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사 현장
한.화.일 3 국 역사학계는 이조선 말기 이조선.청.아라사 강역과 지리가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 및 흑룡강 등을 경계하였다고 합니다.
- <화국전도> 1910 년 추정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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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모든 이들도 이조선의 북쪽 경계선이 지금의 압록.두만강이라고 인식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압록강 하류 신의주에서 서북쪽으로 본계.요양.북진을 지나 산해관까지의 지역이 청국 시기 봉천성 봉천.금주 2 부와 직예성 영평부 영역이였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200 여 년 전 화국의 고대국 전한이 설치한 요동군 위칯도 지금의 요하 하류 지역이였고 지금의 요하도 당시의 요수였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결국 지금의 한반도 평양이 이조선의 평안도 평양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또한 고려의 서경이였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이전은 당연히 화국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 지역이였고 그 이전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혹 고조선이 지금의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 인식은 적지 않은 대한민국 시민들로부터 식민사관.동북공정 인식이라며 비난과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체 어떤 근거와 이유로로 비난.비판할까요?
비난.비판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 역사와 지리를 따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즉 현재의 지리는 고대.중세는 물론이고 근세의 지리와도 일치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지리를 토대로 역사를 이해하려고 하니 혼란과 시비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윤내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고조선연구>를 저술한 윤내현은 고조선을 단군 왕검께서 세운 조선으로만 정의하면서 고조선의 첫 출발은 한반도 평양 인 아사달 고을 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하며 도읍명도 아사달이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세력이 커지자 지금의 요동 본계로 추정되는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성이라 하였고 조선이란 국명을 사용하였고 더욱 커진 힘을 바탕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지금의 산해관 부근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였다고 합니다. 대략 서기전 1000 년대 쯤 기자가 동래하여 백악산 아사달 지역에 이르자 거수국으로 삼고 지금의 북진 부근인 장당경으로 천도하였고 서기전 2 세기 초 기자조선을 사탈한 연인 만에 이어 손자 우거까지의 시기에 세력이 강대해지자 영역도 동쪽으로 진출하여 지금의 대릉하 하류에까지 이르렀고 이후 전한 무제가 우거를 제거하고 지금의 요하 하류 서쪽의 통상 요서 지역에 4 군을 설치하자 고조선은 장당경에서 아사달 곧 한반도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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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평양.왕검성.아사달.험독 등은 단군이 통치한 조선의 도읍이라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설명된 왕검조선의 도읍지였던 아사달.백악산 아사달.장당경 3 곳의 위치를 <사기집해><사기색은>의 주석가들 중 서광이 험독과 관련하여 언급한 창려 곧 요서군의 교려현과 <요사/지리지><대청일통지> 등에서 부실하고 부정확하게 추정한 요동군 험독현 위치라는 지금의 북진과 본계 2 곳 및 현 <화국전도>에 표시된 한반도 평양을 합하여 4 곳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산해관.갈석산 부근의 백악산아사달 추정지를 서기전 108 년에 한나라가 낙랑군을 설치한 곳이고 지금의 요동과 요하는 전한이 설치한 요동군.요수와는 다른 별개의 요동.요하였다고 합니다. 즉 서기전 195 년 쯤 준왕조선땅을 사탈한 연나라 망명인 만滿이 영역을 동북쪽으로 확장시켜 수천 리에 이르자 동쪽 멀리 있는 땅과 물길의 뜻이라는 요동.요하 명칭이 지금의 위치로 자연적으로 이동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윤내현의 주장이 한.화.일 3 국 역사학계 주장과 다른 것이라면 낙랑.요동.요서 3 개 군 위치를 지금의 산해관과 그 서쪽지역으로 해석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전한 시기보다는 약간 축소.후퇴되었을 후한의 정사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낙양에서 요서.요동.낙랑 3 군까지는 3300 리, 3600 리, 5000 리 떨어진 곳이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서기전 3 세기 말 경 언급된 부.준왕의 조선 왕검성이였고 준왕을 속여 조선땅을 사탈한 연나라 망명인 만과 손자 우거가 점거한 왕검성이였으며 서기전 108 년 한나라 무제 유철이 낙랑군 위치가 진장성 동단 곧 후일 임유.산해관이 축성되고 갈석산이 있는 요서군의 임유현 지역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요동군과 별개의 요동.요하가 있었다는 화국 기록은 전무합니다.
게다가 한국 사서인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단군세기><동국통감><규원사화> 등에 단군 왕검께서 세운 조선 곧 왕검조선의 역년을 `壽1908년``47 대 1205 년 또는 2096 년` 등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장당경에서 아사달로의 천도사유와 시기를 한나라 무제 유철이 한4군을 설치한 때문이라 단정한 것은 윤내현의 고조선, 정확하게는 왕검조선에 관한 전반적인 인식이 너무 부족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고구려>에 고구려 남쪽에 조선과 예맥이,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가 있었다고 하여 고구려가 건국되어 200 여 년이 지난 시기에도 존재했다는 조선을 왕검조선의 잔존세력으로 해석했는데 이 역시 시기와 위치 모두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결국 서기전 2333 년 개국한 왕검조선을 왕검조선 이전의 환웅천왕 고조선과 서기전 3 세기 경의 부.준왕의 조선과 동일시하여 조선의 정통맥을 혼동하였고 지리 인식도 현 <화국전도>의 지리틀을 수긍한 셈이니 결국 식민사관을 비판하려는 의도와 목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또 다른 식민사관 맹종자이고 동북공정 선전.홍보질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윤내현이 그렇게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윤내현 자신도 언급하였지만 이미 100 여 년 전에 단재 선생이 언급한 고대의 요하는 란하, 정확하게는 지금의 란하 상류 곧 곡선 부분을 제외한 중.하류 부분만이 요하이며 또한 고대뿐만이 아니라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대략 2100 여 년 동안 지류 대요수와 본류 염난수 곧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황하.요하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삼국유사/기이> 기록에는 `고조선.왕검조선`이란 항목으로 <위서>와 <고기>를 인용하여 환웅천왕과 단군 왕검 조선에 대해 간명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환웅천왕이 신시에 내려와 인간사 360 가지 일을 보았으며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단군 왕검께서는 조선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즉 환웅천왕이 내려왔다는 신단수.신시는 국명이 아니라 지명일 뿐이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정했다는 얘기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단군 왕검의 국호였으니 고조선은 환웅천왕의 시기를 일컬은 국명으로 구별지은 것이라 보는 것이 순리적일 것입니다. 일연국사가 부제한 고조선.왕검조선 의도에 맞추려면 서기전 3 세기의 부왕.준왕의 조선은 부왕조선 혹 준왕조선으로, 서기 1392 년 이태조가 건국한 조선을 이조선이라 구별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연나라 망명인 만滿이 준왕조선 땅을 사탈하여 80 여 년 동안 점거한 시기를 위만조선이라 명명했지만 나는 그릇된 판단이라 보고 `만.우거`로만 명명하겠고 그 직전은 준왕조선이라 통칭하겠습니다.
