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사 현장

 

한.화.일 3 국 역사학계는 이조선 말기 이조선.청.아라사 강역과 지리가 아래와 같았다고 합니다. 

 

- <화국전도> 1910 년 추정 지리

 

결국 지금의 한반도 평양이 고조선의 왕검성이였고 서기전 108 년 설치된 한나라의 낙랑군 지역이였으며 이후 고구려의 평양성이였고 고려의 서경, 이조선의 평양부였다고 주장합니다. 혹 고조선이 지금의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고도 합니다. 

 

반면에 윤내현은 <고조선연구>에서 고조선을 단군 왕검께서 세운 조선으로만 정의하면서 고조선의 첫 출발지는 한반도 평양이였다고 합니다. 이후 세력을 키우면서 지금의 요동 본계로 추정되는 아사달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더욱 커진 힘을 바탕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지금의 산해관 부근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했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기자가 동래하여 백악산 아사달 지역에 이르자 제후국으로 삼고 지금의 북진 부근인 장당경으로 천도하였고 말기에는 요동 본계시의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기자가 동래한 산해관 부근의 조선은 이후 만.우거가 80 여 년 동안 점거하였고 서기전 108 년 한나라가 낙랑군을 설치한 곳이고 주장하였습니다. 

 

 

2. 신채호가 교시한 요동 위치와 왕검조선 3 도읍 추정지

 

우선 이러한 인식은 서기전 202 년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설치한 요동군 위치가 위 타원형 표시 지역이였다고 단정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동은 화국의 모든 지리 기록 곧 <관자>를 위시하여 <사기><한서>부터 <청사고>까지의 24 개 정사는 물론이고 <설원><산해경><수경주><통전><만주원류고> 등 대략 2100 여년 동안 저술.편찬된 사서에 상세하고 일관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 송 시기부터 제작된 모든 고지도에도 다행스럽게도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한국의 모든 역사서에도 기본적으로 언급되는 서쪽 화국의 지명과 지리입니다. 

 

그러나 위 <화국전도>에 표시한 요동군 주변의 지형은 춘추시대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저술된 문헌 기록이나 송 시기부터 제작된 모든 고지도의 묘사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지 지명만 일치할 뿐입니다. 

 

즉 요동군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곳이여야 하며 북경에서는 1180 리에서 1540 리 사이에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 곧 송.거란부터 개칭된 황하와 요하가 경유해야 하며 두 물길이 합류한 후 바다로 들어갔다고 하지만 실제는 강폭이 크게 넓어진 만灣이고 남쪽 발해 해안선까지는 대략 300 여 리 이상을 더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요동만을 만灣이라 할 수 있고 요하의 최하류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런데 지리 조작을 꿰맞추는 논리일 뿐인 식민사관과 조작 결과 거저 얻은 장물땅 지키기일 뿐인 동북공정 논리에 취해 있는 한국사학계도 민족사학의 비조라며 존중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추정은 저 둘과 다릅니다. 즉 일국의 조작과 청국의 장물아비 심보를 간파하고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며 강단.재야의 지리 인식을 모두 부정한 주장을 이미 100 여 년 전에 설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재야조차도 선생이 언급한 단군 왕검 조선의 3 도읍 곧 신조선.번조선.막조선의 도읍이라는 합이빈.개평.평양 위치를 지금의 합이빈.개평.평양으로 인식합니다. 또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라는 구절의 해성도 지금의 해성을 흐르는 물길이라며 의기양양해 합니다.  

 

1910 년 압록강을 건너 청국으로 망명한 단재 선생의 심중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압록강을 건너 청국으로 망명하여 요하에 이르니 느닷없이 란하라고 부르는데 란하로 불리우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고대에는 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고 단 한 구절만 남겼지만 서쪽 화국의 모든 지리지 기록과 모든 고지도에는 지금의 란하 본류의 중.하류가 황하.요하라고 설명.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서기전 202 년 건국된 유방의 한나라 지리지인 <한서/지리지>부터 이후 청국 시기의 지리가 수록된 <청사고>가 출간된 1928 년까지의 공식 지리입니다. 따라서 한 시기의 요동군이나 청 시기의 봉천성.부도 지금의 란하 중류 유역에 표시된 2 개의 승덕 지역에 설치되었었고 작은 글자로 표시된 승덕 곧 작은승덕 위치가 청국 성경 심양 승덕현이였습니다. 패수가 흐른다는 해성도 작은 승덕에서 남쪽으로 240 리 떨어졌다는 곳입니다. 선생이 언급한 왕검조선의 신.막.번조선 체제나 그 도읍이라 추정한 합이빈.개평.평양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선생이 인식한 합이빈.개평.평양 위치는 지금의 적봉과 준화 동쪽 그리고 산해관 북쪽 지점을 지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현 <화국전도> 표시는 한반도 평양을 낙랑군 위치였다고 주장하는 식민사관.동북공정의 지리 논리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즉 현 <화국전도>의 표시와 같은 곳에서 <사기>와 <삼국사기> 등의 역사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도구를 갖춘 화국이 취할 다음 수순은 당연히 상고 문명사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3. 요하문명

 

화국이 개방된 이후 많은 한국인들은 광개토왕비가 있다는 집안이나 백두산 등과 서쪽으로 산해관.북경 등의 지역을 찾아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일부 역사학자는 약간 북쪽에 있는 부신.조양.능원.적봉 등 지역의 화국이 명명한 요하문명지를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그곳은 신석기.청동기 문화 유적.유물이 발굴된 곳인데 화국은 이제까지 세계 4 대 문명 중 하나라고 자랑하던 황하문명까지 내팽개치며 자신들의 시조 황제 헌원이 일으킨 문명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 요하문명 유적.유물 발굴지

 

 

위 요하문명 지역에서는 황하.장강 유역의 화국 영역에서 발굴되는 검몸과 손잡이가 일체식인 동주식동검과 전혀 다른 조립식인 비파형동검이 대량.집중적으로 발굴되었습니다. 또 비파형동검 출토분포지는 저곳에서 동남쪽으로 지금의 요동과 한반도로만 이어집니다. 또한 요하문명 유적 중 가장 핵심인 곳은 지금의 건평.능원 지역에서 발굴된 우하량유적이고 서기전 3500 년 전후의 초급문명사회 수준이라는 홍산문화의 대표 유적입니다. 또한 지금의 적봉.오한기.북표.조양.건평 등에서 발굴되는 하가점하층문화는 서기전 2500 년 전후의 고급문명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위 추정도에 표시된 요하문명지의 핵심발굴지인 적봉.능원.건평.오한기.조양.북표 등의 지역과 단재가 지목한 왕검조선 3 도읍인 당시의 합이빈.개평.평양 세 곳을 잇는 지역은 서쪽 지역에서 약간 겹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삼국유사/기이> 기록에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 추정 서기전 2333 년 단군 왕검께서 세운 조선을 왕검조선이라 했고 그 이전 환웅천왕이 신시에 내려와 인간사 360 가지 일을 보기 시작했다는 시기를 왕검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고조선이라 부제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적봉 지역은 <청사고/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길림성 신성부와 빈강구 곧 합이빈 지역이였고 송화강의 중류 지역이였으며 신성부에서 남쪽으로 200 리 쯤의 농안현은 옛부여국도古扶餘國都 , 농안현에서 남쪽으로 300 리 쯤인 장춘부와 신성부는 옛부여국지古扶餘國地, 장춘부 남쪽의 이통주는 발해 즉 진국 장령부, 농안현 동쪽 오상부는 진국 상경속경上京屬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환웅천왕의 고조선이 서기전 3500 년 전후 능원.건평 지역의 우하량유적을, 또 왕검조선이 서기전 2500 년 전후의 하가점하층문화유적을 남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지금의 적봉 지역인 신성부를 <청사고/지리지>에서는 송화강이 동남쪽에서 흘러오며 눈강이 삼차구로 흘러와 송화강과 합류한 후 동쪽으로 꺽이어 흑룡강성 경계로 이어진다고 하였고 그 개략적인 지형에 대해서도 `천원광연川原廣衍 수륙폭진水陸輻車+秦` 곧 물길이 넓은 곳으로부터 모여 넘칠 정도이니 물과 땅을 지나는 길도 몰려있다?라고 하였으니 현 지형과도 대략 일치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신성부는 그 치소가 백도눌구라 하였고 뜻이 온전치 않은 `富西甲全省`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검조선의 북쪽 제후국인 부여 영토 중에서도 북쪽 경계지인 것 같고 그 이전에는 예濊 땅이였으며 <수서/열전.동이.말갈>에 의하면 수.당 시기에는 말갈 7 부 중 석촉을 쓰지 않는 3 부 속말.백돌.백산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백돌 말갈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위와 같은 검증도 시기와 지리 두 부분의 모든 역사 해석에서 순리적이며 더욱 견고하게 연결되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낙랑군 위치 문제이고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일입니다. 즉 한국강단사학계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이조선 실학자들이 식민사관의 빌미를 제공했다며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특히 집중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을 거론하는데 대단단 실수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산이 <강역고/낙랑군>에서 낙랑군 위치라고 단정한 평양은 단재가 언급한 요하는 란하, 패수는 해성 헌우락이라는 두 구절과 상통하는 지리이며 당연히 청국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와도 일치하는 지리 인식으로 한반도 평양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점을 지목한 것임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 년대부터 발굴하기 시작하여 2004 년 쯤 발굴 보고서가 출간되었지만 그 문명의 명칭은 `요하`라 붙쳐졌고 `고조선` 강역 표시도 문명 중심지가 아니라 동북쪽 변두리인 청 시기까지에도 흑룡강으로 불린 물길의 하류와 바다로 기록된 곳에 표시하였습니다. 대체 어떤 연유로 저와 같이 명명되고 표시되었을까요? 요하문명은 <삼국유사><규원사화> 기록과 같이 조선.태백산.우수하.아사달.소밀강 등의 이름을 붙쳐야 하는 것입니다. 

 

화국과 일국 역사학자들은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의 역사학자라는 자들이 문명과 지리를 연계하여 석명해 내지 못하는 무지무식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 이조선 사신의 연경 행로 

 

한편 불과 140 년 전까지만 하여도 이조선 사신들은 말을 타고 한양.북경 사이를 왕래하였고 이조선 개국 시기부터만 따져도 대략 500 년에 이릅니다. 내로라하는 이조선의 대다수 고관과 선학들이 사신길에 올랐었습니다. 

 

- 한.중.일 3 국 역사학계가 주장하는 낙랑군 설치지와 이조선 시기 사신 귀로 로정

그들이 남긴 문집에는 한양.북경 사이 로정의 풍광이나 고대 사건 전말 등이 자신만의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신이 오가는 로정은 위 실선 표시와 같았고 1656 년 북경을 다녀온 진주정사 인평대군이 남긴 <연도기행>에는 북경에서 산해관까지 670 리,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1990 리, 평양까지 2520 리, 한양까지는 3095 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역사학계는 그 사신 로정을 위 표시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연도기행> 1656 진주정사 인평대군의 귀로 일기에서 

연경 0/0- 통주 55/55- 삼하현 80/135- 운류하 65/200- 옥전 70/270- 풍윤 80/350-사하역 100/450-노룡 60/510- 유관점 90/

600- 산해관 8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 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삼차하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

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 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의주 80/1990 ... 한양 낙동 40/3095

 

그러면 과연  북경에서 지금의 산해관까지가 670 리, 압록강 의주까지가 1990 리였을까요? 지금의 평양이 이조선 시기의 평양부였고 고려의 서경이였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이였고 연나라 망명자 만에게 사탈당한 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 위치였을까요? 또 북경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3095 리이고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된 그 한성이고 마한의 옛땅이였을까요?   

 

이조선 중기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양.서울을 경도京都라 하였고 고조선.마한의 옛땅이였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도 주위 형세를 설명하기를 `북쪽 진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세이고 남쪽으로는 한강이 옷깃.허리띠처럼 흐르고 왼쪽으로는 관문과 큰산이 막고 오른쪽으로는 발해로 둘러쌓여 있다고 하며 동방 산하 102  개 땅 중 으뜸`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백제 중엽 한산에서 옮겨왔고 이후 남쪽 땅으로 파천하였다고 하며 고려 숙종이 설치한 남경이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발해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면 서울.한양의 오른쪽 곧 서쪽인 지금의 인천 앞바다를 발해라고도 했나요? 

 

이처럼 신뢰해 왔던 문헌의 귀퉁이 한 단어조차도 현 한국역사학계 주장과 또 <화국지도> 표시와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어쨋든 이조선은 물론이고 그 이전 고려.삼국 시기에 서쪽 화국의 역대국과 벌어진 모든 역사 사건은 위 지도에 표시된 2 개의 요동군 지역을 중심으로 한양.북경 사이 지역에서 일어났으니 역사책을 읽으며 이 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도를 본다면 사건 정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러한 혼동.혼란스런 화국의 동북쪽 지리와 한국의 서북쪽 지리에 대해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 <만주국지도>와 일국 공식 관찬 지도 <아세아동부여지도>

 

약간 충격적인 얘기를 하겠습니다. 청나라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공식 합병된 이듬해인 1911 년 멸망했습니다. 그후 1928 년 봉천군벌 장작림의 지원으로 청국 정사 <청사고>가 출간되었다는데 그 지리지에 설명.기록된 황하를 현 <화국전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아야 합니다.

 

 

- 청 시기 황하 추기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다륜약이구...北有錫拉穆楞河 自內蒙古克什克騰旗入 合碧七克碧落拜察諸河 北入巴林旗......

적봉직예주 ...西南距省治1320裡...領縣1 潢河自圍場入 州北200餘裡之巴林旗 東南老哈河 自平泉逕東南隅 納伯爾克河 

                  入建 英金河古饒樂水...          

조양부 건창현  府西南260裡... 東有布古圖山 漢白狼山 白狼水出焉 今曰大凌河 ... 東入朝陽... 北有潢河自赤峰 會老哈

                         河 自平泉入 合伯爾克河 錯出復入 英金河亦自縣來會 復合落馬河 東北至穀口 乾隆8年(1743) 更名敖漢玉

                         瀑 與潢河 入朝陽  柳邊北首朝 訖臨楡 ...

조양부   明 營州衛...置朝陽縣 光緖30年(1904)以墾地多熟 升府 以建昌隸之... 西南距省治1420裡... 西北潢河自內蒙古阿魯                科爾沁旗入 西南大凌河自建昌入 合南土河 逕西平房西 左合卑克努河 察罕河 又東合布爾葛蘇台河 又東至龍城 

              曰三座塔城 左合固都河 凉水河至金敎寺東北 左合土河 入盛京義州  

봉천성

신민부 ...省西一百二十裡 瀋陽中衛與廣寧左衛地

            진안현 ...府西 一百五十裡  明 廣寧衛 鎭安堡 ... 東沙河導源直隸綏東 南流 右受老河 入盤山曰南沙河 ...

금주부 반산구 ... 明廣寧盤山驛... 分遼水自遼中冷家口西南入 逕口南入海 西南沙河東沙河西沙河皆南入海

     

 

그러나 위 <화국전도>에 추기한 황하는 흐를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지금의 칠로도산과 노로아호산의 연맥때문입니다. 

 

- 칠로도산.노로아호산

 

 

 

칠로도산.노로아호산 두 산은 이어져 있습니다. 또한 당연히 분수령이기 때문에 기슭에서 발원한 물길들은 서남.동남.동북 세 방향으로만 흘러나갑니다. 곧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 지류인 열하.폭하.청룡하 등과 지금의 대릉하 및 지금의 노합하 등과 같이 세 방향으로만 흘러나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사고/지리지> 기록과 같이 다륜.극심극등기 사이 지역에서 발원하였다는 황하가 동남쪽으로 흘러 지금의 적봉.건창.조양 지역을 경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러면 <청사고/지리지>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명사/지리지> 기록에도 황하는 북경이 서남쪽으로 800 리 떨어진 곳이라는 북평행도지휘사사 소속의 영주전둔위.회주위 지역 곧 청 시기의 조양 부근을 경유하여 요수 곧 오기이며 정확하게는 요하로 흘러들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명사/지리지>

北平行都指揮使司 本大寧都指揮使司 洪武29年9月置 治大寧衛 ...領衛10.....西南距北平布政司八百裏

       大寧衛...治大定縣 ...洪武20年8月置衛 9月分置左右中三衛 尋又置前後2衛 28年4月改左右後3衛爲營州左右中3護衛...

       營州前屯衛 元興州屬上都路...南有老河 源出馬孟山流經此 又經行都司城南 東北入於潢河..

       會州衛   洪武20年9月置 永樂元年廢...西北有馬孟山...土河之源出焉 下流合於漌()河 又南入於遼水(河의 오기)... 

 

그러면 현 <화국전도> 표시는 왜 명.청국 지리지 기록과 일치하지 않을까요? 대체 화국의 동북 지리는 어떠했길래 지리지 기록과 지도가 불일치할까요? 사실 <화국전도>의 북경 동북쪽 지역 지리는 1932 년 건국되어 1945 년 시나브로 없어진 만주국의 지도 표시와 같습니다. <만주국지도> 표시 역시 명.청국 정사 지리지 기록과 상위합니다. 

 

- <만주국지도> 1934 년 간행

 

 

 

그리고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자료에는 만주국이 건국된 1932 년 보다 60 년 전쯤 제작되었다는 흥미진진한 지도가 게시되어 있습니다. 일국 육군참모부가 간행했다는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 입니다.

 

8. <아세아동부여지도 - 이하 <아동도>라 줄임> 

 

 

위 <아동도>에 묘사된 청국의 동북쪽 국경선은 <만주국지도>에 표시된 만주국 국경선과 다릅니다.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어쨋든 <아동도> 제작자는 당시의 이조선 강역을 지금의 압록강.두만강 남쪽의 소위 한반도라 인식하고 표시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요하 위치를 흐르는 물길은 당연히 요하였을 것이고 또한 당연히 청국 영역이였을텐데 어찌 청국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공지空地로 묘사되어 있을까요? 또 청국 국경선이 지금의 지금의 대릉하 중류를 동북방향으로 자르며 올라 지금의 서요하.동요하 합수처까지로 묘사되었고 그곳에서 서쪽으로 지금의 서요하와 일치하는 선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동도>의 청국 강역 표시는 청국 정사 지리지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겠지만 한.화.일 3 국 역사학계마저도 그 부정확함에는 등을 돌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동도>는 1875 년 당시 청국의 최북단 국경선만큼은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며 지금의 대릉하 중류를 사선으로 경유하는 청국 국경선도 크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조선의 강역이 공지만큼 축소된 것입니다. 청국 정사인 <청사고/지리지>나 이조선의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청국 관문인 봉황성 책문과 압록강 사이의 거리는 120 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러한 축척지도에는 양국의 국경선이 하나의 선으로 그려져야만 합니다. 양국 국경 사이에 공지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아동도>는 1875 년 제작 당시 청국과 이조선의 국경 지역 지리를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의 지리를 기대.예상하고 습작한 그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산하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자료에는 일국의 공식 관찬지도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 이조선 서북 경계

 

그런데 <아동도>보다 더 가관인 고지도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동도>에 표시된 이조선 강역을 묘사한 것이 확실한 아래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입니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2007 년 12 월 31 일 제 1537 호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9.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이하 <서북도>라 줄임>

 

 

 

그런데 사실은 보물은 커녕 지도 축에도 들지못할 사기.기만의 증거물 종이일 뿐입니다. 도면 위쪽에 표시된 방향 글자인 해亥.정북正北도 거꾸로 표시되어 있고 두 단어가 의미하는 방향조차도 맞지 않습니다. 해 방향은 시계 10 시에서 12 시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정북은 12 간지의 첫 글자인 자子가 나타내는 11 시부터 1 시까지의 방향 중 한 가운데를 말할 것입니다.

 

즉 이조선 시기 도성인 지금의 서울을 기준하여 정북에서 약간 서쪽인 서북방향인 해亥 방향에 선춘령.백두산 및 영고탑.흑룡강이 있다는 표시인데 오히려 그 반대인 동북방향에 해亥 글자를 거꾸로 표시하였습니다. 보물급이라 할 수 있나요? 결국 보물이라는 지도는 물론이고 지금의 <화국전도>, 1934 년 간행 <만주국지도>, 1875 년 간행 <아동도> 등의 신뢰성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래는 위 보물지도의 원본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조선 영조 시기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목 없는 고지도입니다.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도서관 홈페이지에서는 <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제목으로 검색되는 고지도입니다.  

 

10. <무제도>, 가칭 <양계도>

 

 

 

우선 위 <양계도>는 방향 글자가 바로 표시되어 있고 방향도 이조선.청국 당시의 지리와 일치합니다. 이조선 왕이 있는 궁궐 곧 지금의 서울을 기준하여 정북 방향은 흑룡강의 동쪽 끝 곧 지금의 서요하.동요하가 합류하는 지점이라는 얘기이며 시계 10 시에서 12 시 방향 사이 지역에 선춘령과 백두산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리는 이조선 시기 선학들도 정확히 인식하고 언급하였었습니다.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과 같다. 그리고 대마도와 제주도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했다고 하니, 이는 곧 지관들의 일반론이다.

                                                                              <성호사설/천지문> 이익(1681~1763)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다. 해亥 방향에 앉아서 사巳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이다. 그런고로 예전부터 중국과 친해 왔다. 그러나, 땅이 좁고 물이 젓어 위인을 낳지 못했다.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 그리고 동호와 여진족이 모두 중원을 제패하고 황제가 된 일이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만은 그렇지 못해서 주어진 영토만 지키며 감히 뜻을 품어 보지 못했다`라 했다 .

                                                                               <택리지/복거총론,산수총론> 이중환(1690~ ) 

                                                                                       <후기 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배우성 37~38 쪽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과 선춘령을 현 <화국전도>에 추기하면 아래와 같을 것입니다. 

 

11.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선춘령

 

따라서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은 지금의 화국 요녕성 서쪽 노로아호산 중에 있다는 얘기일 수 밖에 없으며 지금의 칠로도산.노로아호산 연맥도 이조선에서는 백산대맥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열하와 서쪽의 두 지류 곧 <청사고/지리지> 기록의 신요하와 서요하를 포함하여 <양계도>는 요하라고 표시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양계도>도 아래 적색 실선 내 지역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2. <양계도> 묘사 범위

 

 

 

따라서 다산이 언급한 평양도 지금의 쌍산자 부근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평양이 그곳이면 이조선 초기 양성지가 북경에서 30 일 정이라고 설명한 한도韓都나 박은식이 압록강을 건너 망명하면서 찾아본 백제 위례성은 과연 어디이겠는지요? 위례.한도 모두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지점인 지금의 천서 동쪽 건너편 지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승람> 경도 기록과 같이 백제 한성의 오른쪽에는 발해渤海로 둘러쌓였다는 기록이 남았을 것입니다.

 

한편 그곳이 당연히 마한땅이였기 때문에 서기전 2333 년 개국된 왕검조선의 땅은 훨씬 북쪽이였을 것이고 서기전 3 세기의 부왕과 준왕이 왕검성에서 통치한 조선 곧 준왕조선의 땅은 당연히 동쪽이였을 것이며 그 동쪽 땅이 후일의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였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온조왕이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승람> 편찬자들이 지리 고증을 게을리 하여 전해오는 글귀를 그대로 전재을 수 있고 혹 지금의 <승람> 서문에 이조선 말기 일국인이 길가에 내팽겨쳐진 <승람>을 주어 간행했다고 하니 고조선.마한.백제 강역을 한반도로 끌어내려야 하는 일국인이 고조선.마한.백제 관련 구절을 한반도 중앙인 이조선 경도 설명 글에 끼워넣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쨋든 대한제국.이조선.고려와 명.청국및 아라사와의 경계도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중.하류 동쪽 지류들과 동북쪽으로  뻗어나간 백산대맥 부근까지이였습니다. 

 

13. 이조선.대한제국 및 고려 강역과 요.명.청의 동북 강역

 

 

 

이같은 이조선 강역은 청 시기 편찬.제작된 <독사방여기요>, <대청광여도> 등에 기록.설명된 것과 같이 당연히 동서 2000 리, 남북 4000 리였습니다.  

 

<독사방여기요> 八 朝鮮

... 成桂更名旦,徙居汉城,遣使请改国号,诏更号朝鲜,自是王氏始绝,李氏世有其地,称藩岁奉贡献。万历二十年,为日本所侵掠,国几亡,王师入援,久之,国始定,然自是浸弱矣。其国中分为八道,八道中,则忠清、庆尚、全罗三道,地广物繁,州县雄巨,最为富庶。且俗尚诗书,人才之出,比诸道倍多。平安、咸镜二道,北接,俗尚弓马,兵卒精强,亦地势使然也。江原、黄梅,居京畿左右,差为狭小。而京畿在诸道之中,襟带山海,称为雄胜。其地东西二千里,南北四千里八道分统郡凡四十一、府凡三十三、州凡三十八、县凡七十。

주) 读史方舆纪要》摘要之三——山东(四)(2008-07-04 17:36:20)转载标签: 整理/摘要 分类: 青燈青史  
중국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의 고조() 편찬한 중국 역사 지리서. 고대에서 명나라  이르는 지리적 연혁  기재하였다. 1659년에 집필 시작하여 1678년에 완성하였다. 모두 130권이다 

 

14. <왜청도>, 청국인이 제작한 <대청광여도>를 1865 년 일본인이 재간행했다는 <대청광여도- 왜청도라 함>

 

 

그런데 이러한 이조선 강역은 화국인들 뿐만 아니라 18 세기 초 청국 지리를 탐구한 서양인들조차 아래와 같이 인식했습니다. 

 

15. <인디아.차이나 지도>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연구/고지도

주)  Netherland, Guillaume, Delisle, 1750, 62.7×60.9㎝

기욤 드릴(Guillaume Delisle, 1675– 1726)은 18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도 제작 가문을 형성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클로드 드릴(Claude Delisle)은 법학과 지리학 그리고 역사학에 정통한 지도 제작자였다. 기욤 드릴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지도수업을 받았으며, 1718년 최초의 왕실지리학자가 되었다. 그가 그린「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지도」는 최초의 세부적인 미국 내륙 지도로 알려져 있다. ... 이 지도는 원래 1705년 프랑스에서 동일한 명칭으로 간행된 것을 1750년 네덜란드에서 재간행한 것이다. 지도의 내용은 1705년 지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전한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고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을 프랑스인 기욤이 대략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만주국이 건국된 1932 년 이후의 지리는 고대부터 1931 년까지 대략 2600 여 년 동안 설명.기록된 지리와는 너무 다른, 달라도 너무 다른 흑심이 가득한 쌩뚱맞은 지리입니다. 

 

따라서 이조선 500 여 년 동안 한양.북경을 오간 사신들의 로정 중 북경에서 평양까지 2520 리 로정은 아래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 명.청 시기의 황하 

 

그러면 현 <화국전도>에 생략된 황하潢河는 대체 어떤 물길일까요?

