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개화파,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내가 쓴 '내 인생의 책']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21.02.16 12:05l최종 업데이트 21.02.16 12:05l

소준섭(namoo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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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구한말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헌신한 애국자로만 배웠다. 그래서 그렇게만 알고 자랐다.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로 해 필자는 빈민지역 현장에서 대중조직과 투쟁 활동을 하면서 대중운동론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고심하던 중 책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를 저술하게 됐다. 그리고 1987년 11월, 내 본명 대신 '김종규'란 필명으로 출간했다.
 

 
▲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책 표지
ⓒ 소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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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개화지상주의 그리고 일본의 침략성에 대한 몰이해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에서 개화파의 거사였던 갑신정변이 만약 성공했다면 조선의 자주성은 상실되고 식민지화가 앞당겨지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단언했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의 역할은 일본공사관에서 돈 빌리고 군대 동원을 요청하고 일본 공사에게 정보보고를 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간 개화파의 위상이 과대평가돼온 것은 일제식민지를 미화하려는 식민사관의 영향이었다고 기술했다.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에서 개화파들이 민중을 지극히 불신했고, 민중의 힘을 두려워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옥균은 조선인 교육에 외국의 종교를 투입할 것을 권했고, 고종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우매한 인민을 가르치되 문명의 도로써"라며 대중을 불신하고 서구숭배주의의 태도를 보였다.

대표적인 개화파 인사인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인민의 지식이 부족한 나라는 그 인민에게 국정에 참여하는 권리를 줌이 불가"하다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개화를 "인간의 천사만물(千事萬物)이 지선지미(至善至美)한 경역에 이름"이라고 규정하면서 개화시대에서 침략과 같은 낡은 죄악은 없다고 단언했다. 실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한 몰이해로서 그 활용물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또 박영효는 민중이란 무지하고 몰상식해 시비곡직을 구별할 수 없고, 한번 민란이 일어나면 거기에 편승, 참혹하고 흉폭한 행위를 제멋대로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는 한편 "금, 은, 동, 철 및 석탄 등의 광산을 크게 개발하되 외국인을 초빙해 관장토록 할 것"을 주창함으로써 제국주의 외국에게 민족 자원을 넘기라는 발언을 했다(일본외무성 일본외교문서 21권 292~311 박영효건백서).

특히 이들 조선 개화파들은 모두 일본의 개화파 거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직접 접촉하면서 그의 개화사상을 받아들였고, 이후 조선의 일본 유학생들은 어김없이 후쿠자와 유키치와 연결돼 그 영향을 받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화를 최대 목표로 조선은 문명개화의 세계적 침투에 저항하는 보수반동 세력의 최후의 아성으로 간주했다. 그는 일본을 서구의 아시아 침략으로부터 동양 전체를 방위하는 맹주국으로 위치시켰으며, 조선은 '문명개화'의 기치 하에 일본에 종속시켜야 할 나라로 파악했다. 그러므로 그의 영향을 온몸으로 익힌 조선 개화파들은 친일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일본의 조종으로 갑신정변 등 정치 행위에 참가하면서 결국 매국의 길을 걷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었다. 실제 개화파들은 동학농민군으로부터 '개화간당(開化奸黨)'으로 배척당했다.

"김치와 밥 대신 빵을 먹자"... '미국화'를 주창한 독립협회

한편 독립협회 역시 지나치게 과대평가됐고, 심지어 독립협회가 당시 가장 유일한 조선의 활로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에서 독립협회는 친미 단체라고 규정지었다. 독립협회는 서구적 교육의 보급에 의한 조선의 서양화, 특히 미국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독립협회의 지도자인 서재필은 "공개강좌나 학교의 설립 및 나라의 전반적인 미국화를 제안"했으며, <독립신문> 1896년 10월 10일 치에는 "조선의 개화란 사람들이 신학문을 배워 구습을 버리고 목면복을 입지 않고 모직과 견직을 입으며, 김치나 밥 대신 고기와 빵을 먹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조선의 기독교화와 식민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비록 조선의 식민지화는 실패했지만, 필자는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에서 독립협회 등을 통한 친미파의 부식이라는 미국의 목표는 이후 일제 강점기에서도 지속적으로 추구됐고 마침내 해방 이후 '훌륭한' 결실을 거두게 된다고 기술했다. 예를 들어, 이승만은 독립협회에서 활동해 친미 세례를 받은 데다가 미국 망명을 통해 더욱 친미화했으며 해방 후 미국의 충실한 대변자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내 20대 끝자락의 뜨거운 열정을 불사른 책

스무살 <광주백서>를 쓴 이후 지하 팸플릿 <학생운동의 전망>을 비롯해 계속 운동론과 관련된 저술 활동을 해나갔던 필자는 현장에서 대중들과 활동하면서도 틈틈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독서를 했다. 그러면서 서울 시내 도서관들을 다니며 역사책을 구해 열심히 공부하고 사색했다.

그러한 결과로 집필된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책은 출간되자마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상당히 팔려나가기도 했다(물론 당시는 대부분 지금처럼 인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매절 방식으로 원고지 매수로 계산해 단 한 번 원고료를 받는 형식이었으므로 많이 팔린다 해서 필자가 더 받진 않았다).

심지어 그 책이 북한 쪽에서 나온 책이라는 유언비어까지 돌았다. 아마 저자가 필명을 사용한 데다가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관점과 시각으로 기술된 탓도 있을 테다. 또한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의 표현방식도 그 요인이었으리라. 서중석 교수도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의 내용을 언급하며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필자는 개인적으로 서 교수를 알지 못하며, 그 책을 필자가 쓴 사실 역시 서 교수는 알지 못한다).

<한국근현대사의 이데올로기>, 한 마디로 내 20대 끝자락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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