다시 지리로 돌아가겠습니다.
한.화.일 3 국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한국의 재야역사계조차도 위 <화국전도>에 표시한 지금의 화국 지리가 전한이 건국된 서기전 202 년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 약 2100 여 년 동안의 지리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헌과 고지도에 설명.묘사된 것을 보면 지금의 북경인 청 시기 경사에서 직예성 영평부 치소인 노룡현까지는 대략 500 리 쯤에, 봉천성 봉천부 치소인 성경 심양 승덕현은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1470 리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합니다. 또 청 시기 노룡현과 승덕현 지역에 설치되었던 전한 시기의 요서.요동군도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300 리, 3600 리 떨어진 곳이여야 합니다. 또한 청 시기의 봉천.금주부 지역이였으며 전한 시기 설치된 요서군 북쪽 끝 지역이며 요동군 서남 지역으로는 백랑수와 1250 리 길이 대요수가 합류해야 하며 그 동쪽으로는 2100 리 길이 염난수도 흘러내려야 합니다. 즉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대릉하.황하.요하가 요동.요택에서 합류해야 하고 이후 남쪽 발해 해안선까지는 바다로 기록될 정도의 만灣을 형성하여 대략 300 여 리 이상을 더 흘러 산해관 동쪽에 이르러서 발해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청사고/지리지>
영평부 ... 西距省治830裡... 노룡 東南陽山 西南孤竹城 欒河自遷安入合靑龍河
봉천부 ... 奉天省治 西南距京師1470裡 ... 承德 ... 明瀋陽中衛 ... 渾河在南...
<수경주/대요수>
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한서/지리지>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
玄兎郡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후한서/군국지>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
玄兎郡 武帝置 洛陽東北四千里
그러면 과연 북경에서 지금의 노룡까지가 500 리 쯤이고 심양까지가 1470 리일까요? 또 지금의 낙양에서 지금의 북진.요양 등의 지역까지가 3600 리 쯤일까요? 또 청 시기의 요하가 지금의 요하이고 지금의 요하 하류로 합류하는 대릉하가 청 시기의 대릉하이며 한.당.북위 시기의 백랑수일까요? 또한 지금의 요동만을 만灣이라 할 수 있으며 요하의 하류가 지금의 산해관 동쪽 지점까지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2. 신채호가 교시한 요동 위치와 왕검조선 3 도읍 추정지
한국역사학계의 강단.재야 모두 민족사학의 비조라고 평가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지리관은 지금의 화국 요녕성 지리나 윤내현이 인식한 지리와는 크게 다릅니다.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아래와 같이 정확.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고로 연 말세에 요서.요동군을 둘 때 영평부는 요서가 되고 그 이동은 요동이 됨인즉, 요동도 요서의 비례로 그 범위가 산해관에 지나지 못하였을지니 어찌 진개가 벌써 요양.해성 등 지까지 차지하였으리요. 고로 만번한을 한하였다 이천리를 차지하였다함은 다 황설이어늘 후인이 조사도 아니하고 거저 믿었도다.`
즉 전한의 요서와 요동 2 군 위치가 고대의 요하인 지금의 란하 부근이였으며 지금의 란하 하류 서쪽 강안 지점이 명.청 시기의 영평부였고 영평부 동쪽 끝이 진장성동단이고 산해관이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역사학계 강단과 재야 모두의 지리 인식을 부정하는 주장을 이미 100 여 년 전에 설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재야마저도 선생이 언급한 단군 왕검 조선의 3 도읍 곧 신조선.번조선.막조선의 도읍이라는 합이빈.개평.평양 위치를 지금의 합이빈.개평.평양으로 인식합니다. 또 `패수는 해성의 헌우락`이라는 구절의 해성도 지금의 해성을 흐르는 물길이라며 의기양양해 합니다. 결국 고대의 요하도 지금의 요하라는 뜻이며 이는 한국사학계는 물론이고 소위 화국과 일국 역사학자라는 자들이 주장하는 지리와 똑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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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한제국이 강제병합된 청국이 멸망한 직전해까지도 청국의 합이빈.개평과 이조선의 평양 세 지점은 위 표시와 같이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 노합하 중류와 대릉하 상류의 서쪽 청룡하 유역에 위치했었습니다. 합이빈은 청국 정사 <청사고/지리지>에 기록된 길림성 빈강구였고 그 위치는 지금의 적봉 부근이였습니다.
<청사고/지리지> 길림성
길림부 ... 西南至京師2300裏 距盛京820裏
濱江口 省北550裏 卽哈爾濱 本松花江右灘也 ... 分隸黑龍江省 ... 光緖31年中日約開 海關 ...
