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미 국무부, 제주4·3에 첫 입장…“비극 잊으면 안 돼”

한겨레 질의에 사건 76년 만에 입장 밝혀

기자허호준
  • 수정 2024-04-02 20:09
  • 등록 2024-04-02 16:24
1948년 5월15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미군 고문관 대위가 경비대 장교들과 작전 계획을 논의하는 모습이다. 미국국립기록관리청 보관 사진

미 국무부가 제주4·3에 대해 “비극적인 사건”으로 “잊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제주4·3 당시 한반도 남쪽을 군정 통치(1945년 9월~1948년 8월)했던 미국은 사건의 발발과 확산에 직간접적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도 지금껏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왔다.

미 국무부는 최근 ‘제주4·3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이냐’는 한겨레의 이메일 질의에 “1948년의 제주사건은 참혹한 비극(terrible tragedy)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답신을 지난달 27일 보내왔다. 미 국무부는 답신에서 “미국은 민주적 가치와 인권 증진에 헌신하는 가까운 동맹국으로서, 앞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한국의 결의를 공유한다”고 덧붙였다.

제주4·3에 대한 입장을 묻는 한겨레의 이메일에 미 국무부가 지난달 27일 보내온 답신

미국 정부가 제주4·3과 관련해 문서로 입장을 밝힌 것은 사건 발생 76년 만에 처음이다. 그동안 현대사 연구자들과 제주 지역사회는 4·3 문제 해결과 관련해 남아 있는 과제 중 하나는 ‘미국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라고 지적해왔다.

 

실제 제주4·3 시기 미군정이나 군사고문단, 주한미국대사관이 작성한 각종 문서는 미국이 4·3 진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정부가 2003년 10월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고 나와 있다.

국내에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4·3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1988년 무렵부터 미국의 인정과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해왔다. 70주년이었던 2018년 10월에는 제주4·3연구소와 제주4·3희생자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이 4·3에 대해 미국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10만9996명의 서명을 받아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달했다. 하지만 미대사관 쪽은 최근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군정 당국은 4·3 무장봉기 직후인 1948년 4월 중·하순 미군정장관 딘 소장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진압을 명령하고, 같은 해 5월에는 미 보병 6사단 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브라운 대령은 당시 “나는 사건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한국의 군·경을 지휘했고, 그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5천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무차별 검거됐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사고문단을 통해 토벌작전을 지원하고,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지속해서 제주도 사태와 관련한 진전 상황을 보고받았다.

1948년 5월 제주도 최고 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기자회견에서 “사건 원인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언급한 &lt;조선중앙일보&gt;(1948년 6월8일)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고종에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백성을 이 지경에…"

질타한 70대 의병대장의 유물이 환수됐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19.04.11 09:10:00 수정 : 2019.04.11 12:13:42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척암선생문집> 책판이 환수됐다. 독일의 작은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구입해온 것이다.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1000여장 존재했지만 이번에 환수된 것까지 21장만 남아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척암선생문집> 책판이 환수됐다. 독일의 작은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구입해온 것이다.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1000여장 존재했지만 이번에 환수된 것까지 21장만 남아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폐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무슨 사람이기에 이따위 짓을 합니까.(陛下何爲而爲此)”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황제를 매섭게 꾸짖는 상소문을 올린 이가 있었다.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였다. 상소문의 주인공은 구한말의 의병장인 척암 김도화 선생(1825~1912년)이다. 700자로 구성된 이 상소문은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른 순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 

 

“500년 역사의 왕위와 3000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척암은 “그런데 임금인 당신은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어찌 농사 짓는 자가 토지에서 난 곡식을 서로 매매하듯 하느냐”고 질타했다. 나라와 백성을 빼앗긴 임금은 더이상 임금이 아닌, 여염의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한 것이다. 척암의 춘추 86살이었다. 그리고는 자택의 문에 ‘合邦大反對之家(합방을 절대 반대하는 집)’이라고 써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척암은 2년 뒤인 1912년 88살을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났다. 

■독일 경매장에 출품된 책판을 구입 

 

척암은 본집 39권 19책, 속집 13권 6책으로 구성된 <척암선생문집>을 남겼다. 손자(김헌주) 등이 1917년 생전에 척암이 남긴 글을 모아 편집·간행했다. 이 정도의 문집을 인출하려면 책판은 1000여장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책판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국학진흥원에 단 20장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중 1장도 2016년 미국 하와이대 에드워드 슐츠 교수가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2월 국외 경매에 출품된 한국문화재를 모니터링하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아시아 문화재 500여건이 나온 독일의 작은 경매에서 흥미로운 유물을 검색해냈다. 바로 <척암선생문집> 책판 1장이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전적 전문가 및 유교책판을 전문적으로 연구·관리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과 협의한 끝에 이 유물을 구입한 뒤 11일 공개했다. 

 

 

이번에 확인된 <척암선생문집> 책판 부분과 비교해본 인출본.  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 부분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이번에 확인된 <척암선생문집> 책판 부분과 비교해본 인출본. 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 부분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오스트리아의 한 가족이 오래전부터 소장했던 이 책판은 양쪽 마구리가 빠졌고, 한쪽 면에는 글자를 조각한 부분에 금색 안료를 덧칠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물은 양호한 편이었다. 판심(版心·책장을 접어 양면으로 나눌 때 접히는 가운데 부분)을 확인해보니 <척암선생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이었다. 

‘태극도설’은 북송의 철학자인 주돈이(1017~1073)의 ‘태극도설’에 척암이 주자(1130~1200)의 설명 및 퇴계 이황(1501~1570)과 대산 이상정(1711~1781)의 견해를 참고해서 조목별로 논술한 글이다. ‘태극도설’은 무극인 태극에서부터 음양오행과 만물의 생성 발전 과정을 도해해서 태극도를 만들고 설명을 붙인 것이다. 책판의 환수에는 온라인 게임회사 라이엇 게임즈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찾은 것 

 

이번 문화재 환수는 단순한 책판 1장의 귀환이 아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김상엽 조사활용2팀장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표적인 의병장 중 한 분인 척암 선생의 유물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거쳐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탓에 미처 포함되지 못했던 세계기록유산의 일부를 되찾아왔다는 것도 이번 환수의 또다른 의미”라고 평가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소장된 718종 6만4226장의 유교 책판은 2015년 ‘한국의 유교책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유교책판’은 판각 계획부터 인출·배포 등의 전 과정을 공론을 통해 결정하는 ‘공동체 출판’이라는 조선 특유의 방식으로 제작됐고, 도덕적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표아래 500년 이상 전승된 집단지성의 산물이라는 점이 큰 의미를 갖는다. <척암선생문집> 역시 ‘한국의 유교책판’의 일부이다.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묘소.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과거없이 발탁한 초야에 묻힌 선비를 의미한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묘소.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과거없이 발탁한 초야에 묻힌 선비를 의미한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고종의 ‘애통조’ 밀지 

척암 김도화 선생은 구한말 문장가이자 성리학자로서 영남 유림의 태두로 추앙받은 대학자였다. 그러나 그 이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만든 수식어가 있었으니 바로 ‘70대 의병대장’이었다는 것이다.

 

척암은 25살 때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아 수많은 학자를 배출한 영남학파의 종장인 정재 유치명(1777~1861)의 문하에 들어가 경학과 성리학을 배웠다. 과거를 통한 출세에 고개를 돌리지 않은 척암은 ‘무려’ 68세 때인 1893년 이른바 ‘유일천(遺逸薦·초야에 묻힌 선비를 발탁하는 제도)’으로 의금부도사와 성균관 직강사예(교수)가 됐지만 실제 근무하지는 않았다. 척암의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곧 ‘유일천’으로 발탁된 선비라는 뜻이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고종의 비밀조서 ‘에통조’. 고종은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거병을 독려하는’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제공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고종의 비밀조서 ‘에통조’. 고종은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거병을 독려하는’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제공 

 

1895년 고향 안동에서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던 척암은 엄청난 격변기에 빨려들어갔다. 국모인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진 것이다. 척암의 춘추 71살 때의 일이다. 척암은 조선의 사직과 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영남 척사파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고종은 이 무렵 ‘애통하다’는 뜻을 적은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고종은 “아 슬프다”로 시작되는 ‘애통조’에서 “나의 죄가 커서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고 자책하면서 각지의 의병을 ‘충의지사(忠義之士)’로 북돋았다. 또 이들을 근왕칠로군(勤王七路軍)이라 하면서 영의정 김병시를 도체찰사로, 전 진사 계국량을 감군지휘사로 삼는다고 했다. 고종은 “호서를 충의군, 호남을 분위군. 영남을 장의군, 관동을 용의군, 관북을 해서를 효의군으로 삼을 테니 조정의 명령에 부응하라”고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척암은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문을 올려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을 매섭게 꾸짖었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임노직 관장 제공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척암은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문을 올려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을 매섭게 꾸짖었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임노직 관장 제공 

 

“역신들의 농간에…단발령을 내려 4000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비밀리에 이것을 보낸다. 각 군수와 관찰사는 잘 선택해서 따르라. 의리의 용사를 뽑고 모집해서…재주있는 양민을 모아서 공을 쌓으면…따르지 않는 수령들은 처분해도 좋다…이전의 옛 제도를 회복하라’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애통조’의 대략 내용이다. 고종의 밀지를 받은 척암은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을 올린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의 예를 든 뒤 “왜놈 오랑캐는 만세를 두고라도 기필코 갚아야할 원수이며, 역대 제왕께서 일찍이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놈들”이라고 성토한다. 척암은 이어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일(復警討賊)은 춘추대의이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달려가는 것은 신하된 직분”이라고 천명한다. 

■70대 의병대장의 노익장 

 

척암은 각 문중에 통문을 보내 유림의 중망이 높은 김흥락·권세연·곽종석 등과 함께 안동의병을 조직하여 안동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동의병은 1896년 경군과 일본 수비대에 패해 흩어진다. 이때 안동의병은 72살의 척암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 뒤 안동부를 재점거한다.

 

척암은 영일의 최세윤을 부대장으로 삼고, 영주·예안·봉화·의성·청송·예천·영양·진보 등의 의병과, 제천의 유인석 의병장 및 호좌(충남)의 서상렬 소모토적 대장과 연합작전을 펴서 상주의 함창(문경) 태봉에서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 오합지졸이었던 의병은 무기마저 시원치 않아 정예병으로 맞선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후 척암을 중심으로 다시 전력을 재편해서 다소간의 전과를 올렸지만 경군(관군)의 압력과 해산을 촉구하는 고종의 윤음(임금의 포고문)을 듣고 할 수 없이 해산했다. 척암은 고종의 해산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착암선생문집>.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환수된 책판도 곧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포함될 예정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착암선생문집>.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환수된 책판도 곧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포함될 예정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정말 전하는 무슨 마음을 먹고…” 

비분강개한 척암은 무려 1400여자에 달하는 상소문(‘파병후자명소·破兵後自明疏’)를 올린다. 척암은 “전에 내렸던 애통하다는 교서(애통조)와 해산하라는 포고의 뜻이 서로 상반되니 전하의 백성을 전하의 칼날에 모두 죽게 만들었다”고 고종의 해산명령을 거세게 항의한다.

왕의 군사가 내려와 가혹한 형벌을 일삼고 있습니다…책을 끼고 가는 어린아이까지도 모조리 잡아죽이고 길쌈하던 부녀까지도 역시 대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산골의 나무꾼도 지게를 진채 길바닥에 나뒹굴었으며 논밭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은 쟁기를 잡은채 굶어죽었고 마구 쏘아대는 총알은 우박 퍼붓듯 하고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룹니다.” 

척암은 그러면서 “정말이지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과 마음으로 백성을 이 지경에 빠뜨리는 지 모르겠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그러나 고종은 “그대들의 충정은 충분히 알겠으니 물러나 국왕의 처분을 가다리라”는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언제는 ‘거병하라’고 부추겨놓고 이제와서 ‘충정을 알겠으니 그만하라’고 말리는 나약한 군왕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인가. 

■을사오적의 세가지 죄 

 

척암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에도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다. 척암은 을사늑약을 당장 폐기하라는 상소문(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을 올렸다.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한 것만이 아닙니다. 군주보다 중한 것이 사직이요, 사직 보다 중한 것이 백성인데 백성이 장차 오랑캐의 노예가 되려 합니다.” 이미 81살이 된 척암이지만 견딜 수 없었다. 척암은 ‘을사오적’을 두고 “저 오적이라는 자는 짐승도 더러워서 먹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 있으니 첫째는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는 군부(君父·임금)를 협박한 죄입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10년 8월 결국 국권이 침탈되자 척암은 고종 황제를 지칭하면서 “대체 황제가 뭐하는 사람이야”고 사정없이 꾸짖은 것이다. 척암의 춘추 86살. 그렇지만 “결코 포기하지 말자”고 마지막까지 호소한다. “군신이 한마음이 되어 못을 파고 성을 쌓아 배수진을 파자. 그리고 백성과 더불어 일본과 한판 싸워 결판내자”고 결사항전을 촉구했다. 그러나 만사휴의였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연합뉴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연합뉴스 

 

■척암 김도화와 석주 이상룡 선생 

척암의 절망시가 가슴을 저민다. “하물며 내 아직 살아있으나 아아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네. 올해 여든여섯…살아서 무익했고 죽을 곳조차 없으니 부끄럽다. 충의에 힘쓰라는 아버지와 스승에게….” 하지만 척암의 뜻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척암이 충남의 의병장 서상열에게 보내는 시를 보라. “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늙은 이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 나섰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척암의 정신은 국권이 침탈되자 가족 50여명과 제자 200여명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한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에게 이어진다.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 석주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내는등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선생 뿐 아니라 아들(준형)과 손자(병화) 등 독립투사 9명이 이 가문에서 배출됐다. 뼛속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문이 아닐 수 없다. 

