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는 <사기/송미자세가> 기록은 사실일까요?
중국의 25 개 정사 첫째가 <사기>이고 둘째가 <한서>인데,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보다 약 160 년 이후 사람인 반고가 저술한 <한서>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만 하였지 조선에 도착했는지 또 조선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마천도 <사기/조선열전>에서 서기전 300 년 대의 조선 후와 서기전 200 년 대의 연인 만을 언급했을 뿐 서기전 1100 년 전후 조선왕에 봉했다는 `송미자세가` 기록은 재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기자조선이란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일까요?
아마도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서 `기자 後`의 `後` 뜻을 시간으로 새기지 않고 후손으로 이해하려고만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조선의 부왕을 기자의 41 대 후손으로 이해하게 되고 기자조선을 역사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 시기 일연의 <삼국유사>나 이암의 <단군세기> 등에는 단군과 후손들의 통치가 2000 년간 전후하여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근세 최남선,신채호,정인보 등은 기자의 조선 통치는 역사 사실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정하였습니다.
또한 의미있는 중국 기록으로 북위 시기 편찬된 <수경주>나 당 시기 편찬된 <사기색은> 등에는 기자의 묘가 중국 땅 옛 양국 몽현에 있다는 기록입니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기자는 은나라 도읍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향하였고 혹 조선으로 간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에 도착하지도 못하였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결국 조선의 거의 모든 성리학자들이 기자조선을 맹신한 꼴인데 변계량,조정,남구만 등은 기자동래나 기자조선을 허구로 여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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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 예문제학(藝文提學) 변계량(卞季良) 상소를 올리니,
우리 동방은 단군이 하늘에서 하강하시었고, 천자(天子)가 분봉(分封)한 땅이 아닙니다.
명나라 황제의 조서(詔書)에서도 아조(我朝)의 일들을 두루 말하였으니 제천(祭天)의 사실도 반드시 알았을 것이지만 본국의 풍속과 예법을 존행하게 한 것이니 그 뜻이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라고 한 것입니다. 처음 하늘에 명을 받았으며 하늘에 제사드리는 예속(禮俗)이 매우 오래니 거스를 수 없습니다. 남교에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는 상소에 의하여 변계량으로하여금 제문을 짓게 하고 영상(領相) 유정현(柳廷顯)을 보내어 원단에서 비를 빌게 하였으며, 그 후에는 원단에서 기우(祈雨)는 물론 기곡(祈穀), 보비(報丕)의 제사를 드리고 재실과 난간 · 담장 등을 수리하기도 하였다.
<한국근세사학사/조선중.후기편> 정구복 93쪽, 남구만 1629~1711 <東史辨證>
단군조에서는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에 의거하여, 요임금 경인으로부터 기자가 봉하여졌다는 주무왕 기묘년까지는 1220 년이므로, 단군이 1500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잘못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하였다. 또 단군이 하백녀와의 사이에서 부루를 낳았다는 설과 해모수와 하백녀가 주몽을 낳았다는 것은 단군으로부터 주몽까지의 간극이 2000 여 년이나 되므로 믿을 수 없는 잘못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기자에 대하여는 주무왕의 봉함을 받았다는 설과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하였다는 기록이 잘못임과 , 또 중국인 5000 인을 데리고 와서 교화하였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망명자가 어느 겨를에 이렇게 준비하여 데려 올 수 있겠는가라고 논하였다. 기자의 8 조교도 모두 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함허자의 상세한 기록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함허자의 <천운소통>에서 기자가 무왕에 의하여 조선후에 봉하여졌다고 기술한 것을 사실이라고 볼 수 없으며, 더구나 기자가 은나라 제사를 받들었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한백겸이 기자의 정전 유제를 평양에서 확인하고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잘못된 것임을 구체적으로 반박하여 그 설이 허구임을 논하고 패수.진번.수양산 등의 항목에서는 특히 이전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많은 문헌을 참고하며, 동시에 날카로운 비판력으로 그 동안 잘옷 인식되어 온 사실들을 논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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