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 년 6 월  25 일 연암 박지원은 한번쯤 밟아보길 원했던 청나라 땅 연경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삼종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70 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정사가 되었고 이때 정사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신단 일행에 끼어  연경으로 향하는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박지원은 의주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1 박을 노숙한 후 청나라 관문인 책문을 통과하여 봉황성.요양.심양을 지나 지평선만 보인다는 요야도 건너고 이윽고 요하.요택.대릉하를 차례로 건너 산해관을 경유하여 북경에 도착합니다. 


참고도- 현 한국역사학계가 추정하는 의주에서 연경.열하까지의 로정 추정도


 


그런데 사신단이 북경에 도착하고 보니 건륭제의 만수절 연회는 북경에서 북쪽으로 700 리 떨어진 승덕부 열하산장에서 열린다고 하며 급기야 조선 사신단은 열하로 오라는 건륭제의 칙지까지 도착하니 박지원을 포함한 조선 사신단은 늦지 않으려고 매일 밤까지 강행군하는 4 박 5 일의 길을 달려 열하에 도착합니다. 이 열하까지의 로정은 조선 사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밟는 것이라 합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막북행정록>에서 북경에서 열하까지의 로정을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설명하였습니다.


熱河皇帝行在所...在皇城東北420里 出長城200餘里 按志漢時要陽白檀2縣屬漁陽郡 元魏時密雲安樂2郡邊界 唐時爲奚地...今我使倉卒被詔晝夜無行5日始達默計途程己非400餘里 及入熱河與山東都司학成論程里...初至熱河者成言大約口外去京師700餘里...聖祖特爲剪站爲400餘里 其實700 餘里...自古北口驛置北出50里曰靑松爲1站...又50里曰欒河爲1站 今渡欒河至熱河爲40里則自古北口至此摠計256里...

 

하에 있는 황제행재소는 황성에서 동북쪽으로 420 리 떨어져 있는데 장성을 나가 200 여리 지점이다. 지리지를 살펴보면 한 시기에는 요양.백단 2 현 지역이며 어양군에 속했고 원위 시기에는 밀운.안락 2 군의 변두리 경계였고 당 시기에는 해족의 땅이였다....지금 우리 사신들은 창졸간에 조서를 받아 주야를 가리지 않고 5 일을 달렸다. 도착하여 가만히 도정을 살피니 400 여리가 아니였다. 또 열하에 들어 산동도사 학성과 리수에 대해 이야기해 보니...처음 열하에 이른 자들이 말하기를 대략 구 밖에서 경사까지는 700 여리라 하였다. 성조 강희제가 특별히 400 여리로 참을 나눈다고 하였지만 실은 700 여리에 이르렀다...고북구로부터 역을 설치하여 북쪽으로 50 리 나가 청송이라 하여 1 참으로 삼고...또 50 리 떨어져 란하를 1 참으로 하였다. 지금 란하를 건너 열하에 이르기를 40 리이니 고북구부터 이곳까지 총 256 리다...



그런데,

우리 대한 역사에서 퇴치.박멸해야야 할 가장 시급하고 큰 문제는 왕검조선.단군부여 등을 신화.전설로 취급하는 것 보다는 지리 부분에 있으며 그 부분의 문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위의 박지원 등의 사신단 행로라 생각합니다.


즉 중국 고대인 한.진.수.당 시기는 물론이고 요.원.명.청 시기의 란하와 요하를 지금의 란하,요하로 인식하려는 인식입니다. 명.청 시기의 요하를 지금의 요하로 이해하면 위와 같은 사신단 행로가 그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동시에 고려의, 거슬러 올라 고구려 시기의 압록강도 지금의 압록강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 서기전 108 년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낙랑군 위치도 지금의 평양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식민사관이고 중국이 추진한다는 동북공정의 최종 목표입니다.  


