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 모두는 <삼국사기> 기록과 현재의 대한.중국 지도에 근거하여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북쪽 국경을 지금의 북조선 대동강 쯤으로 인식한다. 또한 통신라에 이은 고려 국경 압록강은 <삼국유사/흥법> 기록과 고려 말 이조선 초 명국 주원장의 철령위 설치 전말 기록 등에 근거하여 지금의 요하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옳은가? 

 

아니다. 명백한 식민사관.동북공정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식이 식민사관.동북공정 논리라는 것조차도 모르는 바보짓이다. 선조들의 역사 인식에 반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조들이 지켜낸 강역을 싹뚝 잘라 버리는 반민족행위다.

 

중국 정사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 요주 기록에는 아래와 같이 요주 속현인 암연현 동쪽이 신라 경계라고 설명되어 있다. 

 

 

東京道 東京遼陽府 ...

遼陽縣 本渤海國金德縣 漢覇水縣 高麗改爲勾麗縣 渤海爲常樂縣 ...

海州 南海軍 節度 本沃沮國地 高麗爲沙卑城 唐李世적嘗攻焉 渤海號南京南海府 疊石爲城 幅員九裏 都督沃晴椒三州 故縣六 沃沮鷲巖龍山海濱升平靈泉皆廢 太平中大延琳叛 南海城堅守 經歲不下 別部酋長皆被擒 乃降 ...

 

耀州 本渤海椒州 故縣五 椒山貉嶺澌泉尖山巖淵 皆廢 戶七百 隸海州 東北至海州二百裏 統縣一 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一百二十裏

요주...본래는 발해 초주였으며 초산.맥령.기천.첨산.암연현 등 5 개 현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폐현되었다. 호 수는 700 호이며 요주는 해주의 통제를 받는다. 동북쪽으로 200 리 떨어진 곳에 해주가 있으며 속현은 암연현 하나를 설치했는데 동쪽은 신라 땅이다. 옛 평양성은 암연현 서남쪽에 있고 동북쪽으로 해주까지는 120 리다.

 

위 기록에 언급된 거란.요국의 해주.요주 및 암연현과 통신라의 서쪽 경계는 아래 모사도와 같이 지금의 란하 하류의 동쪽 강안 지점이였다. 

 

 

 

 
한편 아래는 <삼국유사/흥법.순도조려> 기록 일부다. 

 

상고하건대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이것을 혹은 안정홀이라고도 하는데 요수 북쪽에 있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인데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한다.  

 

일연국사의 위 설명으로 많은 이들이 혼란스워한다. 즉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안시성에 도읍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안시성이 요수 북쪽에 있었다면 그 요수는 <한서>를 편찬한 반고가 설명한 남쪽으로 흘러 안시현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 대요수 곧 거란.요부터 개칭된 황하潢河이고 황하는 거란.요국의 상경임황부를 경유하여 동쪽에 나란히 흐르는 요하로 합류하는 요하의 서쪽 큰 지류이기 때문에 결코 고려 압록강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고려 압록강의 하류는 안시성에서도 약간 동북쪽에 위치한 거란.요국의 동경인 요양 부근이기 때문에 <한서/지리지> 현토군 고구려현에 주석된 요산에서 발원하는 요수 곧 거란.요국시기부터 개칭된 혼하일 수 밖에 없으니 일연국사가 언급한 요수나 고려 압록강을 정확히 구별.인식해야만 한다.

 

아래는 고려 중기 1137 년 송나라 사람 황상이 돌에 새겼다는 <지리도>다.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류들일 수 밖에 없는 거란.요국의 상경임황부 동쪽을 경유한 요하나 동경요양부 동쪽을 경유하는 혼하 곧 고려 압록강이 지금의 산동반도 정북쪽 내륙지역으로 묘사되어 있다.  위 지역을 확대하면 아래와 같다.

 

 

 

위에 표시된 압록은 송인 황상이 고려 압록강을 동쪽으로 임의로 밀어 버린 것이며 결국 이조선 시기의 압록강을 고려 압록강이라 표시한 것이다.  위와 같은 지리는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도 변동이 없었고 송.명.청 시기 간행된 고지도 묘사 역시 대략 정확하다.

 

그러나 1932 년 일본이 세운 꼭두각시 만주국 지도에는 지금의 란하 위치를 흘렀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이 동쪽으로 200 여 리, 동북쪽으로 2000 여 리 옯겨져 지금의 란하와 서요하.요하로 변조.위작되어 표시되었고 란하.황하.요하 3 물길 유역의 모든 지명까지도 옮긴 3 물길 유역에 적절하게 재배치되어 표시되었다. 이러한 변조.위작의 시작은 1873 년 경 일본 서향융성이고 육군참모부가 하수인이였다.  

