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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考≫를 통해 본 柳得恭의 역사 인식

 

2004701122 이 성 희



목차


Ⅰ. 머리말
Ⅱ. 유득공의 생애
Ⅲ. 《渤海考》의 내용 분석
1. 서술체재와 내용
2. 서술에 나타난 발해사 인식
Ⅳ. 맺음말(사학사적 의의)

 

 

Ⅰ. 머리말

 

조선후기 17-18세기는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발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때로서 실학자들이 선두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허목의 《東事》 <靺鞨列傳>을 비롯하여 이종휘의 《東史》<渤海世家>, 유득공의 《渤海考》, 정약용의《我邦彊域考》<渤海考>와 <渤海續考>, 홍석주의 <渤海世家> 등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 중 특히 유득공의 《발해고》는 ‘남북국 시대론’을 최초로 제기하여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논쟁은 관련 연구자들 사이의 논란이 되고 있다. 유득공은 역사지리서인 발해고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에 관한 연구는 의외로 적다. 1980년대 들어 그의 漢詩 및 문학에 관한 한국 한문학계의 연구업적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이루어진 연구의 대부분은 그의 생애나 업적, 그리고 《발해고》 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에 그쳤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발해고의 번역본이 출간되고 조선후기 발해관 및 유득공의 역사인식을 다룬 연구서 등이 나타나 발해사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발해고의 저자인 유득공의 가계와 생애를 살펴보고 발해고의 서술체재와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 발해고의 발해사 서술을 분석하여 유득공의 역사인식을 살펴보겠다.

 

Ⅱ. 유득공의 생애

 

泠齋 柳得恭은 1748년(영조 24)에 태어나 1807년(순조 7)에 죽었는데 주로 활동했던 시기는 조선 후기 정조시대였다. 유득공의 가계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文化柳氏世譜가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유득공의 증조부 柳三益은 ‘庶子’로 늙어서야 관직을 받은 인물이다. 즉, 1722년 52세에 通禮院 引義로 추천되어 통례원에 근무, 1731년 內資寺 主簿, 1740년 水原 監牧官, 1745년 江華 監牧官이 되었다. 그는 뒤늦게 관직에 들어와서 24년동안 종6품의 주부나 감목관을 역임하다가 77세의 고령으로 임소에서 사망하였다.

유득공의 조부 柳漢相은 과거에 뜻을 두었다가 모친 함평 이씨가 사망한 뒤로 포기하고, 주로 문객생활을 하였다. 판관 윤용(처가이며 재종이 됨)의 문객이 되어 그가 부임하는 영월, 강화, 그리고 함경감영 등지를 수행하였고 윤용이 사망한 뒤에는 宋翼輔, 趙東漸 등을 수행하였다.

유득공의 아버지 柳瑃은 유한상과 평산 신씨 사이의 맏아들로 27세에 요절하였다. 증조부인 유삼익과 외조부인 홍이석이 서자였기 때문에 유득공은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유득공은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 19세에 숙부인 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 짓기를 배웠으며, 20세를 지나 朴趾源․李德懋․朴齊家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북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득공도 중국여행을 했다. 첫 번째는 검서관으로 발탁되기 전에 심양으로 가는 위문사를 따라 갔고, 두 번째는 심양을 거쳐 열하의 별궁을 방문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전대미답의 여로를 밟았다. 특히, 첫 번째 여행은 《東國地理誌》를 읽고 연상만 했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에서 일어난 고구려, 발해 등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발해고》를 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774년(영조 50) 27세에 司馬試에 합격하여 生員이 되었고, 정조가 즉위하여 奎章閣을 설치한 뒤인 1779년(정조 3)에 檢書官에 임명됨으로써 32세에 비로소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포천현감(抱川縣監)․양근군수(楊根郡守)․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사도시(司導寺)주부․가평군수(加平郡守)․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를 역임하였고, 그를 아끼던 정조가 돌아가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는 노론․ 소론․ 남인을 고루 등용하여 왕권을 간접적으로 강화하는 탕평책을 썼고 양반의 서얼들에 대한 差待를 완화한 庶孼通淸을 단행하였다. 또한 규장각을 설치해서 각종 문화출판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득공은 정조를 近侍하며 양반의 庶類로서 漢文 新四家, 北學者, 규장각 검서관, 그리고 역사지리학자로서 뚜렷한 활동을 했다.

그는 단군 조선에서 부터의 역대 도읍지를 유람하고 그 경험을 살려 《二十一都懷古詩》를 지어 우리 역사의 전개과정을 개괄하였고 발해와 한사군의 역사에 대해 각각 《渤海考》(1784), 《四郡志》를 저술하였으며, 그 당시 조선사회의 세시풍속을 정리한 《京都雜志》를 남겼다. 특히 그는 역사상 실체는 있었으나 기록이 없어진 발해와 한사군 등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저술하였고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당시의 세시풍속에도 관심을 기울여 저술을 남긴 것이 독특하다.

 

Ⅲ.《渤海考》의 내용 분석

 

1. 서술체재와 내용

 

국립중앙도서관에는 1권으로 된 ≪발해고≫ 와 4권으로 된 ≪발해고≫ 가 각기 필사본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1권본은 독립된 책으로 되어 있는데 비하여 4권본은 《泠齋書種》에 수록되어 있다. 1권본이 유득공이 처음에 썼던 것이고 4권본은 유득공이 언젠가 내용을 수정하고 증보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는 1권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권본 ≪발해고≫는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던 1784년에 저술되었다. ≪발해고≫의 체재는 「君考」․「臣考」․「地理考」․「職官考」․「儀章考」․「物産考」․「國語考」․「國書考」․「屬國考」 등 9考로 되어있다. 그가 책이름에 굳이 고(考)자를 붙인 이유는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내가 내각의 관료로 있으면서 궁중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역사를 편찬하여 군,신,지리,직관,의장,물산,국어,국서,속국의 9考를 만들었다. 이를 世家, 傳,志로 삼지 않고 고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君考」는 기전체 사서의 세가에 해당되는데 震國公에서부터 高王, 武王, 文王을 거쳐 발해의 마지막 왕이라고 알려진 왕 諲譔, 그리고 興遼王, 烏舍城 浮渝府 琰府王 까지 17명의 발해군주를 소개하고 있다. 발해의 世系에 대해서 새로 발견된 사실 한두 경우를 제외하면 현재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소개된다. 대조영의 出自, 흥요왕과 오사성 부유부 염부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이견이 많다.

「臣考」는 기전체 사서의 열전에 해당한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공하고 숙위에 참여하기를 청하고 관직을 받아오는 발해 사신들, 일본에 파견된 발해의 사신들에 관한 일본 史書의 기록들을 전재하고, 발해 멸망 시에 守城한 무명의 발해인들과 고려로 내투한 발해세자 대광현 등을 소개하고 있다.

 

大叡

장경 4년 (824) 2월에 선왕이 대예 등 5명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고, 숙위에 참여하기를 청하였다.

 

大昌泰

강왕 때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일본 천황이 태극전에 행차하여 이들을 접견하였는데, 네 번 절하는 것을 줄여서 두 번 절하고 박스는 치지 않도록 하였다.

 

洪見

고려 태조 12년 (929) 6월 경신일에 배 20척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고려로 도망하였다.

 

「地理考」는 ≪新唐書≫, ≪遼史≫,≪淸一統志≫를 인용하면서 5경,15부,62주, 그리고 현 등의 위치를 비정하고 안설을 덧붙이고 있다. 이용범은 이곳이 오류가 제일 많은 부분이라고 지적하였다.

「職官考」는 新唐書에 소개된 발해의 3성 6부 12사서 체제의 文職과 十衛제로 된 武職을 열거했다.

「儀章考」는 발해의 의식절차를 언급한 것으로, ≪신당서≫의 기사를 그대로 옮겼다.

「屬國考」는 ≪宋史≫에 실린 定安國전을 가필하지 않고 옮긴 것이다. 정안국의 유래, 정안국 국왕 열만화(烈萬華)와 烏玄明의 조공, 그리고 거란과의 대립 등을 설명한다. 말미에는 고려 현종 9년에 정안국 사람 骨須가 來奔했을을 덧붙이고 있다.

 

정안국은 본래 마한(고구려를 마한이라고도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 후예 국가인 발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송기호)종족으로 발해가 거란에 격파되자 그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다.

 

송나라 태조 개보 3년 (970)에 그 나라 왕 열만화가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리고 갖옷을 바쳤다. 태종 태평흥국 6년(981)에 다시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려 “정안국 왕 신 오현명이 아룁니다. 성스러운 임금께서 천지에 은혜를 두루 펴시고 오랑캐의 습속을 어루만지시는 시절을 삼가 만나게 되니, 신 오현명은 진실로 기쁘고 즐럽기 한령없어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입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정안국 사람 골수가 고려로 망명하였다.

 

쑨위량은 발해는 일찍이 속국이 없었음을 들어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진헌은 속국을 지배, 종속의 좁은 뜻이 아닌 연속의 의미로써 보면 정안국을 포함시킨 것을 틀렸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國書考」는 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낸 외교문서인 국서 6통이 소개되고 있다. 일본사서에서 발췌하여 있는 그대로 옮겼다. 무왕이 보낸 국서에는 많은 발해 연구자들이 수시로 인용하는 문구가 실려 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天朝가 명을 받아 일본을 건국하셨고 누대로 찬란한 업덕을 쌓으셔서 百世나 번성하셨습니다. 저는 列國가운데 하나로서 외람되게 여러 藩들을 거느렸고 고구려의 옛터를 수복했고 부여의 유속을 지녔습니다.

 

이에 대해 정진헌은 이것만으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뜻은 아니고 다만 지역연고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物産考」와 「國語考」는 각가 발해의 특산물을 소개하고 발해의 언어를 정리하고 있다. 내용이 너무 적고 인용자료 모두가 신당서에 실린 것을 그대로 옮겨쓴 것으로 유득공 자신의 견해가 전혀 피력되지 않았다.

