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참여 국제 연구
23년 끈질긴 관측 끝에
블랙홀 회전 증거 확인

세차운동 중인 기울어진 부착원반 모델을 설명하는 그림. 한국천문연구원 제공

막강한 중력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천체인 블랙홀이 팽이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회전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관측됐다. 이 움직임은 11년마다 반복되고 있었는데, 블랙홀 안팎으로 빨려 들어가고 뿜어져 나오는 물질들 역시 같은 주기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천문연구원(천문연)을 포함한 국제공동 연구진이 28일(한국시간) 이 같은 사실을 담은 연구를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연구진에는 전 세계 45개 기관에서 79명의 연구원이 참여하고 있으며, 2000~2022년 동아시아우주전파관측망(EAVN)과 초장기선 어레이(VLBA), 한일공동 우주전파관측망(KaVA), 동아시아-이탈리아 우주전파관측망(EATING)을 통해 얻은 관측 자료를 분석했다.

연구진이 관측한 M78은 처녀자리 은하단 중심에 있는 초대질량블랙홀이다. 초대질량블랙홀은 대부분 은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천체로, 많은 양의 물질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존재다. 그래서 주변에는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들이 뭉쳐져 보이는데, 이를 부착원반(accretion disk, 강착원반)이라고 한다.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질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하나의 원반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블랙홀 주변에 강한 자기장과 부착원반-블랙홀 사이의 상호작용 등을 통해 다시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물질의 흐름도 보인다. 이를 '제트'라고 하며, 제트는 보통 부착원반과 수직한 방향으로 방출된다.

 
 

세차운동 중인 기울어진 부착원반 모델을 설명하는 동영상 화면. 한국천문연구원 제공

이 같은 제트 방출 메커니즘은 그간 이론적으로만 존재해, 천체물리학의 주요 난제 중 하나로 꼽혔다. 초대질량블랙홀이 실제 회전하는지 관측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연구진은 23년간 쌓인 M87 블랙홀의 초장기선 전파간섭계(VLBI) 데이터를 분석해, 해당 블랙홀과 부착원반이 다른 회전축을 두고 움직이면서 제트가 11년 주기로 세차운동1을 하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M87 블랙홀이 실제로 회전하고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논문의 제1저자인 추이 유주 중국 저장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은 "블랙홀과 부착원반의 회전축이 어긋난 정도가 비교적 작고 세차운동 주기가 길기 때문에 장시간에 걸친 고해상도 데이터의 분석으로 이런 성과로 이룰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 측 연구책임자인 노현욱 천문연 박사후연구원은 "앞으로 EAVN 주도로 계속될 M87 모니터링에서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블랙홀의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 2004 년 7 월 24 일 홍산문화의 중심도시인 적봉시 적봉학원에서 열린 ` 제 1 회 홍산문화국제학술연토회`에서 중요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중국의 유국상(1968~)이 1987 년 내몽고에서 발견된 `소하서문화유적`은 기원전 6500 년까지 올라가는 `동북지역에서 가장 오래괸 신석기유적`이라는 논문이 발표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국상은 새로운 연구를 통하여 2006 년에 `서요하 유역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청동기시대까지의 고고학문화 개론`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소하서문화의 연대를 기원전 7000년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유국상은 몽고족으로 북경대 고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소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위는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현재 한국항공대학 인문자연학부 교수인 우실하가 지은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297 쪽 일부입니다.

 

결국 한.중은 아래 표시와 같은 요하문명 유적.유물 지도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면 위의 유적.유물 발굴지를 통칭하는 명칭 요하문명은 합당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명백한 동북공정 선전물입니다.

 

아래와 같이 잠시 우수하 이름을 빌어다 우수하문명이라 해야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현명한 작명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서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기이> `고조선.왕검조선` 기록에 나타난 우수하를 대한인 중 몇이나 기억하겠습니까?

 

아래와 같이 발굴지역의 중심부가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과 북쪽으로는 아들을 보내 세운 부여의 영역이기 때문에 마땅히 `조선문명`이라 해야 합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요수와 한.당 시기의 대요수 및 송.청 시기의 요하가 일본명치왕놈의 지리 조작 결과 지금 란하 의 상.중.하류 본류와 지류였기 때문에 중국인이 명명한 `요하문명`은 물론이고 천진 남쪽.산동반도 북쪽 바다인 발해를 인용한 한국인 이형구가 주장한 `발해문명` 도 역사지리적 측면에서는 문명지의 지명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명도전에 관한 박선미의 논문에서 명도전이 출토된 지역과 그 수량을 표시한 명세입니다.

   

      북경                4,553

      하북성           59,245

      내몽고                218

      대릉하                684 

      요하                 2,601

      요동반도             857 

      압록강유역     2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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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명도전 분포에 대한 의문>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청골 | 조회 165 |추천 0 |2009.12.14. 20:54 http://cafe.daum.net/alhc/ALGC/3200 


명도전은 연 소왕 이후 본격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지리적 분포 양상에는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우선 중국에서 명도전이 발견되는 위치입니다.
 
(출처 : http://2126088.blog.sohu.com/116694931.html )
據不完全統計,現已發表的明刀共出土近200起,其中以北京市出土最多,以下依次爲河北省、內蒙古、遼寧省、天津市,另外吉林、陝西、山西、河南等省也有出土。現將考古發掘中發現的各地區出土燕國明刀的地點,列舉如下:?


北京市:朝陽區、海澱區、豐台區、崇文區、西城區、宣武區、懷柔區、順義區、通州區、房山區、平穀縣、密雲縣、延慶縣、昌平區、大興區;?
河北省:易縣燕下都、石家莊、灤平、承德、滄縣、容城縣、灤南縣、蔚縣、興隆、平山縣;?
內蒙古:赤峰、涼城、敖漢旗、包頭市;?
遼寧省:撫順、錦州、鞍山、遼陽、西豐縣、朝陽、大連、義縣、鐵嶺、遼中縣、瓦房店市、金縣;?
天津市:寶坻、靜海縣;?
吉林省:輯安;?
山西省:山陽、永濟、盂縣、原平;?
河南省:鄭州;?
陝西省:鹹陽。?
 