즉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곳이 지금의 란하 중류 2 개의 승덕이 표시된 지역이고 작은 글자로 표시된 승덕 위치가 청 시기의 봉천성 봉천부 치소인 성경 심양 승덕현이며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1470 리 떨어진 곳입니다. 또한 길림성 치소인 길림부는 봉천성 치소인 작은 승덕에서 820 리 떨어졌고 빈강구는 길림성.부에서 북쪽으로 550 리 떨어진 곳이라 하니 성경 심양 승덕현에서는 북쪽으로 대략 1370 리 떨어진 곳이였습니다. 지금의 노합하는 청 시기 길림성 지역을 동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이였습니다.
또한 번조선 도읍이라는 개평 위치도 작은승덕에서 서남쪽으로 360 리 떨어진 곳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단재가 주장한 패수가 흐른다는 해성 위치도 작은 승덕에서 남쪽으로 240 리 떨어진 곳이였고 선생이 언급한 선생이 언급한 왕검조선의 신.막.번조선 체제나 그 도읍을 합이빈.개평.평양이라 추정한 것은 동의하지 않지만 선생이 막조선 도읍이라 지목한 평양 위치도 지금의 압록강 남쪽이 아니라 위에 표시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산해관과 산해관 북쪽에 표시된 쌍산자 부근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곳이 서기전 300 년 전후 문헌에 언급된 부왕.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이였고 만.우거가 준왕조선을 사탈하여 80 여 년을 점거한 곳이며 한 무제 유철이 낙랑군을 설치한 곳이며 820 리 길이 열수가 흐르는 곳입니다.
결국 한반도 평양을 낙랑군 위치였다고 주장하는 식민사관.동북공정의 지리 논리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한.화.일 3 국 사학자들의 논문이나 주장이 아니라 <화국전도>의 북경 이동 지명 표시인 셈입니다. 역사를 전문으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역사학자들마저도 현 <화국전도>가 당연히 과학적 지도 제작기법인 측량.축척에 의해 발행되었을 것이니 지금의 지명도 마땅히 전한 시기부터 이후 2100 여 년 동안 변동이 없었다고 확단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착각입니다.
현재 화국은 이러한 막강한 도구 <화국전도>를 근거로 부여.고구려.백제.진국 등이 화국 역대국의 지방정권이였다는 동북공정의 통상적 주장을 넘어 문명 침탈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3. 요하문명
화국이 개방된 이후 많은 한국인들은 광개토왕비가 있다는 집안이나 백두산 등과 서쪽으로 산해관.북경 등의 지역을 찾아 보았을 것입니다. 특히 일부 역사학자는 약간 북쪽에 있는 부신.조양.능원.적봉 등 지역의 화국이 명명한 요하문명지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곳은 신석기.청동기 문화 유적.유물이 발굴된 곳인데 화국은 이제까지 세계 4 대 문명 중 하나라고 자랑하던 황하문명까지 내팽개치며 자신들의 시조 황제 헌원이 일으킨 문명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 요하문명 유적.유물 발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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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요하문명 지역에서는 황하.장강 유역의 화국 영역에서 발굴되는 검몸과 손잡이가 일체식인 동주식동검과 전혀 다른 조립식인 비파형동검이 대량.집중적으로 발굴되었습니다. 또 비파형동검 출토분포지는 저곳에서 동남쪽으로 지금의 요동과 한반도로만 이어집니다. 요하문명 유적 중 가장 핵심인 곳은 지금의 건평.능원 지역에서 발굴된 우하량유적이며 서기전 3500 년 전후의 초급문명사회 수준이라는 홍산문화의 대표 유적입니다. 또한 지금의 적봉.오한기.북표.조양.건평 등에서 발굴되는 하가점하층문화는 서기전 2500 년 전후의 고급문명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위 추정도에 표시된 요하문명지의 핵심발굴지인 적봉.능원.건평.오한기.조양.북표 등의 지역과 단재가 지목한 왕검조선 3 도읍인 당시의 합이빈.개평.평양 세 곳을 잇는 지역은 서쪽 지역에서 약간 겹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적봉 지역은 청 시기에는 직예성 평천현 지역을 흐른 극히 짧은 노합하가 아니라 길림성 전 지역을 관통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의 하류 지역이였으며 길림성 소속의 신성부와 빈강구 곧 합이빈이 설치된 지역이였습니다. <청사고/지리지>에 의하면 신성부에서 남쪽으로 200 리 쯤의 농안현은 옛부여국도古扶餘國都 , 신성부와 농안현에서 남쪽으로 300 리 쯤인 장춘부는 옛부여국지古扶餘國地, 장춘부 남쪽의 이통주는 발해 즉 진국 장령부, 농안현 동쪽 오상부는 진국 상경속경上京屬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성부는 송화강이 동남쪽에서 흘러오며 눈강이 삼차구로 흘러와 송화강과 합류한 후 동쪽으로 꺽이어 흑룡강성 경계로 이어진다고 하였고 그 개략적인 지형에 대해서도 `川原廣衍 水陸輻車+秦 富西甲全省 ` 곧 물길이 넓은 곳으로부터 모여 넘치고 물과 땅을 잇는 길도 몰려있다?라고 하였으니 현 지형과도 대략 일치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구절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富西甲全省`의 대략의 뜻은 신성부 치소가 백도눌구伯都訥口라 하였으니 혹 하백이 통치하였을 도읍 비서갑인 것으로 보이며 위치도 왕검조선의 북쪽 제후국인 부여 영토 중에서도 북쪽 경계지일 것입니다. <수서/열전.동이.말갈>에 언급된 말갈 7 부 중 석촉을 쓰지 않은 속말.백돌.백산 3 부 말갈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백돌말갈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윤내현의 <고조선연구> 2장1.3) 한국 고대사회의 전개과정에서 임병태.한창균의 논문을 인용하여 지금의 적봉.오한기.건평.조양.북표 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에 대해 언급하였고 우실하의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에서는 2004 년부터 개최된 홍산문화국제학술토론회에서 발표된 자료들을 인용하여 능원.건평 지역의 우하량유적을 서기전 3500 년 전후 초급문명단계로, 하가점하층문화를 서기전 2000 년 전후의 초기 청동기시대이며 고급문명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결국 우하량 유적지는 환웅천왕의 고조선 중심지인 신시로,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유물 발굴지인 지금의 적봉.오한기.건평.조양.북표 등의 지역은 왕검조선의 강역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단재 선생이 추정한 신조선 도읍지 적봉은 청 시기 송화강이 흐르는 길림성 빈강구.신성부 지역이며 서기전 3500 년 전후의 초기문명단계라는 우하량유적지에서도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지역일 뿐만 아니라 서기전 2000 년 전후의 초기청동기 문화이고 고급문명단계인 하가점하층문화 지역 중에서도 가장 북쪽 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번.막조선 도읍이라 추정한 개평.평양 위치는 하가점하층문화 발굴지역에서 서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 년대부터 발굴하기 시작하여 2004 년 쯤 발굴 보고서가 출간된 그 문명의 명칭은 `요하`라 붙쳐졌고 `고조선` 강역 표시도 문명 중심지가 아니라 동북쪽 변두리인 청 시기까지에도 흑룡강으로 불린 물길의 하류와 바다로 기록된 곳에 표시하였습니다. 대체 어떤 연유로 저와 같이 명명되고 표시되었을까요? 요하문명은 <삼국유사><규원사화> 기록과 같이 조선.태백산.우수하.아사달.소밀강 등의 이름을 붙쳐야 하는 것입니다.
