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에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백성을 이 지경에…"

질타한 70대 의병대장의 유물이 환수됐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19.04.11 09:10:00 수정 : 2019.04.11 12:13:42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척암선생문집> 책판이 환수됐다. 독일의 작은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구입해온 것이다.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1000여장 존재했지만 이번에 환수된 것까지 21장만 남아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척암선생문집> 책판이 환수됐다. 독일의 작은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구입해온 것이다.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1000여장 존재했지만 이번에 환수된 것까지 21장만 남아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폐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무슨 사람이기에 이따위 짓을 합니까.(陛下何爲而爲此)”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황제를 매섭게 꾸짖는 상소문을 올린 이가 있었다.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였다. 상소문의 주인공은 구한말의 의병장인 척암 김도화 선생(1825~1912년)이다. 700자로 구성된 이 상소문은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른 순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 

 

“500년 역사의 왕위와 3000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척암은 “그런데 임금인 당신은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어찌 농사 짓는 자가 토지에서 난 곡식을 서로 매매하듯 하느냐”고 질타했다. 나라와 백성을 빼앗긴 임금은 더이상 임금이 아닌, 여염의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한 것이다. 척암의 춘추 86살이었다. 그리고는 자택의 문에 ‘合邦大反對之家(합방을 절대 반대하는 집)’이라고 써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척암은 2년 뒤인 1912년 88살을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났다. 

■독일 경매장에 출품된 책판을 구입 

 

척암은 본집 39권 19책, 속집 13권 6책으로 구성된 <척암선생문집>을 남겼다. 손자(김헌주) 등이 1917년 생전에 척암이 남긴 글을 모아 편집·간행했다. 이 정도의 문집을 인출하려면 책판은 1000여장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책판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국학진흥원에 단 20장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중 1장도 2016년 미국 하와이대 에드워드 슐츠 교수가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2월 국외 경매에 출품된 한국문화재를 모니터링하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아시아 문화재 500여건이 나온 독일의 작은 경매에서 흥미로운 유물을 검색해냈다. 바로 <척암선생문집> 책판 1장이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전적 전문가 및 유교책판을 전문적으로 연구·관리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과 협의한 끝에 이 유물을 구입한 뒤 11일 공개했다. 

 

 

이번에 확인된 <척암선생문집> 책판 부분과 비교해본 인출본.  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 부분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이번에 확인된 <척암선생문집> 책판 부분과 비교해본 인출본. 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 부분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오스트리아의 한 가족이 오래전부터 소장했던 이 책판은 양쪽 마구리가 빠졌고, 한쪽 면에는 글자를 조각한 부분에 금색 안료를 덧칠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물은 양호한 편이었다. 판심(版心·책장을 접어 양면으로 나눌 때 접히는 가운데 부분)을 확인해보니 <척암선생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이었다. 

‘태극도설’은 북송의 철학자인 주돈이(1017~1073)의 ‘태극도설’에 척암이 주자(1130~1200)의 설명 및 퇴계 이황(1501~1570)과 대산 이상정(1711~1781)의 견해를 참고해서 조목별로 논술한 글이다. ‘태극도설’은 무극인 태극에서부터 음양오행과 만물의 생성 발전 과정을 도해해서 태극도를 만들고 설명을 붙인 것이다. 책판의 환수에는 온라인 게임회사 라이엇 게임즈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찾은 것 

 

이번 문화재 환수는 단순한 책판 1장의 귀환이 아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김상엽 조사활용2팀장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표적인 의병장 중 한 분인 척암 선생의 유물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거쳐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탓에 미처 포함되지 못했던 세계기록유산의 일부를 되찾아왔다는 것도 이번 환수의 또다른 의미”라고 평가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소장된 718종 6만4226장의 유교 책판은 2015년 ‘한국의 유교책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유교책판’은 판각 계획부터 인출·배포 등의 전 과정을 공론을 통해 결정하는 ‘공동체 출판’이라는 조선 특유의 방식으로 제작됐고, 도덕적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표아래 500년 이상 전승된 집단지성의 산물이라는 점이 큰 의미를 갖는다. <척암선생문집> 역시 ‘한국의 유교책판’의 일부이다.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묘소.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과거없이 발탁한 초야에 묻힌 선비를 의미한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묘소.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과거없이 발탁한 초야에 묻힌 선비를 의미한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고종의 ‘애통조’ 밀지 

척암 김도화 선생은 구한말 문장가이자 성리학자로서 영남 유림의 태두로 추앙받은 대학자였다. 그러나 그 이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만든 수식어가 있었으니 바로 ‘70대 의병대장’이었다는 것이다.

 

척암은 25살 때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아 수많은 학자를 배출한 영남학파의 종장인 정재 유치명(1777~1861)의 문하에 들어가 경학과 성리학을 배웠다. 과거를 통한 출세에 고개를 돌리지 않은 척암은 ‘무려’ 68세 때인 1893년 이른바 ‘유일천(遺逸薦·초야에 묻힌 선비를 발탁하는 제도)’으로 의금부도사와 성균관 직강사예(교수)가 됐지만 실제 근무하지는 않았다. 척암의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곧 ‘유일천’으로 발탁된 선비라는 뜻이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고종의 비밀조서 ‘에통조’. 고종은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거병을 독려하는’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제공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고종의 비밀조서 ‘에통조’. 고종은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거병을 독려하는’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제공 

 

1895년 고향 안동에서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던 척암은 엄청난 격변기에 빨려들어갔다. 국모인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진 것이다. 척암의 춘추 71살 때의 일이다. 척암은 조선의 사직과 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영남 척사파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고종은 이 무렵 ‘애통하다’는 뜻을 적은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고종은 “아 슬프다”로 시작되는 ‘애통조’에서 “나의 죄가 커서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고 자책하면서 각지의 의병을 ‘충의지사(忠義之士)’로 북돋았다. 또 이들을 근왕칠로군(勤王七路軍)이라 하면서 영의정 김병시를 도체찰사로, 전 진사 계국량을 감군지휘사로 삼는다고 했다. 고종은 “호서를 충의군, 호남을 분위군. 영남을 장의군, 관동을 용의군, 관북을 해서를 효의군으로 삼을 테니 조정의 명령에 부응하라”고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척암은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문을 올려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을 매섭게 꾸짖었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임노직 관장 제공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척암은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문을 올려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을 매섭게 꾸짖었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임노직 관장 제공 

 

“역신들의 농간에…단발령을 내려 4000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비밀리에 이것을 보낸다. 각 군수와 관찰사는 잘 선택해서 따르라. 의리의 용사를 뽑고 모집해서…재주있는 양민을 모아서 공을 쌓으면…따르지 않는 수령들은 처분해도 좋다…이전의 옛 제도를 회복하라’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애통조’의 대략 내용이다. 고종의 밀지를 받은 척암은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을 올린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의 예를 든 뒤 “왜놈 오랑캐는 만세를 두고라도 기필코 갚아야할 원수이며, 역대 제왕께서 일찍이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놈들”이라고 성토한다. 척암은 이어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일(復警討賊)은 춘추대의이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달려가는 것은 신하된 직분”이라고 천명한다. 

■70대 의병대장의 노익장 

 

척암은 각 문중에 통문을 보내 유림의 중망이 높은 김흥락·권세연·곽종석 등과 함께 안동의병을 조직하여 안동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동의병은 1896년 경군과 일본 수비대에 패해 흩어진다. 이때 안동의병은 72살의 척암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 뒤 안동부를 재점거한다.

 

척암은 영일의 최세윤을 부대장으로 삼고, 영주·예안·봉화·의성·청송·예천·영양·진보 등의 의병과, 제천의 유인석 의병장 및 호좌(충남)의 서상렬 소모토적 대장과 연합작전을 펴서 상주의 함창(문경) 태봉에서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 오합지졸이었던 의병은 무기마저 시원치 않아 정예병으로 맞선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후 척암을 중심으로 다시 전력을 재편해서 다소간의 전과를 올렸지만 경군(관군)의 압력과 해산을 촉구하는 고종의 윤음(임금의 포고문)을 듣고 할 수 없이 해산했다. 척암은 고종의 해산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착암선생문집>.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환수된 책판도 곧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포함될 예정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착암선생문집>.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환수된 책판도 곧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포함될 예정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정말 전하는 무슨 마음을 먹고…” 

비분강개한 척암은 무려 1400여자에 달하는 상소문(‘파병후자명소·破兵後自明疏’)를 올린다. 척암은 “전에 내렸던 애통하다는 교서(애통조)와 해산하라는 포고의 뜻이 서로 상반되니 전하의 백성을 전하의 칼날에 모두 죽게 만들었다”고 고종의 해산명령을 거세게 항의한다.

왕의 군사가 내려와 가혹한 형벌을 일삼고 있습니다…책을 끼고 가는 어린아이까지도 모조리 잡아죽이고 길쌈하던 부녀까지도 역시 대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산골의 나무꾼도 지게를 진채 길바닥에 나뒹굴었으며 논밭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은 쟁기를 잡은채 굶어죽었고 마구 쏘아대는 총알은 우박 퍼붓듯 하고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룹니다.” 

척암은 그러면서 “정말이지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과 마음으로 백성을 이 지경에 빠뜨리는 지 모르겠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그러나 고종은 “그대들의 충정은 충분히 알겠으니 물러나 국왕의 처분을 가다리라”는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언제는 ‘거병하라’고 부추겨놓고 이제와서 ‘충정을 알겠으니 그만하라’고 말리는 나약한 군왕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인가. 

■을사오적의 세가지 죄 

 

척암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에도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다. 척암은 을사늑약을 당장 폐기하라는 상소문(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을 올렸다.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한 것만이 아닙니다. 군주보다 중한 것이 사직이요, 사직 보다 중한 것이 백성인데 백성이 장차 오랑캐의 노예가 되려 합니다.” 이미 81살이 된 척암이지만 견딜 수 없었다. 척암은 ‘을사오적’을 두고 “저 오적이라는 자는 짐승도 더러워서 먹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 있으니 첫째는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는 군부(君父·임금)를 협박한 죄입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10년 8월 결국 국권이 침탈되자 척암은 고종 황제를 지칭하면서 “대체 황제가 뭐하는 사람이야”고 사정없이 꾸짖은 것이다. 척암의 춘추 86살. 그렇지만 “결코 포기하지 말자”고 마지막까지 호소한다. “군신이 한마음이 되어 못을 파고 성을 쌓아 배수진을 파자. 그리고 백성과 더불어 일본과 한판 싸워 결판내자”고 결사항전을 촉구했다. 그러나 만사휴의였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연합뉴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연합뉴스 

 

■척암 김도화와 석주 이상룡 선생 

척암의 절망시가 가슴을 저민다. “하물며 내 아직 살아있으나 아아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네. 올해 여든여섯…살아서 무익했고 죽을 곳조차 없으니 부끄럽다. 충의에 힘쓰라는 아버지와 스승에게….” 하지만 척암의 뜻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척암이 충남의 의병장 서상열에게 보내는 시를 보라. “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늙은 이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 나섰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척암의 정신은 국권이 침탈되자 가족 50여명과 제자 200여명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한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에게 이어진다.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 석주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내는등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선생 뿐 아니라 아들(준형)과 손자(병화) 등 독립투사 9명이 이 가문에서 배출됐다. 뼛속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문이 아닐 수 없다. 

 

 

 

 

이기환의 Hi-story

김부식이 홀대한 가야, 유네스코는 왜 세계유산으로 대접했을까

입력 : 2023.09.24 08:00
히스토리텔러 기자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가야고분군 7곳.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가야고분군 세계유산추진단 제공

“1000년 전 김부식이 천대했던 ‘가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며칠전 한국의 ‘가야고분군’이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7개 가야고분군은 유곡리 및 두락리(전북 남원)·지산동(경북 고령)·대성동(경남 김해)·말이산(경남 함안)·교동 및 송현동(경남 창녕)·송학동(경남 고성)·옥전(경남 합천) 고분군입니다.

유네스코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습니다.

7개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 유물들. 가야 제국은 각각의 문화와 전통을 나름대로 유지하며 성장했다.|가야고분군 세계유산추진단 제공

■천덕꾸러기에서 백조로?

 

이 대목에서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그동안 한국 역사에서 가야의 존재가 얼마나 무시당했습니까.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죠. 맨처음 인용했지만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만 봐도 그렇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3국의 역사만 기술하지 않았습니까. 가야사는 쏙 빼놓았죠. <사국사기>가 아닌 <삼국사기>가 된 겁니다.

완전히 뺀 것은 아닙니다.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백제사’, 즉 ‘백제본기’ 등에는 등장하지 않고요.

다만 ‘신라본기’에 종종 ‘가야국’ 이야기를 끼워 넣었습니다. 기원후 77년(탈해왕 21) ‘가야와의 황산진 전투’를 시작으로 “지원군을 보내 가야를 공격하는 포상8국을 물리쳤다”(209), “가야가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212)는 기사가 보입니다.

또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을 격퇴했다”(481), “가야국 왕이 혼인을 청했다(522)”, “법흥왕이 변방 순행 중 가야국 왕을 만났다”(524)는 내용도 있네요. 급기야 “532년(법흥왕 19) 금관국왕 김구해가 항복했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김구해는 김유신(595~673)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 제왕의 사적을 기록한 ‘본기’에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는 마련했지만 <가야본기>는 빼놓았다. 그래서 <사국사기>가 아닌 <삼국사기>가 되었다. |한국고전 DB

이후 “554년(진흥왕 15)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562년(진흥왕 23) 9월 배반한 가야를 토벌했다”는 가야의 멸망소식을 전합니다.

<삼국사기> ‘잡지·지리’는 ‘김해소경’을 설명하면서 ‘금관국’의 역사를 요약 소개합니다.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가락국 혹은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10대 구해왕에 이르렀고, 532년 항복하여….”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전은 “김유신의 12대조인 수로왕이 기원후 42년 가야를 건국하고, 후에 금관국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부연설명 했습니다. 제법 구체적이죠. 금관가야 만이 아닙니다.

‘대가야국’ 이야기도 <삼국사기> ‘잡지·지리’에 나옵니다.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멸망시키고….”

<삼국사기>에는 ‘가야본기’는 편찬하지 않았지만 ‘신라본기’ 속에 가야관련 기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가야와의 전투, 가야에 보낸 지원군의 활약, 인질로 보낸 가야왕자, 순행중 만난 가야왕 관련 내용을 수록했다.

■가야는 왜 ‘따로 국밥’을 지향했을까

이상하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10대 500년 이어간 금관국과, 16대 520년 존속한 대가야가 분명히 존재했죠.

그쯤되면 ‘금관국본기’, ‘대가야국본기’ 등은 아니더라도 ‘가야본기’ 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은 왜 ‘가야’의 역사를 무시한 걸까요. 일반적인 설명은 이거죠.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삼국과 같이 통일된 하나의 고대 국가를 이룬 적이 없다는 겁니다.