 

16. <모사도/ 대요수.황하>

 

 

황하는 당 말기부터 황암수로 불렸으며 송.거란.요국 시기부터 상경임황부 지역을 흐른 황수潢水.황하潢河로 정식 개칭되어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전 수.북위.진.한 시기에는 요수로도 불렸으며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가 화국 기록의 처음이며 <청사고/지리지> 외에는 <수경주/대요수> 설명이 가장 상세하고 정확합니다.  

 

위 모사도 표시와 같이 난수.란하 최하류가 경유하는 요서군에서 동북쪽으로 300 여 리 떨어진 요동군으로 흘러내린 물길이 대요수.황하입니다. 대요수.황하 발원지와 경유지는 서기 5세기 말 편찬된 <수경주>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한서/지리지>에서 발원지 새외라는 곳을 백평산과 지석산이라 하였고 이후 두 지류 모두 대략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요동군의 망평.양평현을 경유하며 합류한 후 남쪽으로 꺽이어  방.안시 등의 현을 지나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대요수.황하가 흘러 들어갔다는 바다는 정확하게는 염난수.요하의 하류 시작 지점을 말하며 요택의 남쪽 끝 지점입니다. 즉 바다라는 요하 하류는 남쪽으로 발해 해안선까지는 대략 300 여 리 쯤 되는 만灣이고 만의 서쪽은 요서군이며 동쪽은 <승람>과 양성지.박은식의 언급과 같이 남쪽으로 발해와 연결된 만灣의 동쪽에는 고조선.마한 땅이였고 백제의 한도.위례성이 있던 곳입니다. 

 

황하는 명.청 시기에도 당연히 란하와 요하 사이 지역을 경유하여 요하 중류에 위치한 요택을 흘러내렸습니다. 황하가 요택의 서쪽 가장자리로 흘러내리며 어지럽게 흘러 복잡했던지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신민부 진안현 기록에는 동사하가 직예성 수동현, 곧 조양부에 속한 수동현을 경유한 후 남쪽으로 흐른다고 하며 오른쪽에서 노하가 흘러든다고 설명한 후 금주부 반산구로 흘러들어 남사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류 노하 혹은 노합하가 흘러드는 본류는 황하潢河뿐입니다. 결국 황하 최하류이며 요택 중의 황하를 동사하.남사하 등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인지 요하를 묘사한 대부분의 고지도에는 황하가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사/지리지> 상경도

遼國其先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去兪關一千一百三十裏 去幽州又七百一十四裏 南控黃龍 北帶潢水 冷陘屛右 遼河塹左

<한서/지리지>

遼西郡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 肥如 玄水出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후한서/군국지>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

[수경주]
<수경>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주>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 

<수경>
又東南過房縣西 

<주>
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 東南 , 北流, 西北屈, 逕廣成縣故城南. 王莽之平虜也, 俗謂之廣都城.又西北, 石城川水注之,水出西南石城山, 東流逕石城縣故城南. 地理志..右北平有石城縣, 北屈逕白鹿山西, 即白狼山也. ... 其水又東北入廣成縣, 東注白狼水. 白狼水北逕白狼縣故城東, 王莽更名伏狄. 白狼水又東, 方城川水注之. 水發源西南山下, 東流, 北屈逕一故城西, 世謂之雀目城. 東屈逕方城北, 東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 逕昌黎縣故城. 西地理志曰..交黎也, 東部都尉治, ... 應劭曰..今昌黎也. 髙平川水注之, 水出西北平川, 東流逕倭城北, 盖倭地人徙 之. 又東南逕乳樓城北, 蓋逕戎鄉邑, 兼夷稱也. 又東南注白狼水白, 狼水又東北, 自魯水注之, 水導西北逺山, 東南注白狼水. 白狼水又東北逕龍山西, ... 白狼水又北逕黄龍城東, 十三州志曰.. 遼東屬國都尉治, 昌遼道, 有黄龍亭者也. 魏營州刺史治. 魏土地記曰..黄龍城西南有白狼河, 東北流, 附城東北下, 即是也. 又東北, 濫真水出西北塞外, 東南厯重山, 東南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出, 東流, 分為二水, 右水疑即渝水也. ... 其水東南入海. 地理志曰..渝水自塞外南入海. 一水東北出塞, 為白狼水, 又東南流至房縣, 注于遼. 魏土地記曰..白狼水下入遼也

<수경>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주>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이러한 대요수.황암.황수.황하 전체와 남쪽 지류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 아래 <경판천문전도>일 것입니다.  

 

17. <경판천문전도- 이하 <경판도>라 약함>

      청(淸)왕조 시대인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에 의해제작되었으며,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

      화 했다. Woodson Research Center, Fondren Library

      소장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6895389

 

<경판도>가 정확한 지도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황하 중류로 흘러드는 남쪽 지류 노하 혹 노합하의 길이입니다. 지금의 서요하로 흘러드는 남쪽 지류 노합하와 비교하면 <경판도>의 노합하가 짧습니다. 짧아도 너무 짧습니다. 다만 더 중요한 부분인 황하 중류를 요하 상류의 서쪽 지류인 서요하와 연결시킨 것은 큰 실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국 경사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적색 실선 표시 방향이 정동쪽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묘사된 것은 고지도에서는 흔하고 사소한 것이라 실수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쨋든 <경판도>의 대실수가 지리조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경판도> 보다 600 여 년 앞선 송.거란 시기 바위에 새겼다는 <지리도>의 황하는 어떤지 보겠습니다. 

 

18. <지리도> 1137 년 송인 황상이 각석

 

 

위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한 것이 아래입니다.

 

 

란하.황하.요하 3 물길 모두 산동반도의 정북쪽 건너편 내륙지역을 대략 동남 방향으로 흘러내려 발해로 들어갔습니다. 엄밀하게는 발해로 흘러든 물길은 란하와 요하 뿐입니다. 즉 황하는 요하 중류로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요택 남쪽 바다로 묘사된 곳에 청색 실선을 길게 표시한 것은 <한서/지리지> 기록과 같이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염난수가 2100 리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염난수도 대요수와 같이 송.거란 시기부터 요하로 개칭되었으며 중류인 요택의 남쪽 끝 지점에서 대요수.황하를 받아들인 후에도 대략 300 여 리 이상을 더 흘러내려 산해관 동쪽에 이르러 발해로 들어갔습니다. 즉 요택 남쪽의 바다는 발해가 아니라 요하 최하류이고 실제 정황은 만灣입니다.

 

당인 장수절은 <사기정의>에서 진장성이 끝나는 바다 곧 만灣을 요수遼水라고 정확하게 설명.기록하였으며 이조선 효종 시기 인평대군은 발해가 아니라 구하 곧 대릉하.황하.요하.혼하.어니하.웅악하 등이 흘러드는 넓은 지역을 가리킨 `둘러빠진 곳`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한서/지리지>

玄兎郡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麗莽曰下句麗 屬幽州 西蓋馬 馬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후한서/군국지>

玄兎郡 武 洛陽東北四千里

<사기정의>

始皇長城東至遼水 西南至海之上

진시황 시기 수축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닿았고 장성동단의 서남쪽은 바다다.

<연도기행> 

... 남쪽은 발해(渤澥)에 임하여 은빛 물결이 하늘에 닿았고 북쪽은 장성을 바라보아 분첩(粉堞)이 구름에 연했으니, 기상이 웅장하고 시야가 호탕하다. 고금에 몇 사람이 이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던가. 이미 승지(勝地)에 이르렀으니, 한 번 누 위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려 했으나, 층루(層樓)가 반이나 썩어서 높은 난간이 거의 무너졌다. 이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년에 올라가서 바라본 것이 이미 옛일이 되었다. 부질없이 수선할 인물이 없음을 탄식할 뿐이다. 관문(關門)에서 바다를 연결시킨 것은 조룡(祖龍)의 공이 아니라, 바로 서달(徐達)이 창조한 것이다. 누 밖의 호탕한 물결은 원래 발해가 아니고, 구하(九河)가 둘러빠진 곳이다. ...

 

 

- 일국 서향융성의 지리 조작과 청국 양수경의 망상

 

<경판도>의 대실수가 제작자인 마군량의 실수인지 지리조작자의 추기 변조인지 알 수 없지만 황하 중류가 요하 상류 서쪽 지류로 연결된 것은 <경판도> 외에도 또 있습니다. <경판도>의 대실수보다 훨씬 대담하게 황하를 발원지부터 조작하여 동남쪽이 아니라 정동쪽으로 흐르게 묘사하여 요하의 상류 서쪽 지류와 연결한 것입니다. 

 

19. <황조일통여지전도- 이하 <왜황도>라 함> ,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간행한 <황조일통여지전도>를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경판도>와 <왜황도>의 황하 남쪽 지류인 노(합)하 길이를 비교하면 위 <왜황도>의 황하 변조를 훨씬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입니다. 하지만 청 시기는 물론이고 서기전 200 년 경의 전한 시기에도 황하.대요수는 짙은 청색 실선과 같이 흘렀습니다. 

 

 

사실 <왜황도>가 1865 년 재간행됐다는 설명은 믿기 힘듭니다. 1875 년 간행된 일국 공식 관찬 지도의 신뢰성을 뒷받침하려고 청국 고지도를 가져다 재간행하면서 간행 년도를 소급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국은 명치왕 초기 정한론에 사로잡혀 식민지배를 순탄하게 하려는 기획하에 무지막지한 조작까지 감행했다고 판단합니다. 아래는 란하 전체가 묘사된 위 도면의 서쪽 부분입니다. 

 

 

결국 일국은 청 시기의 황하를 당시 흑룡강이였던 지금의 서요하로 조작 표시한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란하 상류를 황하 중류로 연결시키고 란하의 중.하류와  황하 상류를 삭제하였습니다. 그 결과 란하 중.하류가 동쪽으로 대략 300 리 쯤 이동되었고 란하 중.하류 동쪽 강안 지점에 설치한 열하승덕.평천.노룡.산해관 등의 지명도 옮긴 란하 중.하류 동쪽 적절한 위치에 표시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산해관까지라고 표시된 진장성동단과 갈석의 원래 위치도 서쪽으로 대략 500 리 쯤 떨어진 곳이였습니다.  

 

20. 지리 조작 수법 개략도

 

 

21.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압록강 

 

 

 

그리고 황하 변조는 일국 뿐만이 아닙니다. 청국인 양수경도 1900 년 편찬했다는 <역재연혁지도/요지리도>에서 황하를 발원지에서 정동쪽으로 흐르는 물길로 표시했습니다.

 

21. <역대연혁지도/요지리도.황하> 1900 년 청국인 양수경 간행

 

 

 

결국 <아동도>에 당시 지리를 정확하게 표시하자면 아래와 같아야 합니다. 일국인들이 화국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한반도 평양이라 주장하지만 화국 세번째 정사 <후한서/군국지> 낙랑군 주석과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왜 기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지고 그 낙랑군의 서남쪽 귀퉁이에 설치한 대방군에서 바닷길로 남쪽으로 또 동쪽으로 韓땅 7000 리를 가면 대마국의 북안 곧 지금의 부산 부근이였을 변진구야한국에 도착한다는 설명도 아래와 같은 지리일 때만 상식.합리적일 것입니다. 

 

22. <아동도>에 추기한 1875 년 당시의 란하.황하.요하.흑룡강 및 압록강 

 

 

어쨋든 위 <아동도> 묘사로 보아 일국 육군 참모부도 청국의 동북쪽 국경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동도>가 제작된 1875 년 당시 일국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이조선과 청국 국경 지역의 부정확한 지도를 제작토록 지시를 내릴 만한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나는 정한론이라는 조선 침략 당위성에 취한 과단한 성격의 사쓰마번 하급 무사였던 명치유신 3 걸 중 우두머리격인 서향융성의 독단이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수백 년 권좌를 이어온 막부를 끌어내려 항복을 받은 유신 3 걸 중 이조선 침략을 즉시 실행할 것을 주장한 자가 서향융성이였습니다. 당시도 명치왕을 독살하여 가짜 명치왕을 앞세워 동경에 입성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2 인은 내정 안정이 시급하다고 인식하고 선진국 견학을 위해 미국.유럽 순방길에 올랐었다 하니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저런 무지막지한 엉터리 지도를 제작.간행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서향 1 일이였을 것입니다. 

 

 

- 대한 고대 역대국 강역

 

따라서 삼한을 통일한 신라.진국 강역과 서쪽 경계도 아래와 같았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3. <모사도/통신라.진국 강역> 

 

 

<요사/지리지> 동경

耀州 刺史 本渤海椒州 故縣五椒山貊嶺사泉巖淵 皆廢 戶七百隸海州 東北至海州二百裏 統縣一 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 一百二十裏

요주는 자사가 통령하며 본래 진국(발해) 초주였고 옛 현은 5 개이고 초산.백령.사천.암연현이 있었는데 모두 없앴다. 700 호가 살았고 해주에 예속되었다. 동북쪽으로 해주까지는 200 리이고 암연현 1 개를 두었다. 암연현 동쪽으로는 신라와 경계했고 옛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 암연현에서 해주까지는 120 리다. 

 

위 기록과 같이 거란.요국의 요주는 해주에서 관할하였고 해주는 거란의 동경 치소가 있는 요양에서 남쪽으로 120 리 떨어진 곳입니다. 이는 청국 봉천부 지리와 같기 때문에 <청사고/지리지> 기록을 원용한 리 수입니다.

 

결국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서쪽 경계가 요동 지역 요양 부근까지였고 요하 하류의 동쪽 강안 지역까지였기 때문에 당연히 백제의 강역도 그곳까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 300 년 쯤인 서진 말기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가 진출했다는 요서백제 경략도 당시의 대요수와 염난수가 합류한 이후의 만灣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기만 하면 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였습니다. 

 

24. 삼국 강역

 

또한 삼국 건국 직전인 서기전 100 년 쯤의 지리도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5. 단군부여.한韓 및 한漢 8군>

 

 

특히 <삼국지>의 왜 기록과 같이 낙랑군의 서쪽 귀퉁이에 설치한 대방군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향하며 한땅을 지나 뱃길 7000 리를 가면 지금의 부산 부근에 있었던 변진구야한국에 도착하였으니 결국 지금의 산해관 서북쪽 청룡하 하류 남쪽 지역부터 지금의 요동반도 및 한반도 전체를 한韓 영역으로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왜倭>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 ...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渡一海 千餘里至對馬國 

 

화국 및 대한의 지리지 기록이나 고지도 묘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화국.일국은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역사학계마저 전한 시기의 난수.대요수.염난수를 지금의 란하.서요하.요하라며 황당할 정도로 넓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낙랑군 위치도 한반도 평양이라며 비상식적인 주장을 현재까지도 계속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처럼 무지무식한 주장을 할까요?  저들을 한국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한국 재야역사학계의 불완전한 지리 인식

 

한국역사학계는 물론이고 일국.화국 역사학계도 서울이 백제 한성이였고 이조선의 경도였다고 주장합니다. 북조선 평양이 이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이였고 고려의 서경이였다고 하며 그 이전은 화국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이였고 더 이전은 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이였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화국전도>에 표시된 북경부터 서울까지의 현재의 지명은  한.화.일 3 국 모두 화국의 한나라 시기 곧 고구려.백제.신라 건국 시기부터 변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위 민족사학을 자처하는 작금의 한국 재야역사학계에서는 낙랑군 위치가 북조선 평양 일대일 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일본이 만든 대조선사관 곧 식민사관과 화국의 동북공정이 오류라고 비난합니다. 동시에 서울.한양은 이조선 500 년 도읍이였고 고조선.마한 땅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재야는 낙랑군 위치에 대해서 정확하고 반론 불가능한 명확한 정설을 내놓았을까요? 즉 <승람> 기록과 같이 이조선 한양인 지금의 서울 오른쪽.서쪽 바다가 발해일까요? 비난이 아니라 식민사관.동북공정의 주장을 부인할 만한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한.화.일 3 국 역사학계의 100 여 년 지속된 단단한 학설을 깰 수 있는 탄탄한 논리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요? 

 

단국대 명예교수 윤내현은 <고조선연구>에서 낙랑군이 산해관 지역에 설치되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낙랑군 수성현에 진장성 동단이 있다는 화국 정사 <진서/지리지> 기록과 당인 장안이 조선에 습수.열수.선수가 있고 합쳐 열수가 되는데 낙랑조선 명칭은 3 물길명에서 얻은 것 같다고 기록된 <사기집해> 구절에 근거한 주장입니다.

 

<진서/지리지>

樂浪郡 漢置 統縣六 ...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사기집해>

張晏曰 朝鮮有濕水列水仙水 三水合爲列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그런데 윤내현은 습수를 지금의 북경 북쪽 지역에 설치된 상곡.어양 2 군 사이를 흐르고 <한서/지리지> 상곡군 군도현에 주석된 습여수濕餘水로, 열수列水도 어양군 안락현 북쪽 바깥 지역에서 난수 중류로 흘러드는 지류 무열수武列水로 곡해하였습니다. 또한 선수仙水도 <수경주/난수> 기록과 같이 어양군을 흐른 750 리 길이 고수의 하류에서 동쪽으로 우북평군 지역을 관통하고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면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 지역을 경유한 난수와 연결된 인공.작위적인 신하新河로 흘러들어가는 요서군 신안평현이 발원지인 용선수龍鮮水라고 단정한 후 한나라 시기의 상곡.어양.우북평.요서 4 군 지역을 낙랑조선 지역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게다가 요동군 번한현을 흘렀다고 주석된 패수沛水를 한수汗水라고 읽고 이마저도 란하 최상류 지역으로 흘러드는 지류 우수于(물수변첨가한 于)水라고 곡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낙랑군 위치는 갈석산과 진장성동단인 산해관이 표시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26. 윤내현이 곡해 지목한 습여수.무열수.용선수.우수의 원래 위치

<한서/지리지>

上谷郡 ... 軍都 濕餘水東至路 南入海

遼西郡 ... 臨兪 兪水首受白狼 東入塞外 

遼東郡 ...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수경주/난수>

...濡水從塞外來 ...出禦夷鎭東南 其水二源雙引 ... 謂之連淵浦 又東北注難河 難河右則于(물수변첨가한 于)水入焉 水出東鳥(흙토변첨가한鳥)南 西北流逕沙野南 ...

... 濡水又東南 索頭水注之 ... 南流經廣陽僑郡西 魏分右北平置今安州治 ... 注于濡 濡水又東南流 武列水入焉 ...

... 新河自枝渠東出合封大水 謂之交流口 水出新安平縣 ... 又東南流 龍鮮水注之 水出縣西北 ...

<후한서/군국지>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 臨楡(二) ... (二) 山海經曰 碣石之山 ... 水經曰在縣南 ... 

樂浪郡  洛陽東北五千里

 

윤내현 주장은 한마디로 억지입니다. 산해관.갈석산 지역은 춘추.전국 시대 및 진시황 시기까지의 요동군이였고 서기전 202 년 전한부터는 요서군으로 재편된 곳입니다.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요서군과 낙랑군은 대략 1700 리 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산해관 부근을 낙랑군이라 단정하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서/지리지> 낙랑군 탄열현 주석에 명확하게 820 리 길이 열수가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요서군과 더 서쪽의 어양.상곡군 및 어양군 북쪽 바깥 지역을 흐르는 한문 한글자가 같다며 혹은 발음이 비슷하다면 쌩뚱맞은 4 개 지류를 언급하였습니다. 화국 역사학자들은 윤내현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인정할까요? 듣자마자 헛소리라고 무시할 것입니다.

 

또한 지리지 기록의 산해관.갈석산 위치를 현재의 산해관.갈석산으로 인식한 것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또 <진서/지리지> 낙랑군 수성현 기록을 활용하여 전한이 설치한 낙랑군 지역이라 단정했지만 식민사관맹종자인 천관우.공석구 등도 지적하였듯이 265 년 위.오.촉 삼국시대를 끝내고 다시 화국을 통일한 서진이 설치한 낙랑군이고 약 360 년 전에 설치한 원래의 낙랑군 지역을 관리.유지하지 못하여 북경 방향인 후방으로 옮긴 잠정적인 군.현이였습니다. 

 

결국 윤내현은 어느 시기의 낙랑군인지도 구별하지 못하였고 같은 글자가 쓰였다며 엉뚱한 물길과 뜬금없는 지역을 쳐다고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윤내현은 북조선의 리지린 다음으로 지금의 란하 주변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언급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는 구절을 제대로 해석하고 검증하지 못한 것입니다. 재야에서 환호했던 낙랑군.산해관 설이  `교치 군.현`이라는 식민사관.동북공정 맹종자의 비판 한 구절로 완패당한 이후 현재까지 한국사의 모순된 지리를 석명할만한 논증은 전무합니다. 결국 낙랑군.한반도 평양설은 더욱 굳어졌고 마침내  2017 년 화국 시진핑 주석은 미국 트럼프대통령에게 `한국은 화국의 일부`라고 말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신단재보다도 더 과격하게 연수 계인경 선생은 고려 시기 범장이 편찬했다는 <북부여기> 본문에 자신의 지리 비정 `패수는 今금 란하`라는 구절을 넣어 <환단고기>를 엮었습니다. 今금은  당연히 계연수 선생이 망명한 1910 년 전후입니다. 두 선생의 주장에 의한다면 지금의 란하 주변이 요서.요동.현토.낙랑 등 4 개 군지역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산해관은 요서군 남쪽 지역의 동쪽 끝 지점이였고 패수는 요동군의 동쪽 경계선 바깥 지역을 흐르는 물길이며 동시에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에 흐른 물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역사 지리 문제가 해결되었나요? 해결 안됩니다. 또한 <조선상고문화사>나 <환단고기>에도 요하와 패수가 왜 란하인지 대한 논증한 글이 없습니다.

 

사실 요하.패수가 왜 란하인지 논증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야 합니다. 현 <화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에서 동쪽으로 차례대로 흐르는 대릉하.요하.혼하.압록강 등의 유역 지리 전체를 <한서/지리지>를 비롯한 화국의 모든 정사급 기록과 대조.검증하여 원래 위치를 규명해야 합니다. 일국 육군참모부가 조작하기 이전의 지리를 찾아야 합니다. 

 

27. 왕검조선.천군 강역

 

 

결국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 한국 역사서를 정확히 읽어내려면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 년 당시의 정확한 지리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화국 정사급 지리지에 기록된 대요수.황하와 염난수.요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사는 제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역고/서북로연혁고>를 엮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한국사학계는 서북과 정북도 구별하지 못한 채 정확한 지리 설명조차도 식민사관 빌미를 주었다며 비난합니다. 하루빨리 깨닫고 엎드려 사죄해야 할 것입니다. 

못 보던 파리의 출몰…美대령의 고백 "세균전, 합참에서 짰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7]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⑯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  기사입력 2024.04.13. 11:46:39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펼칠 무렵인 1952년 초,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북한·중국의 주장이 거세졌다. 미국은 '그렇다면 유엔 조사단을 구성하자'고 맞섰다. 북한·중국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유엔이란 '미국의 작은 국무부'에 지나지 않고, 둘째, '유엔군'이란 이름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당사자인 유엔이 '공정한 조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국제적십자사(ICRC)가 조사에 나서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나왔다. 북한·중국은 "국제적십자사라는 게 실은 '스위스 적십자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쳤다. "국제적십자사는 한반도에서 미국이 무차별 폭격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내는 상황에 대해 아무런 논평이나 지적을 하지 않았다. 미국의 세균전을 중립적으로 조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큰 몸집에 긴 날개, 못 보던 파리였다" 

미국의 세균전 전쟁범죄 의혹을 밝혀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면서 모두 3개의 조사단이 꾸려졌다. △사실상 중국 정부가 만든 '미 제국주의 세균전 죄행조사단'(활동기간 1952년 3월15일~1952년 4월10일), △국제민주변호사협회가 만든 '국제민주변호사협회 위원단'(1952년 3월3일- 1952년 3월19일), △세계평화이사회 이름으로 만들어진 '국제과학위원단'(1952년 6월23일-1952년 8월31일)이다. 

'미 제국주의 세균전 죄행조사단'은 중국이 정치적 선전 공세를 펼 목적으로 꾸렸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 그렇기에 국제사회에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국제민주변호사협회 위원단'을 꾸린 국제민주변호사협회는 1946년 프랑스 인권 변호사들이 중심이 돼 24개국의 법조인들이 모여 출범한 단체다. 따라서 이 협회의 조사위원단은 나름 공신력을 지녔다. 9명의 법학교수·변호사·판사(출신국은 영국·프랑스·네델란드·벨기에·이탈리아·오스트리아·브라질·중국)로 구성됐다.

9명의 위원은 1952년 3월3일부터 19일까지 북한에 머무르면서 현지 조사를 나갔다. 그들은 미군의 세균전 공격이 사실이라 못 박았다. 위원단은 조사 보고서 끝에 '미국 비행기들이 북한에다 전염병으로 감염된 곤충들을 투하했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며 미국의 세균전 공세를 비난했다.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북한 당국이 '용의주도하고 철저한' 방역대책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라 했다. 

[위원단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과 지방 항공감시소의 보고에 따르면, 북조선 169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곤충들이 발견되었다. 그 대부분은 지금까지 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파리는 재래의 한국 파리와는 달리 몸집이 크고 긴 날개를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곤충이 나올 수 없는 대단히 낮은 기온(1월 최고온도는 영상 1도)을 고려할 때 이런 곤충들이 나타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전문적인 조사결과는 다수 곤충이 병균에 감염돼 있음을 보여주었다](김주환편,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1989, 170쪽).

조사위원단이 지닌 한계는 법조인 중심으로 구성돼 세균전문가가 없었다는 점이다. 보름 동안 북한에 머물며 조사활동을 벌였지만, 북한과 중국에서 주는 자료에 많이 기댔다. 전쟁 중이라 현장 조사를 제대로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보고서가 나오자 미국은 곧바로 세균전 의혹을 부인하고 나섰다. 위원단에 세균전문가들이 빠져 있기에 믿기 어렵고, 공산권의 선전에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 미군 비행기가 떨어뜨렸다고 북한이 주장했던 ‘세균 폭탄’. 공중에서 땅에 닿으면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세균에 감염된 곤충이 쏟아졌다고 한다. ⓒNCNA

ISC의 중심 인물, 조지프 니덤 

정치적 선전 공세에 그치지 않고 전문가들이 나서서 그 나름의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낸 것은 '국제과학위원단'(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ISC)이다. 위원단은 영국인 조지프 니덤(케임브리지대, 생화학), 소련인 주코프-베레즈니코프(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교수, 세균학)을 비롯해 프랑스 동물생리학자, 이탈리아(2인) 해부학자와 미생물학자, 스웨덴 임상연구소장, 브라질 기생충학자 등 모두 7명의 과학자로 꾸려졌다(이 가운데 이탈리아 미생물학자는 정식 조사위원이 아닌 '옵저버'). 