중국 2,3 번째 정사 <한서/지리지>와 <후한서/군국지>에 기록.설명된 요동군이였으며 25번째 정사 <청사고/지리지>에 기록.설명된 봉천 성.부 위치는 어디였을까요? 

 

- 대한민국 경인문화사에서 2007 년 발간한 <중국전도>

 

 

<한서/지리지>

遼東郡 秦置屬幽州 ... 襄平 有牧師官 ...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 房 ...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 險瀆 ... 安市 ... 西安平 ...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 沓氏

<후한서/군국지>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 ... 襄平 ... 望平 ... 安市 ... 西安平 ... 沓氏

玄兎郡 ... 高句麗 遼山 遼水出  ... 西蓋馬 ... 遼陽 ...

<청사고/지리지>

奉天 禹貢靑冀二州之域 舜析其東北爲幽營 ... 周幽州 明遼東都指揮使司 淸天明十年三月 定都瀋陽 尊爲盛京 ...

奉天府 ... 奉天省治 西南距京師1470裡 ... 承德 明瀋陽中衛 康熙三年置縣 ... 渾河在南 ... 遼陽州...府南120裡...北太子河...

 

 

서기전 202 년 유방이 세운 한漢에서 설치한 요동군 위치는 아래와 같이 적색 원으로 표시한 지역이였습니다.

 

 

 

즉 <후한서/군국지> 기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곳이며 <한서/지리지> 기록과 같이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 등이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1644 년 후금이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진입한 시기부터 1932 년 일본이 만주 곧 봉천군벌 장학량을 공격한 때까지 청국이 설치한 봉천성 봉천부 위치는 아래와 같이 전한前漢이 설치한 요동군과 같은 곳이지만 남북으로 약간 길죽하고 면적은 넓었습니다. 

 

 

 

그러면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열하.폭하.청룡하 등이 청 시기는 물론 한 시기에도 그 위치에서 물길 변화 없이 똑같이 흘렀을까요?  

 

아마도 넓은 지역에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서 물길까지도 변동이 일어났다면 모르겠지만 2000 여년 이건 만 여년이건 물길은 당연히 똑같이 흘렀을 것입니다. 북경 이동 지역의 지리를 설명.기록한 2000 여년 간의 중국 정사급 지리지 기록에는 큰 지진이 있었다거나 물길이 변동되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그런데 청 시기의 란하.열하.폭하.청룡하 등의 위 <중국전도> 표시와 같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서기 6 세기 초에 편찬된 <수경주> 기록이나 <한서/지리지>부터 1929 년 편찬된 청국 정사 원고라는 <청사고/지리지>까지의 기록에는 란하가 타원형 모습의 상류를 제외하고 그 이하 중.하류는 아래의 점선 표시와 같이 지금의 란하 중.하류보다 더 서쪽에서 흘러내렸었습니다. 란하는 한부터 당 시기 까지의 난수가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것입니다.

 

 

 

위와 같이 흐른 난수.란하를 대략 정확히 묘사한 고지도도 전해집니다.

 

- <직예전도>

 

 

위는 <직예전도> 명칭으로 전해지는 고지도의 북쪽 부분만이며 비록 도면의 오른쪽.위쪽 부분에 묘사된 노합하.서라목륜하 부분은 뻥튀기수법으로 동쪽으로 크게 늘려 변조된 것이지만 란하 상.중.하류의 묘사만큼은 <수경주/난수>와 <청사고/지리지> 기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아래의 <북위형세도>에도 란하의 중.하류가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 <역대연혁지도/북위형세도> 1900 년 전후 청인 양수경이 간행

 

 

결국 한 시기부터 만주국 건국 직전까지 약 2100 여년 동안 난수.란하 중류 이하의 동쪽 지류인 무열수.열하와 <수경주/난수>에 한 시기 요서군의 양락.비여.영지 3 개 현을 경유하며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죽성 북쪽을 지나면서 서쪽으로 꺽여 난수로 흘러든다고 설명.기록된 현수玄水 곧 청 시기의 청룡하 등도 아래의 추가 점선 표시와 같이 대략 남쪽으로 흘러 점선 표시의 란하로 흘러 들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열하는 청 시기 직예성 승덕부 부근을 흐른 열하일 수 없으며 승덕부 위치 또한 지금의 란하 중류 지점에 표시된 큰 글자의 승덕이 아닙니다. <청사고> 기록과 같이 서남쪽으로 북경까지 1470 리여야 하는 봉천성 봉천부 치소인 성경 심양 승덕현은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작은 글자의 승덕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직예성 영평부 속현인 노룡현이나 유관.산해관 및 갈석산 위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중국 정사 지리지 기록과 판이한 지금의 란하 등은 어떻게 표시되게 된 것일까요? 

