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조대왕 3 년(서기 55년) 기사입니다.

 

봄 2 월 요서에 10 개 성을 쌓아 한나라 침입에 대비했다.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삼국사기(1)/고구려본기3.태조대왕> 최호역해 1997년 홍신문화사간행

 

위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사학계는 위 기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인지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쨋든 강단사학에서는 요서를 지금 요하의 서쪽 지역이라 주장은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요하 하류 서쪽에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이라는 그 넓은 지금의 요서 지역 중에서 과연 어느 곳에 10 개의 성을 쌓았을까요?

 

<삼국사기> 기록에는 10 개 성의 명칭과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김부식 외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고구려가 요서 지역에 10 개 성을 축성한 것이 사실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에 기록을 남긴 것일텐데 10 개 성의 명칭을 남기지 않았으니 미궁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10 개 성의 명칭이나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요?

 

<환단고기>에 편제된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를 편찬하였다는 이맥(1455~1528)은 <조대기>를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조 융무 3 년(서기 55년) 요서에 10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 10 성은 이러하다.

첫째는 안시성이니 개평부(開平)에서 동북쪽으로 70 리 떨어진 곳이고,

둘째는 석성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 리 떨어진 곳이고,

세째는 건안성이니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 리 떨어진 곳이고,

네째는 건흥성이니 난하의 서쪽에 있고,

다섯째는 요동성이니 창려의 서남쪽에 있고,

여섯째는 풍성이니 안시성에서 서북쪽으로 10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일곱째는 한성이니 풍성에서 남쪽으로 20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여덟째는 옥전보이니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으로 6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아홉째는 택성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열번째는 요택성이니 황하(黃河 )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조대기> 내용이 사실이라면 한국사학계가 추정하는 요서 10 성 위치는 지금의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안시성을 비롯하여 아래와 같은 위치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즉 네번째 건흥성은 난하 서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란하 또는 난하 하류 서쪽 강안에 있어야 할 것이며 다섯번째 요동성은 창려 서남쪽에 있었다니 지금의 중국전도에 표시된 창려 부근이여야 할 것이니 2 개의 성은 요서 지역에 있는 것이 맞지만 나머지 8 개의 성은 요서가 아니라 요동지역에 있습니다.  

 

그러면 <삼국사기>나 <조대기>에는 어찌 요서에 10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었을까요? 또 <조대기> 기록과 같이 추정한 저 위치의 10 개 성으로 한나라 병사를 효율적으로 막을 수는 있을까요? 또 아무리 요서 지역이 맞다고 해도 4, 5 위치의 란하 건흥성과 창려 요동성 표시는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요동 지역의 8 개 성과 크게 동떨어진 란하 서안의 건흥성과 창려 요동성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어 보이니 당연히 검증해보아야겠지만 우선 큰 틀에서 검토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며 또한 큰 틀이 명확해지면 당연히 2 개 성의 문제는 수월하게 해결됩니다. 큰 틀에서 검토한다는 것은 앞글에서도 계속 주장했던 요서.요동군의 명확한 위치입니다.

 

즉 지금의 요동이 중국 고대인들이 인식하는 요동군인지, 또 한국통설에서도 주장되는 바와 같이 지금의 요하 하류 서쪽부터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까지의 지역이 요서군인지를 밝히는 것이 먼저여야 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고지도 - 1787 년 홍양길이 저술한 <건륭부청주현도지>에 실린 `성경도`에 보이는 안시성, 건안성, 창려요동성

 

 

 

즉 위 약도는 청나라 사람인 홍양길이 제작한 것인데 위 약도가 묘사하는 범위가 지금의 요동만과 요동반도일까요?
아닙니다.위 약도는 아래 지역을 묘사한 것입니다.

 

 

 

 

 

 

 

 

 

 

한 시기부터 청 시기까지 약 2100 여 년 동안 요서.요동.현토군은 <후한서> 지리지인 <군국지> 요서.요동.현토 각 군의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각각 3300 리, 3600 리, 4000 리 떨어져 있었고 <한서/지리지><수경주> 기록과 같이 난수는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을 경유한 물길이며 1250 리 길이의 대요수는 요동군만을 경유하였고 염난수는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의 물길인데 이 대요수와 염난수는 합쳐진 후에도 약 300 여 리를 정남쪽으로 더 흘러내려 발해 해안선에 닿았습니다. 또 두 물길이 합쳐진 요동군의 남쪽은 바다로 기록되었지만 실제 상황은 만灣이라는 것이며 이 灣이 지금의 란하 최하류라는 것입니다. 

 

결국 낙양에서 3300 리 떨어진 요서군의 위치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 서쪽 강안 지역이였고 요동군은 요서군의 정북쪽 지역인 지금의 반가구수고 부근인 중류 지역이였으며 요서.요동군의 중심지인 치소간의 거리는 불과 300 여 리 정도이기 때문에 지금의 란하와 지금의 요하 사이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대조대왕 시기 요서에 쌓았다는 10 성의 위치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결국 <한서/지리지> 기록의 요동군으로 흐르는 대요수와 염난수를 정확히 비정하는 것만이 우리 대한의 고대사를 정확히 인식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지리를 정확히 인식한 신채호가 <조산상고문화사>에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하였던 것이며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도 `패수는 今란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북조선의 리지린이나 남대한의 윤내현 등과 같이 <한서/지리지>의 대요수를 지금의 요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한의 고대 역사지리를 통째로 비트는 것이며 일본이 조선역사를 축소하기 위해 지명이동시키고 지도까지 조작하여 만든 식민사관 지리를 답습하는 일입니다.

 

민족사학을 표방한다고는 하지만 크게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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