 

태백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綿,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도의 오얏, 악유의 배, 부주의 은

 

왕을 可毒夫, 聖王,基下라 부르며, 왕의 명령을 敎라 한다. 왕의 아버지를 老王, 어머니를 太妃, 처를 貴妃라 하고 맏아들을 副王, 나머지 아들을 王子라 한다. 관품은 질(秩)이라 한다.

 

 

2. 서술에 나타난 발해사 인식

 

우선 발해에 대한 유득공의 인식은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유득공은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나라 또는 당나라의 속국이나 속주로 보는 견해에 대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밝혔다. 이는 ≪동사강목≫ 등에 있어서 안정복의 견해와 아주 대조적인 것으로 안정복은 ≪동사강목≫ 凡例에서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발해사를 우리 역사 속에 넣을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남북국 시대론이다. 유득공은 발해의 존립시기를 남북국시대하고 파악하였다. 유득공은 북쪽에 발해가 있고 남쪽에는 신라가 존립하는 상황을 남북국시대라고 했다. 이는 발해사를 한국사 체계로 편입시켰음을 위미한다. 이것은 허목과도 구별된다. 허목은 신라 ․고구려 ․백제를 단군 기자․위만과 같이 세가 부분에서 취급했음에 비하여 발해를 열전에서 취급하여 발해를 일단 낮게 평가하였다.

 

(보충 필요)

진국공
진국공은 성이 대씨이고 이름은 걸걸중상으로 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던 자들이다. 군고 진국공

이것은 서문에 나타난 의식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한계성이 있다.

 

≪발해고≫에서 치명적인 단점으로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는 발해 멸망 전후의 기록인 興遼王과 烏舍城 浮渝府 琰府王에 관한 기사이다. 유득공은 흥요왕 大延琳과 琰府王을 발해의 군주로 「君考」에 넣고 있다. 특히 염부왕에 대해서는

 

按 (살피건대), 발해 홀한성이 격파된 것은 요 태조 천현 원년(926년)으로 후당 명종 천성 원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 때에 발해가 멸망하였다고 하지만 《요사》에는 태조가 군주의 덕을 갖추고 있어서 발해 국가를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하였다. 요 성종 통화 14년(996)에 蕭韓家奴(소한가노)가 “발해, 고려, 여진이 서로 동맹을 맺었다”고 아뢴 적도 있다........(생략).......이로 보건대 발해는 일찍이 멸망하였던 것이 아니다. 부유부 염부왕에 대해서 비록 성과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나, 태조의 조서를 보니 그가 대씨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발해가 언제 멸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按設에 염부왕에 대해 대씨라는 것과 대인선의 멸망 이후에도 염부왕과 같은 것이 있어서 발해가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쑨위량은 “흥요왕 대연림과 염부왕을 군고에 넣어 서술하고서 아울러 안어에 ‘발해는 일찍이 망하지 않았다. 발해가 언제 망했는지는 고증할 수 없다’고 해서 발해 자체의 역사를 연장했다. 이런 종류의 잘못된 이해는 고증하는데서 두드러진다”라고 논박하였다.

이용범은 흥요국은 大延琳의 반란 정권으로, 그리고 烏舍城 琰府王은 상경 일대에 출현한 토민 정치집단으로 파악하고 유득공이 이를 군고에 넣은 것은 발해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발해 왕통을 연장하려는 주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진헌은 大諲譔의 기사를 제시하면서 유득공이 발해의 말왕이 대인선임을 알았다고 하였다.

 

이날 밤 요 태자 야율배, 대원수 야율요골, 남부재상 야율소, 북원이리근 야율사열적, 남원이리근 야율질리 등이 홀한성(발해 수도 상경성)을 포위하였다. 기사일(12일에 왕이 항복을 청하였다. 경오일에 요 임금이 홀한성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신미일(14일)에 왕이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고 양을 끌고서 신하 300여 명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2월 병오일에 요나라가 발해국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홀한성을 天福城으로 바꾸었다. 또 자신의 태자인 야율배를 人皇王으로 삼아 통치하도록 하였다.

 

이런 그가 염부왕을 소개하면서 발해가 언제 멸망했는지 모르겠다 했다면 이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명의 혈육이 도망가 존속한 것을 왕실의 존속으로 본 예를 들어 유득공도 그러한 경우가 아닐까? 라고 하였다.

유득공은 발해 5경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상경용천부는 지금의 寧古塔이고 중경현덕부는 지금의 吉林이며 동경 용원부는 지금의 鳳凰城이다. 남경 남해부는 지금의 海城縣이고 서경 압록부는 고증할 수 없으나 마땅히 압록강 근처에 있어야 한다

 

5京에 대한 유득공의 언급을 정진헌은 上京의 위치비정을 1933년에 발굴된 유적을 통해 정확했음이 입증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中京은 정효공주와 정혜공주의 묘지가 출토되어 舊國을 돈화시로, 중경은 화룡으로 비정하는 현재의 주장과 비교하면 그의 견해는 상당한 근사치가 있다 하였다. 東京은 현재의 학설과 방향이 정반대이며 南京의 위치 비정도 역시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이렇게 잘못된 비정을 했으므로 남해부의 新羅道를 海路라고 그는 오판했다. (그 뒤에 정약용과 한진서에 의해서 고쳐졌다)

이것은 저자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遼史≫,≪淸一統志≫의 오류 때문인데 유득공은 의문을 제시하면서도 ≪遼史≫,≪淸一統志≫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이상은 신당서에 기록된 것인데, 62州라 해놓고 단지 60주만 열거되어 있다. 또 淸一統志에 郭州가 있지만 여기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당나라 역사서에 누락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에 기록된 발해 지리

 

이상은 요사에 기록된 것으로서 요나라 태조가 동쪽으로 발해를 병합하여 성읍을 얻은 것이 103곳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군현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지금 113곳이나 되니 의문스럽다. 요사에 기록된 발해지리

 

송기호는 이러한 자세는 유득공의 고증학적 자세를 잘 드러내는 것이라며 그 뒤에 정약용, 한진서 등이 발해 지리를 제대로 비정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였다.

유득공은 발해와 신라의 국경선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신라가 통일한 뒤에 동북은 泉井郡으로써 경계를 삼았으니 지금의 德源郡이다. 서북은 唐岳縣으로 국경을 삼았으니 지금의 中和府이다. 중화에서 동쪽으로 祥原,遂安,谷山,그리고 德原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그 변경 요새다. 이밖에 함경도와 평안도의 땅은 발해가 모두 차지했다

 

유득공은 논란이 많고 아직도 결정을 못 본 泥河를 아래와 같이 비정했다.

 

唐書에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맞닿았는데 泥河로써 경계를 삼는다고 했다. ...이른바 일명 니하라고 하는 패수는 곧 우리나라 평양의 패수니 지금의 대동강이다. 신라와 발해의 국경이 나뉜 곳은 바로 대동강 일대였다.

 

이것은 현재의 연구결과와 부합된다. 이에 대해 徐炳國은

 

유득공은 발해사의 개척자로서 그 이름이 길이 남은 인물인데 발해사 연구에 있어 그의 두드러진 공적은 발해국과 신라의 접경지라고 《신당서》에 기록된 니하를 구체적으로 실증한 것이고 그는 발해고에서 두나라 접경지 문제에 자신있게 결론을 내렸다.

 

라고 하면서 극찬하였다.

 

Ⅳ. 맺음말(사학사적 의의)

 

발해사는 한국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삼국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로 당연시 되었던 것과는 달리 발해사는 그것이 우리의 역사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유득공은《발해고》 머리말에서 고려가 발해 역사까지 포함된 ?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한 뒤에, 발해를 세운 大氏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북한 역사 학자 김혁철은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기 전까지는 어느 한 실학자도 발해역사에 대한 글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유득공은 발해사연구를 시작한 실학자들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나중에 정약용, 한치윤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발해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던 그의 노력은 더더욱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본문에서는 걸걸중상을 건국자로 보면서 속말말갈인으로서 고구려에 신하로 보았는 것 등 본문에서는 서문에 나타난 의식을 뒷받침하지 못한 한계성이 있다.

17세기에 들어와 외침을 빈번하게 받으면서 왜 조선이 약한 나라가 되었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영토적인 것에 관심을 쏟게 했으며 이는 고구려 고토 회복 의식에서 발해 고토 회복의식의 표출로 나타났다. 유득공의 발해고와 발해고 自序에 나타난 남북국시대론은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우리 역사로 인식고자 한 그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유득공, 송기호(옮김),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

宋基豪, <조선시대 史書에 나타난 발해관>, ≪韓國史硏究≫72, 1991.

李萬烈, <朝鮮後期의 渤海史 認識>, 《한우근박사정년기념논총》, 1981.

임상선(편역), ≪발해사의 이해≫, 신서원, 1991.

정진헌, ≪실학자 유득공의 고대사 인식≫, 신서원, 1998.

鄭鎭憲, <柳得恭의 南北國時代論에 대한 認識>, 《경희사학≫20, 1996.

조동걸 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창작과 비평사, 1994

조성을, <조선후기 사학사 연구 현황>, ≪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上), 한울, 1987.

 

 

 

출처 : 모두 행복하십시오
글쓴이 : 한미옥 원글보기
메모 :

 

日帝, 신시·고조선 적통 이은 ‘400년 북부여’ 역사도 말살

[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

13〉 고조선과 북부여·부여 역사 부정하는 한국사

            
입력 : 2015-06-14 21:49:25      수정 : 2015-06-14 21:49:25

               
 
필자는 지난 호 (세계일보 6월8일자 26면 참조)에서 우리 역사의 출발이 신시로부터 시작되어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현 교과서에도 서기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말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을 소개하는 것 외의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믿기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이 고조선의 역사를 찾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


◆고조선은 8000리 땅을 100명 이상의 ‘단군’이 1908년간 다스린 나라

고조선의 영토 크기와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관자’에 있다. 관자는 제나라 환공(서기전 685∼643년)과 관중(서기전 ?∼645)의 대화록이므로 서기전 645년 이전의 기록이다. 그 관자에 ‘팔천리지발조선(八千里之發朝鮮)’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 이 기록을 ‘발조선이 제나라에서 8000리 떨어진 나라’라고 해석해왔으나 사실은 ‘발조선은 8000리 영토를 가진 나라’라는 말이다.