소련인 주코프-베레즈니코프는 731부대의 세균전 범죄를 다룬 하바롭스크 전범재판(1949)의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이력을 지녔다. 7명의 조사단 요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영국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1900–1995)이었다. 1952년 조사단이 꾸려질 당시 니덤은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전공인 생화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세균전이 폈는가를 살펴보는 국제과학조사단에 니덤이 참여한 동기와 역할에 대해 쓴 김태우(한국외국어대, 한국현대사)교수는 니덤을 가리켜 '과학사와 중국학 분야에서 워낙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 평가한다. 니덤은 30대 초반 <화학적 발생학>(Chemical Embryology, 1931,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1941년 '과학 분야에서는 노벨상 다음 가는 명예'라는 영국왕립학회 회원(FRS)이 됐다. 

그게 끝이 아니다. 연구자로서의 삶 후반부엔 과학사 관련 역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1954,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을 써냈다. 이 책은 중국에 대한 서구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거의 하룻밤 사이에, 그리고 거의 혼자 힘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니덤은 나이 50대에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과학사 저서로, 그의 인생 전반부 업적 전체를 압도하는 놀라운 연구성과를 남겼다. 그런 업적을 인정받아 1971년 인문학계 최고 영예인 영국아카데미 회원(FBA)이 됐고, 1992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명예훈위'(Companions of Honour)까지 받았다. 이렇듯 니덤은 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최고 영예를 얻게 되었는데, 20세기에 위의 세 가지 타이틀(FRS, FBA, CH)을 동시에 지닌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고 한다](김태우, '한국전쟁기 조지프 니덤의 세균전 국제과학조사단 참여동기와 주요역할'. <의사학> 제32권 제3호, 2023년 12월).

이렇게 니덤의 약력을 소개하는 까닭이 있다. (독자분들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문제의 세균전 의혹을 밝히려는 사람이 지녀야 할 과학적 엄밀성과 진지함이란 잣대로 보면, 니덤이 뛰어난 연구자였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1937년 케임브리지대로 유학 온 중국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면서 니덤은 1942년부터 4년 동안 중국 충칭의 영국대사관 외교관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가 중국군을 상대로 세균전을 편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ISC 보고서, "일본군이 썼던 방식과 똑 같다" 

니덤을 중심으로 한 국제과학위원단(ISC)은 1952년 7월9일부터 2주 동안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 조사활동을 벌였고, 이어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서 8월6일까지 2주 동안 머물렀다. 북한에서 미군 공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8월31일 베이징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대한 사실조사를 위한 국제과학위원단의 보고서'(ISC보고서)란 긴 이름으로 670쪽에 이르는 두툼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니덤이 ISC의 중심인물이었기에 흔히 '니덤 보고서'로 일컬어지는 ISC보고서는 북한과 중국의 주장을 거의 대부분 사실로 받아들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보고서 앞부분에 미군의 세균전 의혹을 731부대와 관련시키는 대목이다. 미국의 세균전 능력이 731부대의 전쟁범죄자들로부터 얻은 '피 묻은 정보'와 떼려야 뗄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생물무기, 특히 곤충무기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꿈을 지녔다. 그들은 만주에서 철수하기 전에 세균전과 관련이 있는 문서들을 조직적으로 없앴다. 1952년 초 북한·중국(만주)의 세균전 의혹이 제기되기 전에 이시이 시로가 한국을 2차례 방문했다는 언론 보도가 잇달아 나왔고, 3월에 다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 내 점령당국(미국)이 이시이 시로의 활동을 도왔는지, 미군 극동사령부가 본질적으로 일본의 (세균전)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본 위원들이 줄곧 품었던 의문이었다](Report of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1953, 12쪽). 

731부대를 비롯한 '이시이 기관'의 우두머리 이시이 시로는 1952년 초에 한반도를 적어도 두 번 비밀리에 다녀갔다고 알려진다. 그가 방문했다는 시기는 '미국이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는 북한·중국의 주장이 거세지기 직전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이시이의 한반도 극비 방문을 확인해주는 미국의 문서는 없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미국이 인정한 바도 없다).

이시이가 미군 관계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한반도를 다녀간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 가지 추론을 해본다면 이렇다. 그가 다녀갔다는 1952년 초 무렵은 전선이 한반도 중부 지역을 경계선으로 지구전 양상을 보였다. 정전회담도 개점휴업 상태로 큰 변화가 없었다. 미국으로선 그런 상황에서 세균무기의 효능을 실험해볼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난날 중국에서 악명을 떨쳤던 '원조(元祖) 세균전문가'가 한반도 전선을 돌아보고 뭔가 새로운 기획안을 내놓길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위원단이 내놓은 조사보고서 곳곳에는 이시이 시로의 망령을 떠올리는 서술이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이 채택한 페스트와 관련된 세균전의 고전적인 방법은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컨테이너든 스프레이든 대량으로 배달하는 것이었다.···이 모든 사실과 다른 유사한 사실들에 비춰볼 때, 본 위원회는 한국에서 미 공군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이 썼던 방식과 똑 같거나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페스트를 북한에 퍼뜨렸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ISC보고서, 24-25쪽). 

▲ 1952년 8월에 나온 ‘북한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대한 사실 조사를 위한 국제과학위원단(ISC) 보고서’ 표지. 670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방식이 ‘일본군이 썼던 방식과 똑 같다’고 지적했다.

'니덤 보고서'가 지닌 한계 

ISC보고서('니덤 보고서')는 한반도에서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전염병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있고, 그 원인은 비행기에서 세균을 떨어뜨리는 미국의 '항공 활동'에 있음을 세계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위원단이 전쟁지역에까지 가서 조사활동을 편 목적은 미국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본 위원회는 사망한 한국 민간인의 숫자, 총 질병률 및 사망률에 관한 구체적인 수치를 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위원회가 확인한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전염병이 발생했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 길(원인)을 거슬러보면 언제나 미국의 항공 활동으로 돌아간다(the trail always leads back to American air activity). 세계는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경고를 받아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는 위험과 함께 이런 종류의 전쟁(세균전쟁) 가능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ISC보고서, 59쪽). 

미국은 ISC보고서를 가리켜 '수집된 곤충 표본을 갖고 세균이 묻었다고 하는 공산권의 거짓 선전활동'에 과학자들이 속았다고 했다. 아울러 그들이 낸 보고서는 허점투성이이라 깎아내렸다. 하지만 니덤을 비롯해 조사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서구의 과학자들이 곤충 표본 수집가들에게 속을 수 있겠는가" 하고 반박했다. '인터뷰와 조사를 벌인 목격자 수백 명의 증언들이 의심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서로 너무 일치하며 너무 독립적'이라는 것이었다.

ISC는 미군이 세균에 오염된 곤충을 살포하기 위해 썼다는 폭탄 모양을 한 빈 통, 세균 매개 곤충의 샘플, 그리고 세균에 감염돼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하지만 조사단은 몇 가지 한계도 지녔다. 무엇보다 북한·중국이 제공하는 자료에 많이 기댔다. 미군 비행기의 공습 순간에 ISC 요원이 바로 그 곳에 머물다가 갓 떨어진 세균무기와 그 속에서 꿈틀대는 곤충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바람직하겠지만,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지 못했다.

노벨상 수상자, "나는 회의론자였지만 생각 바꾸었다" 

그럼에도 ISC보고서는 세균전 연구자들 사이에 후한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이 사실이라 여기는 대표적 연구자인 스티븐 엔디콧, 에드워드 해거먼이 그러하다. 이들은 둘 다 캐나다 토론토 요크대학 교수 출신으로 동아시아역사학 전공자들이다. 특히 엔디콧은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고 1980년대에 중국 쓰촨(四川)에서 대학교수를 지낸 중국통이다. 

이 두 연구자는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The United States and the Biological Warfare, 1998)이란 문제작을 써냈다. 이 책은 위에서 살펴본 ISC보고서(이른바 '니덤 보고서')를 비롯해 미국의 여러 문서보관소의 관련 문서들을 뒤져 얻어낸 여러 정황 증거들을 분석하면서, 미국의 세균전 '설'이 단순히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라 주장했다. ISC보고서에 대한 이 두 연구자의 평가를 보자. 

[이 ISC가 비록 중국 혁명에 우호적인 사람들로 구성됐다고 하지만, 단 한 명만 소련 출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서구에서 훌륭한 경력과 명성을 쌓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낸 보고서는 미군의 활동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비춰볼 때 더욱 존경스럽게 취급돼야 한다. 거기엔 단 하나의 결론만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 동안 곤충과 다른 매개물을 이용해 생물학전(세균전)을 실험했다는 북한과 중국의 설득력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마찬가지로 설득력 있게 재창조했다](엔디콧&해거먼,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중심, 2003, 286쪽). 

ISC보고서는 '설마 미국이 세균전을 폈겠느냐'며 공산권의 주장에 의문을 품었던 많은 회의론자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1967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던 조지 월드(하버드대 생물학연구소장)는 엔디콧과 해거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처음엔 우리가(미국이) 한국에서 세균전을 벌였다는 생각을 전면 거부했다. 니덤이 공산주의에 편향됐다고 믿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니덤은 훌륭하고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며 기념비적인 학자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펼쳤다는 주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당혹스럽고 수치스런 마음으로 당시 내가 믿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 지금은 매우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엔디콧&해거먼, 291쪽). 

▲ 1952년 8월 ISC 조사위원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보고서를 발표하는 모습. 사진 가운데 팔짱을 낀 이가 조사단의 중심인물인 영국의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 ⓒISC

"세균전 계획, 1951년 합참에서 짰다" 

ISC의 활동 가운데는 포로로 잡힌 존 퀸 중위를 비롯한 미군 비행사 4명과의 면담도 있었다. 4명 모두 미 공군 중위였던 포로들은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음료를 마시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서너 시간씩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ISC조사단에게 '세균전을 펼쳤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의 진술에 따르면, '옳지 못한 것은 알았지만 군인이라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했다. 자료사진들을 보면, 포로가 밝게 웃는 모습도 보인다(이들은 포로교환으로 풀려난 뒤 진술을 뒤집고 '세균전 따윈 없었다'고 주장했다). 

공산권에선 미 공군 포로들이 남긴 자술서를 세균전 증거로 내세웠다. 자백 또는 증언 형식으로 자술서를 내놓은 공군 포로는 모두 36명이었다. 이 가운데 계급이 가장 높은 이는 프랭크 슈와블 대령(미 제1해병 항공비행단장)이었다. 1952년 7월 격추돼 포로가 된 그는 공산측 방송에도 나와 마이크 앞에서 그가 관련된 세균전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의 자술서엔 하급장교라면 알기 어려웠을 고급정보가 보인다. 

[한국전쟁에 있어서 일반 세균전 계획은 1951년 10월 합동참모본부에서 이뤄졌다. 참모본부는 극동군총사령관(당시 리지웨이 대장)에 의해 소규모 실험적 단계로 시작되었던 세균전 규모를 한반도(북한) 전체로 확대하도록 건의했다. ···이들 지역은 최소 10일 간격으로 재오염시킬 예정이었다. 작전은 콜레라 폭탄을 사용해 6월 첫 주에 개시됐다. 그 뒤 황열병, 티푸스에 의한 오염작전이 계획되고 있었다](데이비드 콩드, <한국전쟁 또 하나의 시각> 2, 과학과사상, 1988, 360-361쪽). 

슈와블 대령의 자술서 내용을 책에 옮긴 미 역사학자 데이비드 콩드는 1946년부터 연합군총사령부(GHQ)의 문관으로 일본 도쿄에서 근무했었다. 맥아더 장군이 전범 우두머리인 히로히토 일왕과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미국의 일본점령정책에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품게 됐다. 1947년 GHQ를 떠난 그는 패전 뒤 미 군정 아래의 일본, 좌우 갈등과 전쟁의 격동기를 맞았던 한국 등 동아시아 정치사를 비판적으로 다룬 책을 여러 권 남겼다. 

슈와블 대령이 '일반 세균전 계획은 1951년 10월 합동참모본부에서 이뤄졌다'고 밝힌 내용은 포로가 된 앤드류 에반스 대령의 입에서도 확인된다. 미 전쟁기획국 출신인 에반스 대령은 1953년 중국 인민지원군의 대공포에 격추돼 붙잡혔다. 그는 '한반도에서의 생물학전(세균전)은 참모본부가 인편으로 리지웨이 장군에게 관련 명령을 전해 착수됐다'고 털어놓았다. 슈와블 대령과 에반스 대령이 리지웨이 장군에게 세균전 관련 대면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엔디콧&해거먼, 194쪽 참조). 

▲ ISC 조사위원들이 격추돼 포로로 잡힌 존 퀸 중위를 면담하는 모습. 조사단은 모두 4명의 미군 포로와 면담하면서 이들이 털어놓은 세균전 사실을 확인했다(맨 오른쪽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존 퀸 중위). ⓒISC

세균폭탄 떨어뜨린 조종사, "명령은 명령" 

1952년 4월에서 7월 사이에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들도 한반도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들의 말을 모아보면, 세균폭탄을 일본에서 가져왔고, 공식 보고로 세균탄을 가리킬 때는 '불발탄'이라 불렀고, 비행사와 탑승원 사이에서도 '세균탄'을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비밀을 지킨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했고, 이를 어길 경우 군법회의에 넘겨질 것이라 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콩드의 글을 다시 보자. 

[세균전에 종사하는 비행사의 사기는 대단히 낮았다. 그들은 기지로 돌아오면 네이팜과 세균 투하의 임무를 잊으려고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것은 무자비한 군대의 명령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명령은 명령이다!"](데이비드 콩드, 363쪽). 

위 문장 끝에서 '명령은 명령'이란 표현은 세균전에 투입된 미군 조종사들뿐 아니라 군인이라면 지켜야 할 일반적 의무로 여겨진다. ISC보고서('니덤 보고서')에 실린 미군 조종사의 자술서에도 그런 내용이 보인다. 존 퀸 중위의 자술서에 나오는 한 대목. 

[우리가 비행기를 타러 갔을 때 경비병을 만났다. (비행기 날개 쪽에 있는 폭탄이) 세균 폭탄(germ bombs)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경비병은 날개 폭탄들은 잘 관리(포장)돼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비행기를 점검할 때 항법사가 "비행기 날개폭탄에 어떤 병균도 없다"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고, 나는 "명령은 명령이니..."라고 말했다](ISC 보고서, 614쪽). 

정전협정(1953년 7월27일) 뒤 포로교환으로 풀려나 미국에 돌아가면서 존 퀸 중위를 비롯한 포로들은 진술을 뒤집었다. 세균전 자백은 '강요'에 따른 것이라며 '세균 살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한국전쟁 기간 중에 펼쳐졌다는 세균전 의혹은 (한쪽에선 '사실'이라 주장하지만) 당사국인 미국이 '사실이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침으로써 논란으로 남았다. 

다음 글에서는 세균전이 실제로 있었다고 여기는 캐나다 요크대학의 스티븐 엔디콧, 에드워드 해거먼 교수의 주장과, '세균전은 없었고 공산권의 선전이었다'는 밀튼 라이텐버그(메릴랜드대 국제안보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의 반론을 중심으로,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을 더 살펴보려 한다.(계속)

경실련 "총선 결과가 의대 증원 심판? 의사단체 후안무치 기찰 따름"

논평 내 강경 비판…"특권 지키려 의료대란 일으킨 당사자 적반하장"

이대희 기자  |  기사입력 2024.04.15. 19:00:00
 
 

4.10 총선의 여당 참패를 두고 대한의사협회(의협) 등이 정부의 의대 증원안을 원점 재검토하라는 민의로 해석한 가운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를 "민심 왜곡"으로 규정하고 "의사집단의 유아독존적 사고"가 반영됐다고 일침했다.

15일 경실련은 논평을 내 총선 후 의협이 내부 잡음을 정리하며 의대 증원 저지를 위해 나서는 양태를 두고 "총선 결과를 의대 증원에 대한 민심으로 해석하고 증원 저지를 위해 ‘원팀’으로 결속하는 의료계의 행태에 기가 찰 따름"이라고 개탄했다.

경실련은 "여당의 총선 대패는 윤석열 대통령의 불통과 미숙한 국정운영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의대 증원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라는 의료계의 해석은 특권 지키려다 지금의 의료대란을 만든 당사자의 적반하장이자 후안무치한 발상"이라고 질타했다. 

경실련은 그간 "시민사회·소비자·환자단체들은 지속적으로 정부에 의대 증원 정책 추진을 요구했다"며 "정부의 일방적 증원 규모 결정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의료계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번 사태의 핵심 책임은 "지난 4년간 의대 증원을 부정하며 논의를 거부했던 의사단체에 있다"고 강조했다.

경실련은 "의사단체의 실력행사로 정책이 지연되거나 중단된 것은 이번만이 아니"라며 "2023년부터 시행된 비급여 보고제도 역시 2020년 국회에서 법 통과 이후 의료계의 반대로 정책 집행이 2년이나 지연"되는 등 "여야 합의로 국회의 정상적 절차를 거친 정책임에도, 의사단체가 반대하면 정책 추진이 지연되거나 시작도 못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고 밝혔다. 

 

이어 경실련은 "불법 행동으로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불편을 초래한 의료계는 사태 파악도 못하고 총선 결과를 악용"하고 있다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의사의 본분은 뒷전인 채 오직 특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입장을 관철하려는 유아독존적 사고의 극치"라고 분개했다. 

또 "대화 주체로서 사회적 갈등 해소에 나서야 할 의료계는 선거 전에는 증원 규모 조정도 가능하다더니 여당의 선거 참패를 계기로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고 "사직 전공의들은 정부의 증원 정책으로 피해를 봤다며 복지부 차관을 직권 남용 등으로 고소한다"며 "이렇게 특권의식에 취해있는 의료계 행태를 국민이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 하나"고 탄식했다.

경실련은 "의대 증원은 의사 집단행동으로 한 차례 중단됐던 사안"이라며 "더는 정부가 의료계에 휘둘려서 정책 집행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아울러 경실련은 정부도 이 사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무엇보다 가장 큰 실책은 법적 근거도 없고 비민주적이며 폐쇄적인 의․정 양자 간 협의체 구조를 2년간이나 지속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2025년 입시부터 증원된 의대 입학정원을 모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지 않다"며 "윤석열 정부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선거로 주춤했던 의대 증원 추진을 조속히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택우 의협 비대위원장과 임현택 의협 차기 회장 당선인이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열린 브리핑 도중에 포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쟁·능력주의·공정 '야만의 트라이앵글' 깨야 한국의 미래가 있다"

[프레시안 books] 김누리 <경쟁교육은 야만이다>

전홍기혜 기자  |  기사입력 2024.04.07. 05:07:39 최종수정 2024.04.07. 12:07:46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등을 통해 '한국형 불행'의 근원을 제시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김누리 중앙대 교수의 신간 제목이다.

경쟁 교육은 야만…오만한 엘리트와 열등감을 내면화한 대중을 양산한다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OECD 국가 중 꼴찌(2021년), 청소년 자살율 1위 등 한국의 극심한 경쟁교육의 폐해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만 너무 과한 표현이 아니냐는 지적에 김누리 교수는 2일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제 표현이 아니고 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명이라고 평가 받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입니다. 이는 독일 68세대가 교육 개혁을 추진할 때 가장 중요한 모토였습니다. 독일에서는 당시 히틀러의 역사, 아우슈비츠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파시즘적 세계관의 핵심은 첫째, 경쟁, 둘째 우열, 셋째 지배입니다. 경쟁을 통해 우월한 자가 지배를 하는 게 자연의 질서이자 인간사회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한국 교육을 보세요. 경쟁, 우열, 지배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12년 동안의 한국 교육을 통해 성숙한 민주 시민이 길러질 수 있을까요? 위험한 파시스트를 길러내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라고 봐요." 

'학벌'이 새로운 신분, 계급, 특권을 만드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은 12년간의 치열하고 소모적인 학습노동에 시달리며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나뉜다. 미성숙하고 오만한 엘리트와 열등감과 모멸감을 내면화한 대중들을 양산하는 파시즘적 교육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리기 힘들 것이라고 김 교수는 단언한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 ⓒ프레시안(김봉규)

경쟁교육은 아이들을 무능하게 만들어…한국 대학은 너무 너절하게 죽었다 

김 교수는 경쟁교육이 이처럼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고도의 능력마저 이제 기계가 대체하는 것입니다. 최근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에 어떤 교육을 해야 하나? 너무 명확하죠. 기계로는 대체할 수 없는 능력,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첫째 사유하는 능력, 둘째 창조하는 능력, 셋째 비판하는 능력, 넷째 공감하는 능력이에요. 저는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4가지 능력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 줄 세우기를 합니다. 경쟁 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비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무능하게 한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서 암기를 통해 등수를 매겨야 하는 이유는 대학 입시 때문이다. 그러나 살인적인 경쟁을 뚫고 들어간 대학은 과거와 달리 '비판적 지식인을 양성하는 고등 교육 기관'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이 대학까지 소유하게 되면서 완전히 '탈정치화된 대학'의 현재 모습에 김 교수는 "대학이 죽어도 너무 너절하게 죽었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대학이 자본의 노예가 된 현실은 대학 캠퍼스의 모습을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연세대에서 청소 노동자들, 경비 노동자들이 시위를 한다고 학생들이 고발하고 민사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이것 자체가 한국 교육이 얼마나 막장이 되었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독일을 방문해 대학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학생들이 끊임없이 정치, 사회적 문제와 관련해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나눠줍니다. 지금 한국 대학 캠퍼스에 넘쳐나는 유인물들은 오로지 취업 정보 뿐입니다." 

경쟁, 능력주의, 공정…야만의 트라이앵글 

 

경쟁교육이 문제라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으면서도 왜 우리는 바꾸지 못할까? 김 교수는 "경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테리 이글턴 옥스퍼드대 교수는 이데올로기 연구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불행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일에 대한 탐구’라고 했어요. 저는 이 말이 정곡을 찌른다고 봅니다. 한국인들은 지금 자신의 불행에 스스로를 내던져요. 경쟁 이데올로기 때문입니다. 경쟁의 ‘결과’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되고, 경쟁의 ‘과정’은 공정 이데올로기에 의해 합리화됩니다. 경쟁, 능력주의, 공정 이데올로기가 강고한 삼각체제를 이루고 있어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한국 사회를 이런 야만사회로 만들어놓은 근원적 뿌리입니다. 저는 이를 책에서 '야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대학 입시·서열화·등록금 폐지, 불가능하다고? 독일과 프랑스를 보라 

경쟁교육을 통해 불행을 내면화한 아이들이 과연 어른이 되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이들이 타인의 행복을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이라는 현상은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이기도 하다.

살인적인 경쟁 교육을 바로잡기 위해선 ‘개혁’으로는 부족하고 ‘혁명’이 필요하다는 김 교수는 대학 입시 폐지, 대학 서열화 폐지, 대학 등록금 폐지 등을 나아갈 방향으로 제시했다. 

"한국에서 대학 입학시험을 없애자고 하면 이게 대체 가능하냐고 묻는데, 유럽에서 대학 입학 시험을 보는 나라가 어디 있나요? 독일은 '아비투어'라고 고등학교 졸업 시험만 보고, 이 시험에 90% 이상이 붙습니다. 합격하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원하는 때에 갈 수 있어요. 심지어 30, 40대에 대학에 가는 사람도 많아요. 물론 의학과나 심리학과 등 학생들이 몰리는 과는 정원제한을 둡니다. 이런 경우에도 과거엔 추첨으로 선발하다가 최근엔 아비투어 성적을 제한적으로 반영하기도 합니다. 

독일만이 아니라 프랑스도 '바칼로레아'라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이자 대학 입학 자격시험만 봅니다. 독일처럼 대학 서열화도 없습니다. 우리처럼 대학 서열화가 있는 나라는 주로 영미권 국가들이지요.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모델은 국가가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고등교육까지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게 성숙한 사회라는 인식을 공유합니다. 그러니까 대학을 나왔다, 어느 대학을 나왔다가 자기 우월감이나 열등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김 교수는 교사들의 정치 참여 금지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법 개정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OECD 38개국 중에서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지금 여의도에 교사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습니다. 과거의 교사가 두 분 있을 뿐이지요. 지난번 독일 의회는 640명 의원 중 81명이 전현직 교사였습니다. 독일 의회를 구성하는 직업군 가운데 교사는 두 번째로 많은 의원을 배출한 직업군입니다. 한국은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1963년부터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주 정부에서 당연히 이걸 복원시켰어야죠." 

'이미 경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한국에서 교육 혁명이 가능한 일이냐고 묻자 김 교수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적은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무력감입니다.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이 있어야 그쪽으로 가죠. 제가 이런 이상적인 방향과 사례를 계속해서 얘기하니까, 이제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으면서도 서서히 새로운 교육을 꿈꾸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김누리 지음, 해냄 펴냄. ⓒ해냄

- <무제목국경도> 이조선 영조 26 년 편찬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

소장: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고지도/ 제목- 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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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7 . 2

  
  최성재
  
  
   [신라의 정통성에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때는 언제인가]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한국의 온갖 문제점을 찾아내려는 환원주의자들이 좌우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사대주의와 패배주의와 일제식민지배와 분단과 군사독재를 몽땅 신라에게 돌리고, 고구려를 숭상하며 중국과 일본을 압도하는 동이족의 대제국을 꿈꾼다. 그러면서 스스로 국가의 통일을 위해 하는 일은 16살 관창이 한 것의 100분의 1도 않는다. 말만 우렁찰 뿐이다. 혀만 날카로울 뿐이다.
  