12개(전기) 혹은 22개(후기)의 소국으로 느슨한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겁니다. 가야는 고대 국가의 첫번째 조건인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국’에 편입되기에는 ‘자격 미달’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가야는 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을까요.

가야 연맹 제국은 모두 소백산맥 및 지맥과 낙동강 및 그 지류로 형성된 작은 분지를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비근한 예로 대가야는 고령 서북쪽에 가야산(1430m), 서쪽에 비계산(1126m)과 두무산(1038m)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죠. 이러한 분지로 형성되어 있으니 낙동강 물길로만 왕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일왕국의 길이 어려워졌죠.

분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낙동강을 터전 삼아 살았습니다. 큰 일이 생겼을 때 인근 소국과 연합해서 대처하는 길을 모색했죠. 그렇게 10~20여개 소국이 ‘각자도생’을 원칙으로 성장한 겁니다.

“532년(법흥왕19) 금관국왕 김구해(김유신의 증조부)가 항복했다”는 기사와 554년(진흥왕 15) 신라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기사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562년(진흥왕 23) 9월 배반한 가야를 토벌했다”는 가야의 멸망소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한다.

■다양성의 가치가 평가됐다?

전기 가야 연맹체의 맹주인 금관국(가락국)을 예로 들어볼까요.

낙동강과 바다(남해)를 동시에 접한 금관국은 교역을 통한 경제를 나라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굳이 무력으로 주변 소국을 정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삼국유사> ‘기이·가락국기’에 등장하는 김수로왕 탄생신화를 봅시다.

“서기후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6개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중 한사람은 대가야의 왕이, 나머지 5사람도 가야의 임금이 됐다”고 했죠. 그뿐 아니고요. 통일신라 최치원(857~?)은 <석이정전>에서 흥미로운 대가야 전설을 전합니다.

즉 “가야산신이 천신과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인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인 뇌질청예 등을 낳았다”는 겁니다. 대가야왕과 금관국왕이 형제라는 이야기죠.

그런 점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참 흥미롭습니다. ‘주변국과의 자율·수평적 관계’를 유지했고, 그것을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증거’여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인정된다는 거잖아요.

언제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해 <삼국사기>에서도 ‘자격미달’의 평가를 받았던 ‘가야’였는데….

이제는 자율성·다양성의 모델이라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니….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하기야 금관국 및 대가야 설화를 곱씹어보면 ‘다양성의 지향’, 뭐 그런 의미로도 충분히 해석될 수 있겠네요.

<삼국사기> ‘잡지·지리’조에는 금관국(금관가야)과 대가야국의 역사를 짧게 정리했다. 즉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가락국 혹은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10대 구해왕에 이르렀고, 532년 항복했다”고 했고,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멸망시켰다”고 설명했다.

■만년 2인자의 견제 때문?

각설하고요. 제가 이번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7개 고분군을 훑어보았는데요.

역시 최근 발굴 성과가 두드러진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 눈이 가더군요.

함안은 가야연맹체 가운데서도 아라가야(안라국)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데요.

여러분은 가야 하면 전·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인 금관국과 대가야국 등 2개국만 아시죠.

그러나 전기 연맹체(2~4세기말) 에서도 2인자, 후기연맹체(5세기 전반~6세기 중후반)에서도 2인자로서 존재감을 발휘한 나라가 있었는데요. 그 나라가 바로 안라국입니다. 왜 2등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런 인식 때문에 잘 몰랐을뿐 안라국의 위상은 만만치 않았답니다.

오죽하면 이런 견해가 있어요. 전기의 금관국, 후기의 대가야가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2인자였던 안라국의 견제 때문이었다, 뭐 이런 이야기입니다.

<삼국유사> ‘기이·가락국기’에 등장하는 김수로왕 탄생신화. “서기후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6개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중 한사람은 대가야의 왕이, 나머지 5사람도 가야의 임금이 됐다”고 했다.

■“임나일본부 찾겠다”고 큰소리 뻥뻥

말이산 고분군에는 1.9㎞ 정도되는 구릉에 127기의 대형고분(지름 10~35m)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즐비한 대형 고분 덕분에 함안은 일제강점기부터 주목을 끌었던 곳입니다.

일제가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여기서 찾겠다”고 혈안이 되었죠. 예컨대 일본학자인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는 김해·함안 지역 조사에 나서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분명 여기에 있다. 내 손으로 임나일본부를 찾겠다’(<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고 큰소리 뻥뻥 쳤습니다.

그러나 1910~17년 사이 4차례의 조사결과 구로이타의 장담은 헛소리로 판명됐죠.

“막상 일본부라고 해도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조사결과 일본부의 자취 사라져서 찾을 방법이 없는 게 유감이다.”

한마디로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통일신라 최치원(857~?)은 <석이정전>에서 흥미로운 대가야 전설을 전했다고 한다. 즉 “가야산신이 천신과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인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인 뇌질청예 등을 낳았다”는 것이다. 대가야왕과 금관국왕이 형제라는 이야기다.

■속속 밝혀지는 2인자의 위상

그러나 이후에도 일제가 뒤집어쒸운 ‘임나일본부’의 악령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죠.

그러던 중 1992년 6월6일 아침 신문 배달 소년이 함안 도항리 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을 발견해냅니다.

굴착기로 파헤쳐지기 일보 직전 가까스로 발견·신고한 철조각은 말갑옷이었습니다.

동수묘·삼실총·쌍영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묘사된 것과 거의 흡사한 말갑옷이었습니다. 고구려 벽화와의 친연관계를 볼 때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과 관련있는 유물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2018년 말에는 아라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가야리에서 높이 8.3m에 달하는 토성벽(잔존길이 2㎞ 정도)이 확인됐습니다.

왕궁터에서는 망루, 무기고, 강당, 내무반, 취사반 등 부대 건물터 14개동이 노출됐습니다. 수도방위사령부가 연상됩니다.

또 말이산 13호분에서는 전갈 및 궁수자리 등 125개의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돌이 확인됐습니다.

이중 6개의 별로 구성된 궁수자리는 북두칠성을 닮았다고 해서 ‘남두육성’이라도 하는데요. 북두칠성이 하늘과 죽음을 의미한다면, 남두육성은 땅과 생명을 뜻하죠. 13호분에서는 중국제 모방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제 허리띠장식과 일본 최고위무덤에서만 보이는 녹각제 칼손잡이 등이 출토됐습니다. 강한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죠.

1992년 신문배달소년이 함안 아파트 공사장에서 기적적으로 찾아낸 말갑옷과 둥근고리큰칼. 아라가야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2018년 함안 말이산 13호분에서는 전갈자리와 궁수자리(남두육성) 등 125개의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돌이 확인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제공

■금관과 청자

2021년 7월에도 말이산 45호분 출토 유물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금동관 조각들을 찾아냈는데요.

무엇보다 이 금동관(길이 16.4㎝·높이 8.2㎝)이 백제나 신라로부터 받은 사여 혹은 수입품이 아니라 자체 제작품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아라가야산 금동관은 다소 거칠게 제작되었는데요.

그러나 두 마리의 봉황(추정)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며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아라가야만의 디자인입니다. ‘출(出)’자나 사슴뿔 모양인 신라제나, 풀(꽃) 형태 장식인 대가야제와는 사뭇 다른 독창적인 금동관입니다.4개월여 뒤(2021년 11월) 말이산 75호분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가 또한번 화제를 뿌렸습니다.

5세기 중국 남조(유송·420~479)에서 제작된 연꽃무늬 청자그릇이 분명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천안 용원리와 서울 풍납토성, 영남 옥야리·내동리 등에서 출토된 청자그릇과 쌍둥이라 할만큼 깊은 친연관계를 보였답니다. 청자를 매개로 5세기 동북아시아에서 활발한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가야리에서는 높이 8.3m에 달하는 토성벽이 확인됐다. 잔존 성벽의 길이는 2㎞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왕궁터의 부대시설 안에 있는 2호 건물지. 부뚜막과 돌화살촉 등으로 볼 때 군인들이 상주한 내무반 유구일 가능성이 짙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안라인수병의 정체

이와같은 발굴성과를 계기로 아라가야와 관련된 문헌기록이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삼국사기>의 아라국(안라국·아라가야) 관련 기사가 눈에 띕니다. ‘포상8국의 전쟁’ 기사인데요.

<삼국사기> ‘신라본기·나해 이사금’조는 “209년(나해 이사금 14) 포상 8국의 공격을 받은 가라국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 ‘물계자 열전’은 “포상 8국의 침입을 받은 나라는 (가라가 아니라) 아라”라고 상반되게 표현했습니다. 공격의 대상을 두고 <본기>는 ‘가라’, <열전>은 ‘아라’라고 달리 표현한 겁니다.

지금까지는 이 포상8국의 전쟁이 안라(아라가야)의 배후지원 아래 골포(마산)·칠포(칠원)·고사포(고성)·사물국(사천) 등 8국이 가라(금관가야)를 공격한 사건으로 해석되었는데요.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안라, 즉 아라가야가 포상8국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라는 견해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맞든 안라국의 위상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증거해줍니다.

또하나 주목을 받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광개토대왕 비문>의 고구려 남정(400년) 기사 중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문구입니다. ‘고구려 남정기사’는 광개토대왕이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한 왜를 쫓아냈다는 내용인데요.

그중 ‘안라인수병’의 문구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등장했죠. 그런데 요즘에는 ‘안라’를 ‘안라국(아라가야) 별동대’ 혹은 ‘안라국 수비대’로 해석하는 견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 안라국군대가 고구려·신라편인지, 백제·왜 편인지는 설왕설래 합니다.

어쨌거나 안라국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올 정도로 만만치않은 세력이었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019년 함안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복원 모습. 봉황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아라가야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이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복원·함안군 제공

■국제회의 주도한 안라

최근들어 아라가야의 위상을 영원한 2인자에서 1인자로 올리는 시도도 엿보입니다.

즉 <남제서> ‘동남이열전·가라’조에 “(479년) 가라왕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보국장군 본국왕’에 제수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요. 지금까지는 남제의 작위를 받은 ‘가라왕 하지=대가야왕’이라는 해석이 통설이었는데요.

후기 가야의 맹주가 대가야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죠.

그러나 5세기 중후반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가 말이산 고분에서 출토되자 새로운 해석이 나왔습니다.

<남제서>의 ‘가라왕 하지’는 대가야왕이 아니라 다름아닌 아라가야 왕을 가리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인용하기를 주저했던 <일본서기>의 아라가야(안라국) 관련 기록도 부각됩니다

“임나는 안라를 형(兄) 혹은 아버지(父)로 여겨 오로지 안라의 뜻을 따른다”(<일본서기> ‘흠명기·544)’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안라(아라가야)를 형님으로 모신다는 얘기죠.

<일본서기>를 보면 529년 남부 가야 제국이 안라국을 중심으로 자구책을 모색하고, 이에 안라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하여 새롭게 조성한 고당(高堂)에서 국제회의를 주도합니다.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고, 신라가 탁기탄(경남 밀양)을 멸망시키는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이 국제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안라(아라가야)가 당대의 국제정세를 주도한 유력한 나라였음을 암시해주죠.

말이산 45호분에서 금동관 조각이 출토되는 모습이다. 제작을 위해 뚫음(투조)기법을 구사할 때 문양의 크기와 모양이 매끄럽지도 일정하지도 않다. 다소 거칠게 제작됐다.|함안군 제공

■최후의 몸부림

이 무렵(540년대) 가야연맹은 대가야(북부)와 안라(남부) 등 남북 이원체제로 굳어졌는데요.

안라국은 541년과 544년 두차례에 걸쳐 6~7개 소국 대표들을 이끌고 백제의 사비(부여)에서 1·2차 국제 회담을 엽니다.

하지만 두차례 사비회의는 백제와의 입장차 때문에 결렬되고 맙니다. 안라는 백제의 압력을 무력화시키려고 고구려와 밀통하여 고구려-백제간 독산성 전투를 유발시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백제군의 승리로 끝났고요.(548)

이후 가야연맹은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하게 되죠.

6년 뒤인 554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는 등 대패하게 됩니다.

이때 가야연맹 제국도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게 되었고요. 반백제 독립정책의 선봉에 섰던 안라국은 가야제국중 가장 먼저 신라에 투항합니다.(560) 그후 2년 뒤인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써 가야의 5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요.

여하간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가야역사가 새롭게 부각될 것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해 가야에 대한 연구가 일천한 상태에서 세계유산에 등재된 감이 있어요. 예를 들면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지역을 왜 가야 영역으로 묶는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세계유산 등재가 가야사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네요.(이 기사를 위해 가야고분군 세계유산추진단의 하승철 조사연구실장과 최석화 연구원이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기사와 관련된 자문을 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수로왕에서 월광태자까지>, 푸른역사, 2002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3-왕들의 나라>, 푸른역사, 2004

주보돈, <가야사 새로 읽기>, 주류성, 2017

김경복·이희근, <이야기 가야사>, 청아출판사, 2010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21

동아세아문화재연구소, <함안 말이산고분군 13호분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0

두류문화재연구원, <함안 말이산 고분군 정비사업부지내 유적>(학술조사보고서 50책), 2021

 
 

경상문화재연구원, <함안 말이산 고분군 57·128호, 석1호묘>(발굴조사보고서 89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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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대한민국!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이는 나라이름...

 

大韓民國, 大 (클 대) 韓 (나라 이름 한) 民 (백성 민) 國 (나라 국)

 

대한민국은 원래 大韓民國으로 그 직역은 "크고 위대한 백성의 나라"라는 이며, 대한민국의 약칭인 한국은 큰 나라, "위대한 나라"라는 입니다.

 

즉,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민주주의 사상에 기인...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제 1,2조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호 '대한민국' 발안자를 아십니까?"

역사학자들 거의 몰라… 임정(臨政)서 신석우 선생이 제안

우리 국민 중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3·1운동 81주년을 맞아 새삼 우리 국호의 창안자가 누구인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10여명의 근현대사 전공자들에게 질문했으나 뜻밖에 ‘모른다’는 대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였으며 1948년 8월15일 건국과 함께 계승한 우리의 국호이다.


1919년 4월 10일 오후10시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이었다.


참석 의원은 29명.


처음 ‘대한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이 신석우(申錫雨·1894-1953).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여운형(呂運亨)의원이 반대했다.


“대한(大韓)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신석우가 되받았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대한민국’ 국호가 채택됐다.


어떻게 많은 역사전공자들조차 대한민국 국호의 발안자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한 소장역사학자는 “우리 역사학계가 거시적 흐름을 중시하다 보니 개개의 사안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자연히 ‘신석우’란 인물에 대한 연구나 일반의 인식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신석우는 20-30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던 거목이었다.


