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도읍은 한양이였고 그 위치는 지금의 서울이였습니다.
이 한양.서울의 지세를 설명한 기록이 1530 년 이행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京都 상上인데 아래와 같습니다.
`古朝鮮 馬韓地域 北鎭華山 有龍盤虎踞之勢 南以漢江爲襟帶 左控關嶺 右環渤海 ...`
`고조선과 마한 땅이다. 북쪽으로는 화산으로 진을 삼았는데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지세이다. 남쪽으로는 한강으로 옷깃과 같이 둘르게 하고 왼쪽으로는 관과 영으로 막고 오른쪽으로는 발해가 둘려 있다.`
현재 한국사학계는 위 설명을 고조선.마한에 속했던 지금의 서울 지세를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설명 중에서 한강은 대한민국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인데 화산이니 관령 등은 조금 모호하지만 서울 주위에 있는 험한 산들이려니 여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해라니요?
뜬금없이 발해가 왜 기록되었을까요?
혹시 황해를 발해로 잘못 쓴 것은 아닐까요?
또 오른쪽이란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 볼 때의 기준으로 오른쪽이란 뜻이며 서쪽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면 혹 고대 어느 시기에 대한반도 중앙 지역의 서쪽 바다를 발해渤海라고도 하였을까요?
발해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 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지금의 중국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북쪽에 동서 방향으로 길게 펼쳐진 바다를 말하며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에 의하면 발해와 황해를 가르는 기준은 요동 남쪽 끝에 위치한 여순구였으며 이는 조선 시기 모든 선학들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순을 기점으로 반도의 서쪽으로 나가면서 요하구.대소릉하구를 지나 산해관까지를 발해안이라 하고 그 동쪽인 벽류하구.장하구.대양하구를 지나 압록강까지를 황해안이라 한다
`自旅順循半島以西 歷遼河口大小凌河口 至山海關 爲渤海岸 以東歷碧流河口莊河口大洋河口 至鴨錄江 爲黃海岸`
개략도 - 현 중국지도 개략도
사실 발해가 오른쪽에 있고 서쪽 바다일 수 밖에 없는 곳은 지금의 요동반도 지역 외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 경도인 한양의 위치가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이해하는 대한인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지금의 서울 지세를 묘사한 것이라면 아마도 그냥 바다라고 했거나 서해라고 하였을 것이며 만약 청국의 지리지를 보았다면 황해라고는 했을 것입니다. 어쨋든 지금의 서해를 발해라고 주장할 만한 선학들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의 관찬 지리지 기록에서 한양의 서쪽 바다를 왜 발해라고 하였을까요?
나는 발해 문구가 오기가 아니라 정확한 묘사라고 판단합니다.
강의 북쪽에 있는 지명은 강명과 북쪽 땅의 뜻인 양을 붙쳐 명명하였는데 이러한 예로는 요양.심양 등이 있으며 조선에서도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으로 한양漢陽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 땅에도 한수가 있었고 위례성에서 한수 부근으로 천도한 백제는 한양이라 하지 않고 한성漢城이라 했습니다. 또한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에서 건국되었고 낙랑군은 대한반도 평양 지역이 아니라 발해 북안 지역인 지금의 중국 요녕성 건창 부근에 설치되었었습니다.
따라서 <승람>의 발해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 아니라 발해 북안 지역에서 흥망한 백제 한성의 지세를 정확하게 설명한 것인데 <승람> 편찬자들이 백제의 한성과 조선의 한양을 동일한 지점으로 잘못 인식한 점도 있지만 부주의하게도 백제의 한수가 흘러드는 발해를 자구하나 건들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에 서술된 건국설과 같이 시조 비류.온조 형제 일행이 고구려에서 남하하면서 차례대로 건넌 패수.대수와 천도하려고 건넌 한수 등의 3 개 물길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지금의 서해.황해가 아니라 지금의 산동.요동반도 북쪽에 있는 발해로 들어갔슴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사실 패.대.한수가 모두 흘러들어간 발해도 정확한 설명은 아닙니다. 패.대.한수가 흘러드는 곳은 당시 요동군으로 흘러드는 대요수.염난수가 합쳐진 후 발해로 흘러들기까지의 최하류 동쪽 지역이였고 대요수.염난수 두 물길이 합쳐진 후의 최하류 정황은 정확하게는 만灣이였지만 강폭이 워낙 넓은데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며 강폭이 점점 확대되면서 남쪽에 있는 발해 해안선과의 구분이 모호하여 고대로부터 바다, 요해 또는 창해로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그 대요수.염난수의 위치는 지금의 란하 서북쪽 본류와 정북쪽 지류였습니다.