 

지금의 란하는 1873 년 쯤부터 일본 명치유신의 3 걸 중 우두머리인 서향융성이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밀정을 파견하고 지리 정보를 수집하여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란하 1 물길로 변조한 엉터리 습작지도를 간행.홍보하면서 시작된 물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란하의 중.하류가 2000 여 년 간 대요수.황하, 염난수.요하이기 때문에 지금의 란하 중.하류 동쪽 강변 지역에 승덕현.해성현이 표시되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875 년 제작하였다는 아래의 지리 조작 후의 엉터리 지도를 전세계에 뿌리고 홍보하였습니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 년 일본 육군 참모부 간행

 

대한민국에서 세금을 퍼부어 운용.유지하는 동북아재단 산하 독도연구소는 위 엉터리 변조 지도를 `일본 공식 관찬 지도`라는 설명까지 덧붙쳐 홈페이지/연구/고지도에 당당하게 게시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 중 일부다.

 

나는 재앙이 닥쳐왔을 때 태어나 나라 망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차마 죽지 못하고 마침내 도망쳐 나왔다. 경술년(1910) 모월 모일 아침에 한성을 떠나 저녁에 압록강을 건너 다시 북쪽으로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가 위례성(慰禮城)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머물렀다. (박은식이 환인현으로 망명한 것은 졸본성-현재 오녀산성일 것이다) 고금을 살펴보니 허전한 느낌이 들고 안타까워 오랫동안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역 땅에 도망와 있으니 사람을 대하기가 점점 부그러워지고 길가 아이들과 시장 사람들조차 모두 나를 망국노라 욕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비록 넓다고는 하나 이런 욕을 짊어지고 어디로 돌아가리오. 때는 혼하(渾河)에 가을이 저물어 쑥은 꺾어지고 풀들은 시들었으며, 원숭이도 슬피 울고 부엉이도 울어댄다.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런 정경을 바라보고 더울 서글퍼져 견딜 수가 없다.

 

저자는 위례성이 압록강 북쪽 강을 거슬러 오르면 내려다 보인다고 하였고 근처에는 혼하가 흐르는 듯이 말하고 있다.

저 위례성은 백제의 첫도읍을 말한 것일까?

 

그렇다. 하지만 백제의 초도 위례성은 아닐 것 같고 천도한 한성은 분명한 것 같다.

 

1656 년 진주정사 임무를 띄고 북경을 다녀 온 인평대군의 귀로에서 30 일 정은 압록강 북쪽의 봉황성이였으니 위례성은 압록강의 북쪽이기는 하지만 약간 서쪽인 청국 봉천성 봉황성직예구 수암주 방면인 당시의 요하 하류인 바다 곧 정확하게는 만灣 가까이 있는 백제의 두번째 천도지 한성漢城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이는 <조선왕조실록/성종조>에서도 양성지가 북경에서 30 일 정에 한도漢都가 있다는 기록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 1910 년 지리

 

- 서기 600 년 전후 지리

 

 

-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

 

 

 

아래는 매림역사tv, 인하대고조선연구소 연구원 이영완이 주장하는 왕검조선의 3 개 도읍지 추정도다. 그러나 지금의 하얼빈.장춘.개원 등의 지명은 중국 2600 여 년 동안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송.명.청 시기 간행된 고지도 묘사와 불일치한 지리 인식이기 때문에 적색 x 표시를 하였다.

 

https://youtu.be/M1dwmN-WykY

 

 

 

왕검조선의 3 개 도읍지를 지금의 하얼빈.장춘.개원 위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1873 년경부터 일본명치왕.서향융성 두 놈이 기획.이동.조작하여 만든 습작지도에 표시한 지리를 고대부터의 역사 지리로 인정하겠다는 무지무식한 지리 인식일 뿐이다. 즉 1932 년 만주국부터의 하얼빈.장춘.개원 위치이기 때문이다. 결국 명백한 식민사관인 동시에 동북공정을 선전.홍보하는 셈이다. 민족.역사적 측면에서는 너무나도 명백한 반민족.반역사적행위다.

 

중국 춘추시기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1 년까지 약 2600 여 년 동안 요수는 지금의 란하였다. 따라서 청 시기의 하얼빈 위치 곧 송화강이 흐르는 강변의 합이빈 곧 길림성 빈강구는 지금의 요녕성 서북쪽 끝 바깥의 적봉 부근이였다. 이는 중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송.명.청 시기 간행된 지도에도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 1799 년 간행된 <성경통지>에 실린 <성경지여전도>

 

그러면 왕검조선의 3 개 도읍지인 우수하 아사달, 백악산아사달, 장당경 위치는 어디일까?

 

주) 1.4 - 태백산 우수하 아사달 2 - 백악산아사달 3 - 장당경

 

 

- 무제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됨.

