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사 현장

 

한.화.일 3 국 역사학계는 이조선 말기 이조선.청.아라사 강역과 지리가 아래와 같았다고 합니다. 

 

- <화국전도> 1910 년 추정 지리

 

결국 지금의 한반도 평양이 고조선의 왕검성이였고 서기전 108 년 설치된 한나라의 낙랑군 지역이였으며 이후 고구려의 평양성이였고 고려의 서경, 이조선의 평양부였다고 주장합니다. 혹 고조선이 지금의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고도 합니다. 

 

반면에 윤내현은 <고조선연구>에서 고조선을 단군 왕검께서 세운 조선으로만 정의하면서 고조선의 첫 출발지는 한반도 평양이였다고 합니다. 이후 세력을 키우면서 지금의 요동 본계로 추정되는 아사달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더욱 커진 힘을 바탕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지금의 산해관 부근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했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기자가 동래하여 백악산 아사달 지역에 이르자 제후국으로 삼고 지금의 북진 부근인 장당경으로 천도하였고 말기에는 요동 본계시의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기자가 동래한 산해관 부근의 조선은 이후 만.우거가 80 여 년 동안 점거하였고 서기전 108 년 한나라가 낙랑군을 설치한 곳이고 주장하였습니다. 

 

 

2. 신채호가 교시한 요동 위치와 왕검조선 3 도읍 추정지

 

우선 이러한 인식은 서기전 202 년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설치한 요동군 위치가 위 타원형 표시 지역이였다고 단정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동은 화국의 모든 지리 기록 곧 <관자>를 위시하여 <사기><한서>부터 <청사고>까지의 24 개 정사는 물론이고 <설원><산해경><수경주><통전><만주원류고> 등 대략 2100 여년 동안 저술.편찬된 사서에 상세하고 일관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 송 시기부터 제작된 모든 고지도에도 다행스럽게도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한국의 모든 역사서에도 기본적으로 언급되는 서쪽 화국의 지명과 지리입니다. 

 

그러나 위 <화국전도>에 표시한 요동군 주변의 지형은 춘추시대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저술된 문헌 기록이나 송 시기부터 제작된 모든 고지도의 묘사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지 지명만 일치할 뿐입니다. 

 

즉 요동군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곳이여야 하며 북경에서는 1180 리에서 1540 리 사이에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 곧 송.거란부터 개칭된 황하와 요하가 경유해야 하며 두 물길이 합류한 후 바다로 들어갔다고 하지만 실제는 강폭이 크게 넓어진 만灣이고 남쪽 발해 해안선까지는 대략 300 여 리 이상을 더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요동만을 만灣이라 할 수 있고 요하의 최하류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런데 지리 조작을 꿰맞추는 논리일 뿐인 식민사관과 조작 결과 거저 얻은 장물땅 지키기일 뿐인 동북공정 논리에 취해 있는 한국사학계도 민족사학의 비조라며 존중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추정은 저 둘과 다릅니다. 즉 일국의 조작과 청국의 장물아비 심보를 간파하고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며 강단.재야의 지리 인식을 모두 부정한 주장을 이미 100 여 년 전에 설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재야조차도 선생이 언급한 단군 왕검 조선의 3 도읍 곧 신조선.번조선.막조선의 도읍이라는 합이빈.개평.평양 위치를 지금의 합이빈.개평.평양으로 인식합니다. 또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라는 구절의 해성도 지금의 해성을 흐르는 물길이라며 의기양양해 합니다.  

 

1910 년 압록강을 건너 청국으로 망명한 단재 선생의 심중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압록강을 건너 청국으로 망명하여 요하에 이르니 느닷없이 란하라고 부르는데 란하로 불리우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고대에는 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고 단 한 구절만 남겼지만 서쪽 화국의 모든 지리지 기록과 모든 고지도에는 지금의 란하 본류의 중.하류가 황하.요하라고 설명.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서기전 202 년 건국된 유방의 한나라 지리지인 <한서/지리지>부터 이후 청국 시기의 지리가 수록된 <청사고>가 출간된 1928 년까지의 공식 지리입니다. 따라서 한 시기의 요동군이나 청 시기의 봉천성.부도 지금의 란하 중류 유역에 표시된 2 개의 승덕 지역에 설치되었었고 작은 글자로 표시된 승덕 곧 작은승덕 위치가 청국 성경 심양 승덕현이였습니다. 패수가 흐른다는 해성도 작은 승덕에서 남쪽으로 240 리 떨어졌다는 곳입니다. 선생이 언급한 왕검조선의 신.막.번조선 체제나 그 도읍이라 추정한 합이빈.개평.평양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선생이 인식한 합이빈.개평.평양 위치는 지금의 적봉과 준화 동쪽 그리고 산해관 북쪽 지점을 지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현 <화국전도> 표시는 한반도 평양을 낙랑군 위치였다고 주장하는 식민사관.동북공정의 지리 논리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즉 현 <화국전도>의 표시와 같은 곳에서 <사기>와 <삼국사기> 등의 역사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도구를 갖춘 화국이 취할 다음 수순은 당연히 상고 문명사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3. 요하문명

 

화국이 개방된 이후 많은 한국인들은 광개토왕비가 있다는 집안이나 백두산 등과 서쪽으로 산해관.북경 등의 지역을 찾아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일부 역사학자는 약간 북쪽에 있는 부신.조양.능원.적봉 등 지역의 화국이 명명한 요하문명지를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그곳은 신석기.청동기 문화 유적.유물이 발굴된 곳인데 화국은 이제까지 세계 4 대 문명 중 하나라고 자랑하던 황하문명까지 내팽개치며 자신들의 시조 황제 헌원이 일으킨 문명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 요하문명 유적.유물 발굴지

 

 

