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 중 일부다.

 

나는 재앙이 닥쳐왔을 때 태어나 나라 망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차마 죽지 못하고 마침내 도망쳐 나왔다. 경술년(1910) 모월 모일 아침에 한성을 떠나 저녁에 압록강을 건너 다시 북쪽으로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가 위례성(慰禮城)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머물렀다. (박은식이 환인현으로 망명한 것은 졸본성-현재 오녀산성일 것이다) 고금을 살펴보니 허전한 느낌이 들고 안타까워 오랫동안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역 땅에 도망와 있으니 사람을 대하기가 점점 부그러워지고 길가 아이들과 시장 사람들조차 모두 나를 망국노라 욕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비록 넓다고는 하나 이런 욕을 짊어지고 어디로 돌아가리오. 때는 혼하(渾河)에 가을이 저물어 쑥은 꺾어지고 풀들은 시들었으며, 원숭이도 슬피 울고 부엉이도 울어댄다.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런 정경을 바라보고 더울 서글퍼져 견딜 수가 없다.

 

저자는 위례성이 압록강 북쪽 강을 거슬러 오르면 내려다 보인다고 하였고 근처에는 혼하가 흐르는 듯이 말하고 있다.

저 위례성은 백제의 첫도읍을 말한 것일까?

 

그렇다.

하지만 백제의 초도 위례성이 아니라 천도한 한성이다.

즉 <조선왕조실록/성종조>에는 양성지가 북경에서 30 일 정에 한도漢都가 있다고 하였고 1656 년 진주정사 임무를 띄고 북경을 다녀 온 인평대군의 일기인 <연도기행> 귀로의 30 일 정은 압록강 북쪽의 봉황성이였다.

결국 북경에서 위례성까지의 거리는 북경에서 압록강 북쪽 약 120 여 리 떨어진 봉황성.책문까지의 거리와 같다는 얘기다.

 

- 1910 년 지리

 

- 서기 600 년 전후 지리

 

 

- 무제도,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간행한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고지도 제목: 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위와 같았던 지리를 한국역사학계는 아래와 같았다고 왜놈 머슴질을 서슴치 않는 주댕이질을 하고 있고 중국 동북공정의 무지막지한 주장을 한 마디 반론도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고 있다.  

 

- 한국보물 제 1537-2 호로 지정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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