   한국인 스스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욕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의 일이다. 불과 100년도 안 된 일이다.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따른 것이다. 일제하에서 그것은 한국인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주기도 했지만, 해방 후에는 미래에 대한 환상과 과거에 대한 환멸을 심어 주는 역할이 커서 이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이 한국에는 재야의 민족사관으로, 북한에는 주체사관으로 계승되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남북 국수주의자들의 의기투합]
  
   제일 큰 문제는 한국의 자칭 민주세력 중 일부가 좌경화되면서 김일성의 가문을 회칠하기 위해 만든 주체사관을 맹종하는 것이다. 북한이 한국에 대해 허무맹랑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단지 지역적 위치가 옛 고조선과 고구려 땅의 일부임을 근거로 터무니없이 신라를 욕하고 고조선과 고구려를 높이 받드는 것에 엔돌핀이 솟아나서, 그들은 김일성의 독립투쟁과 친일청산, 평등 사회 구현 등을 곧이곧대로 믿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정통성과 업적을 매질하고 짓밟는 데 무한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김구와 장준하를 신처럼 떠받들며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통성과 업적을 찬양하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 이들 자칭 남북의 ‘정통’ 민족세력들은 외세를 배제하고 내부의 사대주의자와 수구보수세력을 거꾸러뜨리고 남북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고구려는 신라에 통합되어 오늘에 이름]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제멋대로 역사를 고쳐 쓰는 지극히 유치한 수작들이다. 고구려는 70년에 걸쳐서 400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두 제국 수와 당을 상대로 20세기의 두 세계대전에 못지 않게 큰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자국만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도 지켜 주었지만, 마침내 힘이 고갈되어 멸망했다. 역사적 임무를 충분히 다한 것이다. 고구려는 한민족의 긍지이다.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외교 실패였다. 이 외교실패는 오늘날 북한이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이 어리석은 행렬에 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이 구국의 일념으로 가담하고 있다.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당으로 원군을 청하기 전에 642년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연개소문은 신라의 생명줄인 한강유역을 되돌려 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로 보기 좋게 거절하고 왕족인 그를 아예 감금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춘추는 거짓 약속을 하고 풀려난 다음에 고구려의 갖은 방해책동에도 불구하고 직접 서해를 건너가 당의 군사를 빌려 올 수밖에 없었다. 당도 645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참담하게 패한 후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에 신라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환단고기에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삼한일체론을 들먹이며 고구려가 수나라와 싸울 때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주고 기다렸다가 중원의 당을 빼앗아 분리지배하자는 제의를 했다고 씌어 있다는데, 이건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허구이다. 왜냐하면 김춘추가 찾아갔을 때 수나라는 망한 지 28년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강한 연개소문은 세계와 미래를 보는 눈이 흐릿했던 데다가 강국 고구려에 대한 자만 때문에 고구려를 망국의 길로 이끌었고, 약한 김춘추는 세계정세와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밝았던 데다가 신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겸손과 마음속으로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히지 않는 자존심과 호랑이 굴도 맨몸으로 찾아가는 용기 때문에 삼한일통의 기틀을 마련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아들들간의 내분으로 너무도 우습게 망한 후에 그 지배족은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한족에 흡수되거나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귀순했다. 그리고 일부는 발해를 세웠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대거 고구려 후손은 고려로 귀순했지만, 나머지는 요와 금이 세워지면서 우리 역사에서 멀어졌다. 다시 말해서 발해까지는 만주가 우리 역사의 현장이었지만, 발해의 멸망 이후는 고려 땅에서만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세 나라 후손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단일민족을 형성했기 때문에, 만주는 싫든 좋든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만주가 우리 땅이라면 일본도 우리 땅인가]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삼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게 일본이지만, 중국의 재통일과 신라의 삼국통일,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일본도 독립왕국을 세웠기 때문에, 만주가 우리 역사에서 떨어져 나갔듯이 일본도 우리 역사에서 떨어져나갔다. 고구려를 생각하며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이불 속에서 고함을 지르고 싶으면, 그 기개 그대로 일본도 우리 땅이라고 현해탄을 바라보고 소리소리 질러 보라. 지나가던 개도 단박에 정신병자임을 알아보고 비웃을 것이다.
  
   [역사 결정론의 함정]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역사 가정의 환타지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한 번의 역사적 사건으로 그 후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역사 결정론의 함정에 스스로 빠진 자들이다.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그 후 우리나라는 중국과 늘 맞먹거나 중국을 압도하거나 중국을 종의 나라로 한 1000년 부려먹었을 거라는 달콤한 환상에 젖는다. 돈키호테 수준의 코미디다.
  
   그러면, 대제국 로마는 왜 멸망했으며, 멸망한 후 무려 1400년이 되어 이태리는 겨우 통일했는데, 그것도 기껏 로마제국의 광대한 영토는 어디 두고 이태리 반도만 간신히 차지했을까.
  
   그 강대하던 당 나라는 왜 망했으며, 송은 왜 요와 금과 원에 시달리다가 끝내 멸망하고 중원을 원이 차지했을까. 원은 왜 100여년 만에 망했을까. 원을 물리친 명은 왜 옛날에 고구려의 한 피지배족에 불과했던 만주족에게 멸망했을까. 그 어떤 나라든 흥망성쇠를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라는 600년 내전을 종식시켰다]
  
   신라는 엄청나게 큰 일을 했다. 뛰어난 군사외교적인 안목으로 세계 최강의 당과 손을 잡아 사비성과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본색을 드러내는 당과 무려 8년에 걸친 국가 총력전으로 중국인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쫓아냈다. 당이 물러난 것은 토번과의 전쟁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 태종이 내전에 시달리느라 싸움 한 번 못하고 돌궐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에, 마침내 힘을 길러 북쪽과 서쪽의 오랑캐를 완전히 섬멸해 버렸기 때문에 고구려 외에는 당을 위협할 나라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국경 지대를 노략질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신라가 한 일 중 가장 빛나는 것은 600년 내전 종식이다. 단군의 자손끼리 600년에 걸쳐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피를 흘리던 전쟁을, 동족상잔을 후삼국 시대와 6󈸩 동란 때 외에는 아예 뿌리를 뽑아 버린 나라가 신라였던 것이다. 1300년 평화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한민족은 위대한 신라 덕분에 외국과의 전쟁 외에는 전쟁이란 것을 모르고 살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 어떤 민족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의 민족으로 거듭났다. 국경 지대의 약탈을 빼면, 외국과도 큰 전쟁은 통일 신라 시대 이후에는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통일신라시대는 당을 내쫓은 후 국가간의 전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큰 전쟁은 고려 때에 제일 많았다. 요나 원과 큰 전쟁을 치렀고 왜구의 잦은 약탈에 시달렸다. 그러나 원과의 전쟁 외에는 모조리 승리했기 때문에 고려는 민족적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조선도 500년 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잇달아 겪은 16세기 말 17세기 초 외에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신라가 일찌감치 통일 국가를 이룬 덕분이다. 일본시대에 한국인을 열등감에 시달리게 하기 위해 일본의 역사가들이 과장해서 935회니 뭐니 하면서 국경에서 말 한 마리 잃은 것까지 다 포함하여 전쟁 횟수를 엄청 늘려서 마치 우리나라가 수천 년 동안 이민족에게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렸던 것처럼 세뇌했는데, 아직도 이를 철석같이 믿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김을 자랑삼는 한국인이 너무도 많다. 그러면서 ‘한민족이 최고야’를 되뇐다. 중증의 도착 증세다.
  
   [만주를 되찾지 못한 것은 고려와 조선과 북한의 책임]
  
   만주를 되찾지 못한 것은 신라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고려의 책임이요, 조선의 책임이다. 왜 그 비난을 신라가 덮어써야 하는가. 신라는 원래 땅을 3배 이상 늘렸다. 그러나 고려는 신라가 물려준 땅의 10분의 1도 넓히지 못했다. 조선도 세종대왕 때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한 이후 땅을 한 뼘도 넓히지 못했다. 한국과 북한은 더하다. 순전히 미국의 힘으로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났지만, 초등학교만 나와도 너도나도 입만 열면 신라를 욕하지만, 간척한 것 외에는 땅을 넓힌 것도 없고 통일도 우리 힘으로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평화통일하는 것은 백년하청이다. 결국 통일도 미국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신라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북한은 코미디 공화국-그러나 아무도 웃지 못한다]
  
   북한은 웃겨도 보통 웃기는 게 아니다. 협동농장만 해체하면 당장 한 명도 안 굶겨 죽일 수 있고, 필리핀이나 인도나 멕시코처럼 북한 주민을 아무런 간섭하지 말고 외국으로 내보내 달러를 벌어서 조국으로 송금하게만 해도 중국 부럽지 않게 살 수 있고, 원자탄 개발하는 돈과 김일성 동상 만들고 관리하는 돈만 풀어도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오로지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구려 정통성’이니, ‘주체의 나라’라느니, ‘지상낙원’이라니, ‘우리는 행복해요’라느니, 하면서 적화통일을 달성하여 너무너무 잘 사는 한국을 집어삼킬 궁리만 하고 있다.
  
   한국의 이승만이 미군의 대위로 집권했다고 해 보자. 한국인들과 북한 공산당은 얼마나 길길이 뛸 것인가. 이승만이 김일성보다 독립운동을 100배나 했지만,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간 데 없고 아무리 내세워 봤자, 90% 국내 갑산파의 도움으로 함경도의 벽지 보천보에서 꾸벅꾸벅 졸던 일본 순사 몇 명 죽인 것을 마치 100만 일본대군을 물리친 듯이 ‘피바다’ 가극을 만들고 김일성 혁명역사를 날조하여 독립운동을 저 혼자 다한 듯이 60년을 한결같이 북한주민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친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뼛속까지 절은 사대주의자]
  
   김일성만큼 사대주의에 뼛속까지 절은 자가 없다. 그런 자일수록 주체사상을 내세운다. 일본헌병의 자손이 친일파 척결에 앞장서서 독립군의 후손인 척하는 거나 마찬가지 심리이다. 소련군에 빌붙어 정권을 잡았을 뿐 아니라 그는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애걸하여 그들의 무기와 작전으로 소련의 힘을 빌려 인민군을 창설하여 동족상잔을 일으켰다. 이런 자가 신라가 당의 힘을 빌려 통일한 것이 사대주의라고 이를 바득바득 간다. 한국의 지식인 중에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이런 자들이 득실거린다. 군대와 외교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북한이 고구려를 조금이라도 닮고 싶으면 한국이 아니라 만주로 쳐들어가야 한다. 한국을 삼키기 위한 속셈을 감추기 위해 마치 미국과 전쟁을 벌일 듯이 60년 동안 줄기차게 해 대는 헛소리는 제발 그만하고 만주로 쳐들어가서 간도와 백두산이라도 찾아오면, 한국도 기꺼이 도와 줄 것이다. 중국을 상대로 전쟁한다는 것은 이불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못한다. 철두철미한 사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온상은 북한]
  
   졸고 ‘한국의 일제청산과 북한의 일제계승’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친일파청산도 겉과 속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한국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친일청산을 확실하게 했다. 반민특위 유산이라는 것 하나만 갖고, 한국의 정통성을 짓씹고 북한의 정통성을 흠모하는 자들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공부는 죽으라고 안 하고 누가 일러 준 정답만 달달 외면서 귀를 틀어막고 눈을 부라리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으니까.
  
   [정통성은 유교의 잔재]
  
   정통성에 목을 매는 것은 유교 문화의 잔재이다. 자신과 비슷한 무리가 정치든 학문이든 언론이든 권력을 잡기 위해 내세우는 가면일 따름이다. 실은 한국이나 북한이나 권력이 곧 정통성이다. 권력만 잡으면 제멋대로 스스로 정통성을 독점한다.
  
   공자도 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를 멸망시킨 탕왕과 은을 멸망시킨 주공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것은 잘못이나 그 후에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 예를 확립한 것은 잘못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백성을 버린 군주는 하늘이 버린다고 보고, 천명이 바뀌었다고 하여 탕왕과 주공을 정당화하고 그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도 그 이상은 내다보지 못했다. 춘추시대는 다시 주 왕실을 중심으로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그것이 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후에 맹자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과감히 혁명을 옹호했다. 그는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예가 필요함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그 정도에 그쳤다.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무기체제의 발달, 그리고 인구의 증가 등으로 왕도정치만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가 없었다. 제자백가가 다 필요했다. 특히 중원의 400년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군대와 새 시대에 맞는 행정체계를 구축할 법가의 사상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한의 정통성: 공자의 덕치와 진시황의 법치가 결합하다]
  
   마침내 천하의 인재를 우대하고 이상적 덕치보다 현실적 법치를 앞세운 진이 중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법이 만능이 아니었다. 유방이 세운 한이 비로소 400년 평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하은주의 제도인 봉건제에서 예로 상징되는 덕치에 곧 공자와 맹자의 덕치에 진시황의 군현제에서 실현된 법치를 합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봉건제와 군현제를 합친 군국제이다.
  
   비로소 정통성 문제가 일단락된 것이다. 천하대란을 종식시키고 백성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하고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게 한 군주가 곧 정통성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피를 이어받은 자가 곧 정통성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도 폭군이나 암군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고 천하대란이 일어나면, 정통성은 또 오리무중으로 빠져든다.
  
   [오랑캐에게 400년이나 지배당한 한족의 정통성 문제]
  
   중국인들이 그 후에도 정통성 문제로 정신적 공황을 겪은 적이 두 번이나 있다. 한번은 몽골족의 원이고 또 한 번은 만주족의 청이다. 도합 400년을 한족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도대체 누가 정통성을 주장할 것인가. 이 때 나온 것이 송의 성리학이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이었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고도 송의 성리학자는 끝내 정통성은 한족에게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송은 물론 당이나 한보다 위대한 원의 치세를, 징기스칸이 자신도 법의 아래에 있다고 함으로써 오늘날의 중국 못지 않은 법치를 확립한 원의 치세를, 보통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만 해도 2만개가 넘었던 근대국가와 가장 흡사한 원의 빛나는 치세를, 그들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한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착오적인 성리학적 정통론은 원이 멸망한 후 명에서도 부활되었다. 그런데 그 명이 가렴주구로 백성을 개돼지 취급하다가 또 한 줌밖에 안 되는 만주족에게 무릎을 꿇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정통성이 있는가. 모택동에 의해서 한족이 고구려가 멸망한 후 중국과는 전혀 상관없었던 만주를, 당이 신라와 힘을 합쳐 평양을 함락한 후 안동도호부니 뭐니 하면서 잠시 거들먹거렸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과 힘을 합쳐 악착같이 덤벼드는 신라한테 8년간 시달리다가 끝내 쫓겨나고 당과 신라가 싸우는 사이에 힘을 기른 대조영이 당에게 반기를 들고 발해를 세우면서, 겨우 요서 땅을 차지했을 뿐 중국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만주를, 만주족에게 약 300년간 지배당한 덕분에, 인구가 너무 적었던 만주족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만주를 공짜로 얻어서 중국을 통일한 후에 중국은 또다시 정통성 문제에 봉착했다.
  
   [중국의 모든 통일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한 중국]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봉건귀족을 물리치고 공산당이 외세를 몰아내고 통일했기 때문에 공산당의 최고 우두머리가 당연히 정통성을 갖는 것이었다. 이전의 왕조와 다른 것은 세습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산당 안에서 지도자가 나오면 된다. 그러면 원과 청의 정통성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도 한당송명과 똑같이 정통성을 갖는다. 통일왕조는 모조리 정통성을 갖는다. 공산당보다는 한 단계 아래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 역사의 많은 부분과 중국의 많은 지역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서북공정이니 동북공정이니 하면서, 역사에 등장하는 중국 주변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중국에 편입시킨다. 고구려까지 자기 나라요, 자기 역사라고 주장한다. 100년 앞을 내다보고 북한과 한국까지 변방의 역사로 집어넣을 속셈이다. 중화주의가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두고 볼 일이다.
  
   이처럼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특히 등소평 이후에 전통을 정통성 못지 않게 중시하고 있다. 모택동 치세에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다가 국가가 거덜난 후에 크게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한민족의 정통성]
  
   중국에 비하면 한국의 정통성은 아주 단순하다. 35년간의 일제시대 외에는 같은 민족끼리의 지배와 피지배였으니까. 고려 말기에도 우리나라는 원의 간접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왕조도 겨우 신라, 고려, 조선 셋밖에 없다. 문제는 정통성 에 대해 처음부터 시대착오적이었던 성리학을 조선시대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데 있다. 융통성이 전혀 없다. 그것은 현대의 남북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정권 잡은 자가 장땡이다.
  
   [정통성의 핵심은 국민]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른 나라나 정통성의 해답은 이미 5000년 전에 답이 나왔다. 백성을, 국민을 잘 살게 하는 정권이 정통성이 있다. 정치는 결과지 동기가 아니다. 말로는 국민을 다 같이 잘 살게 한다고 하고선 국민을 80% 거지, 10% 죄수, 10% 도둑으로 만든 정권은 정통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북한은 북한주민을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으니까, 전세계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5000년 역사상 정통성이 가장 적은 정권이다. 대신에 한국은 해방 당시 아프리카의 가장 못 살던 나라보다 못 살았던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굴지의 민주 국가로 끌어올렸으므로 대부분의 역대 국가 원수는 정통성이 있다. 있어도 대단히 많이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저 혼자 잘난척하는 정권이 더 문제다. 경제든 정치든 이전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루면 누구나 박수를 칠 것인데, 하라는 일은 않고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는 일에, 잘난 남을 헐뜯는 일에, 앙심을 품은 과거사 캐는 일에만 열중하고, 주자학에 정신적 노예가 되어, 동족을 학살하고 굶겨 죽이고 개돼지 취급하는 데 크나큰 희열을 느끼는 북한의 정권에 정통성 콤플렉스를 갖는 정권이 가장 큰 문제다.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역사는 이들에게서 정통성을 완전히 박탈할지 모른다. 예나 제나 정통성의 기준은 안보와 경제 곧 부국강병이기 때문이다.
  
   (2005. 7. 2.)

[단독] 미 국무부, 제주4·3에 첫 입장…“비극 잊으면 안 돼”

한겨레 질의에 사건 76년 만에 입장 밝혀

기자허호준
  • 수정 2024-04-02 20:09
  • 등록 2024-04-02 16:24
1948년 5월15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미군 고문관 대위가 경비대 장교들과 작전 계획을 논의하는 모습이다. 미국국립기록관리청 보관 사진

미 국무부가 제주4·3에 대해 “비극적인 사건”으로 “잊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제주4·3 당시 한반도 남쪽을 군정 통치(1945년 9월~1948년 8월)했던 미국은 사건의 발발과 확산에 직간접적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도 지금껏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왔다.

미 국무부는 최근 ‘제주4·3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이냐’는 한겨레의 이메일 질의에 “1948년의 제주사건은 참혹한 비극(terrible tragedy)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답신을 지난달 27일 보내왔다. 미 국무부는 답신에서 “미국은 민주적 가치와 인권 증진에 헌신하는 가까운 동맹국으로서, 앞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한국의 결의를 공유한다”고 덧붙였다.

제주4·3에 대한 입장을 묻는 한겨레의 이메일에 미 국무부가 지난달 27일 보내온 답신

미국 정부가 제주4·3과 관련해 문서로 입장을 밝힌 것은 사건 발생 76년 만에 처음이다. 그동안 현대사 연구자들과 제주 지역사회는 4·3 문제 해결과 관련해 남아 있는 과제 중 하나는 ‘미국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라고 지적해왔다.

 

실제 제주4·3 시기 미군정이나 군사고문단, 주한미국대사관이 작성한 각종 문서는 미국이 4·3 진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정부가 2003년 10월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사건이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고 나와 있다.

국내에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4·3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1988년 무렵부터 미국의 인정과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해왔다. 70주년이었던 2018년 10월에는 제주4·3연구소와 제주4·3희생자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이 4·3에 대해 미국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10만9996명의 서명을 받아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달했다. 하지만 미대사관 쪽은 최근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군정 당국은 4·3 무장봉기 직후인 1948년 4월 중·하순 미군정장관 딘 소장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진압을 명령하고, 같은 해 5월에는 미 보병 6사단 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브라운 대령은 당시 “나는 사건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한국의 군·경을 지휘했고, 그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5천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무차별 검거됐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사고문단을 통해 토벌작전을 지원하고,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지속해서 제주도 사태와 관련한 진전 상황을 보고받았다.

1948년 5월 제주도 최고 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기자회견에서 “사건 원인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언급한 &lt;조선중앙일보&gt;(1948년 6월8일)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한자의 탈을 쓴 일본어’ 등 방송·법률용어 순화 힘쓴 박갑수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정충신 기자입력 2024. 3. 30. 11:12
 
2015년 세종문화상 수상 당시의 박갑수 서울대 명예교수. 문화체육관관부 제공

경범죄처벌법 제1조 14 ‘음용(飮用)에 공(供)하는 정수(淨水)를 오예(汚濊)하거나 또는 그 사용을 방해하는 자’ → ‘사람이 마시는 물을 더럽히거나 그 사용을 방해한 사람’(1983년 개정)

민사소송법 198조(재판의 탈루) ‘법원이 청구의 일부에 대하여 재판을 유탈(遺脫)한 때에는 소송은 그 청구의 부분이 계속(繼續)하여 그 법원에 계속(係屬)한다.’→212조(재판의 누락) ‘법원이 청구의 일부에 대하여 재판을 누락한 경우에 그 청구 부분에 대하여는 그 법원이 계속하여 재판한다.’(2002년 개정)」

 

알아듣기 어려운 경범죄처벌법·민사소송법 표현을 고치는 등 평생 법률·방송용어 순화에 애쓴 남천(南川) 박갑수(朴甲洙) 서울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가 지난달 23일 오전 6시 45분경 서울성모병원에서 만 8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유족의 네이버 블로그 글(‘소천을 알립니다’)에 따르면 "고인은 1년반 전에 낙상한 뒤 거동이 불편하던 차에 2월 22일 갑자기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가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영면"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본인의 소천 사실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한 달 뒤에 사회에 알리기로 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작성해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유족은 지난 26일에야 블로그에 별세 사실을 공개하고, 지인들이 추모 글을 쓸 수 있는 방명록을 마련했다.

1934년 8월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청주고, 서울대 사범대학, 동 대학원(국문학과)을 졸업했다. 1958∼1967년 이화여고와 서울사대부고 교사로 일하다 1968년 청주여대 조교수를 거쳐 1969년부터 서울대 국어교육학과에서 가르쳤다.

1980년 법제처 정책자문위원 제의를 받고 경범죄처벌법 조문을 쉬운 말로 바꾸는 데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법제처가 ‘법률 용어 순화집’ 6권을 펴내는 데 모두 관여했다. 1997년 대법원의 의뢰로 민사소송법 한글화 작업에 착수, 다음해 ‘공무소(公務所)’는 ‘공공기관’, ‘게기(揭記)하다’는 ‘규정하다’, ‘계쟁물(係爭物)’은 ‘다툼의 대상’, ‘해태(懈怠)하다’는 ‘게을리하다’, ‘수계(受繼)하다’는 ‘이어받다’로 각각 바꾸는 내용의 순화안을 제출했고, 이중 일부가 반영됐다.

1972년 MBC에서 ‘이것이 바른말’을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1985∼1987년 KBS 2TV ‘바르고 고운 말’에 출연하는 등 라디오와 TV에서 수십년간 우리말을 가르쳤고, 스포츠 중계나 광고의 외래어 남용 문제점을 지적했다. 1985년 KBS 시청자 불만처리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신문·잡지 등에도 ‘바른 말 고운 말’(동아일보), ‘우리말 산책’(중앙일보) 등 연재했다. 동아일보 연재를 보면 1994년 5월 12일자에선 스승의 날 노랫말 중 ‘참되거라 바르거라’는 ‘참되고 바르게 돼라’, ‘고마와라’는 ‘고마워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같은 해 7월7일자에선 방송 사극 ‘한명회’에 나온 ‘민초(民草)’라는 말은 한자의 탈을 쓴 일본말이어서, 조선조 세조 때에는 쓰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8월 18일자에선 ‘쓰레기 분리수거해 달라’는 어색한 표현이라며 ‘분리는 시민이, 수거는 당국이’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초 외에 출영(出迎)·하주(荷主)·입장(立場)·명도(明渡) 등이 모두 ‘한자의 탈을 쓴 일본말’이라고 한 것도 고인이었다.

 

서울대 사대에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지도자과정’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1995∼1996년 한국어국제화추진협의회 공동대표, 1996년 회장을 맡았고, 2001년 한국어세계화재단 이사로 활동하는 등 한국어 세계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중고교 한문·문학 등 교과서 집필에도 다년간 참여했다. 학문적으로는 문체론에 관심을 기울여 ‘문체론의 이론과 실제’(1977), ‘국어문체론’(1994), ‘현대문학의 문체와 표현’(1998) 등을 펴냈다. 1988년 도쿄대 도서관에서 춘향전 필사본을 찾아냈다.

국민훈장 모란장(1999), 세종문화상(2015), 대한민국 세계화 봉사대상(2019)을 받았다.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한 뒤 분당 봉안당 홈에 모셨다.

정충신 선임기자

chung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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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하다 붙잡힌 미 폭격기 승무원들은 생체해부 당했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입력 2024. 3. 30. 11:10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5]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⑭

미국 포로가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죽음을 맞이했는가는 논란거리다. 일본이 저질렀던 생체실험의 희생자들 가운데 조선 독립운동가와 러시아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 731부대는 만주 선양(瀋陽, 奉天)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2000명가량의 포로 가운데 일부에게 '세균무기에 백인 특유의 면역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생체실험을 했다(연재 62 참조).

여기까지는 사실로 확인된다. 하지만 그 생체실험으로 연합군 포로가 숨졌는지는 불확실하다. 731부대 본부에서처럼 '마루타'로 여러 독성 실험을 한 뒤 수술 칼로 몸을 가르는 끔찍스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군이 강한 적개심으로 연합군 포로들을 마구 다뤘고, 731부대가 세균무기 개발에 미쳐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생체 해부가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만주 포로수용소는 의혹으로 남았지만, 패전 무렵 일본 본토에서 미군 포로들을 마구 죽이고, 심지어는 생체 해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은 도쿄 대공습(1945년 3월10일)을 비롯해, 전쟁 후반부에 잇달았던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로 말미암아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됐고, 포로로 잡힌 이들에 대한 보복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공습 보복으로 8.15 당일에도 미군 처형

[1945년 6월19일 공습으로 인한 참담한 피해 상황은 서부군사령부 안에 구금된 미군 전폭기 탑승원에 대한 증오로 폭발했다. 공습 다음 날인 6월20일, 사령부의 검도(剣道) 유단자들이 사령부 뒤편의 후쿠오카 시립여자고등학교 교정에서 8명의 탑승원을 참살했다. 대낮에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참극이었다](東野利夫, <污名: 九大生体解剖事件の真相>, 文藝春秋, 1979, 67쪽).

윗글의 필자 도노 도시오(東野利夫)는 1945년 후쿠오카 규슈제국대 의과대학의 19살 신입생이었다. 밑에서 곧 살펴보겠지만, 그는 포로로 잡힌 미 B-29 폭격기 승무원 8명이 1945년 5월과 6월에 걸쳐 규슈제국대 의대 실습실에서 생체해부되는 참극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도노는 그 날의 끔찍했던 사건을 메모해 두었다가 훗날 <오명>(污名)이란 이름의 책을 펴냈다.

도노에 따르면, 그가 살던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한 큐슈지방에서는 1945년 초여름 포로로 잡힌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을 처형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도노가 두 눈으로 목격한 규슈제국대 의대에서의 생체해부 말고도 1945년 6월 29일에 8명(바로 위에 옮긴, 검도 유단자들의 척살 사건),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8월9일에 8명, 심지어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했던 8월15일 당일에도 17명의 처형이 이뤄졌다. 도노의 글을 보자.

[처형은 8월 9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흘 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진 날) 후쿠오카 남쪽 교외의 아부라야마 화장장 옆, 잡목림에서 행해졌다. 처형된 8명 모두 B-24 탑승원이었다. 또 패전한 8월 15일 오후 구금소에 남아 있던 탑승원 17명이 같은 곳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은 B-24 공습에 대한 보복이었다](東野利夫, 67쪽).