위 요하문명 지역에서는 황하.장강 유역의 화국 영역에서 발굴되는 검몸과 손잡이가 일체식인 동주식동검과 전혀 다른 조립식인 비파형동검이 대량.집중적으로 발굴되었습니다. 또 비파형동검 출토분포지는 저곳에서 동남쪽으로 지금의 요동과 한반도로만 이어집니다. 또한 요하문명 유적 중 가장 핵심인 곳은 지금의 건평.능원 지역에서 발굴된 우하량유적이고 서기전 3500 년 전후의 초급문명사회 수준이라는 홍산문화의 대표 유적입니다. 또한 지금의 적봉.오한기.북표.조양.건평 등에서 발굴되는 하가점하층문화는 서기전 2500 년 전후의 고급문명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위 추정도에 표시된 요하문명지의 핵심발굴지인 적봉.능원.건평.오한기.조양.북표 등의 지역과 단재가 지목한 왕검조선 3 도읍인 당시의 합이빈.개평.평양 세 곳을 잇는 지역은 서쪽 지역에서 약간 겹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삼국유사/기이> 기록에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 추정 서기전 2333 년 단군 왕검께서 세운 조선을 왕검조선이라 했고 그 이전 환웅천왕이 신시에 내려와 인간사 360 가지 일을 보기 시작했다는 시기를 왕검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고조선이라 부제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적봉 지역은 <청사고/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길림성 신성부와 빈강구 곧 합이빈 지역이였고 송화강의 중류 지역이였으며 신성부에서 남쪽으로 200 리 쯤의 농안현은 옛부여국도古扶餘國都 , 농안현에서 남쪽으로 300 리 쯤인 장춘부와 신성부는 옛부여국지古扶餘國地, 장춘부 남쪽의 이통주는 발해 즉 진국 장령부, 농안현 동쪽 오상부는 진국 상경속경上京屬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환웅천왕의 고조선이 서기전 3500 년 전후 능원.건평 지역의 우하량유적을, 또 왕검조선이 서기전 2500 년 전후의 하가점하층문화유적을 남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지금의 적봉 지역인 신성부를 <청사고/지리지>에서는 송화강이 동남쪽에서 흘러오며 눈강이 삼차구로 흘러와 송화강과 합류한 후 동쪽으로 꺽이어 흑룡강성 경계로 이어진다고 하였고 그 개략적인 지형에 대해서도 `천원광연川原廣衍 수륙폭진水陸輻車+秦` 곧 물길이 넓은 곳으로부터 모여 넘칠 정도이니 물과 땅을 지나는 길도 몰려있다?라고 하였으니 현 지형과도 대략 일치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신성부는 그 치소가 백도눌구라 하였고 뜻이 온전치 않은 `富西甲全省`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검조선의 북쪽 제후국인 부여 영토 중에서도 북쪽 경계지인 것 같고 그 이전에는 예濊 땅이였으며 <수서/열전.동이.말갈>에 의하면 수.당 시기에는 말갈 7 부 중 석촉을 쓰지 않는 3 부 속말.백돌.백산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백돌 말갈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위와 같은 검증도 시기와 지리 두 부분의 모든 역사 해석에서 순리적이며 더욱 견고하게 연결되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낙랑군 위치 문제이고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일입니다. 즉 한국강단사학계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이조선 실학자들이 식민사관의 빌미를 제공했다며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특히 집중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을 거론하는데 대단단 실수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산이 <강역고/낙랑군>에서 낙랑군 위치라고 단정한 평양은 단재가 언급한 요하는 란하, 패수는 해성 헌우락이라는 두 구절과 상통하는 지리이며 당연히 청국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와도 일치하는 지리 인식으로 한반도 평양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점을 지목한 것임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 년대부터 발굴하기 시작하여 2004 년 쯤 발굴 보고서가 출간되었지만 그 문명의 명칭은 `요하`라 붙쳐졌고 `고조선` 강역 표시도 문명 중심지가 아니라 동북쪽 변두리인 청 시기까지에도 흑룡강으로 불린 물길의 하류와 바다로 기록된 곳에 표시하였습니다. 대체 어떤 연유로 저와 같이 명명되고 표시되었을까요? 요하문명은 <삼국유사><규원사화> 기록과 같이 조선.태백산.우수하.아사달.소밀강 등의 이름을 붙쳐야 하는 것입니다. 

 

화국과 일국 역사학자들은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의 역사학자라는 자들이 문명과 지리를 연계하여 석명해 내지 못하는 무지무식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 이조선 사신의 연경 행로 

 

한편 불과 140 년 전까지만 하여도 이조선 사신들은 말을 타고 한양.북경 사이를 왕래하였고 이조선 개국 시기부터만 따져도 대략 500 년에 이릅니다. 내로라하는 이조선의 대다수 고관과 선학들이 사신길에 올랐었습니다. 

 

- 한.중.일 3 국 역사학계가 주장하는 낙랑군 설치지와 이조선 시기 사신 귀로 로정

그들이 남긴 문집에는 한양.북경 사이 로정의 풍광이나 고대 사건 전말 등이 자신만의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신이 오가는 로정은 위 실선 표시와 같았고 1656 년 북경을 다녀온 진주정사 인평대군이 남긴 <연도기행>에는 북경에서 산해관까지 670 리,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1990 리, 평양까지 2520 리, 한양까지는 3095 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역사학계는 그 사신 로정을 위 표시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연도기행> 1656 진주정사 인평대군의 귀로 일기에서 

연경 0/0- 통주 55/55- 삼하현 80/135- 운류하 65/200- 옥전 70/270- 풍윤 80/350-사하역 100/450-노룡 60/510- 유관점 90/

600- 산해관 8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 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삼차하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

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 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의주 80/1990 ... 한양 낙동 40/3095

 

그러면 과연  북경에서 지금의 산해관까지가 670 리, 압록강 의주까지가 1990 리였을까요? 지금의 평양이 이조선 시기의 평양부였고 고려의 서경이였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이였고 연나라 망명자 만에게 사탈당한 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 위치였을까요? 또 북경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3095 리이고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된 그 한성이고 마한의 옛땅이였을까요?   

 

이조선 중기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양.서울을 경도京都라 하였고 고조선.마한의 옛땅이였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도 주위 형세를 설명하기를 `북쪽 진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세이고 남쪽으로는 한강이 옷깃.허리띠처럼 흐르고 왼쪽으로는 관문과 큰산이 막고 오른쪽으로는 발해로 둘러쌓여 있다고 하며 동방 산하 102  개 땅 중 으뜸`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백제 중엽 한산에서 옮겨왔고 이후 남쪽 땅으로 파천하였다고 하며 고려 숙종이 설치한 남경이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발해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면 서울.한양의 오른쪽 곧 서쪽인 지금의 인천 앞바다를 발해라고도 했나요? 