 

 

 

 

작년 여름 육군사관학교의 갑작스러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에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명박 정부 당시의 건국절 논란, 박근혜 정부 당시의 국정교과서 논란에 이은 세 번째 '역사전쟁'의 신호탄이었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역사학도로서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 없었다. 전국 역사학도 서명운동·대통령실 앞 1인 시위·전통활쏘기대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에 저항했다(관련기사: 육군사관학교와 윤 대통령 때문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https://omn.kr/26vsz).

독립운동사 전공자로서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왜곡과 모욕은 내 공부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니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독립운동사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선양으로 맞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번에 그 첫 번째 결실을 이루게 됐다. 홍범도 장군과 함께 북간도 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최진동 장군(1883~1941)에 관한 학술논문이 나온 것이다.

최진동 장군에 주목한 이유

먼저 내가 최진동 장군에 주목한 까닭을 소개하고자 한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의 해' 선포 후 우리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로 평가받는 '봉오동 전투'는 대한북로독군부 및 신민단 등 북간도 지역에 산재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벌인 전투였다. 그리고 최진동은 대한북로독군부의 수장으로서 봉오동 전투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이끈 전투'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는 듯하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도 홍범도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등장하면서 전투를 홍범도 홀로 지휘한 것처럼 묘사된 바 있다.

사실 봉오동 전투 당시의 활약뿐만 아니라 최진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홍범도에 비해 대중들에게는 낯선 것이 사실이다. 학계에서도 봉오동 전투 및 홍범도에 대한 연구 성과가 꾸준히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최진동에 관한 연구는 저조한 편이다.

다행히도 독립운동사·군사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최진동에 관한 연구가 너무 저조했다는 문제의식이 공유되면서, 최진동에 관한 학술연구들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나의 논문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이하 내용들은 본 논문의 일부를 요약·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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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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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북간도 항일무장투쟁을 이끌다

봉오동 전투 이전에도 두만강 일대 국경 부근에서는 최진동의 사병 조직이었던 '대한군무도독부'가 주축이 되어 산발적인 교전이 이뤄졌다.

1920년 3월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이 전개되는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군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로 침입하여 일본 경찰·군대와 교전을 치렀다(온성 작전).

비상이 걸린 일제는 온성 작전 당시 침투한 독립군의 수령이 최진동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인 봉오동 일대에 대한 토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최진동 부대의 온성 작전이 봉오동 전투를 이끌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일제의 움직임에 독립군들도 비상이 걸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봉오동 일대에는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모여있었는데, 일제와의 전면전에 대비하여 단일한 지휘체계에 대한 확립을 꾀하게 된다. 그 결과 1920년 5월 19일 군무도독부·국민회 군무위원회의 연합으로 최진동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한북로독군부'가 성립됐다.

이어 합류한 홍범도 부대는 북로독군부 산하 북로정일제1군사령부(사령부장 홍범도)라는 조직으로 개편된다. 홍범도 부대는 명목상 북로독군부 아래 편제됐으나 일종의 '외번(外藩)'격으로서 지휘명령권이 북로독군부장이나 국민회장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독립군 연합이 성사된 직후인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 연합은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온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전개했다. 최진동 역시 북로독군부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직할 부대를 이끌고 한 고지를 맡아 전투를 수행했다. 그렇게 독립군 연합은 일본군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제1회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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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3~6월 두만강 국경 근처에서 전개된 최진동 부대의 전투도. 일제가 당시 보고서에 첨부한 지도 위에 해당 전투 지역 위치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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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당시 지휘관은 누구였나

그런데 최근 학계 일각에서 '봉오동 전투 당시 실질적 지휘관이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기존 연구자들은 대체로 홍범도가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해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는 '홍범도 단독지휘설'(박민영), 지휘권은 홍범도와 최진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보는 '홍범도·최진동 공동지휘설'(반병률) 등으로 설명해 왔다.

그런데 '사령관' 최진동이 전투를 지휘했고 홍범도는 휘하의 '연대장'에 불과했다는 1920년 12월 25일 자 <독립신문> 기사를 근거로 전투를 총지휘한 주체는 북로독군부장 최진동이었다는 반론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연대장이라는 직책은 임시정부가 구상했던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편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제 이러한 편제로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었다. 또한 홍범도는 편제상 북로독군부 산하에 편입되어 있긴 했으나 외번격으로 그 어디에도 명령권이 속하지 않는 독자적 위상을 구축하고 있는 상태였다.

봉오동 전투에 참전했던 신민단 사령관 박승길의 회고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 직전 홍범도와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봉오동에 모인 독립군 단체들에 작전태세와 대기명령을 발했다 한다. 그런데 정작 신민단 군사들은 전투 도중 홍범도가 퇴각 명령을 내리자 "우리는 다른 데서 온 군인들이다"라며 거부했다.

여러 사료와 증언을 종합해 봤을 때, 봉오동 전투 당시 지휘권은 최진동과 홍범도만 행사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부대의 지휘관들 각자가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했음을 추측게 한다.

이러한 결론이 최진동과 홍범도 두 사람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걸로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누가 총지휘관이었는가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지휘체계가 불완전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기습해오자 하나가 되어 싸웠고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봉오동 전투 승리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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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미상의 최진동 장군 사진 (김춘선·안화춘·허영길, <최진동장군>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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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최진동, 그들을 잊지 말아야

본 연구에서는 1920년 당시 북간도 지역 독립군이 얼마나 열악한 현실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룩했는지 다시 한번 조명했다.

다만 '1920년 북간도 지역'이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매우 한정된 범위만을 살펴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봉오동 전투 승리 후 최진동은 일본군의 간도 침공을 피해 러시아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1920년 이후 최진동의 삶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삼을 생각이다. 

여러모로 부실한 논문이기에 세상에 소개하기가 많이 민망하다. 그럼에도 굳이 부족한 논문을 소개하는 까닭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최진동이라는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니 본 논문이 일반 시민들에게 홍범도 장군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홍범도 흉상 철거 반대 운동의 동력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드러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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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동 장군 묘(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251번 묘). 2024년 2월 16일 장군의 묘역에 논문을 헌정하며 술 한 잔 부어올렸다. 이날 올린 술은 최진동의 고향인 함경북도 지역의 주민들이 빚어마시던 '농태기'라는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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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정보]

- 제목: 1920년 북간도에서의 최진동의 항일무장투쟁
- 저자: 김경준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 등재지: 동북아역사논총 82호
- 발행기관: 동북아역사재단
- 발행년월: 2023.12.
- 논문 열람: https://url.kr/diyw46 (무료 PDF 다운로드)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중일 참여 국제 연구
23년 끈질긴 관측 끝에
블랙홀 회전 증거 확인

세차운동 중인 기울어진 부착원반 모델을 설명하는 그림. 한국천문연구원 제공

막강한 중력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천체인 블랙홀이 팽이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회전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관측됐다. 이 움직임은 11년마다 반복되고 있었는데, 블랙홀 안팎으로 빨려 들어가고 뿜어져 나오는 물질들 역시 같은 주기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천문연구원(천문연)을 포함한 국제공동 연구진이 28일(한국시간) 이 같은 사실을 담은 연구를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연구진에는 전 세계 45개 기관에서 79명의 연구원이 참여하고 있으며, 2000~2022년 동아시아우주전파관측망(EAVN)과 초장기선 어레이(VLBA), 한일공동 우주전파관측망(KaVA), 동아시아-이탈리아 우주전파관측망(EATING)을 통해 얻은 관측 자료를 분석했다.

연구진이 관측한 M78은 처녀자리 은하단 중심에 있는 초대질량블랙홀이다. 초대질량블랙홀은 대부분 은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천체로, 많은 양의 물질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존재다. 그래서 주변에는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들이 뭉쳐져 보이는데, 이를 부착원반(accretion disk, 강착원반)이라고 한다.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질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하나의 원반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블랙홀 주변에 강한 자기장과 부착원반-블랙홀 사이의 상호작용 등을 통해 다시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물질의 흐름도 보인다. 이를 '제트'라고 하며, 제트는 보통 부착원반과 수직한 방향으로 방출된다.

 
 

세차운동 중인 기울어진 부착원반 모델을 설명하는 동영상 화면. 한국천문연구원 제공

이 같은 제트 방출 메커니즘은 그간 이론적으로만 존재해, 천체물리학의 주요 난제 중 하나로 꼽혔다. 초대질량블랙홀이 실제 회전하는지 관측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연구진은 23년간 쌓인 M87 블랙홀의 초장기선 전파간섭계(VLBI) 데이터를 분석해, 해당 블랙홀과 부착원반이 다른 회전축을 두고 움직이면서 제트가 11년 주기로 세차운동1을 하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M87 블랙홀이 실제로 회전하고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논문의 제1저자인 추이 유주 중국 저장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은 "블랙홀과 부착원반의 회전축이 어긋난 정도가 비교적 작고 세차운동 주기가 길기 때문에 장시간에 걸친 고해상도 데이터의 분석으로 이런 성과로 이룰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 측 연구책임자인 노현욱 천문연 박사후연구원은 "앞으로 EAVN 주도로 계속될 M87 모니터링에서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블랙홀의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이기환의 Hi-story

김부식이 홀대한 가야, 유네스코는 왜 세계유산으로 대접했을까

입력 : 2023.09.24 08:00
히스토리텔러 기자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가야고분군 7곳.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가야고분군 세계유산추진단 제공

“1000년 전 김부식이 천대했던 ‘가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며칠전 한국의 ‘가야고분군’이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7개 가야고분군은 유곡리 및 두락리(전북 남원)·지산동(경북 고령)·대성동(경남 김해)·말이산(경남 함안)·교동 및 송현동(경남 창녕)·송학동(경남 고성)·옥전(경남 합천) 고분군입니다.

유네스코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습니다.

7개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야 유물들. 가야 제국은 각각의 문화와 전통을 나름대로 유지하며 성장했다.|가야고분군 세계유산추진단 제공

■천덕꾸러기에서 백조로?

 

이 대목에서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그동안 한국 역사에서 가야의 존재가 얼마나 무시당했습니까.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죠. 맨처음 인용했지만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만 봐도 그렇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3국의 역사만 기술하지 않았습니까. 가야사는 쏙 빼놓았죠. <사국사기>가 아닌 <삼국사기>가 된 겁니다.

완전히 뺀 것은 아닙니다.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백제사’, 즉 ‘백제본기’ 등에는 등장하지 않고요.

다만 ‘신라본기’에 종종 ‘가야국’ 이야기를 끼워 넣었습니다. 기원후 77년(탈해왕 21) ‘가야와의 황산진 전투’를 시작으로 “지원군을 보내 가야를 공격하는 포상8국을 물리쳤다”(209), “가야가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212)는 기사가 보입니다.

또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을 격퇴했다”(481), “가야국 왕이 혼인을 청했다(522)”, “법흥왕이 변방 순행 중 가야국 왕을 만났다”(524)는 내용도 있네요. 급기야 “532년(법흥왕 19) 금관국왕 김구해가 항복했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김구해는 김유신(595~673)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김부식(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 제왕의 사적을 기록한 ‘본기’에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는 마련했지만 <가야본기>는 빼놓았다. 그래서 <사국사기>가 아닌 <삼국사기>가 되었다. |한국고전 DB

이후 “554년(진흥왕 15)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562년(진흥왕 23) 9월 배반한 가야를 토벌했다”는 가야의 멸망소식을 전합니다.

<삼국사기> ‘잡지·지리’는 ‘김해소경’을 설명하면서 ‘금관국’의 역사를 요약 소개합니다.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가락국 혹은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10대 구해왕에 이르렀고, 532년 항복하여….”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전은 “김유신의 12대조인 수로왕이 기원후 42년 가야를 건국하고, 후에 금관국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부연설명 했습니다. 제법 구체적이죠. 금관가야 만이 아닙니다.

‘대가야국’ 이야기도 <삼국사기> ‘잡지·지리’에 나옵니다.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멸망시키고….”

<삼국사기>에는 ‘가야본기’는 편찬하지 않았지만 ‘신라본기’ 속에 가야관련 기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가야와의 전투, 가야에 보낸 지원군의 활약, 인질로 보낸 가야왕자, 순행중 만난 가야왕 관련 내용을 수록했다.

■가야는 왜 ‘따로 국밥’을 지향했을까

이상하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10대 500년 이어간 금관국과, 16대 520년 존속한 대가야가 분명히 존재했죠.

