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2,3 번째 정사 <한서/지리지>와 <후한서/군국지>에 기록.설명된 요동군이였으며 25번째 정사 <청사고/지리지>에 기록.설명된 봉천 성.부 위치는 어디였을까요? 

 

- 대한민국 경인문화사에서 2007 년 발간한 <중국전도>

 

 

<한서/지리지>

遼東郡 秦置屬幽州 ... 襄平 有牧師官 ...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 房 ...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 險瀆 ... 安市 ... 西安平 ...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 沓氏

<후한서/군국지>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 ... 襄平 ... 望平 ... 安市 ... 西安平 ... 沓氏

玄兎郡 ... 高句麗 遼山 遼水出  ... 西蓋馬 ... 遼陽 ...

<청사고/지리지>

奉天 禹貢靑冀二州之域 舜析其東北爲幽營 ... 周幽州 明遼東都指揮使司 淸天明十年三月 定都瀋陽 尊爲盛京 ...

奉天府 ... 奉天省治 西南距京師1470裡 ... 承德 明瀋陽中衛 康熙三年置縣 ... 渾河在南 ... 遼陽州...府南120裡...北太子河...

 

 

서기전 202 년 유방이 세운 한漢에서 설치한 요동군 위치는 아래와 같이 적색 원으로 표시한 지역이였습니다.

 

 

 

즉 <후한서/군국지> 기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곳이며 <한서/지리지> 기록과 같이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2100 리 길이 염난수 등이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1644 년 후금이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진입한 시기부터 1932 년 일본이 만주 곧 봉천군벌 장학량을 공격한 때까지 청국이 설치한 봉천성 봉천부 위치는 아래와 같이 전한前漢이 설치한 요동군과 같은 곳이지만 남북으로 약간 길죽하고 면적은 넓었습니다. 

 

 

 

그러면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열하.폭하.청룡하 등이 청 시기는 물론 한 시기에도 그 위치에서 물길 변화 없이 똑같이 흘렀을까요?  

 

아마도 넓은 지역에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서 물길까지도 변동이 일어났다면 모르겠지만 2000 여년 이건 만 여년이건 물길은 당연히 똑같이 흘렀을 것입니다. 북경 이동 지역의 지리를 설명.기록한 2000 여년 간의 중국 정사급 지리지 기록에는 큰 지진이 있었다거나 물길이 변동되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그런데 청 시기의 란하.열하.폭하.청룡하 등의 위 <중국전도> 표시와 같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서기 6 세기 초에 편찬된 <수경주> 기록이나 <한서/지리지>부터 1929 년 편찬된 청국 정사 원고라는 <청사고/지리지>까지의 기록에는 란하가 타원형 모습의 상류를 제외하고 그 이하 중.하류는 아래의 점선 표시와 같이 지금의 란하 중.하류보다 더 서쪽에서 흘러내렸었습니다. 란하는 한부터 당 시기 까지의 난수가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것입니다.

 

 

 

위와 같이 흐른 난수.란하를 대략 정확히 묘사한 고지도도 전해집니다.

 

- <직예전도>

 

 

위는 <직예전도> 명칭으로 전해지는 고지도의 북쪽 부분만이며 비록 도면의 오른쪽.위쪽 부분에 묘사된 노합하.서라목륜하 부분은 뻥튀기수법으로 동쪽으로 크게 늘려 변조된 것이지만 란하 상.중.하류의 묘사만큼은 <수경주/난수>와 <청사고/지리지> 기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아래의 <북위형세도>에도 란하의 중.하류가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 <역대연혁지도/북위형세도> 1900 년 전후 청인 양수경이 간행

 

 

결국 한 시기부터 만주국 건국 직전까지 약 2100 여년 동안 난수.란하 중류 이하의 동쪽 지류인 무열수.열하와 <수경주/난수>에 한 시기 요서군의 양락.비여.영지 3 개 현을 경유하며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죽성 북쪽을 지나면서 서쪽으로 꺽여 난수로 흘러든다고 설명.기록된 현수玄水 곧 청 시기의 청룡하 등도 아래의 추가 점선 표시와 같이 대략 남쪽으로 흘러 점선 표시의 란하로 흘러 들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열하는 청 시기 직예성 승덕부 부근을 흐른 열하일 수 없으며 승덕부 위치 또한 지금의 란하 중류 지점에 표시된 큰 글자의 승덕이 아닙니다. <청사고> 기록과 같이 서남쪽으로 북경까지 1470 리여야 하는 봉천성 봉천부 치소인 성경 심양 승덕현은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작은 글자의 승덕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직예성 영평부 속현인 노룡현이나 유관.산해관 및 갈석산 위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중국 정사 지리지 기록과 판이한 지금의 란하 등은 어떻게 표시되게 된 것일까요? 

 

지금의 란하는 1873 년 쯤부터 일본 명치유신의 3 걸 중 우두머리인 서향융성이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밀정을 파견하고 지리 정보를 수집하여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 3 물길을 란하 1 물길로 변조한 엉터리 습작지도를 간행.홍보하면서 시작된 물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란하의 중.하류가 2000 여 년 간 대요수.황하, 염난수.요하이기 때문에 지금의 란하 중.하류 동쪽 강변 지역에 승덕현.해성현이 표시되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875 년 제작하였다는 아래의 지리 조작 후의 엉터리 지도를 전세계에 뿌리고 홍보하였습니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 년 일본 육군 참모부 간행

 

대한민국에서 세금을 퍼부어 운용.유지하는 동북아재단 산하 독도연구소는 위 엉터리 변조 지도를 `일본 공식 관찬 지도`라는 설명까지 덧붙쳐 홈페이지/연구/고지도에 당당하게 게시하고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