화국과 일국 역사학자들은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의 역사학자라는 자들이 문명과 지리를 연계하여 석명해 내지 못하는 무지무식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4. 이조선 사신의 연경 행로
그러면 과연 이조선 시기 한양.북경을 오간 사신들의 행로는 어떠했을까요? 불과 140 년 전까지만 하여도 사신들은 말을 타고 한양.북경 사이를 왕래하였습니다. 이조선 개국 시기부터만 따져도 대략 500 년에 이르며 내로라하는 이조선의 대다수 고관과 선학들이 사신길에 올랐었습니다.
- 한.중.일 3 국 역사학계가 주장하는 낙랑군 설치지와 이조선 시기 사신 귀로 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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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남긴 문집에는 한양.북경 사이 로정의 풍광이나 고대 사건 전말 등이 자신만의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신들이 500 여 년 동안 오가는 로정은 위 실선 표시와 같았다고 합니다.
1656 년 북경을 다녀온 진주정사 인평대군이 남긴 <연도기행>에는 북경에서 산해관까지 670 리,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1990 리, 평양까지 2520 리, 한양까지는 3095 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도기행> 1656 진주정사 인평대군의 귀로 일기에서
연경 0/0- 통주 55/55- 삼하현 80/135- 운류하 65/200- 옥전 70/270- 풍윤 80/350-사하역 100/450-노룡 60/510- 유관점 90/
600- 산해관 8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 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삼차하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
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 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의주 80/1990 ... 한양 낙동 40/3095
그러면 과연 북경에서 지금의 산해관까지가 670 리, 압록강 의주까지가 1990 리였을까요? 또 지금의 평양까지 2520 리였으며 이조선 시기의 평양부였고 고려의 서경과 고구려의 평양성이였고 연나라 망명자 만에게 사탈당한 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 위치였을까요? 또 북경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3095 리이고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된 그 한성이고 마한의 옛땅이였을까요?
이조선 중기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양.서울을 경도京都라 하였고 고조선.마한의 옛땅이였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도 주위 형세를 설명하기를 `북쪽 진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세이고 남쪽으로는 한강이 옷깃.허리띠처럼 흐르고 왼쪽으로는 관문과 큰산이 막고 오른쪽으로는 발해로 둘러쌓여 있다고 하며 동방 산하 102 개 땅 중 으뜸`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백제 중엽 한산에서 옮겨왔고 이후 남쪽 땅으로 파천하였다고 하며 고려 숙종이 설치한 남경이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발해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면 서울.한양의 오른쪽 곧 서쪽인 지금의 인천 앞바다를 발해라고도 했나요?
경사.발해의 서술과 비슷한 경우가 바로 평양.낙랑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역고/낙랑군>에서 낙랑군 위치라고 단정한 평양도 단재가 언급한 요하는 란하, 패수는 해성 헌우락이라는 두 구절과 상통하는 지리입니다. 또한 당연히 청국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와도 일치하는 지리 인식으로 한반도 평양을 지목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점을 지목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강단사학계는 정약용도 한반도의 평양을 낙랑군이라고 단정한 것이라며 제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고 재야 일부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이조선 실학자들 특히 정약용.한백겸 등이 식민사관의 빌미를 제공했다며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모두 대단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신뢰해 왔던 문헌의 귀퉁이에 남겨진 몇 개의 단어나 구절이나마 현 한국역사학계 주장과 <화국지도> 표시와는 동떨어져 있으니 유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이제부터 이러한 혼동.혼란스런 화국의 동북쪽 지리와 한국의 서북쪽 지리에 대해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5. <만주국지도>와 일국 공식 관찬 지도 <아세아동부여지도>
청나라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공식 합병된 이듬해인 1911 년 멸망했습니다. 그후 1928 년 봉천군벌 장작림의 지원으로 청국 정사 <청사고>가 출간되었다는데 그 지리지에 설명.기록된 황하를 현 <화국전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아야 합니다.
- 청 시기 황하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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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지리지>
직예성
다륜약이구...北有錫拉穆楞河 自內蒙古克什克騰旗入 合碧七克碧落拜察諸河 北入巴林旗......
적봉직예주 ...西南距省治1320裡...領縣1 潢河自圍場入 州北200餘裡之巴林旗 東南老哈河 自平泉逕東南隅 納伯爾克河 北
入建昌 英金河古饒樂水...
조양부 건창현 府西南260裡... 東有布古圖山 漢白狼山 白狼水出焉 今曰大凌河 ... 東入朝陽... 北有潢河自赤峰入 會老哈
河 河自平泉入 合伯爾克河 錯出復入 英金河亦自縣來會 復合落馬河 東北至穀口 乾隆8年(1743) 更名敖漢玉
瀑 與潢河會 又東入朝陽 柳邊北首朝陽 南訖臨楡 ...
