닐면서 둘레를 돌아보니, 들과 하늘이 서로 맞닿고 사방에 산이라고는 없었다. 넓고 넓어서 마치 큰 바다 가운데에서 배를 탄 것과 같았다. 학야는 9000 리란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니었다.

사람과 말이 다 건너고 나니 강바람이 늦게 일어났다. 노를 재촉하여 하수를 건너가 북쪽 언덕에서 노숙했다. 오늘 사령역에 이르지 못한 것은 나루가 험하여 뱃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방물을 실은 수레는 먼저 건넜다.

이날 25 리를 갔다.

 
4 일(기유)
맑음. 늦게 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떠나서 서령보(西寧堡)를 지났다. 이 보(堡)는 길 서쪽 5리에 떨어져 있다. 성은 무너졌고 사람도 없었다. 사령역(沙嶺驛) 두 돈대(墩臺)를 지나 작은 갯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전에는 배로 건넜는데 지금은 다리가 있었다. 역성(驛城)은 무너지고, 오직 유민(流民) 두세 집이 있었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싸움에 광녕(廣寧)의 대병(大兵)들이 이 들에 주둔하여 오랑캐와 서로 버티고 있었는데, 날랜 장수 손득공(孫得功)이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관군이 망하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백골(白骨)이 쌓여 있었다.
오시에 떠나서 소포출교(小浦秫橋)를 건너고 평안보(平安堡)를 지나 제2의 소포 출교(小浦秫橋)를 건넜다. 이곳도 역시 전일에는 배를 타고 가던 곳이다. 평안보는 길 서쪽 3리 밖에 있다. 성은 허물어지고 사람도 없었다. 사령(沙嶺) 북쪽에 있는 세 나루도 일찍이 배를 타던 험한 나루였는데, 지금은 가을 물이 이미 얕아진 데다가 다리까지 있기 때문에 일행이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으니, 그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하랴!
저물녘에 고평역(高平驛) 첫째 돈대(墩臺)를 지나서 노숙했다. 부사는 성안에 들어가서 잤는데, 허물어진 성에는 겨우 유민 두세 집이 있을 뿐이었다. 화수(火手)가 들오리 한 마리를 바쳤다. 큰 들 서쪽 머리에 먼 메 뿌리가 아득하여 모양이 마치 칼날과 같았다. 이는 곧 십삼산(十三山)이 큰 들판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그 뾰족한 봉우리가 처음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눈을 씻고 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날 오전에 45리, 오후에 55리를 갔다.

 

5 일 (경술)

맑음. 크게 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떠나 둘째 돈대를 지나니, 승전비가 있었다. 이는 곧 감찰어사 송흥조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약 20 리쯤 가니

둑이 무너져서 물이 넘쳤다. 여기서부터 반산에 이르기까지는 육지가 바다를 이루었는데, 그 깊이가 무릎을 넘는다. 물속으로 10 리를 가다가 다시 둑 위로 올라가서 반산역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허물어진 성 옆에 유민 두세 집이 있는데, 옛날 여기에서 호되게 물난리를 당했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여기에 오니 나도 모르게 이에 신물이 난다. 북쪽으로 의무려醫巫閭를 바라보니, 푸른 봉우리는 하늘에 닿아 멀리 구름과 가지런하고, 깎은 듯한 암벽은 서쪽으로 수백 리를 달려서, 마치 용이 날고 봉이 춤추는 것처럼 신경을 옹호하고 있다. 그 기이하고 웅장한 경치가 꼭 신선이 그 속에 사는 것만 같았다. 제헌이 광성자에게 도를 물었다는 말이 자못 헛되지 않는 듯싶었다.

날씨는 비록 춥지만 때는 아직 가을철이기 때문에, 일행 중에 털옷 입은 사람을 보면 자못 비웃었다. 넓은 들의 사나운 바람에 한기가 배나 더했다. 털 외투와 갖옷을 벗지 못하니 도리어 우수운 일이다.

오시에 떠났는데, 성 북쪽 10 리나 둑이 무너져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또 물속으로 2 리를 가고 둑 위로 5 리를 가서 비로소 육지를 만났다. 광녕앞 고개를 넘노라니 고개 밑에 비석이 있으니 이것은 곧 홍려소경 두공의 신도비였다. 광녕 선화문을 거쳐서 들어가 나성 안의 천총의 집에서 잤다. 선화문은 곧 나성 동쪽 문이다.

...

이제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하정이 있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편안해 했다. 심양으로부터 이 성에 이르는데는 세 길이 있는데, 한 길은, 심양의 소남문으로부터 나와 요하의 하류를 건너고 진녕보를 거쳐서 여기에 이르는 것인데 대략 4 일간의 로정이 되고, 한 길은, 심양 상서문으로 나와 영안석교를 지나고 요하를 건너서 두을비성.황기포.백기포.진원보를 거쳐서 여기에 이르는 것인데 약 5 일간의 로정이 되고, 한 길은, 두을비성으로 해서 신성과 반제탑을 거쳐 여기에 이르는 것인데 약 6 일간의 로정이 된다. 이 세 길은 내가 모두 지나본 것인데, 로정을 자세히 계산해 보면, 우장으로 해서 가는 길이 겨우 1,2 일의 시간을 감하는 대신 그 고생은 배나 된다. 예부 좌시랑 1 인과 낭중 2 인이 건주 경계인 백향성을 감축하다가 역마로 달려와 유숙한 곳에 찾아왔다. 이들과는 이미 면분이 있었기 때문에 예물을 주었다. 무려의 배가 북쪽 땅에서 유명하여 돈을 주고 사먹어 보니 맛이 몹시 상쾌했다.

이날 오전에 35 리, 오후에 50 리를 갔다.

 

 

200 여 리의 겨울 빙판길은 봄.여름.가을에는 진흙수렁과 무릎이 잠길 정도의 물길의 연속이였다. 극심한 추위는 없지만 모기떼로 고통스러운 길이였다. 차라리 겨울 길이 나은 것 같다. 아래는 요택을 피하여 북쪽길로 우회한 김창업.김경선의 경험담이다.   

 

 

지리를 상고해 보면 이 물은 요수로서, 호지에서 나와 장성으로 들어가고 남으로 혼하와 태자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이 세 물이 합쳐지는 곳을 삼차관 또는 삼차하라고 하는데, 근년에 사람들이 우장을 경유할 때 건너던 곳이다. 이 물을 건너 2 리 쯤 가면 또 작은 물이 나타나는데, 바로 周流河의 지류이다. 경치는 큰 길과 달리 지나는 곳마다 염전이 많았으니 그 토양이 비옥함을 역시 알 만하다. ... 봉성에서 주류하에 이르기까지는 초가가 많고, 주류하부터 산해관까지는 토옥이 많다. 토옥이 나타난 이후로 이따금 와가는 있어도 초가는 전혀 볼 수 없다. 이것은 이을 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김창업 자벽군관 <노가재연행록> 1712

 

일판문에서 이도정의 사이는 옛부터 물맛이 가장 나쁘다는 곳이다. 이곳은 요동 들판 가운데에 위치하여 물과 샘이 모두 고여 있고 빠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물맛을 보니 과연 신 듯도 하고 떫은 듯도 하여 실로 입에 대기가 곤란했다.

                                                                 김경선 서장관 <연원직지> 1832

 

 

요택을 묘사한 고지도가 있다. 청국인 홍양길(洪亮吉1746~1809)이 건륭 52년(1787)에 초고를 완성하여 가경 8년(1803)에 간각하였다는 <건륭부청주현도지>에 실린 지도다. 앞으로 <건륭도>라 하겠다. 

 

 

아래와 같이 읽으면 쉬을 것이다.  