약 200곳에서 명도전이 발견되었는데 북경-하북성-내몽고-요녕성-천진시의 순서로 출토되었고, 그외 길림, 협서, 산서, 하남 등지에서도 출토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자료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가지만)에 의하면 박선미박사의 하북성>북경>압록강>요하연안>요동반도>대릉하>내몽고의 자료는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연나라가 발행하여 통용된 화폐라면 당연히 연과 접한 조, 제나라 지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연과 적국의 관계(소왕이후)였을 동호(내몽고)와 조선(요하동안, 압록강)에서 더 많이 발견되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하는 것인가' 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지리적 분포양상이라면
1. 명도전은 연이 동북민족과의 거래를 위해 만든 특별한 화폐인가?
2. 명도전은 동북민족이 연과의 거래를 위해 만든 특별한 화폐인가?
라는 두가지 상황을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한가지 제가 인용한 자료에 보이는 산동지방에서 발견되는 제명도(齊明刀)는 과연 연이 제나라를 5년간 지배했던 시기의 유물일까요("留循齊五年”之遺物)? 제가 막연히 추축하기에는 이 제명도 또한 동북민족이 제와 교역하기 위해 만든 또 다른 명도전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드는데 이 가설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요하, 압록강 연안의 명도전 중 제명도가 있어야만 하므로 이 부분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는 현재까지는 타당성이 없다고 추정됩니다. 따라서 명도전을 동북민족이 만들었다는 가설 또한 배제됨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럼 명도전은 연이 동북민족과의 교류를 위해 만든 특별한 화폐이고, 제명도는 제나라에서 사용하던 연나라 화폐라는 소리가 되는데 한나라에서 동시에 두가지 화폐를 시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고수 여러분의 지도편달 바랍니다.




 

 

 

 

 

문화문화일반

일제강점기 최악의 발굴 ‘악명’…만신창이가 된 창녕 고분들

등록 :2016-08-23 16:17수정 :2016-08-23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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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⑭ 1918~19년 창녕고분 발굴의 참극

화차 2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유물들 쏟아졌지만
야쓰이는 보고서 한장 내지않고 유물들 빼돌리기에 급급했다
그뒤 방치된 고분들은 도굴꾼과 일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야쓰이가 찍은 1918~19년 창녕 교동고분의 굴착조사 현장. 봉분 한쪽을 허물고 내부 석실 구멍을 노출시킨 모습이다. 조선인 인부들과 그들이 가져온 흙지게 등도 보인다.
야쓰이가 찍은 1918~19년 창녕 교동고분의 굴착조사 현장. 봉분 한쪽을 허물고 내부 석실 구멍을 노출시킨 모습이다. 조선인 인부들과 그들이 가져온 흙지게 등도 보인다.

 

한국 고고학사상 최악의 발굴을 꼽는다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하룻밤새 무덤 안 유물을 깨끗히 청소해버린 1971년 무령왕릉 조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엔 이를 능가하는 보물 싹쓸이 작전 같은 발굴 참사가 두고두고 일본 학자들 입에 오르내렸다.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불과 두달여만에 비화가야의 옛 터전인 경남 창녕 교동고분군의 대형 무덤 9곳의 유물들을 싹쓸이하듯 걷어간 뒤 보고서조차 내지않은 야쓰이 세이이츠의 단기조사 작업이 그것이었다.

 

가야권 유적들은 1910년 건축사학자 세키노 타다시와 야쓰이의 조사단이 조선 고적을 예비답사할 당시부터 상당한 눈길을 받았다. 당시 진주 옥봉·수정봉 유적과 고령 지산동 산허리의 가야고분군, 도굴로 일부 석곽이 드러난 창녕 고분군을 답사한 세키노는 “가야 유적이야말로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조사성과”라고 평하기도 했다. 일본과 가장 인접한 경남 일대 가야권에서 임나일본부설과 3세기 진구왕후의 한반도 정벌을 실증할 증거들이 나올 공산이 가장 크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주와 가야권을 잇는 낙동강변의 요지 창녕에는 산자락에 경주에 버금갈만큼 많은 고분군들이 흩어져 이마니시 류 등의 여러 일인 학자들이 일찍부터 눈독들이며 답사를 진행했다.

 

이런 와중에 교동 발굴에 나선 야쓰이는 마음이 초조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일대 낙랑계 유적 발견에 뒤이어 한반도 남부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할 유적 출현을 고대했으나, 1917년 그가 조사하면서 ‘왜’ 자체로 단정한 전라도 나주 반남고분 외에는 백제·신라권에서 도드라진 실물들이 나타나질 않았다. 이런 실정에서 1918년 창녕 교동고분을 처음 발굴조사한 후배학자 우메하라 스에지, 하마다 고사쿠가 토기와 장신구 등 주목할 만한 출토성과를 보고하자, 야쓰이는 갑자기 마음이 동해 그해 12월 겨울인데도 창녕 교동 일대의 거대 고분으로 달려갔다.

 

춥고 땅이 딱딱한 악조건 속에서 야쓰이는 가장 큰 규모인 7호분과 89호분의 굴착조사에 매달렸다. 교동 7호분은 봉토의 지름이 31.2m, 높이 8.5m에, 내부 석곽의 주검방 길이 9.0m, 너비 1.7m에 이르는 초대형 고분이었다. 발굴 인부들은 봉토 남단벽의 상부가 완전히 노출된 상황에서 벽석의 일부를 제거하고 깊은 곳 석곽 안을 대놓고 드나들었다. 무덤 봉분 한쪽을 허물어뜨려 내부의 석곽과 널길이 완전히 드러나게 한 뒤 그 안의 유물을 노골적으로 쓸어담는 작업장 얼개였다. 문자 그대로 보물털기식 발굴이었던 셈이지만, 창녕이 <일본서기>에 진구왕후에게 항복해 조아린 7개국중 하나로 기록된 ‘비자벌’임에 분명하다는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던 야쓰이에겐 정벌과 복속의 흔적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야쓰이의 조사 당시 돌로 쌓은 창녕 교동고분 석실 내부를 찍은 사진이다. 내부에 토기류가 가득 들어차있다.
야쓰이의 조사 당시 돌로 쌓은 창녕 교동고분 석실 내부를 찍은 사진이다. 내부에 토기류가 가득 들어차있다.

