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조대왕大祖大王 66 년(서기118년)과 69 년 기록 전문입니다.
66 년 봄 2 월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6 월에 왕은 예맥과 더불어 한漢나라 현토군을 기습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가을 7 월에 누리와 우바이 곡물을 해쳤다. 8 월에 소속 관원에게 명하여 현량.효순한 자를 천거하고 환과고독 및 노인으로 자활할 수 없는 자를 방문하여 의식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69 년 봄에 한漢나라의 유주 자사 풍환, 현토군 태수 요광, 요동군 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하여 예맥의 거수를 격살하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왕은 이내 아우 수성을 보내어 군사 2000 여 명을 거느리고 환.광 등을 역격하였다. 수성이 사자를 보내어 거짓 항복하니 환 등이 믿었다. 수성은 이로 인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대군을 차단하고 몰래 3000 여 명을 보내어 현토.요동의 2 개 군을 치고 그 성곽을 불살랐으며 2000 여 명을 살획하였다. 여름 4 월에 왕이 선비 8000 명을 데리고 요수현을 공격하니 요동군 태수 채풍이 군사를 내어 신창에서 싸우다 죽었다. 공조연 용서와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써 풍을 막다가 함께 진중에서 죽고, 죽은 자가 100 여 명이었다. 겨울 10 월에 왕은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백성 중 곤궁한 자를 물어서 차등을 두어 물건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색 여우 갖옷 및 흰 매.흰 말을 바치니, 왕은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여 보냈다. 11 월에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은 수성에게 군국의 일을 통섭케하였다. 12 월에 왕은 마한.예맥의 1 만 여 기병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니, 부여 왕이 아들 위구대를 보내어 군사 2 만 명을 거느리고 한漢의 군사화 힘을 합쳐 막아 싸우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대패했다.
<삼국사기>1 최호역해 홍신문화사 1997
지금으로부터 약 1900 여 년 전의 상황을 전한 위 기록에는 고구려 외에 예맥, 한漢나라 현토군.유주.요동군, 선비, 부여, 숙신, 마한 등 무려 6 개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물론 국력의 크고 작음과 전성 시기의 선후 및 인접국 사이에 어느 정도의 종속 관계 등은 있었을 것이지만 각각 일정 정도의 강역을 차지하고 나름대로 어느 정도까지는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하나의 명칭으로 불렸었고 그러한 연유로 중국사서에도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후대에 고구려나 백제로 흡수되어 명칭이 사라진 예맥.부여.마한 등의 내부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국 역사서를 보아야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즉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부여> 조의 아래 기록은 부여가 예.예맥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과 한나라 현토군과 고구려 및 읍루.선비등과의 떨어진 거리나 방향이 설명되어 있는데 이 정도의 기록마저도 <삼국사기>에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토에서 북쪽으로 1000 리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경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흐른다고 하였으며, 왕이 사용한 인장의 글에는 `예왕濊王지인`이라 되어 있고 나라에 있는 옛성 이름은 예성濊城이라 하였으니 이는 부여땅이 본래 예맥땅이며 부여왕이 예맥땅에서 재임한 것이며 스스로 망인, 떠나온 사람이라고 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중국의 세번째 정사라는 <후한서>의 <동이열전/예>에는 예의 북쪽에 고구려.옥저가 있고 남쪽으로는 진한이, 동쪽으로 끝까지 가면 큰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르며 예.옥저.구려의 땅이 모두 조선에 속하였다고 하여 개략적인 예 의 위치를 설명을 하고 이어서 기자, 조선왕 준, 위만, 우거 등에 관한 사건이 간략하게 열거된 후 서기전 128 년 예군 남여가 우거에 반대하고 28 만 명을 이끌고 요동에 내속하니 한 무제 유철은 그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였고 수년 후에 폐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와 같이 고구려 초기는 여러 종족, 수 개의 나라와 공존하였고 건국되기 이전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로 조선과 한漢이 공존하였고 대결하였으며 조선 내에서도 부.준왕에서 연나라에서 망며한 만.우거로 교체되었는데 당시에도 조선의 북쪽에는 부여가, 남쪽에는 마한이 있었습니다.
대조대왕 시기의 고구려 도읍은 국내 위나암성이였는데 과연 위나암성은 어느 곳이였고 당시 고구려 강역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아래의 한국통설 약도과 같이 지금의 압록강 하류가 시작되는 집안 부근에 있었을까요? 또한 태조왕 시기 한나라의 요동.현토군 위치도 지금의 요하 하류 부근이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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