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지여전도

청에서 동병충(董秉忠), 손성(孫成) 등이 처음 성경지(盛京志)를 펴낸 것은 1684년으로 조선 숙종 10년의 일이다. 그 뒤 이 책은 여요증(呂耀曾, 1734년, 34권), 왕하(王河, 1736년, 48권), 아규(阿桂, 1778년 130권) 등에 의해 증보 수정본이 만들어졌다.

 

- 경판천문전도(京板天文全圖)

청(淸)왕조 시대인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에 의해제작되었으며,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화 했다. Woodson Research Center, Fondren Library 소장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6895389

 

 

- 건륭부청주현도지 乾隆府廳州縣圖志

이 책은 홍양길(洪亮吉1746~1809)이 건륭 52년(1787)에 초고를 완성하여 가경 8년(1803)에 간각되었는데, 이는 홍양길 생전의 당대 지리저작으로, 체례는 이길보의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를 모방하였다고 한다. 양계초(梁啓超)가 말하기를, "건륭 말에 홍치존(洪稚存)(치존은 홍양길의 호이다, 필자주)이 저술한 《건륭부청주현도지(乾隆府廳州縣圖志)》 50권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절본(節本: 발췌본)으로, 자료를 좀더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한 것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 책은 궁중에 비장하고 있는 《일통지(一統志)》의 내용을 민간에 전하여 지리지식의 보급에 유익했다 

 

 

 

 

- 역대연혁지도 

1900 년 청국인 양수경 간행

인물 사전에 의하면 양수경은 동치 원년(1862)의 거인()으로 비학파()의 서를 널리 보급시키고 신해혁명(1911) 후에는 고서 ∙ 비판()의 감정과 서작에 몰두했다고 하며 서는 비첩()을 겸수()해서 각 체를 잘 했으나 특히 행서를 특기로 했다고 합니다. / 북경 금석학자, 1902 년 광개토왕비문 탁본을 얻어 해독 시도.

 

- 서한 요서.요동군

 

- 거란.요 황하 변조도

 

 

인도와 중국지도

CARTE DES INDES ET DE LA CHINE
Netherland, Guillaume, Delisle, 1750, 62.7×60.9㎝
기욤 드릴(Guillaume Delisle, 1675– 1726)은 18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도 제작 가문을 형성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클로드 드릴(Claude Delisle)은 법학과 지리학 그리고 역사학에 정통한 지도 제작자였다. 기욤 드릴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지도수업을 받았으며, 1718년 최초의 왕실지리학자가 되었다. 그가 그린「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지도」는 최초의 세부적인 미국 내륙 지도로 알려져 있다. 기욤 드릴은 프랑스 지형도 제작의 태두인 장 도미니크 카시니(Jean-Dominique Cassini)로부터 수학과 천문학을 배운 지도 투영법에 정통한 지도학자였다. 그는 프랑스 과학원의 측량자료를 그 자신이 개발한 투영법을 사용하여 지도화 했는데, 특히 측량 자료가 없는 곳의 지도를 자신의 투영법을 이용하여 보간(interpolation)하였다. 기욤 드릴은 또한 지명 표기를 정확하게 표기한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찍이 아메리카 대륙 특히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주를 대상으로 영국과 지도 분쟁을 벌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 지도는 원래 1705년 프랑스에서 동일한 명칭으로 간행된 것을 1750년 네덜란드에서 재 간행한 것이다. 지도의 내용은 1705년 지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 지도에서는 동해 해역을 ‘동양해 또는 한국해(MER DE ORIENTALE OU MER DE CORÉE)’로 표기하였다. 그는 그의 초기 지도에서 동해 명칭을 동양해와 한국해로 병기하였다. 이전의 지도에서는 동해 해역을 동양해라고만 표시했으며, 이후 지도에서는 한국해로만 표시했다.

 

 

 

 

마닐라에서 아바츠까지의 중국해와 달단해 탐사도 
Carte Générale des Découvertes faites en 1787 dans les MERS DE CHINE et DE TARTATIE ou depuis Manille, jusqu’à Avatscha par les Fregates Francaises la Boussole et l'Astrolabe
France, Philippe Triere, 1797, 49.8×69.2㎝
라 페루즈(Jean-François de Galoup, Comte de la Pérouse)의 항해 경로를 수록한 1797년의『라페루즈 탐사 아틀라스』( Atlas du Voyage de la Perouse)에 삽입된 지도이다. 판각자는 라 페루즈가 트리에르( Philippe Triere)이다.