 

 

 

광녕 동남쪽으로 흘러내린 황하 곧 한.당 시기의 대요수는 <수경주>에 의하면 새외에서 발원하여 백평산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양평현 서쪽으로 들어오고 북쪽 지류격인 요수는 지석산에서 발원하여 새 밖에서 동쪽으로 흘러 망평현 서쪽을 지난 후 크게 꺽이어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양평현에서 북쪽 지류 요수를 받아들인 대요수는 이후 남류하면서 요수遼隧.방房.안시安市 등의 현 지역을 차례대로 경유한 후 바다로 들어갔고 서남쪽 지류인 백랑수 곧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대릉하도 방房현으로 흘러와 대요수 곧 송.거란 이후 개칭된 황하로 합류했다.  

 

결국 요동군 치소인 양평현이나 요수가 경유하는 망평현은 황하가 동쪽으로 흐르다가 크게 꺽이어 남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곳에 있었을 것이다. <건륭도>에는 방현 서남쪽에 많은 이들이 왕검조선 도읍이라고 인식하는 험독險瀆현도 표시되어 있고 요택 동쪽 끝으로 흘러내린 요하 동쪽 강안 지역에는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차례대로 개원.철령.심양.해성海城 .안시 등이 보인다. 또한 해성 서쪽에는 요택을 가로지른 후 삼차하를 건너 도착하는 우장牛莊이, 해성 동쪽에는 태자하가 경유하는 요양遼陽이 표시되어 있다. 

 

앞에서 제시한 <경판도>에는 백평산을 경유하는 대요수와 지석산에서 발원한 요수가 구분.묘사되어 있으나 <건륭도>에는 흔적조차 없다. 두 고지도는 같은 시기에 간행되었으니 아마도 홍양길의 인식 한계인 것 같다. 

 

한편 인평대군이 어느 시기에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는 2 개의 장성은 란하.황하.요하 3 물길 유역이 고대부터 진시황시기까지와 송.거란 전과 후 시기에 각각 남쪽의 황하.장강 세력과 북쪽의 동호.선비.거란 세력 및 동쪽의 왕검조선 후예국 사이의 경계였기 때문에 당연히 전국시대 연국과 고구려.고려 시기의 장성일 것이다. 즉 섬서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대동부 등지로 해서 큰 사막을 거쳐 의무려 뒤로 꾸불거리다가 임녕보.진원보.진녕보 등을 지나 고평역에 이르렀다는 장성은 연 전성기 장수 진개가 동호를 1000 여 리 물리치고 동호를 방비하기 위한 조양부터 양평까지 쌓았다는 장성일 것이고 건주위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보.무순보 등지로 해서 개원위.철령위 등을 지나 요하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보에 이르른 장성은 요하 동쪽이며 요동 지역을 감싼 장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왕검조선의 후예국인 고구려와 고려에서 쌓은 장성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나) 황하 潢河

 

그러면 요동군 양평현으로 흘러내린 대요수.황하의 중류와 상류는 대체 어느 지역을 흘렀을까? 

 

황하와 관련해서는 반드시 아래 고지도를 검토해야 한다.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황조일통여지전도- 이하 황조도>를 간행하였다는데 아래는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하였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의 요하 부분도다. 일본 재간행본은 원본인 <황조도>와 구별하여 앞으로 <왜황도>라 하겠다. 

 

 

 

아래와 같이 물길 위주로 읽으면 보다 쉬울 것이다. 

 

 

 

<왜황도>의 황하와 <건륭도>에 필자가 임의로 추기한 황하는 흐르는 방향이 완전히 다른 물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청 시기의 황하 곧 한.당 시기의 대요수 발원지와 상류는 어느 지역을 어떻게 흘렀을까? 

 

 

주1)

大遼水

[수경]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東南過房縣西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주]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 ... 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 ...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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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오르다

인평대군 귀로의 산해관에서 광녕까지 로정은 아래와 같다. 

 

산해관 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15일 (기미)
맑음. 새벽에 떠나 자성(子城)의 동문(東門)을 경유하여 나성(羅城)의 동문을 나왔다. 자성의 문은 이름이 없었고, 나성의 문은 이름이 있었으니, ‘동엄(東嚴)’이라고 했다. 동쪽 냇가를 지났는데, 이곳은 청인이 몽고 군대를 유인해서 묻어 죽인 곳이다. 백골이 아직까지도 쌓여 있으니, 길 가는 나그네들이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오시에 대릉하(大凌河)를 출교(秫橋)로 건넜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강은 반쯤 얼었다. 닭이 울자 인마(人馬)가 먼저 떠났다. 달빛이 컴컴하고 길이 희미해서 의주위(義州衛)로 향하는 길을 잘못 간 자가 과반이었는데, 날이 밝아서야 되돌아 왔다. 인마가 피곤해 있었다. 연경으로부터 용만에 이르기까지 대릉하가 꼭 절반이었다. 이 강을 건너고 보니 돌아갈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사람들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용감하게 나아갔다. 저물녘에 십삼산(十三山)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16일 (경신)
된서리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끼었다가 낮에 걷혔다. 새벽에 떠났다.
사시에 여양역(閭陽驛) 성 밖 촌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짙은 안개에 가리워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저물녘 광녕위(廣寧衛)에 이르러 여염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연경으로부터 광녕위에 이르는 사이에 사슴ㆍ멧돼지ㆍ노루 등을 가득 실은 수레가 도로에 잇달았다고 하는데, 이는 호인(胡人)들이 대규모로 사냥해서 잡은 것이다. 이날 밤에 월식(月蝕)이 있었다. 달빛이 산관(山關)에 희미했다. 갑군(甲軍)이 광녕에 체부(替付)하고 돌아가기를 고하므로 남초(南草 담배)를 나누어 주었다. 이날에는 아침에 40리, 저녁에 50리를 갔다.
 
 

 

산해관을 나와 구하가 둘러빠졌다는 곳을 끼고 걸어 6 일째 되는 날에 다리 위로 대릉하를 건너 십삼산을 지나 7 일차 저녘에는 광녕에 도착하였다. 산해관부터는 500 리 떨어진 곳이니 일 평균 70 리 쯤의 행보였고 북경으로부터는 1180 리 떨어진 곳이다.  청 시기의 광녕 위치 역시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북진일 수가 없다. 명백한 오류다. 

 

 

 

앞 글에서 이미 대군 일행이 도착한 산해관 위치도 지금의 산해관이 아니라 하였듯이 산해관을 나와 동쪽으로 구하가 둘러빠진 곳이며 장수절이 정확하게 언급한 요수의 최하류이고 실정황은 만灣을 끼고 대략 정북쪽 방향으로 오르는 길이다. 그래야만 우북평.요서 2 개 군을 경유한 대릉하의 하류를 건널 수 있다. 이후 의무려산 남쪽 지산인 13산을 지나 광녕 곧 전한 시기 요동군 무려현에 도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가) 대릉하

 

 
대릉하는 전한부터 당까지 대략 1000 여 년 동안 백랑수로 기록.설명되었고 송 이후부터 대릉하로 개칭되어 청국이 멸망 시까지도 변동 없이 제 위치를 흘렀다. 