가칭 <백산대맥도> 한국보물 1537 호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원본으로 추정됨

 

 

<삼국유사><규원사화>와 임승국 역주 <환단고기> 등과 특히 청국 정사 원고인 <청사고/지리지>에 의하면,

왕검조선의 아사달.백아강.장당경 등 3 개 도읍지 중 태백산 우수하 아래라는 아사달 위치는 소밀강.속말강.송화강이 경유하는 청 시기 현 치소가 소알연인 길림성 쌍양현이다.

 

두번째 천도지 백아강 곧 백악산아사달은 북쪽으로 흐르는 우수하 지역이 기후가 차가와 농사가 어렵고 교통 곧 황하 하류 유역과의 교역도 불편하여 동서 천 리에 이른다는 개마대산 곧 청 시기의 장백산맥을 서남쪽으로 넘어 패수 북쪽이라 했으니 마땅히 지금의 란하 정북쪽 지류의 동쪽 지점이여야 한다. 이곳은 북애노인이 인용했듯 고려 시기 청평 이명의 <진역유기>에 패수 북쪽 곧 발해의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라는 곳일 것이며 마땅히 서기전 202 년 漢을 세운 고조 유방이 설치한 요동군 망평.양평현 등의 북쪽이다.

 

세번째 천도지인 장당경은 백악산아사달의 동쪽일 것인데 어느 지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사통팔달의 청 시기의 개원 쯤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청 시기의 개원 위치 역시 요하가 경유하는 곳이며 전한 시기에는 현토군 서개마현을 서북쪽으로 흐르는 마자수와 마자수를 받아들인 2100 리 길이 염난수가 합류하는 지형지세인 곳이여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의 란하 정북쪽 상류 지류의 동쪽이고 지금의 요녕성 서쪽에 있는 칠로도산의 서쪽 기슭 쯤이여야 하는 것이다.

 

 

 

아래와 같았던 청국과 이조선 국경 지역 지리를,

 

일본명치왕과 하수인 서향융성.육군참모부가 아래와 같이 변조한 습작지도를 간행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 <중국전도>에도 갈석산.장성동단이 새로운 란하 하류의 동쪽으로 이동되어 표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명치왕의 저따위 지리 변조질을 신채호.계연수가 확실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고대의 요수는 란하, 패수는 란하라 한 것이다.

패수를 란하라 한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지만 위치만큼은 신채호 다음으로 정확한 것이다. 

 

일본명치왕의 지리 변조를 증거하는 대표적인 고지도가 아래의 <황조일통여지전도- 이하 왜황도라 함>의 황하부분도다.

<왜황도>는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간행한 <황조일통여지전도>를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했다는 변조지도다. 

 

- <왜황도>의 황하부분도

 

중국 정사 <한서/지리지>부터 <청사고/지리지> 까지의 모든 기록과 송.명.청 시기 간행된 고지도에 의하면,

황하 곧 한.당 시기의 대요수는 아래의 옅은 청색 실선 추기와 같이 발원지를 떠나 동남류하여 요하 곧 한.당 시기의 염난수 중류로 흘러들었다.

 

결국 위 <왜항도>가 묘사한 범위는 아래의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이다.

 

 

 

 

아래는 현 <중국전도> 표시의 물길입니다.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물길은 아래의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의 물길과 같습니다.

 

 

그러나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북경부터 대한제국 압록강까지의 물길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위 추기도에서 란하.황하.요하.혼하는 10 세기 초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명칭이고 그 이전 1000 여 년 동안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즉 <사기/조선열전>의 패수를 비롯하여 <한서/지리지> 기록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현토.낙랑 등 7 군 지역을 흐른 물길이며 <수경주>에 설명된 고수.포구수.난수.대요수.소요수.패수 등의 위치입니다. 단지 춘추시대부터 시황 진까지의 요수는 위 추정도의 난수였습니다. 근거는 <관자><설원><수경주/난수> 등입니다.

 

따라서 신채호가 말한 `고대의 요하는 란하`를 문리상만으로 해석하면 춘추.진 시기의 요수가 란하라고 말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채호가 <조선상고문화사.상고사> 등을 집필할 1910 년 전후 시기는 이미 일본명치왕놈과 그 하수인들이 전한 시기의 난수.대요수.염난수 곧 송.거란 부터 개칭된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1 개 물길로 변조하고 란하라고 우기며 변조한 습작지도까지 간행.배포한 상황이였기 때문에 신채호가 말한 고대의 요하는 전한 시기부터 대요수와 염난수가 합류한 지금의 란하 중류의 서북쪽 본류 일부와 정북쪽 지류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국 전한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약 2100 여 년의 지리를 지도 제작 기법상 가장 정확하게 제작한 것이 돌에 새겼다는 아래의 <지리도> 이고 당시의 요하가 흘러내린 곳이 산동반도 정중앙 북쪽 내륙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지리도>, 1137 년 송국인 황상이 각석함

 

 

위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또한 위 확대도에 아래와 같이 표시한 적색 실선의 동쪽 지역을 묘사한 것이 이조선의 <무제도>입니다.