 

프랑스 국왕인 루이 16세는 해상탐사에서 앞선 영국의 자극을 받아, 프랑스도 이와 유사한 수준의 탐사 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라 페루즈 백작을 탐사대장으로 임명하고 부솔(Boussole)호와 아스트로라베(Astrolabe)호를 주어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을 탐사하도록 했다. 이 지도는 탐사 일정 중 마닐라에서 캄차카 반도의 아바츠까지에 이르는 탐사 일정을 기록한 것이다. 지도에 숫자를 이은 선이 보이는데, 숫자는 통과 날짜이며, 선은 항로를 나타낸 것이다.

 

그는 동해 해역의 이전 명칭인 한국해(Mer de Corée)를 일본해(Mer du Japon)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직접 자신의 이름을 딴 라페루즈 해협(détroit de Lapérouse)을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해협 명칭로 부여하였다. 그는 새로 발견되는 땅들을 승무원의 이름을 붙여 명명하였다.

 

라 페루즈 함대는 1797년 5월 25일 대한해협을 지났고, 5월 27일 당시 서양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았던 한 섬을 발견했는데, 그 이름을 이 섬을 발견한 천문학자 조셉 르포트 다젤레(Joseph Lepaute Dagelet, 1751-1788)의 이름을 따서 다줄레 섬이라 명명했다.

 

그는 섬의 북동부 끝단의 좌표를 북위 37도 25분, 동경 129도 2분이라고 항해 일지에 적었는데, 당시 파리를 기준으로 한 경도기준점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경도 좌표와는 차이가 있다. 프랑스는 19세기 중반까지 파리기준점을 사용했으므로 이후 많은 지도들에서 오늘날의 그리니치 기준 좌표와 달리 표기되었다. 이것이 19세기 중반까지 제작된 서양지도에서 독도와 울릉도의 좌표 혼돈을 야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라 페루즈는 비록 거센 파도 때문에 울릉도에 상륙하지 못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주민들이 배를 건조하는 모습 등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 때 목격한 조선 사람들은 프랑스인들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숲속으로 도망쳤다. 이들이 도망친 것은 낯선 이국인들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지만, 관에서 수색하러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사실은 쇄환정책이 실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울릉도에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울릉도가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라 페루즈의 기록이 입증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울릉도에 조선인들이 거주했다는 기록은 1770년(영조 46)에 편찬된『동국문헌비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우리나라 동해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황여전람도에 표시된 독도와 울릉도를 표시하였으며 울릉도 위치에 Fanlin이라고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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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국경선을 고의적으로 변조한 지도들

 

 

조선왕국도 ROYAUME DE COREE
France, Jean Baptiste Bourguignon d'Anville, 1735, 44×60㎝

당빌은 18세기 중·후반의 가장 위대한 지도학자이다. 이 지도는 프랑스의 중국사 전문가인 예수회 선교사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의 1735년『중국지리 및 역사 기술(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의 4권 422쪽에 수록된 지도이다. 이 지도는 유럽인이 한국만 별도로 그린 최초의 한국지도며, 이후 당빌의 1737년 신중국지도첩(Nouvelle Atlas de la Chine)에도 수록되어 당시에는 한국과 관련한 가장 정확한 지도였다.

이 지도는 청나라의 황여전람도를 참조하였고,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청나라의 봉금지역을 백두산을 비롯하여 압록강, 두만강과 주변의 지역을 조선령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녹둔도 역시 조선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와 같은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선 표기를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당시 프랑스에 이 지역의 정보를 보냈던 레지(Jean-Baptiste Régis) 신부의 이름을 따라 레지선이라 부른다. 독도는 Tchian-chan-tao, 울릉도는 Fan-ling-tao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여러 도시들의 위치를 상세히 표시하였다.

 

 

 

 

S.E. ASIA & FAR EAST China

SDUK( Society for the Duffusion Knowledge )of Useful   1877년.

 

 

 

 

 

China & Japan .

Published  in Henry Teesdale's New General Atlas, John. Dower 1842년.