이 관자와 ‘산해경’, ‘여씨춘추’, ‘사기’ 등에 수록된 조선 위치 관련 기록을 종합적으로 연구·분석한 결과 고조선 영역은 서쪽으로 영정하(베이징·톈진의 서부)에 이르고, 발해의 북쪽에 있던 8000리 대제국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나카 미치요와 이마니시 류는 ‘단군’은 평양지역의 박수무당, ‘왕검’은 ‘선인’으로서의 호칭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을 이은 최남선은 ‘단군은 무당의 일명인 당굴, 왕검은 대인·신성인의 뜻’을 가진 단어라고 하였고, 이병도는 ‘제정일치 시대에는 단군뿐이요, 제정이 분리된 후로는 제사단체의 장은 단군, 정치단체의 장은 왕검’이라고 하였다. 

단군은 지배자의 칭호로, 수많은 단군들이 나와 1908년간 고대의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민족 통합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져 지금도 경배의 대상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런 주장에 따라 현 교과서에서는 단군왕검을 제사장을 의미하는 ‘단군’과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하는 ‘왕검’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의 직책명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단군왕검’은 중국의 성명과 칭호의 표기 방법에 따라서 칭호가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도록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단군(壇君)의 ‘단(壇)’자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을 의미하고, ‘군(君)’자는 ‘임금’을 의미하는 칭호였으며, 왕검은 1세 단군의 이름으로 봐야 한다.

‘나이가 1908세였다(壽一千九百八歲)’는 기록은 단군 홀로 1908년을 살았다는 신화가 아니다. 신라·고려·근세조선 119명 임금의 평균 재위 기간이 16.7년이었음을 고려하면 고조선 1908년 동안 1세 단군 왕검, 2세 단군 ○○, 3세 단군 ○○에 이어 114세 단군 ○○까지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의미이다.

그 흔적이 4000년 전 이전에 시작된 하가점하층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이고, 이보다 앞선 환웅천왕의 신시문화는 6725년 전 이전에 시작된 홍산문화이다. 이렇게 되면 요하문명이 우리 조상들의 유적임이 명확해진다.

◆환인이란 말을 빌미로 삼국유사 기록 부정


나카 미치요와 이마니시 류 등의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 ‘환인(桓因)’이라는 불교용어가 등장하는 것을 이유로 이 기록이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 온 이후에 날조한 신화라고 하였다. 환인(桓因)이 ‘석가제파인타라’ 혹은 ‘석제환인인타라’라고도 불리는 불교의 천신을 간략하게 줄인 칭호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하늘님금’을 하느님이라며 받들어왔고, 한자로는 ‘천제’, ‘상제’, ‘황천’, ‘천(天)’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불교 도입 후에는 불교의 ‘천신’인 ‘환인’으로 표기를 한 것뿐이다.

근세조선 말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인 로스, 게일, 기포드, 헐버트, 성서변역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낸 언더우드 등은 각기 한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 책에서 “한국인들이 수천 년 전부터 하느님, 하나님을 부처님보다 높은 최고의 신,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관리하며 상과 벌을 주관하는 신으로 믿고 있으니 ‘성서’ 번역에 있어 여호와를 하느님(하나님)으로 번역하자”고 주장하여, 그렇게 되었다. 따라서 환인이라는 말을 빌미로 ‘삼국유사’의 고기와 ‘제왕운기’의 본기를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조작된 신화라고는 할 수 없게 된다. 

약 4000년 전 고조선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꺽창 유물.
◆해모수의 북부여와 동명제의 부여 400년 역사가 사라졌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이 서기전 2333년에 건국되어 1908년 만에 망했다 했으니 고조선이 멸망한 해는 서기전 425년이다. 이어서 서기전 419년에 북부여가 건국되었고, 서기전 100년 전후에 동명제가 해부루왕의 북부여를 빼앗아 부흥시켰다.

이런 긴 역사적 흥망 과정을 시라토리 구라키치와 이마니시 류는 “단군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부루가 태어났고, 해모수와 하백의 딸이 주몽을 낳았으며, 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라 하여 단군이 곧 해모수이고, 주몽과 부루는 형제”라는 식으로 모두 서기전 59년에 태어나는 주몽과 거의 동시대 인물들로 왜곡하였다.

이렇게 되면 단군의 고조선, 해모수의 북부여, 동명제의 북부여(부여) 등 400여년의 역사가 없어진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를 근거로 신시, 고조선, 해모수의 북부여, 동명제의 북부여, 해부루왕의 동부여 등의 역사 교육이 금지되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이병도는 ‘부여고’에서 북부여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하느님(천제)의 아들이라며 부여를 부흥시킨 동명제의 탄생, 성장, 탈출, 부여로 와서 왕이 되는 등에 대한 ‘논형’, ‘후한서’, ‘위략’ 등의 중국 기록이 고구려 건국시조(주몽)의 전설을 잘못 전한 것이고, 동명제 즉, 동명은 주몽으로 고구려의 시조라고 왜곡하였다. 이 논리는 현재의 교과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역사교과서에서 ‘부여는 1세기에 이미 왕을 칭하고’라고 하여 전국시대부터 서기 1세기 이전까지 수백 년의 북부여·부여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준왕의 조선, 위만조선의 영토 위치와 정체

고대 한국의 맹주였던 고조선이 사라지자, 요동국과 더불어 가장 서쪽에 있던 고죽국이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수서’ 배구전에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 무왕 때에, 이 고죽국 땅에 기자를 봉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이 땅을 나누어서 삼군(낙랑·현도·대방군)을 두었고”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기자와 무왕은 서기전 12세기 사람이고, 고죽국은 서기전 18세기부터 서기전 7세기까지도 존재하던 나라이므로 무왕이 기자를 고죽국에 봉할 수 없다. 이는 고죽국이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것을 아는 사람들이 기자의 조선으로 생각하고 만들어낸 말로 보인다. 고죽국에서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조선의 마지막 왕이 준왕이고, 준왕이 서기전 194년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고죽국은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고, 그 지역의 창려가 준왕과 위만조선이 도읍했던 왕험성이었다. 고대 한국 영토 중에 가장 서쪽 지역에 있던 나라가 준왕의 조선과 위만조선이었다. 따라서 이 조선들은 혈통적으로나 영토 위치상으로나 신시·고조선의 적통을 이은 고대 한국의 중심 국가가 될 수는 없다. 신시·고조선의 적통을 이은 국가가 북부여이고, 그다음이 오국(부여·신라·고구려·백제·가야)으로 이어진다.

◆고조선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 ‘고조선’ 국호 왜곡

고조선은 본래 기자조선, 위만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의미로 쓰인 국호이다. 그러나 일본강점기에는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의 실존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이병도학파 학자들에 의해 현재 역사교과서에서도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기자조선, 준왕 조선, 위만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의미로 고조선이라 불렀던 것인데, 준왕의 조선,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 한국 고대국가의 중심에 있는 국가라는 의미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조선의 군주를 뜻하는 ‘기후’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 유물. 기자동래설, 기자조선의 실존을 증명하는 유물로 제시되지만 조작된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존재한 적도 없는 기자조선의 망령이 중국 동북공정의 근원

우리 역사에서 기자와 기자조선보다 더 큰 비중을 가진 인물과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기자와 기자조선이 수·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원인, 고구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고, 유학자들의 모화·사대에 명분이 되기도 했다. 또 일제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였다.

하지만 기자동래, 기자조선의 실존 유무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적다. 필자가 중국의 수많은 사서를 뒤져 고증한 바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온 적도 없었고, 기자가 건국한 조선이라는 나라, 기자조선은 존재한 적도 없었다. ‘사기’ 송미자세가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과 ‘상서대전’의 “기자가 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조선으로 달아났는데, 무왕이 그 말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라는 기록에 등장하는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하남성 상구시에 있었던 넓이 50리의 작은 땅이었다.

기자의 이름은 서여이고, 서여를 봉한 이 땅 이름이 하남성 ‘조선(朝鮮)’이었다. 나라 이름은 조선이 아닌 ‘기(箕)’이며, 서여의 작위가 자작이다. 이 때문에 서여를 ‘기 나라의 군주인 자작’이라는 의미로 ‘기자(箕子)’라고 불러온 것이다.

반고가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송미자세가’와 ‘상서대전’ 기록의 조선을 한국의 고대국가인 ‘조선’으로 오인하고, ‘한서’ 지리지에 “은나라가 쇠약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예, 의, 밭농사, 누에치기, 벼 짜기, 옷 만들기를 가르쳤다”라는 말을 창작해 넣은 것이다. 이러한 반고의 역사왜곡이 확대재생산되어 존재한 적도 없는 기자조선이 고대 한국을 920년 지배하였던 역사로 왜곡되었다. 

김종서 문학박사
1970년대에 들어서 대릉하 유역에서 기자조선의 군주를 뜻하는 ‘기후’, 연나라 군주를 뜻하는 ‘연후’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를 비롯하여 은나라 말, 주나라 초기(서기전 1117년 전후)의 청동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기존의 기자 동래,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과 인식에 더하여 이 청동기를 기자조선의 실존을 입증하는 증거로 삼았고, 요하서쪽 유역이 상(은)과 서주의 세력범위에 포함된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청동기들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중국은 실존한 적도 없는 기자동래, 기자조선을 동북공정의 핵심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중국의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불러올 수 있고, 영토분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그러한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의 진실,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찾고 가르쳐야 한다. 필자의 ‘기자·위만조선 연구’, ‘신시·단군 조선사 연구’, ‘잃어버린 한국의 고유문화’ 등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김종서 문학박사·역사교육을 바로잡는 사람들의 모임(www.yuksamo.com) 회장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는 <사기/송미자세가> 기록은 사실일까요?