 

 

 

백랑수 물길을 상세하게 설명한 문헌은 오직 <수경주>일 뿐인데 대요수 항목에 설명되어 있다. 백랑수가 대요수 하류로 합류하는 지류일 뿐더러 <한서>를 편찬한 반고의 물길 길이 기록 기준인 650 리 길이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짧은 물길이기 때문에 대요수 항목에 넣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쨋든 백랑수는 우북평군 백랑현에서 발원하여 동북류하며 요서군의 유성현 북쪽을 지난 후 동남쪽으로 크게 휘어 요동군 방현에서 대요수로 합류한 물길이다.(주1)

 

그런데 <수경주>에서 백랑수가 발원하여 우북평.요서.요동 3 개 군 지역을 경유하였다고 하니 제법 큰 물길인 것처럼 인식한다. 현재 전해지는 <후한서/군국지> 우북평.요서.요동 3 개 군 주석과도 같이 백랑수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2300 리 떨어진 우북평군 지역에서 발원하여 3300 리 떨어진 요서군의 북쪽 지역인 유성현 북쪽 지점으로 동북류한 후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요동군의 방현으로 흘러가야 하니 대략 최대 1300 리에 이르는 큰 물길로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으나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지역에 표시된 지금의 대릉하 길이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앞 글에서 <후/지>의 광녕.어양.우북평 3 개 군 주석의 낙양부터 떨어진 리 수는 요서.요동 2 개 군 위치를 더 동쪽으로 위치시키려는 고의 변조라고 추단하였고 또한 <한서/지리지> 어양.우북평.요동.현토.낙랑 등 5 개 군에서 물길의 길이를 기록한 것은 고수 750 리, 경수 650 리, 대요수 1250 리, 염난수 2100 리, 열수 820 리(주2) 뿐이기 때문에 백랑수는 절대로 큰 물길일 수가 없는 것이다. 대략 이러한 길이를 기준으로 물길을 언급한 반고는 요서군 임유현의 주석에서 유수의 발원수격인 백랑수의 백랑 두 글자만 언급하였을 뿐이다. 

 

<한서/지리지>

요서군

臨兪   兪水首受白浪 

임유현   유수는 백랑수에서 갈라졌다.

 

결국 백랑수는 650 리에 미치지 못하는 비교적 짧은 물길이라 추측할 수 있고 현 <중국전도> 표시에도 우북평.어양 2 개 군을 경유한 650 리 경수 길이보다도 훨씬 짧게 표시되어 있다.

 

 

 

주1)

[수경주]
大遼水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 又東南過房縣西 地理志 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東南 北流西北屈 逕廣成縣故城南 ... 又西北 石城川水注之出西南石城山 東流逕石城縣故城南 地理志 右北平有石城縣 北屈逕白鹿山西 即白狼山也 ... 魏書國志曰..遼西單于蹋頓尤强, 為袁氏所厚 故袁尚歸之 數入為害 公出盧龍 塹山堙谷五百餘里 未至柳城二百里 尚與蹋頓將數萬騎逆戰 公登白狼山 望栁城 卒與虜遇 乗其不整 縱兵擊之 虜衆大崩 斬蹋頓 胡漢降者二十萬口 ... 其水又東北入廣成縣 東注白狼水 白狼水北逕白狼縣故城東 ... 白狼水又東 ... 又東北逕昌黎縣故城西 地理志曰交黎也 東部都尉治 應劭曰今昌黎也 ... 髙平川水注之 ... 東流逕倭城北 盖倭地人徙 之 又東南逕乳樓城北 蓋逕戎鄉邑 兼夷稱也 又東南注白狼水 又東北 自魯水注之 ... 白狼水又東北逕龍山西 燕慕容皝以栁城之北龍山之南 福地也 使陽裕築龍城 改栁城為龍城縣 ... 號新宫曰和龍宫 ... 白狼水又北逕黄龍城東 十三州志曰 遼東屬國都尉治 昌遼道有黄龍亭者也 魏營州刺史治 又東北 濫真水 ... 東南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出 東流分為二水 右水疑即渝水也 地理志曰 渝水首受白狼水 西南循山 逕一故城西 世以為河連城 疑是臨渝縣之故城 ... 一水東北出塞 為白狼水 又東南流至房縣 注于遼 魏土地記曰 白狼水下入遼也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주2)

漁陽郡 漁陽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入海 行七百五十里

右北平 無終 故無終子國 浭水西至雍奴入海 過郡二行六百五十里

遼西郡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玄兎郡 西蓋馬 馬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2024. 3 월 고침

 

4/ 2) 산해관

 

 

 

대군 일행은 11 월 8 일 저녁에 산해관에 도착했고 북경으로부터는 680 리 떨어진 곳이다. 산해관은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 명하여 전국시대 조.연국이 쌓은 장성을 수축하여 그 동쪽 끝에 구축한 성문으로 장성의 서쪽 끝부터 동쪽으로 산해관까지 만 리에 이른다는 진장성의 동쪽 끝 지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명 시기 장군 서달이 이전의 동쪽 끝 지점인 임유관에서 동쪽으로 장성 60 리를 더 쌓고 관을 설치하였다는 곳이 산해관이다.

 

그러면 인평대군 일행이 도착한 산해관이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산해관일까? 

 

3) 망해루

 

아래는 인평대군이 산해관에서 하루를 쉰 9 일 일기다.

 

9일(계축)

아침에 눈이 내리고 저녁때는 갰다. 머물렀다. 시초를 바쳐 왔다. 찰원(察院)에서 베풀어지는 연례(宴禮)에 갔다. 부사는 좌재(坐齋 제사 전날부터 재계하는 것)로 참석치 못하고 내가 서장관ㆍ중사 이하 사람들을 거느리고 연회에 갔는데, 연회를 주관하는 관원은 바로 호행 광록소경(護行光祿少卿)이었다. 연회는 관례이나 관 안 두 군데서 전별연을 베푸는 것은 비록 상신(相臣)의 사행(使行)이라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연회를 마치고 객점으로 돌아갔다. 잠깐 휴식을 취하고서 망해정(望海亭)을 찾아갔다. 서장관을 비롯해서 두 중사 및 그 밖의 몇몇 원역(員役)이 따라갔다. 자진(子珍)만 함께 가지 못해서 섭섭했다. 서라성(西羅城) 남쪽의 무너진 곳으로 해서 나가서 두 군데 성(城)을 거쳤는데, 모두 장성(長城)에 의지해서 쌓았으며, 두 성 안팎에는 인가가 드물었다. 제2성(城)의 서쪽이 바로 망해루이다. 누각 밑에 비석 둘이 있어 한가운데서 남쪽을 향하고 섰는데, 모두 불상(佛像)을 새겼다. 동쪽에 비석 하나가 있는데, ‘지성루(知聖樓)’라 새겼고, 서쪽에 비석 셋이 있는데, 그 하나는 바로 ‘징해루기(澂海樓記)’며, 나머지 둘은 제영(題詠 시(詩)를 쓴 것)인데 초서로 쓴 것이 미끈하고 아름다웠다. 누(樓) 위의 현판에는 ‘근일(近日)’이라 썼고, 누 밑에는 ‘지성(知聖)’이라 썼는데, ‘근일’이니 ‘징해(澂海)’니 ‘망해(望海)’니 하는 것은 모두 누의 이름이다. 화루(畫樓 단청한 누각)의 위ㆍ아래의 분벽(粉壁)에다 시를 써 놓은 것이 몹시 많으나, 모두 운(韻)만 있고 율(律)이 없으니, 명 나라 말년의 문재(文才)를 짐작할 수 있다. 뜰 아래 동쪽과 서쪽에 모두 비석이 있으니, 동쪽의 것은 ‘일작지다(一勺之多)’라 썼고, 서쪽의 것은 ‘한해기관루(瀚海奇觀樓)’라고 썼다. 이는 장성이 끝나는 곳으로 바다를 방비하는 적루(敵樓)인 것이다. 남쪽은 발해(渤澥)에 임하여 은빛 물결이 하늘에 닿았고 북쪽은 장성을 바라보아 분첩(粉堞)이 구름에 연했으니, 기상이 웅장하고 시야가 호탕하다. 고금에 몇 사람이 이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던가. 이미 승지(勝地)에 이르렀으니, 한 번 누 위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려 했으나, 층루(層樓)가 반이나 썩어서 높은 난간이 거의 무너졌다. 이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년에 올라가서 바라본 것이 이미 옛일이 되었다. 부질없이 수선할 인물이 없음을 탄식할 뿐이다.

