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 vs 2014, 갑오년의 동아시아](2)
동학 1차 봉기 - 반정부·반외세 표방, 터져나온 ‘백산봉기’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
- ㆍ제국주의 시대, 동학 봉기는 동아시아 전쟁의 서막이었다
■ 백산, 만민을 위한 봉기의 현장
백산은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할 목적으로 집결해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했던 곳이다. 해발 47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꼭대기에 서면 사방으로 수십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요새다. 1894년 4월 하순(양력) 무장에서 기병한 농민군은 고부를 거쳐 닷새 만에 백산에 다다랐다. 이 소식에 너도나도 몰려들면서 백산은 흰옷에 죽창을 든 농민들로 넘쳐났다. 그 장관을 표현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란 말이 그때 생겨났다. 백산에 호남창의대장소가 설치되면서 그들은 농민군 부대원이 되었고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 대장으로 공식 추대되었다. ‘신출귀몰하는 재주가 있고 바람을 타고 구름을 부리는 묘술이 있으며 천하의 장사요, 세상에 다시 없는 영웅’이라는 칭송처럼 전봉준에 대한 농민군의 신뢰와 기대는 절대적이었다.
전봉준은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해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으려 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사방에 띄웠다. 이에 호응해 수많은 농민들이 ‘보국안민’이라 써넣은 깃발이 휘날리는 백산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이 사방에서 모여든 연합부대인 까닭에 전봉준은 이들을 규율하기 위한 4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셋째,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 정치를 바로잡는다.
넷째, 군대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군대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해 지배 권력은 물론 일본이라는 외세까지 없애겠다는 결전 의지를 밝힌 강령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선전포고에 다름 아니었다. 고부민란이라는 군 단위의 항쟁을 시작으로 무장에서의 기병을 거쳐 백산에 이르러 1만여명을 헤아리는 연합부대의 위용을 갖춘 농민군은 우선 전주를 향해 진격했다. 그건 농민군과 정부군 간의 내전으로 시작되었으나, 종국에는 청과 일본이 맞부딪치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진 1894년 동아시아 전쟁의 서막이었다.
강 건너 보이는 백산 전북 부안 동진강 너머의 야트막한 산이 120년 전 농민군 창의대장소가 설치된 백산이다. 당시 그곳에는 흰 옷에 죽창을 든 농민들이 넘쳐나면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부안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백산 아래 펼쳐진 평야 백산에 서면 부안 고부의 너른 평야가 펼쳐진다. 1894년 갑오년 부안의 농민들은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으려 한다’는 전봉준의 격문을 보고 백산으로 몰려들었다. 부안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 김옥균의 반역·망명·암살의 공간
1894년 갑오년의 봄, 백산에 모인 농민군의 드높은 사기로 남도가 후끈 달아오를 무렵, 그들의 최종 진격 목적지였던 서울은 김옥균의 죽음에 취해 있었다. 김옥균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주모자이다. 갑신정변은 급진개화파가 일본의 은밀한 지원 아래 조선의 근대화를 목표로 정변을 일으켰으나, 결국 청의 진압으로 좌절한 사건을 말한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환대하거나 극진히 대접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송환을 요구하는 조선 정부의 요구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고종은 직접 자객들을 보내 김옥균의 목숨을 노렸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0년에 걸친 줄다리기는 고종이 보낸 홍종우가 김옥균을 청나라의 땅인 상하이로 유인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왜 김옥균은 상하이행이라는 모험을 감행해 결국 불귀의 객이 되었을까. 김옥균은 조선·청·일본 3국이 동맹을 맺고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면서 아시아를 부흥시키자는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냉담한 태도에 실망한 김옥균은 청에 기대를 걸고 청의 북양대신인 리훙장을 만나러 상하이로 건너간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894년 3월28일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홍종우가 쏜 권총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김옥균은 조선의 반역자이니 조선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리훙장의 주장에 따라 그의 유해는 4월12일 인천으로 들어왔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양화진 모래사장에서 김옥균의 시체를 능지처참한 뒤 반역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전국 순회를 시켰다. 하지만, 고부민란 이후 농민전쟁이 준비되고 있는 가운데 민심은 더욱 흉흉해질 뿐이었다.
갑신정변은 일본의 배신과 청의 진압으로 좌절되었다. 10년이 흐른 뒤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 역시 일본의 상하이행 묵인과 청의 살인 방조로 죽임과 능지처참을 당해야 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본은 김옥균을 영웅시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암살의 배후에는 리훙장이 개입되어 있다며 그의 죽음을 청과의 전쟁 명분으로 활용했다. 또한, 고종이 제로에 가까운 통치 능력을 만회하기 위한 정국 전환용 카드로 외교 갈등을 불사하면서까지 김옥균을 잔인하게 처형했다고 힐난했다.
이렇듯 갑신정변과 김옥균의 죽음을 살펴보면, ‘조선’호의 항로는 고종이나 정부가 아니라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결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군의 백산봉기가 청과 일본마저 얽히는 동아시아 전쟁으로 이어진 것도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격동이 낳은 필연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되짚게 된다.
김옥균이 상하이의 한 객사에서 동행하던 홍종우에게 암살당하는 장면. 조선은 김옥균의 죽음을 전후해 동아시아의 소용돌이로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 청과 일본 사이에 낀 조선의 운명
개항을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맞닥뜨릴 때부터 조선의 운명은 ‘동아시아적’이었다. 조선은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통해 1876년 개국했다. 영국과 미국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 청이나 일본과는 다른 출발이었다. 조선이 1882년 서양 열강으로는 처음으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는 청이 알선을 맡았다.