중국의 25 개 정사 첫째가 <사기>이고 둘째가 <한서>인데,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보다 약 160 년 이후 사람인 반고가 저술한 <한서>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만 하였지 조선에 도착했는지 또 조선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마천도 <사기/조선열전>에서 서기전 300 년 대의 조선 후와 서기전 200 년 대의 연인 만을 언급했을 뿐 서기전 1100 년 전후 조선왕에 봉했다는 `송미자세가` 기록은 재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기자조선이란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일까요?


아마도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서 `기자 後`의 `後` 뜻을 시간으로 새기지 않고 후손으로 이해하려고만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조선의 부왕을 기자의 41 대 후손으로 이해하게 되고 기자조선을 역사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 시기 일연의 <삼국유사>나 이암의 <단군세기> 등에는 단군과 후손들의 통치가 2000 년간 전후하여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근세 최남선,신채호,정인보 등은 기자의 조선 통치는 역사 사실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정하였습니다.


또한 의미있는 중국 기록으로 북위 시기 편찬된 <수경주>나 당 시기 편찬된 <사기색은> 등에는 기자의 묘가 중국 땅 옛 양국 몽현에 있다는 기록입니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기자는 은나라 도읍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향하였고 혹 조선으로 간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에 도착하지도 못하였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결국 조선의 거의 모든 성리학자들이 기자조선을 맹신한 꼴인데 변계량,조정,남구만 등은 기자동래나 기자조선을 허구로 여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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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 예문제학(藝文提學) 변계량(卞季良) 상소를 올리니,

 

우리 동방은 단군이 하늘에서 하강하시었고, 천자(天子)가 분봉(分封)한 땅이 아닙니다.

명나라 황제의 조서(詔書)에서도 아조(我朝)의 일들을 두루 말하였으니 제천(祭天)의 사실도 반드시 알았을 것이지만 본국의 풍속과 예법을 존행하게 한 것이니 그 뜻이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라고 한 것입니다. 처음 하늘에 명을 받았으며 하늘에 제사드리는 예속(禮俗)이 매우 오래니 거스를 수 없습니다. 남교에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는 상소에 의하여 변계량으로하여금 제문을 짓게 하고 영상(領相) 유정현(柳廷顯)을 보내어 원단에서 비를 빌게 하였으며, 그 후에는 원단에서 기우(祈雨)는 물론 기곡(祈穀), 보비(報丕)의 제사를 드리고 재실과 난간 · 담장 등을 수리하기도 하였다.


<한국근세사학사/조선중.후기편> 정구복 93쪽, 남구만 1629~1711 <東史辨證>

 

단군조에서는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에 의거하여, 요임금 경인으로부터 기자가 봉하여졌다는 주무왕 기묘년까지는 1220 년이므로, 단군이 1500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잘못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하였다. 또 단군이 하백녀와의 사이에서 부루를 낳았다는 설과 해모수와 하백녀가 주몽을 낳았다는 것은 단군으로부터 주몽까지의 간극이 2000 여 년이나 되므로 믿을  수 없는 잘못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기자에 대하여는 주무왕의 봉함을 받았다는 설과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하였다는 기록이 잘못임과 , 또 중국인 5000 인을 데리고 와서 교화하였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망명자가 어느 겨를에 이렇게 준비하여 데려 올 수 있겠는가라고 논하였다. 기자의 8 조교도 모두 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함허자의 상세한 기록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함허자의 <천운소통>에서 기자가 무왕에 의하여 조선후에 봉하여졌다고 기술한 것을 사실이라고 볼 수 없으며, 더구나 기자가 은나라 제사를 받들었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한백겸이 기자의 정전 유제를 평양에서 확인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잘못된 것임을 구체적으로 반박하여 그 설이 허구임을 논하고 패수.진번.수양산 등의 항목에서는 특히 이전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많은 문헌을 참고하며, 동시에 날카로운 비판력으로 그 동안 잘옷 인식되어 온 사실들을 논증하고 있다.

   





단군의 건국사화, 일제가 `신화`로 왜곡

`단군신화는 일제식민사학자가 만든 이름`,

이태룡박사 <이것이 진실이다> 펴내

 

15.10.03 10:14l최종 업데이트 15.10.03 10:1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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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진실이다>를 펴낸 이태룡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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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단군(檀君)께서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나라를 연 지 4347주년이 되는 해이자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해 고조선부터 경술국치까지 의병의 역사를 한 줄에 꿰어 정리한 <한국의병사>(상·하)를 펴냈던 이태룡(60) 박사가 단군과 관련한 내용을 정리해 이번에 <이것이 진실이다>(광문각)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개천절(10월 3일)을 앞두고 나온 이 책에서 이 박사는 "'기자조선'은 조선 유학자들이 조작한 것이고, '단군신화'는 일제 식민사학자와 그들 앞잡이들이 만든 이름"이라고 밝혀 놓았다.

저자는 "단군신화라는 해괴한 용어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등 관찬사서, 그리고 수많은 유학자들의 문집에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삼국유사> 중간본(1512)의 내용은 매우 왜곡·축소된 것이라 했다. 저자는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 나오는 단군의 건국사화(建國史話) 내용을 소개해 놓았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환인의)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린 (지역이) 되었다.(후략)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濊與貊, 皆檀君之理.)."

저자는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단군의 건국사화가 <단군고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단군신화'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둔갑시켰고, 그 이름으로 300여 논저가 나왔다"고 했다.

저자는 <단군고기>가 '단군신화'로 둔갑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책에 설명해 놓았다.

"1894년 도쿄 제국대학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교수가 <단군고(檀君考)>에서, '<삼국유사>에 나온 단군사적(檀君史籍)은 한국 불교의 설화(說話)에 근거하여 가공(架空)의 선담(仙譚)'이라 하였고, 단군과 단군이 세운 조선의 건국사화(建國史話)를 '설화에 바탕을 둔 불교 이야기'로 조작하였으니, 단군사적을 첫 단계에서 '단군설화(檀君說話)'로 만들었으며, 이어 케이오 의숙(慶應義塾) 출신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는 <삼국유사>에 나온 내용을 두고, '승도(僧徒)의 망설(妄說)을 역사상의 사실로 삼은 것'이라고 하여 사화를 허구(虛構)로 만들었고, 이어 1897년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 승도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神話)'라고 하였으니, 단군사적을 이른바 '단군신화(檀君神話)'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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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룡 박사는 최근 책 <이것이 진실이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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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룡 박사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왜곡에 이어 1916년 1월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중추원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가 발족되었다"며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 개인 차원이 아닌, 일제가 정부 차원에서 일본 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으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배제하고, 열등의식을 심기 위하여 설립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제는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 일본인 식민사학자들과 어윤적·유맹·이능화·정만조 등 부왜인(附倭人)들을 참여시켜 우리 역사를 왜곡·말살시키는 기초작업에 들어갔다. 1922년에는 이를 '조선사편찬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고,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권중현·박영효·이완용·이진호 등 매국노들을 참여시켰다. 2년 뒤에는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신석호·이병도·최남선 등 많은 부왜인들을 동원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본격적인 조선사 편찬 작업을 하였다"고 했다.

이태룡 박사는 "이 같은 과정에서 이마니시 류는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에서 단군의 건국사화를 신화로 다시 조작하였는데, 이는 20여 년 전에 나카 미치요가 만든 '단군신화'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밑바탕이 되었고, 1937년에는 35권 2만 4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조선사>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저자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린 <단군고기>에는 천제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여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개국의 터전을 닦고, 그 후손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며 "배달겨레는 <단군고기>의 내용을 국조신앙(國祖信仰)처럼 여겨 천손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자긍심으로 수천 년 동안 살아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단군고기>를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었다는 것은 당시 실록 편찬자들로부터 역사서로 인정받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룡 박사는 이 책을 저술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서를 바탕으로 중국과 일본의 사서 수십 권을 참고했고, 원문을 포함해 600여 개의 주석을 달아 놓았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역사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흥밋거리가 될만한 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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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도 ‘독자적 문자’ 사용했다… 훈민정음에도 영향 끼쳤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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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시대의 토기·청동기·암벽 등 유적·유물에는 해독되지 않는 신석기 기호문자인 ‘신지문자’들이 남아 있다. 이것이 한문자(漢文字)나 훈민정음에도 영향을 미쳤을지는 학계의 연구과제이다. 사진은 요서지역 소하연문화(BC 3000∼BC 2000) 토기 그림문자의 탁본.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4) 고조선의 ‘神誌문자’

- 한민족 문명학

토기·청동기·암벽 등서 유사한 문자 발견… 삼국유사·용비어천가 등 고문헌에도 실재 흔적
세종실록엔 ‘훈민정음이 옛 전자 모방했다’고 기록… 남은 자료 적고 해독 어려워 연구 필요


고조선문명에서는 지배층 지식인만이 사용하던 고조선 말을 표기하는 ‘신지(神誌)문자’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러나 유물이 적게 발견되어 아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고조선 황화 유역에서 이주민 밝족이 商(상=殷·은)을 건국한 후 고중국어를 표기하는 ‘한문자(漢文字)’를 발명하여 오늘날의 한문이 되었다. 고조선문명의 후예들은 민족별로 여러 가지 문자를 차용한 간이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15세기 전반기에 들어와서 드디어 조선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새로운 알파벳이 발명되어 모든 우랄·알타이어족 언어와 세계 모든 언어를 쉽고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세계 문자가 창조되었다. 고조선문명의 시작부터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고(古)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은 최초에는 노끈이나 ‘새끼에 매듭’(結繩·결승)을 만들어 의사소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호(太호)족이 고한반도에서 중국 산동반도로 건너가서 원주민에게 ‘새끼 매듭’(결승)에 의한 의사소통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기록은 태호족이 떠나기 전 고한반도에서는 ‘새끼 매듭’에 의한 의사소통 방법이 실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고한반도 신석기인은 ‘나무에 새김’(算木, 佃木)을 만들어 의사소통했다는 기록(續博物志(속박물지))도 있다. 이러한 새끼줄이나 나무는 모두 썩어버렸으므로 오늘날 그 기호나 부호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위 또는 토기에 새긴 ‘그림문자’ ‘기호’ ‘부호’는 현재도 남아 있다.