▲ 1945년 3월10일 공습 뒤의 도쿄 주거지역. 일본은 잇단 공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겪었기에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고, 포로를 마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石川光陽

잔혹한 르메이가 부른 적개심과 증오

이미 이 연재에서 살펴봤듯이,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은 엄청난 무차별 공습을 일본에 퍼부었다. 공습의 지휘관은 미 육군 제21폭격단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소장.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 또는 '도살자 해리스'(Butcher Harris)란 별명을 얻었던 아서 해리스(영국전략폭격기 사령관) 못지않은 호전적인 성격을 지녔다. 한국전쟁 때 미 전략폭격집단(SAC) 총사령관이었던 르메이는 "(한반도에서) 우리는 백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밖으로 내몰았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연재 40 참조).

 

르메이의 공습 명령에 따라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도쿄는 물론 나고야, 오사카, 고베, 요코하마를 비롯해, B-24 또는 B-29의 폭격을 받은 도시는 67개에 이르렀다. 일본이 얼마만큼 폭격으로 초토화됐는가'는 1945년 8월말 미군 선발대의 모습을 그린 존 다우어(MIT대 명예교수, 역사학)의 책 한 구절이 잘 말해준다.

[요코하마에 상륙해 도쿄로 가던 미군 부대원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도시의 폐허에 할 말을 잃거나 두 눈을 감아버렸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민음사, 2009, 46쪽).

전쟁 말기에 미군 폭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겨나자 일본인들의 적개심은 매우 컸다. 미군 포로를 때려죽이거나 생체해부하는 잔혹한 전쟁범죄 행위들이 일본 본토에서 벌어졌다. 규슈제국대학 의대 해부 실습실에서 B-29기 승무원 8명이 생체해부를 당하는 참극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다.

일본의 패망이 불을 보듯 뻔한 때였던 1945년 5월5일, 마리아나 기지로부터 출격해 폭격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B-29 폭격기 1대가 후쿠오카 남쪽 시골마을(오이타현 구즈미 남부의 산간 촌락)에 떨어졌다. 19살 난 학병이 몰던 전투기로부터 가미가제(神風)식 공격을 받고난 뒤였다. 탑승자 11명은 낙하산으로 탈출했지만, 현지인들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끝내 승무원 1명은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다른 1명은 자경단의 총에 맞아 숨졌다.

나머지 9명은 일본 육군 서부군사령부로 끌려갔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펼쳐질 경우, 후쿠오카를 비롯한 규슈 지역 방어가 서부군사령부에 맡겨진 임무였다. 그 무렵 일본군은 일반 연합군 포로와 B-시리즈(B-19, B-24, b-25, B-29) 전폭기 탑승원 포로를 따로 다루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이들을 데려가 심문했다. 군사 정보를 캐기 위해서였다.

도쿄 참모본부에서 내려온 비밀 전문이 미군 전폭기 포로들의 운명을 갈랐다. '포로로 잡힌 탑승원들 모두를 도쿄로 보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정보의 가치가 있는 기장만 도쿄로 보내라. 나머지는 군사령부에서 적절히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기장 마빈 왓킨스 중위만 도쿄로 압송돼 갔고 나머지 8명은 서부사령부 감방에 갇혔다.

"우릴 무차별 폭격했으니 죽어할 놈들이다"

서부군사령부(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육군 중장)는 군사재판을 거치지도 않고 B-29기 승무원들을 '전쟁범죄자'로 몰아 죽이려 했다. 그럴 경우 총살이 일반적인 처형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규슈의대 출신으로 서부군 사령부에 근무하던 코모리 타카시 군의관이 규슈제국대 의대 관계자들과 상의 끝에 '의학 쪽에서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5월17일부터 6월3일 사이에 B-29기 승무원들은 2명, 2명, 1명, 3명씩 나뉘어 모두 4회에 걸쳐 규슈제국대학 의대 해부 실습실로 끌려갔다. 건강진단을 받는 줄 알고 수술대에 누운 미군은 마취 주사를 맞은 뒤 깨어나지 못했다. 미군 포로를 의대까지 끌고 온 일본군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포로들의 피가 뽑혀 나가고 대체혈액 실험용 바닷물이 주사기 바늘을 통해 들어갔다(그 무렵 규슈제대 의사들은 대체혈액을 개발해달라는 일본 군부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마취로 의식을 잃은 미군 포로의 배에 해부칼이 닿았고, 폐와 심장, 간을 비롯한 신체기관이 하나둘씩 떼어내졌다. 그 끔찍한 생체실험과 해부에 앞장섰던 일본 의사는 규슈의대 출신의 코모리 군의와 이시야마 후쿠지로(石山福二郞) 교수, 2명이었다. 의대 신입생 도노는 수술대 바로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봤다. 4회에 걸친 생체해부 가운데 2회를 목격했다.

도노에 따르면, 해부를 이끌었던 이시야마는 '젊고 유능했던 의대교수'였다고 한다. 이시야마는 겁에 질린 채 해부실 안에 있던 제자들에게 "심장을 자르는 것도 꿰매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바로 가까이에서 생체해부를 지켜보던 일본군 장교는 이렇게 외쳤다. "이놈들은 우리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란 말이다."

(참고로, 일본 본토에서 미군 폭격기 승무원을 처형한 첫기록은 1942년 4월18일 둘리툴 편대의 일본 폭격 때였다. 제임스 둘리툴 중령이 이끈 16대의 B-25 경폭격기 편대가 도쿄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폭격했다. 연료 부족으로 중국의 일본군 점령지역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승무원 8명이 붙잡혔다. 그들은 일본으로 압송된 뒤 '민간 주거지역을 폭격한 전쟁범죄자'로 재판 받은 끝에 3명이 처형됐다.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의 보복으로 일본을 타격했다는 선전 효과를 내세웠고, 둘리툴 중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켰다.)

▲ 1945년 규슈제국대 의대 구내 실습실에서 생체해부로 죽은 미 B-29 폭격기 승무원들. 사진 속 11명 가운데 2명은 격추 당시에 죽고, 기장은 도쿄로 압송돼가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위키미디어

5명 교수형, 4명 종신형

의대 해부실에서 미군포로가 생체해부된 사건이 쉬쉬 하며 비밀에 붙여지긴 어려웠다. 도쿄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법무국 수사관들은 사라진 미군 승무원들의 행방을 캤다. 서부군사령부는 처음엔 "그들은 히로시마 포로수용소로 이송된 뒤 핵폭탄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둘러댔다. 어설픈 거짓말은 들통 나기 마련이었다. 5개월 동안의 조사 끝에 B-29기 승무원들이 의과대학에서 생체해부로 숨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관련자들은 붙잡혔고, 1948년 8월27일 요코하마(横浜)에서 군사재판이 열렸다. 전쟁범죄 현장을 목격했던 의대 신입생 도노도 GHQ의 조사를 받은 뒤 법정 증언대에 섰다. 주범 가운데 규슈대 출신 군의관 코모리는 이미 미군 공습으로 죽었고, 이시야마 후쿠지로 교수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요코하마로 이송되기 앞서 스스로 목을 맸다.

요코하마 군사재판 검찰관은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야만성'이라고 피고들을 꾸짖었다. 서부군사령부 소속 2명(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 사토 요시나오 대좌)과 규슈의대 교수진 3명(토리스 타로 조교수, 히라오 켄이치 조교수, 모리 요시오 강사)이 교수형을 받고 죽었다. 다른 4명에게 종신형이 내려졌지만, 이들은 1950년대에 일본 정부의 감형과 사면 조치로 모두 풀려났다.

의대 신입생으로 끔찍했던 범죄행위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도노는 산부인과 개업의로 지내면서 그날의 엄청난 충격을 잊지 못하고 내내 힘들게 살았다. 34년 뒤 <오명>(污名)이란 책 앞머리에 그는 '전쟁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적었다. 특히 '전쟁 말기의 분위기와 혼란은 의사들을 미치게 했다'고도 썼다(도노는 책을 낸 다음 해인 1980년, 도쿄로 끌려가는 바람에 혼자 살아남았던 기장 마빈 왓킨스를 찾아가 사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2021년 타계).

여기서 짚어볼 점 하나.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비롯된 피해를 떠올린다면, B-29 폭격기 승무원들의 생체해부가 이해나 용서가 될까. 어려운 일이다. 미군의 공습 그 자체가 전쟁범죄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했지만, 보복심리나 적개심이 그런 잔혹행위를 합리화할 수 없다. 어떤 그럴듯한 논리를 들이댄다 해도 마구잡이 포로 학살, 더구나 생체해부란 용서 받지 못할 전쟁범죄다.

전쟁범죄 반성 없는 일본의사회

이렇듯 전쟁의 광기 속에 인간성을 저버린 자들이 곳곳에서 피를 흩뿌리는 가운데 일본은 8.15 패망을 맞이했다. 일본 의사 모임인 일본의사회는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비롯해 지난날 일본 의사가 벌인 전쟁범죄에 대해 집단적으로 사과의 뜻을 나타냈을까.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규슈제국대학 의대에서 벌어진 미 B-29기 승무원 생체해부에 대해서 사죄와 더불어 용서를 빌었을까. 아니다. 침묵으로 지내왔다.

일본 의학계의 그런 분위기 아래 731부대 출신자들도 사죄와 용서를 빌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전쟁 중에 생체실험을 거듭하면서 얻어낸 자료를 바탕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따거나, 생체실험으로 갈고닦은 혈액의 동결·건조 기술로 혈액은행을 세워 한반도 전쟁특수를 틈타 떼돈을 벌기도 했다.

일본 의사 모두가 줄곧 과거사 문제에 나 몰라라 하며 파렴치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소수의 양심적인 의사는 '일본의 침략전쟁과 그 과정에서 저질렀던 비인도적 전쟁범죄를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왔다. '15년전쟁과 일본의학의료연구회' 소속인 다케우치 지이치, 하라 후미오 두 의사는 오사카 개업의 6200명이 모여 만든 오사카보험의협회 출신의 평화운동가들이다. 이 두 사람의 글은 일본의사회에 비판적이다.

[지금까지 일본의사회가 보여준 모습은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더구나 국가정책에 따라 일본군과 일본기업들이 강제동원한 '종군위안부'와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는 일본정부와 다를 바 없다. 이는 일본 각 지역의 의사회도 마찬가지다](15년전쟁과 일본의학의료연구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299쪽).

▲ 만주 하얼빈 남쪽 핑팡 옛 731부대 터에 자리한 ‘731부대 죄증진열관’.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이 ‘마루타’들을 생체실험한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김재명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

731부대 군의관들이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아 전쟁범죄 처벌을 비껴간 것과는 달리, 독일에선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으로 처벌이 있었다. 지난 연재 51과 52에서 살펴봤듯이, 1947년 8월19일 나치 의사들은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킨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로 처벌을 받았다(7명 교수형, 9명 장기 징역형).

731부대 일본 의사나 나치 의사가 저질렀던 생체실험은 끔찍한 전쟁범죄임에 틀림없다. 논란은 그 무렵의 국제사회에서 의사가 지켜야 할 윤리나 도덕적 기준이 제대로 마련돼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에서 나치 의사들은 '인체실험을 정당 또는 불법이라 가름하는 보편적 윤리기준이 국제사회에 세워져 있지 않다'면서 자신들의 행위는 '전시독일법에 따른 정당한 행위였다'고 우겼다.

이 재판의 검찰 쪽 의학 전문가로 미국의사협회에서 파견한 앤드류 아이비(1942-43년 미국생리학회 회장)는 반론을 폈다. "인체실험에 대한 규칙은 지금까지의 관습, 사회적 관례, 그리고 위료행위의 윤리에 의해 충분히 확립돼 왔다"고 반박했다. 의료윤리를 둘러싼 법정 공방 뒤 재판부는 나치 의사들의 뻔뻔한 주장을 일축하면서 나름의 의료윤리 기준을 판결문 뒤에 붙여 내놓았다. 그 문건은 앤드류 아이비가 중심이 돼 만든 것으로, 오늘날 흔히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이라 일컬어진다.

모두 10개 항목으로 이뤄진 이 강령은 의사가 어떤 의료윤리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첫머리는 인체실험 대상자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발적인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 강조했다. 731부대의 '마루타'처럼 특이급(特移扱)이란 형태로 강제로 끌고 와 '처음부터 죽음을 전제로 한 실험'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강령의 주요 내용을 보자.

[△연구는 불필요한 모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상해를 피해야 하고 △어떠한 실험도 사망이나 불구가 생길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는 경우엔 (연구진 자신도 피실험자로 참여하는 경우를 빼고는) 해선 안 되며 △(사람보다는) 동물 실험을 먼저 해야 하고 △상해와 장애 또는 죽음으로부터 피실험자를 지킬 수 있도록 적절한 준비와 설비가 마련돼야 하며 △실험을 계속하면 피실험자에게 상해나 불구, 또는 사망을 부른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으면 실험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일본 전쟁과의료윤리검증추진회, <731부대와 의사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4, 100-101쪽 참조).

이 강령에 비추어 731부대 의사들의 행태를 보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는 물으나 마나다. 그들의 악마적 행태는 너무나 뚜렷이 드러난다. 동물 실험을 건너뛰고 바로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생체 실험으로 죽게 했다. 한 마디로 731부대에선 뉘른베르크 강령 그 어느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피실험자를 온각 가학적인 방법으로 괴롭히다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든 731부대 의사들은 '조직적 전쟁범죄의 공범자'들이었다.

독일의 '어정쩡한 비(非)나치화'

독일의 경우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을 거치긴 했지만, 전쟁범죄자로 처벌된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 많던 나치 의사들은 법적 심판을 비껴갔다. 패전 뒤 독일에선 대학이든 병원이든 지난날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했던 나치당원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를테면 독일 쾰른에 가까운 작은 도시 본에서는 의사 112명 가운데 102명이 나치 당원이었다. 나치 전력을 문제 삼아 이들의 의사 면허를 빼앗는다면 의료체계가 무너질 테니, 탈(脫)나치화를 밀어붙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연재 33 참조).

그런 이유로 서독 초대총리 콘라드 아데나워가 이끌던 기독교민주연합(약칭 기민련, CDU) 정권은 적극적으로 탈나치화를 추진하지 않았다. 때마침 동서냉전의 바람이 불었다. 의료계 뿐 아니라 학계나 다른 분야에서도 탈나치는 멈췄다. 나치를 지지했던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교수들이 대학에 곧 복직했다. 이를 가리켜 탈나치화가 아닌, '어정쩡한 비(非)나치화'라 일컬어진다.

돌이켜 보면, 나치 독일정권 아래서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목소리를 낸 의사는 거의 없었다. 극히 소수의 의사만이 그들의 기독교적 양심 또는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소극적인 저항을 했을 뿐이다. 많은 의사들이 나치 정권의 잘못된 우생학 정책에 따라 장애인 단종수술이나 안락사, 강제수용소 학살을 실무적으로 거들었다. 패전 뒤 (소수이긴 했지만) 나치 히틀러 정권이 추진했던 제3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이들조차 있었다(이는 마치 일본의 극우들이 대동아공영권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 731부대가 1945년 8월 소련군을 피해 도망칠 무렵 폭약으로 파괴된 보일러실. 거대한 굴뚝 2개가 지난날의 전쟁범죄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김재명

전쟁범죄 책임 부인해온 독일 의사들

지난 주 글에서 소개한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평론가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가 쓴 책<戦争と罪責>(岩波書店, 1998)에는 패전 뒤 독일의 의사들이 지녔던 감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1946년 12월부터 1947년 8월에 걸쳐,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이 열릴 무렵, 그 재판의 성격을 독일 의사들에게 해설하기 위한 책자가 만들어졌다. <인간 경시의 독재>(Das Diktat der Menschenverachtung)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노다에 따르면, 그 책을 공동 편집한 알렉산더 미처리히와 프레트 밀케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의사들은 그들의 공격적인 진리 추구와 독재의 이데올로기가 교차하는 지점에 섰을 때, 처음으로 공인된 살육자이자 공적으로 임명된 고문관리가 되었다. 지난날의 끔찍한 행위가 지금 조용히 법정에서 밝혀지고 있다. 재판관의 판결이 어떤 것이든, 23명의 피고만을 죄인으로 보고 그들을 이상성격의 소유자로 보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죄를 끌어들여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것은, 제대로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 시대에 사악함이 승리했다고 해서, 우리 존재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노다 마사야키, <전쟁과 죄책>, 또다른우주, 2023, 131-132쪽).

위 글의 요점은 나치 정권의 전쟁범죄에 대해 독일 의사들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공범자로서의 집단적 책임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적) 죄를 자각한 상태에서 삶을 이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독의 많은 의사들은 이런 지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노다의 글을 보자.

[미처리히가 쓴 서문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논점을 간결하게 지적했다. 그런데 서독의 의사 집단도 역시 이와 같은 지적에 귀 기울일 힘(뜻)이 없었다. 이 서문은 베를린대학 교수들에 의해 삭제되었고, 미처리히는 격렬한 인신공격을 받았다](노다 마사야키, 133쪽).

이는 독일의사회뿐 아니라, 나름의 엘리트 의식을 지닌 의사집단의 집단적 완고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한때는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했던 많은 독일인들이 패전 뒤 그랬던 것처럼, 독일 의사들도 스스로를 '나치 정권의 희생자'로 여기는 집단적 자기 합리화에 기울어 있었다.

베를린 의사회,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독일의사회가 오늘날처럼 나치의 과거사와 전쟁범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면서 열린 모습을 보인 것은 1980년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을 찾아가 비에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던 때(1970년 12월7일)보다도 한참을 지난 시점이다.

베를린 의사회가 잘못된 과거사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종전 40년도 더 지난 1988년이 되어서였다. 성명서를 통해 "베를린 의사회는 과거의 짐을 지겠다. 우리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면서 지난날 나치 독일에서 의사가 했던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나치 전쟁범죄의 협력자 또는 공모자) 역할을 돌아보고,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에 따라 독일의사회도 달라졌다. 1989년 '인간의 가치-1918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의학'이란 주제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고, 나치즘과 의학이 사악한 동맹을 맺었던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이렇듯 독일의사회는 뒤늦게나마 사죄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견주어 일본의사회는 어떠한가. 전후 80년이 지나도록 지난날 침략전쟁 속에서 일본 의학계가 어떤 일을 했는지 따져보려 들지 않는다. 소수의 양심적인 의료인들이 반성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집단의 힘으로 이를 눌러왔다. 필요에 따라선 겉치레로 '히포크라테스'니 '생명 윤리'를 말하겠지만, 집단적인 반성을 슬그머니 건너뛰고 전쟁범죄로 얼룩진 과거사를 아예 잊기로 한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껏 여러 회에 걸쳐 일본 731부대의 악행과 그 뒤 상황을 살펴봤다. 세균무기를 만든답시고 731부대가 저질렀던 악행은 전쟁범죄사에서 매우 끔찍하고 특이한 엽기적 전쟁범죄였다. 그들이 저질렀던 '인도에 어긋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는 우리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로 꼽힌다. 이 범죄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악마의 의사'들은 전승국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았지만, 그들의 죄의식마저 깔끔하게 지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 앞에 용서를 비는 것이 진정한 면죄부를 얻는 길이다.

4차에 걸쳐 세균전 전문 조사관을 파견한 미국은 731부대 간부들로부터 '피 묻은' 세균전 정보를 챙겼다. 1947년 가을에 그 '더러운 거래'가 마무리됐다. 3년 뒤 터진 한반도 전쟁에서 미국은 세균전을 폈다는 의혹을 받는다. 다음 주 글에선 독자들과 함께 그 문제를 들여다보려 한다.(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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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에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백성을 이 지경에…"

질타한 70대 의병대장의 유물이 환수됐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19.04.11 09:10:00 수정 : 2019.04.11 12:13:42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척암선생문집> 책판이 환수됐다. 독일의 작은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구입해온 것이다.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1000여장 존재했지만 이번에 환수된 것까지 21장만 남아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항일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척암선생문집> 책판이 환수됐다. 독일의 작은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구입해온 것이다.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1000여장 존재했지만 이번에 환수된 것까지 21장만 남아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폐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무슨 사람이기에 이따위 짓을 합니까.(陛下何爲而爲此)”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황제를 매섭게 꾸짖는 상소문을 올린 이가 있었다.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였다. 상소문의 주인공은 구한말의 의병장인 척암 김도화 선생(1825~1912년)이다. 700자로 구성된 이 상소문은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른 순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 

 

“500년 역사의 왕위와 3000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척암은 “그런데 임금인 당신은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어찌 농사 짓는 자가 토지에서 난 곡식을 서로 매매하듯 하느냐”고 질타했다. 나라와 백성을 빼앗긴 임금은 더이상 임금이 아닌, 여염의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한 것이다. 척암의 춘추 86살이었다. 그리고는 자택의 문에 ‘合邦大反對之家(합방을 절대 반대하는 집)’이라고 써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척암은 2년 뒤인 1912년 88살을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났다. 

■독일 경매장에 출품된 책판을 구입 

 

척암은 본집 39권 19책, 속집 13권 6책으로 구성된 <척암선생문집>을 남겼다. 손자(김헌주) 등이 1917년 생전에 척암이 남긴 글을 모아 편집·간행했다. 이 정도의 문집을 인출하려면 책판은 1000여장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책판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국학진흥원에 단 20장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중 1장도 2016년 미국 하와이대 에드워드 슐츠 교수가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2월 국외 경매에 출품된 한국문화재를 모니터링하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아시아 문화재 500여건이 나온 독일의 작은 경매에서 흥미로운 유물을 검색해냈다. 바로 <척암선생문집> 책판 1장이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전적 전문가 및 유교책판을 전문적으로 연구·관리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과 협의한 끝에 이 유물을 구입한 뒤 11일 공개했다. 

 

 

이번에 확인된 <척암선생문집> 책판 부분과 비교해본 인출본.  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 부분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이번에 확인된 <척암선생문집> 책판 부분과 비교해본 인출본. 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 부분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오스트리아의 한 가족이 오래전부터 소장했던 이 책판은 양쪽 마구리가 빠졌고, 한쪽 면에는 글자를 조각한 부분에 금색 안료를 덧칠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물은 양호한 편이었다. 판심(版心·책장을 접어 양면으로 나눌 때 접히는 가운데 부분)을 확인해보니 <척암선생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이었다. 

‘태극도설’은 북송의 철학자인 주돈이(1017~1073)의 ‘태극도설’에 척암이 주자(1130~1200)의 설명 및 퇴계 이황(1501~1570)과 대산 이상정(1711~1781)의 견해를 참고해서 조목별로 논술한 글이다. ‘태극도설’은 무극인 태극에서부터 음양오행과 만물의 생성 발전 과정을 도해해서 태극도를 만들고 설명을 붙인 것이다. 책판의 환수에는 온라인 게임회사 라이엇 게임즈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찾은 것 

 

이번 문화재 환수는 단순한 책판 1장의 귀환이 아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김상엽 조사활용2팀장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표적인 의병장 중 한 분인 척암 선생의 유물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거쳐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탓에 미처 포함되지 못했던 세계기록유산의 일부를 되찾아왔다는 것도 이번 환수의 또다른 의미”라고 평가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소장된 718종 6만4226장의 유교 책판은 2015년 ‘한국의 유교책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유교책판’은 판각 계획부터 인출·배포 등의 전 과정을 공론을 통해 결정하는 ‘공동체 출판’이라는 조선 특유의 방식으로 제작됐고, 도덕적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표아래 500년 이상 전승된 집단지성의 산물이라는 점이 큰 의미를 갖는다. <척암선생문집> 역시 ‘한국의 유교책판’의 일부이다.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묘소.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과거없이 발탁한 초야에 묻힌 선비를 의미한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묘소.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과거없이 발탁한 초야에 묻힌 선비를 의미한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고종의 ‘애통조’ 밀지 

척암 김도화 선생은 구한말 문장가이자 성리학자로서 영남 유림의 태두로 추앙받은 대학자였다. 그러나 그 이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만든 수식어가 있었으니 바로 ‘70대 의병대장’이었다는 것이다.

 

척암은 25살 때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아 수많은 학자를 배출한 영남학파의 종장인 정재 유치명(1777~1861)의 문하에 들어가 경학과 성리학을 배웠다. 과거를 통한 출세에 고개를 돌리지 않은 척암은 ‘무려’ 68세 때인 1893년 이른바 ‘유일천(遺逸薦·초야에 묻힌 선비를 발탁하는 제도)’으로 의금부도사와 성균관 직강사예(교수)가 됐지만 실제 근무하지는 않았다. 척암의 묘비에는 ‘조선징사(朝鮮徵士)’라는 수식어가 달려있다. ‘징사’는 곧 ‘유일천’으로 발탁된 선비라는 뜻이다. 선비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고종의 비밀조서 ‘에통조’. 고종은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거병을 독려하는’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제공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고종의 비밀조서 ‘에통조’. 고종은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거병을 독려하는’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제공 

 

1895년 고향 안동에서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던 척암은 엄청난 격변기에 빨려들어갔다. 국모인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진 것이다. 척암의 춘추 71살 때의 일이다. 척암은 조선의 사직과 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영남 척사파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고종은 이 무렵 ‘애통하다’는 뜻을 적은 밀지를 전국의 향교 등에 내려보낸다. 이것이 ‘애통조(哀痛詔)’인데, 척암에게도 전달됐다.

고종은 “아 슬프다”로 시작되는 ‘애통조’에서 “나의 죄가 커서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고 자책하면서 각지의 의병을 ‘충의지사(忠義之士)’로 북돋았다. 또 이들을 근왕칠로군(勤王七路軍)이라 하면서 영의정 김병시를 도체찰사로, 전 진사 계국량을 감군지휘사로 삼는다고 했다. 고종은 “호서를 충의군, 호남을 분위군. 영남을 장의군, 관동을 용의군, 관북을 해서를 효의군으로 삼을 테니 조정의 명령에 부응하라”고 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척암은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문을 올려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을 매섭게 꾸짖었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임노직 관장 제공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척암은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문을 올려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을 매섭게 꾸짖었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른다.|임노직 관장 제공 

 

“역신들의 농간에…단발령을 내려 4000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비밀리에 이것을 보낸다. 각 군수와 관찰사는 잘 선택해서 따르라. 의리의 용사를 뽑고 모집해서…재주있는 양민을 모아서 공을 쌓으면…따르지 않는 수령들은 처분해도 좋다…이전의 옛 제도를 회복하라’

<척암선생문집> 별집에 실린 ‘애통조’의 대략 내용이다. 고종의 밀지를 받은 척암은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을 올린다. 척암은 상소문에서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의 예를 든 뒤 “왜놈 오랑캐는 만세를 두고라도 기필코 갚아야할 원수이며, 역대 제왕께서 일찍이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놈들”이라고 성토한다. 척암은 이어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일(復警討賊)은 춘추대의이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달려가는 것은 신하된 직분”이라고 천명한다. 

■70대 의병대장의 노익장 

 

척암은 각 문중에 통문을 보내 유림의 중망이 높은 김흥락·권세연·곽종석 등과 함께 안동의병을 조직하여 안동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동의병은 1896년 경군과 일본 수비대에 패해 흩어진다. 이때 안동의병은 72살의 척암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 뒤 안동부를 재점거한다.