 

이처럼 신뢰해 왔던 문헌의 귀퉁이 한 단어조차도 현 한국역사학계 주장과 또 <화국지도> 표시와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어쨋든 이조선은 물론이고 그 이전 고려.삼국 시기에 서쪽 화국의 역대국과 벌어진 모든 역사 사건은 위 지도에 표시된 2 개의 요동군 지역을 중심으로 한양.북경 사이 지역에서 일어났으니 역사책을 읽으며 이 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도를 본다면 사건 정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러한 혼동.혼란스런 화국의 동북쪽 지리와 한국의 서북쪽 지리에 대해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 <만주국지도>와 일국 공식 관찬 지도 <아세아동부여지도>

 

약간 충격적인 얘기를 하겠습니다. 청나라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공식 합병된 이듬해인 1911 년 멸망했습니다. 그후 1928 년 봉천군벌 장작림의 지원으로 청국 정사 <청사고>가 출간되었다는데 그 지리지에 설명.기록된 황하를 현 <화국전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아야 합니다.

 

 

- 청 시기 황하 추기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다륜약이구...北有錫拉穆楞河 自內蒙古克什克騰旗入 合碧七克碧落拜察諸河 北入巴林旗......

적봉직예주 ...西南距省治1320裡...領縣1 潢河自圍場入 州北200餘裡之巴林旗 東南老哈河 自平泉逕東南隅 納伯爾克河 

                  入建 英金河古饒樂水...          

조양부 건창현  府西南260裡... 東有布古圖山 漢白狼山 白狼水出焉 今曰大凌河 ... 東入朝陽... 北有潢河自赤峰 會老哈

                         河 自平泉入 合伯爾克河 錯出復入 英金河亦自縣來會 復合落馬河 東北至穀口 乾隆8年(1743) 更名敖漢玉

                         瀑 與潢河 入朝陽  柳邊北首朝 訖臨楡 ...

조양부   明 營州衛...置朝陽縣 光緖30年(1904)以墾地多熟 升府 以建昌隸之... 西南距省治1420裡... 西北潢河自內蒙古阿魯                科爾沁旗入 西南大凌河自建昌入 合南土河 逕西平房西 左合卑克努河 察罕河 又東合布爾葛蘇台河 又東至龍城 

              曰三座塔城 左合固都河 凉水河至金敎寺東北 左合土河 入盛京義州  

봉천성

신민부 ...省西一百二十裡 瀋陽中衛與廣寧左衛地

            진안현 ...府西 一百五十裡  明 廣寧衛 鎭安堡 ... 東沙河導源直隸綏東 南流 右受老河 入盤山曰南沙河 ...

금주부 반산구 ... 明廣寧盤山驛... 分遼水自遼中冷家口西南入 逕口南入海 西南沙河東沙河西沙河皆南入海

     

 

그러나 위 <화국전도>에 추기한 황하는 흐를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지금의 칠로도산과 노로아호산의 연맥때문입니다. 

 

- 칠로도산.노로아호산

 

 

 

칠로도산.노로아호산 두 산은 이어져 있습니다. 또한 당연히 분수령이기 때문에 기슭에서 발원한 물길들은 서남.동남.동북 세 방향으로만 흘러나갑니다. 곧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 지류인 열하.폭하.청룡하 등과 지금의 대릉하 및 지금의 노합하 등과 같이 세 방향으로만 흘러나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사고/지리지> 기록과 같이 다륜.극심극등기 사이 지역에서 발원하였다는 황하가 동남쪽으로 흘러 지금의 적봉.건창.조양 지역을 경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러면 <청사고/지리지>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명사/지리지> 기록에도 황하는 북경이 서남쪽으로 800 리 떨어진 곳이라는 북평행도지휘사사 소속의 영주전둔위.회주위 지역 곧 청 시기의 조양 부근을 경유하여 요수 곧 오기이며 정확하게는 요하로 흘러들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명사/지리지>

北平行都指揮使司 本大寧都指揮使司 洪武29年9月置 治大寧衛 ...領衛10.....西南距北平布政司八百裏

       大寧衛...治大定縣 ...洪武20年8月置衛 9月分置左右中三衛 尋又置前後2衛 28年4月改左右後3衛爲營州左右中3護衛...

       營州前屯衛 元興州屬上都路...南有老河 源出馬孟山流經此 又經行都司城南 東北入於潢河..

       會州衛   洪武20年9月置 永樂元年廢...西北有馬孟山...土河之源出焉 下流合於漌()河 又南入於遼水(河의 오기)... 

 

그러면 현 <화국전도> 표시는 왜 명.청국 지리지 기록과 일치하지 않을까요? 대체 화국의 동북 지리는 어떠했길래 지리지 기록과 지도가 불일치할까요? 사실 <화국전도>의 북경 동북쪽 지역 지리는 1932 년 건국되어 1945 년 시나브로 없어진 만주국의 지도 표시와 같습니다. <만주국지도> 표시 역시 명.청국 정사 지리지 기록과 상위합니다. 

 

- <만주국지도> 1934 년 간행

 

 

 

그리고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자료에는 만주국이 건국된 1932 년 보다 60 년 전쯤 제작되었다는 흥미진진한 지도가 게시되어 있습니다. 일국 육군참모부가 간행했다는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 입니다.

 

8. <아세아동부여지도 - 이하 <아동도>라 줄임> 

 

 

위 <아동도>에 묘사된 청국의 동북쪽 국경선은 <만주국지도>에 표시된 만주국 국경선과 다릅니다.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어쨋든 <아동도> 제작자는 당시의 이조선 강역을 지금의 압록강.두만강 남쪽의 소위 한반도라 인식하고 표시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요하 위치를 흐르는 물길은 당연히 요하였을 것이고 또한 당연히 청국 영역이였을텐데 어찌 청국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공지空地로 묘사되어 있을까요? 또 청국 국경선이 지금의 지금의 대릉하 중류를 동북방향으로 자르며 올라 지금의 서요하.동요하 합수처까지로 묘사되었고 그곳에서 서쪽으로 지금의 서요하와 일치하는 선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동도>의 청국 강역 표시는 청국 정사 지리지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겠지만 한.화.일 3 국 역사학계마저도 그 부정확함에는 등을 돌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동도>는 1875 년 당시 청국의 최북단 국경선만큼은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며 지금의 대릉하 중류를 사선으로 경유하는 청국 국경선도 크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조선의 강역이 공지만큼 축소된 것입니다. 청국 정사인 <청사고/지리지>나 이조선의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청국 관문인 봉황성 책문과 압록강 사이의 거리는 120 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러한 축척지도에는 양국의 국경선이 하나의 선으로 그려져야만 합니다. 양국 국경 사이에 공지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아동도>는 1875 년 제작 당시 청국과 이조선의 국경 지역 지리를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의 지리를 기대.예상하고 습작한 그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산하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자료에는 일국의 공식 관찬지도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 이조선 서북 경계