조선을 사이에 놓고 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갈등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였다. 조선 정부는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들에 대한 특별대우에 불만을 품은 구식군인들이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궁궐과 일본 공사관을 습격한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이다. 일본은 즉시 군대를 파견해 조선 정부를 압박하며 공식 사과와 배상금 지불을 약속하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청은 3000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내정고문으로 마젠창, 외교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파견하는 등 내정간섭을 본격화했다.
2년 뒤인 1884년 청은 베트남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자 조선 주둔군의 절반을 빼내갔다. 이를 기회라 여긴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의 지원을 받아 궁궐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청의 출동으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뒤, 조선은 또다시 일본의 배상 요구와 청의 내정간섭을 감내해야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을 빼놓고 청의 리훙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머리를 맞대고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 모두 병력을 철수하고 향후 파병 시에는 사전에 서로에게 통고할 것을 약속한 톈진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조선을 배제한 채 청과 일본이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언약을 한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자주성은 서서히 훼손되어 갔다. 청은 묄렌도르프 대신 위안스카이를 파견해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간섭을 한층 강화했고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청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0년간 청과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서양 열강의 진출을 경계하며 상호간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려는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군사력 증강을 놓고는 치열한 소리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청은 육군보다는 해군 군사력 증강에 매진한다는 전략으로 1885년에 해군아문을 설립하고 1888년에는 북양함대를 편성했다. 일본은 북양함대의 등장에 위협을 느끼며 민첩하게 대응했다. 징병제를 한층 강화하고 해군 병력과 군함을 늘리는 등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1894년 무렵에는 해군은 물론 육군까지 거뜬하게 대외전쟁을 치를 수 있을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갑신정변 이래 10년간 청과 일본은 외교적 협조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군사력 확충을 통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일대 혈전을 예비하고 있었다. 청의 내정간섭으로 외교관조차 마음대로 파견할 수 없었던 조선은 양국의 군비 증강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음에도 빠져 나올 방도를 마련하지 못했던 1894년 조선의 불우한 운명을 살피다 보면 자연스레 120년을 훌쩍 지나 다시 돌아온 갑오년, 2014년 동아시아 속 대한민국의 처지를 떠올리게 된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조선·청·일본 3자간에 운명을 건 대결이 펼쳐졌다면, 지금 ‘동아시아호’는 미국, 러시아, 북한을 포함한 여섯 사공이 저마다의 계산법으로 노를 저으려 하니 향배를 예측하기가 더욱 어렵기만 하다. 게다가 미국과 중국이라는 2강 구도가 굳어지면서 격랑의 소용돌이는 한층 거세지고 있다. 또다시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끼인’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러운 현실인 것이다.
전북 부안 백산에 있는 ‘동학혁명 백산창의비’.
■ 안팎의 위기에 일어선 민중
1890년대에 들어 동아시아 차원에서 ‘외환’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가운데, ‘내우’의 위기도 고조되어 갔다. 19세기는 그야말로 농민항쟁의 세기였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한 세기 내내 전국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이어졌다. 주로 군 단위로 봉기해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조세 제도와 관리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양상으로 전개된 농민항쟁이 1862년에는 삼남지방을 휩쓸기도 했다. 이후 1890년대에 들어와 농민항쟁이 다시 빈번해졌다.
1894년 백산봉기는 농민항쟁이 마침내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사상과 조직을 갖춘 농민전쟁으로 진화했음을 만천하에 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농민전쟁에 사상과 조직을 제공한 것은 동학이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중종교다. 동학은 신분적 차별은 물론 남녀노소의 차별을 없애는 실천 활동을 통해 평등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교세를 넓혀 나갔다. 조선 정부는 동학을 반정부적인 사이비 종교로 낙인찍고 최제우를 혹세무민한다며 처형했다. 하지만, 제2대 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동학의 세력권은 전국화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전봉준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동학에 가담해 지도자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항쟁이나 변혁을 꿈꾸던 이들에게 동학 조직은 단순한 종교 조직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렇게 모여든 지식인과 민중이 동학농민군의 주력을 형성했다.
동학농민군은 반정부 투쟁만이 아니라 백산봉기 당시의 4대 강령에서 알 수 있듯이 강한 반외세 투쟁 의지를 표명했다.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정치군사적 동향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조선 내 경제 활동을 침탈로 인식하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상인들이 청과 일본 상인을 내쫓을 것을 요구하며 벌인 철시 투쟁이나 제주도 어민들이 일본 어민의 제주도 해역 출어 금지를 요구하며 일으킨 봉기 등은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집단행동이었다. 일본 상인을 통한 과다한 곡물 유출을 막기 위해 1889년에 내려진 방곡령이 결국 조약 위반으로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면서 막을 내린 현실 역시 민중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반외세 의식은 1893년 1만명 이상이 운집한 보은과 원평의 동학 집회에서 ‘일본과 서양을 몰아내자’는 대중적 구호로 응축되어 나타났다.
1894년 갑오년에 조선 정부는 민중에게 안팎으로 맞닥뜨린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당시 ‘동경매일신문’에는 동학농민군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왜 농민군으로 참여했느냐고 묻는 자가 있으면, 정부의 잘못된 정치를 고치고 조선에 있는 외국인을 추방하여 국민의 만복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국사 > 조선.고려,남북.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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