그쯤되면 ‘금관국본기’, ‘대가야국본기’ 등은 아니더라도 ‘가야본기’ 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은 왜 ‘가야’의 역사를 무시한 걸까요. 일반적인 설명은 이거죠.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삼국과 같이 통일된 하나의 고대 국가를 이룬 적이 없다는 겁니다.

12개(전기) 혹은 22개(후기)의 소국으로 느슨한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겁니다. 가야는 고대 국가의 첫번째 조건인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국’에 편입되기에는 ‘자격 미달’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가야는 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을까요.

가야 연맹 제국은 모두 소백산맥 및 지맥과 낙동강 및 그 지류로 형성된 작은 분지를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비근한 예로 대가야는 고령 서북쪽에 가야산(1430m), 서쪽에 비계산(1126m)과 두무산(1038m)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죠. 이러한 분지로 형성되어 있으니 낙동강 물길로만 왕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일왕국의 길이 어려워졌죠.

분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낙동강을 터전 삼아 살았습니다. 큰 일이 생겼을 때 인근 소국과 연합해서 대처하는 길을 모색했죠. 그렇게 10~20여개 소국이 ‘각자도생’을 원칙으로 성장한 겁니다.

“532년(법흥왕19) 금관국왕 김구해(김유신의 증조부)가 항복했다”는 기사와 554년(진흥왕 15) 신라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야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기사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562년(진흥왕 23) 9월 배반한 가야를 토벌했다”는 가야의 멸망소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한다.

■다양성의 가치가 평가됐다?

전기 가야 연맹체의 맹주인 금관국(가락국)을 예로 들어볼까요.

낙동강과 바다(남해)를 동시에 접한 금관국은 교역을 통한 경제를 나라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굳이 무력으로 주변 소국을 정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삼국유사> ‘기이·가락국기’에 등장하는 김수로왕 탄생신화를 봅시다.

“서기후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6개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중 한사람은 대가야의 왕이, 나머지 5사람도 가야의 임금이 됐다”고 했죠. 그뿐 아니고요. 통일신라 최치원(857~?)은 <석이정전>에서 흥미로운 대가야 전설을 전합니다.

즉 “가야산신이 천신과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인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인 뇌질청예 등을 낳았다”는 겁니다. 대가야왕과 금관국왕이 형제라는 이야기죠.

그런 점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참 흥미롭습니다. ‘주변국과의 자율·수평적 관계’를 유지했고, 그것을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증거’여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인정된다는 거잖아요.

언제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해 <삼국사기>에서도 ‘자격미달’의 평가를 받았던 ‘가야’였는데….

이제는 자율성·다양성의 모델이라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니….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하기야 금관국 및 대가야 설화를 곱씹어보면 ‘다양성의 지향’, 뭐 그런 의미로도 충분히 해석될 수 있겠네요.

<삼국사기> ‘잡지·지리’조에는 금관국(금관가야)과 대가야국의 역사를 짧게 정리했다. 즉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가락국 혹은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10대 구해왕에 이르렀고, 532년 항복했다”고 했고,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진흥왕이 멸망시켰다”고 설명했다.

■만년 2인자의 견제 때문?

각설하고요. 제가 이번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7개 고분군을 훑어보았는데요.

역시 최근 발굴 성과가 두드러진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 눈이 가더군요.

함안은 가야연맹체 가운데서도 아라가야(안라국)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데요.

여러분은 가야 하면 전·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인 금관국과 대가야국 등 2개국만 아시죠.

그러나 전기 연맹체(2~4세기말) 에서도 2인자, 후기연맹체(5세기 전반~6세기 중후반)에서도 2인자로서 존재감을 발휘한 나라가 있었는데요. 그 나라가 바로 안라국입니다. 왜 2등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런 인식 때문에 잘 몰랐을뿐 안라국의 위상은 만만치 않았답니다.

오죽하면 이런 견해가 있어요. 전기의 금관국, 후기의 대가야가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2인자였던 안라국의 견제 때문이었다, 뭐 이런 이야기입니다.

<삼국유사> ‘기이·가락국기’에 등장하는 김수로왕 탄생신화. “서기후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6개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 중 한사람은 대가야의 왕이, 나머지 5사람도 가야의 임금이 됐다”고 했다.

■“임나일본부 찾겠다”고 큰소리 뻥뻥

말이산 고분군에는 1.9㎞ 정도되는 구릉에 127기의 대형고분(지름 10~35m)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즐비한 대형 고분 덕분에 함안은 일제강점기부터 주목을 끌었던 곳입니다.

일제가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여기서 찾겠다”고 혈안이 되었죠. 예컨대 일본학자인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는 김해·함안 지역 조사에 나서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분명 여기에 있다. 내 손으로 임나일본부를 찾겠다’(<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고 큰소리 뻥뻥 쳤습니다.

그러나 1910~17년 사이 4차례의 조사결과 구로이타의 장담은 헛소리로 판명됐죠.

“막상 일본부라고 해도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조사결과 일본부의 자취 사라져서 찾을 방법이 없는 게 유감이다.”

한마디로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통일신라 최치원(857~?)은 <석이정전>에서 흥미로운 대가야 전설을 전했다고 한다. 즉 “가야산신이 천신과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인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인 뇌질청예 등을 낳았다”는 것이다. 대가야왕과 금관국왕이 형제라는 이야기다.

■속속 밝혀지는 2인자의 위상

그러나 이후에도 일제가 뒤집어쒸운 ‘임나일본부’의 악령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죠.

그러던 중 1992년 6월6일 아침 신문 배달 소년이 함안 도항리 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을 발견해냅니다.

굴착기로 파헤쳐지기 일보 직전 가까스로 발견·신고한 철조각은 말갑옷이었습니다.

동수묘·삼실총·쌍영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묘사된 것과 거의 흡사한 말갑옷이었습니다. 고구려 벽화와의 친연관계를 볼 때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과 관련있는 유물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2018년 말에는 아라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가야리에서 높이 8.3m에 달하는 토성벽(잔존길이 2㎞ 정도)이 확인됐습니다.

왕궁터에서는 망루, 무기고, 강당, 내무반, 취사반 등 부대 건물터 14개동이 노출됐습니다. 수도방위사령부가 연상됩니다.

또 말이산 13호분에서는 전갈 및 궁수자리 등 125개의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돌이 확인됐습니다.

이중 6개의 별로 구성된 궁수자리는 북두칠성을 닮았다고 해서 ‘남두육성’이라도 하는데요. 북두칠성이 하늘과 죽음을 의미한다면, 남두육성은 땅과 생명을 뜻하죠. 13호분에서는 중국제 모방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제 허리띠장식과 일본 최고위무덤에서만 보이는 녹각제 칼손잡이 등이 출토됐습니다. 강한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죠.

1992년 신문배달소년이 함안 아파트 공사장에서 기적적으로 찾아낸 말갑옷과 둥근고리큰칼. 아라가야 수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2018년 함안 말이산 13호분에서는 전갈자리와 궁수자리(남두육성) 등 125개의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돌이 확인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제공

■금관과 청자

2021년 7월에도 말이산 45호분 출토 유물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금동관 조각들을 찾아냈는데요.

무엇보다 이 금동관(길이 16.4㎝·높이 8.2㎝)이 백제나 신라로부터 받은 사여 혹은 수입품이 아니라 자체 제작품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아라가야산 금동관은 다소 거칠게 제작되었는데요.

그러나 두 마리의 봉황(추정)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며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아라가야만의 디자인입니다. ‘출(出)’자나 사슴뿔 모양인 신라제나, 풀(꽃) 형태 장식인 대가야제와는 사뭇 다른 독창적인 금동관입니다.4개월여 뒤(2021년 11월) 말이산 75호분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가 또한번 화제를 뿌렸습니다.

5세기 중국 남조(유송·420~479)에서 제작된 연꽃무늬 청자그릇이 분명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천안 용원리와 서울 풍납토성, 영남 옥야리·내동리 등에서 출토된 청자그릇과 쌍둥이라 할만큼 깊은 친연관계를 보였답니다. 청자를 매개로 5세기 동북아시아에서 활발한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가야리에서는 높이 8.3m에 달하는 토성벽이 확인됐다. 잔존 성벽의 길이는 2㎞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왕궁터의 부대시설 안에 있는 2호 건물지. 부뚜막과 돌화살촉 등으로 볼 때 군인들이 상주한 내무반 유구일 가능성이 짙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안라인수병의 정체

이와같은 발굴성과를 계기로 아라가야와 관련된 문헌기록이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삼국사기>의 아라국(안라국·아라가야) 관련 기사가 눈에 띕니다. ‘포상8국의 전쟁’ 기사인데요.

<삼국사기> ‘신라본기·나해 이사금’조는 “209년(나해 이사금 14) 포상 8국의 공격을 받은 가라국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 ‘물계자 열전’은 “포상 8국의 침입을 받은 나라는 (가라가 아니라) 아라”라고 상반되게 표현했습니다. 공격의 대상을 두고 <본기>는 ‘가라’, <열전>은 ‘아라’라고 달리 표현한 겁니다.

지금까지는 이 포상8국의 전쟁이 안라(아라가야)의 배후지원 아래 골포(마산)·칠포(칠원)·고사포(고성)·사물국(사천) 등 8국이 가라(금관가야)를 공격한 사건으로 해석되었는데요.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안라, 즉 아라가야가 포상8국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라는 견해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맞든 안라국의 위상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증거해줍니다.

또하나 주목을 받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광개토대왕 비문>의 고구려 남정(400년) 기사 중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문구입니다. ‘고구려 남정기사’는 광개토대왕이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한 왜를 쫓아냈다는 내용인데요.

그중 ‘안라인수병’의 문구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등장했죠. 그런데 요즘에는 ‘안라’를 ‘안라국(아라가야) 별동대’ 혹은 ‘안라국 수비대’로 해석하는 견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 안라국군대가 고구려·신라편인지, 백제·왜 편인지는 설왕설래 합니다.

어쨌거나 안라국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올 정도로 만만치않은 세력이었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019년 함안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복원 모습. 봉황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아라가야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이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복원·함안군 제공

■국제회의 주도한 안라

최근들어 아라가야의 위상을 영원한 2인자에서 1인자로 올리는 시도도 엿보입니다.

즉 <남제서> ‘동남이열전·가라’조에 “(479년) 가라왕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보국장군 본국왕’에 제수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요. 지금까지는 남제의 작위를 받은 ‘가라왕 하지=대가야왕’이라는 해석이 통설이었는데요.

후기 가야의 맹주가 대가야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죠.

그러나 5세기 중후반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가 말이산 고분에서 출토되자 새로운 해석이 나왔습니다.

<남제서>의 ‘가라왕 하지’는 대가야왕이 아니라 다름아닌 아라가야 왕을 가리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인용하기를 주저했던 <일본서기>의 아라가야(안라국) 관련 기록도 부각됩니다

“임나는 안라를 형(兄) 혹은 아버지(父)로 여겨 오로지 안라의 뜻을 따른다”(<일본서기> ‘흠명기·544)’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안라(아라가야)를 형님으로 모신다는 얘기죠.

<일본서기>를 보면 529년 남부 가야 제국이 안라국을 중심으로 자구책을 모색하고, 이에 안라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하여 새롭게 조성한 고당(高堂)에서 국제회의를 주도합니다.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고, 신라가 탁기탄(경남 밀양)을 멸망시키는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이 국제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안라(아라가야)가 당대의 국제정세를 주도한 유력한 나라였음을 암시해주죠.

말이산 45호분에서 금동관 조각이 출토되는 모습이다. 제작을 위해 뚫음(투조)기법을 구사할 때 문양의 크기와 모양이 매끄럽지도 일정하지도 않다. 다소 거칠게 제작됐다.|함안군 제공

■최후의 몸부림

이 무렵(540년대) 가야연맹은 대가야(북부)와 안라(남부) 등 남북 이원체제로 굳어졌는데요.

안라국은 541년과 544년 두차례에 걸쳐 6~7개 소국 대표들을 이끌고 백제의 사비(부여)에서 1·2차 국제 회담을 엽니다.

하지만 두차례 사비회의는 백제와의 입장차 때문에 결렬되고 맙니다. 안라는 백제의 압력을 무력화시키려고 고구려와 밀통하여 고구려-백제간 독산성 전투를 유발시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백제군의 승리로 끝났고요.(548)

이후 가야연맹은 백제의 부용국으로 전락하게 되죠.

6년 뒤인 554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는 등 대패하게 됩니다.

이때 가야연맹 제국도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게 되었고요. 반백제 독립정책의 선봉에 섰던 안라국은 가야제국중 가장 먼저 신라에 투항합니다.(560) 그후 2년 뒤인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써 가야의 5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요.

여하간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가야역사가 새롭게 부각될 것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해 가야에 대한 연구가 일천한 상태에서 세계유산에 등재된 감이 있어요. 예를 들면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지역을 왜 가야 영역으로 묶는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세계유산 등재가 가야사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네요.(이 기사를 위해 가야고분군 세계유산추진단의 하승철 조사연구실장과 최석화 연구원이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기사와 관련된 자문을 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수로왕에서 월광태자까지>, 푸른역사, 2002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3-왕들의 나라>, 푸른역사, 2004

주보돈, <가야사 새로 읽기>, 주류성, 2017

김경복·이희근, <이야기 가야사>, 청아출판사, 2010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21

동아세아문화재연구소, <함안 말이산고분군 13호분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0

두류문화재연구원, <함안 말이산 고분군 정비사업부지내 유적>(학술조사보고서 50책), 2021

 
 

경상문화재연구원, <함안 말이산 고분군 57·128호, 석1호묘>(발굴조사보고서 89책), 2020

아래는 신흥무관학교로 검색한 나무위키 설명문 중 일부다.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대고산(大孤山)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 했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독립운동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것과 직결되는 사업이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따라서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1912 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봉천부(奉天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면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통화현은 과연 어디였을까?