 

그런데 <아동도>보다 더 가관인 고지도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동도>에 표시된 이조선 강역을 묘사한 것이 확실한 아래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입니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2007 년 12 월 31 일 제 1537 호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9.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이하 <서북도>라 줄임>

 

 

 

그런데 사실은 보물은 커녕 지도 축에도 들지못할 사기.기만의 증거물 종이일 뿐입니다. 도면 위쪽에 표시된 방향 글자인 해亥.정북正北도 거꾸로 표시되어 있고 두 단어가 의미하는 방향조차도 맞지 않습니다. 해 방향은 시계 10 시에서 12 시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정북은 12 간지의 첫 글자인 자子가 나타내는 11 시부터 1 시까지의 방향 중 한 가운데를 말할 것입니다.

 

즉 이조선 시기 도성인 지금의 서울을 기준하여 정북에서 약간 서쪽인 서북방향인 해亥 방향에 선춘령.백두산 및 영고탑.흑룡강이 있다는 표시인데 오히려 그 반대인 동북방향에 해亥 글자를 거꾸로 표시하였습니다. 보물급이라 할 수 있나요? 결국 보물이라는 지도는 물론이고 지금의 <화국전도>, 1934 년 간행 <만주국지도>, 1875 년 간행 <아동도> 등의 신뢰성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래는 위 보물지도의 원본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조선 영조 시기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목 없는 고지도입니다.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도서관 홈페이지에서는 <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제목으로 검색되는 고지도입니다.  

 

10. <무제도>, 가칭 <양계도>

 

 

 

우선 위 <양계도>는 방향 글자가 바로 표시되어 있고 방향도 이조선.청국 당시의 지리와 일치합니다. 이조선 왕이 있는 궁궐 곧 지금의 서울을 기준하여 정북 방향은 흑룡강의 동쪽 끝 곧 지금의 서요하.동요하가 합류하는 지점이라는 얘기이며 시계 10 시에서 12 시 방향 사이 지역에 선춘령과 백두산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리는 이조선 시기 선학들도 정확히 인식하고 언급하였었습니다.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과 같다. 그리고 대마도와 제주도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했다고 하니, 이는 곧 지관들의 일반론이다.

                                                                              <성호사설/천지문> 이익(1681~1763)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다. 해亥 방향에 앉아서 사巳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이다. 그런고로 예전부터 중국과 친해 왔다. 그러나, 땅이 좁고 물이 젓어 위인을 낳지 못했다.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 그리고 동호와 여진족이 모두 중원을 제패하고 황제가 된 일이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만은 그렇지 못해서 주어진 영토만 지키며 감히 뜻을 품어 보지 못했다`라 했다 .

                                                                               <택리지/복거총론,산수총론> 이중환(1690~ ) 

                                                                                       <후기 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배우성 37~38 쪽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과 선춘령을 현 <화국전도>에 추기하면 아래와 같을 것입니다. 

 

11.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선춘령

 

따라서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은 지금의 화국 요녕성 서쪽 노로아호산 중에 있다는 얘기일 수 밖에 없으며 지금의 칠로도산.노로아호산 연맥도 이조선에서는 백산대맥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열하와 서쪽의 두 지류 곧 <청사고/지리지> 기록의 신요하와 서요하를 포함하여 <양계도>는 요하라고 표시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양계도>도 아래 적색 실선 내 지역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2. <양계도> 묘사 범위

 

 

 

따라서 다산이 언급한 평양도 지금의 쌍산자 부근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평양이 그곳이면 이조선 초기 양성지가 북경에서 30 일 정이라고 설명한 한도韓都나 박은식이 압록강을 건너 망명하면서 찾아본 백제 위례성은 과연 어디이겠는지요? 위례.한도 모두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지점인 지금의 천서 동쪽 건너편 지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승람> 경도 기록과 같이 백제 한성의 오른쪽에는 발해渤海로 둘러쌓였다는 기록이 남았을 것입니다.

 

한편 그곳이 당연히 마한땅이였기 때문에 서기전 2333 년 개국된 왕검조선의 땅은 훨씬 북쪽이였을 것이고 서기전 3 세기의 부왕과 준왕이 왕검성에서 통치한 조선 곧 준왕조선의 땅은 당연히 동쪽이였을 것이며 그 동쪽 땅이 후일의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였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온조왕이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승람> 편찬자들이 지리 고증을 게을리 하여 전해오는 글귀를 그대로 전재을 수 있고 혹 지금의 <승람> 서문에 이조선 말기 일국인이 길가에 내팽겨쳐진 <승람>을 주어 간행했다고 하니 고조선.마한.백제 강역을 한반도로 끌어내려야 하는 일국인이 고조선.마한.백제 관련 구절을 한반도 중앙인 이조선 경도 설명 글에 끼워넣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쨋든 대한제국.이조선.고려와 명.청국및 아라사와의 경계도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중.하류 동쪽 지류들과 동북쪽으로  뻗어나간 백산대맥 부근까지이였습니다. 

 

13. 이조선.대한제국 및 고려 강역과 요.명.청의 동북 강역

 

 

 

이같은 이조선 강역은 청 시기 편찬.제작된 <독사방여기요>, <대청광여도> 등에 기록.설명된 것과 같이 당연히 동서 2000 리, 남북 4000 리였습니다.  