조양부 明 營州衛...置朝陽縣 光緖30年(1904)以墾地多熟 升府 以建昌隸之... 西南距省治1420裡... 西北潢河自內蒙古阿魯 科爾沁旗入 西南大凌河自建昌入 合南土河 逕西平房西 左合卑克努河 察罕河 又東合布爾葛蘇台河 又東至龍城 一
曰三座塔城 左合固都河 凉水河至金敎寺東北 左合土河 入盛京義州
봉천성
신민부 ...省西一百二十裡 瀋陽中衛與廣寧左衛地
진안현 ...府西 一百五十裡 明 廣寧衛 鎭安堡 ... 東沙河導源直隸綏東 南流 右受老河 入盤山曰南沙河 ...
금주부 반산구 ... 明廣寧盤山驛... 分遼水自遼中冷家口西南入 逕口南入海 西南沙河東沙河西沙河皆南入海
즉 황하는 직예성의 다륜 북쪽 지점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며 적봉 동쪽을 지나 건창.조양 북쪽으로 지나 봉천성 지역의 서쪽 끝 지점인 신민부 진안현을 경유한 후 크게 휘어 남쪽으로 흘러 금주부 반산구를 지나 요하로 합류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위 <화국전도>에 <청사고/지리지> 기록대로 추기한 황하는 흐를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지금의 칠로도산과 노로아호산의 연맥때문입니다.
- 칠로도산.노로아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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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로도산.노로아호산 두 산은 이어져 있습니다. 또한 당연히 분수령이기 때문에 기슭에서 발원한 물길들은 서남.동남.동북 세 방향으로만 흘러나갑니다. 곧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 지류인 열하.폭하.청룡하 등과 지금의 대릉하 및 지금의 노합하 등과 같이 세 방향으로만 흘러나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사고/지리지> 기록과 같이 다륜.극심극등기 사이 지역에서 발원하였다는 황하가 동남쪽으로 흘러 지금의 적봉.건창.조양 지역을 경유한다는 것은 지형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청사고/지리지>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명 시기 기록에도 황하는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불과 800 리 떨어진 곳이라는 북평행도지휘사사 소속의 영주전둔위.회주위 지역 곧 청 시기의 조양 부근을 경유하여 요수 곧 요하로 흘러들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명사/지리지>
北平行都指揮使司 本大寧都指揮使司 洪武29年9月置 治大寧衛 ...領衛10.....西南距北平布政司八百裏
大寧衛...治大定縣 ...洪武20年8月置衛 9月分置左右中三衛 尋又置前後2衛 28年4月改左右後3衛爲營州左右中3護衛...
營州前屯衛 元興州屬上都路...南有老河 源出馬孟山流經此 又經行都司城南 東北入於潢河..
會州衛 洪武20年9月置 永樂元年廢...西北有馬孟山...土河之源出焉 下流合於漌(潢의 오기)河 又南入於遼水 ...
지금의 북경인 경사에서 동북쪽으로 800 여 리 떨어졌다는 곳을 흐르는 노하 곧 청 시기의 노합하와 노하가 합류하는 황하가 지금의 노합하와 서요하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 <화국전도> 표시는 왜 명.청국 지리지 기록과 일치하지 않을까요? 대체 화국의 동북 지리는 어떠했길래 지리지 기록과 지도가 불일치할까요?
사실 현 <화국전도>의 북경 동북쪽 지역 지리는 1932 년 건국되어 1945 년 시나브로 없어진 만주국의 지도 표시와 같습니다. 따라서 <만주국지도> 표시 역시 명.청국 정사 지리지 기록과 상위합니다.
- <만주국지도> 1934 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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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 직전 시기 간행되었다는 지도를 보겠습니다.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자료에는 만주국이 건국된 1932 년 보다 60 년 전쯤 제작되었다는 흥미진진한 지도가 게시되어 있습니다. 일국 육군참모부가 간행했다는 아래의 <아세아동부여지도> 입니다.
- <아세아동부여지도 - 이하 <아동도>라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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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위 <아동도>에 묘사된 청국의 동북쪽 국경선은 <만주국지도>에 표시된 만주국 국경선과 다릅니다.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첫째는 지금의 서요하를 청국 북쪽 국경선으로 묘사하였고 둘째는 청국과 이조선 사이에 지금의 화국 요녕성 전체 영역만큼의 공지空地를 묘사하였습니다. 일국 육군참모부는 이조선 강역을 지금의 압록강.두만강 남쪽으로 표시하였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요하 위치를 흐르는 물길은 당연히 명.청 시기의 요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요하 중.하류의 동.서쪽 전 지역은 당연히 청국 영역이여야 하는데 어찌 공지로 묘사하였을까요? 단순하고 기초적인 의문의 결과는 <아동도>가 형편없는 엉터리 종이쪽이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한.화.일 3 국 역사학계마저도 코웃음칠 것입니다.
그러나 <아동도>는 1875 년 당시 청국의 최북단 국경선만큼은 대략 정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대략 지금의 산해관 위치에서부터 요동만의 동서 해변 지역을 묘사하고 그 동쪽 끝 압록강까지를 묘사한 공지는 명.청 시기 이조선과 명.청국인들의 사신 행로를 묘사한 고지도와 똑같은 것입니다.
