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국토를 흔히 삼천리 강산이라 한다.


하지만 500 여 년 이어온 조선의 강역은 남북 방향으로 4000 리였고 동서 방향으로 2000 리였고 이러한 내용은 조선의 기록이 아니라 청국 기록이고 1678 년 청나라 사람 고조우가 편찬한 <독사방여기요>에 보인다. 또한 조선 역사를 축소시키려고 청국 고지도인 <황조일통여지전도>를 재간행하면서 황하潢河의 중.하류를 서슴치 않고 조작하는 일본이 아래 제시하는 <대청광여도>에서도 명.청 시기의 산해관 북쪽 지역을 고의적으로 늘려 묘사하였으면서도 미처 정정하지 못한 각주에 기록된 문장이다. 


조선 강역에 대한 고지도로는 청나라 강희년간(1663~1722)에 채방병이 판각한 <대청광여도> 각주에 기록되어 있다.


<读史方舆纪要>


八、朝鲜
在辽东都司东千八百里。东至海七百七十里,南至海千三百里,西南至海八百里,西北至鸭渌江七百五十里,北至女真界千四百里。自其国都至京师三千五百里,至江南江宁府四千里。

古朝鲜国,箕子所封。战国时,燕略属真番、朝鲜,为置吏筑障塞,遂为燕地。秦为辽东外徼。汉初属燕国,燕王卢绾叛入匈奴,燕人卫满窃据其地。武帝定朝鲜,为真番、临屯、乐浪、玄菟四郡。昭帝并为乐浪、玄菟二郡。

后汉末,为公孙度所据。至公孙渊,魏灭之。晋永嘉末,没于高丽。

...中略...

及明洪武二年,高丽王王颛表贺即位,诏封高丽国王。二十五年,其王瑶昏缪众推门下侍郎李成桂主国事,诏从其自为声教 成桂更名旦,徙居汉城,遣使请改国号,诏更号朝鲜,自是王氏始绝,李氏世有其地,称藩岁奉贡献。万历二十年,为日本所侵掠,国几亡,王师入援,久之,国始定,然自是浸弱矣。其国中分为八道,八道中,则忠清、庆尚、全罗三道,地广物繁,州县雄巨,最为富庶。且俗尚诗书,人才之出,比诸道倍多。平安、咸镜二道,北接,俗尚弓马,兵卒精强,亦地势使然也。江原、黄梅,居京畿左右,差为狭小。而京畿在诸道之中,襟带山海,称为雄胜。其地东西二千里,南北四千里八道分统郡凡四十一、府凡三十三、州凡三十八、县凡七十。




고지도 - 대청광여도

            강희년간(1663~1722)에 채방병이 판각한 것을 1785 년 왜종 장구보적수(나가쿠보 세키스이)가 교정하였다 함.

 





대한의 많은 이들이 <삼국사기/잡지.지리>에 설명된 압록강과 평양을 지금의 대한민국 강역내에 흐르는 압록강과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일본 명치왕군부가 1873 년 경부터 청국의 직예성 일부 지명과 봉천.길림.흑룡강성 지역의 모든 지명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조선의 강역을 축소하려는 기획하에 육군 참모국을 통하여 밀정을 파견하고 지리정보 등을 수집하여 정밀지도를 작성한 후 그 활용 방책으로써 지명을 이동시켜 조작지도를 제작하는 습작질에 몰두하고 청국과 조선 현지에서는 홍보질을 병행하던 중 1932 년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우게 되고 만주국지도를 간행하면서 공식적으로 공표하여 지금의 중국지도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조선 500 여 년 중에도 정확한 전체 강역이 묘사된 지도도 극소수이지만 간행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래의 <백산도-아래 고지도와 같이 지도 표제가 없어 가칭함>와 같이 비교적 정확할 것으로 보여지는 지도들은 모두 청국과의 국경선 지역만을 묘사한 지도들만이 전해질 뿐이며 전체 강역이 묘사된 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가 유일합니다.  


고지도 - 1751년 (영조26)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 <백산도> 


하지만 <대동여지전도>는 위에서 언급한 중국기록이나 중국고지도 각주 설명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즉 <대동여지전도>에 표시된 우리 강토는 남북 3000 리, 동서는 최대 1000 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남북 4000 리는 어떻게 해서 기록된 것일까요?


이익과 이중환이 지관들의 말이라며 `백산의 좌향은 亥座巳向`이라 했다는 기록을 <성호사설><택리지>에 남긴 것으로 보거나 위 <백산도>와 같이 정북正北 표시와 백두산.흑룡강 북쪽의 해亥 방향 표시로 보아 조선 시기 학자들 모두는  백두산이 한양을 기준으로 지금의 백두산처럼 동북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북쪽의 서쪽 지역인 亥 위치 곧 시계의 10~12 시 방향에 좌정하여 있었고 백산의 남쪽 지맥은 巳 방향 곧 시계의 4~6 시 방향으로 뻗어나간 정황을 명확하게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조선 500 여 년 동안 남쪽 남해 해안선에서 북쪽 백두산까지 4000 리에서의 그 백두산 위치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지역인 지금의 부신.고륜기 사이 지역에 있었으며 이를 중국에서는 노호산 또는 노로호산이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조선의 백두산이 부신 북쪽 노호산 부근이였기 때문에 조선 강역의 동서 길이도 2000 리까지 되는 것이며 동시에 조선.청국과의 국경선을 흐르는 압록강도 또 조선의 평양, 고려의 서경, 고구려의 평양성이였으며 준왕조선의 왕검성도 지금의 중국 요녕성 건창과 금주 사이에 있었고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했다는 낙랑군도 건창에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위의 <백산도- 가칭>가 묘사하는 범위는 아래의 적색 실선 지역입니다.  







원본으로 추정되는 <백산도>의 아래 여백에 지금의 압록강 남쪽의 대한반도를 덧붙치게 되면 조선 시기의 백두산.압록강.토문강 등이 자동적으로 동쪽으로 약 2000 여 리 이동되는 것이고 조선 강역이 4000 리에서 3000 리로 축소되는 것입니다. <백산도> 아래 여백에 뜬금없이 대한반도가 덧붙쳐진 고지도가 아래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제목의 지도이며 위의 청색 실선 지역을 묘사한 셈이며 이 지도는 2007 년 한국보물 1537 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결국 조선 강역을 축소시켜 독립의지를 꺽으려는 일본의 식민지배 계획하에 조작된 지도가 2007 년 버젓이 한국보물로 지정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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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역사카페에 올라온 질문


 

백두산과 관련한 질문


 거두절미 하고 한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대동여지도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지요. 

 하지만 지금 전해지는 대동여지도는 1935년부터 전해진것이고 

 그 이전까지 대동여지도 상의 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 인지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서,북,간도 지방이 대동여지도 상에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것이 1935년도에 바뀌었더군요..

 

 저희 회사 대표님의 아버지께서 1935년 이전과 이후의 대동여지도를 소개한 

 책자를 가지고 계신데 변경이 되었더라구요..

 

 그리고 1935년 이전의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백두산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니었습니다. 

 장백산맥의 줄기 끝에 백두산이 있었지요..

 

 백두산정계비 상에 표기되어 있는 탁본을 보아도 현재의 백두산이 아닙니다. 

 지금의 백두산의 이름은 조선 시대에 묘향산이었지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고민고민하다가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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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찐O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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