 

<독사방여기요> 八 朝鮮

... 成桂更名旦,徙居汉城,遣使请改国号,诏更号朝鲜,自是王氏始绝,李氏世有其地,称藩岁奉贡献。万历二十年,为日本所侵掠,国几亡,王师入援,久之,国始定,然自是浸弱矣。其国中分为八道,八道中,则忠清、庆尚、全罗三道,地广物繁,州县雄巨,最为富庶。且俗尚诗书,人才之出,比诸道倍多。平安、咸镜二道,北接,俗尚弓马,兵卒精强,亦地势使然也。江原、黄梅,居京畿左右,差为狭小。而京畿在诸道之中,襟带山海,称为雄胜。其地东西二千里,南北四千里八道分统郡凡四十一、府凡三十三、州凡三十八、县凡七十。

주) 读史方舆纪要》摘要之三——山东(四)(2008-07-04 17:36:20)转载标签: 整理/摘要 分类: 青燈青史  
중국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의 고조() 편찬한 중국 역사 지리서. 고대에서 명나라  이르는 지리적 연혁  기재하였다. 1659년에 집필 시작하여 1678년에 완성하였다. 모두 130권이다 

 

14. <왜청도>, 청국인이 제작한 <대청광여도>를 1865 년 일본인이 재간행했다는 <대청광여도- 왜청도라 함>

 

 

그런데 이러한 이조선 강역은 화국인들 뿐만 아니라 18 세기 초 청국 지리를 탐구한 서양인들조차 아래와 같이 인식했습니다. 

 

15. <인디아.차이나 지도>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연구/고지도

주)  Netherland, Guillaume, Delisle, 1750, 62.7×60.9㎝

기욤 드릴(Guillaume Delisle, 1675– 1726)은 18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도 제작 가문을 형성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클로드 드릴(Claude Delisle)은 법학과 지리학 그리고 역사학에 정통한 지도 제작자였다. 기욤 드릴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지도수업을 받았으며, 1718년 최초의 왕실지리학자가 되었다. 그가 그린「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지도」는 최초의 세부적인 미국 내륙 지도로 알려져 있다. ... 이 지도는 원래 1705년 프랑스에서 동일한 명칭으로 간행된 것을 1750년 네덜란드에서 재간행한 것이다. 지도의 내용은 1705년 지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전한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고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을 프랑스인 기욤이 대략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만주국이 건국된 1932 년 이후의 지리는 고대부터 1931 년까지 대략 2600 여 년 동안 설명.기록된 지리와는 너무 다른, 달라도 너무 다른 흑심이 가득한 쌩뚱맞은 지리입니다. 

 

따라서 이조선 500 여 년 동안 한양.북경을 오간 사신들의 로정 중 북경에서 평양까지 2520 리 로정은 아래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 명.청 시기의 황하 

 

그러면 현 <화국전도>에 생략된 황하潢河는 대체 어떤 물길일까요?

 

16. <모사도/ 대요수.황하>

 

 

황하는 당 말기부터 황암수로 불렸으며 송.거란.요국 시기부터 상경임황부 지역을 흐른 황수潢水.황하潢河로 정식 개칭되어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전 수.북위.진.한 시기에는 요수로도 불렸으며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가 화국 기록의 처음이며 <청사고/지리지> 외에는 <수경주/대요수> 설명이 가장 상세하고 정확합니다.  

 

위 모사도 표시와 같이 난수.란하 최하류가 경유하는 요서군에서 동북쪽으로 300 여 리 떨어진 요동군으로 흘러내린 물길이 대요수.황하입니다. 대요수.황하 발원지와 경유지는 서기 5세기 말 편찬된 <수경주>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한서/지리지>에서 발원지 새외라는 곳을 백평산과 지석산이라 하였고 이후 두 지류 모두 대략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요동군의 망평.양평현을 경유하며 합류한 후 남쪽으로 꺽이어  방.안시 등의 현을 지나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대요수.황하가 흘러 들어갔다는 바다는 정확하게는 염난수.요하의 하류 시작 지점을 말하며 요택의 남쪽 끝 지점입니다. 즉 바다라는 요하 하류는 남쪽으로 발해 해안선까지는 대략 300 여 리 쯤 되는 만灣이고 만의 서쪽은 요서군이며 동쪽은 <승람>과 양성지.박은식의 언급과 같이 남쪽으로 발해와 연결된 만灣의 동쪽에는 고조선.마한 땅이였고 백제의 한도.위례성이 있던 곳입니다. 

 

황하는 명.청 시기에도 당연히 란하와 요하 사이 지역을 경유하여 요하 중류에 위치한 요택을 흘러내렸습니다. 황하가 요택의 서쪽 가장자리로 흘러내리며 어지럽게 흘러 복잡했던지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신민부 진안현 기록에는 동사하가 직예성 수동현, 곧 조양부에 속한 수동현을 경유한 후 남쪽으로 흐른다고 하며 오른쪽에서 노하가 흘러든다고 설명한 후 금주부 반산구로 흘러들어 남사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류 노하 혹은 노합하가 흘러드는 본류는 황하潢河뿐입니다. 결국 황하 최하류이며 요택 중의 황하를 동사하.남사하 등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인지 요하를 묘사한 대부분의 고지도에는 황하가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사/지리지> 상경도

遼國其先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去兪關一千一百三十裏 去幽州又七百一十四裏 南控黃龍 北帶潢水 冷陘屛右 遼河塹左

<한서/지리지>

遼西郡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 肥如 玄水出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후한서/군국지>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

[수경주]
<수경>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주>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 

<수경>
又東南過房縣西 

<주>
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 東南 , 北流, 西北屈, 逕廣成縣故城南. 王莽之平虜也, 俗謂之廣都城.又西北, 石城川水注之,水出西南石城山, 東流逕石城縣故城南. 地理志..右北平有石城縣, 北屈逕白鹿山西, 即白狼山也. ... 其水又東北入廣成縣, 東注白狼水. 白狼水北逕白狼縣故城東, 王莽更名伏狄. 白狼水又東, 方城川水注之. 水發源西南山下, 東流, 北屈逕一故城西, 世謂之雀目城. 東屈逕方城北, 東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 逕昌黎縣故城. 西地理志曰..交黎也, 東部都尉治, ... 應劭曰..今昌黎也. 髙平川水注之, 水出西北平川, 東流逕倭城北, 盖倭地人徙 之. 又東南逕乳樓城北, 蓋逕戎鄉邑, 兼夷稱也. 又東南注白狼水白, 狼水又東北, 自魯水注之, 水導西北逺山, 東南注白狼水. 白狼水又東北逕龍山西, ... 白狼水又北逕黄龍城東, 十三州志曰.. 遼東屬國都尉治, 昌遼道, 有黄龍亭者也. 魏營州刺史治. 魏土地記曰..黄龍城西南有白狼河, 東北流, 附城東北下, 即是也. 又東北, 濫真水出西北塞外, 東南厯重山, 東南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出, 東流, 分為二水, 右水疑即渝水也. ... 其水東南入海. 地理志曰..渝水自塞外南入海. 一水東北出塞, 為白狼水, 又東南流至房縣, 注于遼. 魏土地記曰..白狼水下入遼也

<수경>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주>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이러한 대요수.황암.황수.황하 전체와 남쪽 지류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 아래 <경판천문전도>일 것입니다.  