 

 

 

 

 

아시아도
A New Map of Asia drawn from the latest discoveries
England, Robert Wilkinson, 1794, 27×33㎝
윌킨슨의『A general atlas of the world』에 수록된 아시아 지도로 축척은 1:5,040만이다. 동해 해역은 한국만(G.of COREA)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경계는 점선으로 구분하고 있으나 지도의 축척문제로 인하여 정확한 선이 지나는 장소를 구분하기 어렵다.

 

 

아시아 지도
Carte de Asi divisée en les principaux états
France, Joseph de Laporte, 1795, 26×20㎝ 

조셉 드라포르트의『Atlas Moderne Portlatif』에 수록된 지도로 이 지도첩은 젊은이들의 지리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동해 해역은 한국해(Mer de Corée)로 표기하였고,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는 당빌선의 형태를 취하여 간도 쪽으로 치우쳐 있다.

 

 

 

 

현재의 아시아 

Present Asia
England, Samuel Neele, 1783, 42×28㎝
영국의 닐은 18세기 후반에 많은 지도를 판각하였다. 이 지도는 프랑스 왕실지리학자 보곤디(Robert de Vaugody)의 지도를 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해 해역은 한국해(Sea of Korea)로 표기하였으며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은 당빌 지도와 유사하게 북쪽으로 치우쳐 있다.

 

러시아와 타타르 지도

Charte das Russische Reich und die von den Tartern
Austria, Franz Ludwig Gussefeld, 1786, 64×53㎝
구서팰트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지도제작회사를 경영한 Homann 가문을 위해 일하였다. 이 지도에서 동해 해역은 소동양해를 의미하는 Kleine Orientalishe Meer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에 대한 본느선과 당빌선 논쟁에 대한 해결의 단서를 제공한다. 이 지도의 붉은 선은 랴우둥 반도의 북쪽을 지나면서 조선을 매우 넓은 영역으로 표시하는 듯하다.
즉 본느선을 채택한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백두산 동쪽은 이 붉은 선을 국경으로 채택하지만 서쪽은 당빌선과 유사한 모양의 점선으로 국경을 표시하였다. 즉 본느선은 국경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제주도는 Fongma와 Quelpaerts의 두 개의 별도 섬으로 나타내었다. 

 

 

 

 

 

 

 

 


 

신대달단지도
CARTE NOUVELLE DE LA GRANDE TARTARIE
Netherland, Nicolas Witsen, 1750, 97.5×53.9㎝ 

니콜라 빗젠(Nicolaas or Nicolaes Witsen, 1641-1717)은 암스테르담 시장을 여러 번 역임했던 네덜란드의 정치가이다. 그는 1689년 주 영국 특명대사가 되었으며, 영국왕립학회(The Royal Society)의 회원이 되었으며, 169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영자가 되었다. 그는 취미 생활로 지도제작과 해양소설 쓰기 및 선박 건조에 몰두했으며, 르네상스적인 지식인으로 각국의 외교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특별히 러시아 외교관들과 좋은 친분을 유지하여 러시아의 시베리아 탐사 자료도 접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아버지 얀 빗젠(Cornelis Jan Witsen)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the Dutch West India Company)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지리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

 