 

척암은 영일의 최세윤을 부대장으로 삼고, 영주·예안·봉화·의성·청송·예천·영양·진보 등의 의병과, 제천의 유인석 의병장 및 호좌(충남)의 서상렬 소모토적 대장과 연합작전을 펴서 상주의 함창(문경) 태봉에서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 오합지졸이었던 의병은 무기마저 시원치 않아 정예병으로 맞선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후 척암을 중심으로 다시 전력을 재편해서 다소간의 전과를 올렸지만 경군(관군)의 압력과 해산을 촉구하는 고종의 윤음(임금의 포고문)을 듣고 할 수 없이 해산했다. 척암은 고종의 해산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착암선생문집>.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환수된 책판도 곧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포함될 예정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착암선생문집>.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환수된 책판도 곧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포함될 예정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정말 전하는 무슨 마음을 먹고…” 

비분강개한 척암은 무려 1400여자에 달하는 상소문(‘파병후자명소·破兵後自明疏’)를 올린다. 척암은 “전에 내렸던 애통하다는 교서(애통조)와 해산하라는 포고의 뜻이 서로 상반되니 전하의 백성을 전하의 칼날에 모두 죽게 만들었다”고 고종의 해산명령을 거세게 항의한다.

왕의 군사가 내려와 가혹한 형벌을 일삼고 있습니다…책을 끼고 가는 어린아이까지도 모조리 잡아죽이고 길쌈하던 부녀까지도 역시 대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산골의 나무꾼도 지게를 진채 길바닥에 나뒹굴었으며 논밭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은 쟁기를 잡은채 굶어죽었고 마구 쏘아대는 총알은 우박 퍼붓듯 하고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룹니다.” 

척암은 그러면서 “정말이지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과 마음으로 백성을 이 지경에 빠뜨리는 지 모르겠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그러나 고종은 “그대들의 충정은 충분히 알겠으니 물러나 국왕의 처분을 가다리라”는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언제는 ‘거병하라’고 부추겨놓고 이제와서 ‘충정을 알겠으니 그만하라’고 말리는 나약한 군왕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인가. 

■을사오적의 세가지 죄 

 

척암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에도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다. 척암은 을사늑약을 당장 폐기하라는 상소문(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을 올렸다.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한 것만이 아닙니다. 군주보다 중한 것이 사직이요, 사직 보다 중한 것이 백성인데 백성이 장차 오랑캐의 노예가 되려 합니다.” 이미 81살이 된 척암이지만 견딜 수 없었다. 척암은 ‘을사오적’을 두고 “저 오적이라는 자는 짐승도 더러워서 먹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 있으니 첫째는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는 군부(君父·임금)를 협박한 죄입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10년 8월 결국 국권이 침탈되자 척암은 고종 황제를 지칭하면서 “대체 황제가 뭐하는 사람이야”고 사정없이 꾸짖은 것이다. 척암의 춘추 86살. 그렇지만 “결코 포기하지 말자”고 마지막까지 호소한다. “군신이 한마음이 되어 못을 파고 성을 쌓아 배수진을 파자. 그리고 백성과 더불어 일본과 한판 싸워 결판내자”고 결사항전을 촉구했다. 그러나 만사휴의였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연합뉴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연합뉴스 

 

■척암 김도화와 석주 이상룡 선생 

척암의 절망시가 가슴을 저민다. “하물며 내 아직 살아있으나 아아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네. 올해 여든여섯…살아서 무익했고 죽을 곳조차 없으니 부끄럽다. 충의에 힘쓰라는 아버지와 스승에게….” 하지만 척암의 뜻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척암이 충남의 의병장 서상열에게 보내는 시를 보라. “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늙은 이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 나섰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척암의 정신은 국권이 침탈되자 가족 50여명과 제자 200여명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한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에게 이어진다. 척암 김도화 선생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고모부이다. 석주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내는등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선생 뿐 아니라 아들(준형)과 손자(병화) 등 독립투사 9명이 이 가문에서 배출됐다. 뼛속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문이 아닐 수 없다. 

 

 

 

 

2024, 3 월 고침

 

14/ 바. 우수하 들에 세운 임검성

 

 

이조선 숙종 2 년(1676) 북애노인은 <규원사화/단군기.제1세왕검>에서 조선의 건국시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했다. 지금의 만주 길림땅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 곧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 소밀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예전의 속말수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이 있었고 이들이 속수의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대大씨가 일어나는 길잡이가 되었다. 말갈이란 옛날 숙신의 후예이며 또 단군의 자손이다. 소밀.속말.속말은 모두 소머리란 뜻이며 음이 서로 비슷하다.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거의 와전되었으나 그 뜻은 잃지 않았다.

於是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 牛首河之原 曰任檢城 今滿州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末之水 及大氏之興 爲其先駈 蓋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 蓋蘇密涑沫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일연국사가 1280 년 경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삼국유사/기이.고조선.왕검조선>에도 위와 비슷한 내용이 전해진다.

 

<위서>에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고도 하는데 백주에 있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고와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에는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란 이가 있어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었다. ...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고 한다. 그리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가 즉위한 지 50 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년이다. 그러니 50 년은 정사요 경인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또한 왕검조선이 도읍을 옮긴 연혁도 설명되어 있다.   

 

<규원사화>

우수하 가에서 산 지 10 년이 되어 도읍을 백산 남쪽, 패수의 북쪽으로 옮겼다. 이곳이 평양이며 제 2 의 임검성이다. 지금의 속말 땅은 들이 넓기는 하나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 농사짓기가 남쪽 땅보다 좋지 않았다. 또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남쪽과의 교통이 몹시 불편했다. 이것이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다. 청평이 `단군 때에 네 번이나 도읍을 옮겨 나라를 새롭게 했는데 두 번째 천도는 패수浿水 북쪽, 곧 발해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가 바로 그곳이다`고 했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 浿水之北 曰平陽卽第二任儉城也 蓋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 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綠府地 神州是也

 

<삼국유사>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궁홀산(일명 방홀산)이라고 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그는 일천오백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렷다. 주나라 호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는 천구백팔세였다고 한다. 

 

그러면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의 첫도읍이라는 북애노인의 임검성.소밀성이나 <위서>의 아사달, <고기>의 평양성 위치는 대체 어디일까? 

 

우선 북애노인이 비정한 만주 소밀성은 임검성.아사달.평양성 등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초라 할 수 있다.  아래는 중국 25 번째 정사 <청사고/지리지> 길림성 쌍양현 기록이다. 

 

雙陽縣 省西195裡 明依爾們蘇完河二衛 宣統二年 析吉林西界長春東界伊統北界置 治蘇斡延 ...西南黑頂子 南土頂子將軍嶺光僻山 雙陽河出焉 東南驛馬河 自盤石緣界 合杜帶雙陽放牛溝河入長春 西北霧海河從之 舊設站一蘇斡延 官商路三 南皇營 東南瓦家子鎭 竝達盤石 北奢嶺口達長春

 

쌍양현은 길림성 서쪽 195 리 떨어져 있다. 명나라는 이의문.소완하위를 설치했다. 선통2년(1876) 길림 서쪽, 장춘 동쪽,이통 북쪽을 갈라 설치했으며 치소는 소알연이다. ... 서남쪽으로 흑정자, 남쪽엔 토정자.장군령.광벽산이 있고 광벽산에서 쌍양하가 발원한다. 동남쪽에 있는 반석현에서 역마하가 흘러오는데 두대.쌍양.방우.구하 등과 합류하여 장춘으로 흘러간다. 서북쪽에서는 무해하가 흘러와 합류한다. 옛참은 소알연 하나가 있고 세 개의 주요도로는 남쪽으로 황영, 동남쪽으로 와가자진을 지나 반석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사령구를 지나 장춘에 이른다.

 

치소가 소알연이고 소완하가 흐른다는데 소알연.소완의 음이 혹 소밀.소머리.속말.우수하 등의 음이나 뜻이 같거나 비슷한지 여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남쪽에 있다는 황영皇營은 의미심장하다. <청사고/지리지> 직예.봉천.길림 3 성 지역에서 황제 황皇 글자를 쓰는 지명이 아예 없을 뿐만 아니라 직예.봉천 지역도 아니고 동북쪽 산 깊은 벽촌인 길림성 지역에서 지명에 남겨질 정도로 황제국을 자처한 국가는 진국발해가 있었고 상고 시대의 왕검조선 정도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쌍양현에서 동쪽으로 195 리 떨어진 길림부는 서남쪽에 온덕형溫德亨 곧 망제산이 있고 장백산을 제사지내는 전사殿祀가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吉林府 ...明烏拉等衛 後屬扈倫族之烏拉部 本吉林烏拉 一曰烏拉鷄林 又名船廠 淸初隸寧古塔將軍 ...西南至京師2300裡 距

            盛京820餘裏 ...西南溫德亨 亦望祭山有殿祠長白 ...東南松花江自額穆入 右合海靑溝 左溫德亨河 ...城北70裡本烏拉

            國 ...太祖先後克其宜罕山.臨河 ...遂平之 柳邊四圍長622裏 ...曰柳條邊 亦新邊 ...

 

또한 쌍양현에서 서쪽으로 45 리 떨어진 장춘부는 옛 부여국 땅이라 기록되어 있고 길림부에서 서북쪽으로 360 리 떨어진 농안현은 옛 부여국 도읍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長春府 ...省西240裡 古扶餘國地 明初三萬衛 後屬蒙古科爾沁部 ...南伊通河...東驛馬河自雙陽緣界...在府西北與東淸接

           日俄戰後 長春以北屬我之東淸 以南屬日本南滿鐵道會社 俄站寬城子曰長春驛 商埠 光緖31年中日約開

農安縣 ... 省西北三百六十裡 古扶餘國都 ...

 

또 길림부에서 서남쪽으로 280 리 떨어진 이통주는 발해 곧 진震국 장령부 땅이라 한다. 

伊通州 ...省西南280裡 渤海長嶺府地 ...又西小伊通河自奉天東平錯入 爲新開河入懷德 太平下從之 又西  東遼河自西豊入

           右合大小雅哈河入奉化 昭蘇太及條子下亦入焉 左納陽斯河一曰赫爾蘇河 ...又西淸河入爲葉赫河 入開原 ...北達長春

           ...西赫爾蘇站達奉天奉化 西南蓮花街達昌圖

 

결국 길림성의 쌍양현.장춘부.길림부.이통주 등의 지역은 왕검조선, 부여, 진국발해 등 영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서남쪽으로 경사 곧 지금의 북경까지 2300 리, 성경 심양 승덕현까지는 820 리  떨어져 있는 길림성.부 위치는 어디인가? 

 

 

- <성경통지>에 실린 <성경지여전도-이하 성경도>

 1684 년 청국인 동병충 등이 편찬하여 1778 에는 아규 등이 수정.증보하였음

 

 

 

위 <성경도>에 묘사되어 있듯 동요하 발원지인 백산대맥 너머 지역이다. 인평대군은 북경을 떠나 요양까지 1540 리를 걸었고 성경 심양은 요양에서 120 리 떨어져 있다고 하니 북경부터 심양까지는 1660 리인 셈이다. 다시 길림부까지는 820 리를 더하여 2480 리가 된다. 결국 180 리 차이는 아마도 요택을 남.북쪽으로 건너는 차이일 것이다.    

 

북애노인의 소알연과 일연국사의 서경을 현 <중국전도>에 표시하면 대략 아래와 같을 것이다. 

 

 

 

 

따라서 일연국사가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경인년에 도읍한 평양성을 지금의 서경이라고 주석한 것은 대실수였다. 서경은 고구려 평양성이였으며 낙랑군의 중심 지역이였고 그 이전은 서기전 3 세기 경의 부왕과 이후 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부.준왕의 조선은 조선 북쪽에 위치하였고 왕검조선에서 단군 제위를 물려받은 단군부여의 남쪽 제후국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북애노인은 일연국사의 평양성.서경 비정을 부정한 것이고 당시 이조선의 국경 바깥 지역인 만주땅 속말강이 흐르는소밀성을 태백산.우수하.임검성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규원사화>가 저술된 1675 년으로부터 약 250 여 년 후 청국인 조이손은 <청사고/지리지>에서 온덕향.망제산.옛부여땅.부여국도.진국장령부.황영 등이 있었다는 길림부.쌍양현.농안현.이통주 등을 설명하였으니 북애노인의 지리 인식이 정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애노인이 속말速沫을 소밀과 같은 음가로 또 우수牛首의 뜻인 소머리로 새긴 것은 탁견이라 생각한다. <청/지>의 쌍양현 치소 소알연은 당연히 소밀에서 파생된 음가일 것이다. 

 

따라서 2004 년 중국 유국상이 발표한 요하문명 발굴 조사 보고서에 언급된 유적.유물은 마땅히 환웅천왕의 신시 곧 고조선과 왕검조선의 유적이고 유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우수하.속말강 지역 신석기문화 유적.유물 발굴지 분포도

  원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1900 년 양수경은 일본이 저지른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변조.위작을 동의하여 자신도 거란.요국 시기의 황하를 변조.위작하였고 이후 1980 년 담기양의 역대국지도에 그대로 이어졌고 이러한 변조.위작 지리가 고대부터 변함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중국의 동북공정 실체다.

 

이러한 지리이기 때문에 국사를 제대로 이해하겠다면 역대 국경 지리를 반드시 검증해야 하는 것이다.    

2024, 3 월 고침

13/ 마. 고려 압록수

 

거의 모든 사람이 고려 시기나 이조선 시기의 압록수가 같다고 인식한다. 또 인하대고조선 연구소 윤한택 등의 주장과 같이  고려 압록강은 지금의 요하였고 고려 천리장성도 지금의 요동 철령 부근에 쌓은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 근거로 <삼국유사/흥법> 순도조려 기록을 거론한다.   

 

按麗時都安市城 一名安丁忽 在遼水之北 遼水一名鴨淥 今云安民江

 

그러면 과연 고려 압록수가 지금의 요하였으며 또 이조선의 압록수도 지금의 요하였을까? 아래는 고려 말 명국에서 철령위를 압록강 가까이 설치하는 것에 대한 권근의 진정 내용이다. 

 

권근의 철령.쌍성 관련 진정전 陳情箋 <동문선 권40>  
신(권근)은 아룁니다.
 홍무 21 년 2 월 15 일에 배신 문하평리 설장수가 경사에서 돌아오니, 호부에서 발행한 성지를 공경히 받들었습니다. `그 철령의 이동.이북.이서가 원래 개원에 속한 것이니 소관 군민은 그대로 요동에 붙이도록 하라.`하였으니 신은 일국의 신민과 더불어 놀랍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우러러 소회를 아뢰는 것입니다.
...

말씀하신 철령 이북은 문.고.화.정.함 등의 여러 주를 지나 공험진에 이르기까지는 자고로 본국의 땅이였는데, 요 건통 7 년에 동여진사람들이 난리를 일으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차지하므로 예왕이 요국에 고하고 토벌하기를 청하여 군사를 보내어 잃은 땅을 회복하게 됨에 함주.공험진 등의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원나라 지정의 초기 무오 년간에 이르러 몽고 보지관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수복할 때에, 본국 정주 반민 탁청과 용진현 사람 조휘가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가서 항복하면서 지금 조정의 요동 함주로 부근인 심주에 쌍성현이 있음을 들어 알고 본국 함주 근처인 화주에 옛날에 쌓았던 조그마한 성 둘이 있으므로, 인하여 모호하게 주청하여 드디어 화주를 쌍성으로 잘못 일컫고, 조휘를 쌍성총관으로 탁청을 쌍성천호로 삼았는데, 지정 16 년에 이르러 원조에 주달하여 상항의 총관.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의 땅을 다시 본국에 소속되게 하여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고 인민을 관할하고 있사오니, 반적으로 말미암아 침삭당했던 땅을 대국에 호소하여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지금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로에 속한 것이니, 그대로 요동에 붙이게 하라는 명을 공경히 받들어 보았으나, 이 철령의 산은 왕경과 겨우 3 백리의 거리이며, 공험의 진은 변방의 경계로 한정된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

 

 

즉 명국 주원장이 설치하려는 철령위가 고려 영역인 쌍성이니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설치하려는 철령위 북쪽도 고려 에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을 설치한 지역이였고 동쪽으로 공험진까지도 고려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고려 압록수는 어디에 있었고 윤관이 쌓은 9 성  즉 공험진을 비롯하여 영주.웅주.복주.길주 등의 위치는 어디일까?

 

 

 

주원장이 설치하려는 철령위는 요동 지역이기는 하지만 고려 압록수 변에 바짝 붙어 있는 곳이였기 때문에 반대하였던 것 이니 고려 압록수도 당연히 요동 지역의 철령 동쪽에 흘렀을 것이다. 고려의 반대를 수용했음인지 주원장은 처음 지목한 곳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옮겨 철령위를 설치했다. 

 

결국 고려 압록수는 명국이 설치한 철령 동남쪽에 있어야 하고 그곳에는 심양 승덕현과 요양주 부근을 흐르는 혼하渾河.태자하 두 강이 흘렀으니 고려 국경도 두 강을 잇는 자연적인 경계였을 것이며 혼하.태자하 곧 <한서/지리지> 현토군 고구려현의 요수와 요동군 요양현의 대량수를 고구려에서도 서압록.동압록이라 하였음을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국천왕 기사에서 추단할 수 있다.

 

十三年 ... 令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四部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力由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以卑辭 重禮聘之 ...

13 년(서기191년) ... 너희 사부는 각기 현량한 재하의 사람을 천거하라. 이에 사부는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다. 왕은 불러들여 국정을 위촉하니 안류는 왕에게 말하기를 `소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진실로 대정에 참여하기 부족합니다. 서압록곡 좌물촌에 을파소란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 을소의 손자로서 성품이 굳세고 지려가 깊으나 세상에 쓰여지지 않으므로 농사에 진력하여 살고 있으니 대왕이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안될 것입니다.`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어 겸손한 언사와 중한 예로써 맞이하여 ...

 

결국 명국 지리지에서는 혼하.태자하라 기록된 고려의 서압록.동압록 지역에 쌍성화주와 정주.문주.고주 등이 설치된 것이고 권근으로부터 250 여 년 전인 고려 예종 시기에는 서압록.동압록의 발원지인 동쪽 개마대산을 넘어 동북쪽에 위치한 선춘령까지의 지역을 윤관.오연총.척준경 등이 17 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쫓아내고 함주.영주.복주.길주.영주.공험진 등 9 성을 쌓았던 것이다.

 

아래는 명국 말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다.

 

- <조선도>

주) 명대 모원의가 역대 군사관계 서적 2,000여 종을 모아 1621년(천계 1)에 완성했다. 〈병결평 兵訣評〉 18권, 〈전략고 戰略考〉 31권, 〈진련제 陳練制〉 41권, 〈군자승 軍資乘〉 55권, 〈점도재 占度載〉 96권으로 이루어져 모두 240권이다. 각 부분마다 그림과 해설이 있으며, 사료가 매우 풍부하다.( 출처:다음백과)

 

 

아래는 이해하기 쉽게 추기한 것이다. 

 

 

 

결국 위 <조선도>의 묘사범위는 아래 적색 실선 삼각형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도>를 보면 황하.요하가 묘사되어 있지 않고 심양.요양이 표시되고 그 동쪽에 압록강이 그려져 있어 어리둥절할 수 있겠다. 그러나 권근의 상문과 위 모사도를 보아야 고려 압록수가 요하 동쪽에 흐른 혼하.태자하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평대군이 요택.요하를 건너 우장.해성을 지나 도착한 요양 남북쪽 지역을 흐른 태자하.혼하는 고구려.고려 시기에는 동압록.서압록으로 불렸다는 얘기다. 이러한 연유로 일연국사도 <삼국유사/흥법>조에서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인데 지금은 안민강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이조선 시기들어 압록은 동남쪽으로 450 리 옮겨졌고 고려 압록 지역에 설치된 지명까지도 덩달아 450 리 동남쪽으로 옮겨지며 화주.고주.문주 등은 사라졌고 정주.귀주.인주 등 일부만 전해졌다. 

다. 요서백제

 

인평대군이 산해관을 경유하여 광녕에 이를 때까지의 500 리 로정은 한 시기 요서군의 동쪽 변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올라 요동군 서쪽 지점으로 들어선 것이다. 중국 정사급 지리 기록에는 이곳 요서군 지역에 백제가 설치한 백제군白濟郡 또는 진평군 진평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서/고구려전>

백제국은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모두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고, 백제도 요서를 빼앗아 차지하였다. 백제의 치소를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하였다.

 

<양서>

마한에는 54 개 나라가 있었는데 백제는 그 가운데의 한 나라이었다. 나중에 점차 강대해져 여러 작은 나라들을 겸병하였다. 그 나라는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동진 때 요서.진평 2 군을 빼앗아 차지하여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구당서>

백제의 땅은 장안의 동쪽 6200 리 되는 곳에 있다. 동북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그 나라의 왕이 사는 곳은 동.서 두 성에 있다. 

 

<통고>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진평(당나라 유성과 북평 일대다)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진나라 이래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1 천 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태평환우기>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바로 왜국에 이른다. 진 이래 대대로 번국의 작위를 받았으며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위와 같이 동진 말 즉 서기전 300 년 전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백제군 또는 진평군 진평현은 어디일까? 백제와 요서군이 관련된 아래 기록들을 미루어 보면 대략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서/재기/모용황>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狹湊都城 恐方將?國家深害 宜分其兄弟宗屬 徙于西境諸城 撫之以恩檢之以法        

고구려.백제 및 우문.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를 옮겼는데 의를 내세워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 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럽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종속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위 기록은 서기 344 년 모용선비가 세운 연국 기실참군 봉유가 모용황에게 진언한 봉표 일부다. 모용황은 342 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의 항복을 받고 미천왕 시신과 남녀포로 5 만여 명 및 부고에 있던 수많은 보물을 빼앗았다. 따라서 고구려가 옮겼다는 병세란 당연히 포로일 것이고 백제 역시 요서 지역에 있던 백제 병사일 것이다. 그러면 당시 모용황은 어디에 있었을까? 

 

- <역대여지험요도/전한강역도>, 1900 년경 청국인 양수경 제작 

 

 

 

위와 같이 모용황의 용성 화룡궁은 요서군 유성현의 북쪽이고 서쪽에 백랑수.대릉하가 흘러야 한다. 그리고 위 <험여/전한강역도>는 아래 모사도의 적색 실선 내 지역을 묘사한 것이다.

 

 

 

결국 백제는 당시 바다로 기록된 지금의 란하 하류를 서쪽으로 건너기만 하면 요서군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북쪽에 는 한나라 요동군과 말갈 곧 추정 남옥저와 고구려가 있고 동쪽에는 낙랑군이 있으니 서쪽으로 바다를 건넜던 것이다. 한편 봉유가 봉표를 올리고 2 년 후인 346 년에는 백제와 함께 부여도 등장한다.  

 

 <자치통감/ 진기/ ?종성황제 하 영화2년>

永和二年 春 正月...初 夫餘居于鹿山?百?所侵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 燕王?遣世子俊?慕容?慕容恪慕?根三?? 萬七千??夫? 俊居中指수? 事皆以任恪 遂拔夫?? 其王玄及部落五萬?口 而? ?以玄????? 妻以女 

346 년 봄 정월...처음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모용각,모여근 등 세 장군과 만 칠천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토록하엿다. 준은 영내에서 지시를 하였고 군사의 일은 모용각에게 일임하여 드디어 부여를 소탕하여 그 왕 현과 부락 오만여 구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 현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었다.  

 

녹산에 거주하였다는 부여는 서기 285 년 선비 모용외에게 격파된 부여인 것으로 보이며 백제가 녹산에 있던 부여를 공격하고 재차 모용황이 공격했다는 얘기다. 

 

이후 선비 모용씨 지역은 탁발선비의 공격을 받아 사라진다. 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굴곡지며 흐르는 오르도스 지역에서 굴기한 탁발선비가 3 세기 초 흉노 유연을 격파하고 음산 일대를 장악하여 315 년 대代를 세웠으나 곧 쇠락하였고 이후 다시 굴기하여 낙양.장안 지역을 차지하여 국호를 위魏로 개칭하였다. 조조가 세운 조위曺魏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北魏 또는 원위元魏라 한다. 384 년 동진과 전진이 대결한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한 틈을 메꾸며 화북 전지역을 장악하였다. 이후 북위는 북진하여 요서군 남쪽 비여.유성현 지역으로 쫓겨난 모용선비의 후연을 탈취한 풍발.풍홍의 북연 도성 용성을 격파하고 이 지역에 평주와 영주를 설치했다. 이때 영주 지역에서 생포한 조선민 3 만 구를 남쪽 평주 지역으로 옮기고 조선현을 설치한다.   

 

<위서/지형지>

평주 북평군 

朝鮮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 復置 屬焉昌新 前漢屬涿 後漢晉屬遼東 後屬 有盧龍山

조선현 전후한과 진 시기 낙랑군에 속한 현이고 후에 폐현됐다. 432 년 조선민을 비여현으로 옮겨 다시 설치했고 창신현을 병합했다. 창신현은 전한 시기 탁군 속현이였고 후한.진 시기에는 요동군 속현이였다가 후에 조선현에 병합되었다. 노룡산이 있다. 

 

위 기록의 조선민은 선비족 모용외.모용황에게 끌려왔던 부여.고구려.백제의 백성일 것이다. 조선현 위치는 청 말기 1900 년 경 양수경이 편찬한 <역대연혁지도/북위형세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역대연혁지지도/북위형세도> 1900 년 경 청국인 양수경 

 

 

 

아래는 1980 년 담기양이 편찬했다는 <중국역사지도집/동진16국남북조> 추정도다. 

 

 

 

 

 

두 추정도에 표시된 난수濡水.란하와 진장성 경유지와 동단 묘사는 대략 중국 정사 기록과 일치한다. 의외라 생각되겠지만 당연한 것이다. 즉 양수경 이후 현재까지 란하 유역만을 묘사할 때 만큼은 일본의 지리 변조.이동 사실을 묵인하여야 하고 변조 후의 지리가 고대부터였다는 주장 곧 동북공정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중국인으로서도 원래의 란하 유역 지리를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 <중국전도>에는 삭제되어 있는 원래의 난수.란하와 유역의 지리를 대략이나마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누차 제시했듯이 원래의 란하와 일본 변조, 중국 묵인한 지금의 란하는 아래와 같다. 

 

 

 

 결국 1900 년 <험요도>를 간행한 양수경이나 1980 년 <중국역사지도집>을 간행한 담기양 등도 북경 이동 지역의 전통적인 유주.평주.영주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요서백제 위치와 관련된 <요사/지리지>중경대정부 서문 기록을 보겠다. 

 

中京道大定府 虞爲營州夏屬冀州周在幽州之分 秦郡天下是爲遼西 漢爲新安平縣漢末步奚居之 幅員千裏多大山深穀唨險足以自固魏武北征從兵大戰 降者二十餘萬 去之松漠 其後拓拔氏乘遼建牙於此 當饒樂河水之南溫兪河水之北 唐太宗伐高麗 駐蹕於此 部帥蘇文從征有功 奚長可度率衆內附 力量饒樂都督府 咸通以後挈丹始大 奚族不敢復抗 太祖建國...중략...有七金山馬孟山雙山松山土河 統州十縣九 大定縣白( )故地...