 

17. <경판천문전도- 이하 <경판도>라 약함>

      청(淸)왕조 시대인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에 의해제작되었으며,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

      화 했다. Woodson Research Center, Fondren Library

      소장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6895389

 

<경판도>가 정확한 지도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황하 중류로 흘러드는 남쪽 지류 노하 혹 노합하의 길이입니다. 지금의 서요하로 흘러드는 남쪽 지류 노합하와 비교하면 <경판도>의 노합하가 짧습니다. 짧아도 너무 짧습니다. 다만 더 중요한 부분인 황하 중류를 요하 상류의 서쪽 지류인 서요하와 연결시킨 것은 큰 실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국 경사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적색 실선 표시 방향이 정동쪽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묘사된 것은 고지도에서는 흔하고 사소한 것이라 실수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쨋든 <경판도>의 대실수가 지리조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경판도> 보다 600 여 년 앞선 송.거란 시기 바위에 새겼다는 <지리도>의 황하는 어떤지 보겠습니다. 

 

18. <지리도> 1137 년 송인 황상이 각석

 

 

위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한 것이 아래입니다.

 

 

란하.황하.요하 3 물길 모두 산동반도의 정북쪽 건너편 내륙지역을 대략 동남 방향으로 흘러내려 발해로 들어갔습니다. 엄밀하게는 발해로 흘러든 물길은 란하와 요하 뿐입니다. 즉 황하는 요하 중류로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요택 남쪽 바다로 묘사된 곳에 청색 실선을 길게 표시한 것은 <한서/지리지> 기록과 같이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염난수가 2100 리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염난수도 대요수와 같이 송.거란 시기부터 요하로 개칭되었으며 중류인 요택의 남쪽 끝 지점에서 대요수.황하를 받아들인 후에도 대략 300 여 리 이상을 더 흘러내려 산해관 동쪽에 이르러 발해로 들어갔습니다. 즉 요택 남쪽의 바다는 발해가 아니라 요하 최하류이고 실제 정황은 만灣입니다.

 

당인 장수절은 <사기정의>에서 진장성이 끝나는 바다 곧 만灣을 요수遼水라고 정확하게 설명.기록하였으며 이조선 효종 시기 인평대군은 발해가 아니라 구하 곧 대릉하.황하.요하.혼하.어니하.웅악하 등이 흘러드는 넓은 지역을 가리킨 `둘러빠진 곳`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한서/지리지>

玄兎郡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麗莽曰下句麗 屬幽州 西蓋馬 馬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후한서/군국지>

玄兎郡 武 洛陽東北四千里

<사기정의>

始皇長城東至遼水 西南至海之上

진시황 시기 수축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닿았고 장성동단의 서남쪽은 바다다.

<연도기행> 

... 남쪽은 발해(渤澥)에 임하여 은빛 물결이 하늘에 닿았고 북쪽은 장성을 바라보아 분첩(粉堞)이 구름에 연했으니, 기상이 웅장하고 시야가 호탕하다. 고금에 몇 사람이 이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던가. 이미 승지(勝地)에 이르렀으니, 한 번 누 위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려 했으나, 층루(層樓)가 반이나 썩어서 높은 난간이 거의 무너졌다. 이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년에 올라가서 바라본 것이 이미 옛일이 되었다. 부질없이 수선할 인물이 없음을 탄식할 뿐이다. 관문(關門)에서 바다를 연결시킨 것은 조룡(祖龍)의 공이 아니라, 바로 서달(徐達)이 창조한 것이다. 누 밖의 호탕한 물결은 원래 발해가 아니고, 구하(九河)가 둘러빠진 곳이다. ...

 

 

- 일국 서향융성의 지리 조작과 청국 양수경의 망상

 

<경판도>의 대실수가 제작자인 마군량의 실수인지 지리조작자의 추기 변조인지 알 수 없지만 황하 중류가 요하 상류 서쪽 지류로 연결된 것은 <경판도> 외에도 또 있습니다. <경판도>의 대실수보다 훨씬 대담하게 황하를 발원지부터 조작하여 동남쪽이 아니라 정동쪽으로 흐르게 묘사하여 요하의 상류 서쪽 지류와 연결한 것입니다. 

 

19. <황조일통여지전도- 이하 <왜황도>라 함> ,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간행한 <황조일통여지전도>를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경판도>와 <왜황도>의 황하 남쪽 지류인 노(합)하 길이를 비교하면 위 <왜황도>의 황하 변조를 훨씬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입니다. 하지만 청 시기는 물론이고 서기전 200 년 경의 전한 시기에도 황하.대요수는 짙은 청색 실선과 같이 흘렀습니다. 

 

 

사실 <왜황도>가 1865 년 재간행됐다는 설명은 믿기 힘듭니다. 1875 년 간행된 일국 공식 관찬 지도의 신뢰성을 뒷받침하려고 청국 고지도를 가져다 재간행하면서 간행 년도를 소급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국은 명치왕 초기 정한론에 사로잡혀 식민지배를 순탄하게 하려는 기획하에 무지막지한 조작까지 감행했다고 판단합니다. 아래는 란하 전체가 묘사된 위 도면의 서쪽 부분입니다. 

 

 

결국 일국은 청 시기의 황하를 당시 흑룡강이였던 지금의 서요하로 조작 표시한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란하 상류를 황하 중류로 연결시키고 란하의 중.하류와  황하 상류를 삭제하였습니다. 그 결과 란하 중.하류가 동쪽으로 대략 300 리 쯤 이동되었고 란하 중.하류 동쪽 강안 지점에 설치한 열하승덕.평천.노룡.산해관 등의 지명도 옮긴 란하 중.하류 동쪽 적절한 위치에 표시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산해관까지라고 표시된 진장성동단과 갈석의 원래 위치도 서쪽으로 대략 500 리 쯤 떨어진 곳이였습니다.  