▲  위의 그림문자가 새겨진 요서지역 소하연문화의 토기.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무엇을 기록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관련 학계의 연구과제라고 할 것이다. 고조선에는 신지(神誌)문자라는 문자가 창제되어 실재했다. 고중국에서는 고조선의 신지문자를 ‘창힐(蒼힐)문자’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고조선시대에 신지(神誌)가 창제한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문헌에 ‘신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라는 서책이 암자에 남아 있었음을 기록했다. 세종 때 편찬된 ‘용비어천가’에서는 ‘구변지국(九變之局)’의 ‘局’을 주석하면서 ‘구변도국(九變圖局)’을 신지(神誌)가 편찬한 도참서(예언 서적)의 이름으로 설명했다.

‘세조실록’에서는 신지비사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라고 기록하면서,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고조선비사’ 등을 관에서 회수하여 다른 원하는 서적으로 교환해주도록 유시했다. ‘예종실록’(1472년 편찬)과 ‘성종실록’(1495년 편찬)에도 유사한 유시가 발령되고 있는 것은 신지의 ‘고조선비사’가 당시까지는 민간에 꽤 널리 보관되어 있었는데 조정에서 모두 몰수하여 소멸시킨 것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왕조 선조 시기의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神誌는 단군시대 사람으로 호는 스스로 선인(仙人)이라 했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선조 23년) 윤두수(尹斗壽)가 편찬 간행한 ‘평양지(平壤誌)’에는 “평양 법수교(法首橋)에 옛 비석이 있는데 언문도 아니고 범(梵)문자도 아니며 전(篆) 자도 아닌 글자로서 사람들이 능히 알 수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계미년(선조 16년) 2월 법수교에 매장되었던 멱석비(石碑)를 파내어 본 즉 3단으로 나누어졌는데, 비문은 예(隷) 자도 아니고 범서(梵書) 모양과 같았으며, 어떤 이는 이것을 단군(檀君) 시기 신지(神誌)의 소서(所書)라고 말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유실된 것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와 ‘영변지(寧邊誌)’에는 신지문자 16자가 채록되어 있다.

이 밖에 고조선 시대의 토기·청동기·암벽 등 유적·유물에는 위의 문자와 유사한 문자들이 간혹 조각되어 있어서 고조선의 신지문자가 실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고중국에서는 신지(神誌)문자를 창힐문자(蒼힐文字)라고 부르면서 기록을 남겼다.

▲  창힐문자의 비석 탁본(사진 왼쪽). 해독되지 않는 고조선문명 지역의 신석기 기호문자가 새겨진 경남 남해군 양하리 바위와 경북 영일군 칠포리 바위.

중국 고문헌 ‘포박자(抱朴子)’에는 하(夏)나라를 건국한 황제(黃帝)가 靑丘(청구)에 도착하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膚) 선생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청구’는 조선의 옛 이름이며, 3황은 ‘환인·환웅·단군’으로서, 황제가 고조선의 풍산을 지내가다가 고조선의 ‘자부’라는 학자로부터 고조선의 문자(삼황내문)를 받아왔음을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때 황제가 받아간 ‘삼황내문’이 고중국이 창힐문자라고 호칭했던 신지문자라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시대 서기 992년(송 순화 3년)에 간행된 옛 붓글씨 첩책 ‘순화각첩(淳化閣帖)’에는 한문자로 해독되지 않는 글자로 새겨진 비문 28자를 창힐문자라는 이름을 붙여 수록했다. 또한 청나라시대에 세운 중국 섬서성 백수현 사관향(白水縣 史官鄕)에 있는 ‘창성묘(倉聖廟)’라는 사당에 ‘창힐조적서비(蒼힐鳥迹書碑)’와 서안(西安)시 비림(碑林)에 있는 ‘창힐서비(蒼힐書碑)’는 역시 ‘순화각첩’의 창힐문자 28자를 모사하여 세운 것이었다.

신지문자와 창힐문자가 동일한 이유는 신지문자가 고중국에 전수된 것이 창힐문자이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 근거는 우선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위에서 든 ‘포박자’에 고중국 황제가 조선에 간 적이 있을 때 고조선의 학자 ‘자부’ 선생으로부터 고조선 문자(신지문자)를 받아왔다고 풀이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蒼힐’은 ‘푸른나라 사람 힐’의 뜻으로 그 자체 ‘靑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중국에서는 ‘창힐’을 황제의 사관(史官)이라고 하면서 글자를 반포했다고 하여, ‘힐황(힐皇)’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힐’이 사관 이름이며 ‘蒼’은 ‘靑丘’(조선)를 의미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창힐문자란 ‘고조선 사관 힐’에서 받아온 문자의 뜻이 되는 것이다.

고조선의 신지문자는 BC 108년 고조선 국가가 한(漢) 무제(武帝)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한 4군이 설치된 이후 한문자가 본격적으로 들어옴에 따라 급속히 소멸하기 시작했으나, 고려시대까지는 일부 수공업자 계급 사이에서 잔존했던 흔적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사학자였던 권덕규(權悳奎)는 단군 고조선 시기부터 고려 시대까지 신지문자를 비롯하여 고유 문자가 존재했으며, 조선왕조에서 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이를 토대로 크게 계승·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을 일찍부터 강력하게 주장했다. 고조선 신지문자는 초기 소박한 문자 체계의 상태에서 BC 1세기부터 한문자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조정에서 AD 4세기∼AD 6세기경 한문자가 공식 문자로 채택됨에 따라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소멸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는 민간에서 구속용문자(舊俗用文字)로서 잔존했다가, 조선왕조 세조 때 마지막 잔존한 신지문자 관련 몇 종 서적까지 조정이 강제 수집하여 최종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지문자는 현재 충분히 수집되어 있지 않고, 또한 해독되지도 않고 있다. 고조선문명 연구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수의 연구자에 의해 신지문자가 풍부하게 수집된 다음에 언젠가는 해독될 날이 있으리라고 예견할 수 있다. 신지문자는 앞으로 학계가 연구해야 할 과제다.


조선왕조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마침내, 다음 표와 같은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1446년에 반포했다. 초성(자음) 17자와 중성(모음) 11자로 구성된 알파벳인데, 조립하면 세계 어떠한 언어도 능히 표현할 수 있는, 세계 문자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과학적 문자이다.

주목할 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제정한 ‘세종실록’ 기사에 훈민정음이 ‘옛 전자(古篆)’를 모방했다고 기록한 사실이다. 또한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에서도 “글자는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고 기록했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고전(古篆, 옛 전자)을 반드시 한문자의 ‘옛 전자’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표현은 훈민정음 반대파에게는 한문자의 ‘옛 전자’로 해석되게 했지만, 동시에 신지문자의 ‘옛 전자’의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훈민정음의 글자 꼴이 한문자의 옛 전자와 동일한 것은 몇 개 없는 반면에, 그 정도의 닮은 수는 아직 50여 자밖에 수집하지 못한 신지문자에도 실재하기 때문이다.(표 참조)

물론 훈민정음은 완벽한 표음문자이고, 신지문자는 표의문자인지 표음문자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문자이기 때문에, 훈민정음이 신지문자를 계승 완성한 문자라고는 추정할 수 없다. 필자는 신지문자와 ‘훈민정음’은 별도의 문자체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사회학도이고 언어·문자학자가 아니므로, 이것은 필자의 생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도중에 모든 기존 문자를 참조했고, 요동에 와 있는 명의 언어학자 황찬(黃瓚)에게 성삼문(成三問) 등을 13차례나 파견하면서 서면 토론한 것을 고려할 때, 세종이 고려시대까지 민간의 일부에서 존속했고 세종의 후대 왕들 시대까지도 존속하여 그 수거를 명령했던 신지비사와 신지문자를 참작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지문자와 훈민정음의 관계 역시 학계의 앞으로의 연구과제 중 하나라고 할 것이다. 명백히 할 것은 고조선문명에서 지배층은 독자적 신지문자를 제정하여 사용했으며, 한문자가 들어와 그것을 대체한 AD 4세기까지는 신지문자가 지배층 사이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지문자를 계승했든지 또는 별도의 문자체계로 창작했든지 간에, 고조선문명 창조자의 직계 후예가 15세기에 세계의 모든 문자 가운데서 가장 과학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평민층까지 모든 백성이 세계에서 가장 알기 쉽고 배우기 쉬운 과학적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문화일보 2월 26일자 17면 13 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신지문자(神誌文字) : 고조선문명 지역에서는 해독되지 않는 신석기 기호문자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이를 고조선 지배층이 자신들의 말을 표기했던 ‘신지문자’라고 일부에서는 추정한다. 고중국에서는 ‘창힐(蒼힐)문자’라고 불렀다.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고조선의 문자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는 아닙니다. 

 

우리 대한사의 왜곡은 시간과 공간 두 측면에서 축소라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는데 시간적 축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사서로는 <한단고기> 외에도 훨씬 일찍 편찬.간행된 <삼국유사> <동국통감> <규원사화> 등도 있고 또한 그러한 사서들은 <한단고기>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적 축소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판단되는 공간적 축소를 바로잡기에는 <한단고기> 내용으로는 택도 없고 <삼국사기/잡지/지리>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이나 <승람> <비고> <강역고> 등을 동원한다 하여도 역부족인 상황이기 때문에 <한단고기>를 유일무이한 사서라 주장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고 한심한 작태임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단고기>를 위서라 주장하는 이나 `유일` 운운하는 자 역시 역사가 무언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우리 국사의 본 모습을 확실한 부분부터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2000 여년 간의 북경 이동 지역의  중국 정사 지리지 전체를 <삼국사기> 등과 대조.검토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대국과 국경을 마주한 중국의 동쪽 국경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이고 결국 2000 여년 동안 요하로 불린 물길은 지금의 요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요하가 요하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11년에서 1920 년대 쯤이며 지도에 확정되어 표시된 것은 1934 년 만주국지도이기 때문입니다.