 

현장에서는 전례없이 막대한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석곽안 무덤방은 그릇받침인 기대나 목긴 항아리 장경호, 굽다리 접시 등의 토기들로 가득했다. 영남권에서는 처음으로 금동관의 파편과 금제귀고리, 은제대금구, 장식대도 등 고급 금공예품들이 나왔다. 우메하라 스에지 등의 일본 학자들이 마차 20대, 화차 2량 분량의 유물이 고분을 빠져나갔다고 회고할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그러나 야쓰이는 이 거대 고분에 대해 보고서 한장 내지 않고, 유물들만 반출해버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련 문서기록을 보면, 야쓰이가 7호분에서 캐어간 유물들만 최소 700점이 넘는다. 하지만, 9기의 대형고분에서 발굴한 전체 유물들의 수량과 내역은 지금도 전모를 모른다. 마구나 금공품 등의 몇몇 일급 유물은 총독부 박물관에 보냈지만 상당수는 딴 곳으로 빼돌렸을 것이란 설이 유력하다. 왜 보고서를 내지 않았는지 야쓰이는 비망록에 기록을 남기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추정해볼 수 있다. 창녕고분에서는 고대 일본과의 관련성을 입증할 유물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출(出)자형의 금동관 파편이나 환두대도 등에서 보이듯 7호분과 89호분에서 나온 유물들은 대부분 친신라계통 유물들이 대부분이고, 일본과 연관되는 건 직호문이란 무늬가 새겨진 칼집 장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왜곡된 학문적 목표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야쓰이가 보고서 작성에 의욕을 잃고 유물 반출에만 눈을 밝혔던 셈이다.

 

창녕 고분의 후일담은 비참하다. 19년 조사가 끝난 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일차 표적이 되어 벌집을 쑤신 듯했지만, 총독부는 도굴구멍만 막는 땜질대책만 내놓았다. 대구에서 장사하던 상인 오쿠라 다케노스케는 그 사이에 창녕 고분 출토·도굴품들을 마구 빼돌려 악명높은 오쿠라컬렉션을 구축했다. 막강한 지역세력이던 창녕의 가야 선조들 무덤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됐고, 해방 뒤에도 무덤과 유물의 성격, 실체는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파묻혀졌다. 2012년 우리문화재연구원이 교동 7호분을 90여년만에 재조사해 유구 보고서를 냈고, 국립김해박물관이 2015년 출토유물 보고서를 뒤이어 낸 것이 선조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됐을까.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브레이크뉴스

https://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862025

 

중국 적봉일대, 4천년전 고조선 문자 추정 도기문자-갑골문 발견

“이 유적들과 고조선과의 연관성에 대해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찬구 박사 | 기사입력 2022/01/06 [10:19]
 
 


 
중국 인민일보(人民日報)는 2018년 3월 15일 네이멍구자치구 츠펑시(적봉시,Chifeng) 가오쟈타이쯔(高家臺子,Gaojiataizi)유적에 대한 고고학 발굴에서 약 4000년 전 샤자뎬(하가점Xiajiadian)하층문화 시기 도기(陶器)에 붓으로 쓴 문자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게는 하가점하층 문화로 알려졌는데, 이 문화가 고조선 문화와 시기나 영역이 겹친다는 면에서 고조선문자로 추정할만하다. 이미 4년 전에 보도된 것이었으나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에 의하면 네이멍구자치구 문화재 고고연구소와 지린대 변강고고연구센터로 구성된 합동  고고학팀이 적봉시 고가대자유적에 대한 구조적 고고학 발굴에서 이 문자를 발견했다.

  
적봉시 원보산(元寶山)구에 있는 고가대자 유적은 총면적 1만 여㎡로 하가점하층 문화 초기로 보이며, 기원전 2070년부터 기원전 1600년 사이에 해당한다.
     
고고학자들은 유적지에서 집터 · 회갱 · 회구 · 묘장을 잇따라 발견하였는데, 출토 유물은 주로 토기 · 석기 · 골조개 · 동물 골격 등이다.
  
내몽고유물고고연구소 롄지린(連吉林) 연구원은 "하가점하층 문화 재구덩이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깨진 도기(陶片)는 도발(陶鉢)의 입복부(口腹部) 잔해"라며 "도편문자의 필체의 굵기와 세련함으로 미뤄 볼 때 붓에 먹을 묻혀 도발의 내벽에 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문자가 도기에 묵서(墨書)로 쓴 것임을 말해준다. 그동안 오래된 묵서로 3500년전 상(商)나라 “묵서도편”이 있다. 이보다 최고 500년은 앞선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전문가 감식 결과 도기에 적힌 글자는 기록 문자에 해당돼 당시 제사(祭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문(陶文)은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과 같이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가대자유적에서 발견된 도문은 비교적 성숙하고 필획이 세련(유창)된 것이 제사 용어로 추정되며, 중국 고대 문자의 발생과 기원 등을 탐구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를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한편 중국 북방일보(北方日報)는 2018년 3월 6일자 기사에서 이 도기문자를 소개한 데 이어 같은 고가대자유적에서 갑골문도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중국에서 고고학적으로 갑골문이 발견된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라고 지적했다. 상대(商代)의 갑골문보다 앞서는 것이다. 


  
이어 연길림 연구원은 갑골문도 고가대자유적의 재구덩이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시대는 하가점하층문화 시기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발견된 갑골은 2자(字)의 갑골문 문자를 각획(刻劃)한 복골(卜骨)의 한 면, 다른 뒤 면에는 달구어 뚫은 구멍이 있었다. 이는 당시의 점복(占卜)활동과 관계가 있다. 새긴 문자는 앞면 상단에 희미하게 보인다. 
  
신문은 고가대자유적은 과학적인 발굴을 거쳐 연대가 확정되었고 층위치가 명확하며 발견된 갑골문과 도기문자는 비교적 성숙되었고, 제사와 점복용어로 추측되며 이리두(二里頭)문화 시기의 문자에 속한다고 보도했다. 상대(商代)의 갑골문과 마땅히 밀접한 전승관계가 있는 것으로 중국 고대문자의 발생 및 갑골문의 기원 등을 탐색하는데 새로운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보았다.
  
외신을 근거로 이번의 고고성과를 종합하면 고가대자유적은 중국의 가장 북쪽에서 도문과 갑골문이 한 개 유적에서 동시에 출토된 것도 극히 이례적인 일로 볼 수 있다. 비록 이번에 발견된 글자 수는 몇 글자밖에 안 되지만 한 곳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추가적인 발굴이 이루어질 때, 과거 상(商)나라 갑골문이 일시에 무더기로 발굴되었던 전례가 다시 발생 안 하리라고 볼 수 없다. 