지금의 압록강 중류 북쪽에 표시된 통화 부근일까?

 

아니다.

지금의 통화는 1932 년 건국된 일본 꼭두각시국 만주국의 통화현이다.

 

1911 년 멸망한 청국의 봉천성 흥경부 통화현은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류 지금의 청룡하 상류 지점이다. 

 

 

근거는 당시의 요하가 위 표시와 같이 지금의 란하 정북쪽 지류이고 이조선의 압록강이 지금의 청룡하이기 때문이다.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흥경부 통화현

府東南二百七十裡 明 建州衛之額爾敏路 光緖三年置縣 隸興京同知 宣統元年改隸府 縣境居旺淸邊門外 北龍岡山脈 自興京.海龍間納噜窩集入 迤邐而東 歷臨江直達長白山 亘二百餘裏 山南之水皆入鴨綠江 山北之水皆入松花江 爲鴨綠江松花江之分水嶺 以其爲永陵幹脈 故曰龍岡 南有渾江 自臨江入 西流屈東流 復迤西南入懷仁 左受大羅圈溝河小羅圈溝河 右受哈泥河加爾圖庫河 舊設馬撥七 西哈馬河快當帽子英額布歡喜嶺半截拉子入興京 又快當帽子西南行 曰高麗墓頭道溝等入懷人

주) 高麗墓: 광개토왕릉 즉 영락태왕릉 

 

`` 2004 년 7 월 24 일 홍산문화의 중심도시인 적봉시 적봉학원에서 열린 ` 제 1 회 홍산문화국제학술연토회`에서 중요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중국의 유국상(1968~)이 1987 년 내몽고에서 발견된 `소하서문화유적`은 기원전 6500 년까지 올라가는 `동북지역에서 가장 오래괸 신석기유적`이라는 논문이 발표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국상은 새로운 연구를 통하여 2006 년에 `서요하 유역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청동기시대까지의 고고학문화 개론`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소하서문화의 연대를 기원전 7000년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유국상은 몽고족으로 북경대 고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소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위는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현재 한국항공대학 인문자연학부 교수인 우실하가 지은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297 쪽 일부입니다.

 

결국 한.중은 아래 표시와 같은 요하문명 유적.유물 지도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면 위의 유적.유물 발굴지를 통칭하는 명칭 요하문명은 합당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명백한 동북공정 선전물입니다.

 

아래와 같이 잠시 우수하 이름을 빌어다 우수하문명이라 해야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현명한 작명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서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기이> `고조선.왕검조선` 기록에 나타난 우수하를 대한인 중 몇이나 기억하겠습니까?

 

아래와 같이 발굴지역의 중심부가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과 북쪽으로는 아들을 보내 세운 부여의 영역이기 때문에 마땅히 `조선문명`이라 해야 합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요수와 한.당 시기의 대요수 및 송.청 시기의 요하가 일본명치왕놈의 지리 조작 결과 지금 란하 의 상.중.하류 본류와 지류였기 때문에 중국인이 명명한 `요하문명`은 물론이고 천진 남쪽.산동반도 북쪽 바다인 발해를 인용한 한국인 이형구가 주장한 `발해문명` 도 역사지리적 측면에서는 문명지의 지명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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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考≫를 통해 본 柳得恭의 역사 인식

 

2004701122 이 성 희



목차


Ⅰ. 머리말
Ⅱ. 유득공의 생애
Ⅲ. 《渤海考》의 내용 분석
1. 서술체재와 내용
2. 서술에 나타난 발해사 인식
Ⅳ. 맺음말(사학사적 의의)

 

 

Ⅰ. 머리말

 

조선후기 17-18세기는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발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때로서 실학자들이 선두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허목의 《東事》 <靺鞨列傳>을 비롯하여 이종휘의 《東史》<渤海世家>, 유득공의 《渤海考》, 정약용의《我邦彊域考》<渤海考>와 <渤海續考>, 홍석주의 <渤海世家> 등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 중 특히 유득공의 《발해고》는 ‘남북국 시대론’을 최초로 제기하여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논쟁은 관련 연구자들 사이의 논란이 되고 있다. 유득공은 역사지리서인 발해고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에 관한 연구는 의외로 적다. 1980년대 들어 그의 漢詩 및 문학에 관한 한국 한문학계의 연구업적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이루어진 연구의 대부분은 그의 생애나 업적, 그리고 《발해고》 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에 그쳤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발해고의 번역본이 출간되고 조선후기 발해관 및 유득공의 역사인식을 다룬 연구서 등이 나타나 발해사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발해고의 저자인 유득공의 가계와 생애를 살펴보고 발해고의 서술체재와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 발해고의 발해사 서술을 분석하여 유득공의 역사인식을 살펴보겠다.

 

Ⅱ. 유득공의 생애

 

泠齋 柳得恭은 1748년(영조 24)에 태어나 1807년(순조 7)에 죽었는데 주로 활동했던 시기는 조선 후기 정조시대였다. 유득공의 가계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文化柳氏世譜가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유득공의 증조부 柳三益은 ‘庶子’로 늙어서야 관직을 받은 인물이다. 즉, 1722년 52세에 通禮院 引義로 추천되어 통례원에 근무, 1731년 內資寺 主簿, 1740년 水原 監牧官, 1745년 江華 監牧官이 되었다. 그는 뒤늦게 관직에 들어와서 24년동안 종6품의 주부나 감목관을 역임하다가 77세의 고령으로 임소에서 사망하였다.

유득공의 조부 柳漢相은 과거에 뜻을 두었다가 모친 함평 이씨가 사망한 뒤로 포기하고, 주로 문객생활을 하였다. 판관 윤용(처가이며 재종이 됨)의 문객이 되어 그가 부임하는 영월, 강화, 그리고 함경감영 등지를 수행하였고 윤용이 사망한 뒤에는 宋翼輔, 趙東漸 등을 수행하였다.

유득공의 아버지 柳瑃은 유한상과 평산 신씨 사이의 맏아들로 27세에 요절하였다. 증조부인 유삼익과 외조부인 홍이석이 서자였기 때문에 유득공은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유득공은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 19세에 숙부인 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 짓기를 배웠으며, 20세를 지나 朴趾源․李德懋․朴齊家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북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득공도 중국여행을 했다. 첫 번째는 검서관으로 발탁되기 전에 심양으로 가는 위문사를 따라 갔고, 두 번째는 심양을 거쳐 열하의 별궁을 방문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전대미답의 여로를 밟았다. 특히, 첫 번째 여행은 《東國地理誌》를 읽고 연상만 했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에서 일어난 고구려, 발해 등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발해고》를 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774년(영조 50) 27세에 司馬試에 합격하여 生員이 되었고, 정조가 즉위하여 奎章閣을 설치한 뒤인 1779년(정조 3)에 檢書官에 임명됨으로써 32세에 비로소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포천현감(抱川縣監)․양근군수(楊根郡守)․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사도시(司導寺)주부․가평군수(加平郡守)․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를 역임하였고, 그를 아끼던 정조가 돌아가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는 노론․ 소론․ 남인을 고루 등용하여 왕권을 간접적으로 강화하는 탕평책을 썼고 양반의 서얼들에 대한 差待를 완화한 庶孼通淸을 단행하였다. 또한 규장각을 설치해서 각종 문화출판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득공은 정조를 近侍하며 양반의 庶類로서 漢文 新四家, 北學者, 규장각 검서관, 그리고 역사지리학자로서 뚜렷한 활동을 했다.

그는 단군 조선에서 부터의 역대 도읍지를 유람하고 그 경험을 살려 《二十一都懷古詩》를 지어 우리 역사의 전개과정을 개괄하였고 발해와 한사군의 역사에 대해 각각 《渤海考》(1784), 《四郡志》를 저술하였으며, 그 당시 조선사회의 세시풍속을 정리한 《京都雜志》를 남겼다. 특히 그는 역사상 실체는 있었으나 기록이 없어진 발해와 한사군 등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저술하였고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당시의 세시풍속에도 관심을 기울여 저술을 남긴 것이 독특하다.

 

Ⅲ.《渤海考》의 내용 분석

 

1. 서술체재와 내용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권으로 된 ≪발해고≫ 와 4권으로 된 ≪발해고≫ 가 각기 필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1권본은 독립된 책으로 되어 있는데 비하여 4권본은 《泠齋書種》에 수록되어 있다. 1권본이 유득공이 처음에 썼던 것이고 4권본은 유득공이 언젠가 내용을 수정하고 증보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는 1권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권본 ≪발해고≫는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던 1784년에 저술되었다. ≪발해고≫의 체재는 「君考」․「臣考」․「地理考」․「職官考」․「儀章考」․「物産考」․「國語考」․「國書考」․「屬國考」 등 9考로 되어있다. 그가 책이름에 굳이 고(考)자를 붙인 이유는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내가 내각의 관료로 있으면서 궁중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역사를 편찬하여 군,신,지리,직관,의장,물산,국어,국서,속국의 9考를 만들었다. 이를 世家, 傳,志로 삼지 않고 고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君考」는 기전체 사서의 세가에 해당되는데 震國公에서부터 高王, 武王, 文王을 거쳐 발해의 마지막 왕이라고 알려진 왕 諲譔, 그리고 興遼王, 烏舍城 浮渝府 琰府王 까지 17명의 발해군주를 소개하고 있다. 발해의 世系에 대해서 새로 발견된 사실 한두 경우를 제외하면 현재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소개된다. 대조영의 出自, 흥요왕과 오사성 부유부 염부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이견이 많다.

「臣考」는 기전체 사서의 열전에 해당한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공하고 숙위에 참여하기를 청하고 관직을 받아오는 발해 사신들, 일본에 파견된 발해의 사신들에 관한 일본 史書의 기록들을 전재하고, 발해 멸망 시에 守城한 무명의 발해인들과 고려로 내투한 발해세자 대광현 등을 소개하고 있다.

 

大叡

장경 4년 (824) 2월에 선왕이 대예 등 5명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고, 숙위에 참여하기를 청하였다.

 

大昌泰

강왕 때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일본 천황이 태극전에 행차하여 이들을 접견하였는데, 네 번 절하는 것을 줄여서 두 번 절하고 박스는 치지 않도록 하였다.

 

洪見

고려 태조 12년 (929) 6월 경신일에 배 20척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고려로 도망하였다.

 

「地理考」는 ≪新唐書≫, ≪遼史≫,≪淸一統志≫를 인용하면서 5경,15부,62주, 그리고 현 등의 위치를 비정하고 안설을 덧붙이고 있다. 이용범은 이곳이 오류가 제일 많은 부분이라고 지적하였다.

「職官考」는 新唐書에 소개된 발해의 3성 6부 12사서 체제의 文職과 十衛제로 된 武職을 열거했다.

「儀章考」는 발해의 의식절차를 언급한 것으로, ≪신당서≫의 기사를 그대로 옮겼다.

「屬國考」는 ≪宋史≫에 실린 定安國전을 가필하지 않고 옮긴 것이다. 정안국의 유래, 정안국 국왕 열만화(烈萬華)와 烏玄明의 조공, 그리고 거란과의 대립 등을 설명한다. 말미에는 고려 현종 9년에 정안국 사람 骨須가 來奔했을을 덧붙이고 있다.

 

정안국은 본래 마한(고구려를 마한이라고도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 후예 국가인 발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송기호)종족으로 발해가 거란에 격파되자 그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다.

 

송나라 태조 개보 3년 (970)에 그 나라 왕 열만화가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리고 갖옷을 바쳤다. 태종 태평흥국 6년(981)에 다시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려 “정안국 왕 신 오현명이 아룁니다. 성스러운 임금께서 천지에 은혜를 두루 펴시고 오랑캐의 습속을 어루만지시는 시절을 삼가 만나게 되니, 신 오현명은 진실로 기쁘고 즐럽기 한령없어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입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정안국 사람 골수가 고려로 망명하였다.

 

쑨위량은 발해는 일찍이 속국이 없었음을 들어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진헌은 속국을 지배, 종속의 좁은 뜻이 아닌 연속의 의미로써 보면 정안국을 포함시킨 것을 틀렸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國書考」는 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낸 외교문서인 국서 6통이 소개되고 있다. 일본사서에서 발췌하여 있는 그대로 옮겼다. 무왕이 보낸 국서에는 많은 발해 연구자들이 수시로 인용하는 문구가 실려 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天朝가 명을 받아 일본을 건국하셨고 누대로 찬란한 업덕을 쌓으셔서 百世나 번성하셨습니다. 저는 列國가운데 하나로서 외람되게 여러 藩들을 거느렸고 고구려의 옛터를 수복했고 부여의 유속을 지녔습니다.