지도제작자로서 그의 최고의 역작은 달단지도(Map of Tartary)이다. 20년 동안의 연구 끝에 1690년 시베리아 지도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1692년 후속편인 달단전역에 대한 지리지로서「북동달단지(Noord en Oost Tartarye)」를 편찬하였다. A4 크기의 양단 편집으로 1,000쪽이 넘는 이 책에는 하멜이 습득한 조선에 대한 내용이 하멜 표류기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1692년에는 1643년 사할린 근방에서 행해진 후리스(Maarten Gerritsz Vries)의 일기를 습득하여 이후의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즉 그는 당대 최고의 동아시아와 러시아 전문가였던 것이다. 위의 두 지도 가운데「신달단지도」는 이전의 달단지도를 수정한 것이며, 1730년 세계지도는 그의 사후 출간된 것이다. 이 지도에서는 둘 다 동해 해역을 불어로 ‘동해 또는 일본해(MER ORIENTALE OU DU JAPON)’로 표기하였다. 1712년 Utrecht 조약이 프랑스와 연합국가(Provinces-Unies; 네덜란드와 벨기에) 사이에 맺어져 이후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이에 활발한 교류 활동이 있었으므로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에 빗젠의 지도가 프랑스어로 출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왜 빗젠이 한국해 대신 일본해 명칭을 사용했는가는 결국 네덜란드의 관심이 한국보다는 일본에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에 운영하던 동인도회사의 경영자를 역임한 빗젠에게는 당연히 한국보다는 일본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가 한국해 대신 일본해 명칭을 사용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병기를 하면서 동해 해역에 소동양해를 의미하는 ‘mer orientale’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동해 명칭은 여전히 존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해를 동양해로 표시한 기욤 드릴의 지도가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으며, 또 네덜란드의 지도학자인 반데르아가 동해 해역을 ‘mer orientale’로 불렀다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시아 지도
CARTE DE L'ASIE
France, Ambroise Tardieu, 1821, 54.9×40.8㎝
19세기의 프랑스 저술가 라 아르프(Jean François de La Harpe)의『여행의 역사(Histoire Generale du voyage)』에 수록된 아시아 지도이다. 이 지도의 판각자 타르디유(1788-1846)는 주로 해군지도를 많이 제작하였다. 우리나라 동해 연안은 ‘한국만(G. DE CORÉE)’으로 표기했으나, 동해 해역 전체는 ‘일본해(MER DU JAPON)’로 표기했다. 독도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울릉도를 Dagelet 섬으로 표기했으며, 가상의 섬 아르고노트(I.Argauraute)가 표시되어 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은 당빌 선과 유사한 지리적 범위로 표현하였다.

 

 

 

 

 

 

가칭 [백산대맥도],[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1750년(영조26년) 초에 관에서 발간한 해동지도(海東地圖)라는 지도책에 수록된 것으로 조선의 서.북방에 맞닿은 청.여진과의 접경지역을 그린 지도이다. 이 해동지도를 소장하고 있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해동지도(古大4709-41) : 필사본(회화식)(제작시기: 1750년대 초, 규격: 47.0×30.5cm, 구성: 8책)1750년대 초에 제작된 회화식 군현지도집.

 

이 지도집에는 조선전도, 도별도, 군현지도 뿐만 아니라 세계지도(<천하도>), 외국지도(<중국도>, <황성도>, <북경궁궐도>, <왜국지도>, <유구지도>), 관방지도( <요계관방도>) 등이 망라되어 있다. 민간에서 제작된 지도집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 활용된 관찬 군현지도집이다. 제8책의 팔도총도와 제 4책의 서북피아양계전도는 회화식 대형 전도이며, 나머지 대부분의 지도들은 도지도, 도별 군현지도, 도내 군사적 요충지의 지도 순으로 편집되어있다. 해동지도는 당시까지 제작된 모든 회화식 지도를 망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는 총 8책으로 이루어진 해동지도의 3책에 수록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웹지도검색 5 산해관요동...> http://www.dlibrary.go.kr/Map/HISM_ViewerFrame.jsp

 

 

- 사행도

 

 

[조선여진분계도]

 

 

 

 조선여진분계도의 주기

 

 

 

 

 

 

여지도(輿地圖)집의 조선여진양국경계도(朝鮮女眞兩國境界圖).

 

조선과 여진의 접경을 그린 또 다른 지도 중의 하나로 조선여진분계도와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이 지도는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총 6책으로 구성된 여지도(輿地圖, 古4709-68)지도집 제6책에 수록된 지도이다. 해동지도집 보다 약간 늦은 1736년-1767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집 역시 해동지도집과 같은 류의 전국 군현지도집이고, 많은 부분 해동지도집의 지도를 참고 내지는 모사한 것이 보이며 조선-여진 접경지역 지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평안,함경,만주의 지명을 색깔 별로 구분하고 있는 등, 조선여진분계도 보다는 좀더 세련된 모습도 보인다.

원본 지도집 크기 : 26.5cm×19.1cm

 

 

 

 

광여도(廣輿圖)집의 조선여진양국경계도(朝鮮女眞兩國境界圖).