임시 의정원 기사록에 따르면 신석우는 국호 제정 말고도 임정 관제에 군무부(軍務部) 증설, 임정 초대 총리에 이승만추천, 임시헌장에 병역(兵役) 포함 등을 관철시키는 등 초기 임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의 언론사에서 굵직한 흔적을 남긴 것은 24년 30세의 나이에 만석꾼 부친을 설득해 8만5000원을 주고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었다.


만성적인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는 신석우의 인수로 재도약 계기를 마련했으며 사장으로 민족의 스승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대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신석우의 활약은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인 신간회 활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27년 2월15일 오후7시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 대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신석우는 사회를 맡았고 벽초 홍명희가 개회를 선언했으며 이어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처음에 이상재 선생이 사양하자 신석우는 “신간회 회장이 되시는 것이 그렇게도 겁이 나십니까”라며 간곡히 설득해 추대를 성사시켰다.


신간회 창립 때 간부 및 발기인은 모두 51명이었다.
그중 조선일보계가 사장 부사장 편집국장 등 9명으로 가장 많았다.


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신석우는 민세 안재홍 선생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상해로 탈출했다.


신용하 교수는 “아마도 전 재산을 쏟아 부으면서 펼쳤던 독립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데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하면서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제정이야말로 신석우라는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라고 밝혔다.


/ 이한우기자

 

이상은 조선일보기사입니다. 조선일보는 원래 민족독립운동가들이 주인 시대와 친일부역자 방응모씨의 조선일보 인수(1933)로 나뉘게 됩니다.

 

올해 2009년이 조선일보 창립 89주년이라고 하는 데, 이는 정확히 틀린 것입니다. 친일매국지를 민족독립지로 왜곡, 조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지요.

 

결국, 친일매국지 70주년이라 해야 맞는 역사적 진실이라 하겠지요.

 

참고로 신석우선생 약력...

 

호는 우창()이다. 일찍이 중국

상하이

[]로 망명하여

여운형

()과 손잡고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고, 유인()신문 《아등()의 소리》를 발간하는 한편,

임시정부

교통총장직을 맡았다. 1924년 일본의 훼방으로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를 인수하여

이상재

()를 사장에 추대,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민족지

로 성장시키는 데 힘썼다. 8 ·15광복 후에 주()자유중국 대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가운데 분이 신석우 선생, 좌측은 신채호 선생, 우측은 신규식 선생

신석우(申錫雨) (1895. 9. 2~1953. 3. 5)

한국의 독립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다,1915년 3월 경성고보(京城高普) 교원양성소(敎員養成所) 출신 이용우(李用雨) 등이 민족정신 고취와 일본인들에게 침탈당한 사업을 한국인 스스로 부흥시킬 것을 목적으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 )를 조직하자, 계원으로 가입하여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한 주식 모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1917년 3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그 후 일본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919년 3월 상해에서 고려교민친목회(高麗僑民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교통총장(交通總長)으로 선임된 그는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입법기관의 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 결정하는 등 국무원(國務員) 구성과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임시정부 기본법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같은 달 개최된 임시의정원 3차 회의에서 경기도 의원, 의원자격심사위원(議員資格審査委員)등으로 선임되어 민족운동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24년 1월 서울에서 최린(崔麟)・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안재홍(安在鴻)・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를 인수하여 상무이사와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언론의 창달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7년 2월 안재홍(安在鴻)・김준연(金俊淵) 등 30여 명의 민족주의장들과 함께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총무간사, 신간회 경성지회(京城支會) 대표로 선임되어 지회 조직 건설에 앞장서는 등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 광복 뒤 1949년 초대 주중대사(駐中大使)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기타] 도서: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774~775.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극기 

 

 

 

출처 : 호모사피엔스
글쓴이 : 저격수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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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이 역사상 조선이라 언급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삼국유사/기이>에 `고조선.왕검조선`으로 설명.기록된 것에 맞추어 환웅천왕의 시대를 고조선이라 해야 하며 소위 `위만조선`의 항목은 대한역대국에서 삭제해야 한다. 국호 조선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조금 더 세밀하게 명명하여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 

 

 

              고조선        환웅 천왕   서기전 3000 년 전후

              왕검조선     단군 왕검   서기전 2333 년 개국

 

              단군부여                       서기전 1000 년 이후     왕검조선의 제후국 부여로 시작하여 서기전 1100 년 경 단군 제위

                                                                                         계승 

              진辰.한韓                      ? ~

              준왕조선                       서기전 220 년 이전 ?    단군부여의 제후국일 것으로 추정, 서기전 195 년경까지 존속   

 

                                  만.우거의 조선땅 점거는 준왕조선을 중국 연나라 사람 만滿이 거짓말로 빼앗아 차지한 80 여 년의 시

                                  기일 뿐이고, 만.우거를 왕검조선.단군부여.준왕조선의 적통으로 인식하는 것은 일본이 기획한 식민

                                  사관일 뿐이기 때문에 적통에서 제외해야 한다.  

              삼국.가야

              고려         왕건               서기 918 년 ~

              이조선     이성계            서기  1392 년 ~

 

 

구한말 개화파,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내가 쓴 '내 인생의 책']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21.02.16 12:05l최종 업데이트 21.02.16 12:05l

소준섭(namoo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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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구한말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헌신한 애국자로만 배웠다. 그래서 그렇게만 알고 자랐다.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로 해 필자는 빈민지역 현장에서 대중조직과 투쟁 활동을 하면서 대중운동론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고심하던 중 책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를 저술하게 됐다. 그리고 1987년 11월, 내 본명 대신 '김종규'란 필명으로 출간했다.
 

 
▲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책 표지
ⓒ 소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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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개화지상주의 그리고 일본의 침략성에 대한 몰이해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에서 개화파의 거사였던 갑신정변이 만약 성공했다면 조선의 자주성은 상실되고 식민지화가 앞당겨지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단언했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역할은 일본공사관에서 돈 빌리고 군대 동원을 요청하고 일본 공사에게 정보보고를 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간 개화파의 위상이 과대평가돼온 것은 일제식민지를 미화하려는 식민사관의 영향이었다고 기술했다.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에서 개화파들이 민중을 지극히 불신했고, 민중의 힘을 두려워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옥균은 조선인 교육에 외국의 종교를 투입할 것을 권했고, 고종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우매한 인민을 가르치되 문명의 도로써"라며 대중을 불신하고 서구숭배주의의 태도를 보였다.

대표적인 개화파 인사인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인민의 지식이 부족한 나라는 그 인민에게 국정에 참여하는 권리를 줌이 불가"하다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개화를 "인간의 천사만물(千事萬物)이 지선지미(至善至美)한 경역에 이름"이라고 규정하면서 개화시대에서 침략과 같은 낡은 죄악은 없다고 단언했다. 실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한 몰이해로서 그 활용물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또 박영효는 민중이란 무지하고 몰상식해 시비곡직을 구별할 수 없고, 한번 민란이 일어나면 거기에 편승, 참혹하고 흉폭한 행위를 제멋대로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는 한편 "금, 은, 동, 철 및 석탄 등의 광산을 크게 개발하되 외국인을 초빙해 관장토록 할 것"을 주창함으로써 제국주의 외국에게 민족 자원을 넘기라는 발언을 했다(일본외무성 일본외교문서 21권 292~311 박영효건백서).

특히 이들 조선 개화파들은 모두 일본의 개화파 거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직접 접촉하면서 그의 개화사상을 받아들였고, 이후 조선의 일본 유학생들은 어김없이 후쿠자와 유키치와 연결돼 그 영향을 받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화를 최대 목표로 조선은 문명개화의 세계적 침투에 저항하는 보수반동 세력의 최후의 아성으로 간주했다. 그는 일본을 서구의 아시아 침략으로부터 동양 전체를 방위하는 맹주국으로 위치시켰으며, 조선은 '문명개화'의 기치 하에 일본에 종속시켜야 할 나라로 파악했다. 그러므로 그의 영향을 온몸으로 익힌 조선 개화파들은 친일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일본의 조종으로 갑신정변 등 정치 행위에 참가하면서 결국 매국의 길을 걷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었다. 실제 개화파들은 동학농민군으로부터 '개화간당(開化奸黨)'으로 배척당했다.

"김치와 밥 대신 빵을 먹자"... '미국화'를 주창한 독립협회

한편 독립협회 역시 지나치게 과대평가됐고, 심지어 독립협회가 당시 가장 유일한 조선의 활로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에서 독립협회는 친미 단체라고 규정지었다. 독립협회는 서구적 교육의 보급에 의한 조선의 서양화, 특히 미국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독립협회의 지도자인 서재필은 "공개강좌나 학교의 설립 및 나라의 전반적인 미국화를 제안"했으며, <독립신문> 1896년 10월 10일 치에는 "조선의 개화란 사람들이 신학문을 배워 구습을 버리고 목면복을 입지 않고 모직과 견직을 입으며, 김치나 밥 대신 고기와 빵을 먹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조선의 기독교화와 식민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비록 조선의 식민지화는 실패했지만,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에서 독립협회 등을 통한 친미파의 부식이라는 미국의 목표는 이후 일제 강점기에서도 지속적으로 추구됐고 마침내 해방 이후 '훌륭한' 결실을 거두게 된다고 기술했다. 예를 들어, 이승만은 독립협회에서 활동해 친미 세례를 받은 데다가 미국 망명을 통해 더욱 친미화했으며 해방 후 미국의 충실한 대변자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내 20대 끝자락의 뜨거운 열정을 불사른 책

스무살 <광주백서>를 쓴 이후 지하 팸플릿 <학생운동의 전망>을 비롯해 계속 운동론과 관련된 저술 활동을 해나갔던 필자는 현장에서 대중들과 활동하면서도 틈틈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독서를 했다. 그러면서 서울 시내 도서관들을 다니며 역사책을 구해 열심히 공부하고 사색했다.

그러한 결과로 집필된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책은 출간되자마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상당히 팔려나가기도 했다(물론 당시는 대부분 지금처럼 인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매절 방식으로 원고지 매수로 계산해 단 한 번 원고료를 받는 형식이었으므로 많이 팔린다 해서 필자가 더 받진 않았다).

심지어 그 책이 북한 쪽에서 나온 책이라는 유언비어까지 돌았다. 아마 저자가 필명을 사용한 데다가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관점과 시각으로 기술된 탓도 있을 테다. 또한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의 표현방식도 그 요인이었으리라. 서중석 교수도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의 내용을 언급하며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필자는 개인적으로 서 교수를 알지 못하며, 그 책을 필자가 쓴 사실 역시 서 교수는 알지 못한다).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한 마디로 내 20대 끝자락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 책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1700년 전 가야인이 찬 영롱한 유리 목걸이…'철의 왕국' 아닌 '유리의 왕국'이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20.09.07 09:34 수정 : 2020.09.0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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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양동리 270호분에서 확인된 1800년전 제작된 수정목걸이. 이 목걸이’는 수정제 다면옥(多面玉) 20점과 주판옥 120점, 곡옥(曲玉) 6점 등 총 146점의 수정으로 구성됐다. 전체 약 142.6cm의 길이에, 육각다면체형, 주판알형, 곡옥형(曲玉形) 등 여러 형태로 수정을 다듬어 연결했다. |문화재청 제공

 

“(가야인들은) 구슬을 보배로 삼아 혹은 옷을 꿰어 장식하고 혹은 목에 걸고 귀에 달았지만 금·은·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삼국지> ‘위서·동이전’)

가야를 흔히 ‘철의 왕국’으로 알로 있지만 실은 ‘유리의 왕국’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은 가야 시대를 대표하는 두 고분인 김해 대성동 및 양동리 고분에서 출토된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 등 목걸이 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7일 밝혔다. 지정 예고된 목걸이 3건은 ‘철의 왕국’으로만 알려진 가야가 다양한 유리 제품 가공 능력도 뛰어났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유물이다.

김해 대성동 76호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수정제 구슬 10점, 마노제(瑪瑙製·수정 같은 석영광물, 말의 뇌수 즉 머릿골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 구슬 77점, 각종 유리제 구슬 2,386점 등 총 2,473점으로 이루어졌다. 평균 지름이 6~7mm 정도로 아주 작은 형태로 다듬었다. |문화재청 제공

출토 정황이 명확하고 보존상태가 좋으며 형태도 완전해서 보물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동안의 발굴결과 가야인들은 수정이나 마노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거나 유리 곡옥이나 둥근 옥을 만들어 목걸이로 착용했다. 구슬의 재질도 금, 은, 유리, 금박 입힌 유리, 수정, 호박, 비취 등으로 다양했다. 형태도 판옥(板屋·편평하게 가공한 옥제품), 곡옥, 대롱옥(대롱처럼 기다란 형태의 옥제품), 다면옥(多面玉, 여러 면을 깎은 옥제품) 등 다채롭다.

보물로 지정예고된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는 2011년 발굴조사 중 목곽묘에서 발견됐다. 6가야 중 하나인 금관가야는 서기 전후~532년까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 지역에 존속한 전기 가야연명채의 맹주국으로 알려져왔다. 가락국이라고도 했다. 목걸이가 출토된 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제341호)은 3~5세기 무렵 금관가야 시대 수장층(首長層)의 공동묘지이다.

양동리 322호에서 확인된 목걸이. 수정제 곡옥 147점, 대형 수정제 다면옥 2점, 마노 환옥 6점, 파란 유리 환옥 418점, 유리 곡옥 1점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보석 총 574점으로 구성됐다.|문화재청 제공

목걸이는 서로 길이가 다른 3줄로 구성되었다. 수정제 구슬 10점, 마노제(瑪瑙製·수정 같은 석영광물, 말의 뇌수 즉 머릿골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 구슬 77점, 각종 유리제 구슬 2,386점 등 총 2,473점으로 이루어졌다. 평균 지름이 6~7mm 정도로 아주 작은 형태로 다듬었다. 맑고 투명한 수정과 주황색 마노, 파란색 유리 등 다양한 재질과 색감을 조화롭게 구성한 것이 특색이다. 유리를 곡옥(曲玉)이나 다면체 형태로 섬세하게 가공하고 세밀하게 구멍을 뚫어 연결하거나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는 등 조형적인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 이 목걸이는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에서 보이는 굽은 옥.

또 다른 목걸이인 ‘김해 양동리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는 1992년 동의대 박물관의 제2차 발굴 조사 중 토광목곽묘에서 발굴됐다. 양동리 고분 270호는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으나 고배(高杯· 높다리 그릇)를 비롯해 토기류나 철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알려 주는 중요한 고분으로 꼽힌다.