 

이에 대해 정진헌은 이것만으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뜻은 아니고 다만 지역연고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物産考」와 「國語考」는 각가 발해의 특산물을 소개하고 발해의 언어를 정리하고 있다. 내용이 너무 적고 인용자료 모두가 신당서에 실린 것을 그대로 옮겨쓴 것으로 유득공 자신의 견해가 전혀 피력되지 않았다.

 

태백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綿,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도의 오얏, 악유의 배, 부주의 은

 

왕을 可毒夫, 聖王,基下라 부르며, 왕의 명령을 敎라 한다. 왕의 아버지를 老王, 어머니를 太妃, 처를 貴妃라 하고 맏아들을 副王, 나머지 아들을 王子라 한다. 관품은 질(秩)이라 한다.

 

 

2. 서술에 나타난 발해사 인식

 

우선 발해에 대한 유득공의 인식은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유득공은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나라 또는 당나라의 속국이나 속주로 보는 견해에 대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밝혔다. 이는 ≪동사강목≫ 등에 있어서 안정복의 견해와 아주 대조적인 것으로 안정복은 ≪동사강목≫ 凡例에서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발해사를 우리 역사 속에 넣을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남북국 시대론이다. 유득공은 발해의 존립시기를 남북국시대하고 파악하였다. 유득공은 북쪽에 발해가 있고 남쪽에는 신라가 존립하는 상황을 남북국시대라고 했다. 이는 발해사를 한국사 체계로 편입시켰음을 위미한다. 이것은 허목과도 구별된다. 허목은 신라 ․고구려 ․백제를 단군 기자․위만과 같이 세가 부분에서 취급했음에 비하여 발해를 열전에서 취급하여 발해를 일단 낮게 평가하였다.

 

(보충 필요)

진국공
진국공은 성이 대씨이고 이름은 걸걸중상으로 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던 자들이다. 군고 진국공

이것은 서문에 나타난 의식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한계성이 있다.

 

≪발해고≫에서 치명적인 단점으로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는 발해 멸망 전후의 기록인 興遼王과 烏舍城 浮渝府 琰府王에 관한 기사이다. 유득공은 흥요왕 大延琳과 琰府王을 발해의 군주로 「君考」에 넣고 있다. 특히 염부왕에 대해서는

 

按 (살피건대), 발해 홀한성이 격파된 것은 요 태조 천현 원년(926년)으로 후당 명종 천성 원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 때에 발해가 멸망하였다고 하지만 《요사》에는 태조가 군주의 덕을 갖추고 있어서 발해 국가를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하였다. 요 성종 통화 14년(996)에 蕭韓家奴(소한가노)가 “발해, 고려, 여진이 서로 동맹을 맺었다”고 아뢴 적도 있다........(생략).......이로 보건대 발해는 일찍이 멸망하였던 것이 아니다. 부유부 염부왕에 대해서 비록 성과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나, 태조의 조서를 보니 그가 대씨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발해가 언제 멸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按設에 염부왕에 대해 대씨라는 것과 대인선의 멸망 이후에도 염부왕과 같은 것이 있어서 발해가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쑨위량은 “흥요왕 대연림과 염부왕을 군고에 넣어 서술하고서 아울러 안어에 ‘발해는 일찍이 망하지 않았다. 발해가 언제 망했는지는 고증할 수 없다’고 해서 발해 자체의 역사를 연장했다. 이런 종류의 잘못된 이해는 고증하는데서 두드러진다”라고 논박하였다.

이용범은 흥요국은 大延琳의 반란 정권으로, 그리고 烏舍城 琰府王은 상경 일대에 출현한 토민 정치집단으로 파악하고 유득공이 이를 군고에 넣은 것은 발해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발해 왕통을 연장하려는 주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진헌은 大諲譔의 기사를 제시하면서 유득공이 발해의 말왕이 대인선임을 알았다고 하였다.

 

이날 밤 요 태자 야율배, 대원수 야율요골, 남부재상 야율소, 북원이리근 야율사열적, 남원이리근 야율질리 등이 홀한성(발해 수도 상경성)을 포위하였다. 기사일(12일에 왕이 항복을 청하였다. 경오일에 요 임금이 홀한성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신미일(14일)에 왕이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고 양을 끌고서 신하 300여 명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2월 병오일에 요나라가 발해국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홀한성을 天福城으로 바꾸었다. 또 자신의 태자인 야율배를 人皇王으로 삼아 통치하도록 하였다.

 

이런 그가 염부왕을 소개하면서 발해가 언제 멸망했는지 모르겠다 했다면 이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명의 혈육이 도망가 존속한 것을 왕실의 존속으로 본 예를 들어 유득공도 그러한 경우가 아닐까? 라고 하였다.

유득공은 발해 5경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상경용천부는 지금의 寧古塔이고 중경현덕부는 지금의 吉林이며 동경 용원부는 지금의 鳳凰城이다. 남경 남해부는 지금의 海城縣이고 서경 압록부는 고증할 수 없으나 마땅히 압록강 근처에 있어야 한다

 

5京에 대한 유득공의 언급을 정진헌은 上京의 위치비정을 1933년에 발굴된 유적을 통해 정확했음이 입증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中京은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묘지가 출토되어 舊國을 돈화시로, 중경은 화룡으로 비정하는 현재의 주장과 비교하면 그의 견해는 상당한 근사치가 있다 하였다. 東京은 현재의 학설과 방향이 정반대이며 南京의 위치 비정도 역시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렇게 잘못된 비정을 했으므로 남해부의 新羅道를 海路라고 그는 오판했다. (그 뒤에 정약용과 한진서에 의해서 고쳐졌다)

이것은 저자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遼史≫,≪淸一統志≫의 오류 때문인데 유득공은 의문을 제시하면서도 ≪遼史≫,≪淸一統志≫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이상은 신당서에 기록된 것인데, 62州라 해놓고 단지 60주만 열거되어 있다. 또 淸一統志에 郭州가 있지만 여기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당나라 역사서에 누락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에 기록된 발해 지리

 

이상은 요사에 기록된 것으로서 요나라 태조가 동쪽으로 발해를 병합하여 성읍을 얻은 것이 103곳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군현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지금 113곳이나 되니 의문스럽다. 요사에 기록된 발해지리

 

송기호는 이러한 자세는 유득공의 고증학적 자세를 잘 드러내는 것이라며 그 뒤에 정약용, 한진서 등이 발해 지리를 제대로 비정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였다.

유득공은 발해와 신라의 국경선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신라가 통일한 뒤에 동북은 泉井郡으로써 경계를 삼았으니 지금의 德源郡이다. 서북은 唐岳縣으로 국경을 삼았으니 지금의 中和府이다. 중화에서 동쪽으로 祥原,遂安,谷山,그리고 德原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그 변경 요새다. 이밖에 함경도와 평안도의 땅은 발해가 모두 차지했다

 

유득공은 논란이 많고 아직도 결정을 못 본 泥河를 아래와 같이 비정했다.

 

唐書에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맞닿았는데 泥河로써 경계를 삼는다고 했다. ...이른바 일명 니하라고 하는 패수는 곧 우리나라 평양의 패수니 지금의 대동강이다. 신라와 발해의 국경이 나뉜 곳은 바로 대동강 일대였다.

 

이것은 현재의 연구결과와 부합된다. 이에 대해 徐炳國은

 

유득공은 발해사의 개척자로서 그 이름이 길이 남은 인물인데 발해사 연구에 있어 그의 두드러진 공적은 발해국과 신라의 접경지라고 《신당서》에 기록된 니하를 구체적으로 실증한 것이고 그는 발해고에서 두나라 접경지 문제에 자신있게 결론을 내렸다.

 

라고 하면서 극찬하였다.

 

Ⅳ. 맺음말(사학사적 의의)

 

발해사는 한국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삼국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로 당연시 되었던 것과는 달리 발해사는 그것이 우리의 역사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유득공은《발해고》 머리말에서 고려가 발해 역사까지 포함된 ?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한 뒤에, 발해를 세운 大氏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북한 역사 학자 김혁철은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기 전까지는 어느 한 실학자도 발해역사에 대한 글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유득공은 발해사연구를 시작한 실학자들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나중에 정약용, 한치윤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발해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던 그의 노력은 더더욱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본문에서는 걸걸중상을 건국자로 보면서 속말말갈인으로서 고구려에 신하로 보았는 것 등 본문에서는 서문에 나타난 의식을 뒷받침하지 못한 한계성이 있다.

17세기에 들어와 외침을 빈번하게 받으면서 왜 조선이 약한 나라가 되었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영토적인 것에 관심을 쏟게 했으며 이는 고구려 고토 회복 의식에서 발해 고토 회복의식의 표출로 나타났다. 유득공의 발해고와 발해고 自序에 나타난 남북국시대론은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우리 역사로 인식고자 한 그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유득공, 송기호(옮김),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

宋基豪, <조선시대 史書에 나타난 발해관>, ≪韓國史硏究≫72, 1991.

李萬烈, <朝鮮後期의 渤海史 認識>, 《한우근박사정년기념논총》, 1981.

임상선(편역), ≪발해사의 이해≫, 신서원, 1991.

정진헌, ≪실학자 유득공의 고대사 인식≫, 신서원, 1998.

鄭鎭憲, <柳得恭의 南北國時代論에 대한 認識>, 《경희사학≫20, 1996.

조동걸 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창작과 비평사, 1994

조성을, <조선후기 사학사 연구 현황>, ≪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上), 한울, 1987.

 

 

 

출처 : 모두 행복하십시오
글쓴이 : 한미옥 원글보기
메모 :

 

명도전에 관한 박선미의 논문에서 명도전이 출토된 지역과 그 수량을 표시한 명세입니다.

   

      북경                4,553

      하북성           59,245

      내몽고                218

      대릉하                684 

      요하                 2,601

      요동반도             857 

      압록강유역     2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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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명도전 분포에 대한 의문>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청골 | 조회 165 |추천 0 |2009.12.14. 20:54 http://cafe.daum.net/alhc/ALGC/3200 


명도전은 연 소왕 이후 본격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지리적 분포 양상에는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우선 중국에서 명도전이 발견되는 위치입니다.
 
(출처 : http://2126088.blog.sohu.com/116694931.html )
據不完全統計,現已發表的明刀共出土近200起,其中以北京市出土最多,以下依次爲河北省、內蒙古、遼寧省、天津市,另外吉林、陝西、山西、河南等省也有出土。現將考古發掘中發現的各地區出土燕國明刀的地點,列舉如下:?


北京市:朝陽區、海澱區、豐台區、崇文區、西城區、宣武區、懷柔區、順義區、通州區、房山區、平穀縣、密雲縣、延慶縣、昌平區、大興區;?
河北省:易縣燕下都、石家莊、灤平、承德、滄縣、容城縣、灤南縣、蔚縣、興隆、平山縣;?
內蒙古:赤峰、涼城、敖漢旗、包頭市;?
遼寧省:撫順、錦州、鞍山、遼陽、西豐縣、朝陽、大連、義縣、鐵嶺、遼中縣、瓦房店市、金縣;?
天津市:寶坻、靜海縣;?
吉林省:輯安;?
山西省:山陽、永濟、盂縣、原平;?
河南省:鄭州;?
陝西省:鹹陽。?
 
약 200곳에서 명도전이 발견되었는데 북경-하북성-내몽고-요녕성-천진시의 순서로 출토되었고, 그외 길림, 협서, 산서, 하남 등지에서도 출토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자료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가지만)에 의하면 박선미박사의 하북성>북경>압록강>요하연안>요동반도>대릉하>내몽고의 자료는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연나라가 발행하여 통용된 화폐라면 당연히 연과 접한 조, 제나라 지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연과 적국의 관계(소왕이후)였을 동호(내몽고)와 조선(요하동안, 압록강)에서 더 많이 발견되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하는 것인가' 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지리적 분포양상이라면
1. 명도전은 연이 동북민족과의 거래를 위해 만든 특별한 화폐인가?
2. 명도전은 동북민족이 연과의 거래를 위해 만든 특별한 화폐인가?
라는 두가지 상황을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한가지 제가 인용한 자료에 보이는 산동지방에서 발견되는 제명도(齊明刀)는 과연 연이 제나라를 5년간 지배했던 시기의 유물일까요("留循齊五年”之遺物)? 제가 막연히 추축하기에는 이 제명도 또한 동북민족이 제와 교역하기 위해 만든 또 다른 명도전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드는데 이 가설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요하, 압록강 연안의 명도전 중 제명도가 있어야만 하므로 이 부분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는 현재까지는 타당성이 없다고 추정됩니다. 따라서 명도전을 동북민족이 만들었다는 가설 또한 배제됨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럼 명도전은 연이 동북민족과의 교류를 위해 만든 특별한 화폐이고, 제명도는 제나라에서 사용하던 연나라 화폐라는 소리가 되는데 한나라에서 동시에 두가지 화폐를 시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고수 여러분의 지도편달 바랍니다.




 

 

 

 

 

<!-by_daum->

 아! 대한민국!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이는 나라이름...