- 사행로, 출처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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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 정사인 <청사고/지리지>나 이조선의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청국 동북쪽 관문인 봉황성 책문과 압록강 사이의 거리는 120 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동도>와 같은 축척지도에는 양국의 국경선이 하나의 선으로 그려져야만 합니다. 양국 국경 사이에 공지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아동도>는 제작했다는 1875 년 당시 청국과 이조선의 국경 지역 지리를 60 여 년 후인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의 지리를 기대하고 습작한 그림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산하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자료에는 일국의 공식 관찬지도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6. 이조선 서북 경계
그런데 <아동도>보다 더 가관인 고지도가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동도>에 표시된 이조선 강역을 묘사한 것이 확실한 아래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입니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2007 년 12 월 31 일 제 1537 호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이하 <서북도>라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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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서북도> 역시 <아동도> 못지않은 사기.기만질의 증거인 종이쪼가리일 뿐입니다. 도면 위쪽에 표시된 방향 글자인 해亥.정북正北도 거꾸로 표시되어 있고 두 단어가 의미하는 방향조차도 맞지 않습니다. 해 방향은 시계 10 시에서 12 시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정북은 12 간지의 첫 글자인 자子가 나타내는 11 시부터 1 시까지의 방향 중 한 가운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조선 시기 도성인 지금의 서울을 기준하여 정북에서 약간 서쪽인 서북방향인 해亥 방향에 선춘령.백두산 및 영고탑.흑룡강이 있다는 표시인데 오히려 그 반대인 동북방향에 해亥 글자를 거꾸로 표시하였습니다. 결국 보물이라는 <서북도>는 물론이고 1875 년 간행 <아동도>, 1934 년 간행 <만주국지도> 와 지금의 <화국전도>까지 북경 이동의 지리 표시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래는 위 보물지도의 원본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조선 영조 시기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목 없는 고지도입니다.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도서관 홈페이지에서는 <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제목으로 검색되는 고지도입니다.
- <무제도>, 가칭 <양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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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위 <양계도>는 방향 글자가 바로 표시되어 있고 방향도 이조선.청국 당시의 지리와 일치합니다. 이조선 왕이 있는 궁궐 곧 지금의 서울을 기준하여 정북 방향은 흑룡강의 동쪽 끝 곧 지금의 서요하.동요하가 합류하는 지점이라는 얘기이며 시계 10 시에서 12 시 방향 사이 지역에 선춘령과 백두산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리는 이조선 시기 선학들도 정확히 인식하고 언급하였었습니다.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과 같다. 그리고 대마도와 제주도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했다고 하니, 이는 곧 지관들의 일반론이다.
<성호사설/천지문> 이익(1681~1763)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다. 해亥 방향에 앉아서 사巳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이다. 그런고로 예전부터 중국과 친해 왔다. 그러나, 땅이 좁고 물이 젓어 위인을 낳지 못했다.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 그리고 동호와 여진족이 모두 중원을 제패하고 황제가 된 일이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만은 그렇지 못해서 주어진 영토만 지키며 감히 뜻을 품어 보지 못했다`라 했다 .
<택리지/복거총론,산수총론> 이중환(1690~ )
<후기 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배우성 37~38 쪽
선학들이 설명한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과 선춘령을 현 <화국전도>에 추기하면 아래와 같을 것입니다.
-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선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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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조선 시기의 백두산은 지금의 화국 요녕성 서쪽 노로아호산 중에 있다는 얘기일 수 밖에 없으며 지금의 칠로도산.노로아호산 연맥도 이조선에서는 백산대맥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양계도> 묘사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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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금의 열하와 서쪽의 두 지류 곧 <청사고/지리지> 기록의 신요하와 서요하를 포함하여 <양계도>는 요하라고 표시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양계도>도 아래 적색 실선 내 지역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승람> 기록과 같이 오른쪽 곧 서쪽에 발해가 둘러있다는 백제 한성이며 이조선 초기 양성지가 북경에서 30 일 정이라고 설명한 한도韓都나 박은식이 압록강을 건너 기슭을 올라 내려다 보았다는 백제 위례성은 과연 어디이겠는지요? 위례.한도 모두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지점인 지금의 천서 동쪽 건너편 지점일 것입니다.
한편 그곳이 당연히 마한땅이였기 때문에 서기전 2333 년 개국된 왕검조선의 땅은 훨씬 북쪽이였을 것이고 서기전 3 세기의 부왕과 준왕이 왕검성에서 통치한 조선 곧 준왕조선의 땅은 당연히 동쪽이였을 것입니다. 그 동쪽 땅이 후일의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였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온조왕이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승람> 편찬자들이 지리 고증을 게을리 하여 전해오는 글귀를 수정 없이 그대로 전재한 것으로 추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지금의 <승람> 서문에 이조선 말기 일국인이 길가에 내팽겨쳐진 <승람>을 주어 간행했다고 하니 고조선.마한.백제 강역을 한반도로 끌어내려야 하는 일국인이 고조선.마한.백제 관련 구절을 한반도 중앙인 이조선 경도 설명 글에 끼워넣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쨋든 대한제국.이조선.고려와 요.명.청국및 아라사와의 경계는 아래와 같이 지금의 란하 중.하류 동쪽 지역이며 서남.동북쪽으로 뻗어나간 백산대맥 부근이였습니다.
- 고려.이조선.대한제국 서북 국경과 요.명.청의 동북 국경 및 아라사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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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이조선 강역은 청 시기 편찬.제작된 <독사방여기요>, <대청광여도> 등에 기록.설명된 것과 같이 당연히 동서 2000 리, 남북 4000 리였습니다.
<독사방여기요> 八 朝鮮
... 成桂更名旦,徙居汉城,遣使请改国号,诏更号朝鲜,... 其国中分为八道,八道中,则忠清、庆尚、全罗三道,地广物繁,州县雄巨,最为富庶。且俗尚诗书,人才之出,比诸道倍多。平安、咸镜二道,北接,俗尚弓马,兵卒精强,亦地势使然也。江原、黄梅,居京畿左右,差为狭小。而京畿在诸道之中,襟带山海,称为雄胜。其地东西二千里,南北四千里,八道分统郡凡四十一、府凡三十三、州凡三十八、县凡七十。
주) 중국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의 고조우(顧祖禹)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 지리서. 1659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678년에 완성
- <왜청도>, 청국인이 제작한 <대청광여도>를 1865 년 일본인이 재간행했다는 <대청광여도- 왜청도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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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이조선 강역은 화국인들 뿐만 아니라 18 세기 초 청국 지리를 탐구한 서양인들조차 아래와 같이 인식했습니다.