이 목걸이’는 수정제 다면옥(多面玉) 20점과 주판옥 120점, 곡옥(曲玉) 6점 등 총 146점의 수정으로 구성됐다. 전체 약 142.6cm의 길이에, 육각다면체형, 주판알형, 곡옥형(曲玉形) 등 여러 형태로 수정을 다듬어 연결했다. 제작 시기는 고분의 형식과 부장품 등으로 보아 3세기로 추정된다. 영롱하고 맑은 투명 무색과 황색, 갈색 등이 약간 섞인 은은한 색의 수정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었다. 형태와 크기가 다른 수정을 조화롭게 배치해 조형성이 매우 뛰어나다. 그동안에는 목걸이를 구성하고 있는 수정(水晶)은 한동안 외국산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학계의 연구를 통해 경상남도 양산(梁山) 등 국내에서 생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수정목걸이는 3세기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지배계층의 장신구다. 3~4세기 가야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 목걸이처럼 100여점 이상의 수정으로만 구성된 사례는 드물다. 가공 기법 또한 요즘의 세공기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양동리 322호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의 곡옥(파란색), 마노구슬(주황색) 세부. |문화재청 제공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는 1994년 동의대 박물관이 목곽묘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함께 발굴된 유물 중 중국 한나라 시대 청동 세발 솥(靑銅鼎·청동정) 등을 통해 3세기 경 축조된 금관가야 시대 고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목걸이는 수정제 곡옥 147점, 대형 수정제 다면옥 2점, 마노 환옥 6점, 파란 유리 환옥 418점, 유리 곡옥 1점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보석 총 574점으로 구성됐다.

특히 경도 7의 단단한 수정(水晶)을 다면체로 가공하거나 많은 수량의 곡옥 형태로 섬세하게 다듬은 제작 방법은 가야인들의 기술 면모를 보여준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3세기 대까지 유행한 가야의 장신구는 수정이나 마노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거나, 유리로 곱은옥이나 둥근옥(球玉)을 만든 목걸이였다.

양동리 322호분에서 출토된 목걸이의 수정다면옥. |문화제청 제공

김해 양동리 322호분에서 출토된 목걸이는 이러한 가야 구슬 목걸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투명한 수정을 육각형으로 다듬고 거기에 붉은색 마노와 푸른색의 유리옥을 더하여 영롱한 빛으로 조화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가야 목걸이 3건은 각각 개별 유적에서 일괄로 발견됐고, 금관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중 많은 수량의 구슬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희귀한 사례이다. 또 가야인들이 신분 위상과 지배 계층의 권위를 장신구를 통해 드러내었음을 실증적으로 말해 준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

 

또한 금과 은 제품을 주로 다룬 신라, 백제인들과 달리 수정이나 유리구슬을 선호한 가야인들의 생활상과 연관이 깊은 작품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070934001&code=960100#csidx89149e2e543677fb2264ae3e0af4b2a

망국을 앞두고 민중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친일파 처단과 의열 독립운동 이야기 1] 한일의정서 불법 체결, 이지용과 구완희

20.05.04 11:34l최종 업데이트 20.05.04 11:34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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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 산속의 광해군 '묘'. 철책으로 에워싸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남양주 산속의 광해군 "묘". 철책으로 에워싸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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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4월 29일 선조는 둘째아들 광해를 세자로 책봉한다. <선조실록> 당일 기사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세자가 동궁으로 나오니 몰려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축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자 자리가 장남 임해군이 아니라 차남 광해군에게 돌아간 것은 임해에 대한 부정적 세평 때문이었다. <선조실록> 1595년(선조 28) 12월 16일자의 3번째 기사는 중국에 보내는 세자 책봉 문서의 임해군 부분을 선조가 고쳐 쓰라고 하명하는 내용인데, 선조는 '임해군이 사냥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다는 표현은 너무 노골적이니 다시 다듬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임해군 집에 불을 지른 백성들

임해군에 관한 가장 단적인 혹평은 1597년(선조 30) 1월 4일자 <선조실록>의 '임해는 어려서부터 불의를 많이 저질렀다'는 선조의 발언이다. 아버지인 선조조차 그렇게 저평가할 정도였으니 피해자인 백성들이 임해에 대해 나쁜 인식을 가졌을 것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집권층에 대한 민중의 반발을 보여주는 1592년(선조 25) 4월 14일자 <선조수정실록>은 백성들이 임해군의 집에 불을 질렀다고 증언한다.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임금의 가마가 떠나려 할 즈음 백성들이 먼저 내탕고(임금의 재산 보관 창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져갔다. 거가가 떠난 뒤 크게 불어난 난민들은 장례원(노비 관련 문서와 소송을 관장하는 기관)과 형조(현 법무부)부터 불태웠다. 두 관서가 공사 노비의 문서들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중략)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현 국방부장관) 홍여순의 집도 불에 탔다. 이들 두 집에 방화가 된 것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난 탓이었다. 유도 대장(현 수도경비사령관)이 몇 사람을 죽여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막을 수가 없었다.
  
백성들은 구한말에도 문제적 고관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런 자들을 죽이려 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밀려 국가의 숨이 막 멈출 지경까지 몰렸던 1592년처럼, 그로부터 310년가량 뒤인 1904년에도 조선의 백성들은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권력자들을 응징하려 했다.

1904년 3월 2일, 백성들은 외부 대신(현 외교부 장관) 서리 이지용과 참서관(공사와 서기관 사이 직급) 구완희의 집에 폭탄을 투척했다. 둘은 2월 23일 황제의 재가도 받지 않고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任權助)가 내민 '한일 의정서(韓日議定書)'에 조인 도장을 찍은 자들이었다.   

한일의정서 불법 체결에 앞장선 이지용
 
 을사오적(왼쪽부터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모습(대구 조양회관 전시 사진)
 을사오적(왼쪽부터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모습(대구 조양회관 전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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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인 1월 23일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은 2월 9일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일본은 그날 바로 서울까지 들어왔다. 다음날인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순식간에 우리나라는 전쟁터로 돌변했다.

하야시는 일본군이 서울에 진입한 즉시 이지용을 앞세워 고종을 알현했다. 하야시는 고종에게 일본에 협력하라고 강요하면서 중립 선언을 전적으로 무시했다. 이틀 뒤인 2월 12일,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브(Pavlow)가 자국 병사 80명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을 떠났다.

하야시는 일본군 제12사단장 이노우에(井上)와 함께 한일 의정서 체결을 강압했다. 반일친로파 탁지부(현 기획재정부) 대신 이용익을 일본으로 압송하고, 이용익과 친한 길영수(보부상의 중심 인물), 육군 참장(현 준장) 이학균, 육군 참령(현 소령) 현상건 등을 연금한 뒤, 이지용과 한일 의정서를 체결했다.

"군사상 필요하면 일본은 조선 땅 어디든 사용할 수 있다"

전문 6조로 된 한일 의정서의 핵심 내용은 제4조로,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때에 맞춰 사용할 수 있다'였다.

한일 의정서를 체결한 일제는 곧바로 우리나라의 토지를 군용지로 광범위하게 점령했다. 일제는 3월 말 통신 기관도 군용으로 쓴다면서 강제 접수했다. 또 경부·경의 철도 부설권이 군사 용도로 일제에 넘어갔고, 6월 4일에는 충청·황해·평안 3도 연안의 어업권도 일본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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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자 관보에 의정서가 실린 것을 본 조선의 국민들은 정부의 처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고, 이윽고 매국노 이지용과 구완희의 집에 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일제는 선산 군수 길영수, 평양 연대의 연대장 최낙주와 제2 대대장 이재화, 이규환 등이 폭탄을 투척한 범인이라면서 즉각 처벌하라고 우리 정부에 요구했다. 정부는 그들의 직위를 해제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이때는 '이미 많은 일본군이 서울 안에 주둔하고 (군사 시설과 군사 행동에 방해가 된다고 인정되는 사람은 사형 등 중형으로 처벌하고, 서울 및 중요 지역에는 경찰 업무를 일본 군대가 대신한다 등의) 군령까지 포고하고 있는 살벌한 때인 만큼 (일제에 맞서는) 문제가 더 확대될 수도 없었다(국가보훈처 <의열 투쟁사>).' 그러나 이지용과 구완희를 대상으로 시도된 처단 거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고, 친일파를 응징하려는 우리 민중의 첫 발걸음이었다. 

이지용과 구완희의 이력을 알아본다

이지용(1870, 고종 7-1928, 대한민국 10)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 친일파 중 한 명으로 을사오적의 1인이다. 고종의 종질(5촌 조카)이자 이최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의 손자이다. 당연히 서울 태생이다.

조선 시대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이 36세인데, 이지용은 17세(1887년, 고종 24) 때 등용문을 통과했다. 천재이거나, 또는 임금의 종질이라는 이유로 부적절하게 등과한 사례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행주 대첩과 이치 대첩을 이끈 권율은 영의정을 역임한 권철의 아들이었지만 45세에 급제했고, 충무공 이순신은 31세에 합격했다. 

대한제국 시대에 황해도 관찰사, 외부 대신 서리, 내부 대신 등을 역임한 이지용은 일제로부터 한일병합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지용은 1910년 10월부터 중추원 고문을 지내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600원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우리나라 1년 국가 예산 1300만 원의 0.0123%이다. 2020년도 우리나라 예산 512조의 0.0123%는 약 6억 3천만 원이다.)

이지용은 1911년 1월 일본왕이 주는 은사금도 10만 원 받았다. 이지용은 1912년 1월 도박죄로 태형 100대를 선고받아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된다. 1915년 9월 백작 작위가 회복되고, 1925년 7월 중추원 고문에 재임명된다. 그 이후 그는 1928년 6월 사망 때까지 매년 3000원의 중추원 고문 수당을 받았다.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대구 조양회관 전시 사진)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대구 조양회관 전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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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완희(1876년, 고종 13-1945년, 대한민국 27)는 1894년 동학 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유학(벼슬 없는 신분)으로 토벌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공주 외곽 이인에서 '공'을 세워 대흥 군수에 임명되었다.

1896년 2월에는 호좌 의병진(대장 유인석, 1842-1915) 소모장 이범직(1868-1896)의 군대가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천안 군수 김병숙을 처단하는 등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자 격돌하여 물리치기도 했다.

구완희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 평안북도 의주 군수였는데, 북진하는 일본군을 접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공'을 인정받은 구완희는 외부(현 외교부) 참서관에 뽑혔다. 그는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함께 한일의정서 조인에 적극 참여했다.

한일의정서 체결에 앞장선 '공'으로 출세가도 달려

그렇게 한일의정서 체결에 기여한 '공'으로 구완희는 경무사(현 경찰청장)를 역임하면서 칙임관 2등(차관급)까지 오른다. 그 후 구완희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 박용화 등과 함께 일본군을 인도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대포를 설치하기도 했다.

을사늑약 후의 서울 상황을 증언해주는 김윤식의 <속음청사>는 '전 의정(영의정) 이근명 등이 상소하고, 또 전 성천 군수 이석종 등이 일진회를 성토하며 일본인의 창귀(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호랑이를 인도하는 귀신)라 하며 윤시병·송병준의 머리 베기를 청하다가 역시 일본 사령부에 잡혀 갇혔다. 경무사 구완희가 알아 하였는데 역시 일본에 붙은 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루때글' 이란 멸칭 들으면서도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 / 44회] 주시경은 썩은 선비들의 '언어유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04.11 15:27l최종 업데이트 20.04.11 15:27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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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한글학회> 입구에 설치된 주시경 선생 흉상. 이곳부터 북쪽으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까지 난 길이 '한글가온길'이다.
 광화문 <한글학회> 입구에 설치된 주시경 선생 흉상. 이곳부터 북쪽으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까지 난 길이 "한글가온길"이다.
ⓒ 유영호 관련사진보기
주시경의 독특한 행보에 비방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적대시하거나 심지어 그의 한글연구는 '두루때글'이란 욕설적인 별명을 만들어 유포시켰다.

"스승께서는 그의 지은 책에 되도록 우리 말을 썼고, 우리 말이 없으면 손수 만들어 썼기 때문에 당시의 고루한 썩은 선비들의 미움을 샀다. 그리하여 스승의 성이 두루 주(周) 자이므로 '두루'를 따고, 이름의 윗 글자가 때 시(時) 자이므로 그 뜻의 '때'를 따고, 이름의 아래 글자가 글 경(經) 자이므로 '글'을 따서 주시경(周時經)의 뜻풀이로 '두루때글'이라고 욕삼아 별명을 지었다 한다." (주석 9)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김영조 관련사진보기
 
주시경은 그러거나 말거나 썩은 선비들의 '언어유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국권을 상실한 마당에서 한글 지키기와 민족의 자주성 회복이 무엇보다 선결과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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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종래의 한문 세력과 새로운 서구 문화 사이에서 자기의 설 자리를 정확하게 정립시키었다. 얼마나 자주적 정신이 뚜렷한가? 여기에 겹쳐 일본 세력이 우리 나라를 완전히 지배하여 정치적으로 예속당한 것은 물론, 일본 세력이 사회, 문화, 경제 등에 속속들이 파고 들어 목을 조르고 있는 암담한 현실에서, 스승의 교육관은 한문 제일 사상, 문화 맹종 사조, 일본의 끈질긴 침략 정책들을 분쇄하고, 우리 나라를 정신적 침략에서 구제하려고 몸부림쳤다.

그 길은 우리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근본을 굳건히 다져서 어떠한 정신적, 문화적 침략에도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을 기르는 길밖에 없고, 그렇게 하자면 금선무가 우리 말과 글을 우리 겨레에게 가르치고 보급시켜서 자기 위치를 찾게 하는 길밖에 없다는 이런 신념이 바로 국어 교육으로 나타났다. (주석 10)


주시경은 이즈음 「큼과 어려움」이란 시를 지었다. 읽을수록 의미가 각별한 내용이다. 지은 이의 시대적 아픔과 결연한 의지가 읽힌다.

 큼과 어려움

 적음으로 큼을 이루고
 쉬움으로 어려움을 하나니
 큼을 적음에서 꾀하고
 어려움을 쉬움에서 힘쓸지로다 
 큼을 적음에서 꾀하며
 어려움을 쉬움에서 힘쓰는 이는
 일어날 것이요
 큼을 적음에서 웃으며
 어려움을 쉬움에서 잊어버리는 이는
 넘어지리로다. (주석 11)


주석
9> 이강로, 앞의 책, 121쪽.
10> 앞의 책, 130~131쪽.
11> 『나라사랑』 제4집, 뒷 표지.