관문(關門)에서 바다를 연결시킨 것은 조룡(祖龍)의 공이 아니라, 바로 서달(徐達)이 창조한 것이다. 누 밖의 호탕한 물결은 원래 발해가 아니고, 구하(九河)가 둘러빠진 곳이다. 바닷가에는 물이 얕은 곳이 많고, 누 서쪽에는 바다 속에 용도(甬道)를 쌓아 호인의 잠범(潛犯)을 방지하고 있다. 화루(畫樓)에서부터 용도에 이르기까지 거리가 약 200보 된다. 누의 바닥은 높고 성의 바닥은 낮아서 그 중간에 돌사다리 세 층을 두어서 위로 통하는데, 세 층이 높이가 모두 4, 5장(丈)이나 된다. 첫째 사다리를 걸어 내려가면 포각(砲閣)이 있고, 비석 하나를 세워 ‘천개해구(天開海丘)’라 새겼으며, 제2ㆍ제3의 사다리를 내려가야 비로소 용도에 이른다. 성가퀴에 의지해서 내려다보니 바다 빛이 검푸르러서 깊이가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 거센 물결이 거슬려 부딪쳐 성가퀴에는 얼음이 깔렸고, 동쪽 주변의 반 가량은 물결에 부딪쳐 이미 무너져 가고 있었다. 자세히 그 제도를 살펴보니, 바다 속에 돌을 집어넣고 그것을 토대로 성을 쌓았는데, 벽돌이나 흙을 쓰지 않고 돌과 석회를 써서 견아상제(犬牙相制 개의 위아래 이빨이 서로 어긋맞음과 같은 것)로 축조(築造)하였으니, 수선을 하려면 할 수 있을 텐데 어찌 무너지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제 이미 고치지 아니해서 장차 터조차 없게 될 것이니, 부질없이 탄식만 나올 뿐이다. 홀로 거닐면서 길게 휘파람 불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흥망성쇠를 생각해 보았다. 명 나라 말년에 국정이 어지러워져서 인화(人和)를 못하였기 때문에 이 같은 천참(天塹)도 쓸모 없는 존재로 되고 말았다. 맹자의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라는 말이야말로 실로 약석(藥石)과 같은 교훈이다.

중원(中原)에는 이와 같은 성지(城池)가 있으면서도 오히려 오랑캐를 막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나라가 한 조각 탄환만 한 땅을 가지고 오랑캐의 기병을 물리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랴. 잠시 후에 누 아래로 내려와서 술잔을 들고 멀리 바라보니 바다와 하늘은 한 빛으로 물들었는데 거기서 나타나는 경상(景象)도 가지가지이다. 시인(詩人)의 서정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봉래(蓬萊)의 섬이 아득하여 속세의 굴레를 아직 벗지 못하고 있다. 한사(漢槎 한(漢) 나라 사신의 배)는 자취를 감추고 진동(秦童 진시황(秦始皇)이 삼신산(三神山)으로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보낸 동남 동녀를 말함)은 돌아오지 않으니,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부질없이 혼자서 길게 탄식할 뿐이다. 산관(山關)의 남문(南門)으로 해서 들어와 십자가(十字街)를 지났다. 종루(鐘樓) 위에는 ‘문창각(文昌閣)’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서문(西門)을 찾아서 나왔다. 객점에 돌아와서 몸을 쉬니 해가 저물려 했다. 이날 약 18리를 왕반(徃返)했다.

 

 

 

위와 같이 대군은 산해관에 도착한 후 하루를 쉬면서 산해관 바깥 망해루에 올랐다. 망해루 남쪽은 발해인데 동쪽으로 눈 앞에 펼쳐진 바다는 발해가 아니리 구하九河가 둘러빠진 곳이라고 한다. 구하가 둘러빠졌다란 뜻이 대체 무엇일까?

 

중국 정사 <명사>나 정사원고격인 <청사고> 등의 지리지 기록에는 구하라는 물길은 없다. 명.청 시대 뿐만 아니라 이전 원.금.요.당.수.북위.진.한 시기 정사급 지리지도 마찬가지다. 결국 대군이 언급한 구하란 물길 명칭이거나 아홉 개의 물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 개의 강을 통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결국 수 개의 강이 한 곳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니 당연히 강폭이 크게 넓어졌을 것이니 남쪽 발해로 흘러들기 직전의 만灣이라 보는 것이 상식.합리적일 것이다.  

 

그런데 당 시기 장수절은 <사기정의>에서 `始皇長城東至遼水 西南至海之上` 즉 진시황 시기 수축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닿았고 장성동단의 서남쪽은 바다 곧 발해라 하였다. 한 시기부터 당 시기까지의 지리 기록 중에서 유일하고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결국 인평대군이 망해루에 올라 설명한 산해관 동쪽은 수 개의 물길이 흘러든 요수이겠지만 그 요수 최하류인 만灣의 다른 표현인 둘러빠진 곳의 길이도 물길에 포함시켜 남긴 기록이 바로 반고가 서기 80 년 경 편찬한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에 주석된 2100 리 길이 염난수일 것이고 송.거란 시기부터는 요하로 개칭.기록되어 있다. 염난수 서쪽에는 새외에서 흘러와 요동군 망평.양평.방.안시 등의 현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 1250 리 길이 대요수가 흘렀는데 염난수도 요동군 서안평현을 지난 후 바다로 들어갔으니 지형상으로 보아서는 대요수는 염난수 중류로 합류한 서쪽 지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아래의 란하.서요하.요하는 전한 시기부터 청 시기까지의 물길일 수가 없다.

 

 

 

전한 시기부터 청 시기까지의 난수.란하, 대요수.황하 및 염난수.요하 3 물길은 아래와 같이 흘렀기 때문에 인평대군이 북경을 떠나 680 리 떨어진 도착한 산해관도 아래와 같이 점선 표시의 란하 최하류 동쪽이여야 하고 지금의 란하 최하류 서쪽 강안 지점에 적색 표시의 산해관 위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전.후한 시기 설치된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6 개 군 위치도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후한서/군국지> 상곡.요서.요동 3 군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200 리, 3300 리, 3600 리 떨어진 곳은 마땅히 위의 상곡.요서.요동 위치여야 한다. 인평대군이 북경을 떠나 산해관에 이른 680 리 사이에 전한 시기의 상곡군 영역이였으며 후한 시기 개편된 광양군과 그 동쪽으로 어양.우북평.요서 등 4 개 군이 설치되었으니 1 개 군 동서 폭은 대략 170 리 정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 전해지는 <후/지>의 광양.어양.우북평 3 군 주석인 낙양에서 2000 리, 2000 리, 2300 리 떨어졌다는 내용은 전사 중의 실수.오기라기 보다는 요서.요동 2 개 군 위치를 최대한 동북쪽으로 밀어내기 위한 변조라 보는 것이 합리적 추정이라 본다. 

 

또한 <수경주/대요수> 기록에 언급된 대요수의 서남쪽 지류인 백랑수 곧 송.거란 이후의 대릉하가 우북평군에서 발원하여 요서군의 북쪽인 유성현을 지나 요동군 방현에서 대요수로 합류한다는 설명이 현 <중국전도>의 표시에 추정.추기한 우북평.요서.요동 3 군 위치와 대략 일치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전국시대 연국과 진시황 시기의 요동군이였으며 전한 시기 개편된 요서군 위치와 난수 및 장수절이 설명한 요수를 어떻게 다른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단 말인가?  