 하가점하층 문화에 대한 학계의 의견을 들어 보고자 한다. 
  
하가점하층 문화에 속하는 삼좌점(三座店)과 성자산(城子山)에서 석성과 제사유구, 주거지 등을 현장 답사(2007년10월7일 경향신문)한 이형구 교수(전 선문대)는 이 유적들과 고조선과의 연관성에 대해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말한 바 있고, 복기대 교수(인하대)는 고조선 유적으로 추정했다. 
  
신용하 명예교수(서울대)는 “요서지방의 홍산 문화와 하가점하층 문화의 3족토기는 한강문화의 뾰쪽밑 빗살무늬토기의 영향과 교류 속에 출현한 것이며, 고조선문명의 서부지역 토기형태”(고조선문명의 사회사,2018)라고 언급했다. 


또 우실하 교수(항공대)는 “류국상은 청동기시대로 진입하는 하가점하층 문화 시기에는 ‘고급문명사회’에 진입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학자들 가운데 단군조선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초기 단군조선과 연결시키기도 한다”(고조선문명의 기원과 요하문명, 2018)고 말하면서도 적봉, 조양, 오한기를 잇는 지역이 단군조선의 초기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는 류국상이 이 문화시기를 B.C.2000 ~ B.C.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절대 연대로 B.C.2300 ~ B.C.1600년으로 보았다. 


반면에 송호정 교수(교원대)는 “하가점하층 문화는 채색토기나 나무 판재로 무덤 곽을 짜서 매장하는 등 비교적 중원문화와 유사성을 보이며, 지석묘나 석관묘를 주로 만든 예맥족의 문화나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는 다른 특성을 보인다”(2016.10. 10. 동아일보)며 고조선의 연관성을 찾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이는 강단내 주류학자들의 의견을 대변한 말로 보이는데, 중국학계에서도 치(雉)가 있는 석성 등으로 중국문화라고 단정 짓지 못하고 별도의 북방문화나 동이문화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는 면에서 보면 자칫 동북공정에 동조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이 시기, 이 일대의 방국(方國)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고조선밖에 없다는 점에서 하가점하층 문화는 고조선 문화”(한국통사, 2019)라고 직접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중국학자 왕혜덕(王惠德)은 30여년 전에 “환발해(環渤海)의 신석기시대 문화지역계통에서 후(後)홍산문화인 소하연유형은 위로는 조보구문화를 계승하고 아래로는 하가점하층 문화로 이어지는 하나의 완정(完整)한 발전 과정이 있는 바, 이를 동이(東夷)문화의 주류”(鳥圖騰的濫觴一兼談東夷文化,1990년)라고 명백히 지적한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국내 언론이나 학계에서 고조선문자로 추정할 수 있는 하가점하층 문화의 고고학적 발굴 사실을 숨겨온 점이 이상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상(商)의 갑골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동이문화권에서 갑골문이 발견된 것은 그동안 상(商)에만 갑골문이 있었다는 주장과 문자가 없는 복골로만 알려져 온 것도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도기문자도 묵서(墨書)로 기록했다는 면에서 붓의 역사도 고조선이 상(商)보다 앞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상(商)은 같은 동이문화권으로서 고조선과는 선후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부여의 영고(迎鼓)가 상나라 달력으로 정월에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말에서도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문명의 형성에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문자의 유무이다. 요(堯)의 도사유지에서는 ‘文(문)’과 ‘邑(읍) 또는 易(역)의 유사자’ 등 두 글자가 발견되었다. 반면에 이미 하가점하층문화인 삼좌점(三座店)의 석성에서 부호문자(도편문자) 두 글자가 발견된 바 있다. 만약 이번에 나온 두 건의 5~6개 문자가 고조선문자로 확인될 경우에 우리는 명실공이 요순이나 ‘상(商)문명’에 대응하는 ‘고조선문명’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lee291838@naver.com


*필자/이찬구
박사. 신시역사문화연구원 “홍산문화의 인류학적 조명” “고조선의 오행과 역법”의 저자.lee291838@naver.com

경남 대가야 땅에서 나온 백제풍 무덤..주인의 국적은?

노형석 입력 2022. 02. 18. 05:06 수정 2022. 02. 18. 08:26 댓글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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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경남 산청 'M32호분' 발굴 현장
봉분속 돌무더기 석실 구조물
아치형 천장·측벽 모두 온전
전형적인 송산리형 분묘 구조
"백제세력 영향력 행사 증거" 해석
"단순히 장제문화 퍼진 것" 견해도
백제계 굴식돌방(횡혈식 석실) 무덤으로 확인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경남 산청 생초 엠(M)32호분의 무덤 석실 내부. 6세기 초 백제가 웅진(공주)에 도읍하던 시기 지배층 무덤 형식인 굴식돌방 무덤의 전형적인 얼개를 보여준다. 사방의 벽체가 아치형의 윤곽을 그리며 천장석을 향해 좁혀져 올라가는 백제 석실무덤 특유의 궁륭형 상부 얼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고대 왕국 백제의 영역은 동쪽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갔을까? 충청·전라도 넘어 경상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을까? 가야를 직접 지배하며 신라와 대치했을까?

국내 역사학계 연구자들이 오래 품어왔던 궁금증을 풀어줄 단서가 새해 벽두에 나타났다. 지리산 동쪽 자락의 경남 산청 땅에서 6세기 제대로 된 백제풍의 지배층 무덤이 나왔다. 굴 모양으로 무덤 옆 측면을 파고 들어가 주검자리 묘실을 만든 무덤. 여러번 장사를 지낼 수 있게 만든 이른바 굴식 돌방(횡혈식 석실) 무덤이 출현했다. 백제가 고구려군에 의해 첫 수도 한성(서울)을 함락당하고 475년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뒤 무령왕(재위 501~523) 치세를 계기로 중흥하기 시작했던 시기 왕족·귀족의 전형적인 무덤 얼개다. 그것도 대가야의 주된 영역으로만 생각해온 경남 서부 내륙의 산청군 생초고분군에서 온전한 백제 지배층의 무덤이 나왔다는 소식에 학계 관심이 집중되는 중이다.

