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 년 청국인 홍양길이 편찬한 <건륭부청주현도지>에 실린 봉천.길림.흑룡강성도
1780 년 청 건륭제 만수절 축하 사절단을 따라간 박지원이 <열하일기/도강록> 6 월 18 일 기록.
``<당서>를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 리요,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도 한다고 썼고,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나, 이러고 보면 무엇을 표준 삼아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일이다. 또 <지지>에는,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 70 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고, 개평현으로부터 동으로 수암하秀岩河까지 300 리요, 수암하로부터 동으로 200 리를 가면 봉황성이라고 했으니, 이것으로써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서 말한 평양과 안시성의 거리가 약 500 리쯤 된다는 것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우리 나라 인사들은 기껏 안다는 것이 지금의 평양뿐으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을 했더라 하면 이 말은 꼭 믿고, 평양에 정전이 있었더라 하면 이 말은 넙적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면 이 역시 믿으나 만약에 봉황성이 평양이었더라 하면 깜짝 놀랄 것이요, 더구나 요동에도 평양이 있었느니라 한다면 아주 괴변으로 알고 야단들일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래 조선의 옛 땅인 것을 모르고, 숙신.예맥과 동이의 잡족들이 모두들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던 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오랄,영고탑,후춘 등지가 본디 고구려의 옛 강토임을 모르고 있다.
애달프구나!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어 붙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아 혹은 압록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그러들고 만 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군데 붙박이로 정해 두고 패수는 앞으로 물려내어 언제나 사적을 따라다니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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