 

아래는 서기 344 년 요서 지역에서 굴기한 모용선비가 세운 연국 기실참군 봉유가 연왕 모용황에게 올린 봉표 내용 중 일부입니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구려.백제 및 우문.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를 옮겼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오고자 한 것이 아님에도 왔으니,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 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럽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종족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진서/재기/모용황>

 

위 기사에서 우문.단부는 선비 단석괴에서 파생된 같은 종족이고 모용씨와 같이 요서군 유성현의 부근 지역이 거주지이니 문제될 것이 없는데 문제는 고구려.백제의 군사가 모용황 도성인 한 시기 요서군 유성현 지역인 용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봉유가 위 봉표를 올리기 2 년 전인 342 년 겨울 10 월 모용황은 극성에서 용성으로 천도한 후 배후에 있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이 수리한 환도성과 새로 축성한 국내성 및 평양성 등을 모두 부수고 궁실을 불태웠고 부고에 있던 누대의 보물과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 주씨,왕비 및 남여 5 만여구를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연유로 봉표문에 고구려 병세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요서군 용성에 나타난 백제 병세는 한.중.일 3 국 역사학계 주장대로 백제가 지금의 대한 땅 임진강.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였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록입니다. 중국 정사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하면 될까요?
더군다나 낙랑군 위치 비정으로 지금도 시끄럽고 또 신채호 선생이 교시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는 짧디 짧은 문장하나도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하면서도 무시한다면 그러한 자들을 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구려를 비롯하여 백제도 지금의 란하 중.하류 동쪽 지역에 있었습니다. 또한 두 나라의 경계라는 소해도 이 땅의 경기만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최하류의 동쪽 지류인 고구려의 동압록이며 조선 시기 압록강의 최하류였을 뿐이고 실상은 만灣이며 진시황 시기부터 문헌에 기록된 바다의 동쪽 일부인 小海소해였던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에 있던 백제가 서쪽으로 바다.灣을 건넌 것이며 정확하게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를 서쪽으로 건넌 것입니다. 

 

또한 백제는 봉유의 봉표 2 년 후인 346 년 기사에도 나타납니다. 

 

永和二年 春 正月...初 夫餘居于鹿山??所侵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 燕王?遣世子俊?慕容?慕容恪慕?根三?? 萬七千??? 俊居中指? 事皆以任恪 遂拔夫?? 其王玄及部落五萬?口 而? ?以玄????? 妻以女

 

346 년 봄 정월...처음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가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모용각,모여근 등 세 장군과 만 칠천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토록하엿다. 준은 영내에서 지시를 하였고 군사의 일은 모용각에게 일임하여 드디어 부여를 소탕하여 그 왕 현과 부락 오만여 구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 현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었다.

 

                                                                                                          <자치통감/ 진기/ ?종성황제 하 영화2>

 

백제도 당연히 요서 지역으로 진출한 백제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여는 현토군 북쪽에 위치했었고 서기 285 년 선비 모용외에게 격파당한 후 일부가 약간 남쪽인 요동군을 거쳐 요서군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부여 일부 세력의 요서 지역 이동은 당연히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남쪽 요서군 지역으로 이동한 일부 부여 세력을 모용황의 용성에 포로로 있는 백제 병세가 아닌 별도의 백제 군사가 346 년에 또다시 녹산 곧 백녹산 혹 백랑산이라고도 추정되는 요서군과 가까운 우북평군 북쪽 지역으로 옮겨온 부여를 공격하여 연왕 모용황 쪽으로 쫓아냈고 모용황이 또다시 부여를 소탕하였다는 기록입니다. 

 

백제가 대한 땅 중앙에 있었다면 당연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한편 아래는 청말민국초 사람인 양수경이 편찬한 <역대연혁지도> 중 서진 시기 낙랑군을 요동 호족 장통이 요동군 지역으로 옮긴 정황을 표시한 <4연강역도>라 하지만 일본에 경도된 양수경이 낙랑군 이치 지역을 지금의 요동만 지역으로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지도라고 판단합니다.  

조작도 - <역대연혁지도/4연강역도>

 

 

 

 

하지만 아래 추기한 것과 같이 한 시기 요동군을 흐른 1250 리 길이 대요수는 동남류하는 물길이였으며 거란.요국 시기 이후 황하로 개칭되었는데 그 황하는 당연히 한 시기 요동군의 망평.양평.방현.안시현 등의 지역을 경유하여야 하고 우북평군에서 발원한 후 동북쪽으로 흘러 요서군 유성현 북쪽으로 지나 동남쪽으로 휘어 요동군 방현으로 흘러오는 백랑수 곧 거란.요국 이후의 대릉하와 합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수경은 동남쪽으로 흐른 대요수.황하를 생략하고 거란 요국 시기부터 요하로 개칭된 한시기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를 요하로 표시하고 마치 대요수였고 지금의 요하처럼 인식시키려 한 것입니다. 결국 1870 년 초부터 일본 명치왕군부가 조선역사를 축소시키려고 꿈꾸던 엉뚱한 지리를 양수경이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 교정도

 

 

 

그러나 위 <4연강역도>가 묘사하는 범위는 지금의 요동만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중류 아주 좁은 지역으로 아래와 같이 적색 사각형 지역을 묘사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란.요국 시기의 지리를 기록한 정사 <요사/지리지>중경대정부 서문에는 요서백제.백제군을  지목할 수 있는 구절이 한 글자가 지워진 채 전해 옵니다.

 

中京道大定府 虞爲營州夏屬冀州周 在幽之分 秦郡天下是爲遼西 漢爲新安平縣漢末步奚居之 幅員千裏多大山深穀唨險足以自固魏武北征從兵大戰 降者二十餘萬 去之松漠 其後拓拔氏乘遼建牙於此 饒樂河水之南溫兪河水之北 唐太宗伐高麗 駐蹕於此 部帥蘇文從征有功 奚長可度率衆內附 力量饒樂都督府 咸通以後丹始大 奚族不敢復抗 太祖建國...중략...有七金山馬盂山雙山松山土河統州十縣九 大定縣白( )故地...

 

중경도 대정부 땅은 우 시기에는 영주, 하 시기는 기주, 주 시기에는 유주라 하였고 진 시기의 군제 하에서는 요서군이라 하였으며 한 시기에는 신안평현으로, 한 말에는 해족이 거주하였다. 폭원이 천 리에 이르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험하여 지키기가 쉬웠다. 위나라 조조가 북벌하여 큰 싸움에서 20 여만 명을 포획하니 송막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탁발씨가 지휘소를 세웠으니 요락하수의 남쪽이며 온유하수의 북쪽 땅이다. 당 태종이 고려를 침공할 때 주필하던 곳이 이곳이였고 당시 부의 우두머리 소문이 이 전역을 종군하여 자못 공이 있었다. 해족의 장 가도가 족속을 이끌고 내부하니 살펴 요락도독부를 맡겼다. 함통(860~873) 이후 거란이 세력을 키우니 해족은 다시는 항거하지 못했다태조(907~925)가 건국하고....중략....칠금산.마맹산.쌍산.송산이 있고 토하가 흐르며 10 주와 9 현을 통할한다. 대정현은 옛 백( )의 땅이다... 

 

위 `大定縣白( )故地` 원문의 괄호에는 `濟`일 수 밖에 없고 16 국 시기의 <송서><남제서><양서><남사><통전> 등에 백제군이 설치된 곳으로 인식할 수 있는 요서군과 진평군 진평현은 거란 요국 시기의 대정현이며 <요사/지리지>를 편찬한 원나라 사람 탈탈이 추정한 요서군 신안평현은 난수.란하의 최하류 지점이기 때문에 부정확한 것이며 난수.란하의 하류 동쪽 지점이며 대요수.황하 중류의 남쪽이고 백랑수.대릉하 중류의 약간 북쪽 지점이며 유성현.영주.조양의 서쪽 지점으로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 <지리도> 부분확대도

 

 

 

 

 

해족이 이땅을 차지하였다는 기록은 수.당 시기부터였고 요락하수는 청 시기의 영금하이며 직예성 승덕부 적봉현 남쪽 지역을 흘러 평천에서 북류하는 노합하와 함께 건창현으로 흘러가 황하 곧 1250 리 길이 대요수로 합류하는 물길이기 때문에 요 시기의 중경 대정부 대정현 위치는 역시 요국 시기 중경도에 속한 아래 흥중부 설명과 같이 백랑수.대릉하의 하류 쯤인 한 시기 요서군 유성현, 북위.수.당 시기 영주, 청 시기 직예성 승덕부 조양현 등의 약간 서북쪽 지역이였습니다.   

 

흥중부는 ... 옛 고죽국 땅이며 한 시기에는 유성현이며 모용황은 유성 북쪽, 용산 남쪽이 복덕있는 땅이라 여겨 용성을 쌓고 궁묘를 지어 천도하고 화룡궁이라 하였으며 모용수가 돌아와 거주했다. 후에 풍발에게 멸망당했고 원위가 취하여 요서군을 설치했고 수 시기에는 고보녕을 평정하고 영주를 설치했다. 수 양제는 주를 폐하고 유성군을 설치했으며 당 무덕(618~626) 초에 영주총관부를 두었고 후에 도독부로 개칭했다. 만세통천(696) 중에 이만영에게 함락되고 신룡(705~706) 초에 유주로 교치하였고 개원 4 (716) 다시 유성을 설치하고 8 년에 서쪽 어양으로 교치하였다가 10 년에 다시 유성을 두었다. 이후 해족이 거주하였고 태조가 해 및 연민을 포획하여 성을 축성하려 한지방에게 명하여 땅을 골라 유성을 수리케 하였다....하략

興中府 本覇州彰武軍節都 古孤竹國 漢柳城縣地 慕容?以柳城之北龍山之南福德之地 乃築龍城構宮廟 改柳城爲龍城縣 遂遷都號曰和龍宮 慕容復居焉 後爲馮拔所滅 元魏取爲遼西郡 隨平高保寧置營州 煬帝廢州置柳城郡 唐武德初開營州總管府 尋爲都督府 萬世通天中陷李萬榮 神龍初移府幽州 開元四年復置柳城 八年西徙漁陽 十年還柳城 後爲奚所居 太祖平奚及燕民將建城 命韓知方擇其處乃完葺柳城...                                                                                                        <요사/지리지> 중경도 흥중부

 

결국 전한 시기 이후 동호의 후예라는 오환과 단석괴의 선비가 차지하였던 지역으로 단부.우문씨 등의 선비족이 있었으며 이후 해.거란으로 개칭되었던 것이니 요서군 유성현 북쪽이며 거란.요국 흥중부 북쪽에 점거.거주하며 `白( )`이라 쓸 수 있는 종족이나 국명으로는 백제 외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래는 비록 일본이 조작하였지만 조작 부분은 지도의 극히 일부분인 황하 중.하류만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되는 19 세기 초 청국인 이조락 등이 간행한 지도입니다. 

 

 

조작도 - 1832년 초간된 청국의 <황조일통여지전도>를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하였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주)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적봉.승덕.조양부 기록에는 황하가 동남류하며 적봉직예주와 조양부 건창현을 지나 조양부로 흘러내린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위 1865 년 일본 간행 <황조일통여지전도>의 동류하는 황하는 변조.조작된 것입니다.  


위 지도에서 황하 중.하류의 원래 경유지를 추기하였듯이 송.요 시기에 간행된 <지리도> 묘사와 같이 대릉하 곧 백랑수가 건창현에서 발원하여 요서군 유성현 북쪽인 용성 곧 영주.조양을 지난 후 동남류하여 요동군 방현인 봉천성 금주부 금현 부근에서 대요수였던 황하와 합류해야 하며 대릉하와 황하 사이에 영금하 곧 요락하수가 흘러와 황하로 합류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란하 상.중류 서쪽 지역의 지형지세는 남쪽인 바다 가까운 곳이 당연히 낮기 때문에 <지리도>와 같이 모든 물길이  동남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5 년 일본간행이라는 <황조일통여지전도>의 황하는 그 지형지세를 무시하고 동쪽으로만 흐르게 변조한 것입니다.

 

한편 중국 사서 중에서 백제흥망지와 요서백제 지역을 추정하면서 명확한 지명을 언급한 것은 아마도 1777 년 청나라 아계 등이 편찬한 <만주원류고>의 아래 글일 것입니다.

 

 

마한에 속했는데 진대 이후로 마한의 옛 땅을 전부 차지하고, 요서.진평 2 군을 겸유해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 마단림이 ``진평은 당나라 유성과 북평 그 일대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실은 지금 금주.영원.광녕의 경내이다.

 

백제의 지경을 상고해 보니,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금주.의주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海.蓋에 걸쳐있고, 동남쪽으로 조선의 황해.충청.전라도의 제도에서 끝이나,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쭉하다. 따라서 유성과 북평을 기준으로 신라가 있는 곳을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게 되지만 경상과 웅진을 기준으로 이를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있게 된다. 또 북위 때 백제가 물길과 공모해서 힘을 합해 고구려를 취하려고 했던 것을 보더라도 동북쪽이 역시 물길과 연접해 있었던 것이다. 

                                                                                                  <만주원류고> 장진근역주 144.145 146 쪽

 

<만주원류고> 찬자 아계 등이 언급한 조선의 황해 충청.전라도 등의 지역은 1621 년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 표시와 같이 조선 시기가 아니라 고려 시기의 황해.충청.전라도이며 그래야만 백제의 강역이 백제군을 제외하고 해.개주부터 남쪽으로 사비성까지 동서 450 리 남북 900 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백제 강역을 현 중국전도에 표시해 볼까요?

 

 

 

 

 

요서군 혹은 진평군 진평현에 설치했다는 백제군 위치는 위의 1,2 중 어느 지역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지역이든 백제 한성과 사비성이 한반도 서울과 공주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산해관과 희봉구 지역이기 때문에 백제군 설치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1,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川澤)·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요, 대다수 민중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일 년 내 소득으로 일신(一身)과 처자의 호구 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치어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끝내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이 해마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여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배고픈 귀신이 아니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 - 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소전오존(素전鳴尊)의 형제” 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라 한 일본 놈들 적은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 일본화(半日本化)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염세절망의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 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 채우기, 단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매는, 콧구멍에는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사전에도 없는 가진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옥문에서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질자가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하며, 진취활발의 기상은 경우(境遇)의 압박에서 소멸되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채찍질·구박·압제를 받아 환해 삼천리가 일개 대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로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 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草芥)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의 의병 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의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거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 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욕보인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일신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보존>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강토를 집어 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인민 생명·재산·자유 보호” “조선인민 행복증진” 등을 거듭 밝힌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2천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제를 못 보느냐?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한 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이에 부하 뇌동하는 자가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

 

 

 

설혹 강도 일본이 과연 관대한 도량이 있어 개연히 이러한 요구를 허락한다 하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일반의 배고픈 귀신이 될 뿐이 아니냐? 참정권을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 개 노예 대의사(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아사의 화를 면하겠는가?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어떤 종류의 자치임을 묻지 않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간판인 <제국>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그 지배하에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헛된 이름으로써 민족적 생존을 유지하겠는가?