 

大韓民國, 大 (클 대) 韓 (나라 이름 한) 民 (백성 민) 國 (나라 국)

 

대한민국은 원래 大韓民國으로 그 직역은 "크고 위대한 백성의 나라"라는 이며, 대한민국의 약칭인 한국은 큰 나라, "위대한 나라"라는 입니다.

 

즉,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민주주의 사상에 기인...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제 1,2조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호 '대한민국' 발안자를 아십니까?"

역사학자들 거의 몰라… 임정(臨政)서 신석우 선생이 제안

우리 국민 중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3·1운동 81주년을 맞아 새삼 우리 국호의 창안자가 누구인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10여명의 근현대사 전공자들에게 질문했으나 뜻밖에 ‘모른다’는 대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였으며 1948년 8월15일 건국과 함께 계승한 우리의 국호이다.


1919년 4월 10일 오후10시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오늘날의 국회)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이었다.


참석 의원은 29명.


처음 ‘대한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이 신석우(申錫雨·1894-1953).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여운형(呂運亨)의원이 반대했다.


“대한(大韓)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신석우가 되받았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대한민국’ 국호가 채택됐다.


어떻게 많은 역사전공자들조차 대한민국 국호의 발안자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한 소장역사학자는 “우리 역사학계가 거시적 흐름을 중시하다 보니 개개의 사안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자연히 ‘신석우’란 인물에 대한 연구나 일반의 인식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신석우는 20-30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던 거목이었다.


임시 의정원 기사록에 따르면 신석우는 국호 제정 말고도 임정 관제에 군무부(軍務部) 증설, 임정 초대 총리에 이승만추천, 임시헌장에 병역(兵役) 포함 등을 관철시키는 등 초기 임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의 언론사에서 굵직한 흔적을 남긴 것은 24년 30세의 나이에 만석꾼 부친을 설득해 8만5000원을 주고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었다.


만성적인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는 신석우의 인수로 재도약 계기를 마련했으며 사장으로 민족의 스승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대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신석우의 활약은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인 신간회 활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27년 2월15일 오후7시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 대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신석우는 사회를 맡았고 벽초 홍명희가 개회를 선언했으며 이어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처음에 이상재 선생이 사양하자 신석우는 “신간회 회장이 되시는 것이 그렇게도 겁이 나십니까”라며 간곡히 설득해 추대를 성사시켰다.


신간회 창립 때 간부 및 발기인은 모두 51명이었다.
그중 조선일보계가 사장 부사장 편집국장 등 9명으로 가장 많았다.


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신석우는 민세 안재홍 선생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상해로 탈출했다.


신용하 교수는 “아마도 전 재산을 쏟아 부으면서 펼쳤던 독립운동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데 대한 실망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분석하면서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제정이야말로 신석우라는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라고 밝혔다.


/ 이한우기자

 

이상은 조선일보기사입니다. 조선일보는 원래 민족독립운동가들이 주인 시대와 친일부역자 방응모씨의 조선일보 인수(1933)로 나뉘게 됩니다.

 

올해 2009년이 조선일보 창립 89주년이라고 하는 데, 이는 정확히 틀린 것입니다. 친일매국지를 민족독립지로 왜곡, 조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지요.

 

결국, 친일매국지 70주년이라 해야 맞는 역사적 진실이라 하겠지요.

 

참고로 신석우선생 약력...

 

호는 우창()이다. 일찍이 중국

상하이

[]로 망명하여

여운형

()과 손잡고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고, 유인()신문 《아등()의 소리》를 발간하는 한편,

임시정부

교통총장직을 맡았다. 1924년 일본의 훼방으로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를 인수하여

이상재

()를 사장에 추대,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민족지

로 성장시키는 데 힘썼다. 8 ·15광복 후에 주()자유중국 대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가운데 분이 신석우 선생, 좌측은 신채호 선생, 우측은 신규식 선생

신석우(申錫雨) (1895. 9. 2~1953. 3. 5)

한국의 독립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다,1915년 3월 경성고보(京城高普) 교원양성소(敎員養成所) 출신 이용우(李用雨) 등이 민족정신 고취와 일본인들에게 침탈당한 사업을 한국인 스스로 부흥시킬 것을 목적으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 )를 조직하자, 계원으로 가입하여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한 주식 모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1917년 3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그 후 일본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919년 3월 상해에서 고려교민친목회(高麗僑民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교통총장(交通總長)으로 선임된 그는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입법기관의 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 결정하는 등 국무원(國務員) 구성과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임시정부 기본법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같은 달 개최된 임시의정원 3차 회의에서 경기도 의원, 의원자격심사위원(議員資格審査委員)등으로 선임되어 민족운동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24년 1월 서울에서 최린(崔麟)・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안재홍(安在鴻)・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를 인수하여 상무이사와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언론의 창달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7년 2월 안재홍(安在鴻)・김준연(金俊淵) 등 30여 명의 민족주의장들과 함께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총무간사, 신간회 경성지회(京城支會) 대표로 선임되어 지회 조직 건설에 앞장서는 등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 광복 뒤 1949년 초대 주중대사(駐中大使)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기타] 도서: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pp.774~775.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극기 

 

 

 

출처 : 호모사피엔스
글쓴이 : 저격수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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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일제강점기 최악의 발굴 ‘악명’…만신창이가 된 창녕 고분들

등록 :2016-08-23 16:17수정 :2016-08-23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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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⑭ 1918~19년 창녕고분 발굴의 참극

화차 2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유물들 쏟아졌지만
야쓰이는 보고서 한장 내지않고 유물들 빼돌리기에 급급했다
그뒤 방치된 고분들은 도굴꾼과 일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야쓰이가 찍은 1918~19년 창녕 교동고분의 굴착조사 현장. 봉분 한쪽을 허물고 내부 석실 구멍을 노출시킨 모습이다. 조선인 인부들과 그들이 가져온 흙지게 등도 보인다.
야쓰이가 찍은 1918~19년 창녕 교동고분의 굴착조사 현장. 봉분 한쪽을 허물고 내부 석실 구멍을 노출시킨 모습이다. 조선인 인부들과 그들이 가져온 흙지게 등도 보인다.

 

한국 고고학사상 최악의 발굴을 꼽는다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하룻밤새 무덤 안 유물을 깨끗히 청소해버린 1971년 무령왕릉 조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엔 이를 능가하는 보물 싹쓸이 작전 같은 발굴 참사가 두고두고 일본 학자들 입에 오르내렸다.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불과 두달여만에 비화가야의 옛 터전인 경남 창녕 교동고분군의 대형 무덤 9곳의 유물들을 싹쓸이하듯 걷어간 뒤 보고서조차 내지않은 야쓰이 세이이츠의 단기조사 작업이 그것이었다.

 

가야권 유적들은 1910년 건축사학자 세키노 타다시와 야쓰이의 조사단이 조선 고적을 예비답사할 당시부터 상당한 눈길을 받았다. 당시 진주 옥봉·수정봉 유적과 고령 지산동 산허리의 가야고분군, 도굴로 일부 석곽이 드러난 창녕 고분군을 답사한 세키노는 “가야 유적이야말로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조사성과”라고 평하기도 했다. 일본과 가장 인접한 경남 일대 가야권에서 임나일본부설과 3세기 진구왕후의 한반도 정벌을 실증할 증거들이 나올 공산이 가장 크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주와 가야권을 잇는 낙동강변의 요지 창녕에는 산자락에 경주에 버금갈만큼 많은 고분군들이 흩어져 이마니시 류 등의 여러 일인 학자들이 일찍부터 눈독들이며 답사를 진행했다.

 

이런 와중에 교동 발굴에 나선 야쓰이는 마음이 초조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일대 낙랑계 유적 발견에 뒤이어 한반도 남부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할 유적 출현을 고대했으나, 1917년 그가 조사하면서 ‘왜’ 자체로 단정한 전라도 나주 반남고분 외에는 백제·신라권에서 도드라진 실물들이 나타나질 않았다. 이런 실정에서 1918년 창녕 교동고분을 처음 발굴조사한 후배학자 우메하라 스에지, 하마다 고사쿠가 토기와 장신구 등 주목할 만한 출토성과를 보고하자, 야쓰이는 갑자기 마음이 동해 그해 12월 겨울인데도 창녕 교동 일대의 거대 고분으로 달려갔다.

 

춥고 땅이 딱딱한 악조건 속에서 야쓰이는 가장 큰 규모인 7호분과 89호분의 굴착조사에 매달렸다. 교동 7호분은 봉토의 지름이 31.2m, 높이 8.5m에, 내부 석곽의 주검방 길이 9.0m, 너비 1.7m에 이르는 초대형 고분이었다. 발굴 인부들은 봉토 남단벽의 상부가 완전히 노출된 상황에서 벽석의 일부를 제거하고 깊은 곳 석곽 안을 대놓고 드나들었다. 무덤 봉분 한쪽을 허물어뜨려 내부의 석곽과 널길이 완전히 드러나게 한 뒤 그 안의 유물을 노골적으로 쓸어담는 작업장 얼개였다. 문자 그대로 보물털기식 발굴이었던 셈이지만, 창녕이 <일본서기>에 진구왕후에게 항복해 조아린 7개국중 하나로 기록된 ‘비자벌’임에 분명하다는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던 야쓰이에겐 정벌과 복속의 흔적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야쓰이의 조사 당시 돌로 쌓은 창녕 교동고분 석실 내부를 찍은 사진이다. 내부에 토기류가 가득 들어차있다.
야쓰이의 조사 당시 돌로 쌓은 창녕 교동고분 석실 내부를 찍은 사진이다. 내부에 토기류가 가득 들어차있다.

 

현장에서는 전례없이 막대한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석곽안 무덤방은 그릇받침인 기대나 목긴 항아리 장경호, 굽다리 접시 등의 토기들로 가득했다. 영남권에서는 처음으로 금동관의 파편과 금제귀고리, 은제대금구, 장식대도 등 고급 금공예품들이 나왔다. 우메하라 스에지 등의 일본 학자들이 마차 20대, 화차 2량 분량의 유물이 고분을 빠져나갔다고 회고할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그러나 야쓰이는 이 거대 고분에 대해 보고서 한장 내지 않고, 유물들만 반출해버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련 문서기록을 보면, 야쓰이가 7호분에서 캐어간 유물들만 최소 700점이 넘는다. 하지만, 9기의 대형고분에서 발굴한 전체 유물들의 수량과 내역은 지금도 전모를 모른다. 마구나 금공품 등의 몇몇 일급 유물은 총독부 박물관에 보냈지만 상당수는 딴 곳으로 빼돌렸을 것이란 설이 유력하다. 왜 보고서를 내지 않았는지 야쓰이는 비망록에 기록을 남기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추정해볼 수 있다. 창녕고분에서는 고대 일본과의 관련성을 입증할 유물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출(出)자형의 금동관 파편이나 환두대도 등에서 보이듯 7호분과 89호분에서 나온 유물들은 대부분 친신라계통 유물들이 대부분이고, 일본과 연관되는 건 직호문이란 무늬가 새겨진 칼집 장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왜곡된 학문적 목표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야쓰이가 보고서 작성에 의욕을 잃고 유물 반출에만 눈을 밝혔던 셈이다.

 

창녕 고분의 후일담은 비참하다. 19년 조사가 끝난 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일차 표적이 되어 벌집을 쑤신 듯했지만, 총독부는 도굴구멍만 막는 땜질대책만 내놓았다. 대구에서 장사하던 상인 오쿠라 다케노스케는 그 사이에 창녕 고분 출토·도굴품들을 마구 빼돌려 악명높은 오쿠라컬렉션을 구축했다. 막강한 지역세력이던 창녕의 가야 선조들 무덤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됐고, 해방 뒤에도 무덤과 유물의 성격, 실체는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파묻혀졌다. 2012년 우리문화재연구원이 교동 7호분을 90여년만에 재조사해 유구 보고서를 냈고, 국립김해박물관이 2015년 출토유물 보고서를 뒤이어 낸 것이 선조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됐을까.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日帝, 신시·고조선 적통 이은 ‘400년 북부여’ 역사도 말살

[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

13〉 고조선과 북부여·부여 역사 부정하는 한국사

            
입력 : 2015-06-14 21:49:25      수정 : 2015-06-14 21:49:25

               
 
필자는 지난 호 (세계일보 6월8일자 26면 참조)에서 우리 역사의 출발이 신시로부터 시작되어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현 교과서에도 서기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말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을 소개하는 것 외의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믿기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이 고조선의 역사를 찾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


◆고조선은 8000리 땅을 100명 이상의 ‘단군’이 1908년간 다스린 나라

고조선의 영토 크기와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관자’에 있다. 관자는 제나라 환공(서기전 685∼643년)과 관중(서기전 ?∼645)의 대화록이므로 서기전 645년 이전의 기록이다. 그 관자에 ‘팔천리지발조선(八千里之發朝鮮)’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 이 기록을 ‘발조선이 제나라에서 8000리 떨어진 나라’라고 해석해왔으나 사실은 ‘발조선은 8000리 영토를 가진 나라’라는 말이다.