 

20. 지리 조작 수법 개략도

 

 

21.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압록강 

 

 

 

그리고 황하 변조는 일국 뿐만이 아닙니다. 청국인 양수경도 1900 년 편찬했다는 <역재연혁지도/요지리도>에서 황하를 발원지에서 정동쪽으로 흐르는 물길로 표시했습니다.

 

21. <역대연혁지도/요지리도.황하> 1900 년 청국인 양수경 간행

 

 

 

결국 <아동도>에 당시 지리를 정확하게 표시하자면 아래와 같아야 합니다. 일국인들이 화국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한반도 평양이라 주장하지만 화국 세번째 정사 <후한서/군국지> 낙랑군 주석과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왜 기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지고 그 낙랑군의 서남쪽 귀퉁이에 설치한 대방군에서 바닷길로 남쪽으로 또 동쪽으로 韓땅 7000 리를 가면 대마국의 북안 곧 지금의 부산 부근이였을 변진구야한국에 도착한다는 설명도 아래와 같은 지리일 때만 상식.합리적일 것입니다. 

 

22. <아동도>에 추기한 1875 년 당시의 란하.황하.요하.흑룡강 및 압록강 

 

 

어쨋든 위 <아동도> 묘사로 보아 일국 육군 참모부도 청국의 동북쪽 국경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동도>가 제작된 1875 년 당시 일국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이조선과 청국 국경 지역의 부정확한 지도를 제작토록 지시를 내릴 만한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나는 정한론이라는 조선 침략 당위성에 취한 과단한 성격의 사쓰마번 하급 무사였던 명치유신 3 걸 중 우두머리격인 서향융성의 독단이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수백 년 권좌를 이어온 막부를 끌어내려 항복을 받은 유신 3 걸 중 이조선 침략을 즉시 실행할 것을 주장한 자가 서향융성이였습니다. 당시도 명치왕을 독살하여 가짜 명치왕을 앞세워 동경에 입성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2 인은 내정 안정이 시급하다고 인식하고 선진국 견학을 위해 미국.유럽 순방길에 올랐었다 하니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저런 무지막지한 엉터리 지도를 제작.간행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서향 1 일이였을 것입니다. 

 

 

- 대한 고대 역대국 강역

 

따라서 삼한을 통일한 신라.진국 강역과 서쪽 경계도 아래와 같았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3. <모사도/통신라.진국 강역> 

 

 

<요사/지리지> 동경

耀州 刺史 本渤海椒州 故縣五椒山貊嶺사泉巖淵 皆廢 戶七百隸海州 東北至海州二百裏 統縣一 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 一百二十裏

요주는 자사가 통령하며 본래 진국(발해) 초주였고 옛 현은 5 개이고 초산.백령.사천.암연현이 있었는데 모두 없앴다. 700 호가 살았고 해주에 예속되었다. 동북쪽으로 해주까지는 200 리이고 암연현 1 개를 두었다. 암연현 동쪽으로는 신라와 경계했고 옛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 암연현에서 해주까지는 120 리다. 

 

위 기록과 같이 거란.요국의 요주는 해주에서 관할하였고 해주는 거란의 동경 치소가 있는 요양에서 남쪽으로 120 리 떨어진 곳입니다. 이는 청국 봉천부 지리와 같기 때문에 <청사고/지리지> 기록을 원용한 리 수입니다.

 

결국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서쪽 경계가 요동 지역 요양 부근까지였고 요하 하류의 동쪽 강안 지역까지였기 때문에 당연히 백제의 강역도 그곳까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 300 년 쯤인 서진 말기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가 진출했다는 요서백제 경략도 당시의 대요수와 염난수가 합류한 이후의 만灣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기만 하면 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였습니다. 

 

24. 삼국 강역

 

또한 삼국 건국 직전인 서기전 100 년 쯤의 지리도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5. 단군부여.한韓 및 한漢 8군>

 

 

특히 <삼국지>의 왜 기록과 같이 낙랑군의 서쪽 귀퉁이에 설치한 대방군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향하며 한땅을 지나 뱃길 7000 리를 가면 지금의 부산 부근에 있었던 변진구야한국에 도착하였으니 결국 지금의 산해관 서북쪽 청룡하 하류 남쪽 지역부터 지금의 요동반도 및 한반도 전체를 한韓 영역으로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왜倭>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 ...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渡一海 千餘里至對馬國 

 

화국 및 대한의 지리지 기록이나 고지도 묘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화국.일국은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역사학계마저 전한 시기의 난수.대요수.염난수를 지금의 란하.서요하.요하라며 황당할 정도로 넓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낙랑군 위치도 한반도 평양이라며 비상식적인 주장을 현재까지도 계속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처럼 무지무식한 주장을 할까요?  저들을 한국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한국 재야역사학계의 불완전한 지리 인식

 

한국역사학계는 물론이고 일국.화국 역사학계도 서울이 백제 한성이였고 이조선의 경도였다고 주장합니다. 북조선 평양이 이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이였고 고려의 서경이였다고 하며 그 이전은 화국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이였고 더 이전은 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이였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화국전도>에 표시된 북경부터 서울까지의 현재의 지명은  한.화.일 3 국 모두 화국의 한나라 시기 곧 고구려.백제.신라 건국 시기부터 변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위 민족사학을 자처하는 작금의 한국 재야역사학계에서는 낙랑군 위치가 북조선 평양 일대일 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일본이 만든 대조선사관 곧 식민사관과 화국의 동북공정이 오류라고 비난합니다. 동시에 서울.한양은 이조선 500 년 도읍이였고 고조선.마한 땅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재야는 낙랑군 위치에 대해서 정확하고 반론 불가능한 명확한 정설을 내놓았을까요? 즉 <승람> 기록과 같이 이조선 한양인 지금의 서울 오른쪽.서쪽 바다가 발해일까요? 비난이 아니라 식민사관.동북공정의 주장을 부인할 만한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한.화.일 3 국 역사학계의 100 여 년 지속된 단단한 학설을 깰 수 있는 탄탄한 논리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요? 

 

단국대 명예교수 윤내현은 <고조선연구>에서 낙랑군이 산해관 지역에 설치되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낙랑군 수성현에 진장성 동단이 있다는 화국 정사 <진서/지리지> 기록과 당인 장안이 조선에 습수.열수.선수가 있고 합쳐 열수가 되는데 낙랑조선 명칭은 3 물길명에서 얻은 것 같다고 기록된 <사기집해> 구절에 근거한 주장입니다.