 

 

 

설혹 강도 일본이 불보살(佛菩薩)이 되어 하루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환부하며, 내정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헛된 이름의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한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종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쇠망한 인도족·유태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하나는 금전의 힘으로 그 조상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하나는 그 토지의 넓음 과 인구의 많음으로 상고(上古)에 자유롭게 발달한 문명의 남은 혜택을 지킴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 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람의 피를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 데서 문화를 발전 혹 지켰던 전례가 있더냐?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어 대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 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 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의거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3, 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1은 외교론 이니, 이조 5백년 문약정치(文弱政治)가 외교로써 호국의 좋은 계책으로 삼아 더욱 그 말세에 대단히 심하여 갑신(甲申)이래 유신당(維新黨)·수구당(守舊黨)의 성쇠가 거의 외원의 도움의 유무에서 판결되며,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갑국을 끌어당겨 을국을 제압함에 불과하였고, 그 믿고 의지하는 습성이 일반 정치사회에 전염되어 즉 갑오·갑신 양 전역에 일본이 수십만 명의 생명과 수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노 양국을 물리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하는 이들은 일검일탄으로 어리석고 용렬하며 탐욕스런 관리나 국적에게 던지지 목하고, 탄원서나 열국공관(列國公館)에 던지며, 청원서 나 일본정부에 보내어 국세(國勢)의 외롭고 약함을 애소(哀訴)하여 국가 존망·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병> - 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 천 년 만에 처음 당하던 치욕에 대한 조선민족의 분노적 표시가 겨우 하얼빈의 총, 종로의 칼, 산림유생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십 년 역사야말로 용기 있는 자로 보면 침을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어진 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러고도 국망 이후 해외로 나가는 모모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전쟁(日美戰爭)·일로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의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사조약의 당시에 열국공관에 빗발 돋듯 하던 종이쪽지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년의 헤이그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메,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전쟁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써 전쟁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에 성패를 생각지 않고 의병을 모집하여 아관대의로 지휘의 대장이 되며, 사냥 포수의 총 든 무리를 몰아가지고 조일전쟁(朝日戰爭)의 전투선에 나섰지만 신문 쪽이나 본 이들 - 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리할 용기가 아니 난다. 이에 “금일 금시로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장관이나 사졸감까지라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감각되어, 그 준비론의 범위가 전쟁 이외까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겠다, 상공업도 발전해야겠다, 기타 무엇 무엇 일체가 모두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다. 경술 이후 각 지사들이 혹 서·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혹 시베리아의 찬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돌아가며, 혹 경향(京鄕)에 출몰하여 십여 년 내외 각지에서 목이 터질 만치 준비! 준비!를 불렀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이 없는 단체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의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4,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는가?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 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 <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을 양 세력 곧 신·구 양 상전의 누가 더 어질며, 누가 더 포악하며, 누가 더 선하며, 누가 더 악한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할 뿐이요, 직접의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목을 베어 백성을 위로한다.”가 혁명의 유일한 취지가 되고 “한 도시락의 밥과 한 종지의 장으로써 임금의 군대를 맞아들인다.”가 혁명사의 유일미담이 되었거니와,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 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팽창의 열도가 숫자상 강약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해진 판단에서 이탈하여 돈 없고 군대 없는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들도 쫓아내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는가?.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다.

 

 

 

일반 민중이 배고픔, 추위, 피곤, 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 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여 뭇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일로가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활 잔포한 강도 일본이 필경 쫓겨 나가는 날이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폭탄을 한번 던진 것만 못하며 억 천 장 신문 잡지가 일회 폭동만 못할 지니라.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궐 안 한 때의 활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분격하여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언뜻 보였지만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폭력> 양자의 그 하나만 빠지면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를 내며 장렬한 거동이라도 또한 번개같이 수그러지는 도다.

 

 

 

조선 안에 강도 일본이 제조한 혁명 원인이 산같이 쌓였다.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개시되어 “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리라”, “일본을 쫓아내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구호를 가지 고 계속 전진하면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지니, 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후면에는 어두운 함정이요, 나아가면 그 전면에는 광명한 활기이니, 우리 조선민족은 그 처절하고 씩씩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 - 암살· 파괴 ·폭동 - 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꾼·매국적

 

4)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 할 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

 

 

 

5,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 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제1은, 이족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민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족 전제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적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족통치를 파괴함이니라.

 

 

 

제2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적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적 조선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함이니라.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을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 약탈제도를 파괴함이니라.

 

 

 

제4는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 위에 강자가 있고 천한 자 위에 귀한 자가 있어 모든 불평등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박탈, 서로 질투·원수시하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민중을 해치다가 말경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해치어 민중 전체의 행복이 필경 숫자상의 공(空)이 되고 말 뿐이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함이니라.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전통적 문화사상의 종교·윤리·문학·미술·풍속·습관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이바지하던 도구가 아니더냐? 일반 민중을 노예화하게 했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 계급은 강자가 되고 다수 민중은 도리어 약자가 되어 불의의 압제를 반항치 못함은 전혀 노예적 문화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니, 만일 민중적 문화를 제창하여 그 속박의 철쇄를 끊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은 권리 사상이 박약하며 자유 향상의 흥미가 결핍하여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할 뿐이다. 그러므로 민중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함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新朝鮮)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1923년 1월

 

 

 

 

 

조선의 도읍은 한양이였고 그 위치는 지금의 서울이였습니다.

이 한양.서울의 지세를 설명한 기록이 1530 년 이행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京都 상上인데 아래와 같습니다.   

 

`古朝鮮 馬韓地域 北鎭華山 有龍盤虎踞之勢 南以漢江爲襟帶 左控關嶺 右環渤海 ...`

`고조선과 마한 땅이다. 북쪽으로는 화산으로 진을 삼았는데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지세이다. 남쪽으로는 한강으로 옷깃과 같이 둘르게 하고 왼쪽으로는 관과 영으로 막고 오른쪽으로는 발해가 둘려 있다.`

 

현재 한국사학계는 위 설명을 고조선.마한에 속했던 지금의 서울 지세를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설명 중에서 한강은 대한민국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인데 화산이니 관령 등은 조금 모호하지만 서울 주위에 있는 험한 산들이려니 여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해라니요?

뜬금없이 발해가 왜 기록되었을까요? 

혹시 황해를 발해로 잘못 쓴 것은 아닐까요? 

또 오른쪽이란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 볼 때의 기준으로 오른쪽이란 뜻이며 서쪽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면 혹 고대 어느 시기에 대한반도 중앙 지역의 서쪽 바다를 발해渤海라고도 하였을까요? 

 

 

발해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 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지금의 중국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북쪽에 동서 방향으로 길게 펼쳐진 바다를 말하며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에 의하면 발해와 황해를 가르는 기준은 요동 남쪽 끝에 위치한 여순구였으며 이는 조선 시기 모든 선학들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순을 기점으로 반도의 서쪽으로 나가면서 요하구.대소릉하구를 지나 산해관까지를 발해안이라 하고 그 동쪽인 벽류하구.장하구.대양하구를 지나 압록강까지를 황해안이라 한다

`自旅順循半島以西 歷遼河口大小凌河口 至山海關 爲渤海岸 以東歷碧流河口莊河口大洋河口 至鴨錄江 爲黃海岸`

 

개략도 - 현 중국지도 개략도

 

 

 

사실 발해가 오른쪽에 있고 서쪽 바다일 수 밖에 없는 곳은 지금의 요동반도 지역 외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 경도인 한양의 위치가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이해하는 대한인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지금의 서울 지세를 묘사한 것이라면 아마도 그냥 바다라고 했거나 서해라고 하였을 것이며 만약 청국의 지리지를 보았다면 황해라고는 했을 것입니다. 어쨋든 지금의 서해를 발해라고 주장할 만한 선학들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의 관찬 지리지 기록에서 한양의 서쪽 바다를 왜 발해라고 하였을까요?

 

나는 발해 문구가 오기가 아니라 정확한 묘사라고 판단합니다.

 

강의 북쪽에 있는 지명은 강명과 북쪽 땅의 뜻인 양을 붙쳐 명명하였는데 이러한 예로는 요양.심양 등이 있으며 조선에서도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으로 한양漢陽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 땅에도 한수가 있었고 위례성에서 한수 부근으로 천도한 백제는 한양이라 하지 않고 한성漢城이라 했습니다. 또한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에서 건국되었고 낙랑군은 대한반도 평양 지역이 아니라 발해 북안 지역인 지금의 중국 요녕성 건창 부근에 설치되었었습니다.

 

따라서 <승람>의 발해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 아니라 발해 북안 지역에서 흥망한 백제 한성의 지세를 정확하게 설명한 것인데 <승람> 편찬자들이 백제의 한성과 조선의 한양을 동일한 지점으로 잘못 인식한 점도 있지만 부주의하게도 백제의 한수가 흘러드는 발해를 자구하나 건들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에 서술된 건국설과 같이 시조 비류.온조 형제 일행이 고구려에서 남하하면서 차례대로 건넌 패수.대수와 천도하려고 건넌 한수 등의 3 개 물길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지금의 서해.황해가 아니라 지금의 산동.요동반도 북쪽에 있는 발해로 들어갔슴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사실 패.대.한수가 모두 흘러들어간 발해도 정확한 설명은 아닙니다. 패.대.한수가 흘러드는 곳은 당시 요동군으로 흘러드는 대요수.염난수가 합쳐진 후 발해로 흘러들기까지의 최하류 동쪽 지역이였고 대요수.염난수 두 물길이 합쳐진 후의 최하류 정황은 정확하게는 만灣이였지만 강폭이 워낙 넓은데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며 강폭이 점점 확대되면서 남쪽에 있는 발해 해안선과의 구분이 모호하여 고대로부터 바다, 요해 또는 창해로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그 대요수.염난수의 위치는 지금의 란하 서북쪽 본류와 정북쪽 지류였습니다. 

 

추정도 - 신채호가 인식한 패수 곧 해성의 어니하와 정약용이 국경 패수로 비정한 압록강 및 평양성 패수로 비정한

            능성강 및 백제 한성으로 비정한 저탄강 지류 한수와 고려 남경 위치

 

 

 

 

백제 시조 비류.온조가 남하하면서 건넜다는 패수.대수.한수가 흘러들어간 물길은 정확하게는 발해가 아니라 대요수.염난수가 합쳐진 후의 만灣이였으며 패.대수가 흐르는 지역은 당시 한나라 낙랑군 지역이였고 비류.온조 형제는 고구려에서 남하하면서 낙랑군 서쪽 끝 지역을 흐르는 패.대수를 건너 낙랑군 경계 밖 마한 땅인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하였던 것입니다. 이곳은 후한 말 공손연이 설치한 대방군 지역이였기 때문에 대방고지라고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 경도 지세 기록에 발해가 나타난 것은 <승람> 편찬자들이 백제의 흥망지를 정확히 인식하지도 못하였고 게다가 너무 게을러서 `발해` 자구를 삭제할 생각도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승람> 경도의 발해 기록 때문에 백제가 지금의 대한반도 서울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최하류 중 압록강과 하류하는 지점에 있는 요동군의 남쪽이며 낙랑군의 서쪽인 마한 땅에서 건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백제의 강역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추정도 - 요서백제.백제 강역 추정도

 

 

 

 

식민사관 지리관을 맹종하는 한국사학계는 한 시기의 낙랑군 위치를 대한반도 평양 부근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낙랑군의 서남쪽 지역인 대방고지에서 건국하였다는 백제의 위례성 위치도 대한반도 서울 북쪽 지역 어디였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만든 조선 역사 축소.조작 결과물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실례일 것입니다.

 

한편 백제 강역이나 한성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 시기에도 약간 혼란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나라의 중심이 지금의 한강 유역이였던 조선 500 여 년 동안 일부 선학들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에 기록된 한수를 당시 한양 남쪽을 흐르는 지금의 한강이라고도 인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지도 - 1823 년 한치윤.한진서가 편찬한 <해동역사>에 실린 삼국분계도

 

 

 

 

하지만 위 한치윤.한진서의 <삼국분계도>는 명확하게 조작된 것입니다. 비록 조선 일부 선학들이 백제의 한수를 조선의 한강으로 인식했을지언정 대요수.압록강.백두산의 위치는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대요수는 지금의 란하로, 압록강은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 청룡하로, 백두산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조양 북쪽에 있는 노호산 등이였기 때문에 지금의 압록강, 지금의 백두산을 묘사한 위 <삼국분계도>는 일본인의 조선강역 축소.조작 시각일 뿐입니다. 또한 김정호가 간행했다는 <대동여지전도>도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지리관일 뿐입니다.

 

또 정약용은 백제 시기의 한수를 고려의 개성 서쪽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저탄강 최하류의 동쪽 지류로 인식하였으니 곧 고려 시기의 남경인데 이 지역 역시 낙랑군의 서쪽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백제의 흥망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강역고/백산보>에서 백산을 상세하게 설명하였고 이는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 봉천성의 해룡부.흥경부.장백부 등의 장백산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동시에 봉천성 해룡부.창도부.봉천부.봉황성직예구 등에 기록.설명된 당시의 요하와 압록강이 지금의 란하와 그 동쪽 지류인 지금의 청룡하를 지목한 것이기 때문에 정약용도 요하를 지금의 란하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청국 건륭제 시기 홍양길이 편찬한 <건륭부청주현도지>에 실린 아래 심양도(가칭)와 같이 발해는 정약용의 시대에도 조선 지역의 바다 이름이 아니였습니다.

 

고지도 - 청 건륭제 시기 편찬된 홍양길의 직예성 산해관.봉천성 성경 심양 지역 지도

 

 

 

추정도 - 위 <건륭부청주도현지>의 심양도가 묘사하는 범위

 

 

 

고조선.마한 땅이며 동시에 백제 초기 강역과 도읍인 위례성.한성은 지금의 란하 최하류 동쪽 강안에 있었으나 고려.조선 시기에는 백제의 패.대.한수 지역이 이미 거란.금.원.명.청국 강역으로 되었고 고대 지리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엉뚱하게도 개성 서쪽을 흐르는 저탄강 최하류의 동쪽 지류인 한수를 패수로 비정하여 고려의 남경이였던 지역을 백제 한성으로 추정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식민사관에 젖은 이 땅의 역사학계는 당 시기의 백제 강역과 지형지세를 설명한 <구당서>에 언급된 소해를 현재의 경기만으로, 대해를 지금의 남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舊唐書/列傳/東夷/百濟國

百濟國本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裏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之越州 南渡海之倭國 北渡海之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 其地自此爲新羅渤海靺鞨所分 百濟之種遂絶

백제국은 원래 부여 별종들의 나라이고 마한 옛 땅에 나라를 세웠었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6200 리 떨어져 있고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있었고 동북쪽으로는 신라에 닿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에,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국에,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고구려에 닿는다. 백제왕은 동.서 2 개 성에 거처했었다. ... 백제 땅은 (황폐.훼손되고 점차 신라가 所據- 차지-하여 여융은 감히 옛땅으로 돌아갈 생각도 못하고 죽자 손자 경이 대방군왕을 습봉받게 된 이후) 신라와 발해말갈에게 나누어지고 결국 백제 종족은 멸절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대수.한수는 패수 남쪽 지역을 흘렀으며 패수.대수.한수는 모두 서쪽으로 흘러 당시의 대요수.염난수가 바다로 들어간 요동군 안시현의 남쪽 바다로 들어갔기 때문에 백제 강역을 대해 곧 발해의 북쪽, 소해 곧 대요수.염난수가 합쳐진 灣의 남쪽이라고 묘사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백제 강역은 대한반도 중앙이 아니고 지금의 란하 하류가 시작되는 지점의 동쪽 강안일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이를 <만주원류고> 찬자들은 해성.개평 등의 지역이였다고 한 것입니다.

