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광개토태왕비문의 일부라고 하며 고구려연구회 윤독회의 석문과 번역문입니다.
영락 5년(395), 을미년에 왕께서 패려(稗麗)가 △△△하지 않기 때문에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부△(負△)을 지나 염수(鹽水) 언덕에 이르러 세 부△39)6,7백 영(營)40)을 처부수고 소?말?양떼 들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뒤 어가(御駕)를 돌렸다. 이에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쪽으로 와 △성?역성(力城)?북풍(北豊)으로 왔다. 왕은 사냥을 준비하도록하고 국경을 시찰한 뒤 사냥(田獵)을 하고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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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비문 석문과 같이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땅을 벗어나 산을 두 개 넘은 후 염수 언덕에 이르러 패려를 공격한 후 돌아오는 길에 양평도를 지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구려에서 패려 사이에 있는 염수.양평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기록에서는 광개토태왕의 패려 공격 전말이나 염수.양평도에 관한 조금 더 상세한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에 없다고 광개토태왕 비문의 사건이 허구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 고대 기록을 찾아볼 수 밖에 없는데 패려 공격 사건에 대해서는 제외하고 지리에 관한 것만 추적해 보겠습니다. 고구려 강역 부근의 지리를 기록한 중국 정사에는 염수鹽水는 나타나지 않고 비슷한 염난수鹽難水가 기록되어 있으며 양평도 역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 유의미한 것은 염수 혹은 염난수 및 양평 등의 명칭은 당시의 고구려 강역 밖 서쪽에서부터 지금의 북경까지의 지역 사이에서는 유일무이한 지명이라는 점입니다.
염수는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에 설명된 염난수 곧 서개마현을 흐르는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합쳐지고 이 염난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서안평현을 지난 후 바다로 들어가는데 그 길이는 2100 리라는 염난수일 수 밖에 없고 양평은 요동군의 수현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 속현 중에서 처음 기록된 양평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서>는 서기 80 년 경 반고가 편찬한 것으로 기전 202 년부터 서기 8 년까지 210 년의 전한前漢의 역사를 서술한 <사기> 다음에 꼽히는 중국의 두 번째 정사입니다.
결국 광개토태왕은 한나라가 서기전 75 년 옮겨 설치한 현토군 지역에 흐른다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를 서쪽으로 건넌 후 패려를 공격한 후 귀로에 요동군 양평현을 거쳐 귀환한 것입니다.
요동군 양평현에 대해 조금 더 검토하자면 <한서>보다는 중국 고대 물길 전문 설명서인 <수경주> 기록이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수경주/대요수> 기록에는 요동군 양평현으로 흘러오는 물길이 2 개가 있는데 하나는 요동군의 새 밖에 있는 백평산 주위(衛白平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요동군의 외곽 새를 관통하여 요동군 지역으로 들어와 양평현 서쪽으로 지나는 대요수와 다른 하나는 요수가 역시 요동군 새 밖에 있는 지석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요동군 망평현 서쪽에 이른 후 휘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에 있는 옛 성 서쪽을 경유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대요수와 요수는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현 지역에서 합류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대요수는 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요수현에 있는 옛성 서쪽을 지나는데 이 요수현은 중국 삼국시기 말 서기 237 년 스스로 燕왕에 오른 공손연이 장군 필연을 보내 사마의의 공격을 막은 곳이라며 역사 사건과 연관지어 설명하였습니다.
요수현을 경유한 대요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방현 서쪽을 지나는데 이때 오른쪽 곧 서쪽에서 백랑수가 흘러들어 온다고 합니다. 이 백랑수의 발원지는 우북평군이며 동북쪽으로 흘러 요서군 북쪽에 위치한 유성현 부근을 경유한 후 요동군 방현에서 대요수로 합쳐지는 대요수의 서남쪽 지류이며 거란.요국 시기 이후 대릉하로 개칭된 물길입니다. 지금의 대릉하 하류가 지금의 요하 하류와 거의 합쳐지는 모습은 <수경주/대요수>에 설명된 바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 주석에는 <수경주> 설명과는 반대로 망평현을 경유하는 물길을 대요수라고 하며 그 길이는 1250 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수경주>기록에서의 대요수.요수 구별은 무의미하며 굳이 구별하자면 <수경주>의 소요수가 <한서/지리지> 현토군 고구려현의 요수입니다.
결국 위 추정도에 표시한 바와 같이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는 지금의 요하가 되어야 하고 광개토태왕은 지금의 요하인 염난수를 건너 서쪽의 어느 언덕에 이르러 패려를 공격한 것이고 공격 후 염난수 하류 서쪽 지역에 흘러내리는 1250 리 길이의 대요수 하류 동쪽에 위치한 요동군 양평현을 거쳐 고구려 땅으로 들어왔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요하가 <한서>를 편찬한 반고의 설명과 같이 한 시기의 염난수 또는 염수로 불렸을까요?
또 한나라 현토.요동군은 한국통설과 같이 지금의 요하 하류에 설치되어 있었을까요?
한편 당 시기 사람인 두우도 염난수를 언급했었습니다. <통전/변방문/동이하/고구려>에서 두우는 말갈 백산에서 발원한 압록수가 국내성 남쪽을 흘러내린 후 서쪽에서 염난수와 합친다고 하였고 이후 안평을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는데 중국 정사 지리지에서는 서기 80 년경 반고가 처음으로 염난수를 언급한 이후 약 800 년 후에 두우가 두번째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에는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합쳐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와 같은 <한서><통전> 기록을 검토한 조선 시기 선학들의 지리 인식입니다. 즉 안정복 등은 두우가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의 마자수 기록을 오인하여 마자수를 일명 압록수라 잘못 설명한 것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고구려 시기에는 국내성 남쪽을 경유하였고 조선 시기에는 압록강의 북쪽 지류인 파저강 곧 중국의 25번째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의 봉천성 흥경부 임강현.통화현.회인현.집안현 등 4 개 현을 경유하는 혼강이며 옛명칭 동가강의 고대 명칭을 염난수로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또한 두우는 압록수가 염난수로 합쳐진 후 고구려의 안평을 경유하였다고 하였지만 안평을 2100 리 길이의 염난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직전에 경유하는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잘못 이해한 나머지 요동군과 열수 곧 준왕조선 시기의 열수였으며 조선 시기의 압록수 사이 지역인 열양이며 청 시기 봉천성 봉천부의 남쪽 지역 곧 개주.복주.금주 및 그 동쪽의 봉황성직예구 지역에 대한 지리 인식에 착오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들의 글을 읽는 후학들이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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