추정도 - 1780 년 박지원이 경유한 의주.심양.산해관.북경.열하



      


하지만,

1780 년 박지원이 밟은 의주.심양.산해관.승덕은 위 추정도에 적색으로 표시한 지점이였고 사신행로도 적색 실선이 시작이고 끝이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강역고/조선고>에서 언급한 북경부터 압록강 의주까지 2100 리라는 리 수도 바로 위의 적색 실선의 리 수였던 것입니다. 


즉 1780 년 당시 압록강.요하.란하는 아래 추정도에 적.황색으로 표시한 물길이며 이는 서기전 75 년부터 청국이 멸망하는 1911 년까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변화라면 10 세기 초 거란.요국 시기에 전한 시기부터 불려온 대요수 즉 아래 추정도의 황하潢河로 표시된 물길을 개칭한 것이고 동시에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에 처음으로 나타난 후 당 시기 두우가 <통전>에서 두번째로 언급한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를 요하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이는 대요수.염난수를 요수의 본류와 지류로 인식하던 것을 지류와 본류로 재인식하는 것에 그친 것일 뿐 그 최하류가 바뀐 것은 아니였습니다.  


추정도 - 1780 년 당시 압록강.황하.요하.란하 위치





그런데,

내가 위 로정도를 보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한국사학계가 난하라며 흐름 방향과 경유지 및 최하류 지점을 거의 정확하게 묘사하였으면서도 어찌 황하의 경유지와 똑같이 표시된 지금의 란하에 대해서는 한 줄의 의문이나 검증 없이 명.청 시기의 란하가 맞다고 수긍하는 것입니다. 



개략도 - 현대 중국지도에 표시된 란하






중국 25 번째 정사라는 청나라 정사 <청사고/지리지> 기록에는 경사 즉 지금의 북경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680 리, 북쪽으로 1200 리, 서쪽으로 550 리, 남쪽으로 1430 리 떨어진 지점까지의 지역을 구획하여 직예성을 설치하였다고 설명되어 있고 이 직예성의 동쪽 끝 지역을 흐르는 가장 크고 긴 물길은 독석.고원 등에서 발원하여 물음표 `?`와 같이 반원을 그린 후 동남쪽으로 흘러내려 갈석산 남쪽을 지나 발해로 흘러든 2100 리 길이의 란하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  란하의 중류 쯤에는 승덕부가 설치되었고 서쪽에는 순천부 밀운현에 속하며 만리장성이 통과하는 고북구가, 동쪽에는 열하산장이 있는 승덕부의 열하구가 설치되었으며 란하 하류의 서쪽에는 준화직예주의 풍윤현이, 동쪽에는 영평부 노룡현이 설치되었고 노룡현에서 동북쪽으로 170 리 떨어진 곳에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1780 년은 물론이고 1911 년까지도 란하는 지금의 란하 중.하류 서쪽 지역에 별개로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중국지도에는 1911 년까지도 흐른 란하의 중류와 하류가 지워져 있는 것입니다.


명백한 조작입니다. 


추정도 - 명.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 위치



 

지금의 란하는 명.청 시기의 란하 상류와 황하 발원지를 인위적으로 연결하고 그 이름을 란하로 개칭한 조작된 물길이며 조작자들은 조작질을 들키지 않으려고 중국 역대의 지리지 기록에 나타난 요하도 동쪽으로 옮겨 요하 기록과 비슷한 물길을 찾아 요하라고 새롭게 명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동.조작은 일본이 만든 꼭두각시 만주국의 1934 년 지도부터 공식적으로 나타났고 지금의 중국지도는 만주국지도를 그대로 습용한 것입니다. 


- 1934 년 만주국지도




한편  한국사학계가 제시한 사신단의 로정도에 난하 즉 란하가 정확한 위치에 표시되었다는 것은 한국사학계도 란하가 이동.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명.청 시기의 란하를 정확한 위치에 표시하면서도 지금의 란하는 그려넣지도 않았는지.

구역질 납니다.


한편 아래 지도는 청말민국초 양수경이 편찬한 <역대연혁지도>에 실린 북위형세도인데 바로 청 시기의 란하 부근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한서> <수경주> <청사고>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수경주>의 난수濡水가 <요사> 지리지부터 란하로 개칭되었는데 양수경도 이를 명확하게 이해하였기 때문에 난수와 란하(水+欒河)를 병기한 것입니다.