 

 

 

 

 

 

 

 

 

 

1780 년 6 월  25 일 연암 박지원은 한번쯤 밟아보길 원했던 청나라 땅 연경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삼종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70 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정사가 되었고 이때 정사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신단 일행에 끼어  연경으로 향하는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박지원은 의주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1 박을 노숙한 후 청나라 관문인 책문을 통과하여 봉황성.요양.심양을 지나 지평선만 보인다는 요야도 건너고 이윽고 요하.요택.대릉하를 차례로 건너 산해관을 경유하여 북경에 도착합니다. 


참고도- 현 한국역사학계가 추정하는 의주에서 연경.열하까지의 로정 추정도


 


그런데 사신단이 북경에 도착하고 보니 건륭제의 만수절 연회는 북경에서 북쪽으로 700 리 떨어진 승덕부 열하산장에서 열린다고 하며 급기야 조선 사신단은 열하로 오라는 건륭제의 칙지까지 도착하니 박지원을 포함한 조선 사신단은 늦지 않으려고 매일 밤까지 강행군하는 4 박 5 일의 길을 달려 열하에 도착합니다. 이 열하까지의 로정은 조선 사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밟는 것이라 합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막북행정록>에서 북경에서 열하까지의 로정을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설명하였습니다.


熱河皇帝行在所...在皇城東北420里 出長城200餘里 按志漢時要陽白檀2縣屬漁陽郡 元魏時密雲安樂2郡邊界 唐時爲奚地...今我使倉卒被詔晝夜無行5日始達默計途程己非400餘里 及入熱河與山東都司학成論程里...初至熱河者成言大約口外去京師700餘里...聖祖特爲剪站爲400餘里 其實700 餘里...自古北口驛置北出50里曰靑松爲1站...又50里曰欒河爲1站 今渡欒河至熱河爲40里則自古北口至此摠計256里...

 

하에 있는 황제행재소는 황성에서 동북쪽으로 420 리 떨어져 있는데 장성을 나가 200 여리 지점이다. 지리지를 살펴보면 한 시기에는 요양.백단 2 현 지역이며 어양군에 속했고 원위 시기에는 밀운.안락 2 군의 변두리 경계였고 당 시기에는 해족의 땅이였다....지금 우리 사신들은 창졸간에 조서를 받아 주야를 가리지 않고 5 일을 달렸다. 도착하여 가만히 도정을 살피니 400 여리가 아니였다. 또 열하에 들어 산동도사 학성과 리수에 대해 이야기해 보니...처음 열하에 이른 자들이 말하기를 대략 구 밖에서 경사까지는 700 여리라 하였다. 성조 강희제가 특별히 400 여리로 참을 나눈다고 하였지만 실은 700 여리에 이르렀다...고북구로부터 역을 설치하여 북쪽으로 50 리 나가 청송이라 하여 1 참으로 삼고...또 50 리 떨어져 란하를 1 참으로 하였다. 지금 란하를 건너 열하에 이르기를 40 리이니 고북구부터 이곳까지 총 256 리다...



그런데,

우리 대한 역사에서 퇴치.박멸해야야 할 가장 시급하고 큰 문제는 왕검조선.단군부여 등을 신화.전설로 취급하는 것 보다는 지리 부분에 있으며 그 부분의 문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위의 박지원 등의 사신단 행로라 생각합니다.


즉 중국 고대인 한.진.수.당 시기는 물론이고 요.원.명.청 시기의 란하와 요하를 지금의 란하,요하로 인식하려는 인식입니다. 명.청 시기의 요하를 지금의 요하로 이해하면 위와 같은 사신단 행로가 그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동시에 고려의, 거슬러 올라 고구려 시기의 압록강도 지금의 압록강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 서기전 108 년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낙랑군 위치도 지금의 평양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식민사관이고 중국이 추진한다는 동북공정의 최종 목표입니다.  


추정도 - 1780 년 박지원이 경유한 의주.심양.산해관.북경.열하



      


하지만,

1780 년 박지원이 밟은 의주.심양.산해관.승덕은 위 추정도에 적색으로 표시한 지점이였고 사신행로도 적색 실선이 시작이고 끝이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강역고/조선고>에서 언급한 북경부터 압록강 의주까지 2100 리라는 리 수도 바로 위의 적색 실선의 리 수였던 것입니다. 


즉 1780 년 당시 압록강.요하.란하는 아래 추정도에 적.황색으로 표시한 물길이며 이는 서기전 75 년부터 청국이 멸망하는 1911 년까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변화라면 10 세기 초 거란.요국 시기에 전한 시기부터 불려온 대요수 즉 아래 추정도의 황하潢河로 표시된 물길을 개칭한 것이고 동시에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에 처음으로 나타난 후 당 시기 두우가 <통전>에서 두번째로 언급한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를 요하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이는 대요수.염난수를 요수의 본류와 지류로 인식하던 것을 지류와 본류로 재인식하는 것에 그친 것일 뿐 그 최하류가 바뀐 것은 아니였습니다.  


추정도 - 1780 년 당시 압록강.황하.요하.란하 위치





그런데,

내가 위 로정도를 보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한국사학계가 난하라며 흐름 방향과 경유지 및 최하류 지점을 거의 정확하게 묘사하였으면서도 어찌 황하의 경유지와 똑같이 표시된 지금의 란하에 대해서는 한 줄의 의문이나 검증 없이 명.청 시기의 란하가 맞다고 수긍하는 것입니다. 



개략도 - 현대 중국지도에 표시된 란하






중국 25 번째 정사라는 청나라 정사 <청사고/지리지> 기록에는 경사 즉 지금의 북경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680 리, 북쪽으로 1200 리, 서쪽으로 550 리, 남쪽으로 1430 리 떨어진 지점까지의 지역을 구획하여 직예성을 설치하였다고 설명되어 있고 이 직예성의 동쪽 끝 지역을 흐르는 가장 크고 긴 물길은 독석.고원 등에서 발원하여 물음표 `?`와 같이 반원을 그린 후 동남쪽으로 흘러내려 갈석산 남쪽을 지나 발해로 흘러든 2100 리 길이의 란하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  란하의 중류 쯤에는 승덕부가 설치되었고 서쪽에는 순천부 밀운현에 속하며 만리장성이 통과하는 고북구가, 동쪽에는 열하산장이 있는 승덕부의 열하구가 설치되었으며 란하 하류의 서쪽에는 준화직예주의 풍윤현이, 동쪽에는 영평부 노룡현이 설치되었고 노룡현에서 동북쪽으로 170 리 떨어진 곳에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1780 년은 물론이고 1911 년까지도 란하는 지금의 란하 중.하류 서쪽 지역에 별개로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중국지도에는 1911 년까지도 흐른 란하의 중류와 하류가 지워져 있는 것입니다.


명백한 조작입니다. 


추정도 - 명.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 위치



 

지금의 란하는 명.청 시기의 란하 상류와 황하 발원지를 인위적으로 연결하고 그 이름을 란하로 개칭한 조작된 물길이며 조작자들은 조작질을 들키지 않으려고 중국 역대의 지리지 기록에 나타난 요하도 동쪽으로 옮겨 요하 기록과 비슷한 물길을 찾아 요하라고 새롭게 명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동.조작은 일본이 만든 꼭두각시 만주국의 1934 년 지도부터 공식적으로 나타났고 지금의 중국지도는 만주국지도를 그대로 습용한 것입니다. 


- 1934 년 만주국지도




한편  한국사학계가 제시한 사신단의 로정도에 난하 즉 란하가 정확한 위치에 표시되었다는 것은 한국사학계도 란하가 이동.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명.청 시기의 란하를 정확한 위치에 표시하면서도 지금의 란하는 그려넣지도 않았는지.

구역질 납니다.


한편 아래 지도는 청말민국초 양수경이 편찬한 <역대연혁지도>에 실린 북위형세도인데 바로 청 시기의 란하 부근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한서> <수경주> <청사고>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수경주>의 난수濡水가 <요사> 지리지부터 란하로 개칭되었는데 양수경도 이를 명확하게 이해하였기 때문에 난수와 란하(水+欒河)를 병기한 것입니다.

 

 

고지도 - <역대연혁지도> 북위형세도에 표시된 춘추전국의 요수,한~위 난수, 요~청 란하

 

 

 

위와 같이 1900 년 전후 시기에도 란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밀운.고북구 동쪽 아주 가까운 지점을 동남쪽으로 흘러내려 만리장성을 관통한 후 노룡현 서쪽을 지나 발해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또한 란하의 상류 지역 동쪽인 선화부 위장구 부근에서 황하가 발원한다고 하였고 이 황하는 동남쪽으로 흐르며 승덕부의 적봉현.건창현을 경유하며 영금하.노합하를 받아들인 후 조양으로 흘러가 대릉하를 받아들인 후 봉천성 금주부 지역으로 흘러가 요하의 하류로 합쳐진다고 설명되어 있으며 이 요하의 하류는 지금의 란하 하류와 같았던 것입니다.


1920 전후하여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한 이유가 바로 위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만약 지금의 중국지도에 표시된 란하가 <청사고/지리지> 기록의 그 란하가 맞다고 가정하면 아래 추정도의 황색 1,2 물길과 같이 란하 중류인 지금의 승덕 동쪽 가까운 지점을 황하가 동남쪽으로 흘러내려 조양 부근을 거쳐 대릉하와 합쳐진 후 요하 하류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추정도 - 현대 중국지도상 청 시기의 황하가 흘러야 하는 지역




그런데 지금의 중국지도에는 이러한 황하는 흐르지 않습니다. 사실 흐를 수가 없습니다. 보다시피 산줄기가 흐르는 방향이 엄연히 있는데 어찌 가로질러 흐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지금의 적봉 지역 부근에 황하의 남쪽 지류인 노합하가 동북쪽으로 흐르게 표시되어 있고 노합하가 흘러드는 물길을 서요하라 하며 <청사고/지리지> 기록의 황하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얼척이 없습니다. 


현대의 중국인은 물론이고 일본이 패전한 1945 년 직후의 중국인들도 지금의 동북 3 성 지역을 인수받으면서도 지명이동되고 지도조작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 앞에 놓인 거대한 이익을 차지는 하였지만 그것이 역사적 장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사학계의 핵심도 일본이 저지른 지명이동.지도조작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는 있다고 봅니다. 다만 광복 후 70 년간 주장해온 내용을 한 순간에 스스로 뒤집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는 것을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한스러울 것입니다. 

 

저들이 대체 무슨 수로 식민사관을 몰아내고 동북공정을 비판할 수 있겠는지 아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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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780 년 청 건륭제 만수절 축하 사절단을 따라간 박지원이 <열하일기/도강록> 6 월 18 일 기록.

 

``<당서>를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 리요,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도 한다고 썼고,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나, 이러고 보면 무엇을 표준 삼아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일이다. 또 <지지>에는,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 70 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개평현으로부터 동으로 수암하秀岩河까지 300 리요, 수암하로부터 동으로 200 리를 가면 봉황성이라고 했으니, 이것으로써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서 말한 평양과 안시성의 거리가 약 500 리쯤 된다는 것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우리 나라 인사들은 기껏 안다는 것이 지금의 평양뿐으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을 했더라 하면 이 말은 꼭 믿고, 평양에 정전이 있었더라 하면 이 말은 넙적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면 이 역시 믿으나 만약에 봉황성이 평양이었더라 하면 깜짝 놀랄 것이요, 더구나 요동에도 평양이 있었느니라 한다면 아주 괴변으로 알고 야단들일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래 조선의 옛 땅인 것을 모르고, 숙신.예맥과 동이의 잡족들이 모두들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던 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오랄,영고탑,후춘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옛 강토임을 모르고 있다.

 

애달프구나!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어 붙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아 혹은 압록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그러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어 언제나 사적을 따라다니게 된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 국토를 흔히 삼천리 강산이라 한다.


하지만 500 여 년 이어온 조선의 강역은 남북 방향으로 4000 리였고 동서 방향으로 2000 리였고 이러한 내용은 조선의 기록이 아니라 청국 기록이고 1678 년 청나라 사람 고조우가 편찬한 <독사방여기요>에 보인다. 또한 조선 역사를 축소시키려고 청국 고지도인 <황조일통여지전도>를 재간행하면서 황하潢河의 중.하류를 서슴치 않고 조작하는 일본이 아래 제시하는 <대청광여도>에서도 명.청 시기의 산해관 북쪽 지역을 고의적으로 늘려 묘사하였으면서도 미처 정정하지 못한 각주에 기록된 문장이다. 


조선 강역에 대한 고지도로는 청나라 강희년간(1663~1722)에 채방병이 판각한 <대청광여도> 각주에 기록되어 있다.


<读史方舆纪要>


八、朝鲜
在辽东都司东千八百里。东至海七百七十里,南至海千三百里,西南至海八百里,西北至鸭渌江七百五十里,北至女真界千四百里。自其国都至京师三千五百里,至江南江宁府四千里。

古朝鲜国,箕子所封。战国时,燕略属真番、朝鲜,为置吏筑障塞,遂为燕地。秦为辽东外徼。汉初属燕国,燕王卢绾叛入匈奴,燕人卫满窃据其地。武帝定朝鲜,为真番、临屯、乐浪、玄菟四郡。昭帝并为乐浪、玄菟二郡。

后汉末,为公孙度所据。至公孙渊,魏灭之。晋永嘉末,没于高丽。

...中略...

