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3 년경부터 이조선 서북국경 지도조작 모의

재일고고학자 이진희의 <광개토왕릉비의 탐구>와 <아세아동부여지도>에 근거하여 명치왕과 서향융성의 지도조작을 추정함.

 

- 지도조작 주모자

일본 명치왕

서향융성 - 1873 년 육군 초급장교 수십 명을 이조선.청국.대만에 밀정으로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 

 

- 하수인

일본육군참모부

계태랑     - 참모부장

대원리현 - 편찬과장

횡정충직 - 영락태왕비문 쌍구탑본 석문 작성 실무자, 1889 년 정탁본으로 발표, <임나고> 작성

하촌수개 - 청국.이조선 국경 변조 지도 작성 추정자

 

- 대표 밀정

주내경신 - 1883 년 영락태왕비문 일부 변조와 쌍구탑본 휴대하고 귀국

 

 

 

- 1875 년 일본육군참모부 간행, 공식관찬지도라고 설명됨.

출처: 한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연구/고지도

 

주1) 1875 년 당시 란하는 1 물길이였고, 황하는 2, 요하는 3 , 흑룡강은 4 물길이였고 이조선의 압록강은 8 물

        길이였다. 또한 1 란하는 춘추~진시황 시기에는 요수로 불렸으며 한~당 시기에는 난수, 송~청 시기에 란

        하로 개칭. 황하 2 물길도 한~당 시기에는 대요수였으며 송 시기 이후 황하로 개칭. 요하 3 물길도 한~당

        시기에는 염난수였으며 송 시기 이후 요하로 개칭. 흑룡강 4 물길은 북위~당 시기에 흑수로 설명.기록되

        었고 청시기에서야 흑룡강으로 기록됨. 압록강 8 물길은 전한 시기의 열수列水였으며 고구려의 살수薩

        水임.

   2)  이조선 시기 백두산은 7 위치에 있었고 지금의 백두산 10 은 <삼국사기/신라본기>의 토함산으로 추정

        됨.

   3) 결국 일본명치왕과 서향융성은 이조선의 압록강 8 물길을 9 물길로 이동.조작시키기 위해 2,3 황하.요하

       를 4 위치로 이동.조작한 것

 

      

 

 

- 재하수인들

 

1. 백조고길(1865-1942) -시라토리 구라키치

- 1887 년 동경제국대학 사학과 개설

-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중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 전개

- 1906 년 일본 조차지 청국 봉천성 금주구 대련에 있던 남만주철도(주)(- 이하 만철이라 약함) 내에 `만주역사지리조사부`  설치를 주도하여 전내긍,송정등,도엽암길-이나바 이와키치 등을 불러들여 만주 즉 길림과 조선의 역사.지리에 대한 조사.연구를 개시하였고 이후 인력이 부족해지자 진전좌우길.지내굉(1878-1952) 등을 추가로 영입

- 1908 년 한 서점에서 한국사 관련 문헌사료 5000 여 권을 만철이 지원한 5000~6000 원으로 사들임, <고려사> 20 원

- 1913 년 <만주역사지리> 편찬

  고대사

  1. 한대의 조선(백조고길.전내긍) 2. 한대의 만조(도엽암길) 3. 삼국시대의 만주(전내긍) 4.진대의 만주(전내긍) 5.남북조시

      대의 만주(전내긍) 6. 수.당 고구려 원정기의 만주(송정등) 7.발해국의 강역(송정등)

  근대사

   1. 요대의 만주 강역 2. 허원종의 행정록으로 본 요.금대의 만주 교통노선 3. 금대의 만주강역(송정등) 4. 동진국의 강역

   5. 원대의 만주 강역 6. 원.명대의 만주 교통노선(전내긍) 7.명대 요동의 변방장성 8. 건주여진의 원주지 및 이주지

   9. 청대 초기의 강역(도엽암길)

- 이후 진전좌우길.지내굉은 <조선역사 지리>를 편찬

- 1914 년 만철의 재정적 지원이 대폭 축소되자 연구 공간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로 옮기고 매년 만철로부터 기금을 지원

   받음, 전내긍.지내굉은 문과 교수로, 송정등은 국학원대학 교수로, 도엽암길은 조선총독부 부설 조선사료편찬과 주임

              

2. 송정등(1877~1937) 1909 년 진장성 동단을 요양 서북부로 비정

3. 도엽암길 1910 년 <진장성동단급왕험성고> 논문 발표, 진장성 동단을 한반도 황해도 수안이라 주장

4. 조거용장(1870~1953)

- 동경제국대학 인류학교실 청강생

- 1895 년 조수 신분으로 요동반도 현지조사에 참여를 시작으로 대만.중국서남부.시베리아.동아시아 각지를 조사하고 보고

  서와 전문서 발표,

- `한 낙랑시대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하여 <남만주조사보고서>를 간행

- 일선동조론 주창

- 1911 년부터 조선의 석기.고분.체질인류.민속 등 다방면 조사에 참여, 

  평양 등 한반도 북부가 낙랑군이라 주장

5. 관야정-세키노 다다시

- 동경제대 건축학과 교수

- 1910 년 평양지역 고분 발굴, 효문묘 동종 유물 수습

- 1911 년 황해도 사리원역 부근에서 `어양 장` 명문의 벽돌 파편 발견, 부근 고분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전` 발견하여 황해

  도 지역을 한대의 대방군으로 단정

- 1913 년 9 월 23 일 평양 대동강변 고분군에서 토성 발견하고 기와 파편을 수습하고 이 일대를 한대 낙랑군 치소로 단정

- 1918 년 북경 유리창에서 한대 발굴품을 300 여 엔에 구입하여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냄, 쌀 5 키로가 1 엔 

- 1921 년 조선총독부 박물관, 중추원에서 강연(송병준.이완용.이경영 등이 내방)

- 1921 년 총독부 초대 만찬에 백조고길.지내굉과 함께 참석 

6. 금서룡-이마니시 류

- 조선총독부 촉탁

- 1913 년 9 월 30 일 평안도 용강에서 점제현신사비 발견하고 이 일대를 낙랑군 점제현으로 단정

7 등등. 산전재치랑- 도굴꾼, 1921 년 가을 낙랑태수장 봉니가 출토된 지역 정밀 조사

            관구반 - 평양법원 검사장, 1923 년 평양 토성리 부근에서 조선우위 봉니 입수

 

그러면 한국인 이병도.신석호 등의 위치는 어떨까? 

명치왕의 재하수인에 불과한 조선총독부와 어용학자 금서룡 등등의 한국인

`머슴`일 뿐이다.

 

명치왕.서향융성이 기획.습작한 지도가 조작이고 그 조작에 근거한 역사 해설을 학문이라 할 수는 없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