 

 

-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대략 1751 이조선 영조 26 년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추정됨

 

 

 

결국 위 <백산대맥도>가 묘사한 범위는 아래의 적색 실선 내 지역입니다.

 

 

위와 같이 사실과 부합한 고지도마저도 일본놈의 손 아래에서 아래와 같이 변조되었고 현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보물이라고 지정까지 하였습니다. 

 

-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2007 년 12 월 31 일 보물 1537 호 지정

 

 

신채호는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하였고 계연수도 란하를 패수라 하였다.

 

 

한국사학계는 물론이고 소위 재야사학의 어느 누구도 저 두 문장을 올바로 해석해 내지 못한다. 

왜일까?

역사 관련 기초 지식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북경대학에서 고조선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북조선 리지린조차도 신채호가 언급한 해성의 헌우락이 패수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지금의 중국 요녕성 해성현에 흐르는 물길이라고 주장한다. 해성현은 요하 중류 동쪽 강변에 설치된 현 명칭이고 그 요하가 란하였다고 하는데, 어떻게 지금의 요하 하류 동쪽 강변에 표시된 지금의 해성현 지역을 흐르는 물길이라고 해석을 하나? 

 

청국 시기 북경에서 동쪽으로 680 리 떨어졌다는 산해관이 지금의 산해관 위치인가? 북경에서 1180 리 떨어진 의무려산과 광녕이 지금의 북진 위치인가? 또 그 산해관 동쪽의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구하가 둘러빠진 곳 곧 발해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의 요하의 최하류이며 입해처라고 연경을 드나들던 이조선 사신 인평대군이이 설명을 했어도 한국인들은 지금의 산해관 위치가 맞고 산해관 동쪽의 지금의 요동만 바다를 요하의 최하류이며 입해처라고 해석한다. 참으로 바다와 같이 너그러운 발상이다.

 

일본명치왕이 1873 년 청국의 란하.황하.요하를 삭제.연결.이동 등의 변조 수법을 동원하여 동쪽으로 뻥튀기식 조작지도를 간행하였고 그래서 산해관도 동쪽으로 500 여 리 쯤, 의무려산도 대략 2000 리 쯤 이동.표시되어야만 한 것인데, 그러한 지리 이동.조작을 신채호.계연수가 간파하고 지금의 산해관.지금의 북진이 아니라고 한 것이 바로 고대의 요하는 란하.패수는 란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광복후 한국사학계는 신채호.계연수의 정확한 지리 인식을 철저하게 깔아뭉갰다. 그리고는 일본명치왕이 조작한 지도에 맞추어 낙랑군이 대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었다라느니 일본명치왕군부 참모부 편찬과 졸개 횡정충직이 1883 년 써제낀 임나고를 계승발전시켜 대한반도 남반부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었다며 마치 일본앵무새처럼 읊조리고 있다. 

 

한국사학계를 비난하는 소위 재야사학도 극히 일부 사실에 약간 가까왔을 뿐 한국사학계 수준이나 거의 마찬가지다. 낙랑군이 갈석산이 있고 진장성 동단이 있는 지점에 설치된 것이 역사 사실인가? 윤내현.이덕일 등의 주장이 역사 사실인가? 한국 역사 지리지는 물론이고 중국 역사 지리지 기록과도 일치하는 모순 없는 논리적인 해석인가? 게다가 안경전.심백강 같은 이들은 패수를 조하 곧 지금의 북운하 동쪽 지류라고까지 주장한다. 조하는 북위 시기 편찬된 <수경주>의 포구수이고 전한이 설치한 어양.우북평 2 개 군 지역을 흐른 물길이다. 무지막지한 주장이며 명백한 망상이고 지속적이면 대국민 사기질에 다름 아니다.

 

또한 낙랑군이 설치된 곳은 준왕조선의 왕검성이 있던 곳이고 고구려의 평양성이였고 고려의 서경이였으며 이조선의 평양부였는데 지금의 갈석산.산해관 부근이 이조선의 평양부였다는 얘기인가? 이미 천관우가 교치 군.현이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다시 생각해 보지 않는가? 왜 그리 모순되고 미흡한 생각만 하는가?

 

윤내현 주장처럼 중국 두 번째 정사인 <한서>의 지리지 기록 중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수경주> 대요수 항에 설명된 물길이 지금의 요하라고 인식하는 한 한국의 강단이건 재야건 식민사관.동북공정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

 

각성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일순간에 잠재우는 방법은 대한제국 당시의 정확한 지리 지식 뿐이다.

자료 없다고 투정부리지도 말라. 이조선.대한제국 당시의 자료는 널리고 널려 있다.

 

 

 

 

 

 

 

 

 

 

1910 년 멸망한 대한제국의 서북 국경선은 아래와 같았다.