及明洪武二年,高丽王王颛表贺即位,诏封高丽国王。二十五年,其王瑶昏缪众推门下侍郎李成桂主国事,诏从其自为声教 成桂更名旦,徙居汉城,遣使请改国号,诏更号朝鲜,自是王氏始绝,李氏世有其地,称藩岁奉贡献。万历二十年,为日本所侵掠,国几亡,王师入援,久之,国始定,然自是浸弱矣。其国中分为八道,八道中,则忠清、庆尚、全罗三道,地广物繁,州县雄巨,最为富庶。且俗尚诗书,人才之出,比诸道倍多。平安、咸镜二道,北接,俗尚弓马,兵卒精强,亦地势使然也。江原、黄梅,居京畿左右,差为狭小。而京畿在诸道之中,襟带山海,称为雄胜。其地东西二千里,南北四千里八道分统郡凡四十一、府凡三十三、州凡三十八、县凡七十。




고지도 - 대청광여도

            강희년간(1663~1722)에 채방병이 판각한 것을 1785 년 왜종 장구보적수(나가쿠보 세키스이)가 교정하였다 함.

 





대한의 많은 이들이 <삼국사기/잡지.지리>에 설명된 압록강과 평양을 지금의 대한민국 강역내에 흐르는 압록강과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일본 명치왕군부가 1873 년 경부터 청국의 직예성 일부 지명과 봉천.길림.흑룡강성 지역의 모든 지명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조선의 강역을 축소하려는 기획하에 육군 참모국을 통하여 밀정을 파견하고 지리정보 등을 수집하여 정밀지도를 작성한 후 그 활용 방책으로써 지명을 이동시켜 조작지도를 제작하는 습작질에 몰두하고 청국과 조선 현지에서는 홍보질을 병행하던 중 1932 년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우게 되고 만주국지도를 간행하면서 공식적으로 공표하여 지금의 중국지도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조선 500 여 년 중에도 정확한 전체 강역이 묘사된 지도도 극소수이지만 간행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래의 <백산도-아래 고지도와 같이 지도 표제가 없어 가칭함>와 같이 비교적 정확할 것으로 보여지는 지도들은 모두 청국과의 국경선 지역만을 묘사한 지도들만이 전해질 뿐이며 전체 강역이 묘사된 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가 유일합니다.  


고지도 - 1751년 (영조26)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 <백산도> 


하지만 <대동여지전도>는 위에서 언급한 중국기록이나 중국고지도 각주 설명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즉 <대동여지전도>에 표시된 우리 강토는 남북 3000 리, 동서는 최대 1000 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남북 4000 리는 어떻게 해서 기록된 것일까요?


이익과 이중환이 지관들의 말이라며 `백산의 좌향은 亥座巳向`이라 했다는 기록을 <성호사설><택리지>에 남긴 것으로 보거나 위 <백산도>와 같이 정북正北 표시와 백두산.흑룡강 북쪽의 해亥 방향 표시로 보아 조선 시기 학자들 모두는  백두산이 한양을 기준으로 지금의 백두산처럼 동북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북쪽의 서쪽 지역인 亥 위치 곧 시계의 10~12 시 방향에 좌정하여 있었고 백산의 남쪽 지맥은 巳 방향 곧 시계의 4~6 시 방향으로 뻗어나간 정황을 명확하게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조선 500 여 년 동안 남쪽 남해 해안선에서 북쪽 백두산까지 4000 리에서의 그 백두산 위치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지역인 지금의 부신.고륜기 사이 지역에 있었으며 이를 중국에서는 노호산 또는 노로호산이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조선의 백두산이 부신 북쪽 노호산 부근이였기 때문에 조선 강역의 동서 길이도 2000 리까지 되는 것이며 동시에 조선.청국과의 국경선을 흐르는 압록강도 또 조선의 평양, 고려의 서경, 고구려의 평양성이였으며 준왕조선의 왕검성도 지금의 중국 요녕성 건창과 금주 사이에 있었고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했다는 낙랑군도 건창에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위의 <백산도- 가칭>가 묘사하는 범위는 아래의 적색 실선 지역입니다.  







원본으로 추정되는 <백산도>의 아래 여백에 지금의 압록강 남쪽의 대한반도를 덧붙치게 되면 조선 시기의 백두산.압록강.토문강 등이 자동적으로 동쪽으로 약 2000 여 리 이동되는 것이고 조선 강역이 4000 리에서 3000 리로 축소되는 것입니다. <백산도> 아래 여백에 뜬금없이 대한반도가 덧붙쳐진 고지도가 아래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제목의 지도이며 위의 청색 실선 지역을 묘사한 셈이며 이 지도는 2007 년 한국보물 1537 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결국 조선 강역을 축소시켜 독립의지를 꺽으려는 일본의 식민지배 계획하에 조작된 지도가 2007 년 버젓이 한국보물로 지정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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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역사카페에 올라온 질문


 

백두산과 관련한 질문


 거두절미 하고 한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대동여지도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지요. 

 하지만 지금 전해지는 대동여지도는 1935년부터 전해진것이고 

 그 이전까지 대동여지도 상의 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 인지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서,북,간도 지방이 대동여지도 상에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것이 1935년도에 바뀌었더군요..

 

 저희 회사 대표님의 아버지께서 1935년 이전과 이후의 대동여지도를 소개한 

 책자를 가지고 계신데 변경이 되었더라구요..

 

 그리고 1935년 이전의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백두산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니었습니다. 

 장백산맥의 줄기 끝에 백두산이 있었지요..

 

 백두산정계비 상에 표기되어 있는 탁본을 보아도 현재의 백두산이 아닙니다. 

 지금의 백두산의 이름은 조선 시대에 묘향산이었지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고민고민하다가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
글쓴이 : 찐OI| 원글보기


제서의 백제 기록이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이해(AD490년) 위노(북위)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동성대왕)는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노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중국 북방을 통일했다고 하는 강력한 북위의 효문제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 동성대왕을 공격을 하였는데 백제 동성대왕이 4명의 장수를 보내 격퇴하였다는 내용이다.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동성대왕이 북위군의 공격을 격퇴한 공로를 치하하여 태수를 7명 임명하였다.

① 광양태수
② 조선태수
③ 대방태수
④ 광릉태수
⑤ 청하태수
⑥ 낙랑태수
⑦ 성양태수


남제서 백제전 앞부분 15줄 320자를 누군가가 고의로 삭제하였다.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 고려대 중앙도서관 한적실 보관 1637년 발행 ‘남제서 백제전 원문’ 


▲ 남제서원문     ©플러스코리아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 남제서 원문     ©플러스코리아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15.04.17 15:37l최종 업데이트 15.04.17 15:37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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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1919. 9. 17.) 앞줄 중앙에 안창호, 다음줄 맨 오른쪽이 김구다.
ⓒ 백범김구사진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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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1일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가 수립된 날이다. 그 동안 4월 13일을 임정 수립 기념일로 기려온 것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한 날을 중심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정은 이틀 전인 4월 11일에 수립됐다고 하는 게 옳고, 정확하다(따라서 기념일은 다시 지정하는 게 마땅하다).

4월 11일, '왕정'에서 '민주 공화정'으로

상하이에서 우리 독립운동가 29명이 오늘날의 국회 격인 임시 의정원(議政院·의장 이동녕)을 구성하고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연 것은 그 하루 전인 4월 10일이었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다음날까지 계속됐고 마침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임시헌장을 제정해 통과시켰다. 1919년 4월 11일 오전 10시였다.

그것은 비록 국권을 빼앗겼지만, 그간 한반도에서 이어져 온 '왕정'을 '민주 공화정'으로 바꾸는 혁명적 정체(政體)의 전환이었다. 그리하여 임정의 수립은 우리 '5천 년 역사'의 분수령이었고, 봉건과 근대를 가르는 변곡점이었다. 그것은 3·1운동에서 드러난 독립 정신을 토대로 임금의 나라 '대한제국'을 마감하고 백성의 나라 '대한민국'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후 임정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무려 27년 동안 이국땅에서 온갖 간난과 신산(辛酸)을 감내하며 처절한 독립 투쟁을 벌였다. 숱한 유·무명의 독립지사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일제의 감옥에서 싸우다 스러져갔다. 그들의 피어린 희생 끝에 해방이 됐고, 그 주춧돌 위에 우뚝 선 나라가 오늘의 대한민국인 것이다.

"27년이나 되는 긴 기간 동안 정부 조직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 식민지 해방 투쟁을 벌인 나라는 세계에서 오직 대한민국뿐이다."
- 이봉원 <알기 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정인출판사, 2013)

'망명 정부'의 역사 '27년'은 이전에는 물론, 이후로도 없을 초유의 기록이다. 영국의 지지를 받긴 했으나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던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물론, 합법 폴란드 망명정부도 그 활동 기간은 5~6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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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치고(중경, 1947.9.17.) 광복군은 임정 산하의 정규군이었다.
ⓒ 백범김구사진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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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임정은 일제 강점기 36년 가운데 27년 동안 유일한 망명 정부로서 소임을 다하면서 유지됐다. 그러나 임정엔 정부 운영의 물적 기반도 없었고 중국의 도움 외엔 외부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임정은 청사를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아서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무려 8개 도시를 전전해야 했다. 그런 세월이 27년이었다.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기미년(1919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 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일임을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起算)할 것이요..."

1948년 제헌의회 개원식에서 의장 이승만이 행한 개회사의 일부다. 초대에서 5대까지 임정의 수반을 역임한 이승만으로서는 당연한 회고였을 것이다. 실제 그 해 발행된 대한민국 정부의 관보 제1호는 발행일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전문에 명시된 '임정의 법통'

여러 차례 정치적 이유로 개정을 거듭해 온 우리 헌법도 그 전문(前文)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명시하고 있다. 이 역시 '임정이 대한민국의 뿌리'라는 헌법적 인식의 증거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헌법과 임정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백범 김구와 그가 주도한 한인애국단의 의거를 '테러'로 묘사하는 뉴라이트와 그 지지 세력이 이승만을 국부로 옹립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면서도 이승만이 참여해 수반까지 지낸 임정의 역사를 지우고 싶어 하는 자가당착은 그들에게 드리운 '친일'의 역사를 지우고 싶어서일까.

그런데 자랑스러운 임정의 역사를 오늘을 사는 한국인에게 일러주는 것은 한국사 교과서의 몇 줄 기록이 다다. 임정이 수행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기념관 하나 없는 것이다. 하긴 독립기념관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응해 해방 42년 만인 1987년에야 세워졌으니 무엇을 말하랴.

임정의 역사 하나 기리지 못하는 현실이 결국은 뒤틀린 역사 인식을 불렀던가. 일제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비롯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거기에 기반한 뉴라이트 세력들의 왜곡된 <한국사> 교과서 파동은 그러한 현실의 산물인 것이다. 단죄는커녕 그 진상을 기록하는 일조차 민간에 맡겨 버린 친일 문제 등 청산하지 못한 역사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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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이 교과서로 말미암은 논란은 임정의 역사조차 기리지 못한 현실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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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광복절' 대신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몰역사적 주장이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이는 임정과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수행된 독립 운동과 해방 투쟁의 역사가 두려운 친일 기득권 세력의 교묘한 역사 왜곡의 시도인 셈이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정 수립 96돌이 되는 해니 4년 후인 2019년에는 임정 수립 100년을 맞는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지 9년, 온 나라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기미년 '3·1운동의 민주·자주·자유·평화의 정신'(이만열)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건설한 것이었다.

그리고 100년, 여전히 분단의 질곡을 벗지는 못하고 있으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험난한 민주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세계에 유례없는 발전을 이룬 모범 국가가 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한민국의 모태인 임정의 역사를 기리는 어떤 상징물도, 건축물도 없다.

임정 백 년, 기념관 건립 관련 논의

일찍이 미국이 독립 100주년을 맞아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고,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 100주년에 '에펠탑'을 세운 뜻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과 혁명 100돌 기념 에펠탑 같은 기념 상징물이 미국과 프랑스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이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3·1운동 100주년 기념탑'과 '대한민국 100주년 기념관'을 웅장하게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 원로 역사학자는 <경향신문>의 지난 9일 자 시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바라보며'에서 임정 수립으로 "1910년에 사라진 '대한제국'은 9년 후 이렇게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탄생했다"며 임정을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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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은 1982년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응으로 1987년 개관하였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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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기념관 건립은 하고 많은 기념관 중 또 하나를 보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임정이 상징하는 역사와 시대 정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국(民國)'을 표방하고. 세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열이 희생됐는가를 후세에 가르치기 위함인 것이다.

국가 주도로 임정 기념관을 세워야 한다는 논의는 이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기념관과 상징물 건립을 주장한 이만열 교수 외에도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기념관 건립은 물론, 임정기록물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임정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념관 부지 선정에 박원순 서울시장의 적극적 협력을 희망했다. 그는 <한겨레>의 지난 9일 자 시론에서 임정이 상징하는 '독립 정신과 민주공화정의 정신'을 '민족의 가치, 대한민국의 토대'일 뿐 아니라 우리가 영구히 지켜내야 할 '귀중한 자산'으로 평가했다.

임정 기념관 부지 선정과 관련 박덕진 임정기념사업회 연구실장은 지난해 12월 8일 <한겨레> 칼럼에서 서울시가 '돈의문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면서 철거를 저울질하고 있는 유한양행 옛 사옥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유한양행 옛 사옥 바로 옆의 경교장(京橋莊)과 연계하면 훌륭한 근현대사 테마 길이 조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홍소연 전 백범기념관 자료실장은 임정기념관은 용산에 지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외세의 상징인 용산에, 외세에 항거했던 역사를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용산공원이 개발되면 단순히 시민이 쉼터에 그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았던 이들이 있었다는 걸, '외세의 교두보'인 용산에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자치가 정착되면서 지역마다 여러 종류의 박물관과 기념관, 전시관이 넘치고 있다. 지역마다 관광 수입을 노린 관광 자원 개발에 경쟁적으로 나선 결과다. 수억에서 더러는 백억 원이 넘게 소요되는 이들 시설(물)은 그 성과와 무관하게 시행되는 단체장의 치적용 '묻지 마 투자'로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임시 정부 100돌을 내다보며 민족의 수난과 영광을 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을 세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늦춰져서는 안 된다. 정부가 주도하되, 나라의 주인인 '민'이 참여하는 공간을 함께 추진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거듭 말하거니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념관을 세우는 일은 여느 기념관 수립과는 다른 일이다. 조국 독립을 위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바쳐 온 이들이 지켜온 정부가 임시 정부였다. 이들은 조국 해방을 위해 20세기를 '19세기 방식'으로 산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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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임시헌장을 제정해 통과시킨 임시의정원의 의장을 지낸 이동녕 선생의 장례식.(1940, 치장)
ⓒ 백범김구사진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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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간섭이 없고, 분열 없는 자주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민족의 지상 명령이니, 이 지상 명령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망명 생활을 삼십여 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 명령이므로,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 김구, <백범어록> 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데도 오직 민족의 지상 명령이었기에 기꺼이 그 길을 마다치 않고 갔던 이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누리며 산다. 임정 100년, 임시의정원 수립 100년을 맞으며 그들의 삶과 투쟁을 기리는 기념관이 우뚝 세워지는 광경을 그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유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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