능선에 자리한 산청 생초고분군 서남쪽 자락에서 발견된 엠(M)32호분의 들머리 부분. 무덤 안 돌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연도)의 문이 보인다. 널길 바닥에는 따로 돌들을 깔고 배수로를 틔워놓은 자취(나란히 내려오는 두줄의 흰색 선 부분)가 보인다.

지난 15일 오전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산93-1번지 일대의 태봉산 능선 자락에 강풍과 추위를 무릅쓰고 전국 각지에서 중견 고고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연말부터 이 능선 끝자락에 있는 엠(M)32호분을 발굴한 극동문화재연구원의 현장을 보러 온 이들이었다. 산청의 젖줄 경호강을 굽어보면서 능선 끝자락에 자리한 지름 13m의 봉분을 절개해 돌무더기 석실 구조물이 드러나 있었다. 석실은 앞쪽에 널길 출입문을 틔워놓고 안에 있는 미지의 세계로 연구자들을 손짓하고 있었다. 류창환 연구원장의 안내를 받아 안전모를 쓰고 묘실로 가는 널길(연도)을 지나 묘실로 들어갔다. 길이 2.8m, 너비 1.7m의 묘실은 2평도 안 되는 4.85㎡의 다소 비좁은 공간이다. 하지만 들어간 순간 바라본 천장과 벽체의 모습들은 탄성을 발하게 했다.

엠(M)32호분 무덤방 내부. 환한 바깥으로 통하는 널길(연도)이 한쪽으로 치우쳐 뚫린 것이 보인다. 벽체가 위로 갈수록 사다리꼴 모양에서 아치형 모양으로 점점 좁아져 천장을 덮는 판석과 맞물리는 궁륭형 얼개를 하고 있다. 6세기 웅진 도읍 시기 백제 석실무덤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송산리형 백제 귀족고분의 특징인 아치형 천장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사방의 벽체가 아치형의 윤곽을 그리며 천장석을 향해 좁혀져 올라가는 백제 석실무덤 특유의 무지개형 혹은 궁륭형 상부 얼개다. 6세기 초 백제가 웅진에 도읍하던 시기 지배층 무덤 형식인 굴식 돌방 무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널길에 문지방석과 문주석을 놓고 문비석(막음돌)으로 가로막아 폐쇄한 구조는 가야인들의 석실이나 석곽 고분과는 크게 다른 백제 계통 석실분의 특징이다.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 포함)의 이른바 송산리형 석실과 거의 똑같은 구조의 수장급 무덤임이 분명하다. 깬돌로 측벽과 좁아지는 천장부까지 채운 전형적인 백제 스타일 석실인데, 송산리 고분군에서도 볼 수 없는 측벽-천장의 연결 부분과 천장 판석까지 모두 온전히 남아 있었다.

산청 생초고분군의 엠(M)32호분 석실을 덮었던 봉분을 뒤에서 본 모습. 봉분 가운데 부분을 절개해 석실의 상부를 이루는 돌무더기가 드러나 있다. 능선 끝자락에 있는 봉분 앞쪽으로 산청의 젖줄인 경호강과 들녘의 모습이 보인다.

무령왕릉과 여러 왕릉급 고분이 자리 잡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덤 양식이라고 하여 송산리형으로 불리는 이 고분 양식이 뜻밖에도 지리산 너머 산청 땅 계곡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이 학자들을 설레게 했다. 미도굴 무덤이지만, 아쉽게도 당대 백제 풍습상 부장품을 별로 묻지 않아, 삭아 없어진 관에 쓰인 관못과 작은 손칼(도자) 외엔 다른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자갈과 점토가 깔린 채 정연하게 열석으로 주검자리를 표기한 묘실 바닥엔 망자의 영기가 배어나오는 듯했다. 발굴 당시 막음용 돌인 문비석이 무려 3개나 나온 것으로 봐 한 사람을 장사 지낸 뒤 추가로 두 사람의 망자를 더 장사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묘실을 돌아보고 나온 학자들 사이에선 왜 산청에 백제 지배층 묘실이 등장했는지를 놓고 여러 의견이 오갔다. 백제계 유적이 분명한데 과연 백제인의 것일까란 게 논점이 됐다. 성정용 충북대 교수는 인근 산성에서 백제계 유물인 인장 찍은 기와가 나오고 백제 송산리 형식의 전형적인 분묘 구조란 점을 중시했다. 백제 세력이 분명하게 산청에 영향력을 행사한 증거라고 해석했다. 반면, 김낙중 전북대 교수와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백제풍 기와나 백제풍 묘실이 보이지만, 주거지나 토기 등 다른 결정적인 백제인의 유물들이 나오지 않았기에 대가야 세력이 당시 우호세력이던 백제의 장제문화 영향을 받아 이런 식의 무덤을 축조한 것 아니냐는 견해를 폈다.

엠(M)32호분 석실의 천장 부분. 사방의 벽체들이 아치형 곡면을 그리며 좁혀지다가 정점의 천장석 1매와 맞물리는 궁륭형 얼개를 띠고 있다.

백제는 5~6세기 경상도의 가야 영역을 집요하게 점유하려고 애썼다.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와 나제동맹을 결성한 이래 후방 방비를 위해 가야 지역을 직접적인 지배권 아래 끌어들이려고 신라와 물밑 암투를 벌였다. 이른바 ‘군령·성주’란 이름으로 가야 지역에 군사적 지배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는 관료들을 파견했다는 기록들도 보인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남북과 열강의 외교전이 치열한 상황에서 산청에서 1600년 전 한반도 남부를 떠돌았던 전란과 외교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유적이 바로 산청 생초고분군의 엠32호 무덤이었다.

산청/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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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네이처에 발표된 '트랜스유라시아어족 언어의 기원'에 대한 논문의 또다른 의미

등록 2021.11.19 15: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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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우실하 한국항공대 인문자연학부 교수

[서울=뉴시스] 우실하 한국항공대 인문자연학부 교수. (사진= 우실하 교수 제공) 2021.11.19.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2021년11월)에 '알타이어족'으로도 불리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Transeurasian languages) 언어의 기원지가 '서요하 유역 기장 농업 지역'이라는 중요한 연구 논문이 발표됐다. 현재 한국어를 포함해 98개 언어가 속해있다.

