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 여년 동안 남구만.이규경.신채호.정인보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유사들이 화국 은 말기 충신이라는 기자가 조선땅에 왔고 군왕으로 재위하였다고 주장하며 조선 백성을 교화하였다는 교화시조로 숭배하였습니다.


어이가 없어 한숨만 나옵니다.


사실 기자동래설은 후조선뿐만 아니라 1287 년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도 기자조선을 인정하며 단군조선을 전조선으로 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묘사하였으니 기자조선의 역사는 고려 유학자들로부터 시작한 것이며 기자 기록이 확대.강조된 것은 1570 년 윤두수가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기자에 대한 질문을 받고도 대답하지 못했다 하여 귀국 후 <기자실기> 등을 저술하고 동시기에 율곡 이이마저도 동참하며 이를 기점으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주자의 경전 해석을 거부하고 직접 고문을 통해 유교의 본의을 파악하였던 미수 허목마저도 기자를 우리 국사 체계에 편입시켜 기자를 교화시조로 숭배하였으며 개국시조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을 잇는 국가로 기자조선을 상정했습니다. 


유교 경전을 직접 해석을 하건 주자 등의 주석인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연구.검토하건 유학을 개인 처신의 신조로 삼는 것까지 누가 뭐라겠습니까?


하지만 <사기> <한서> 에 기록된 바와 같이 `조선에 갔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기록들은 멀찌기 밀어내고 어찌 주나라 영토도 아닌 `조선 땅에 봉했다`는 한가한 소리를 어찌 비판 한 마디 없이 그대로 믿는단 말입니까? 또한 <양서>나 화국의 거의 모든 물길을 상세히 기록한 지형지세 전문 지리지인 <수경주> 등에도 기자의 묘가 조선 땅이 아니라 양국 몽현에 있다는 기록은 대체 왜 믿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정사급 기록에 들지도 못할 <위략>의 한 구절인 `기자후 40 여세` 기록을 잘못 해석하고 또 맹신하여 부왕이 40 세 후손이니 준왕은 41 세 후손이라는 둥, 기자가 5000 명을 데리고 왔다고 말한 소강절은 명나라 승려가 아니라 조선의 승려였다는 안정복의 주장과 같이 도무지 신뢰할 만한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기사들로 꽉찬 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며 기자동래설입니다. 


기자 숭배를 사대라고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기자실기>를 저술한 윤두수마저도 기자사당이 요동 의무려산에 있다고 하며 목상이 전란으로 불타없어졌다고 하였는데 어찌 고려.후조선의 깊숙한 평양 땅에 묘와 사당을 만든단 말입니까?


<한단고기>에 편목된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기록에도, <삼국유사>의 기이편 편목에도 기자조선은 없습니다. 어찌 후조선의 거의 모든 유사들은 하나같이 기자를 교화시조로 숭배하고 기자조선을 왕검조선을 잇는 국가로 상정한단 말입니까?


참으로 한심한 행위들입니다.


<동국통감> 기록과 같이 왕검조선 역년을 1048 년으로 상정하면 서기전 1300 년 즈음에는 왕검조선이 망하였다는 소리이고 누군가는 단군의 제위를 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군세기>에는 서기전 238 년 북부여를 개국한 해모수에게 단군의 위를 양위하여 왕검조선의 역년을 2100 년으로 보았지만 <규원사화>와 똑같이 47 대를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는 평균재위 20~30 년 안팎으로 보는 것이 상식적이기 때문에  <동국통감> <규원사화>의 1048 년이나 1205 년 역년이 근거 없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자조선은 우리 선조들이 이어온 1000 여년 가까운 역사를 가로챈 것이며 기자조선을 왕검조선을 잇는 국가로 상정한 고려나 후조선의 역사저술가.유사들은 1000 여년 동안의 선조들을 욕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왕검조선의 단군 제위를 이은 자는 누구이며 국명은 무엇이였을까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