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서기 344 년 요서 지역에서 굴기한 모용선비가 세운 연국 기실참군 봉유가 연왕 모용황에게 올린 봉표 내용 중 일부입니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
구려.백제 및 우문.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를 옮겼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오고자 한 것이 아님에도 왔으니,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 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럽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종족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진서/재기/모용황>
위 기사에서 우문.단부는 선비 단석괴에서 파생된 같은 종족이고 모용씨와 같이 요서군 유성현의 부근 지역이 거주지이니 문제될 것이 없는데 문제는 고구려.백제의 군사가 모용황 도성인 한 시기 요서군 유성현 지역인 용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봉유가 위 봉표를 올리기 2 년 전인 342 년 겨울 10 월 모용황은 극성에서 용성으로 천도한 후 배후에 있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이 수리한 환도성과 새로 축성한 국내성 및 평양성 등을 모두 부수고 궁실을 불태웠고 부고에 있던 누대의 보물과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 주씨,왕비 및 남여 5 만여구를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연유로 봉표문에 고구려 병세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요서군 용성에 나타난 백제 병세는 한.중.일 3 국 역사학계 주장대로 백제가 지금의 대한 땅 임진강.한강 유역에서 건국하였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록입니다. 중국 정사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하면 될까요?
더군다나 낙랑군 위치 비정으로 지금도 시끄럽고 또 신채호 선생이 교시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는 짧디 짧은 문장하나도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하면서도 무시한다면 그러한 자들을 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구려를 비롯하여 백제도 지금의 란하 중.하류 동쪽 지역에 있었습니다. 또한 두 나라의 경계라는 소해도 이 땅의 경기만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최하류의 동쪽 지류인 고구려의 동압록이며 조선 시기 압록강의 최하류였을 뿐이고 실상은 만灣이며 진시황 시기부터 문헌에 기록된 바다의 동쪽 일부인 小海소해였던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에 있던 백제가 서쪽으로 바다.灣을 건넌 것이며 정확하게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를 서쪽으로 건넌 것입니다.
또한 백제는 봉유의 봉표 2 년 후인 346 년 기사에도 나타납니다.
永和二年 春 正月...初 夫餘居于鹿山?百?所侵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 燕王?遣世子俊?慕容?慕容恪慕?根三?? 萬七千??夫? 俊居中指수? 事皆以任恪 遂拔夫?? 其王玄及部落五萬?口 而? ?以玄????? 妻以女
346 년 봄 정월...처음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가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모용각,모여근 등 세 장군과 만 칠천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토록하엿다. 준은 영내에서 지시를 하였고 군사의 일은 모용각에게 일임하여 드디어 부여를 소탕하여 그 왕 현과 부락 오만여 구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 현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었다.
<자치통감/ 진기/ ?종성황제 하 영화2년>
위 백제도 당연히 요서 지역으로 진출한 백제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여는 현토군 북쪽에 위치했었고 서기 285 년 선비 모용외에게 격파당한 후 일부가 약간 남쪽인 요동군을 거쳐 요서군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부여 일부 세력의 요서 지역 이동은 당연히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남쪽 요서군 지역으로 이동한 일부 부여 세력을 모용황의 용성에 포로로 있는 백제 병세가 아닌 별도의 백제 군사가 346 년에 또다시 녹산 곧 백녹산 혹 백랑산이라고도 추정되는 요서군과 가까운 우북평군 북쪽 지역으로 옮겨온 부여를 공격하여 연왕 모용황 쪽으로 쫓아냈고 모용황이 또다시 부여를 소탕하였다는 기록입니다.
백제가 대한 땅 중앙에 있었다면 당연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한편 아래는 청말민국초 사람인 양수경이 편찬한 <역대연혁지도> 중 서진 시기 낙랑군을 요동 호족 장통이 요동군 지역으로 옮긴 정황을 표시한 <4연강역도>라 하지만 일본에 경도된 양수경이 낙랑군 이치 지역을 지금의 요동만 지역으로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지도라고 판단합니다.