이 논문은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의 마르티너 로베이츠(Martine Robbeets) 교수 연구팀을 중심으로 10개국의 학자들이 언어학, 고고학, 유전생물학 분야를 종합한 대규모 공동 연구의 결과였다.

연구 결과는 '농경'의 확산을 통해서 언어의 확산이 이뤄졌는데, (1) 트랜스유라시아어족(=알타이어족) 언어의 기원지는 '9000년 전 서요하(西遼河) 유역의 기장[黍] 농업 지역'(=요하문명 지역)이며, (2) 신석기시대에 '원시 한국어-일본어(5500년 전)'와 '원시 몽골어-퉁구스어(5000년 전)'로 1차로 분화되었고, (3) 청동기시대에는 원시 한국어, 원시 일본어, 원시 몽골어, 원시 퉁구스어, 원시 튀르크(=돌궐)어로 2차로 분화되었으며, (4) 이후에 각 지역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서울=뉴시스] 신석기-청동기 시대 트랜스유라시아어족(=알타이어족)의 분포. (사진=우실하 한국항공대 인문자연학부 교수 제공) 2021.11.19.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논문에서 트랜스유라시아어족 언어의 기원지로 밝혀진 '9000년 전 서요하 유역의 기장 농업 지역'이 바로 '요하문명' 지역이고, 요하문명의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고고학문화인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BC 7000-BC 6500)의 시작이 바로 9000년 전이다. 요하문명의 흥륭와문화 흥륭구(興隆溝)유적에서 발견된 8000년 전의 '세계 최초의 재배종 기장(1460알 중 1400알, 96%)과 조(1460알 중 60알, 4%)'는 2012년에 UN 식량농업기구(FAO)에서 '세계 중요 농업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논문은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언어가 4000년 전을 기점으로 중앙아시아를 거처 들어온 유목-목축민들이 전파했다는 기존의 '유목민 가설'을 비판하면서, '9000년 전 서요하 지역의 기장 농경민'에서 기원하여 확산된다는 '농경민 가설'을 제시한다.

필자는 '서요하 유역'에서 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발굴되고 있는 '요하문명(遼河文明)'에 대해서 여러 권의 책을 쓰며 연구해오고 있다. 이 논문은 한국어의 뿌리인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기원 이외에도 다양한 역사-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다.

곧, 요하문명 지역은 '트랜스유라시아어족' 언어의 기원지일 뿐만이 아니라, (1) 9000년 전 최초의 빗살무늬토기, (2) 9000-8000년 전 최초의 재배종 기장-조, (3) 8000년 전 최초의 옥결(玉玦·옥 귀고리), (4) 8000년 전 최초의 적석묘, (5) 7000년 전 최초의 복골(卜骨·점을 친 뼈), (6) 5500년 전 최초의 계단식 적석총, (7) 4300년 전 최초의 치(雉)를 갖춘 석성(石城), (8) 3000년 전 최초의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되고 기원하는 곳이기도 하다(아래 표 참조).

 이 가운데 (1), (4), (6), (7), (8)은 요하문명과 한반도 지역에서는 모두 발견되지만 황하문명 중심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다.

[서울=뉴시스] 요하문명의 중요 신석기-청동기 시대에 발굴된 최초의 것들. (사진=우실하 한국항공대 인문자연학부 교수 제공) 2021.11.19.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요하문명은 전형적인 북방문화 계통으로 황하문명과는 확실하게 구별된다. 위 논문에서도 황하문명 지역은 '중국-티베트어족' 언어의 기원지고, 요하문명 지역은 트랜스유라시이어족 언어의 기원지라고 본다. 곧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이 이질적이고 독자적인 문명권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요하문명 지역을 화하족의 조상인 황제족(黃帝族)이 일군 문명이자 중화문명의 발상지로 삼고, 동북아시아의 상고-고대사를 전면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후대에 출현하는 모든 소수민족들은 모두 황제족의 후손이고, 그 황제족의 후손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역사는 이미 중국사의 일부가 된지 오래다.

한국인들은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만주 일대를 '고조선의 문화권/세력권/세력 범위' 등으로 가르치고 배운다. 그 한 가운데서 수 천년 동안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요하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는데,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서울=뉴시스] 요하문명 지역 주요 신석기-청동기 시대 고고학문화 분포. (사진=우실하 한국항공대 인문자연학부 교수 제공) 2021.11.19.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이 논문은 동북아시아 역사·문화 연구에서도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동북아시아 상고사-고대사 연구의 출발점도 요하문명 지역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요하문명 지역은 언어적으로도 황화문명 지역과는 별개의 독자적 문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이제는 요하문명에 대해서 모르고는 동북아시아의 언어·역사·문화·철학·종교를 논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필자는 여러 책과 논문에서 요하문명이 '동북아시아 공통의 시원문명'이라고 논의한 바 있다. 요하문명을 일군 사람들이 동이족의 선조들이었고, 예맥족의 선조들이다.

이제는 여러 분야에서 요하문명과 연결하여 깊이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시각에서 요하문명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논리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각 분야에서 요하문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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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시원, 만주]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1)

 

용 옥 토기 주거지 등 중국문화 최초 상징 뿌리
BC 6천년 한반도-요하 단일 문화권, 유물 증거

 

 

 

 

 

 

 

최근에 요하문명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년 8월29일 방영)이 방송된 뒤에 많은 사람한테 전화를 받았다. 어떤 역사 교사가 전화를 해서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되느냐”고 묻더라. 아직 역사 교과서에는 단군이 신화로만 나오는데, 단군의 실체에 대해 학생들이 물어보고, “요하문명이 우리 문화와 연결돼 있는데, 왜 우린 그런 것을 배우지 않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혼란스럽다고 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모르고 어떤 기록에도 없는 새로운 문명이 발견되었으니까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500년 앞선 하모도문화 발견에 중국이 난리 나 기원론 수정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문명뿐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장강하류에서 하모도문화라고 명명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앙소문화(황하문명의 중심적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모도문화권에서 어떤 유적들이 발굴됐을까? 그때 이미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었다. 논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모를 길러서 심는 이양법을 제외하면 현재 우리가 하는 논농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유적이 대규모로 나온다. 그것이 기원전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문화다. 이것은 황하문명과는 다른 문명이다.