 

단재 신채호가 고대의 요수는 란하라 하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요수가 란하이면 요하에서 동남쪽으로 480 리 떨어진. 압록강은  란하 동쪽 지류인 청룡하였다는 말이고 결국 후조선.고려.고구려.준왕조선의 압록강.열수가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청룡하라는 말압니다. 또한 평양성.서경은 그 청룡하에서 동남쪽으로 450 리 떨어진 지금의 중국 요녕성 건창 부근이라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이전의 준왕조선의 왕검성은 청룡하 부근이고 준왕조선 이전의 단군부여나 그 이전의 단군조선의 중심지는 당연히 청룡하 북쪽에 있는 분수령의 북쪽 지역인 란하 동북쪽 지류와 칠로도산 북쪽 지역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는 노합하 지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지역은 중국이 저들의 시원문명이라 주장하며 요하문명이라 칭하지만 1911 년 이전 약 1000 여년 동안은 요하와 송화강으로 그 이전 1000 여년 동안은 염난수와 약수 등으로 불렸습니다.  

 

결국 지금의 청룡하와 노합하 지역이 압록강.송화강 지역이기 때문에 문명지의 명칭을 요하 하나로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요하와 송화강의 분수령인 백산으로 하여 백산문명이라 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근거 자료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 즉 <관자><산해경><수경><설원><염철론><사기><한서><후한서><진서><위서><수경주> 등 초기의 지리 기록과 <수서><신.구당서><통전><요사><금사><원사><명사><청사고> 등의 지리지 기록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런데 <한단고기>만으로 할 수 있다니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어쨋든 한국 강단사학에서는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몰아세우지만 결코 위서가 아니며 다만 체제나 언급된 내용이 사서라 하기엔 미흡하고 부정확한 점이 너무 많이 산견되고 또한 편찬자의 비정이 원본에 삽입되어 있는 점 또 사상.종교에 관한 내용은 결코 충분하거나 명쾌하다 할 수 없어 대체적으로 미진한 사서 관련 묶음이라 평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단고기>에는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 삼성기 하>, <신시역대기>,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북부여기> 등과 이맥의 <태백일사> 에는 삼신오제본기/한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국본기 등이 묶여 있는데, 그중 유의미한 사서로는 <단군세기> <북부여기> 정도입니다.  

 

 

그나마 <단군세기>는 47 대 2095 년의 왕검조선 역년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47 대 1028~1048 년으로 기록한 <동국통감>이나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와는 다르게 보고 있어 어느 한쪽은 수정.폐기되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단지 <북부여기>만은 왕검조선 멸망 이후 삼국시기 이전까지 약 

200 여년의 대략적인 정황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하고 유일한 자료라고 판단합니다.

 

 

 

한편 <한단고기> 기록의 정확성 여부와 원문.주석과 관련하여 아래의 한 예와 같이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북부여기상 시조 단군 해모수 기해 38 년(전202년) 원문에,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란하다.`라 기록되어 있는데, 패수를 란하로 비정한 것으로 보아 결코 <북부여기> 편찬자 범장의 원글이라 할 수는 없고 이기.계연수 혹은 이유립 등의 비정이 원문에 삽입된 글이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란하라 한 비정은 정확한 것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어쨋든 17 세기 중반 <동국제강>을 저술한 홍여하가 패수를 요하로 비정한 것과 똑같은 경우로 대략 정확한 지리인식을 갖추었다고 평할 수 있지만 범장의 글이라면 당연히 `패수는 요하다`라고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21 세기의 란하는 고려 시기에는 요하라 불렸으며 패수는 요하 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지류에 불과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패수는 곧 오늘의 란하다`라는 범장의 원문을 가장한 <한단고기> 편역자 주석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고대의 요수는 란하이며 패수는 해성의 헌우록이라는 지리 인식 수준보다는 약간 떨어지지만 거의 진실에 다가간 비정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한단고기>를 통하여 역사왜곡을 밝히겠다면 시간적 축소 부분보다는 공간적 축소 부분과 관련한 패수.란하 비정에 대하여 심도있게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1920 년 전후하여 왜종은 지도상으로 청 시기의 란하를 동쪽으로 약 300 여리 옮겨 지금의 란하로 만들고 지금의 란하 위치에 흐르는 당시의 요하를 동쪽으로 약 2000 여리 옮겨 지금의 요하로 만든 습작질을 증명하는 것 즉 공간적 축소 부분에 치중하는 것이 계연수 등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라 판단합니다.

 

왜종은 지도조작의 습작질을 하던 중 1931 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만주국을 세운 다음 1934 년 만주국 지도를 만들면서 저 습작질을 만주국지도에 현실화시켰고 현재지도는 만주국지도를 습용한 것이기 때문이며 오늘날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도 저 조작지도를 역사 사실인 양 강변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중국은 뜨거운 장물을 손에 쥐고 일본의 도적질을 밝히자니 자신들의 묵인.도둑질도 실토해야 하고 대한에 넘겨주자니 너무 아까워1911년까지의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배치되는 무리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조대왕 3 년(서기 55년) 기사입니다.

 

봄 2 월 요서에 10 개 성을 쌓아 한나라 침입에 대비했다.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삼국사기(1)/고구려본기3.태조대왕> 최호역해 1997년 홍신문화사간행

 

위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사학계는 위 기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인지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쨋든 강단사학에서는 요서를 지금 요하의 서쪽 지역이라 주장은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요하 하류 서쪽에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이라는 그 넓은 지금의 요서 지역 중에서 과연 어느 곳에 10 개의 성을 쌓았을까요?

 

<삼국사기> 기록에는 10 개 성의 명칭과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김부식 외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고구려가 요서 지역에 10 개 성을 축성한 것이 사실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에 기록을 남긴 것일텐데 10 개 성의 명칭을 남기지 않았으니 미궁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10 개 성의 명칭이나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요?

 

<환단고기>에 편제된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를 편찬하였다는 이맥(1455~1528)은 <조대기>를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 년(서기 55년) 요서에 10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 10 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이니 개평부(開平)에서 동북쪽으로 70 리 떨어진 곳이고,

둘째는 석성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 리 떨어진 곳이고,

세째는 건안성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 리 떨어진 곳이고,

네째는 건흥성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이니 창려의 서남쪽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아홉째는 택성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열번째는 요택성이니 황하(黃河 )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조대기> 내용이 사실이라면 한국사학계가 추정하는 요서 10 성 위치는 지금의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안시성을 비롯하여 아래와 같은 위치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즉 네번째 건흥성은 난하 서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란하 또는 난하 하류 서쪽 강안에 있어야 할 것이며 다섯번째 요동성은 창려 서남쪽에 있었다니 지금의 중국전도에 표시된 창려 부근이여야 할 것이니 2 개의 성은 요서 지역에 있는 것이 맞지만 나머지 8 개의 성은 요서가 아니라 요동지역에 있습니다.  

 

그러면 <삼국사기>나 <조대기>에는 어찌 요서에 10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었을까요? 또 <조대기> 기록과 같이 추정한 저 위치의 10 개 성으로 한나라 병사를 효율적으로 막을 수는 있을까요? 또 아무리 요서 지역이 맞다고 해도 4, 5 위치의 란하 건흥성과 창려 요동성 표시는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요동 지역의 8 개 성과 크게 동떨어진 란하 서안의 건흥성과 창려 요동성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어 보이니 당연히 검증해보아야겠지만 우선 큰 틀에서 검토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며 또한 큰 틀이 명확해지면 당연히 2 개 성의 문제는 수월하게 해결됩니다. 큰 틀에서 검토한다는 것은 앞글에서도 계속 주장했던 요서.요동군의 명확한 위치입니다.

 

즉 지금의 요동이 중국 고대인들이 인식하는 요동군인지, 또 한국통설에서도 주장되는 바와 같이 지금의 요하 하류 서쪽부터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까지의 지역이 요서군인지를 밝히는 것이 먼저여야 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고지도 - 1787 년 홍양길이 저술한 <건륭부청주현도지>에 실린 `성경도`에 보이는 안시성, 건안성, 창려요동성

 

 

 

즉 위 약도는 청나라 사람인 홍양길이 제작한 것인데 위 약도가 묘사하는 범위가 지금의 요동만과 요동반도일까요?
아닙니다.위 약도는 아래 지역을 묘사한 것입니다.

 

 

 

 

 

 

 

 

 

 

한 시기부터 청 시기까지 약 2100 여 년 동안 요서.요동.현토군은 <후한서> 지리지인 <군국지> 요서.요동.현토 각 군의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각각 3300 리, 3600 리, 4000 리 떨어져 있었고 <한서/지리지><수경주> 기록과 같이 난수는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을 경유한 물길이며 1250 리 길이의 대요수는 요동군만을 경유하였고 염난수는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의 물길인데 이 대요수와 염난수는 합쳐진 후에도 약 300 여 리를 정남쪽으로 더 흘러내려 발해 해안선에 닿았습니다. 또 두 물길이 합쳐진 요동군의 남쪽은 바다로 기록되었지만 실제 상황은 만灣이라는 것이며 이 灣이 지금의 란하 최하류라는 것입니다. 