 

2024, 3 월 고침

 

3/ 나. 난수를 건너 산해관으로

 

북경을 떠난 인평대군 일행은 8 일 째 날인 11 월 6 일 난수를 다리 위로 건넌다. 아래는 출발 다음 날인 10 월 30 일과 11 월 2,3, 6 일 일기 전문이다.

 

30일(갑진)

맑음. 일찍 길을 떠나 얼음 위로 로하(潞河)를 건넜다.

지난날에 본 수많은 돛단배가 자취를 감추었으니, 아마도 물이 얼기 전에 모두 돌아간 것 같다. 한낮에 하점(夏店) 점사(店舍)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녁에 삼하현(三河縣)에 이르러 성남 객점(城南客店)에 투숙(投宿)했다. 시초(柴草)를 공급받았다. 감기가 더욱 심해졌다. 계심랑(啓心郞)이 이일선(李一善)을 보내와서 문병했다.

이날은 아침에 50리, 저녁에 30리를 갔다.

 

2일(병오)

맑음. 감기가 조금 나았다.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랐다.
호타하(滹沱河)의 출교(秫橋)를 건넜다. 강물이 반은 얼었다. 사시에 방군점(邦君店)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오시에 다시 길을 떠났다. 계주(薊州)의 큰길로 가지 않고, 사잇길로 갔다. 저녁 늦게 운류하(運流河)에 이르러 객점(客店)에 들었다. 시초를 범양(范陽)으로부터 운반해 왔다. 연경과 요동 도중에서 그 풍속을 자세히 살펴보니, 성시(城市)와 교외에 왕래하는 행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크게 급한 일이 아니고는 남녀가 서로 섞여 다니지 않으니, 이는 상고 시대의 유풍이다. 그러나 상장(喪葬)의 제도는 무너졌다. 장례를 행할 때에는 전적으로 육상산(陸象山 이름은 구연(九淵), 상산은 호임)의 예론을 써서 음악을 연주하여 시체를 기쁘게 한다. 장사 지내는 곳에 비록 석양(石羊 묘 앞에 놓는 돌로 만든 양)은 쓰나, 산기슭의 길지(吉地)를 가리지 않고, 길가의 비습(卑濕)한 곳에 초라하게 묻는다. 심한 자는 시체를 밭두둑 사이에 버려서 바람과 비에 썩고 백골이 저절로 마른다. 애석하다! 명 나라 말기에 상례가 어찌 이와 같은 망측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날은 아침에 40리, 저녁에 25리를 갔다.

 

3일(정미)

맑음. 새벽에 떠났다. 운류하(運流河)를 출교(秫橋)로 건넜는데, 물이 반은 얼었다. 오시에 고수점(枯樹店) 점사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녁에 옥전현(玉田縣)에 이르러 동관리(東關里) 객점에 유숙했다. 시초(柴草)를 바쳐 왔다. 서장관이 와서 문병했다. 우리가 지나온 별산(鼈山)과 고수(枯樹) 사이는 산세가 험준하고, 산성(山城)을 많이 쌓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난번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주민들이 그 예리한 칼날을 갑자기 피했던 곳이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모두 35리씩 갔다.

 

6일(경술)

맑음. 오늘은 동지(冬至) 명절이다. 팥을 사서 죽을 쑤어 일행 사람에게 고루 먹였다. 아침 일찍 떠났다. 야계타(野鷄坨)를 거쳐서 오시에 범가장(范家庄) 충렬사(忠烈祠)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이 사당은 오삼계(吳三桂)의 아버지가 절의(節義)로 죽은 곳인데, 그 소상(塑像)이 아직도 있었다. 여러 날 병으로 신음하고 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었는데, 이제야 다행히 완쾌되었다. 비로소 말을 달려보니 상쾌하기 비할 데 없었다. 난수(灤水)의 3류(流)를 모두 출교(秫橋)로 건넜다. 강물은 반쯤 얼었다. 저녁에 영평부(永平府)에 이르러 남관리(南關里)에 유숙했다. 자진(子珍)과 성서(聖瑞)가 와서 문병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이날은 아침에 40리, 저녁에 20리를 갔다.

 

7일(신해)

맑음. 아침 일찍 떠났다.

남문(南門)으로 들어가니 적루(敵樓) 위에 ‘관해(觀海)’ 두 자가 씌어 있었다. 성(城) 안을 거쳐서 동문(東門)으로 나왔다. 오시에 배음포(背陰鋪) 냇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호행 광록경(護行光祿卿)이 와서 뵙고 술을 바치면서 성의를 표했다.

저녁에 유관점(楡關店)에 이르러 점사(店舍)에 유숙했다. 쇄마부(刷馬夫)들이 길을 가면서 시장 상점의 떡ㆍ국수 같은 물건을 약탈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매양 이를 다스리려 했으나, 죄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오후에 길 위에서 한 한인(漢人)이 꿇어앉아, 쇄마부(刷馬夫)가 엿 등을 빼앗아 먹은 일을 호소했으니, 몹시 해괴한 일이었다. 범인을 색출해서 값을 갑절로 물어주고, 중장(重杖) 80대를 쳐서 일행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초경(初更)에 그저께 보냈던 쇄마주호(刷馬主戶)가 어린 쇄마부를 찾아 싣고 돌아왔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모두 45리씩을 갔다.

 

8일(임자)

맑음. 새벽에 떠났다.오시에 대리영(大里營) 점사(店舍)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산해관에 이르러 서관리(西關里) 객점에 유숙했다. 마패(麻牌)와 아역(衙譯) 차성철(車聖哲)ㆍ김응선(金應先)이 와서 뵈었다. 선래군관(先來軍官)이 출관(出關)한 날짜를 물으니, 초하룻날 관을 통과했다고 한다. 시초를 바쳐 왔다. 호행대통관(護行大通官) 이몽선(李夢先)은 성품이 매우 양순했기 때문에, 부사ㆍ서장관이 마침내 찰원(察院)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을 면했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대군일행은 북경을 떠난 후 하루 쉬고 산해관까지 총 680 리 길을 걸었으니 9 일 동안 하루 평균 75 리 쯤 걸은 셈이다. 북경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며 로하.호타하.운류하.난수를 건넜고 통현.삼하현.옥전현.영평부 남관리.유관점 등을 차례로 거쳐 산해관에 이른 것이다.  

 

청 시기의 로하.호타하.운류하 3 개 물길은 현 <중국전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주) <중국전도> 하북.요녕성 부분도, 2008 년 9 월 중앙지도문화사 인쇄.발행

 

 

청국 정사 <청사고/지리지>에는 로하를 직예성 순천부 통주를 흐르는 북운하北運河로, 삼하현 동쪽에 흐른 호타하는 구하泃河로, 계주薊州동쪽이며 옥전玉田 서쪽에 흐른 운류하는 이하梨河이며 古경수浭水로 설명하고 있다. 난수濡水는 송.거란 시기부터는 란하滦河로 개칭되었지만 대군은 옛 명칭 그대로 기록하였다.(주1) 이러한 지리는 당연히 <한서/지리지> 기록과도 일치한다. 서기전 202 년 전한 건국부터 1911 년 청국 멸망까지 2100 여 년 동안 지형 변화를 일으킬 만한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한/지>에는 <청/지>의 로하를 어양군 어양현을 경유한 750 리 길이 고수沽水로, 호타하.구하를 우북평군 준미俊靡현을 경유한 루수壘水로, 운류하를 우북평군 무종현을 경유한 650 리 길이 경수浭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에 대해 알아 보자. 