 

 

 

 

 

 

 

 

 

‘오랑캐 땅’의 앞선 문명인 옥기시대에 중국 더 큰 혼란…세계도 깜짝

 

 

 

 

 

 

 

장강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학계의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차피 중국 땅에 있으니까….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게 요하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인식 속에 요동, 요서, 만주를 생각하면 말 달리던 선구자 생각나고, 수렵·목축하는 유목민을 떠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새로운 신석기 유물이 계속 나오니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3,000년) 단계에 오면 이미 초기 문명단계,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문명이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그 문명단계가 성립할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동기가 나오든지, 문자가 나오든지, 권력분립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징표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홍산문화 시기에서는 청동기나 문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나 문자가 없는 문명단계, 국가단계는 세계 역사에서 많다. 단적인 예로 몽골제국은 전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지만 문자가 없었다. 제국 형성 이후에 필요에 의해서 새롭게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했던 타제석기, 마제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 구분은 동북아시아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북아시아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마제석기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간에 옥기시대를 새롭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순에 빠진 중국이 역사 재편 작업 들어간 것이 동북공정

 

 

 

 

 

 

 

이렇게 신석기 문화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은데, 발굴하고 나니까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인 황하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나오니까….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문명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요하 일대는 원래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제가 활동하던 곳이고, 황제가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고 내려오면서 또 중원에서 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요하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소수 민족은 모두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일부 학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논문들이 요하문명을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와 연결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한 동북공정 때문에 말이 많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공정이 아니다. 동북공정의 진짜 의도는 동북지역의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전부 중국사로 만들려는 것이다. 신화부터 시작해서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고조선, 단군, 해모수, 주몽 전부 다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황제의 후예인가? 단군의 후예인가? ‘그래 너희는 단군의 후예인데, 단군이 바로 황제의 후예다.’ 이런 논리로 가고 있다. 지금, 요하문명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하문명 세력이 진짜 중국 황제의 후손이었나?

 

 

 

 

 

 

 

자 그럼 이 지역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사진 자료 중심으로 보여주겠다. 그 문명의 주도세력은 누구였는지? 진짜 황제의 후손이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요하문명은 요하를 끼고 형성된 문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하 상류는 내몽고자치구의 동북쪽에서 랴오닝성 발해만에 이르는 큰 강으로 수많은 지류를 지니고 있고, 이게 발해만으로 흐르는데 ‘ㄱ’자 모양이라고 보면 된다. 요하를 중심으로 신석기 문화인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 분포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동석병용시대는 소하연문화(기원전 3,000~2,000년)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년부터)를 거쳐 고급 문명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지명을 따 붙인 것이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홍산문화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지역이 500곳이 넘는다. 한 예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인근 오한치박물관에 가면 하가점-하층문화가 발견된 지역만 2천 곳이 넘는다.

 

 

 

 

 

 

 

중국 본토에선 없던 고조선 상징 비파형동검, 한반도에선 무더기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다.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다. 요하문명이라고 하면 소하서, 흥륭와, 사해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문명단계로 진입하는 시기가 홍산문화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친다. 홍산문화가 요하문명의 꽃이라면 우하량 유적지는 홍산문화의 꽃이다. 여기서 제단터와 여신상 등 홍산문화를 상징할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자가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동검이 대량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폭넓게 발굴이 되었고, 산둥반도에서 1~2개가 나온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중국 본토나 다른 곳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에서 발견된 주요 유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자.

 

 

 

 

 

 

 

 

 

세계 최초 요하 옥기와 비슷한 유물 전남 여수에서도 발굴

 

 

 

 

 

흥륭와문화의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 발굴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흥륭와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옥기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다. 이들 유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에서 나온 옥 귀걸이(사적 426호). 기원전 6,000년 이상으로 연대가 추정된다. 우실하 교수 제공  
 
 

 

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다. 그의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

 

 

 

 

 

한반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전남 여수시 안도패총유적에서 나온 귀걸이와 발굴 당시 사진. 안도패총의 귀걸이는 화산지역에서 나오는 흑요석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장강하류를 통해서 보다는 백두산 지역에서 백두대간 동쪽 동해안을 통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해안의 흑요석은 일본 화산지대의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성분 분석이 필요하다.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역사적 상식을 깬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

 

 

 

 

 

흥륭와문화지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중국 전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집단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놀랍게도 해자 혹은 환호(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주거지 주변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판 것)가 있는데, 폭이 4m, 깊이가 2m나 된다. 여기에서 15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주거지가 흥륭와 일대에서 3곳이 발굴되었다. 해자나 환호는 적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때부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불에 탄 조와 기장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야만인의 땅이라고 믿어온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6000년에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상식을 깨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 아래 부분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곳이 해자 혹은 환호이다. 우실하 교수 제공  

 

 

 

흥륭와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기원전 6천 년 이미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

 

 

 

 

 

 

 

위 사진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5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2,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사해문화시대 집단 주거지인 요하제일촌(사진 위)와 마을 한가운데 돌로 쌓은 용 형상물(사진 아래). 중국 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우실하 교수 제공  

 

 

 

사해문화는 흥륭와문화 보다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연대는 거의 비슷하다. 두 문화가 비슷해서 보통 사해-흥륭와문화 또는 흥륭와-사해문화라고 함께 부르기도 한다. 사해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요하제일촌이다. 이 집단 주거지가 발견돼 사해문화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여기도 해자 혹은 환호가 있고, 100여 가구가 살았다.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용 모양의 조형물이다. 주먹보다 조금 큰 돌을 쌓아서 용 형상물을 만들었다. 길이가 19.7m, 폭이 넓은 곳은 2m, 좁은 곳은 1m다. 중국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사해유적에서는 용문 도편도 나온다. 뱀이 똬리를 튼 그림이 새겨진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게 용에 대한 최초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조보구문화 시대에는 최초의 봉황이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께 새 형상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중화제일봉’이라고 부른다.

 

 

 

 

 

 

 

채색 토기, 황하문명은 서역 전래설…요하문명은 독자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보구의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 존형기다. 그릇 형태가 특이하고 매우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앙소문화에서 채도는 아주 넉넉하게 잡아도 기원전 4,500년인데, 조보구의 채도는 앙소문화보다 최소한 500년이 더 앞선 것이다.

 

 

 

앙소문화의 채도는 단순 기하문이거나 고기나 사람 얼굴을 그렸다면 조보구의 채도는 디자인이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채도를 평면으로 펴보면 현대적 디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기에 사슴, 돼지, 새 등의 머리를 한 용이 그려져 있다. 녹수룡, 저수룡, 조수룡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조보구문화 시대에 신성시 했던 주요 토템 동물들일 것이다.