- <인도.차이나 지도>
출처: 대한민국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 연구/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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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Netherland, Guillaume, Delisle, 1750, 62.7×60.9㎝
기욤 드릴(Guillaume Delisle, 1675– 1726)은 18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도 제작 가문을 형성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클로드 드릴(Claude Delisle)은 법학과 지리학 그리고 역사학에 정통한 지도 제작자였다. 기욤 드릴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지도수업을 받았으며, 1718년 최초의 왕실지리학자가 되었다. 그가 그린「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지도」는 최초의 세부적인 미국 내륙 지도로 알려져 있다. ... 이 지도는 원래 1705년 프랑스에서 동일한 명칭으로 간행된 것을 1750년 네덜란드에서 재간행한 것이다. 지도의 내용은 1705년 지도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전한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고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을 프랑스인 기욤이 대략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만주국이 건국된 1932 년 이후의 지리는 고대부터 1931 년까지 대략 2600 여 년 동안 설명.기록된 지리와는 너무 다른, 달라도 너무 다른 흑심이 가득한 쌩뚱맞은 지리입니다.
따라서 이조선 500 여 년 동안 한양.북경을 오간 사신들의 로정 중 북경에서 평양까지 2520 리 로정도 아래와 같이 지금의 하북성 작은승덕 부근을 경유하여야 하고 그 평양도 지금의 쌍산자.산해관 사이 지점이였습니다.
7. 명.청 시기의 황하
그러면 현 <화국전도>에 생략된 황하潢河는 대체 어떤 물길일까요?
- <모사도/ 대요수.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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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모사도 표시와 같이 난수.란하 최하류가 경유하는 전한 시기 요서군에서 동북쪽으로 300 여 리 떨어진 요동군으로 흘러내린 물길로 길이 1250 리이며 난수.란하 동쪽에 흐르는 별개의 물길입니다. 당 말기부터 황암수로 불렸고 송.거란.요국 시기부터 상경임황부 지역을 흐른 황수潢水.황하潢河로 정식 개칭되어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황하는 동남류하여 요하 중류로 흘러드는 요하의 서쪽 지류입니다.
대요수는 <한서/지리지> 요동군 망평현에 처음으로 언급.설명된 물길이며 <수경주>와 <청사고/지리지> 기록이 가장 상세하고 정확합니다.
<한서/지리지>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
<후한서/군국지>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
[수경주]
<수경>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주>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
<수경>
又東南過房縣西
<주>
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 東南 , 北流, 西北屈, 逕廣成縣故城南. 王莽之平虜也, 俗謂之廣都城.又西北, 石城川水注之,水出西南石城山, 東流逕石城縣故城南. 地理志..右北平有石城縣, 北屈逕白鹿山西, 即白狼山也. ... 其水又東北入廣成縣, 東注白狼水. 白狼水北逕白狼縣故城東, 王莽更名伏狄. 白狼水又東, 方城川水注之. 水發源西南山下, 東流, 北屈逕一故城西, 世謂之雀目城. 東屈逕方城北, 東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 逕昌黎縣故城. 西地理志曰..交黎也, 東部都尉治, ... 應劭曰..今昌黎也. 髙平川水注之, 水出西北平川, 東流逕倭城北, 盖倭地人徙 之. 又東南逕乳樓城北, 蓋逕戎鄉邑, 兼夷稱也. 又東南注白狼水白, 狼水又東北, 自魯水注之, 水導西北逺山, 東南注白狼水. 白狼水又東北逕龍山西, ... 白狼水又北逕黄龍城東, 十三州志曰.. 遼東屬國都尉治, 昌遼道, 有黄龍亭者也. 魏營州刺史治. 魏土地記曰..黄龍城西南有白狼河, 東北流, 附城東北下, 即是也. 又東北, 濫真水出西北塞外, 東南厯重山, 東南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出, 東流, 分為二水, 右水疑即渝水也. ... 其水東南入海. 地理志曰..渝水自塞外南入海. 一水東北出塞, 為白狼水, 又東南流至房縣, 注于遼. 魏土地記曰..白狼水下入遼也
<수경>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주>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요사/지리지> 상경도
遼國其先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去兪關一千一百三十裏 去幽州又七百一十四裏 南控黃龍 北帶潢水 冷陘屛右 遼河塹左
즉 <수경주>에는 백평산에서 대요수가, 지석산에서 요수가 발원하는데 대요수는 동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양평현 서쪽으로, 요수는 동쪽으로 흘러 요동군 망평현 서쪽을 지나 크게 꺽이어 서남쪽으로 흐르며 양평현 옛성 서쪽을 경유한다고 하니 결국 양평현에서 합류한 후 남쪽으로 흘러 요수현 옛성 서쪽을 지나 방현에서 백랑수와 합류한 후 동쪽으로 꺽이며 안시현 서쪽을 경유한 후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한편 대요수.황하가 흘러 들어갔다는 바다는 정확하게는 염난수.요하의 하류 시작 지점을 말하며 요택의 남쪽 끝 지점입니다. 즉 바다라는 요하 하류는 남쪽으로 발해 해안선까지는 대략 300 여 리 쯤 되는 만灣이고 만의 서쪽은 요서군이며 동쪽은 <승람>과 양성지.박은식의 언급과 같이 남쪽으로 발해와 연결된 만灣의 동쪽에는 고조선.마한 땅이였고 백제의 한도.위례성이 있던 곳입니다.
황하는 명.청 시기에도 당연히 란하와 요하 사이 지역을 경유하여 요하 중류에 위치한 요택으로 흘러내렸는데 요택의 서쪽 가장자리로 흘러내리며 어지럽게 흘러 복잡했던지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신민부 진안현 기록에는 동사하가 직예성 수동현, 곧 조양부에 속한 수동현을 경유한 후 남쪽으로 흐른다고 하며 오른쪽에서 노하가 흘러든다고 설명한 후 금주부 반산구로 흘러들어 남사하라 불린다며 황하를 망각한 듯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류 노하 혹은 노합하가 흘러드는 본류는 황하潢河뿐이기 때문에 동사하.남사하가 황하의 최하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인지 요하를 묘사한 대부분의 고지도에는 황하가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대요수.황암.황수.황하 전체와 남쪽 지류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 아래 <경판천문전도>일 것입니다.