추정도 - 신채호가 인식한 패수 곧 해성의 어니하와 정약용이 국경 패수로 비정한 압록강 및 평양성 패수로 비정한
능성강 및 백제 한성으로 비정한 저탄강 지류 한수와 고려 남경 위치
백제 시조 비류.온조가 남하하면서 건넜다는 패수.대수.한수가 흘러들어간 물길은 정확하게는 발해가 아니라 대요수.염난수가 합쳐진 후의 만灣이였으며 패.대수가 흐르는 지역은 당시 한나라 낙랑군 지역이였고 비류.온조 형제는 고구려에서 남하하면서 낙랑군 서쪽 끝 지역을 흐르는 패.대수를 건너 낙랑군 경계 밖 마한 땅인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하였던 것입니다. 이곳은 후한 말 공손연이 설치한 대방군 지역이였기 때문에 대방고지라고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 경도 지세 기록에 발해가 나타난 것은 <승람> 편찬자들이 백제의 흥망지를 정확히 인식하지도 못하였고 게다가 너무 게을러서 `발해` 자구를 삭제할 생각도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승람> 경도의 발해 기록 때문에 백제가 지금의 대한반도 서울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최하류 중 압록강과 하류하는 지점에 있는 요동군의 남쪽이며 낙랑군의 서쪽인 마한 땅에서 건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백제의 강역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추정도 - 요서백제.백제 강역 추정도
식민사관 지리관을 맹종하는 한국사학계는 한 시기의 낙랑군 위치를 대한반도 평양 부근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낙랑군의 서남쪽 지역인 대방고지에서 건국하였다는 백제의 위례성 위치도 대한반도 서울 북쪽 지역 어디였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만든 조선 역사 축소.조작 결과물인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실례일 것입니다.
한편 백제 강역이나 한성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 시기에도 약간 혼란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나라의 중심이 지금의 한강 유역이였던 조선 500 여 년 동안 일부 선학들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에 기록된 한수를 당시 한양 남쪽을 흐르는 지금의 한강이라고도 인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지도 - 1823 년 한치윤.한진서가 편찬한 <해동역사>에 실린 삼국분계도
하지만 위 한치윤.한진서의 <삼국분계도>는 명확하게 조작된 것입니다. 비록 조선 일부 선학들이 백제의 한수를 조선의 한강으로 인식했을지언정 대요수.압록강.백두산의 위치는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대요수는 지금의 란하로, 압록강은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 청룡하로, 백두산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조양 북쪽에 있는 노호산 등이였기 때문에 지금의 압록강, 지금의 백두산을 묘사한 위 <삼국분계도>는 일본인의 조선강역 축소.조작 시각일 뿐입니다. 또한 김정호가 간행했다는 <대동여지전도>도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지리관일 뿐입니다.
또 정약용은 백제 시기의 한수를 고려의 개성 서쪽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저탄강 최하류의 동쪽 지류로 인식하였으니 곧 고려 시기의 남경인데 이 지역 역시 낙랑군의 서쪽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백제의 흥망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강역고/백산보>에서 백산을 상세하게 설명하였고 이는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 봉천성의 해룡부.흥경부.장백부 등의 장백산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동시에 봉천성 해룡부.창도부.봉천부.봉황성직예구 등에 기록.설명된 당시의 요하와 압록강이 지금의 란하와 그 동쪽 지류인 지금의 청룡하를 지목한 것이기 때문에 정약용도 요하를 지금의 란하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청국 건륭제 시기 홍양길이 편찬한 <건륭부청주현도지>에 실린 아래 심양도(가칭)와 같이 발해는 정약용의 시대에도 조선 지역의 바다 이름이 아니였습니다.
고지도 - 청 건륭제 시기 편찬된 홍양길의 직예성 산해관.봉천성 성경 심양 지역 지도
추정도 - 위 <건륭부청주도현지>의 심양도가 묘사하는 범위
고조선.마한 땅이며 동시에 백제 초기 강역과 도읍인 위례성.한성은 지금의 란하 최하류 동쪽 강안에 있었으나 고려.조선 시기에는 백제의 패.대.한수 지역이 이미 거란.금.원.명.청국 강역으로 되었고 고대 지리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엉뚱하게도 개성 서쪽을 흐르는 저탄강 최하류의 동쪽 지류인 한수를 패수로 비정하여 고려의 남경이였던 지역을 백제 한성으로 추정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식민사관에 젖은 이 땅의 역사학계는 당 시기의 백제 강역과 지형지세를 설명한 <구당서>에 언급된 소해를 현재의 경기만으로, 대해를 지금의 남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舊唐書/列傳/東夷/百濟國
百濟國本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裏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之越州 南渡海之倭國 北渡海之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 其地自此爲新羅渤海靺鞨所分 百濟之種遂絶
백제국은 원래 부여 별종들의 나라이고 마한 옛 땅에 나라를 세웠었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6200 리 떨어져 있고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있었고 동북쪽으로는 신라에 닿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에,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국에,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고구려에 닿는다. 백제왕은 동.서 2 개 성에 거처했었다. ... 백제 땅은 (황폐.훼손되고 점차 신라가 所據- 차지-하여 여융은 감히 옛땅으로 돌아갈 생각도 못하고 죽자 손자 경이 대방군왕을 습봉받게 된 이후) 신라와 발해말갈에게 나누어지고 결국 백제 종족은 멸절되었다.
이처럼 백제 강역은 대한반도 중앙이 아니고 지금의 란하 하류가 시작되는 지점의 동쪽 강안일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이를 <만주원류고> 찬자들은 해성.개평 등의 지역이였다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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