중경도 대정부는 우 시기에는 영주, 하 시기는 기주, 주 시기에는 유주라 하였고 진 시기의 군제 하에서는 요서군이라 하였으며 한 시기에는 신안평현으로, 한 말에는 해족이 거주하였다. 폭원이 천 리에 이르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험하여 지키기가 쉬웠다. 위나라 조조가 북벌하여 큰 싸움에서 20 여만 명을 포획하니 송막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탁발씨가 지휘소를 세웠으니 요락하수의 남쪽이며 온유하수의 북쪽 땅이다. 당 태종이 고려를 침공할 때 주필하던 곳이였고 당시 부의 우두머리 소문이 이 전역을 종군하여 자못 공이 있었다. 해족의 장 가도가 족속을 이끌고 내부하니 살펴 요락도독부를 맡겼다. 함통(860~873) 이후 거란이 세력을 키우니 해족은 다시는 항거하지 못했다. 태조(907~925)가 건국하고....중략....칠금산.마맹산.쌍산.송산이 있고 토하가 흐르며 10 주와 9 현을 통할한다. 대정현은 옛 백( )의 땅이다... 

 

 

위와 같이 거란.요국의 중경 대정부 치소인 대정현이 옛 白( ) 땅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옛 백( ) 땅`의 괄호 안은 대체 어떤 글자가 합당할까? 서기전 202 년 전한부터 916 년 거란.요국 건국까지 1100 여 년 동안 요서군의 북쪽 관내 지역에 `백( )`이라는 종족 혹 국명은 백제百濟 외에는 없다. 즉 백제군이고 요서백제이고 진평군진평현이다.  

 

이번엔 <명사/지리지> 북평행도지휘사사 대녕위 대정현 기록을 보자.  

 

<명사/지리지> 北平行都指揮使司 

本大寧都指揮使司 洪武29年9月置 治大寧衛 ...領衛10.....西南距北平布政司八百裏 ...  大寧衛...治大定縣 ...改左右後3衛爲營州左右中3護衛...南有土河...  會州衛   ...西北有馬孟山...土河之源出焉 下流合於漌河 又南入於遼水...

북평행도지휘사사 본래 대녕도지휘사사였고 1396년9월 설치. 대녕위에 치소가 있으며...10 개 위를 통령하고...서남쪽으로 북평포정사까지 거리는 800 리이다  ... 대녕위 ... 대정현에 치소가 있고 ... 좌.우.중 3 개 위를 영주좌.우.중 3 호위로 개칭 ... 남쪽에 토하가 있고 ... 회주위 ... 서북쪽에 마맹산이 있다 ... 토하의 발원지이며 하류는 근(潢의 오기)하로 합쳐지고 또 남쪽으로 흘러 요수로 들어간다.

 

청국 정사에는 대정현.대녕위와 관련된 대녕성이 기록되어 있다.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승덕부

평천현  府東150裡 ...老合河古託紇臣水 俗省曰老河 出喀喇沁右翼南190裡永安山 ...又東北合昆都倫河入建昌 大寧城東北80裡 州判駐 ...

열하 승덕부에서 동쪽으로 150 리 떨어져 있다. ... 노합하 곧 옛탁흘신수이며 속칭 노하가 객라심우익 남쪽 190 리 떨어진 영안산에서 발원한다. ... 또 동북쪽으로 흘러 곤도륜하와 합류한 후 건창현을 경유한다. 대녕성(은 평천현에서) 동북 8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주판이 통령한다. 

 

결국 <요사/지리지>의 옛 백( )땅이라는 대정현 위치는 명 시기 북평행도사사.대녕도사사에 속한 대녕위.영주호위 치소인 대정현이고 그 위치는 청 시기 직예성 승덕부 평천현에서 동북쪽으로 80 리 떨어졌다는 대녕성일 수 밖에 없다. 한 시기 요서군 지역과 요.명.청 시기 대정현.대녕위.대녕성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고지도로는 일본 육군참모부 간행했을 것으로 보이는 아래 <왜황도>다.

 

 

 

 

위 고지도를 통하여 조조에 이어 탁발선비의 북위가 해족을 공격하기 위해 지휘소를 세웠다는 요락하수.온유하수는 아래 기록과 같이 청 시기 직예성의 적봉직예주와 열하구 승덕부 사이에 흐르는 영금하와 열하임을 알 수 있고 노합하와 대릉하가 동북 방향으로 흘러 각각 황하 중류와 황하 하류로 흘러든 정황도 충분히 구별.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적봉직예주 ...西南距省治1320裡...領縣1 潢河自圍場入 州北200餘裡之巴林旗 東南老哈河 自平泉逕東南隅 納伯爾克河 

                   北入建 英金河古饒樂水...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인 보정부까지는 1320 리이다. ... 거느리는 현은 하나이다. 황하는 적봉에서 북쪽으

                   로 200 여리 떨어진 파림기 위장에서 흘러오며 동남쪽에는 평천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백이극하를 받아들인 노

                   합하가 있는데 북쪽으로 흘러 건창현으로 흘러들어간다. 영금하는 옛 요락수인데... 

 

승덕부  ...康熙42年(1702) 建避暑山莊於熱河...西南省治780裡...熱河古武列水...欒河自欒平入合之

                강희42년 피서산장을 열하에 세웠다. ...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까지 780 리다. ... 열하 곧 옛무열수가 흐른다.

                란평에서 흘러오는 란하로 합류한다.  

 

 

청 시기의 대릉하 곧 한.당 시기의 백랑수 중류 남쪽 지점이 한 시기 요서군의 북쪽 지역에 설치된 유성현이였고 전연 모용황은 용성현으로 개칭하고 화룡궁을 쌓은 곳이다. 또한 명 시기 대녕위를 영주호위로 개칭한 연유도 북위가 이곳 화룡궁.화룡성이 있는 유성.용성현에 영주를 설치하고 영주와 창려군의 치소로 삼은 전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서/지형지>  영주營州

治和龍城 ... 領郡六 ... 昌黎郡 ... 龍城(縣)眞君八年倂柳城... 建德郡 ... 廣都(縣)眞君八年倂白狼 ... 遼東郡 ... 襄平(縣) ... 有靑山 ... 樂浪郡 ... 治連城 ... 帶方(縣) ... 冀陽郡 ... 平剛.柳城(縣) 營丘郡 ...

 

북위가 설치한 영주에는 창려.건덕.요동.낙랑.기양.영구 등 6 군이 속했고 창려군은 한 시기 요서군 유성현을, 건덕군의 광도현은 한 시기 우북평군 백랑현이였을 곳을 병합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사/지리지>에서 대정부 대정현 지역을 요서군 지역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하여 어양군을 흘러내린 고하의 하류에서 동쪽으로 난수.란하까지 이어지는 인위적으로 개통한 신하로 흘러드는 봉대수의 발원지인 신안평현이라 설명한 것은 오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후금.청국을 세운 만주족이 한족 명국을 멸망시킨 후 편찬한 <만주원류고>에도 요서백제지에 대한 기록을 취합.분석해 놓았다.   

 

<흠정만주원류고> 부족3 백제

<통고>에는 또 `남쪽으로 신라와 접해 있다`고 하고, <당회요>에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른다`고 하였는바, 백제의 지경을 상고해 보니.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금주.의주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해.개에 걸쳐 있고, 동남쪽으로 조선의 황해.충청.전라도의 제도에서 끝이 나,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쭉하다. 따라서 유성과 북평을 기준으로 신라가 있는 곳을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게 되지만 경상과 웅진을 기준으로 이를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있게 된다. 또 북위 때 백제가 물길과 공모해서 힘을 합해 고구려를 취하려고 했던 것을 보더라도 동북쪽이 역시 물길과 인접해 있었던 것이다.                                                                                             <흠정만류원류고> 장진근 역주 146 쪽

 

위 기록과 같이 18 세기 말의 만주족은 요서백제 위치를 <요사><명사><청사고> 지리지에서 설명한 토하.노합하가 동북류하여 황하 중류로 흘러드는 대정현.대녕위.건창현 보다 훨씬 동북쪽인 대릉하.황하 하류 지역인 의주.금주.광녕 지역으로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광녕 등의 남쪽으로 걸쳐 있다는 해.개는 해성과 개평을 지목한 것으로 이곳은 패.대수의 남족 지역이니 당연히 백제의 초도 위례성.북한성이며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남평양성일 것이다. 

 

결국 거란 역사를 편찬한 몽고족과 만주족이 인식하는 요서백제 추정지는 동.서 방향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어쨋든 5 세기의 위진 남북조 시기의 <송서><양서> 부터 18 세기 말에 편찬된 <만주원류고>까지 대략 1300 여 년 동안 중국 정사급 기록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백제의 요서군 지역 진출과 경략이 망상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백제본기> 개로왕 18 년(472) 기록에는 사사로이 임명한 북위로 보내는 사신의 직함을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라 하였고 그 상표문 중에 `풍족의 사마는 조축의 생각이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천위가 한 번 거둥하면 정벌이 있고 싸움은 없을 것이며 신도 비록 불민하나 온힘을 다하여 마땅히 부하를 거느리고 성풍을 이어 향응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여기에서 말한 대방과 낙랑의 여러 군은 500 여 년 전 한.조위 등에서 설치한 만.우거가 잠시 점거한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 부근의 대방.낙랑군을 말한 것이 이 아니다.

 

개로왕이 언급한 풍족이란 모용선비가 중원에서 쫓겨온 후연을 탈취한 풍발.풍홍의 북연을 말한 것이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 24 년(436) 기록과 같이 북위가 북정하여 북연의 백랑성을 공격하고 승리하자 장수왕은 장수 갈로맹광을 북연 도읍 용성 화룡궁으로 보내 전후 80 여 리에 이르는 풍홍과 용성 호구를 요동을 거쳐 고구려로 데려갔지만 용성 부근에 남은 북연 백성이 조축의 생각이 있고 즉 주인인 풍홍을 따를 것이고 낙랑의 여러 군이 고향을 생각한다는 것 역시 용성 부근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의 위시한 여러 군 백성들이 옛 풍홍을 잊지 않아 북위를 맞이하려는 군세가 상당하니 속히 용성으로 군사를 보내 고구려 영향력을 말끔하게 제거해달라는 얘기다. 

 

결국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 지역에서 굴기한 백제는 서진말인 서기 310 년대 부터 서쪽에 있는 바다 곧 지금의 란하 최하류를 건너 요서군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344 년에는 선비족 모용황 도성인 용성에 부여.고구려와 함께 포로 신분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436 년 풍홍이 고구려로 납치된 후로는 풍홍의 화룡성 지역까지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대방 외 여러 군을 설치하였을 것이다. 

 

이제 동성왕 10 년(488년) 기록을 보자.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위나라가 보낸 병사가 우리를 공격했지만 우리에게 패했다.

 

백제가 북위 병사를 패배시켰다는 기록인데 마땅히 북연 풍홍의 도성 용성.화룡궁 지역을 포함하여 서남쪽에 있는 대정현.대녕위.대녕성 지역까지를 차지한 요서백제의 기사다. 탁발선비 북위는 요서군의 북쪽 지역 유성현 일대의 모용선비 지역까지만 정벌하였을 뿐이지 고구려 영역은 커녕 요택을 건너지도 못했다. 

 

아래는 요서백제와 관련한 선학들의 인식이다.

 

신경준 (1770년 與地考)
최치원이 당나라 대사시중에게 보내는 시에 나오는 백제가 대륙 동해안을 뒤흔들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백제의 백제의 요서 영유는 사실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누락된 것이라고 봄


신채호 (1931년 조선상고사)
근구수왕때 중국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 등의 지방을 점령하였던 것이며 북조계의 사서에 기록이 없는 것은 북조사관들의 태도 때문임. 백제가 멸망할 때에도 요서에 백제군이 있었다고 봄.

 

김세익 (1967년 력사과학 , 1991년 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
백제의 요서진출을 3세기 말로 보고, 6세기 초중엽에 걸쳐서 요서지역에 진평군을 두고 다스렸고,
백제군의 위치는 대릉하, 소릉하의 하류유역에서 란하의 하류유역으로 봄.

 

 

 

라. 월지장

 

최치원과 신채호는 백제가 서국의 동해안 곧 산동.강소.절강 등의 해안 지역을 점령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 인식한 것이다. <구당서>에도 백제의 땅이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 월주越州도 강소.절강 지역일 수는 없다.

 

<청사고/지리지> 기록에는 직예성 준화직예주 풍윤현에 월지장越支場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豊潤 ...州東南百裡 改예同玉田  海南二百裡...薊運河自玉田緣界...越支場 南百裡 大使駐...

풍윤...(준화직예)주에서 동남쪽으로 100 리 떨어진 곳이다. (옥전과 같이 고쳐 예속시켰고)? 남쪽으로 200 리 떨어져 바다가 있고 ...계운하가 옥전 부근 경계에서 흘러온다. ... 월지장은 남쪽으로 100 리 떨어진 곳인데 대사가 주재한다.

  

풍윤현에서 남쪽으로 100 리 떨어지고 대사大使가 머무른다는 월지장越支場은 발해 연안의 습지대고 대략 지금의 당산 부근으로 보인다. 월지장은 청국이 주.현 지역 내에 설치한 시설 관명인 주판州判.통판通判.주부主簿.순사巡司.유격遊擊.부장副將 등과는 성격이 판이한 대사大使가 주재駐在하였다. 아마도 고대부터 전해지거나 특수한 직무와 관련된 직명으로 보이며 월지장 위치도 요서백제지와도 멀지 않다. 

 

아마도 <구당서>의 그 월주일 것이다. 

 

2024, 3 월 고침

 

가. 개평蓋平.백제위례성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도 기록이다.   

 

京都上

古朝鮮馬韓之域 北鎭華山有龍盤虎踞之勢 南以漢江爲襟帶 左控闢?嶺 右環渤海 其形勝甲於東方 誠山河百二之地也 百濟中葉自漢山而徙居未幾播遷南土 高麗肅宗置南京 有時來巡...

옛조선과 마한 강역이다. 북쪽 진 화산은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형세이고 남쪽은 한강이 옷깃처럼 띠를 이루고 있고 왼쪽은 ?령이 관처럼 막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발해가 둘러쌓아 그 형승은 동방에서 이루어진 백두 곳의 땅 중 으뜸이다. 백제 중엽 한산에서 남쪽 땅으로 옮겨갔는데 고려 숙종이 남경을 설치하고 때마다 순행했다.

 

한국인들은 위의 경도를 지금의 서울로 이해한다. 또한 서울 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을 고대국 백제의 한수라고, 또 서울 지역이 마한 땅이였다고 즉답한다. 그런데  왜 <승람> 기록에는 서울 오른쪽 곧 서쪽에 발해가 있다고 하였을까? 서해西海 또는 황해黃海를 발해라고도 생각했다는 얘기인가? 과연 지금 서울이 고려 시기 남경이였는가?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기록을 보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이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해변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열 사람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거하고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혔으니 천험지리가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을 정함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드디어 아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대浿帶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 2 년 봄 정월에 왕은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와 연접해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거짓이 많으니 마땅히 무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쌓아서 막고 지킬 계획을 세우시오`하였다.

... 4 년... 가을 8 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어 수호하였다.

... 8 년 봄 2월에 말갈적 3000 명이 위례성을 포위해 오니 왕은 성문을 닫고 출전하지 않았다. ...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난날에 빙문과 우호를 맺어 한집안같이 여겼는데, 지금 우리 땅 가까이에 성.책을 세우니 혹시 잠식할 모의가 있는 것이 아니오. 만약 구호를 변치않아 성을 헐고 책을 부수어버린다면 의심을 할 바 없으나 그렇지 않다면 한 번 싸워 승부를 결정합시다`하니 왕은 회답하기를 `험을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니 어찌 감히 이로써 우호에 변함이 있겠는가 마땅히 집사는 의심하지 마시오. 만약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출동한다면 소국도 역시 대응할 것이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더불어 화평을 잃게 되었다.

10 년 가을 9 월에 왕은 사냥을 나가 신록을 잡아서 마한으로 보냈다. 겨울 10 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구하니 왕은 군사 200 명을 보내어 곤미천 위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

11 년 여름 4 월에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책을 습격하게 하여 쳐부수고 100 여 명을 죽이거나 약탈하였다.

...13 년 ... 여름 5 월에 왕은 신하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서 강토를 침략하므로 편한 날이 없는데 하물며 요상한 일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편안치 않아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할 것이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니 토지가 매우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하여 길이 안전할 계책을 도모할 것이다` 하였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 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를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였는데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에 한하며, 서로는 대해에 이르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 월에 성궐을 세웠다. 

14 년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 월에 왕은 부락을 순무하여 농사를 권장하였다. 가을 7 월에 한강의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주1)

 

 

위와 같이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수시로 침입하였고 동쪽에 있는 낙랑군과도 껄끄러운 관계였다. 첫도읍 위례성 북쪽에 는 패수.대수가 흐르고 남쪽에는 한수가 있었다. 얼마후 온조왕은 낙랑군을 피하여 한수를 건너 기름진 땅으로 천도했다. 당시 강역은 북쪽은 패수부터 남쪽으로 웅천까지, 서쪽으로는 대해, 동쪽은 주양까지라 한다. 그러면 서쪽 대해는 발해일까?  

 

한국역사학계는 당연히 발해를 오기라고 주장할 것이고 한수는 지금의 한강이라고 단정할 것이다. 학계가 그렇게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와 이유는 아마도 비류.온조 형제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건넜다는 패수.대수를 한반도 평양을 흐르는 대동강과 예성강이라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2000 여 년 동안의 중국 정사 기록에도 패수가 면면히 기록되어 있다. 즉 중국 영역에 패수가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 패수가 바다로 흘러들었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상은 한.당 시기의 염난수였으며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되어 불린 요하의 하류인 만灣이였고 그 염난수.요하는 지금의 란하 위치를 흘러내렸다. 따라서 요동군 동쪽 경계 바깥 지역이고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에 흐르는 패수는 지금의 한반도 대동강일 수가 없다. 마땅히 지금의 란하 하류의 동쪽 작은 지류였다.      

 

 

 

 

그 패수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패수는 평양의 대동강이니 본래 상흠의 <수경>에는 잘못이 없었는데, 역도원이 잘못 의혹을 만들어서 후인으로 하여금 따로 다른 물을 찾게 했다. ...연나라가 조선과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고 했으니, 만일 대동강을 패수라고 한다면 어찌 다시 조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왕검은 평양이니, 위만이 대동강을 이미 건너서 평양에 다시 도읍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것이 이미 분명하지 않은가? ... 증지는 지금의 증산현이요, 염난수는 지금의 파저강이며, 서안평은 용만에서 물 건너 땅이니, 옛 현의 이름이다. 백산은 옛 개마대산이니 우리 나라에서는 백두산이라고 했다. 반고가 지은 <조선열전>에서는 <사기>의 글을 그대로 써서 개정한 것이 없으나 <지리지>를 지으면서 비로소 두 물을 구별했으니, 이는 대개 그 학술이 상흠의 연원과 같은 까닭이다. 장안은 조선의 습수와 산수와 열수가 있으니, 세 물이 합해서 열수가 되었다고 했다. 

 

위는 장지연이 <임나고><백두산정계비고>를 첨부하고 이민수가 옮겨 출간한 <아방강역고/패수변>의 글이다. 패수를 평양의 대동강이라 했다가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것이 이미 분명하지 않은가라는 글을 과연 정약용의 글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강역고>에 <임나고> 등을 첨부하여 역주한 장지연도 위 글에 이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중동中東 역사에 대동강은 모두 패수라고 했으나, 여기에서 열수라고 한 것은 그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지지>에는 지금의 한수도 세 근원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강릉 오대산에서 나와서 금장강錦障江이 되었고, 둘째는 회양 금강산에서 나와서 소양강이 되었으며 , 세째는 보은 속리산에서 나와 달천이 되었다. 또 임진강과 합류했으니, 열수는 한강인데, 패수가 어찌 두 이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위 두 글에 이어 정체 불명의 어떤 이가 아래와 같이 사서의 패수.대동강 문장을 나열하였다. 

 

이로부터 내려오면서 사전史傳에 기록된 바로는 모두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북사> 고구려가 평양성에 도읍하니, 산의 굽고 돈 것을 따라서 남쪽으로 패수에 임했다.

<수서>... 

<당서> 소정방이 패강에서 오랑캐 군사를 물리쳐서 마읍산은 빼앗고, 평양성을 드디어 포위했다.

<일통지> 대통강大通江은 평양성 동쪽에 있는데 옛 이름은 패수로서, 그 가운데에 조천석이 있었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오랑캐 군사를 패강에서 물리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김부식>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겠는가. <당서>에 의하면 평양성은 한 낙랑군으로서, 산을 따라 굽이 돌아서 부곽이 되고, 남쪽으로 패수를 끝으로 했다고 했다. 또한 <지>에 보면, 등주 동북쪽을 바다로 가다가 바닷가의 남쪽 곁으로 패강 어구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의 서북쪽에 이르렀다고 했다. 또 수의 양제가 동쪽을 정벌하면서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창해도군은 배를 타고 1000 리에 걸쳐 패강을 가로질러 멀리 평양으로 나오라.`했으니, 이로써 살펴보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라는 것이 명확하다.

 

 

글 순서로 보아 장지연은 정약용의 압록강 비정에 대해 논리적인 비평을 해야 했는데 중동이라는 정체 모호자를 끌어들어 모두 패수를 대동강이라 했다는 결론을 먼저 내린 후 패수와는 아무 관계없는 장안의 열수 해설을 인용하였고 열수를 한강이라 오판한 것도 모자라 열수는 패수가 아니라며 뜬금없는 결론을 내렸다. 대체 무슨 논증을 이런 식으로 하는가? 게다가 불명한 삼자도 <김부식> 등의 글을 인용하는 것 만으로 대동강이 패수인 것이 명확하다는 결론을 유도하려 하였다.  

 

하지만 정약용은 대동강이 아니라 압록강을 패수라고 주장한 것이고 대동강이 흐른다는 평양 위치도 정약용은 물론이고 이조선 시기의 모든 선학들은 지금의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쌍산자 부근 지점으로 당연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 인식은 당연히 김부식을 위시한 고려 선학들의 지리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패수를 압록강이라 추정한 것은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을 흐른 물길을 낙랑군의 중심 지역을 흘렀을 820 리 길이의 열수로 추정한 것이기 때문에 명백한 오류다. 

 

이러한 지리를 개략적으로 설명한 기록이 양성지 상문 중에 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한도가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겨우 30 일 거리라  하였으니 양성지는 한도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그 한도란 대체 어디서 유래된 것이며 그 위치는 어디였을까? 

 

인평대군은 음력 10 월 29 일 연도 즉 북경을 떠나 삼하현, 산해관, 우장 등에서 쉰 3 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걸어 12 월 1 일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했다. 북경에서 30 일 거리는 봉황성이였고 의주는 32 일 거리다. 결국 한도는 압록강 바깥 명나라 영역에 있었고 동팔참 지역은 아니라는 얘기다. 결국 요양의 북쪽 혹은 남쪽에 한도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한 위치의 한도를 설명한 기록이 뜻밖에도 거란.요국 정사인 <요사/지리지> 동경도다.  

 

<요사/지리지> 동경도

... <大東丹國新建南京碑銘> 在宮門之南 外城謂之漢城 ...

辰州 ...高麗蓋牟城 唐太宗會李世적勣攻破蓋牟城 卽此 渤海改爲蓋州 又改辰州 以辰韓得名 井邑騈列 最爲沖

        會 ... 統縣一 建縣 ...

盧州 ...本渤海杉盧郡 故縣五 ... 漢陽 ... 統縣一熊嶽縣 西至海十五裏 傍海有熊嶽山 ...

海州 ...本沃沮國地 高麗爲沙卑城 李世적勣嘗攻焉 渤海南京南海府 ... 都督沃晴椒三州 ... 太平中大延琳叛 南海城堅守

        經歲不下...

耀州 ...本渤海椒州 故縣五 椒山 ... 巖淵 皆廢 ... 統縣一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一百二十裏

 

.. 대동단국 남경을 새로 설치한 것을 기념한 비명에 궁문 남쪽에 한성이라 불리는 외성이 있다. ...

진주 ... 고구려 개모성이다. 당태종이 이세적과 만나 공파한 개모성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개주를 설치했다가 진주로 고쳤다. 진한에서 따온 명칭이고 마을이 크게 들어서 있고 번창한 곳이며 건안현을 통령한다. ...

로주 ... 본리 발해 삼로군이며 옛 현은 5 이였고 ... 한양 ... 이였다. 웅악현을 통령한다. 서쪽으로 바다까지는 15 리이고 바다 옆에 웅악산이 있다. ...

해주 ... 본래 옥저국땅이다. 고구려 사비성이 있었고 이세적이 공격했던 곳이였으며 발해는 남경남해부를 설치했다. ... 옥.청.초 3 주를 통령하고 ... 태평 기간에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켜 남해성을 견고하게 지켰으니 해가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

요주 ... 본래 발해 초주였고 5 개 현을 다스렸고 ... 암연 등이였고 모두 폐했다. 통령하는 현은 암연 1 개 현이다. 동쪽은 신라와 경계하였고 옛 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 동북쪽으로 해주까지는 120 리 떨어졌다. 

 

 

위와 같이 고구려의 개모성.사비성.평양성, 발해가 설치한 진주.개주.한양현.암연현 및 옥저국 땅이였고 신라의 서쪽 경계였던 지역에 거란도 한성.건안현.웅악현.암연현 등을 설치했다고 한다. 거란.요국은 황하 곧 요동군을 흐르는 1250 리 길이 대요수 유역이 그들의 터전이였다. 진국발해가 쇠약해 지는 기미를 눈치채고 동쪽으로 염난수 곧 요하를 건너 진국발해를 공격하여 결국 무너트리고 한.당 시기의 요동군 요양현에 동경요양부를 설치한 것이다. 결국 거란.요국은 요동 지역의 옛 지명을 습용했음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한성.한양 지명을 사용하지 않았고 <요사/지리지>에는 한성이 백제 도읍이라는 연혁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진국발해가 설치했다는 한양현.암연현과 거란.요국이 설치한 웅악현은 백제의 한성.웅진과 관련된 지명일 것이라는 추정 외에는 달리 연원을 추적할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30 일 정의 한도는  위치는 요양 동쪽 방향의 동팔참 중 7 번째인 봉황성과 요양에서 남쪽으로 요하를 따라 내려가면서 있는 개주蓋州(주2) 남쪽에 설치된 한양.웅악현과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는 옛 평양성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비록 평양성 곁을 흐르는 대동강을 패수.패강으로 잘못 이해했지만 김부식이 언급한 평양.낙랑군.등주.초도.신라서북.창해도 등의 위치도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 지역으로 인식하고 설명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패수는 <삼국사기/신라본기> 성덕왕 34 년(736) 2월 기록에는 패강으로도 기록되었다.