조작도 - <역대연혁지도/4연강역도>
하지만 아래 추기한 것과 같이 한 시기 요동군을 흐른 1250 리 길이 대요수는 동남류하는 물길이였으며 거란.요국 시기 이후 황하로 개칭되었는데 그 황하는 당연히 한 시기 요동군의 망평.양평.방현.안시현 등의 지역을 경유하여야 하고 우북평군에서 발원한 후 동북쪽으로 흘러 요서군 유성현 북쪽으로 지나 동남쪽으로 휘어 요동군 방현으로 흘러오는 백랑수 곧 거란.요국 이후의 대릉하와 합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수경은 동남쪽으로 흐른 대요수.황하를 생략하고 거란 요국 시기부터 요하로 개칭된 한시기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를 요하로 표시하고 마치 대요수였고 지금의 요하처럼 인식시키려 한 것입니다. 결국 1870 년 초부터 일본 명치왕군부가 조선역사를 축소시키려고 꿈꾸던 엉뚱한 지리를 양수경이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 교정도
그러나 위 <4연강역도>가 묘사하는 범위는 지금의 요동만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중류 아주 좁은 지역으로 아래와 같이 적색 사각형 지역을 묘사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란.요국 시기의 지리를 기록한 정사 <요사/지리지>중경대정부 서문에는 요서백제.백제군을 지목할 수 있는 구절이 한 글자가 지워진 채 전해 옵니다.
中京道大定府 虞爲營州夏屬冀州周 在幽州之分 秦郡天下是爲遼西 漢爲新安平縣漢末步奚居之 幅員千裏多大山深穀唨險足以自固魏武北征從兵大戰 降者二十餘萬 去之松漠 其後拓拔氏乘遼建牙於此 當饒樂河水之南溫兪河水之北 唐太宗伐高麗 駐蹕於此 部帥蘇文從征有功 奚長可度率衆內附 力量饒樂都督府 咸通以後거丹始大 奚族不敢復抗 太祖建國...중략...有七金山馬盂山雙山松山土河統州十縣九 大定縣白( )故地...
중경도 대정부 땅은 우 시기에는 영주, 하 시기는 기주, 주 시기에는 유주라 하였고 진 시기의 군제 하에서는 요서군이라 하였으며 한 시기에는 신안평현으로, 한 말에는 해족이 거주하였다. 폭원이 천 리에 이르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험하여 지키기가 쉬웠다. 위나라 조조가 북벌하여 큰 싸움에서 20 여만 명을 포획하니 송막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탁발씨가 지휘소를 세웠으니 요락하수의 남쪽이며 온유하수의 북쪽 땅이다. 당 태종이 고려를 침공할 때 주필하던 곳이 이곳이였고 당시 부의 우두머리 소문이 이 전역을 종군하여 자못 공이 있었다. 해족의 장 가도가 족속을 이끌고 내부하니 살펴 요락도독부를 맡겼다. 함통(860~873) 이후 거란이 세력을 키우니 해족은 다시는 항거하지 못했다. 태조(907~925)가 건국하고....중략....칠금산.마맹산.쌍산.송산이 있고 토하가 흐르며 10 주와 9 현을 통할한다. 대정현은 옛 백( )의 땅이다...
위 `大定縣白( )故地` 원문의 괄호에는 `濟`일 수 밖에 없고 16 국 시기의 <송서><남제서><양서><남사><통전> 등에 백제군이 설치된 곳으로 인식할 수 있는 요서군과 진평군 진평현은 거란 요국 시기의 대정현이며 <요사/지리지>를 편찬한 원나라 사람 탈탈이 추정한 요서군 신안평현은 난수.란하의 최하류 지점이기 때문에 부정확한 것이며 난수.란하의 하류 동쪽 지점이며 대요수.황하 중류의 남쪽이고 백랑수.대릉하 중류의 약간 북쪽 지점이며 유성현.영주.조양의 서쪽 지점으로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 <지리도> 부분확대도
또 해족이 이땅을 차지하였다는 기록은 수.당 시기부터였고 요락하수는 청 시기의 영금하이며 직예성 승덕부 적봉현 남쪽 지역을 흘러 평천에서 북류하는 노합하와 함께 건창현으로 흘러가 황하 곧 1250 리 길이 대요수로 합류하는 물길이기 때문에 요 시기의 중경 대정부 대정현 위치는 역시 요국 시기 중경도에 속한 아래 흥중부 설명과 같이 백랑수.대릉하의 하류 쯤인 한 시기 요서군 유성현, 북위.수.당 시기 영주, 청 시기 직예성 승덕부 조양현 등의 약간 서북쪽 지역이였습니다.