이 관자와 ‘산해경’, ‘여씨춘추’, ‘사기’ 등에 수록된 조선 위치 관련 기록을 종합적으로 연구·분석한 결과 고조선 영역은 서쪽으로 영정하(베이징·톈진의 서부)에 이르고, 발해의 북쪽에 있던 8000리 대제국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나카 미치요와 이마니시 류는 ‘단군’은 평양지역의 박수무당, ‘왕검’은 ‘선인’으로서의 호칭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을 이은 최남선은 ‘단군은 무당의 일명인 당굴, 왕검은 대인·신성인의 뜻’을 가진 단어라고 하였고, 이병도는 ‘제정일치 시대에는 단군뿐이요, 제정이 분리된 후로는 제사단체의 장은 단군, 정치단체의 장은 왕검’이라고 하였다. 

단군은 지배자의 칭호로, 수많은 단군들이 나와 1908년간 고대의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민족 통합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져 지금도 경배의 대상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런 주장에 따라 현 교과서에서는 단군왕검을 제사장을 의미하는 ‘단군’과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하는 ‘왕검’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의 직책명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단군왕검’은 중국의 성명과 칭호의 표기 방법에 따라서 칭호가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도록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단군(壇君)의 ‘단(壇)’자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을 의미하고, ‘군(君)’자는 ‘임금’을 의미하는 칭호였으며, 왕검은 1세 단군의 이름으로 봐야 한다.

‘나이가 1908세였다(壽一千九百八歲)’는 기록은 단군 홀로 1908년을 살았다는 신화가 아니다. 신라·고려·근세조선 119명 임금의 평균 재위 기간이 16.7년이었음을 고려하면 고조선 1908년 동안 1세 단군 왕검, 2세 단군 ○○, 3세 단군 ○○에 이어 114세 단군 ○○까지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의미이다.

그 흔적이 4000년 전 이전에 시작된 하가점하층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이고, 이보다 앞선 환웅천왕의 신시문화는 6725년 전 이전에 시작된 홍산문화이다. 이렇게 되면 요하문명이 우리 조상들의 유적임이 명확해진다.

◆환인이란 말을 빌미로 삼국유사 기록 부정


나카 미치요와 이마니시 류 등의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 ‘환인(桓因)’이라는 불교용어가 등장하는 것을 이유로 이 기록이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 온 이후에 날조한 신화라고 하였다. 환인(桓因)이 ‘석가제파인타라’ 혹은 ‘석제환인인타라’라고도 불리는 불교의 천신을 간략하게 줄인 칭호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하늘님금’을 하느님이라며 받들어왔고, 한자로는 ‘천제’, ‘상제’, ‘황천’, ‘천(天)’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불교 도입 후에는 불교의 ‘천신’인 ‘환인’으로 표기를 한 것뿐이다.

근세조선 말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인 로스, 게일, 기포드, 헐버트, 성서변역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낸 언더우드 등은 각기 한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 책에서 “한국인들이 수천 년 전부터 하느님, 하나님을 부처님보다 높은 최고의 신,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관리하며 상과 벌을 주관하는 신으로 믿고 있으니 ‘성서’ 번역에 있어 여호와를 하느님(하나님)으로 번역하자”고 주장하여, 그렇게 되었다. 따라서 환인이라는 말을 빌미로 ‘삼국유사’의 고기와 ‘제왕운기’의 본기를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조작된 신화라고는 할 수 없게 된다. 

약 4000년 전 고조선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꺽창 유물.
◆해모수의 북부여와 동명제의 부여 400년 역사가 사라졌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이 서기전 2333년에 건국되어 1908년 만에 망했다 했으니 고조선이 멸망한 해는 서기전 425년이다. 이어서 서기전 419년에 북부여가 건국되었고, 서기전 100년 전후에 동명제가 해부루왕의 북부여를 빼앗아 부흥시켰다.

이런 긴 역사적 흥망 과정을 시라토리 구라키치와 이마니시 류는 “단군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부루가 태어났고, 해모수와 하백의 딸이 주몽을 낳았으며, 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라 하여 단군이 곧 해모수이고, 주몽과 부루는 형제”라는 식으로 모두 서기전 59년에 태어나는 주몽과 거의 동시대 인물들로 왜곡하였다.

이렇게 되면 단군의 고조선, 해모수의 북부여, 동명제의 북부여(부여) 등 400여년의 역사가 없어진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를 근거로 신시, 고조선, 해모수의 북부여, 동명제의 북부여, 해부루왕의 동부여 등의 역사 교육이 금지되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이병도는 ‘부여고’에서 북부여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하느님(천제)의 아들이라며 부여를 부흥시킨 동명제의 탄생, 성장, 탈출, 부여로 와서 왕이 되는 등에 대한 ‘논형’, ‘후한서’, ‘위략’ 등의 중국 기록이 고구려 건국시조(주몽)의 전설을 잘못 전한 것이고, 동명제 즉, 동명은 주몽으로 고구려의 시조라고 왜곡하였다. 이 논리는 현재의 교과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역사교과서에서 ‘부여는 1세기에 이미 왕을 칭하고’라고 하여 전국시대부터 서기 1세기 이전까지 수백 년의 북부여·부여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준왕의 조선, 위만조선의 영토 위치와 정체

고대 한국의 맹주였던 고조선이 사라지자, 요동국과 더불어 가장 서쪽에 있던 고죽국이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수서’ 배구전에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 무왕 때에, 이 고죽국 땅에 기자를 봉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이 땅을 나누어서 삼군(낙랑·현도·대방군)을 두었고”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기자와 무왕은 서기전 12세기 사람이고, 고죽국은 서기전 18세기부터 서기전 7세기까지도 존재하던 나라이므로 무왕이 기자를 고죽국에 봉할 수 없다. 이는 고죽국이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것을 아는 사람들이 기자의 조선으로 생각하고 만들어낸 말로 보인다. 고죽국에서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조선의 마지막 왕이 준왕이고, 준왕이 서기전 194년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고죽국은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고, 그 지역의 창려가 준왕과 위만조선이 도읍했던 왕험성이었다. 고대 한국 영토 중에 가장 서쪽 지역에 있던 나라가 준왕의 조선과 위만조선이었다. 따라서 이 조선들은 혈통적으로나 영토 위치상으로나 신시·고조선의 적통을 이은 고대 한국의 중심 국가가 될 수는 없다. 신시·고조선의 적통을 이은 국가가 북부여이고, 그다음이 오국(부여·신라·고구려·백제·가야)으로 이어진다.

◆고조선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 ‘고조선’ 국호 왜곡

고조선은 본래 기자조선, 위만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의미로 쓰인 국호이다. 그러나 일본강점기에는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의 실존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이병도학파 학자들에 의해 현재 역사교과서에서도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기자조선, 준왕 조선, 위만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의미로 고조선이라 불렀던 것인데, 준왕의 조선,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 한국 고대국가의 중심에 있는 국가라는 의미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조선의 군주를 뜻하는 ‘기후’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 유물. 기자동래설, 기자조선의 실존을 증명하는 유물로 제시되지만 조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존재한 적도 없는 기자조선의 망령이 중국 동북공정의 근원

우리 역사에서 기자와 기자조선보다 더 큰 비중을 가진 인물과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기자와 기자조선이 수·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원인, 고구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고, 유학자들의 모화·사대에 명분이 되기도 했다. 또 일제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였다.

하지만 기자동래, 기자조선의 실존 유무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적다. 필자가 중국의 수많은 사서를 뒤져 고증한 바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온 적도 없었고, 기자가 건국한 조선이라는 나라, 기자조선은 존재한 적도 없었다. ‘사기’ 송미자세가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과 ‘상서대전’의 “기자가 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조선으로 달아났는데, 무왕이 그 말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라는 기록에 등장하는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하남성 상구시에 있었던 넓이 50리의 작은 땅이었다.

기자의 이름은 서여이고, 서여를 봉한 이 땅 이름이 하남성 ‘조선(朝鮮)’이었다. 나라 이름은 조선이 아닌 ‘기(箕)’이며, 서여의 작위가 자작이다. 이 때문에 서여를 ‘기 나라의 군주인 자작’이라는 의미로 ‘기자(箕子)’라고 불러온 것이다.

반고가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송미자세가’와 ‘상서대전’ 기록의 조선을 한국의 고대국가인 ‘조선’으로 오인하고, ‘한서’ 지리지에 “은나라가 쇠약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예, 의, 밭농사, 누에치기, 벼 짜기, 옷 만들기를 가르쳤다”라는 말을 창작해 넣은 것이다. 이러한 반고의 역사왜곡이 확대재생산되어 존재한 적도 없는 기자조선이 고대 한국을 920년 지배하였던 역사로 왜곡되었다. 

김종서 문학박사
1970년대에 들어서 대릉하 유역에서 기자조선의 군주를 뜻하는 ‘기후’, 연나라 군주를 뜻하는 ‘연후’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를 비롯하여 은나라 말, 주나라 초기(서기전 1117년 전후)의 청동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기존의 기자 동래,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과 인식에 더하여 이 청동기를 기자조선의 실존을 입증하는 증거로 삼았고, 요하서쪽 유역이 상(은)과 서주의 세력범위에 포함된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청동기들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중국은 실존한 적도 없는 기자동래, 기자조선을 동북공정의 핵심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중국의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불러올 수 있고, 영토분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그러한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의 진실,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찾고 가르쳐야 한다. 필자의 ‘기자·위만조선 연구’, ‘신시·단군 조선사 연구’, ‘잃어버린 한국의 고유문화’ 등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김종서 문학박사·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www.yuksamo.com) 회장

 

대한인이 역사상 조선이라 언급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삼국유사/기이>에 `고조선.왕검조선`으로 설명.기록된 것에 맞추어 환웅천왕의 시대를 고조선이라 해야 하며 소위 `위만조선`의 항목은 대한역대국에서 삭제해야 한다. 국호 조선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조금 더 세밀하게 명명하여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 

 

 

              고조선        환웅 천왕   서기전 3000 년 전후

              왕검조선     단군 왕검   서기전 2333 년 개국

 

              단군부여                       서기전 1000 년 이후     왕검조선의 제후국 부여로 시작하여 서기전 1100 년 경 단군 제위

                                                                                         계승 

              진辰.한韓                      ? ~

              준왕조선                       서기전 220 년 이전 ?    단군부여의 제후국일 것으로 추정, 서기전 195 년경까지 존속   

 

                                  만.우거의 조선땅 점거는 준왕조선을 중국 연나라 사람 만滿이 거짓말로 빼앗아 차지한 80 여 년의 시

                                  기일 뿐이고, 만.우거를 왕검조선.단군부여.준왕조선의 적통으로 인식하는 것은 일본이 기획한 식민

                                  사관일 뿐이기 때문에 적통에서 제외해야 한다.  

              삼국.가야

              고려         왕건               서기 918 년 ~

              이조선     이성계            서기  1392 년 ~

 

 

브레이크뉴스

https://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862025

 

중국 적봉일대, 4천년전 고조선 문자 추정 도기문자-갑골문 발견

“이 유적들과 고조선과의 연관성에 대해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찬구 박사 | 기사입력 2022/01/06 [10:19]
 
 


 
중국 인민일보(人民日報)는 2018년 3월 15일 네이멍구자치구 츠펑시(적봉시,Chifeng) 가오쟈타이쯔(高家臺子,Gaojiataizi)유적에 대한 고고학 발굴에서 약 4000년 전 샤자뎬(하가점Xiajiadian)하층문화 시기 도기(陶器)에 붓으로 쓴 문자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게는 하가점하층 문화로 알려졌는데, 이 문화가 고조선 문화와 시기나 영역이 겹친다는 면에서 고조선문자로 추정할만하다. 이미 4년 전에 보도된 것이었으나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에 의하면 네이멍구자치구 문화재 고고연구소와 지린대 변강고고연구센터로 구성된 합동  고고학팀이 적봉시 고가대자유적에 대한 구조적 고고학 발굴에서 이 문자를 발견했다.

  
적봉시 원보산(元寶山)구에 있는 고가대자 유적은 총면적 1만 여㎡로 하가점하층 문화 초기로 보이며, 기원전 2070년부터 기원전 1600년 사이에 해당한다.
     
고고학자들은 유적지에서 집터 · 회갱 · 회구 · 묘장을 잇따라 발견하였는데, 출토 유물은 주로 토기 · 석기 · 골조개 · 동물 골격 등이다.
  
내몽고유물고고연구소 롄지린(連吉林) 연구원은 "하가점하층 문화 재구덩이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깨진 도기(陶片)는 도발(陶鉢)의 입복부(口腹部) 잔해"라며 "도편문자의 필체의 굵기와 세련함으로 미뤄 볼 때 붓에 먹을 묻혀 도발의 내벽에 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문자가 도기에 묵서(墨書)로 쓴 것임을 말해준다. 그동안 오래된 묵서로 3500년전 상(商)나라 “묵서도편”이 있다. 이보다 최고 500년은 앞선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전문가 감식 결과 도기에 적힌 글자는 기록 문자에 해당돼 당시 제사(祭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문(陶文)은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과 같이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가대자유적에서 발견된 도문은 비교적 성숙하고 필획이 세련(유창)된 것이 제사 용어로 추정되며, 중국 고대 문자의 발생과 기원 등을 탐구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를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한편 중국 북방일보(北方日報)는 2018년 3월 6일자 기사에서 이 도기문자를 소개한 데 이어 같은 고가대자유적에서 갑골문도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중국에서 고고학적으로 갑골문이 발견된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라고 지적했다. 상대(商代)의 갑골문보다 앞서는 것이다. 