正月... 遣金義忠入唐賀正 二月 副使金榮在唐身死 贈光祿小卿 義忠廻 敕賜浿江以南地

정월에 김의충을 당에 보내어 신년을 축하하였다. 2 월에 부사 김영이 당에서 죽으니 공록소경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돌아오는 편에 칙지로써 패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

 

당 현종이 신라가 진국발해를 공격하면 패강 남쪽 땅을 주겠다는 약속의 이행 선언일 뿐이고 통신라를 이미 패강 즉 패수 남쪽인 거란.요국 강역의 동경요양부 관내 요주 암연현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로써 <한국통사>를 저술한 박은식 서문에 나타난 위례성 관련 내용인데 쌩뚱맞은 것이 아니라 정확한 역사 지리 인식의 산물이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재앙이 닥쳐왔을 때 태어나 나라 망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차마 죽지 못하고 마침내 도망쳐 나왔다. 경술년(1910) 모월 모일 아침에 한성을 떠나 저녁에 압록강을 건너 다시 북쪽으로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가 위례성(慰禮城)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머물렀다. (박은식이 환인현으로 망명한 것은 졸본성-현재 오녀산성일 것이다) 고금을 살펴보니 허전한 느낌이 들고 안타까워 오랫동안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역 땅에 도망와 있으니 사람을 대하기가 점점 부그러워지고 길가 아이들과 시장 사람들조차 모두 나를 망국노라 욕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비록 넓다고는 하나 이런 욕을 짊어지고 어디로 돌아가리오. 때는 혼하(渾河)에 가을이 저물어 쑥은 꺾어지고 풀들은 시들었으며, 원숭이도 슬피 울고 부엉이도 울어댄다.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런 정경을 바라보고 더울 서글퍼져 견딜 수가 없다.

 

1910 년 압록강을 건너 북쪽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 위례성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머물렀다는 얘기가 한반도에서 가능한 얘기이겠는가? 더구나 위례성을 바라본 후 다시 조국땅을 밟았다는 얘기도 없이 곧바로 청나라 봉천성 봉천부 무순현.성경 심양 승덕현.요중현을 경유하여 해성현에서 요하로 합류한 혼하를 바라보았는데?

 

한편 1770 년 대에 편찬된 <만주원류고>에 실린 당 현종 시기 재상을 역임한 장구령(673~740) 문집에 있다는 `여신라김흥광칙` 글이다.   

 

경이 패강에 군영을 설치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은 발해의 요충지와 마주 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록산과도 마주 바라보고 있어 여전히 원대한 계책이요 원래부터 좋은 계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더욱이 저 조그만 발해가 오래전에 벌써 주벌을 모면한 점을 경이 매양 미워하고 있는데 이 점은 매우 가상하다 아니할 수 없다.

                                                                                    <만주원류고/부족4/신라> 장진근역 177 쪽

 

당 시기 요동군 지역을 차지하고 남경을 설치한 진국발해를 남침을 경계하는 신라의 패강 군영은 당연히 백제 초도 위례성 북쪽의 패.대수의 패수에 설치한 군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패수여야만 북쪽의 진국 남경남해부는 물론이고 서쪽으로 요하 하류인 만灣 건너에 있는 당 평주 노룡 지역 곧 한 시기 요서군 비여현 지역을 차지하고 발호한 안록산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요사/지리지> 요주 암연현 기록의 옛평양성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평양성을 표현한 것이며 고구려 장수태왕 시기 점령한 백제 한성을 말한 것이다. 

 

 

 

 

 

주1)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 南行 ... 遂至漢山 ... 十臣諫曰 惟次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唨

               大海 ...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 扶餘 ...

               國家屬於琉留 ... 不如奉母氏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

            13 년 夏 5 月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

            18 년 冬10月    靺鞨掩至 王帥兵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43 년 冬10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다루왕   3 년 冬10月    東部屹于與靺鞨戰 於馬首山西克之 殺獲甚衆

              4 년 秋 8 月    高木城昆優與靺鞨戰 大克 斬首 二百餘級

              7 년 秋 9 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燒百姓廬屋 

             28년 秋 8 月    靺鞨侵北鄙

             29년 春 2 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 靺鞨

기루왕  32년 秋 7 月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49년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救之

초고왕  49 년 秋 9 月   命北部眞果 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10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王薨

 

주2)

<명사/지리지>

蓋州衛 屬遼陽路 洪武四年廢 ... 東北有石城山 ... 又東有駐蹕山 西濱海 有連雲島 上有關 又東有泥河 ... 又西北有梁房口關 海運之舟由此入遼河 旁有鹽場 又東有石門關 西有鹽場 東有鐵場 北距都司二百四十裏

<청사고/지리지>

蓋平 府西南三百六十裡 明置蓋州衛 ... 又西南六十裡有熊嶽防守尉 故遼城也 ... 東棉羊山 縣東南諸山皆發脈於此 西濱蓋州灣 北淤泥河 南蓋州熊嶽河 ... 

<금사/지리지>

葢州, 奉國軍節度使, 下. 本髙麗蓋葛牟城, 遼辰州. 明昌四年, 罷哈斯罕, 建辰州遼海軍節度使. 六年, 以與陳同音, 更取蓋葛牟為名. 户一萬八千四百五十六. 縣四 鎭二. 湯池. 【遼鐵州建武軍湯池縣】 鎮一【神鄉】 建安. 【遼縣】 鎮一【大寧】 秀巖. 【本大寧鎮, 明昌四年陞. 太和四年廢為鎮, 貞祐四年復陞置.】  熊岳. 【遼盧州玄徳軍熊岳縣. 遼屬南女直湯河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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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월 고침

 

나. 개주開州 봉황산

아래는 양성지의 상문 중 일부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2 년(1481) 10 월 17 일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생각건대, 자고로 천하 국가의 사세(事勢)는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혹 알지 못하기도 하고 비록 이미 알아도 또 〈어떻게〉 하지 못하니, 이것이 모두 잘못된 일중의 큰 것입니다. 일을 먼저 도모한다면 어찌 잘 다스리고 오랫동안 안전하기가 어렵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중국이 장차 개주(開州)에 위(衛)를 설치하려 한다 하는데, 신이 거듭 생각해 보니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는데, 산세가 우뚝하고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으며, 3면이 대단히 험하고 1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통하는 이른바 자연히 이루어진 지역이므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고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 태종(太宗)이 주둔하여 고려(高麗)를 정벌하였고, 또 요(遼)나라의 유민(遺民)이 여기에 근거하여 부흥(復興)을 도모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누가 우리 나라와 관계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북쪽으로는 산로(山路)로 심양(瀋陽)·철령(鐵嶺)·개원(開元)을 가리켜 야인(野人)과 연접(連接)하였고,남쪽으로는 해도(海道)로 해개(海蓋)·금복(金復)을 가리켜서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요동(遼東)·광녕(廣寧)·금주(錦州)·서주(瑞州)를 가리켜 연주(燕州)·계주(薊州)로 통하니, 저들에게는 유주(維州)의 이로움이 있고, 우리에게는 한중(漢中)의 세가 있는 실로 동도(東道) 요충(要衝)의 땅입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 <왜청도> 봉황산 부분도

 

 

 

-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편찬한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추정

  소장: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고지도/`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2024, 3 월 고침

9/ 4. 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으로 

 

인평대군은 11월 23 일 요양을 떠나 청국 국경 관문인 책문으로 향했다. 요양에서 봉황성 책문까지 310 리 길은 험한 산길이고 요양에서 의주까지는 450 리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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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 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의주용만관 80/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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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요양부터 의주까지의 전체 로정의 일기다. 

 

23일(정묘)

밤에 큰눈이 내려 행차가 떠나지 못했는데, 평명에 조금 개었다.

돌아갈 생각이 화살 같아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출발을 재촉하여 쌍참(雙驂)을 멍에했다. 사시에 냉정(冷井)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눈이 하늘을 덮어 대낮이 밤처럼 어둡다. 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으나, 한양(漢陽)에서 연산(燕山)에 이르기까지 냉정(冷井)이 중간이 되니 이미 고국에 절반이나 이른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했다. 미시에 떠나 옥상령(玉祥嶺)을 넘었다. 삼류하(三流河)를 얼음 위로 건넜다. 저물녘에 낭자산(狼子山)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는데,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종일토록 눈을 무릅쓰고 길을 걸었더니 인마가 모두 굶주리고 피곤했다. 이튿날 새벽에 큰 고개를 넘을 생각을 하니, 매우 근심스럽다. 초저녁에 역관 양효원(梁孝元)이 진동보(鎭東堡)로부터 돌아와서 소상하게 말했다. 동지사는 오늘 연산(連山)에서 자고 내일 첨수(甜水)에 이른다고 하며, 이어 천서(天書 임금이 보내는 글)와 가신(家信)을 올렸다. 나라가 무사하고 집이 편안함을 자세히 알았다. 마음이 너무나 기뻐서 바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칠 것 같기도 하다. 두 보(杜甫)의 시(詩)에 ‘집에서 온 편지가 만금의 값어치가 있다.[家書抵萬金]’라고 한 것이 실로 빈말이 아니었다.

이날은 아침에 30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24일(무진)

흐렸다가 동틀 무렵에 눈이 개었다.

조반을 먹고 늦게 떠났다. 차량(車輛)과 가교(駕轎)는 험한 곳을 피해서 길을 갔다. 달려서 청석령(靑石嶺) 밑에 이르렀다. 고개 오른편에 암혈(巖穴)이 있고,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의지하여 내려가게 되어 있으니, 이는 바로 석웅황(石雄黃)을 캐는 곳이다. 고갯길은 전부터 험악한 데다가 이제 눈이 말의 무릎까지 차서 개 이빨 같은 악석(惡石)을 가리우고 있는데, 초행하는 사람은 그 험한 것을 알지 못한다. 오시에 첨수참(甜水站)의 북문(北門)에 이르렀다. 동지사 역관(冬至使譯官) 이형백(李馨白)ㆍ김진립(金晉立)이 와서 뵈었다. 성문(城門)에 들어가서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동지사의 일행 중 마부와 말이 먼저 이르렀다. 성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두 상인(商人)이었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른다고 했다. 상고배가 이처럼 혼잡을 이루기는 근래에 없는 일이었다. 해질 무렵에 동지 정사(冬至正使)인 판서 윤강(尹絳), 부사 참의 이석(李晳), 서장관 지평 곽제화(郭齊華)가 와서 만났다. 친구와 만나 다정한 말을 나누노라니 시름에 찬 나그네 회포가 시원하게 풀려짐을 느꼈다. 헤어졌던 수역 지사(首譯知事) 박경생(朴庚生) 이하 사람들이 일제히 와서 뵈었다. 돌아오는 길에 풍윤현(豐潤縣)에서 국화분(菊花盆)을 가지고 올 것을 분명히 부탁했다.

이날 35리를 갔다.

 

25일(기사)

맑음. 이른 아침에 윤 판서 이하가 와서 하직하므로,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것도 몰랐다. 늦게 떠나 돌이켜 보니, 자준(子俊 판서 윤강의 자)의 행차가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자연히 마음이 우울해졌다. 자준의 마음은 필시 나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다. 성 서쪽의 큰 내는 급한 여울인데, 얼음장이 물 위를 덮어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말을 언덕 위에 세우고 막하의 모든 사람, 역졸들까지도 모두 말을 타고 건너게 했다. 사시에 회령령(會寧嶺)을 넘고 벽동 천변(碧洞川邊)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적설(積雪)이 말 배[馬腹]까지 찼다. 저녁에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26일(경오)

맑음. 밤중에 먼저 전사립(田士立)을 책문(柵門)으로 보내어 의주서 맞이하는 인마가 들어오고 있는지 여부를 탐지케 했다.

일찍 길을 떠났다. 사시에 나장탑(羅將塔)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진이보(鎭夷堡)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날씨가 몹시 찼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날이 저물 때 선래군관(先來軍官) 최귀현(崔貴賢)이 하인 강적(江赤)을 데리고 서울로부터 달려와서 천서(天書)와 가신을 바쳤다. 낭산(狼山) 이후로 자주 집 소식을 듣고 또한 고국의 진미를 맛보니 나그네의 회포에 위안이 되었다. 사행(使行)의 많은 사람이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번번이 사고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면하게 되어 상하가 모두 기뻐했다. 유독 홍여한(洪汝漢)이 자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마부(馬夫) 한 사람이 어머니의 상(喪)에 간 것이 가장 가련한 일이었다. 최귀현에게 따뜻한 말로 위안해 주면서 이어 왕복한 소식을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10일에 압록강을 건너 가산(嘉山)에 이르러서, 이면(李㴐)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어서 떠나가지 못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파발을 달려 14일에 입경(入京)했습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하셔서 특별히 술과 음식을 주시고 돌아갈 것을 허락하셨는데, 김여준(金汝俊)은 병이 중하여 서울에 머물러 있고, 혼자서 강적(江赤)을 데리고 16일 다시 서울을 떠나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했다. 저녁때가 되자, 자진(子珍)과 성서(聖瑞)가 와서 임금이 만안(萬安)하심을 하례했다. 서울서 온 감귤(柑橘)ㆍ청어(靑魚)ㆍ은어(銀魚)로 안주를 만들고, 의주에서 보내온 향기로운 술을 잔에 가득 따라 부어 취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변방에서 얻기 어려운 경지였다. 화각(畫角)이 두 번 울리고 인마가 떠났다. 행중에 엄명을 내려 먼저 객점(客店)에 드는 일을 금하였는 데도 이에 따르지 않는 자가 많으니, 너무나 분개할 일이다. 오늘은 비밀히 군관 김여로(金汝老)를 보내어 남몰래 먼저 가서 객점(客店)에 이른 자 14명을 붙잡아 중장(重杖)을 쳤다. 그리고 원역(員役) 중에서 종을 제어하지 못한 잘못으로 장(杖)을 받은 자도 있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 모두 30리씩 갔다.

 

29일(계유)

맑음. 새벽에 떠났다. 8리쯤 앞으로 나갔는데, 부사를 배행(陪行)하는 당상 역관(堂上譯官) 박이절(朴而嶻)이 달려와서 급히 고하기를,“선래군관(先來軍官) 이면(李㴐)의 종이 염초(焰焇)를 수레 속에 감추어 실었습니다. 고용(雇用)한 차부(車夫)는 통원보(通元堡) 사람인데, 좋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장(城將)에게 이 사실을 고발해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좋은 대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했다. 그러나 일이 이미 벌어졌으니, 선후책(善後策)을 강구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요행을 바랄 뿐이었다. 또 5리를 가서 책문에 이르렀다. 먼저 도착한 인마가 모두 책문을 나가지 못하고 한데 모여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교자(轎子)를 책문 앞에 내려놓았다. 성장(城將)이 손에 작은 염초 덩어리 하나를 쥐고서 말하기를 ‘이제 고발로 인해서 금물(禁物)을 이미 적발했습니다. 일행의 짐을 모조리 수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궁극한 곤경에 빠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무슨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좋은 말로 설득하고 있을 즈음에 먼저 온 인마가 모두 샅샅이 수색을 당했다. 그야말로 백인(白刄)으로 서로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금물(禁物)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품목을 일일이 기록하고 연경(燕京)에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마다 실색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내가 생각건대 이는 근년에 없었던 일이므로 그들이 하는 대로 버려둘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인마를 뒤로 물리치고 말안장을 내리고 밥을 짓게 하여 그 형적(形跡)을 감추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역관을 보내서 엄격히 항의(抗議)하게 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갈수록 횡포를 부려 사람으로 하여금 분함을 금치 못하게 했다. 붙잡혀 있는 쇄마부(刷馬夫) 다섯 사람을 교자(轎子) 앞으로 끌어다가 갑자기 중장(重杖)을 치고, 저네들과 다시 말하지 못하게 했다. 광록소경과 성장(城將)이 이와 같은 불평의 기색을 보자 도리어 불안스럽게 여기면서 수색을 늦추고 인마를 나가게 하는 한편 부드러운 낯빛으로 와서 위로하기를, “이 물건들이 비록 금령(禁令)에 저촉되기는 하지만, 가죽은 무두질해서 만든 것이고 금ㆍ은(金銀)은 녹여서 가공(加工)한 것입니다. 대개 중요하기는 하나 그 죄는 중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했다. 다시 광록소경과 작별했는데, 상품(上品) 은장도(銀粧刀)를 예물로 주었다. 채찍을 휘둘러 책문을 나왔다. 이는 필시 만시(灣市)에서 남아 있던 재앙이 억울하게도 사행(使行)에 미친 것이다. 그 노갑이을(怒甲移乙 갑에게서 성난 것을 을에게 분풀이하는 것)하는 소행이 더욱 통탄스럽다. 다섯 죄인은 차원(差員)인 희천(煕川) 원을 시켜 압송해서 가게 했다. 오시에 대룡산(大龍山)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대동(大同)의 우졸(郵卒)이 말 두 필을 끌고 와서 뵈었다. 오늘 아침에 벌어졌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털이 위로 뻗친다. 이것은 실로 요동을 드나든지 20년 동안 일찍이 없었던 치욕이었다. 붙잡힌 다섯 놈은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아침 수색에서 자진(子珍)의 종이 붙잡힌 것을 내가 주선해서 간신히 무사하게 만들었다. 자진이 찾아와서 간곡하게 사례했다. 성서(聖瑞)가 뒤를 이어 와서 일을 상의했다. 상통사(上通事) 최진남(崔振南)에게 일행 속에 금물(禁物)을 감추어 오는 자를 적발하여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10대를 쳤다. 비록 체례(體例)에 의해서 벌이 행하여진 것이지만, 어찌 다만 그의 허물이겠는가. 10여 년을 두고 금령(禁令)을 범한 것이 이제 비로소 발각된 것이다. 관서(關西) 음우(陰雨)의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이 한스럽다. 저녁에 유전(柳田)에 이르러 노숙(露宿)했다. 의주중군(義州中軍) 장우길(張友吉)ㆍ동지(同知) 박희복(朴希復)ㆍ미관첨사(彌串僉使) 장사민(張士敏)ㆍ건천권관(乾川權管) 김수창(金壽昌)ㆍ전 권관(權管) 김준철(金俊哲)이 와서 뵈었다. 의주 포수가 노루 두 마리를 바쳤다. 초저녁에 자진(子珍)이 찾아왔다. 들에 천막을 쳤지만 날씨가 차지 않았다. 노루를 굽고 술을 데워 마시면서 무릎을 맞대고 정답게 담화를 나누다가 밤이 깊은 뒤에 헤어졌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다 같이 30리씩 갔다.

 

1일(갑술)

아침에 눈이 내리고 저녁에 흐렸다.
인마가 밤에 떠나는데, 청마(淸馬) 세 필이 별안간 보이지 않았다. 사면이 모두 다북쑥뿐이니 도적이 있을 리 없다. 괴이한 일이다. 새벽에 떠났다. 오시에 갑목(甲木)의 비석 곁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말 먹이는 사람들이 탕참산(湯站山) 골짜기에서 잃어버린 말을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 곤장을 쳐서 경계했다. 백마(白馬)에 귀양와 있는 사람 김진창(金振昌)은 전에 관하(管下)의 아전이었는데, 와서 뵈었다. 책문에서 붙잡힌 죄인 중에 정범(正犯) 두 사람은 도피했다. 그러므로 차범(次犯) 두 사람을 잡아서 수를 채웠더니 밤낮으로 원통함을 호소했다. 정범을 오늘에야 찾아내게 되어 차범 두 명을 석방했다. 점점 고국에 가까워오니 돌아갈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눈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신시에 삼강을 얼음 위로 건넜다. 과섭차원(過涉差員)으로는, 중강의 북쪽은 옥강만호(玉江萬戶) 이국립(李國立)ㆍ남쪽은 방산만호(方山萬戶) 김윤성(金胤晟)이고, 압록강의 북쪽은 수구만호(水口萬戶) 김천일(金千鎰)ㆍ남쪽은 인산첨사(麟山僉使) 권진명(權震鳴)이었다. 강안에서 만윤(灣尹) 김휘(金徽)가 의장(儀仗)을 거느리고 나와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인마를 점고하였다. 용만의 남문(南門)으로 들어가서 용만관(龍灣館)에 유숙했다. 반년 동안 이역에서 무한한 고생을 하다가 고국땅으로 돌아왔다. 술잔을 기울여서 회포를 푸니, 그 기쁨은 말하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각무차원(各務差員)은, 청북도차원(淸北都差員) 정주(定州) 원 김경(金鏡), 지응차원(支應差員) 선천(宣川) 원 정한기(鄭漢驥), 역마차원(驛馬差員) 어천독우(魚川督郵) 김징(金澄)이다. 참(站) 위에 나와 접대하는 것은 태천(泰川) 원 홍경우(洪儆禹)이다. 부사ㆍ서장관과 함께 계본(啓本 임금께 상주하는 글)을 의논해서 만들었다. 금법(禁法)을 범한 죄인을 용만 옥에 굳게 가두었다. 용만으로 돌아온 일을 상주하는 계본을 보내는 파발 편에 임금에게 올리는 편지와 가신(家信)을 부치느라 새벽 닭이 두 홰를 우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책문에서의 난감한 일도 마무리 짓고 대군일행은 마침내 의주에 도착했다. 

 

가. 동팔참

 

아래는 북경부터 압록강 의주까지 1990 리 로정이 묘사된 고지도 <대청광여도>라 하는데 일본인이 교정하였다 하니 원도와 구별하여 <왜청도>라 하겠다. 

 

- <왜청도> 

   강희년간(1663~1722)에 채방병이 판각한 것을 1785 년 일본인 장구보적수(나가쿠보 세키스이)가 교정.

   영국도서관 소장

 

 

- 연산관 부근

 

주) 1~8 위치는 요양.낭자산.첨수참.연사관.진이보.진동보.봉황성.탕참 등 동팔참 위치.

 

 

 

요양에서 압록강까지 450 리 지역에는 요양.낭자산.첨수참.연산관  4 참과 진이보(통원보), 진동보(사열참), 봉황성(송참.개주), 탕참  4 참을 합하여 팔참이 있었다. 청국 기준인지 동東자가 첨부되어 동팔참이라 하였다. 참站은 사신.상인.행려자들의 숙박 편의를 위하여 설치한 시설이며 탕참은 이조선의 공지 지역이고 책문과 압록강 사이가 길지 않기 때문에 운영되지 않았다.

아래는 동팔참 지역을 거쳐 연경길을 오갔던 선학들의 지리 인식과 감회를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다. 

 

최부 <금남표해록>1488

해주.요동 등지의 사람들은 반은 중국인이고, 반은 우리나라 사람이고, 반은 여진 사람이었다. ... 석문령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 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과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대개 우리 나라 사람과 같았다.

荷谷 허봉 선조 원년(1567) 진하 부사

동팔참의 땅은 산동에 예속되어 요동의 외요가 되며, 산천은 우리나라와 꼭 같아서 준엄한 영과 큰 하수가 많다.

 

김정중 <연행록>

회령령, 회정길, 여기부터 마을 모양과 물맛이 자못 우리 나라와 같은 느낌이 든다. 연산관은 옛 鵝골關이다. 원발점에 들어가 말을 쉬게하고 좌우의 가게를 찾았다. 가는 곳마다 가게 주인이 한 잔의 차를 내어 들기를 권하니, 제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예절이 있다. 문 위 춘첩자가 있는데, `문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복을 받고 호는 동.서.남.북의 재물을 들이다`는 글귀가 우리 나라의 저자문에 붙은 축어와 비슷하다.

권협 <연행록>

분수령 이북의 지세는 북쪽에서 내려와 골짜기의 여러 물이 모두 태자하에 모여서 서쪽 혼하로 들어가고, 분수령 이남의 물은 모두 팔도하로 모였으니, 분수령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김창업 <노가재연행록>

분수령은 평탄하며 서쪽 물은 요하로 들어가고 동쪽 물은 중강으로 들어가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 금주.복주.해주.개주 등 요동의 모든 산은 여기에서 나아간 산맥이다.

 

김순협 <오우당연행록>

대개 송참부터 이 곳(분수령)까지의 120 리 사이는 비록 봉교나 골수와 같이 높고 큰 산들은 없어도 여러 험한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연이어져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도 마을을 열 만한 곳이 없다.

 

홍대용 <당헌연기>

책문은 변방의 황폐하고 궁벽한 지방으로 습속이 유치하고 사나우며, 입고 먹는 것을 오로지 조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행이 도착할 때마다 땔나무 같은 모든 물건의 값이 때를 틈타서 마구 뛰어오르고 방세도 매우 비싸게 받는다. 의주 사람들과는 이웃처럼 친숙하게 지내며 우리 나라 사정을 잘 알고 있어, 이해 타산에 밝고 교활한 것이 모두 우리 나라 풍속 그대로다. ... 북쪽 풍속은 사람을 비켜 세우는 법이 없는데, 오직 봉성 사람들만은 우리 나라 사정을 익히 알고 있어서 성장이 자나갈 때면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소리질러 길 아래로 비켜 세웠다. ... 책문을 열자 수백 명의 청인과 산서 상인이 몰려 나왔다.

유득공 <연대재유록>

책문의 호인은 사납고 거세어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매우 무례한데, 이 두 사람은 사람을 대접할 때에 예의가 매우 정성스럽고 도타우니, 풍속이 변방과 크게 다름을 알겠다.

 

김경선 서장관 <연원직지> 1832

책문에서 영수사까지로 하루 2 참씩 합하여 8 참이 되어 이름지은 것이다. 팔참 사이는 높은 산과 험한 고개, 큰 내와 깊은 숲이 많아 길이 매우 험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수레를 뒤집을 염려가 있다. 대개 그 난립한 산 중간에 널려 있는 들판이 많다. ... 고려촌은 요동들 첫머리에 있는 촌으로 촌가 수십 호가 있다. 동녕위의 옛터로 고려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崔認齋(이름은 晛 1563~1640)의 기록에는 `고려촌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고려말을 하고 차차 자라면서 의상과 관복은 고려 것을 많이 쓴다.`고 했는데 지금 보기에는 촌락이 매우 쇠잔하여 그 사람들이 아직도 고려의 후손인지 알 수 없다. 대개 동서로는 여기서(신요동)부터 산해관까지 이르고 남북으로는 의산醫山에서 시작하여 바다 가까이 이르러 그 길고 넓게 뻗친 것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천지가 큰 것을 알게 된다.

 

요양부터 책문까지는 인평대군 당시에는 청국 영역이였지만 고구려.고려 시기에는 요양 동쪽의 태자하와 북쪽 심양 부근의  혼하를 잇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인 경계선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기록에는 서압록이 보이는데 서압록은 요양 북쪽에 흐르는 혼하였던 것 같고 압록은 요양 남쪽의 태자하였던 것 같다. 

 

이처럼 인평대군이 청국 영역을 지나면서 건넌 요택.요하 및 요동 요양은 지금의 란하 중류와 동쪽 지역이였기 때문에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은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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