 

 

고지도 - <역대연혁지도> 북위형세도에 표시된 춘추전국의 요수,한~위 난수, 요~청 란하

 

 

 

위와 같이 1900 년 전후 시기에도 란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밀운.고북구 동쪽 아주 가까운 지점을 동남쪽으로 흘러내려 만리장성을 관통한 후 노룡현 서쪽을 지나 발해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또한 란하의 상류 지역 동쪽인 선화부 위장구 부근에서 황하가 발원한다고 하였고 이 황하는 동남쪽으로 흐르며 승덕부의 적봉현.건창현을 경유하며 영금하.노합하를 받아들인 후 조양으로 흘러가 대릉하를 받아들인 후 봉천성 금주부 지역으로 흘러가 요하의 하류로 합쳐진다고 설명되어 있으며 이 요하의 하류는 지금의 란하 하류와 같았던 것입니다.


1920 전후하여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한 이유가 바로 위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만약 지금의 중국지도에 표시된 란하가 <청사고/지리지> 기록의 그 란하가 맞다고 가정하면 아래 추정도의 황색 1,2 물길과 같이 란하 중류인 지금의 승덕 동쪽 가까운 지점을 황하가 동남쪽으로 흘러내려 조양 부근을 거쳐 대릉하와 합쳐진 후 요하 하류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추정도 - 현대 중국지도상 청 시기의 황하가 흘러야 하는 지역




그런데 지금의 중국지도에는 이러한 황하는 흐르지 않습니다. 사실 흐를 수가 없습니다. 보다시피 산줄기가 흐르는 방향이 엄연히 있는데 어찌 가로질러 흐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지금의 적봉 지역 부근에 황하의 남쪽 지류인 노합하가 동북쪽으로 흐르게 표시되어 있고 노합하가 흘러드는 물길을 서요하라 하며 <청사고/지리지> 기록의 황하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얼척이 없습니다. 


현대의 중국인은 물론이고 일본이 패전한 1945 년 직후의 중국인들도 지금의 동북 3 성 지역을 인수받으면서도 지명이동되고 지도조작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 앞에 놓인 거대한 이익을 차지는 하였지만 그것이 역사적 장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사학계의 핵심도 일본이 저지른 지명이동.지도조작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는 있다고 봅니다. 다만 광복 후 70 년간 주장해온 내용을 한 순간에 스스로 뒤집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는 것을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한스러울 것입니다. 

 

저들이 대체 무슨 수로 식민사관을 몰아내고 동북공정을 비판할 수 있겠는지 아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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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780 년 청 건륭제 만수절 축하 사절단을 따라간 박지원이 <열하일기/도강록> 6 월 18 일 기록.

 

``<당서>를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 리요,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도 한다고 썼고,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나, 이러고 보면 무엇을 표준 삼아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일이다. 또 <지지>에는,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 70 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개평현으로부터 동으로 수암하秀岩河까지 300 리요, 수암하로부터 동으로 200 리를 가면 봉황성이라고 했으니, 이것으로써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서 말한 평양과 안시성의 거리가 약 500 리쯤 된다는 것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우리 나라 인사들은 기껏 안다는 것이 지금의 평양뿐으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을 했더라 하면 이 말은 꼭 믿고, 평양에 정전이 있었더라 하면 이 말은 넙적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면 이 역시 믿으나 만약에 봉황성이 평양이었더라 하면 깜짝 놀랄 것이요, 더구나 요동에도 평양이 있었느니라 한다면 아주 괴변으로 알고 야단들일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래 조선의 옛 땅인 것을 모르고, 숙신.예맥과 동이의 잡족들이 모두들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던 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오랄,영고탑,후춘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옛 강토임을 모르고 있다.

 

애달프구나!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어 붙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아 혹은 압록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그러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어 언제나 사적을 따라다니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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