 

- 참고도 1 ( 이조선 영조 26, 1751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린 국경지도, 한국보물 1537 호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원본으로 추정됨)

 

왜냐고?

 

대한제국 시기 압록강과 청국의 요하가 위와 같았기 때문이다. 

 

즉,

청국 정사 <청사고/지리지>에 의한 북경에서 산해관까지 670 리, 성경 심양 승덕현까지 1470 리 떨어졌다는 위치는 위 추정도에 표시된 산해관.심양승덕현 지점이였고, 

그래서,

정약용의 <강역고/조선고>에서 연경에서 압록강까지 2100 리라는 거리도 위 추정도의 압록강까지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또 정약용이 언급한 평양 위치도 위 추정도에 표시한 위치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인하대고조선연구소 윤한택 등은 고려 시대 요하가 지금의 요하라고 하며 정약용이 언급한 평양도 대한반도의 평양이라고 주절댄다.

 

시황 진 시기부터 청말까지의 요수도 구별하지 못하는 극히 무식한 자들이고,

일본이 지리를 조작하여 합리화한 식민사관과,

식민사관 지리에 근거한 중국의 동북공정 지리 논리를 옹호.선전하는 한심한 식견이다.  

 

위와 같이 식민사관.동북공정에 젖은 지리 인식은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고 인하대 윤씨 뿐만이 아니다.

한국사학계는 물론이고 북조선의 리지린, 남한의 윤내현 등도 마찬가지다. 

 

 

- 참고도 2 (1612 년 명인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

 

 

요서군 영지.유성.교려현과 요동군 양평.험독.요양현 및 현토군 고구려현, 낙랑군 패수현의 위치는 아래와 같았을 것이다. 

 

 

그 이유와 근거는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 주석의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현토군 고구려현 주석의 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른 요수遼水가 아래와 같았기 때문이다. 

 

 

아래는 서국 전한 시기의 요동군 속현이 표시된 청시기의 고지도 <건륭부청주현도지-이하 건륭도>다. 

 

위 <건륭도>는 아래와 같이 읽는다.

 

즉 고구려.고려 압록수는 <한서/지리지> 현토군 고구려현 주석의 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요수현遼隧縣에 이르러 대요수로 흘러든다는 요수遼水이며 거란.요국 정사인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 기록의 혼하渾河다.

 

또한 진(발해)의 압록수는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의 2100 리 길이 염난수일 것이며 이조선의 압록수는 <한서/지리지> 낙랑군 탄열현 주석의 분려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점제현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는 820 리 길이 열수다. 

 

그 3 개 압록수 위치는 아래와 같다.

 

 

 

지금의 압록수는 1932 년 건국된 꼭두각시 만주국 이후의 압록수일 뿐이다.

 

 

위와 같은 이유는 서국 전한 시기 요동군으로 흘러내리는 대요수였으며 거란.요 시기부터는 황하潢河로 개칭된 물길이 지금의 란하 본류 중류 일부였기 때문이고 그 근거는 서국의 모든 지리지 기록과 송.명.청 시기 간행된 모든 고지도다. 

 

고지도 중에서 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것은 송.거란 시기 각석된 아래의 황상 <지리도>와 이조선의 <백산대맥도-가칭>, 청국의 <성경지여전도>일 것이다.

 

- <지리도>

1137 년 각석된 송인 황상의 <지리도>

 

-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됨.

 

 

- <성경지여전도>

1776 년 간행된 <성경지>에 실림.

 

왕검조선은 <삼국유사/기이>에 의하면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을 말하며 환웅천왕의 신시를 일컫는 고조선과 같이 제목으로 씌였다.

 

또한 <규원사화/단군기.1세왕검>에 의하면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우고 임검성이라 했고 이어서 지금의 만주 길림 땅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 곧 그 땅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속말강은 또 소밀하라고고도 하는데 이것은 예전의 속말수라고 하였다.

 

북애노인이 언급한 만주 길림땅의 소밀성은 정확하게는 청나라 정사인 <청/지리지> 기록의 길림성 쌍양현 치소 소알연일 것이다. 아래 추정도의 1 표시 지점이다. 소알연에서 동쪽으로 195 리 떨어진 곳은 길림부 치소이고 그곳을 온덕향이라고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추정도의 2 지점은 1 지점이 기후가 차서 농사에 적합치 않고 남쪽과의 교통도 불편하여 도읍한 지 10 년 만에 옮긴 패수 북쪽 지점의 제 2 임검성.평양성으로 보이며 30 년 후에는 홍수가 나서 패수도 넘쳤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서한 시기 설치된 요동군 험독현 곧 요택의 남쪽 끝 지점인 것으로 보인다.

 

3 지점은 <규원사화/1세왕검>에서 제 2 임검성.평양성이라고도 설명한 백악산 아사달일 것으로 보이며 북애노인은 <요사/지리지>를 근거로 발해 곧 진국의 서경압록부 신주.풍부.환주.정주 지역으로 이해하였으며 古 염난수의 동쪽이라고 인식하였다. 