 

 

 

 

 

조보구문화 소산유적 존형기의 신령도안. 우실하 교수 제공  

 

 

 

채도 존형기가 의미하는 것은 요하문명이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하문명을 대표하는 앙소문화의 채도가 서방에서 전래했을 것이라는 ‘채도서역전래설’이 세계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앙소문화 채도와 거의 똑같은 것이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발견된다. 지금까지는 채도가 서방에서 들어와 앙소문화 지역을 거처서 요서 지방 일대로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보구 채도가 그릇의 모양도 다르고 50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을 보면 새로운 유입 루트를 상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늘날 중국문화를 상징하는 최초의 옥, 최초의 용, 최초의 주거지, 최초의 토기, 최초의 치아 수술 흔적 등이 모두 요하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실하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pjc@hani.co.kr

 

 

 

 

 

 

 

 

 

 

 




































우실하 교수(사진)는=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수. 중국 요녕대학 한국학과 교수 역임. 문화사와 사상사, 문화종속론, 문화이론, 동양사회사상 전공. 주요 저서로 ‘오리엔탈리즘의 해체와 우리 문화 바로 읽기’(1997), ‘전통문화의 구성원리’(1998), ‘동북공정의 선행 작업과 중국의 국가전략’(2004) , ‘전통음악의 구조와 원리’(2004),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 등 7권의 단독 저서와 ‘고대 동북아 연구’(2008), ‘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2008) 등 8권의 공저가 있다. 우리민족의 문화와 사상의 원류를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고, 상고사를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남다르다. 홈페이지 www.gaonnuri.co.kr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등의 터전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에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한겨레>는 법륜 스님 등 다섯 명의 특강 내용을 11차례로 나눠 영상과 함께 <인터넷한겨레>에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아래는 중국에서 정의하는 요하문명 유물 발굴지를 표시한 것이다.

 

 

 

 

                                                   출처: 문명 유적.유물 해설 -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우실하 지음. 2007 소나무

주)

1. 소하서문화 - 기원전 7000~6500 년 신석기 문화, 1987 년 적봉시 오한기 소하서에서 발굴. 2004 년 적봉에서 열린 제1 회

                       홍산문화국제학술연토회`에서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유

국상 발표.

황하 유역의 앙소문화나 장

                       하모도문화 보다 2000 년 이상 앞섬. 동북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흙으로 빚은 인면상 출토됨. 

                                       
2. 흥륭와문화 - 기원전 6200~기원전 5200 년 신석기 문화, 1982 년 적봉시 오한기 보국토향 흥륭하촌. 세계 최고의 옥玉

                       걸이,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와 해자 및 최초의 용 형상물인 

                       龍, 중국 중원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는 빗살무늬토기 발견.

 

3. 사해문화 -   기원전 5600~ 신석기 문화, 1982 년 부신에서 발굴. 석소룡과 부조 용문양의 도기 파편 발굴, 흥륭와문화

                      발굴되기 전까지는 세계 제1의 옥이 발견되었고 세계 제1의 촌村이였슴.

 

4. 부하문화 -   기원전 5200~5000 년 신석기 문화, 적봉 북쪽 통료시 파림좌기 호얼토향 부하구문에서 장 오래된 복골

                      발굴.

 

5. 조보구문화 - 기원전 5000~4400 년 신석기 문화, 적봉시 오한기 고가와포향 조보구촌 발굴. 최초의 봉황 모양의

                       토기, 방 유적지, 불탄 흔적인 회갱, 최초로 그림이 그려진 채도 발굴.

 

6. 홍산문화 -   기원전 4500~3000 년 동석병용기 문화(2006 년 유국상), 적봉.조양.능원.건창.건평 등. 1906 년 왜 조거

                      용장이 적봉 객라심(?)왕부에 방문 적석총 발견, 1935 년 일본 빈전경작이 학술단을 끌고와 31 곳의 무덤

                      을 발굴하여 인골 29 구, 동물뼈 20 점, 청동기 14 점, 도기 16 점, 옥구슬 380 개, 골기 33 점 채집

                      1000 여 점을 반출해 갔슴. 1943 년 발견된 건평.능원 사이 우하량유적 기원전 3500 년 경 `초급문명

                      회`로 진입되었다고 하였고 1983~1985 년 대대적으로 발굴, 기원전 3500 년까지 올라가는 대형제단.여신

                      묘.총군 발굴. 1979 년 건창(객좌)현 동산취촌에서도 대형 제단 유적 발견

 

7. 소하연문화 - 기원전 3000~2000 년 동석병용기 문화, 갑골문 이전의 원시 상형문자인 도부.도문.도부문자 발굴

 

8. 하가점상층문화 - 기원전 2000~1500 년 청동기시대 문화, 조양시 부근 위영자에서비파형동검 발굴

 

 

- 서기전 75 년 정황을 기록한 <한서/지리지>에 의한 요서.요동.낙랑군 추정 위치

 

 

 

 

- 현 중국전도

 

 

 

 

 

 

- 1751 년 조선 홍문관에서 제도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칭 <백산도>

 

 

 

- 서기 700 년 남북국시기 이후의 추정 판도

 

 

 

 

- 서기 전 300 년 대 이전 판도

 

 

 

한편 중국이 저들의 시조 황제 헌원의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요하문명의 명칭은 잘못 명명된 것입니다.

 

요하문명 유적지 남쪽지역은 위와 같이 서기전 3 세기의 준왕조선 강역과 마한.동예.옥저.진한.진.변진 등의 영역이였고 북쪽은 단군이 통치하던 부여의 강역이였으며 더 북쪽엔 숙신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동서 1000 리에 뻗어있다는 백산대맥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서기전 2300 년 경에는 왕검조선의 중심지와 남쪽의 제후국인 청구.낙랑의 땅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명.청과 조선 시기에는 북쪽의 송화강과 남쪽의 소양강이 흐르는 지역이였으니 문명지의 서쪽 변두리 지역을 흘러내리는 요하와는 꽤 거리가 있었던 것이며 요하 하류가 흘러드는 발해와도 관련이 적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요하.발해문명이나 송화.소양문명보다는 백산문명이 적절하다 판단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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