 

<진서/지리지>

樂浪郡 漢置 統縣六 ...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사기집해>

張晏曰 朝鮮有濕水列水仙水 三水合爲列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그런데 윤내현은 습수를 지금의 북경 북쪽 지역에 설치된 상곡.어양 2 군 사이를 흐르고 <한서/지리지> 상곡군 군도현에 주석된 습여수濕餘水로, 열수列水도 어양군 안락현 북쪽 바깥 지역에서 난수 중류로 흘러드는 지류 무열수武列水로 곡해하였습니다. 또한 선수仙水도 <수경주/난수> 기록과 같이 어양군을 흐른 750 리 길이 고수의 하류에서 동쪽으로 우북평군 지역을 관통하고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면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 지역을 경유한 난수와 연결된 인공.작위적인 신하新河로 흘러들어가는 요서군 신안평현이 발원지인 용선수龍鮮水라고 단정한 후 한나라 시기의 상곡.어양.우북평.요서 4 군 지역을 낙랑조선 지역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게다가 요동군 번한현을 흘렀다고 주석된 패수沛水를 한수汗水라고 읽고 이마저도 란하 최상류 지역으로 흘러드는 지류 우수于(물수변첨가한 于)水라고 곡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낙랑군 위치는 갈석산과 진장성동단인 산해관이 표시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26. 윤내현이 곡해 지목한 습여수.무열수.용선수.우수의 원래 위치

<한서/지리지>

上谷郡 ... 軍都 濕餘水東至路 南入海

遼西郡 ... 臨兪 兪水首受白狼 東入塞外 

遼東郡 ...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수경주/난수>

...濡水從塞外來 ...出禦夷鎭東南 其水二源雙引 ... 謂之連淵浦 又東北注難河 難河右則于(물수변첨가한 于)水入焉 水出東鳥(흙토변첨가한鳥)南 西北流逕沙野南 ...

... 濡水又東南 索頭水注之 ... 南流經廣陽僑郡西 魏分右北平置今安州治 ... 注于濡 濡水又東南流 武列水入焉 ...

... 新河自枝渠東出合封大水 謂之交流口 水出新安平縣 ... 又東南流 龍鮮水注之 水出縣西北 ...

<후한서/군국지>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 臨楡(二) ... (二) 山海經曰 碣石之山 ... 水經曰在縣南 ... 

樂浪郡  洛陽東北五千里

 

윤내현 주장은 한마디로 억지입니다. 산해관.갈석산 지역은 춘추.전국 시대 및 진시황 시기까지의 요동군이였고 서기전 202 년 전한부터는 요서군으로 재편된 곳입니다.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요서군과 낙랑군은 대략 1700 리 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산해관 부근을 낙랑군이라 단정하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서/지리지> 낙랑군 탄열현 주석에 명확하게 820 리 길이 열수가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요서군과 더 서쪽의 어양.상곡군 및 어양군 북쪽 바깥 지역을 흐르는 한문 한글자가 같다며 혹은 발음이 비슷하다면 쌩뚱맞은 4 개 지류를 언급하였습니다. 화국 역사학자들은 윤내현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인정할까요? 듣자마자 헛소리라고 무시할 것입니다.

 

또한 지리지 기록의 산해관.갈석산 위치를 현재의 산해관.갈석산으로 인식한 것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또 <진서/지리지> 낙랑군 수성현 기록을 활용하여 전한이 설치한 낙랑군 지역이라 단정했지만 식민사관맹종자인 천관우.공석구 등도 지적하였듯이 265 년 위.오.촉 삼국시대를 끝내고 다시 화국을 통일한 서진이 설치한 낙랑군이고 약 360 년 전에 설치한 원래의 낙랑군 지역을 관리.유지하지 못하여 북경 방향인 후방으로 옮긴 잠정적인 군.현이였습니다. 

 

결국 윤내현은 어느 시기의 낙랑군인지도 구별하지 못하였고 같은 글자가 쓰였다며 엉뚱한 물길과 뜬금없는 지역을 쳐다고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윤내현은 북조선의 리지린 다음으로 지금의 란하 주변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언급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는 구절을 제대로 해석하고 검증하지 못한 것입니다. 재야에서 환호했던 낙랑군.산해관 설이  `교치 군.현`이라는 식민사관.동북공정 맹종자의 비판 한 구절로 완패당한 이후 현재까지 한국사의 모순된 지리를 석명할만한 논증은 전무합니다. 결국 낙랑군.한반도 평양설은 더욱 굳어졌고 마침내  2017 년 화국 시진핑 주석은 미국 트럼프대통령에게 `한국은 화국의 일부`라고 말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신단재보다도 더 과격하게 연수 계인경 선생은 고려 시기 범장이 편찬했다는 <북부여기> 본문에 자신의 지리 비정 `패수는 今금 란하`라는 구절을 넣어 <환단고기>를 엮었습니다. 今금은  당연히 계연수 선생이 망명한 1910 년 전후입니다. 두 선생의 주장에 의한다면 지금의 란하 주변이 요서.요동.현토.낙랑 등 4 개 군지역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산해관은 요서군 남쪽 지역의 동쪽 끝 지점이였고 패수는 요동군의 동쪽 경계선 바깥 지역을 흐르는 물길이며 동시에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에 흐른 물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역사 지리 문제가 해결되었나요? 해결 안됩니다. 또한 <조선상고문화사>나 <환단고기>에도 요하와 패수가 왜 란하인지 대한 논증한 글이 없습니다.

 

사실 요하.패수가 왜 란하인지 논증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야 합니다. 현 <화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에서 동쪽으로 차례대로 흐르는 대릉하.요하.혼하.압록강 등의 유역 지리 전체를 <한서/지리지>를 비롯한 화국의 모든 정사급 기록과 대조.검증하여 원래 위치를 규명해야 합니다. 일국 육군참모부가 조작하기 이전의 지리를 찾아야 합니다. 

 

27. 왕검조선.천군 강역

 

 

결국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 한국 역사서를 정확히 읽어내려면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 년 당시의 정확한 지리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화국 정사급 지리지에 기록된 대요수.황하와 염난수.요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사는 제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역고/서북로연혁고>를 엮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한국사학계는 서북과 정북도 구별하지 못한 채 정확한 지리 설명조차도 식민사관 빌미를 주었다며 비난합니다. 하루빨리 깨닫고 엎드려 사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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