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는 아닙니다. 

 

우리 대한사의 왜곡은 시간과 공간 두 측면에서 축소라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는데 시간적 축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사서로는 <한단고기> 외에도 훨씬 일찍 편찬.간행된 <삼국유사> <동국통감> <규원사화> 등도 있고 또한 그러한 사서들은 <한단고기>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적 축소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판단되는 공간적 축소를 바로잡기에는 <한단고기> 내용으로는 택도 없고 <삼국사기/잡지/지리>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이나 <승람> <비고> <강역고> 등을 동원한다 하여도 역부족인 상황이기 때문에 <한단고기>를 유일무이한 사서라 주장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고 한심한 작태임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단고기>를 위서라 주장하는 이나 `유일` 운운하는 자 역시 역사가 무언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우리 국사의 본 모습을 확실한 부분부터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2000 여년 간의 북경 이동 지역의  중국 정사 지리지 전체를 <삼국사기> 등과 대조.검토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대국과 국경을 마주한 중국의 동쪽 국경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이고 결국 2000 여년 동안 요하로 불린 물길은 지금의 요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요하가 요하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11년에서 1920 년대 쯤이며 지도에 확정되어 표시된 것은 1934 년 만주국지도이기 때문입니다.

 

단재 신채호가 고대의 요수는 란하라 하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요수가 란하이면 요하에서 동남쪽으로 480 리 떨어진. 압록강은  란하 동쪽 지류인 청룡하였다는 말이고 결국 후조선.고려.고구려.준왕조선의 압록강.열수가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청룡하라는 말압니다. 또한 평양성.서경은 그 청룡하에서 동남쪽으로 450 리 떨어진 지금의 중국 요녕성 건창 부근이라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이전의 준왕조선의 왕검성은 청룡하 부근이고 준왕조선 이전의 단군부여나 그 이전의 단군조선의 중심지는 당연히 청룡하 북쪽에 있는 분수령의 북쪽 지역인 란하 동북쪽 지류와 칠로도산 북쪽 지역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는 노합하 지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지역은 중국이 저들의 시원문명이라 주장하며 요하문명이라 칭하지만 1911 년 이전 약 1000 여년 동안은 요하와 송화강으로 그 이전 1000 여년 동안은 염난수와 약수 등으로 불렸습니다.  

 

결국 지금의 청룡하와 노합하 지역이 압록강.송화강 지역이기 때문에 문명지의 명칭을 요하 하나로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요하와 송화강의 분수령인 백산으로 하여 백산문명이라 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근거 자료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모든 정사급 지리지 즉 <관자><산해경><수경><설원><염철론><사기><한서><후한서><진서><위서><수경주> 등 초기의 지리 기록과 <수서><신.구당서><통전><요사><금사><원사><명사><청사고> 등의 지리지 기록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런데 <한단고기>만으로 할 수 있다니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어쨋든 한국 강단사학에서는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몰아세우지만 결코 위서가 아니며 다만 체제나 언급된 내용이 사서라 하기엔 미흡하고 부정확한 점이 너무 많이 산견되고 또한 편찬자의 비정이 원본에 삽입되어 있는 점 또 사상.종교에 관한 내용은 결코 충분하거나 명쾌하다 할 수 없어 대체적으로 미진한 사서 관련 묶음이라 평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단고기>에는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 삼성기 하>, <신시역대기>,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북부여기> 등과 이맥의 <태백일사> 에는 삼신오제본기/한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국본기 등이 묶여 있는데, 그중 유의미한 사서로는 <단군세기> <북부여기> 정도입니다.  

 

 

그나마 <단군세기>는 47 대 2095 년의 왕검조선 역년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47 대 1028~1048 년으로 기록한 <동국통감>이나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와는 다르게 보고 있어 어느 한쪽은 수정.폐기되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단지 <북부여기>만은 왕검조선 멸망 이후 삼국시기 이전까지 약 

200 여년의 대략적인 정황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하고 유일한 자료라고 판단합니다.

 

 

 

한편 <한단고기> 기록의 정확성 여부와 원문.주석과 관련하여 아래의 한 예와 같이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북부여기상 시조 단군 해모수 기해 38 년(전202년) 원문에,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란하다.`라 기록되어 있는데, 패수를 란하로 비정한 것으로 보아 결코 <북부여기> 편찬자 범장의 원글이라 할 수는 없고 이기.계연수 혹은 이유립 등의 비정이 원문에 삽입된 글이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란하라 한 비정은 정확한 것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어쨋든 17 세기 중반 <동국제강>을 저술한 홍여하가 패수를 요하로 비정한 것과 똑같은 경우로 대략 정확한 지리인식을 갖추었다고 평할 수 있지만 범장의 글이라면 당연히 `패수는 요하다`라고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21 세기의 란하는 고려 시기에는 요하라 불렸으며 패수는 요하 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지류에 불과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패수는 곧 오늘의 란하다`라는 범장의 원문을 가장한 <한단고기> 편역자 주석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고대의 요수는 란하이며 패수는 해성의 헌우록이라는 지리 인식 수준보다는 약간 떨어지지만 거의 진실에 다가간 비정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한단고기>를 통하여 역사왜곡을 밝히겠다면 시간적 축소 부분보다는 공간적 축소 부분과 관련한 패수.란하 비정에 대하여 심도있게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1920 년 전후하여 왜종은 지도상으로 청 시기의 란하를 동쪽으로 약 300 여리 옮겨 지금의 란하로 만들고 지금의 란하 위치에 흐르는 당시의 요하를 동쪽으로 약 2000 여리 옮겨 지금의 요하로 만든 습작질을 증명하는 것 즉 공간적 축소 부분에 치중하는 것이 계연수 등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라 판단합니다.

 

왜종은 지도조작의 습작질을 하던 중 1931 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만주국을 세운 다음 1934 년 만주국 지도를 만들면서 저 습작질을 만주국지도에 현실화시켰고 현재지도는 만주국지도를 습용한 것이기 때문이며 오늘날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도 저 조작지도를 역사 사실인 양 강변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중국은 뜨거운 장물을 손에 쥐고 일본의 도적질을 밝히자니 자신들의 묵인.도둑질도 실토해야 하고 대한에 넘겨주자니 너무 아까워1911년까지의 정사급 지리지 기록과 배치되는 무리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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