흥중부는 ... 옛 고죽국 땅이며 한 시기에는 유성현이며 모용황은 유성 북쪽, 용산 남쪽이 복덕있는 땅이라 여겨 용성을 쌓고 궁묘를 지어 천도하고 화룡궁이라 하였으며 모용수가 돌아와 거주했다. 후에 풍발에게 멸망당했고 원위가 취하여 요서군을 설치했고 수 시기에는 고보녕을 평정하고 영주를 설치했다. 수 양제는 주를 폐하고 유성군을 설치했으며 당 무덕(618~626) 초에 영주총관부를 두었고 후에 도독부로 개칭했다. 만세통천(696) 중에 이만영에게 함락되고 신룡(705~706) 초에 유주로 교치하였고 개원 4 년(716) 다시 유성을 설치하고 8 년에 서쪽 어양으로 교치하였다가 10 년에 다시 유성을 두었다. 이후 해족이 거주하였고 태조가 해 및 연민을 포획하여 성을 축성하려 한지방에게 명하여 땅을 골라 유성을 수리케 하였다....하략
興中府 本覇州彰武軍節都 古孤竹國 漢柳城縣地 慕容황?以柳城之北龍山之南福德之地 乃築龍城構宮廟 改柳城爲龍城縣 遂遷都號曰和龍宮 慕容수復居焉 後爲馮拔所滅 元魏取爲遼西郡 隨平高保寧置營州 煬帝廢州置柳城郡 唐武德初開營州總管府 尋爲都督府 萬世通天中陷李萬榮 神龍初移府幽州 開元四年復置柳城 八年西徙漁陽 十年還柳城 後爲奚所居 太祖平奚及부燕民將建城 命韓知方擇其處乃完葺柳城... <요사/지리지> 중경도 흥중부
결국 전한 시기 이후 동호의 후예라는 오환과 단석괴의 선비가 차지하였던 지역으로 단부.우문씨 등의 선비족이 있었으며 이후 해.거란으로 개칭되었던 것이니 요서군 유성현 북쪽이며 거란.요국 흥중부 북쪽에 점거.거주하며 `白( )`이라 쓸 수 있는 종족이나 국명으로는 백제 외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래는 비록 일본이 조작하였지만 조작 부분은 지도의 극히 일부분인 황하 중.하류만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되는 19 세기 초 청국인 이조락 등이 간행한 지도입니다.
조작도 - 1832년 초간된 청국의 <황조일통여지전도>를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하였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주)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적봉.승덕.조양부 기록에는 황하가 동남류하며 적봉직예주와 조양부 건창현을 지나 조양부로 흘러내린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위 1865 년 일본 간행 <황조일통여지전도>의 동류하는 황하는 변조.조작된 것입니다.
위 지도에서 황하 중.하류의 원래 경유지를 추기하였듯이 송.요 시기에 간행된 <지리도> 묘사와 같이 대릉하 곧 백랑수가 건창현에서 발원하여 요서군 유성현 북쪽인 용성 곧 영주.조양을 지난 후 동남류하여 요동군 방현인 봉천성 금주부 금현 부근에서 대요수였던 황하와 합류해야 하며 대릉하와 황하 사이에 영금하 곧 요락하수가 흘러와 황하로 합류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란하 상.중류 서쪽 지역의 지형지세는 남쪽인 바다 가까운 곳이 당연히 낮기 때문에 <지리도>와 같이 모든 물길이 동남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5 년 일본간행이라는 <황조일통여지전도>의 황하는 그 지형지세를 무시하고 동쪽으로만 흐르게 변조한 것입니다.
한편 중국 사서 중에서 백제흥망지와 요서백제 지역을 추정하면서 명확한 지명을 언급한 것은 아마도 1777 년 청나라 아계 등이 편찬한 <만주원류고>의 아래 글일 것입니다.
마한에 속했는데 진대 이후로 마한의 옛 땅을 전부 차지하고, 요서.진평 2 군을 겸유해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 마단림이 ``진평은 당나라 유성과 북평 그 일대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실은 지금 금주.영원.광녕의 경내이다.
백제의 지경을 상고해 보니,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금주.의주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海.蓋에 걸쳐있고, 동남쪽으로 조선의 황해.충청.전라도의 제도에서 끝이나,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쭉하다. 따라서 유성과 북평을 기준으로 신라가 있는 곳을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게 되지만 경상과 웅진을 기준으로 이를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있게 된다. 또 북위 때 백제가 물길과 공모해서 힘을 합해 고구려를 취하려고 했던 것을 보더라도 동북쪽이 역시 물길과 연접해 있었던 것이다.
<만주원류고> 장진근역주 144.145 146 쪽
<만주원류고> 찬자 아계 등이 언급한 조선의 황해 충청.전라도 등의 지역은 1621 년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에 실린 <조선도> 표시와 같이 조선 시기가 아니라 고려 시기의 황해.충청.전라도이며 그래야만 백제의 강역이 백제군을 제외하고 해.개주부터 남쪽으로 사비성까지 동서 450 리 남북 900 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백제 강역을 현 중국전도에 표시해 볼까요?
요서군 혹은 진평군 진평현에 설치했다는 백제군 위치는 위의 1,2 중 어느 지역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지역이든 백제 한성과 사비성이 한반도 서울과 공주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산해관과 희봉구 지역이기 때문에 백제군 설치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국사 > 조선.고려,남북.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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