 

4 지점은 태백산 우수하 아사달 곧 제1 임검성.평양성의 남쪽이라는 장당경 위치일 것으로 추정된다.

 

5 지점은 중국 진시황과 동시기 부왕이 통치한 조선의 왕검성이고 서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지역이며 고구려 동천왕이 빼앗아 쌓은 평양성이고 고려의 서경.이조선의 평양부다. 

 

6 지점은 <청/지>에 의하면 길림성 농안현으로 길림부 치소에서 서북쪽으로 360 리 떨어진 고부여국도古夫餘國都라고 설명되어 있다.  

 

7 지점은 갑비고차일 것으로 추정되며 8 지점은 영고탑이고 9 지점은 왕검조선의 서남쪽에 위치한 엄려홀 곧 치우씨 후손의 남국藍國이며 엄려는 후일 의무려산의 의무려일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삼국유사><동국통감><규원사화> 등에 의하면 서기전 2333 년 경에 건국된 왕검조선과 47 대로 막을 내린 후 단군의 제위를 물려받고 <삼국사기>의 삼국 흥성기까지 역년한 부여 곧 단군부여의 강역은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상류 동쪽 지역일 수 밖에 없다.   

 

 

위와 같은 지형과 지리는 1870 년대 초 일본명치왕이 한 시기 요서.요동군 곧 청 시기 직예성 영평부와 봉천성 금주부로 흘러드는 난수.란하와 대요수.황하를 변조하여 아래와 같이 란하 1 개 물길로 조작하였다. 또 발원한 후 동남류하여 염난수.요하 의 중류로 흘러들어야 하는 대요수.황하를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흑수.흑룡강 위치로 옮겨 표시하였으니 지금의 요하는 당연히 한 시기 현토.요동 2 개 군을 흐르는 염난수일 수 밖에 없어졌고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요하가 된 것이다. 

 

그 결과 왕검조선의 첫도읍 임검성이며 청 시기의 길림성 쌍양현 위치도 동북쪽으로 3000 리 쯤 튕겨져 위 추정도의 쌍양 위치가 된 것이다.

 

 

아래는 서기 10 세기 초부터 서기 1911 년까지의 산과 물길 명칭 표시 위에 서기전 75 년 경 서한이 설치한 요서.요동.현토.낙랑 4 군 위치를 표시한 추정도다. 

 

 

위 지리에 관한 근거는 서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모든 고지도이고 아래는 그 고지도 중의 하나다.

 

 

  • 1137 년 송인 황상이 각석한 <지리도>의 황하.요하 부분도

 

그런데,

1932 년 건국된 일본 꼭두각시 만주국부터는 1911 년까지의 란하.황하.요하.압록강 곧 서기전 75 년 당시 난수.대요수.

염난수.열수 등 주요 4 강의 위치를 아래와 같이 변조.이동시켜 표시하였다. 지금의 대릉하.송화강.흑룡강 등도 당연히 이동.표시된 물길이다.

 

 

결국 난수 최하류에 설치된 요서군, 대요수 하류와 염난수 중류에 설치된 요동군, 염난수 중상류와 요수 상류 유역에 설치된 현토군과 패수 동쪽 열수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 등 4 군 위치는 동쪽으로 뻥튀기되어 위와 같이 표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변조.이동을 기획하고 습작지도를 간행.선전.홍보하기 시작한 시기는 1870 년대 초부터였고 주모자는 일본명치왕, 하수인은 서향융성과 육군 참모부였으며 그 습작지도가 공인받기 시작한 것은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였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 년 일본 공식 관찬 지도, 육군 참모부 간행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연구/고지도

 

하지만 1875 년 당시 요하.압록강과 백두산 위치는 아래와 같았다. 

 

- 만주국지도

1934 년 간행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과 같다. 그리고 대마도와 제주도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했다고 하니, 이는 곧 지관들의 일반론이다.

                                                       <성호사설/천지문> 이익(1681~1763)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다. 해亥 방향에 앉아서 사巳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이다. 그런고로 예전부터 중국과 친해 왔다. 그러나, 땅이 좁고 물이 젓어 위인을 낳지 못했다.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 그리고 동호와 여진족이 모두 중원을 제패하고 황제가 된 일이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만은 그렇지 못해서 주어진 영토만 지키며 감히 뜻을 품어 보지 못했다`라 했다  

                                                      <택리지/복거총론,산수총론> 이중환(1690~ ) 

                                                                                                    <후기 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배우성 37~38 쪽

 

- 가칭 <백산대맥도>,

소장: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편찬한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알려진 무제도

 2007 년 12 월 31 일 대한민국 보물 1537 호로 지정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의 원도로 추정됨

 

위 <백산대맥도>의 묘사 범위는 아래의 적색 실선 지역을 묘사한 것임.