 

1) 난수.란하

 

난수.란하로 불린 물길이 중국사서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관자>였다. 서기전 7 세기 춘추시대 사건인 제나라 환공과 관중이 북정하여 산융을 정벌한 후 고죽국을 공격하려고 비이계곡에 도착하여 물길을 건너는 정황만 묘사되어 있다.  전한 시기 편찬된 <설원>에서 처음으로 요수遼水라고 기록되었고 <수경> <한서/지리지> 등에서는 난수濡水로 개칭되어 기록되어 있다. 10 세기 초에 건국된 거란국 정사인 <요사/지리지>부터 란하滦河로 개칭되어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도 란하 이름 그대로 위치 변동없이 흘러내렸다. 

 

 결국 란하는 춘추시대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진시황시기까지는 요수였고 한 시기부터는 난수로, 요 시기부터는 란하로 불렸음을 알 수 있겠다.(주2)

 

란하는 <한서/지리지>에서는 현수玄水가 동쪽으로 흘러 난수로 합류한다며 겨우 난수 두 글자만 언급되어 있지만 5 세기 말 북위사람 역도원이 편찬한 <수경주/난수>에는 발원지부터 바다에 흘러들기까지 전체 경유지가 설명되어 있다. 즉 새외 곧 지금의 독석 부근인 어이진 동남지점에서 발원하여 물음표 ? 모습과 같이 흐르며 중.하류는 전한 시기의 어양.우북평 2 군과 요서군의 영지현 동쪽을 경유한다면서 세세한 지류까지 설명되어 있다. 특히 최하류 지역인 요서군 비여현을 경유하면서 양락현에서 흘러내리는 현수를 <한/지>에서는 동쪽으로 흐른다고 했지만 `蓋自東而注也` 즉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물길이라고 정정할 정도로 정확한 물길 전문 지리지라 할 수 있겠다.(주3) 

 

1929 년 편찬된 청국 정사 원고인 <청사고/지리지>에는 란하 길이가 처음으로 기록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염난수와 같은 2100 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영평부

樂亭 ... 滦河自昌黎入 ... 都行二千一百裡 ...

 

이는 서기 80 년 경 편찬된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에서 마자수를 받아들인 후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흘러갔다는 2100 리 길이인 염난수 곧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요하와 같은 길이이니 난수.란하도 큰 물길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는 지금의 난수.란하 부근에 설치된 전.후한 시기의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 등 5 개 군의 영역과 치소 및 주요 현 위치가 아래와 같다고 주장한다. <수경주/난수> 기록에서 난수가 동남쪽으로 흐르며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 지역을 경유한 후 바다로 들어갔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난수.란하가 위 표시와 같이 흘렀고 후한 시기의 어양.우북평.요서 3 군 위치가 위와 같았을까?

 

우선 <후한서/군국지>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 등의 5 개 군 주석에는 5 개 군 위치를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각각 3200 리, 2000 리, 2000 리, 2300 리, 3300 리 떨어져 있다고 개략적이지만 단순.명료하게 설명되어 있다.  

 

<후한서/군국지>

廣陽郡 高帝置 ...葪本燕國 刺史治(一)

(一)漢官曰 洛陽東北二千里

上谷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二百里

漁陽 秦置 洛陽東北二千里

右北平郡 秦置 洛陽東北二千三百里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광양군까지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2000 리,

상곡군까지는 3200 리,

어양군까지는 2000 리,

우북평군까지는 2300 리,

요서군까지는 3300 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위 기록대로라면 우북평.요서 2 개 군의 치소 사이는 1000 리여야 한다. 즉 위 <중국전도>에 추기한 옥전 곧 우북평군 무종현에서 지금의 산해관 북쪽 지점인 요서군 양락현까지를 1000 리라 볼 수는 있겠다. 현재의 란하가 <수경주> 기록의 그 난수라면 광양.어양.우북평.요서 4 개 군까지의 리 수 기록만으로나 동남류하는 난수가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을 경유한다는 설명으로 보아 위 <중국전도>에 표시한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의 위치는 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인평대군은 전.후한 시기 우북평군 무종현이였고 당 측천무후 시기 개칭된 옥전에서 동쪽으로 난수.란하를 건너 도착한 노룡 곧 전.후한 시기의 요서군 비여현까지를 240 리라 하였다. 그 리 수는 대군일행이 직접 걸은 리 수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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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순천부 通州 府東四十裡 ... 白.楡.漒口三河竝自順義入 楡納通惠河 與白會 是爲北運河

                        三河 府東少北百十裡 ... 北有泃河 自平穀入

                        薊州 府東 少北百八十裡 ... 梨河東自遵化入

            준화직예주 ...西南距省治六百三十裡 ... 梨河古浭水 

            영평부 盧龍 ... 滦河自遷安入 合靑龍河

                        遷安 府西北四十裡 ... 滦河自承德府入 合黃花川河瀑河 又南 左得鐵門關水 入潘家口 古盧龍塞也

주2)

<한서/지리지>

遼西郡 肥如 玄水出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주3)

<수경>
濡水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

<수경주>

(1) 濡水出禦夷鎮東南 其水二源雙引 夾山西北流 出山合成一川 又西北逕禦夷故城東 鎮北百四十里 北流 ... 又東北注難河 難河右則汙水入焉 ... 水出東塢南 西北流逕沙野南 北人名之曰沙野 鎮東北二百三十里 西北入難河 濡難聲相近 狄俗語訛耳 ... 濡水又東南 五渡水注之 水北出安樂縣丁原山 南流 ...  濡水又東南逕盧龍塞 塞道自無終縣東出 渡濡水 向林蘭陘 東至清陘 盧龍之險 ... 余按 盧龍東越清陘 至凡城二百許里 自凡城東北出 趣平岡故城 可百八十里 向黄龍則五百里 故陳夀《魏志》田疇引軍出盧龍塞 塹山堙谷 五百餘里 逕白檀 厯平岡 登白狼 望柳城 平岡在盧龍東北逺矣 ...  濡水又東南 逕盧龍故城東 漢建安十二年 魏武征蹋頓所築也 ... 濡水又東南流 逕令支縣故城東 ... 秦始皇二十二年 分燕置遼西郡 令支隸焉 魏土地記曰 肥如城西十里 有濡水 南流逕孤竹城西 右合玄水 世謂之小濡水 非也 水出肥如縣東北玄溪 西南流逕其縣東 東屈 南轉 西迴 逕肥如縣故城南 俗又謂之肥如水 ... 西南流右㑹盧水 水出縣東北沮溪 南流 謂之大沮水 又南 左合陽樂水 水出東北陽樂縣溪 地理風俗記曰陽樂 故燕地 遼西郡治 秦始皇二十二年置 魏土地記曰 海陽城西南有陽樂城 ... 與大沮水合而為盧水也 ... 盧水有二渠 號小沮 大沮 合而入于玄水 ... 地理志曰 盧水南入玄 玄水又西南逕孤竹城北 西入濡水 故地理志曰 玄水東入濡 盖自東而注也 地理志曰 令支有孤竹城 故孤竹國也 史記曰孤竹君之二子 伯夷 叔齊 讓國于此 ... 濡水自孤竹城東南 ... 濡水又逕故城南 分為二水 北水枝出 世謂之小濡水也 東逕樂安亭北 東南入海 濡水東南流 逕樂安亭南 東與新河故瀆合 瀆自雍奴縣承鮑丘水 東出 謂之鹽闗口 魏太祖征蹋頓 與泃口俱導也 世謂之新河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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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월 고침

 

2/ 1. 드디어 연경을 나서다 

 

 

 

1656 년 음력 10 월 29 일 효종의 친동생 인평대군은 청국 경사에서 진주정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후 귀로에 올랐다. 대군은 한양.연경을 오가는 중 매일 일기를 썻고 후일 <연도기행>이 엮어져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 글은 당시의 요하.요동 및 압록강이 이 지금의 어느 물길이고 어느 지역인지를 밝히려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기 때문에 일기 문장 중에서도 지리 부분에 촛점을 맞출 것이며 북경에서 한양까지의 귀로 중에서도 일부분인 북경에서 압록강까지의 로정만 검증하려 한다. 