 

결국 낙양에서 3300 리 떨어진 요서군의 위치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 서쪽 강안 지역이였고 요동군은 요서군의 정북쪽 지역인 지금의 반가구수고 부근인 중류 지역이였으며 요서.요동군의 중심지인 치소간의 거리는 불과 300 여 리 정도이기 때문에 지금의 란하와 지금의 요하 사이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대조대왕 시기 요서에 쌓았다는 10 성의 위치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결국 <한서/지리지> 기록의 요동군으로 흐르는 대요수와 염난수를 정확히 비정하는 것만이 우리 대한의 고대사를 정확히 인식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지리를 정확히 인식한 신채호가 <조산상고문화사>에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하였던 것이며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도 `패수는 今란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북조선의 리지린이나 남대한의 윤내현 등과 같이 <한서/지리지>의 대요수를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한의 고대 역사지리를 통째로 비트는 것이며 일본이 조선역사를 축소하기 위해 지명이동시키고 지도까지 조작하여 만든 식민사관 지리를 답습하는 일입니다.

 

민족사학을 표방한다고는 하지만 크게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아래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모본왕 2 년(서기49년) 기사입니다.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하니 요동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하므로 이내 다시 화친하였다.

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 蔡彤 以恩信待之 內復和親

아마도 위 내용은 <삼국사기> 기록 중에서 한국통설의 지리 기준으로는 사실로 믿기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내용일 것입니다. 



즉 위 추정도와 같이 고구려 전 시기에 걸쳐 강역을 크게 확대시켰다고 알려진 광개토태왕 시기의 서쪽 국경선도 훨씬 뛰어 넘어 장성을 돌파하고 후한 시기 동북 강역 방어의 심장부인 유주 치소였으며 지금의 북경과 그 서북쪽에 설치된 상곡까지 유린하고 이후 보정.석가장 보다 더 서남쪽에 위치한 태원까지 장수를 보내 기습하였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동태수가 말단 심부름꾼으로 나서서 고구려 모본왕을 달랬다는 기록까지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러한 <삼국사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요?


그러면 모본왕 시기보다 약 150 여 년 전인 서기전 108 년에 대한반도 내 지금의 평양까지 공격하여 점령하고 낙랑군까지 설치했었다는 기록은 어떻게 사실 중의 진실이라며 확신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쇄뇌를 한답니까? 서토의 한나라 군사는 언제나 저런 거리의 공격은 가능한 전능한 군사이고 동방의 고구려는 요동.현토군 밖을 나서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대체 무슨 근거로 <삼국사기> 기록을 부정하려 합니까?

한국 강단사학이 늘상 주장하는 말도 안되는 논리인 `삼국 초기 기록`이라서?

진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고구려 전 시기에 걸쳐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이며 전.후한이 설치한 요동.현토군의 동쪽 경계선 역할을 했던 2100 리 길이의 염난수가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 정북쪽 지류이기 때문입니다.


즉 고구려 강역은 지금의 란하 동쪽 지역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북평.어양.상곡 지역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며 기습군의 상태나 기습지역의 방비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군사를 운용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태원까지도 내려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란하에서 서쪽으로 상곡을 거쳐 태원까지 내려가는 게 무에 그리 어렵다고 미리 손사래를 칩니까? 



 이게 다 새빨깐 식민사관때문입니다.


즉,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주석된 1250 리 길이의 대요수는 지금의 란하 중류의 서북쪽 지류이고,

현토군 서개마현에 주석된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는 지금의 란하 정북쪽 본류입니다.

또,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승덕부의 속현인 적봉현.건창현.조양현 및 봉천성 금주부 반산현에 기록된 황하.사하는 지금의 란하 중류로 흘러드는 서북쪽 지류이고 <한서/지리지>의 대요수이며,

봉천성 해룡부.창도부.신민부.법고직예구.봉천부.금주부 등에 기록된 요하는 지금의 란하 정북쪽 지류이고 한 시기의 염난수입니다.


이러한 대요수.염난수였으며 황하.요하 물길을 현재의 중국지도에서 제대로 지목해 내지 못하면 대한민국 역사는 고대 2000 여 년이 사라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고대 2000 여 년간의 터전을 중국에 빼앗기는 것입니다. 즉 왕검조선과 그 선조들이 일군 문명인 소위 요하문명을 중국에게 헌납하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지금의 중국 요녕성 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조작도 - 아세아동부여지도(亞細亞東部輿地圖)

일본기원(紀元) 황기(皇紀)2535년, 명치8(明治8,1875) 년에 일본 육군참모국(陸軍參謨局)에서 발행한 동아시아 지도. 아세아동부여지도의 초판은 1874년에 제작되었으며 아래 지도는 그 이듬해에 제작된 두 번째 판 본이고 그 후, 수 십년에 걸쳐 여러차례 교정,증보되었다. 부기된 예문에는 청나라 각 성(省)의 면적, 인구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6방안, 방안별 확대 : 클릭)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11482801



일본이 1875 년에 간행했다는 위 지도에 표시된 청국과 조선의 국경선이 저랬을까?

<청사고/지리지>에도 압록강을 경계로 청과 조선이 접했다고 하는데? 


결국 요수.대요수.요하 공부 게을리하면 대한민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병신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도 - 조위 시기 유계지도(괄호 내 한글은 추기한 것임)

 


 








아래는 광개토태왕비문의 일부라고 하며 고구려연구회 윤독회의 석문과 번역문입니다.


영락 5(395), 을미년에 왕께서 패려(稗麗)△△△하지 않기 때문에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부△(△)을 지나 염수(鹽水) 언덕에 이르러 세 부39)6,7백 영()40)을 처부수고 소??양떼 들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뒤 어가(御駕)를 돌렸다. 이에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쪽으로 와 ?역성(力城)?북풍(北豊)으로 왔다. 왕은 사냥을 준비하도록하고 국경을 시찰한 뒤 사냥(田獵)을 하고 돌아오셨다.     

                                                                  펌글주소 : http://blog.daum.net/hl2dus/16870401


위 비문 석문과 같이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땅을 벗어나 산을 두 개 넘은 후 염수 언덕에 이르러 패려를 공격한 후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를 지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구려에서 패려 사이에 있는 염수.양평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기록에서는 광개토태왕의 패려 공격 전말이나 염수.양평도에 관한 조금 더 상세한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에 없다고 광개토태왕 비문의 사건이 허구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 고대 기록을 찾아볼 수 밖에 없는데 패려 공격 사건에 대해서는 제외하고 지리에 관한 것만 추적해 보겠습니다. 고구려 강역 부근의 지리를 기록한 중국 정사에는 염수鹽水는 나타나지 않고 비슷한 염난수鹽難水가 기록되어 있으며 양평도 역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 유의미한 것은 염수 혹은 염난수 및 양평 등의 명칭은 당시의 고구려 강역 밖 서쪽에서부터 지금의 북경까지의 지역 사이에서는 유일무이한 지명이라는 점입니다. 

 

염수는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에 설명된 염난수 곧 서개마현을 흐르는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합쳐지고 이 염난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서안평현을 지난 후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길이는 2100 리라는 염난수일 수 밖에 없고 양평은 요동군의 수현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 속현 중에서 처음 기록된 양평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서>는 서기 80 년 경 반고가 편찬한 것으로 기전 202 년부터 서기 8 년까지 210 년의 전한前漢의 역사를 서술한 <사기> 다음에 꼽히는 중국의 두 번째 정사입니다. 

 

결국 광개토태왕은 한나라가 서기전 75 년 옮겨 설치한 현토군 지역에 흐른다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를 서쪽으로 건넌 후 패려를 공격한 후 귀로에 요동군 양평현을 거쳐 귀환한 것입니다. 



요동군 양평현에 대해 조금 더 검토하자면 <한서>보다는 중국 고대 물길 전문 설명서인 <수경주> 기록이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수경주/대요수> 기록에는 요동군 양평현으로 흘러오는 물길이 2 개가 있는데 하나는 요동군의 새 밖에 있는 백평산 주위(衛白平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요동군의 외곽 새를 관통하여 요동군 지역으로 들어와 양평현 서쪽으로 지나는 대요수와 다른 하나는 요수가 역시 요동군 새 밖에 있는 지석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요동군 망평현 서쪽에 이른 후 휘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에 있는 옛 성 서쪽을 경유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대요수와 요수는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현 지역에서 합류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대요수는 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요수현에 있는 옛성 서쪽을 지나는데 이 요수현은 중국 삼국시기 말 서기 237 년 스스로 燕왕에 오른 공손연이 장군 필연을 보내 사마의의 공격을 막은 곳이라며 역사 사건과 연관지어 설명하였습니다. 


요수현을 경유한 대요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방현 서쪽을 지나는데 이때 오른쪽 곧 서쪽에서 백랑수가 흘러들어 온다고 합니다. 이 백랑수의 발원지는 우북평군이며 동북쪽으로 흘러 요서군 북쪽에 위치한 유성현 부근을 경유한 후 요동군 방현에서 대요수로 합쳐지는 대요수의 서남쪽 지류이며 거란.요국 시기 이후 대릉하로 개칭된 물길입니다. 지금의 대릉하 하류가 지금의 요하 하류와 거의 합쳐지는 모습은 <수경주/대요수>에 설명된 바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 주석에는 <수경주> 설명과는 반대로 망평현을 경유하는 물길을 대요수라고 하며 그 길이는 1250 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수경주>기록에서의 대요수.요수 구별은 무의미하며 굳이 구별하자면 <수경주>의 소요수가 <한서/지리지> 현토군 고구려현의 요수입니다.


결국 위 추정도에 표시한 바와 같이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는 지금의 요하가 되어야 하고 광개토태왕은 지금의 요하인 염난수를 건너 서쪽의 어느 언덕에 이르러 패려를 공격한 것이고 공격 후 염난수 하류 서쪽 지역에 흘러내리는 1250 리 길이의 대요수 하류 동쪽에 위치한 요동군 양평현을 거쳐 고구려 땅으로 들어왔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요하가 <한서>를 편찬한 반고의 설명과 같이 한 시기의 염난수 또는 염수로 불렸을까요?

또 한나라 현토.요동군은 한국통설과 같이 지금의 요하 하류에 설치되어 있었을까요? 