 

이범윤 [북여요선北輿要選] 地圖附

 

 

종성으로부터 서쪽으로 광제곡 10 리에 이르고, 광제곡으로부터 북쪽으로 지타소의 남영 70 리에 이르며, 남영으로부터 하반령 350 리에 이르고,

하반령으로부터 북쪽으로 길림성 500 리에 이르렀으며, 온성 삼합강으로부터 서전평 90 리에 이르고, 서전평으로부터 서쪽으로 청산

 

평 125 리에 이르며, 회령으로부터 화룡곡 110 리에 이르고, 화룡곡으로부터 북쪽으로 지타소 남영 95 리에 이르고, 남영으로부터 북

 

쪽으로 배채구 170 리에 이르렀으며, 무산으로부터 북으로 황구령 190 리에 이르렀다.

 

 

- 1880 년대 조선 서북계 추정도

 

1 - 삼수.갑산 2 - 회령.종성.간도 3 - 혼춘 4 - 연추(크라스키노라)  5 - 하바로스크 6- 해삼위(블라디보스톡?)

7 - 이만시(아무르주)

*  자유시(알렉세프스키) 흑룡강 지류인 쩨야강 연안에 위치. 시베리아횡단열차가 통과

    소왕령 - 우스리스크

    수청 - 노우니꼴라예크카

 

광무 2 년(1898) 해삼위의 거류민 조치용趙致龍의 소疎 대략  

- 정약용의 <강역고>를 재편집한 장지연의 <대한강역고/백두산정계비고>에서 발췌

                

해삼위 등지에 거류하는 조선 백성이 6 만여 호이니 마땅히 부로부터 관원을 보내서 보호하고 관리하게 하십시요.

 

이해 4 월에 간도 거류민 여형변呂衡變 등이 중추원에 헌의

 

경흥으로부터 북쪽으로 연추 100 리 사이에 걸쳐서 우리 백성이 2000 여 호가 살고, 아지미 200 리 사이에 사는 자가   300 여 호,

시미 300 리 사이에  사는 자가   200 여 호, 해삼위400 리 사이에 사는 자가 400 여호, 추풍 四社 800 리 사이에 5500 여 호, 수청 1400 리 사이에 1000 여 호, 허발포 許發浦 2000 여 리 사이에 사는 자가 1000 여 호요,

 

아라사 관리가 우리나라 백성에게 세금을 받는 것이 식구 하나에 지폐 2 냥을 거두었으며, 어선.상선 한 척에 대.중.소 3 등으로 나누어서 26 냥, 20 냥, 15 냥으로 작성하니, 총계해 보면 1 년에 상선이 거의 300 여 척이 되므로 세금이 6000 원이 되고, 경흥항에서 세금받는 것이 소 1 필에 세금이 5 냥인데 1 년 동안의 소의 수출이 1 만여 필이며 인구 1 명에 세금이 1 냥 2 전이요, 그 밖의 당목.양승.달리 등의 세금이 1 필에 1 냥씩입니다. 청컨대 영사관을 설치하여 우리의 거민을 보호하시옵소서.

  

그러나 정부에서는 해삼위에 영사관을 설치하기를 의론하다가 경비를 갹출하지 못해서 이 일은 중지되었다. 그러다가 6 년 가을에 이르러 비로서 외부주사 왕우영으로 경흥감리를 삼아 영사를 겸임하여 그로 하여금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1800 년 청국인 홍양길이 편찬한 <건륭부청주현도지>에 실린 봉천.길림.흑룡강성도 

 

 

 

1780 년 청 건륭제 만수절 축하 사절단을 따라간 박지원이 <열하일기/도강록> 6 월 18 일 기록.

 

``<당서>를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 리요,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도 한다고 썼고,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나, 이러고 보면 무엇을 표준 삼아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일이다. 또 <지지>에는,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 70 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개평현으로부터 동으로 수암하秀岩河까지 300 리요, 수암하로부터 동으로 200 리를 가면 봉황성이라고 했으니, 이것으로써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서 말한 평양과 안시성의 거리가 약 500 리쯤 된다는 것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우리 나라 인사들은 기껏 안다는 것이 지금의 평양뿐으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을 했더라 하면 이 말은 꼭 믿고, 평양에 정전이 있었더라 하면 이 말은 넙적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면 이 역시 믿으나 만약에 봉황성이 평양이었더라 하면 깜짝 놀랄 것이요, 더구나 요동에도 평양이 있었느니라 한다면 아주 괴변으로 알고 야단들일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래 조선의 옛 땅인 것을 모르고, 숙신.예맥과 동이의 잡족들이 모두들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던 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오랄,영고탑,후춘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옛 강토임을 모르고 있다.

 

애달프구나!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어 붙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아 혹은 압록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그러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어 언제나 사적을 따라다니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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