 

참고) <연도기행>을 번역한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주소

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6&cate1=Z&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BT_1416A_0030_020_0290&upSeoji=ITKC_BT_1409A

 

아래는 정사 임무를 마치고 지금의 북경을 떠난 10 월 29 일 일기 전문이다.

 

29일(계묘)

맑음. 이른 아침에 떠나려는데, 부사ㆍ서장관 및 영응 중사(領鷹中使)가 올라와서 함께 떠났다.

 

해대문(海岱門)으로 해서 자성 문루(子城門樓)로 나왔는데, 옹성(擁城)은 없고, 적루(敵樓)만 높을 뿐이다. 남쪽 나성(羅城)의 북문(北門)으로 해서 나와서 길 오른편에 있는 묘옥(廟屋)으로 돌아들어가 관복(冠服)을 정제하고 전별연(餞別宴)에 참석했다. 형부 상서(刑部尙書)가 연회를 주관한다고 하는데, 이는 청인(淸人)이다. 연회가 끝나자 약 2리쯤 가서 길 왼편 묘옥(廟屋)으로 들어가 관복을 벗고, 쌍참(雙驂)을 멍에했다. 아역 김거군(金巨軍)과 김덕지(金德之)가 달려와서 작별을 고하기에 온화한 말로 위로해서 보냈다. 감기가 낫지 않은 것을 무릅쓰고 길을 가게 되니, 머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며, 한열(寒熱)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면 떠날 수 없었겠지만, 일단 연경을 나서니 기쁜 마음이 넘쳐흘러서 신음하는 것조차도 잊고 마음이 미칠 것만 같았다.
 
시방원(十方院)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늦게 통주(通州) 서문(西門)에 이르니, 거마(車馬)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간신히 틈을 얻어서 들어가 남라성(南羅城) 점사(店舍)에 유숙했다. 연경 별관 생활의 괴로웠던 일을 회상해 보니 시원하기가 마치 팔찌를 벗어난 매와도 같았다.
 
연경에 사신 다닌 것이 몇 번인지 모르는데, 중행(中行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의 무리의 행악(行惡)과 주구(誅求 강요하는 것)가 갈수록 심하다. 그 끝 없는 욕심을 어떻게 다 채워 준단 말인가. 이것 때문에 노수(路需)도 고갈되었다. 포학을 부리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등창이 생기게 한다. 이것이 모두 흉악한 이일선(李一善)의 소행이니, 대개 사신 올 때 그의 처남(妻娚)을 데려다 달라고 간청하던 것을, 남에게 혐의를 받을 것 같아서 그의 간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자는 일찍부터 불효로 알려져 있는 데다가 이제 그 감정을 사행(使行)에게 폭발시켜서 일마다 말썽을 부리니 더욱 통분할 일이다.
 
예부 계심랑(啓心郞) 한 사람은 대통관 이일선과 아역 박효남(朴孝男)ㆍ김명선(金明善)을 데리고 삼하(三河)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고,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 한 사람과 공부 낭중(工部郞中) 한 사람은 박씨(博氏) 두 사람, 당역(唐譯) 한 사람, 대통관 이몽선(李夢先), 아역 김덕생(金德生)ㆍ윤견(尹堅)을 데리고 관상(關上)에서 연회를 베풀러 왔다. 공부랑(工部郞)은 시초(柴草)를 맡고, 세 역관은 호행(護行)을 맡아서 관상까지 가고 나머지는 모두 봉성(鳳城)까지 호행한다. 청 나라 장수 두 사람이 갑군(甲軍) 20명을 거느리고 관상까지 호송하기로 되어 모두 일행과 함께 떠났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하며 그 비위를 맞추어 주기가 어렵다.
 
연경을 떠나올 때 아문에서 준 전별 금품은, 사신에게는 소와 양을 주었고, 정관(正官)에게는 찬은(饌銀 식사 비용으로 쓰라고 주는 은자)을 주었다. 이 때문에 우장(牛庄)까지는 오직 시초(柴草 땔나무) 만을 지급하고 하정(下程)은 공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관례이다. 이날 55리를 갔다.

 

 

대군은 북경을 떠나는 일이 감기가 낫지 않아 한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고통보다 더 기쁘다고 한다. 청국에 굴복한 지 얼마되지 않은 비상한 시국이라 개인적인 복잡한 감정은 물론이고 진주정사로서의 임무에 대한 부담이 얼마나 컷을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다. 
 

가. 북경.의주 로정의 개요

 

귀로 북경에서 의주까지는 1990 리 육로였고 요택을 가로지르는 로정이였는데 요택을 피해 북쪽길로 돌았다면 대략 2100 쯤이였을 것이다. 귀로 2000 리 내외 로정은 중국 전국시대부터 대군 시기까지 약 2000 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육로 통행 수단은 당연히 도보와 말이 있었을 뿐이고 전쟁 시의 기마부대가 아닌 사신단의 일일 로정은 당연히 보통 사람이 먼 거리를 가면서 하루에 걸을 수 있는 평균 리 수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북경에서 의주까지 로정의 큰 방향도 세월이 지난다고 바뀌는 것이 결코 아니며 로정 중에 건너야 하는 물길이나 넘어야 하는 산 등도 2000 년의 세월이 흘러도 지진이 일어나 지형이 크게 변하지 않은 한 그대로여야 한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 역사 부분 지리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북경.의주 2000 리 거리를 검증할 것인데 짧지도 않은 거리이고 지형과 지리를 효율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4 개 지역으로 나누어 검토하겠다. 

 

 

1) 연경을 나서 산해관으로 

연경 0/0- 통주 55/55- 삼하현 80/135- 운류하 65/200- 옥전 70/270- 풍윤 80/350-사하역 100/450-

노룡 60/510- 유관점 90/600- 산해관 80/680-

주) 지명은 당일의 숙영지이고 앞의 숫자는 당일의 진행 리 수, 뒷 숫자는 북경에서부터의 누적 리 수다.

 

2)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지나다 

산해관 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

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3) 요택을 건너다 

광녕 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삼차하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4) 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으로  

요양 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 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의주 80/1990

 

 

사실 지리는 지리지 문헌 기록에 나타난 지명과 지형을 해설하는 문장만으로는 정확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당연히 지도와 대조해야만 한다. 상상한다 해도 부정확할 수 밖에 없고 의도적으로 변조한 기록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전해져 오는 고지도도 마찬가지다. 부정확하거나 의도적으로 변조한 묘사도 있을 터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된다. 또한 문헌 기록과 고지도 묘사가 판이할 경우 어느 한 쪽만을 신뢰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과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래는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물론이고 재야조차도 수긍하는 북경.의주 로정이다.  

 

 

주) <중국전도> 하북.요녕성 부분도, 2008 년 9 월 중앙지도문화사 인쇄.발행

 

 

아래는 위 중국전도에 표시된 물길을 추출.모사한 모사도이며 역시 북경에서 의주까지의 4 개 구간을 표시하였다.   

 

- 모사도 1

 

 

대군은 일기에서 북경에서 산해관까지 680 리, 산해관에서 북진 곧 광녕까지 500 리, 요택을 건너 요양까지 360 리, 요양에서 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450 리로 총 1990 리를 걸었다 하였고 한국의 강단.재야 사학계는 모두 위 모사도1 에 묘사된 로정으로 해석한다. 어쨋든 북경.의주간 귀로 로정은 물길로는 삼하.란하.대릉하.요택.태자하.요하.압록강 등을 차례대로 건너야 하고 옥전.노룡.산해관.광녕.요양.연산관 등을 경유하여야 한다. 