  
이어 연길림 연구원은 갑골문도 고가대자유적의 재구덩이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시대는 하가점하층문화 시기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발견된 갑골은 2자(字)의 갑골문 문자를 각획(刻劃)한 복골(卜骨)의 한 면, 다른 뒤 면에는 달구어 뚫은 구멍이 있었다. 이는 당시의 점복(占卜)활동과 관계가 있다. 새긴 문자는 앞면 상단에 희미하게 보인다. 
  
신문은 고가대자유적은 과학적인 발굴을 거쳐 연대가 확정되었고 층위치가 명확하며 발견된 갑골문과 도기문자는 비교적 성숙되었고, 제사와 점복용어로 추측되며 이리두(二里頭)문화 시기의 문자에 속한다고 보도했다. 상대(商代)의 갑골문과 마땅히 밀접한 전승관계가 있는 것으로 중국 고대문자의 발생 및 갑골문의 기원 등을 탐색하는데 새로운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보았다.
  
외신을 근거로 이번의 고고성과를 종합하면 고가대자유적은 중국의 가장 북쪽에서 도문과 갑골문이 한 개 유적에서 동시에 출토된 것도 극히 이례적인 일로 볼 수 있다. 비록 이번에 발견된 글자 수는 몇 글자밖에 안 되지만 한 곳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추가적인 발굴이 이루어질 때, 과거 상(商)나라 갑골문이 일시에 무더기로 발굴되었던 전례가 다시 발생 안 하리라고 볼 수 없다. 


 하가점하층 문화에 대한 학계의 의견을 들어 보고자 한다. 
  
하가점하층 문화에 속하는 삼좌점(三座店)과 성자산(城子山)에서 석성과 제사유구, 주거지 등을 현장 답사(2007년10월7일 경향신문)한 이형구 교수(전 선문대)는 이 유적들과 고조선과의 연관성에 대해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말한 바 있고, 복기대 교수(인하대)는 고조선 유적으로 추정했다. 
  
신용하 명예교수(서울대)는 “요서지방의 홍산 문화와 하가점하층 문화의 3족토기는 한강문화의 뾰쪽밑 빗살무늬토기의 영향과 교류 속에 출현한 것이며, 고조선문명의 서부지역 토기형태”(고조선문명의 사회사,2018)라고 언급했다. 


또 우실하 교수(항공대)는 “류국상은 청동기시대로 진입하는 하가점하층 문화 시기에는 ‘고급문명사회’에 진입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학자들 가운데 단군조선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초기 단군조선과 연결시키기도 한다”(고조선문명의 기원과 요하문명, 2018)고 말하면서도 적봉, 조양, 오한기를 잇는 지역이 단군조선의 초기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는 류국상이 이 문화시기를 B.C.2000 ~ B.C.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절대 연대로 B.C.2300 ~ B.C.1600년으로 보았다. 


반면에 송호정 교수(교원대)는 “하가점하층 문화는 채색토기나 나무 판재로 무덤 곽을 짜서 매장하는 등 비교적 중원문화와 유사성을 보이며, 지석묘나 석관묘를 주로 만든 예맥족의 문화나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는 다른 특성을 보인다”(2016.10. 10. 동아일보)며 고조선의 연관성을 찾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이는 강단내 주류학자들의 의견을 대변한 말로 보이는데, 중국학계에서도 치(雉)가 있는 석성 등으로 중국문화라고 단정 짓지 못하고 별도의 북방문화나 동이문화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는 면에서 보면 자칫 동북공정에 동조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이 시기, 이 일대의 방국(方國)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고조선밖에 없다는 점에서 하가점하층 문화는 고조선 문화”(한국통사, 2019)라고 직접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중국학자 왕혜덕(王惠德)은 30여년 전에 “환발해(環渤海)의 신석기시대 문화지역계통에서 후(後)홍산문화인 소하연유형은 위로는 조보구문화를 계승하고 아래로는 하가점하층 문화로 이어지는 하나의 완정(完整)한 발전 과정이 있는 바, 이를 동이(東夷)문화의 주류”(鳥圖騰的濫觴一兼談東夷文化,1990년)라고 명백히 지적한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국내 언론이나 학계에서 고조선문자로 추정할 수 있는 하가점하층 문화의 고고학적 발굴 사실을 숨겨온 점이 이상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상(商)의 갑골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동이문화권에서 갑골문이 발견된 것은 그동안 상(商)에만 갑골문이 있었다는 주장과 문자가 없는 복골로만 알려져 온 것도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도기문자도 묵서(墨書)로 기록했다는 면에서 붓의 역사도 고조선이 상(商)보다 앞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상(商)은 같은 동이문화권으로서 고조선과는 선후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부여의 영고(迎鼓)가 상나라 달력으로 정월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말에서도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문명의 형성에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문자의 유무이다. 요(堯)의 도사유지에서는 ‘文(문)’과 ‘邑(읍) 또는 易(역)의 유사자’ 등 두 글자가 발견되었다. 반면에 이미 하가점하층문화인 삼좌점(三座店)의 석성에서 부호문자(도편문자) 두 글자가 발견된 바 있다. 만약 이번에 나온 두 건의 5~6개 문자가 고조선문자로 확인될 경우에 우리는 명실공이 요순이나 ‘상(商)문명’에 대응하는 ‘고조선문명’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lee291838@naver.com


*필자/이찬구
박사. 신시역사문화연구원 “홍산문화의 인류학적 조명” “고조선의 오행과 역법”의 저자.lee291838@naver.com

경남 대가야 땅에서 나온 백제풍 무덤..주인의 국적은?

노형석 입력 2022. 02. 18. 05:06 수정 2022. 02. 18. 08:26 댓글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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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경남 산청 'M32호분' 발굴 현장
봉분속 돌무더기 석실 구조물
아치형 천장·측벽 모두 온전
전형적인 송산리형 분묘 구조
"백제세력 영향력 행사 증거" 해석
"단순히 장제문화 퍼진 것" 견해도
백제계 굴식돌방(횡혈식 석실) 무덤으로 확인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경남 산청 생초 엠(M)32호분의 무덤 석실 내부. 6세기 초 백제가 웅진(공주)에 도읍하던 시기 지배층 무덤 형식인 굴식돌방 무덤의 전형적인 얼개를 보여준다. 사방의 벽체가 아치형의 윤곽을 그리며 천장석을 향해 좁혀져 올라가는 백제 석실무덤 특유의 궁륭형 상부 얼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고대 왕국 백제의 영역은 동쪽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갔을까? 충청·전라도 넘어 경상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을까? 가야를 직접 지배하며 신라와 대치했을까?

국내 역사학계 연구자들이 오래 품어왔던 궁금증을 풀어줄 단서가 새해 벽두에 나타났다. 지리산 동쪽 자락의 경남 산청 땅에서 6세기 제대로 된 백제풍의 지배층 무덤이 나왔다. 굴 모양으로 무덤 옆 측면을 파고 들어가 주검자리 묘실을 만든 무덤. 여러번 장사를 지낼 수 있게 만든 이른바 굴식 돌방(횡혈식 석실) 무덤이 출현했다. 백제가 고구려군에 의해 첫 수도 한성(서울)을 함락당하고 475년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뒤 무령왕(재위 501~523) 치세를 계기로 중흥하기 시작했던 시기 왕족·귀족의 전형적인 무덤 얼개다. 그것도 대가야의 주된 영역으로만 생각해온 경남 서부 내륙의 산청군 생초고분군에서 온전한 백제 지배층의 무덤이 나왔다는 소식에 학계 관심이 집중되는 중이다.

능선에 자리한 산청 생초고분군 서남쪽 자락에서 발견된 엠(M)32호분의 들머리 부분. 무덤 안 돌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연도)의 문이 보인다. 널길 바닥에는 따로 돌들을 깔고 배수로를 틔워놓은 자취(나란히 내려오는 두줄의 흰색 선 부분)가 보인다.

지난 15일 오전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산93-1번지 일대의 태봉산 능선 자락에 강풍과 추위를 무릅쓰고 전국 각지에서 중견 고고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연말부터 이 능선 끝자락에 있는 엠(M)32호분을 발굴한 극동문화재연구원의 현장을 보러 온 이들이었다. 산청의 젖줄 경호강을 굽어보면서 능선 끝자락에 자리한 지름 13m의 봉분을 절개해 돌무더기 석실 구조물이 드러나 있었다. 석실은 앞쪽에 널길 출입문을 틔워놓고 안에 있는 미지의 세계로 연구자들을 손짓하고 있었다. 류창환 연구원장의 안내를 받아 안전모를 쓰고 묘실로 가는 널길(연도)을 지나 묘실로 들어갔다. 길이 2.8m, 너비 1.7m의 묘실은 2평도 안 되는 4.85㎡의 다소 비좁은 공간이다. 하지만 들어간 순간 바라본 천장과 벽체의 모습들은 탄성을 발하게 했다.

엠(M)32호분 무덤방 내부. 환한 바깥으로 통하는 널길(연도)이 한쪽으로 치우쳐 뚫린 것이 보인다. 벽체가 위로 갈수록 사다리꼴 모양에서 아치형 모양으로 점점 좁아져 천장을 덮는 판석과 맞물리는 궁륭형 얼개를 하고 있다. 6세기 웅진 도읍 시기 백제 석실무덤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송산리형 백제 귀족고분의 특징인 아치형 천장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사방의 벽체가 아치형의 윤곽을 그리며 천장석을 향해 좁혀져 올라가는 백제 석실무덤 특유의 무지개형 혹은 궁륭형 상부 얼개다. 6세기 초 백제가 웅진에 도읍하던 시기 지배층 무덤 형식인 굴식 돌방 무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널길에 문지방석과 문주석을 놓고 문비석(막음돌)으로 가로막아 폐쇄한 구조는 가야인들의 석실이나 석곽 고분과는 크게 다른 백제 계통 석실분의 특징이다.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 포함)의 이른바 송산리형 석실과 거의 똑같은 구조의 수장급 무덤임이 분명하다. 깬돌로 측벽과 좁아지는 천장부까지 채운 전형적인 백제 스타일 석실인데, 송산리 고분군에서도 볼 수 없는 측벽-천장의 연결 부분과 천장 판석까지 모두 온전히 남아 있었다.

산청 생초고분군의 엠(M)32호분 석실을 덮었던 봉분을 뒤에서 본 모습. 봉분 가운데 부분을 절개해 석실의 상부를 이루는 돌무더기가 드러나 있다. 능선 끝자락에 있는 봉분 앞쪽으로 산청의 젖줄인 경호강과 들녘의 모습이 보인다.

무령왕릉과 여러 왕릉급 고분이 자리 잡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 양식이라고 하여 송산리형으로 불리는 이 고분 양식이 뜻밖에도 지리산 너머 산청 땅 계곡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이 학자들을 설레게 했다. 미도굴 무덤이지만, 아쉽게도 당대 백제 풍습상 부장품을 별로 묻지 않아, 삭아 없어진 관에 쓰인 관못과 작은 손칼(도자) 외엔 다른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갈과 점토가 깔린 채 정연하게 열석으로 주검자리를 표기한 묘실 바닥엔 망자의 영기가 배어나오는 듯했다. 발굴 당시 막음용 돌인 문비석이 무려 3개나 나온 것으로 봐 한 사람을 장사 지낸 뒤 추가로 두 사람의 망자를 더 장사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묘실을 돌아보고 나온 학자들 사이에선 왜 산청에 백제 지배층 묘실이 등장했는지를 놓고 여러 의견이 오갔다. 백제계 유적이 분명한데 과연 백제인의 것일까란 게 논점이 됐다. 성정용 충북대 교수는 인근 산성에서 백제계 유물인 인장 찍은 기와가 나오고 백제 송산리 형식의 전형적인 분묘 구조란 점을 중시했다. 백제 세력이 분명하게 산청에 영향력을 행사한 증거라고 해석했다. 반면, 김낙중 전북대 교수와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백제풍 기와나 백제풍 묘실이 보이지만, 주거지나 토기 등 다른 결정적인 백제인의 유물들이 나오지 않았기에 대가야 세력이 당시 우호세력이던 백제의 장제문화 영향을 받아 이런 식의 무덤을 축조한 것 아니냐는 견해를 폈다.

엠(M)32호분 석실의 천장 부분. 사방의 벽체들이 아치형 곡면을 그리며 좁혀지다가 정점의 천장석 1매와 맞물리는 궁륭형 얼개를 띠고 있다.

백제는 5~6세기 경상도의 가야 영역을 집요하게 점유하려고 애썼다.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와 나제동맹을 결성한 이래 후방 방비를 위해 가야 지역을 직접적인 지배권 아래 끌어들이려고 신라와 물밑 암투를 벌였다. 이른바 ‘군령·성주’란 이름으로 가야 지역에 군사적 지배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는 관료들을 파견했다는 기록들도 보인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남북과 열강의 외교전이 치열한 상황에서 산청에서 1600년 전 한반도 남부를 떠돌았던 전란과 외교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유적이 바로 산청 생초고분군의 엠32호 무덤이었다.

산청/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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