 

19세기 전반에 간행된 전국 군현지도집인 광여도(廣輿圖 36.8×28.6cm, 필사본(회화식) ,구성: 7책)의 제 7책에 수록된 조선여진양국경계도(朝鮮女眞兩國境界圖)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우적도(禹迹圖)

남송(南宋, 1126~1279)때인 113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화이도(華夷圖)와 함께 중국의 현존 최고(最古)의 고지도이다.

1933년경에 제작된 아래 탁본은 미,의회도서관 소장품이며,석각본은 중국 섬서성 서안의 비림(碑林)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아래의 탁본은 미,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본으로 19c말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標題 :  蘇州府學四圖碑(墜理圖)

年代 :  南宋,淳祐7年(1247)11月
탁본 소장 : 京都大學所藏
석각비 소장 : 소주(蘇州) 석각 박물관
특징 : 소주부학 4도비(蘇州府學四圖碑)란 남송,소주부에서 제작된 [天文圖, 墜理圖, 帝王紹運圖,

         平江圖 ] 네개의 도비(圖碑)를 말하는 것으로 아래 지도는 그 중, 지리도이다.

* '墜理圖'의 '墜'는 '地'의 고어로 '추리도'가 아닌 '지리도'라 읽어야 한다.

복원도 : 출처 www.coo2.net

 

 

 

 

 

- 거란지리지도(契丹地理之圖)

남송(南宋)의 섭융례(葉隆禮)가 저술한 거란국지(契丹國志)에 수록

 

 

 

 

- 조선도

1621 년 명인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림

 

 

-  해운도

 

 

 

- 요동변도

 

 

 

주해도편(籌海圖編)》

 사해(辭海)에서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책이름이다. 명나라 호종헌(胡宗憲)이 제(題)하여 편찬되었고, 그의 막료 정약증(鄭若曾)의 손에서 나왔다. 13권이다. 명대의 왜구(倭寇)를 방어한 일을 기록하였다. 가정(嘉靖) 때의 사건을 중심으로 위로는 명초 및 명이전의 중·일(中日)의 교통상황까지 소급하였다. 처음에 연해(沿海)와 일본지도(日本地圖)·일본사략(日本史略)을 배열하고, 계속해서 분성어왜사의(分省御倭事宜)와 연표(年表)·구종도보(寇踪圖譜)를 열거하였고, 다시 중대한 전쟁과 재난을 당한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경략(經略)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용병(用兵)·성수(城守)·초무(剿撫)·호시(互市) 등에 대해서도 모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부록으로 연해 포방시세(布防時勢) 및 전선(戰船)·무기(武器) 등의 상세도면이 있다."(하정농 주편, 《사해(四海)》(축인본), 상해사서출판사,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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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여도/여지총도

1566 주사본 간행  http://cafe.daum.net/oldkoreanhistory/OOHA/41

 

 

 

- 주해여지도

 

 

 

도리진

 

 

 

강해전도 1812~43

 

 

 

 

 

 

 

 

 

 

- 각성연해구애전도(各省沿海口隘全圖)

 

제작자 : 청(淸), 진매(陳枚). 
제작년 : 淸,乾隆52年至嘉慶17年間(1787-1812)
형태 : 두르마리, 비단바탕에 채색, 크기 31cm X 773cm
소장 :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이 지도는 각성연해구애전도(各省沿海口隘全圖)라 이름 붙혀져 있으며 청나라 궁정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경직도(耕織圖)등을 그린 진매(陳枚)가 제작한 것이다.원래는 한폭의 두르마리 형태이나 웹 게시를 위해 임의로 분리한 것이며,1번도의 요동반도,발해만,산동반도를 시작으로 11번도에 교지(交趾:월남 하노이의 옛 이름)와의 경계에 이르는 해안과 포구, 섬(島)들을 그렸느며,말미인 12번도에서 15번도에는 해남도(海南島)와 팽호열도(澎湖列島)를 그렸다.  

(各省沿海口隘全圖,絹本彩繪,長卷,本圖卷首北起盛京(今遼寧),南至交趾界(今越南),範圍包括中國沿海七省。地圖方位上西下東,陸地在上,海洋在下,視點由海上望向陸地,對行政區域、地理景觀、海防資訊描述詳細,輔以文字敍述行船須知、海防守則。卷末繪有海南島、臺灣和澎湖。)

 

(이하 이미지 확대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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