 

그러면 인평대군 일행이 걸었던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은 과연 위 모사도1에 표시한 적색 실선과 같은 방향과 거리였을까? 

 

답하기 전에 청 시기 간행되었다는 아래 <경판천문전도>를 먼저 보자.

 

 

- <경판천문전도京板天文全圖- 이하 경판도라 함> 부분도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이 제작,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화 했다 함.

Woodson Research Center, Fondren Library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6895389 

 

 

위 <경판도> 부분도에 연경부터 의주까지의 대군 일행 귀로 로정을 표시하면 아래의 적색 실선이 될 것이고 청색 실선은 당연히 당시 흘렀던 로하.삼하.란하.대릉하.요하.혼하.태자하.압록강 6 개 물길이다.  

 

 

<경판도>와 모사도1 에 표시된 인평대군의 귀로 방향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단지 물길만큼은 로하.삼하가 1 물길로 표시된 것을 제외하고 대략 순서나 각 물길의 흐르는 방향과 위치 및 경유지명은 대략 일치한다. 지형 묘사의 정확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이 되는 물길과 방향은 과학적 지도 제작 기법인 축척과 측량에 의해 표시된 현 <중국전도> 표시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결국 <경판도>의 묘사가 부정확하다고 평할 수 있겠다.

 

그러면 각 구간의 거리나 총거리는 어떨까?  거리 측면에서의 평가는 비록 <경판도>의 지형 묘사가 부정확한 점은 있지만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하기에는 조금 이르다.

 

이번엔 1137 년 송나라 사람 황상이 바위에 각자했다는 아래의 <지리도>를 보자. 

 

 

 

아래는 위 <지리도>의 오른쪽.위쪽에 표시한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주요 물길과 지명을 표시하고 북경에서 의주까지의 로정도 표시하였다. 

 

 

<지리도>에 추기 표시한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 방향은 <중국전도> 보다는 <경판도>와 비슷하다.

 

위 <지리도>를 토대로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 있다. <중국전도>의 북경.의주 로정이 <지리도>의 표시보다 동쪽으로 크게 확장.묘사된 점이다. <지리도>의 요하가 흘러드는 바다의 대략 정남쪽 방향에 산동반도의 중심부가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전도>의 요하 하류 남쪽도 산동반도가 묘사되어 있기는 하다. 문제는 <중국전도>에는 요동반도가 가리고 있고 요하의 입해 방향도 <지리도> 요하의 정남쪽이 아니라 서남쪽이라는 점이다. 

 

결국 <지리도>에 묘사된 요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의문이 모두 가신 것은 아니다. 즉 송.거란 시기 요하였을 지금의 란하 위치 서쪽에 별개의 란하가 표시되어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란하가 둘이였다는 말일까? 그것은 아니다. 중국의 어떤 지리지 어느 구석에도 두 개의 란하가 있다는 기록은 없다. 지형이 변할 만큼 큰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으니 란하가 둘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와 요하는 송.거란 시기 이후 동쪽으로 옮겨진 란하.요하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번에도 거란.요국 이후 금.원.명.청 시기 정사 지리지 어느 곳에서도 란하.요하가 동쪽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고려.이조선의 서쪽 국경이 동쪽으로 크게 이동되어 지금의 압록강 위치로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가능성이라고는 청국이 멸망한 이후 어느 시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것 하나 뿐이다.

 

하지만 한국인 모두는 현재까지도 1911 년 청국이 멸망한 이후에 지금의 란하 주변에 있었던 란하.요하가 지금의 란하와 요하로 옮겨졌다고 생각지 않는다. 즉 옮겨졌다는 것은 변조.위작이란 말이지만 변조.위작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지리는 고대부터 이어진 것이고 변함이 없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는 한국사를 연구하는 일본.중국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까지 굳은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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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월 고침

 

1/ 글을 시작하며

 

한국 사회는 100 여 년 전부터 식민사관 관련한 논쟁이 끓이지 않았고 20 여 년 전부터는 동북공정에 대응한다며 부산을 떨고 있다. 지금은 합당한 결말이 났을까? 아니다. 논쟁은 커녕 식민사관.동북공정 논리에 푹젖은 자들이 역사학계를 좌지우지하고 논쟁도 못하게 갖은 술수를 부리고 있다. 

 

그러한 논쟁의 첫째는 아마도 낙랑군에 관한 것이라 본다. 즉 지리 문제다. 환웅천왕의 신시와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 곧 <삼국유사/기이> 항목의 `고조선.왕검조선`을 신화.전설로 치부하려는 짓은 둘째로 해도 될 것이다. 문명 시대의 유적.유물이 잘 보존되기 때문이고 지리 문제가 석명되면 신화.전설은 당연히 역사로 승격되기 때문이다.

 

어쨋든 지리 문제에서 낙랑군 위치는 한.중.일 3 국 역사학계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전투장이라 할 수 있겠다.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는 모두 서기전 108 년 한나라 무제 유철이 우거가 점거하고 있던 조선땅을 공격.점거하고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한반도 평양지역이라 하지만 이는 조작질이고 사기질이며 등신질의 결정판이다. 임나일본부도 낙랑군 한반도 평양설 때문에 주장되는 지리 문제의 일부분일 뿐이고 중국 시조 황제 헌원이 일군 문명이라는 요하문명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문제는 한국인으로서는 표면적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일 수 밖에 없는데 유독 역사를 공부하고 강의한다는 한국사학계는 그러한 자존심마저도 없는 것 같다.   

 

그러면 과연 해결책은 있을까? 

 

당연히 있고 눈만 뜨면 주위에 널려있다. 문제는 한국사학계가 온통 사시斜視이고 반드시 검증해야 될 국경 지리를 일체 검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 한심한 일은 고구려.고려.이조선 시기는 차치하더라도 지금으로부터 100 여 년 전인 대한제국의 국경마저도 정확하게 인식하는 자가 없다는 점이다.

 

정약용이 <강역고>에서 언급한 평양을 한반도 평양이라고 단정하는 한심한 짓거리가 그것이다. 또 이조선 사신들이 500 여년 동안 오간 의주.북경 사이 2100 리 거리를 어떻게 지금의 신의주.북경 사이의 거리라고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결국 북경.의주 사이의 정확한 지리 인식만이 낙랑군.임나일본부.요하문명 등으로 표출되는 식민사관.동북공정 논리에 대응하는 유일한 수단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지리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아래는 출처 불명한 산해관에서 의주까지의 사신 로정을 묘사한 <사행도>다.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는 위 <사행도>의 묘사범위를 지금의 산해관부터 지금의 요하 지역이라 이해한다. 

 

주) 위 모사도는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물길만을 추출하여 표시한 것임.

 

 

하지만 <사행도>는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중.하류에 있었던 청 시기의 산해관.심양과 이조선.대한제국의 의주 지역을 묘사한 것이다. 

 

 

 

결국 이 글은 신채호가 `고대의 요수는 란하`,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라 한 단 두 구절을 석명하는 글이 되겠다. 계연수도 비록 본.지류를 혼동하였지만 동.서 방향으로는 절대 고정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란하를 패수라고까지 주장하였다. 두 선생은 아쉽게도 지금의 란하가 왜 요수.패수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란하가 왜 요하인지를 이글을 통해서 석명하려 한다.

 

1656 년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은 이조선 대신들의 치죄를 번복하도록 주청하는 진주정사의 임무를 띄고 북경을 다녀오면서 <연도기행>을 남겼다. 그 기행문 중 귀로 로정을 통하여 당시의 요하가 지금의 란하인지를 밝히려 한다. 

 

보통 수준의 상식있는 대한인이라면 필자의 논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읽는 이들의 상식을 믿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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