한편 당 시기 사람인 두우도 염난수를 언급했었습니다. <통전/변방문/동이하/고구려>에서 두우는 말갈 백산에서 발원한 압록수가 국내성 남쪽을 흘러내린 후 서쪽에서 염난수와 합친다고 하였고 이후 안평을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는데 중국 정사 지리지에서는 서기 80 년경 반고가 처음으로 염난수를 언급한 이후 약 800 년 후에 두우가 두번째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에는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합쳐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와 같은 <한서><통전> 기록을 검토한 조선 시기 선학들의 지리 인식입니다. 즉 안정복 등은 두우가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의 마자수 기록을 오인하여 마자수를 일명 압록수라 잘못 설명한 것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고구려 시기에는 국내성 남쪽을 경유하였고 조선 시기에는 압록강의 북쪽 지류인 파저강 곧 중국의 25번째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의 봉천성 흥경부 임강현.통화현.회인현.집안현 등 4 개 현을 경유하는 혼강이며 옛명칭 동가강의 고대 명칭을 염난수로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또한 두우는 압록수가 염난수로 합쳐진 후 고구려의 안평을 경유하였다고 하였지만 안평을 2100 리 길이의 염난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직전에 경유하는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잘못 이해한 나머지 요동군과 열수 곧 준왕조선 시기의 열수였으며 조선 시기의 압록수 사이 지역인 열양이며 청 시기 봉천성 봉천부의 남쪽 지역 곧 개주.복주.금주 및 그 동쪽의 봉황성직예구 지역에 대한 지리 인식에 착오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들의 글을 읽는 후학들이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아래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조대왕大祖大王 66 년(서기118년)과 69 년 기록 전문입니다.

 

66 년 봄 2 월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6 월에 왕은 예맥과 더불어 한漢나라 현토군을 기습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가을 7 월에 누리와 우바이 곡물을 해쳤다. 8 월에 소속 관원에게 명하여 현량.효순한 자를 천거하고 환과고독 및 노인으로 자활할 수 없는 자를 방문하여 의식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69 년 봄에 한漢나라의 유주 자사 풍환, 현토군 태수 요광, 요동군 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의 거수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왕은 이내 아우 수성을 보내어 군사 2000 여 명을 거느리고 환.광 등을 역격하였다. 수성이 사자를 보내어 거짓 항복하니 환 등이 믿었다. 수성은 이로 인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대군을 차단하고 몰래 3000 여 명을 보내어 현토.요동의 2 개 군을 치고 그 성곽을 불살랐으며 2000 여 명을 살획하였다. 여름 4 월에 왕이 선비 8000 명을 데리고 요수현을 공격하니 요동군 태수 채풍이 군사를 내어 신창에서 싸우다 죽었다. 공조연 용서와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써 풍을 막다가 함께 진중에서 죽고, 죽은 자가 100 여 명이었다. 겨울 10 월에 왕은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백성 중 곤궁한 자를 물어서 차등을 두어 물건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색 여우 갖옷 및 흰 매.흰 말을 바치니, 왕은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여 보냈다. 11 월에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은 수성에게 군국의 일을 통섭케하였다. 12 월에 왕은 마한.예맥의 1 만 여 기병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니, 부여 왕이 아들 위구대를 보내어 군사 2 만 명을 거느리고 한漢의 군사화 힘을 합쳐 막아 싸우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대패했다.

                                                                                                                              <삼국사기>1 최호역해 홍신문화사 1997

 

지금으로부터 약 1900 여 년 전의 상황을 전한 위 기록에는 고구려 외에 예맥, 한漢나라 현토군.유주.요동군, 선비, 부여, 숙신, 마한 등 무려 6 개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물론 국력의 크고 작음과 전성 시기의 선후 및 인접국 사이에 어느 정도의 종속 관계 등은 있었을 것이지만 각각 일정 정도의 강역을 차지하고 나름대로 어느 정도까지는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하나의 명칭으로 불렸었고 그러한 연유로 중국사서에도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후대에 고구려나 백제로 흡수되어 명칭이 사라진 예맥.부여.마한 등의 내부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국 역사서를 보아야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즉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부여> 조의 아래 기록은 부여가 예.예맥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과 한나라 현토군과 고구려 및 읍루.선비등과의 떨어진 거리나 방향이 설명되어 있는데 이 정도의 기록마저도 <삼국사기>에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토에서 북쪽으로 1000 리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경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흐른다고 하였으며, 왕이 사용한 인장의 글에는 `예왕濊王지인`이라 되어 있고 나라에 있는 옛성 이름은 예성濊城이라 하였으니 이는 부여땅이 본래 예맥땅이며 부여왕이 예맥땅에서 재임한 것이며 스스로 망인, 떠나온 사람이라고 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중국의 세번째 정사라는 <후한서>의 <동이열전/예>에는 예의 북쪽에 고구려.옥저가 있고 남쪽으로는 진한이, 동쪽으로 끝까지 가면 큰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르며 예.옥저.구려의 땅이 모두 조선에 속하였다고 하여 개략적인 예 의 위치를 설명을 하고 이어서 기자, 조선왕 준, 위만, 우거 등에 관한 사건이 간략하게 열거된 후 서기전 128 년 예군 남여가 우거에 반대하고 28 만 명을 이끌고 요동에 내속하니 한 무제 유철은 그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였고 수년 후에 폐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와 같이 고구려 초기는 여러 종족, 수 개의 나라와 공존하였고 건국되기 이전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로 조선과 한漢이 공존하였고 대결하였으며 조선 내에서도 부.준왕에서 연나라에서 망며한 만.우거로 교체되었는데 당시에도 조선의 북쪽에는 부여가, 남쪽에는 마한이 있었습니다.

 

대조대왕 시기의 고구려 도읍은 국내 위나암성이였는데 과연 위나암성은 어느 곳이였고 당시 고구려 강역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아래의 한국통설 약도과 같이 지금의 압록강 하류가 시작되는 집안 부근에 있었을까요? 또한 태조왕 시기 한나라의 요동.현토군 위치도 지금의 요하 하류 부근이였을까요?

 

 

 

 

 

 

 

 

 

 

 

 

 

 

조선 500 여년 동안 남구만.이규경.신채호.정인보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유사들이 화국 은 말기 충신이라는 기자가 조선땅에 왔고 군왕으로 재위하였다고 주장하며 조선 백성을 교화하였다는 교화시조로 숭배하였습니다.


어이가 없어 한숨만 나옵니다.


사실 기자동래설은 후조선뿐만 아니라 1287 년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도 기자조선을 인정하며 단군조선을 전조선으로 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묘사하였으니 기자조선의 역사는 고려 유학자들로부터 시작한 것이며 기자 기록이 확대.강조된 것은 1570 년 윤두수가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기자에 대한 질문을 받고도 대답하지 못했다 하여 귀국 후 <기자실기> 등을 저술하고 동시기에 율곡 이이마저도 동참하며 이를 기점으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주자의 경전 해석을 거부하고 직접 고문을 통해 유교의 본의을 파악하였던 미수 허목마저도 기자를 우리 국사 체계에 편입시켜 기자를 교화시조로 숭배하였으며 개국시조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을 잇는 국가로 기자조선을 상정했습니다. 


유교 경전을 직접 해석을 하건 주자 등의 주석인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연구.검토하건 유학을 개인 처신의 신조로 삼는 것까지 누가 뭐라겠습니까?


하지만 <사기> <한서> 에 기록된 바와 같이 `조선에 갔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기록들은 멀찌기 밀어내고 어찌 주나라 영토도 아닌 `조선 땅에 봉했다`는 한가한 소리를 어찌 비판 한 마디 없이 그대로 믿는단 말입니까? 또한 <양서>나 화국의 거의 모든 물길을 상세히 기록한 지형지세 전문 지리지인 <수경주> 등에도 기자의 묘가 조선 땅이 아니라 양국 몽현에 있다는 기록은 대체 왜 믿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정사급 기록에 들지도 못할 <위략>의 한 구절인 `기자후 40 여세` 기록을 잘못 해석하고 또 맹신하여 부왕이 40 세 후손이니 준왕은 41 세 후손이라는 둥, 기자가 5000 명을 데리고 왔다고 말한 소강절은 명나라 승려가 아니라 조선의 승려였다는 안정복의 주장과 같이 도무지 신뢰할 만한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기사들로 꽉찬 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며 기자동래설입니다. 


기자 숭배를 사대라고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기자실기>를 저술한 윤두수마저도 기자사당이 요동 의무려산에 있다고 하며 목상이 전란으로 불타없어졌다고 하였는데 어찌 고려.후조선의 깊숙한 평양 땅에 묘와 사당을 만든단 말입니까?


<한단고기>에 편목된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기록에도, <삼국유사>의 기이편 편목에도 기자조선은 없습니다. 어찌 후조선의 거의 모든 유사들은 하나같이 기자를 교화시조로 숭배하고 기자조선을 왕검조선을 잇는 국가로 상정한단 말입니까?


참으로 한심한 행위들입니다.


<동국통감> 기록과 같이 왕검조선 역년을 1048 년으로 상정하면 서기전 1300 년 즈음에는 왕검조선이 망하였다는 소리이고 누군가는 단군의 제위를 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군세기>에는 서기전 238 년 북부여를 개국한 해모수에게 단군의 위를 양위하여 왕검조선의 역년을 2100 년으로 보았지만 <규원사화>와 똑같이 47 대를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는 평균재위 20~30 년 안팎으로 보는 것이 상식적이기 때문에  <동국통감> <규원사화>의 1048 년이나 1205 년 역년이 근거 없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자조선은 우리 선조들이 이어온 1000 여년 가까운 역사를 가로챈 것이며 기자조선을 왕검조선을 잇는 국가로 상정한 고려나 후조선의 역사저술가.유사들은 1000 여년 동안의 선조들을 욕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왕검조선의 단군 제위를 이은 자는 누구이며 국명은 무엇이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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