- <경판천문전도- 이하 <경판도>라 약함>
청(淸)왕조 시대인 1780-1790년 사이에 마군량(Ma Junliang)에 의해제작되었으며, 미국 라이스(Rice )대학에서 디지털
화 했다. Woodson Research Center, Fondren Library
소장 출처 ; http://blog.daum.net/sabul358/6895389
<경판도>가 정확한 지도라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의 첫째는 황하 중류로 흘러드는 남쪽 지류 노하 혹 노합하의 길이입니다. 지금의 서요하로 흘러드는 남쪽 지류 노합하와 비교하면 <경판도>의 노합하가 훨씬 짧습니다. 다만 더 중요한 부분인 황하 중류를 요하 상류의 서쪽 지류인 서요하와 연결시킨 것은 큰 실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국 경사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적색 실선 표시 방향이 정동쪽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묘사된 것은 고지도에서는 흔하고 사소한 것이라 실수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쨋든 <경판도>의 대실수가 지리조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경판도> 보다 600 여 년 앞선 송.거란 시기 바위에 새겼다는 <지리도>의 황하는 어떤지 보겠습니다.
- <지리도> 1137 년 송인 황상이 각석
위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한 것이 아래입니다.
란하.황하.요하 3 물길 모두 산동반도의 정북쪽 건너편 내륙지역을 대략 동남 방향으로 흘러내려 발해로 들어갔습니다. 즉 송.거란 시기의 요하는 지금의 요하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엄밀하게는 발해로 흘러든 물길은 란하와 요하 뿐입니다. 즉 황하가 요하 중류로 합류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택 남쪽 바다로 묘사된 곳에 청색 실선을 길게 표시한 것은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기록과 같이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염난수가 2100 리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염난수도 대요수와 같이 송.거란 시기부터 요하로 개칭되었으며 중류인 요택의 남쪽 끝 지점에서 대요수.황하를 받아들인 후에도 대략 300 여 리 이상을 더 흘러내려 산해관 동쪽에 이르러 발해로 들어갔습니다. 즉 요택 남쪽의 바다는 발해가 아니라 요하 최하류이고 실제 정황은 만灣입니다.
<한서/지리지>
玄兎郡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麗莽曰下句麗 屬幽州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후한서/군국지>
玄兎郡 武帝置 洛陽東北四千里
이러한 란하.요하를 정확하게 묘사한 고지도가 역시 송 시기 간행된 아래의 <우적도>입니다.
또한 당인 장수절은 <사기정의>에서 진장성이 끝나는 바다 곧 만灣을 요수遼水라고 정확하게 설명.기록하였으며 이조선 효종 시기 인평대군은 발해가 아니라 구하 곧 대릉하.황하.요하.혼하.어니하.웅악하 등이 흘러드는 넓은 지역을 가리킨 `둘러빠진 곳`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사기정의>
始皇長城東至遼水 西南至海之上
진시황 시기 수축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닿았고 장성동단의 서남쪽은 바다다.
<연도기행>
... 남쪽은 발해(渤澥)에 임하여 은빛 물결이 하늘에 닿았고 북쪽은 장성을 바라보아 분첩(粉堞)이 구름에 연했으니, 기상이 웅장하고 시야가 호탕하다. 고금에 몇 사람이 이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던가. 이미 승지(勝地)에 이르렀으니, 한 번 누 위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려 했으나, 층루(層樓)가 반이나 썩어서 높은 난간이 거의 무너졌다. 이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년에 올라가서 바라본 것이 이미 옛일이 되었다. 부질없이 수선할 인물이 없음을 탄식할 뿐이다. 관문(關門)에서 바다를 연결시킨 것은 조룡(祖龍)의 공이 아니라, 바로 서달(徐達)이 창조한 것이다. 누 밖의 호탕한 물결은 원래 발해가 아니고, 구하(九河)가 둘러빠진 곳이다. ...
8. 일국 서향융성의 황하 변조와 청국 양수경의 굴종
<경판도>의 대실수가 제작자인 마군량의 실수인지 지리조작자의 추기 변조인지 알 수 없지만 황하 중류가 요하 상류 서쪽 지류로 연결된 것은 <경판도> 외에도 또 있습니다. <경판도>의 대실수보다 훨씬 대담하게 황하를 발원지부터 조작하여 동남쪽이 아니라 정동쪽으로 흐르게 묘사하여 요하의 상류 서쪽 지류와 연결한 것입니다.
- <황조일통여지전도- 이하 <왜황도>라 함> ,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간행한 <황조일통여지전도>를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경판도>와 <왜황도>의 황하 남쪽 지류인 노(합)하 길이를 비교하면 위 <왜황도>의 황하 변조를 훨씬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입니다. 하지만 청 시기는 물론이고 서기전 200 년 경의 전한 시기에도 황하.대요수는 짙은 청색 실선과 같이 흘렀습니다.
사실 <왜황도>가 1865 년 재간행됐다는 설명은 믿기 힘듭니다. 1875 년 간행된 일국 공식 관찬 지도의 신뢰성을 뒷받침하려고 청국 고지도를 가져다 재간행하면서 간행 년도를 소급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국은 명치왕 초기 정한론에 사로잡혀 식민지배를 순탄하게 하려는 기획하에 무지막지한 조작까지 감행했다고 판단합니다. 아래는 란하 전체가 묘사된 위 도면의 서쪽 부분입니다.
결국 일국은 청 시기의 황하를 당시 흑룡강이였던 지금의 서요하로 조작 표시한 것입니다. 그 방법으로 란하 상류를 황하 중류로 연결시키고 란하의 중.하류와 황하 상류를 삭제하였습니다. 그 결과 란하 중.하류가 동쪽으로 대략 300 리 쯤 이동되었고 란하 중.하류 동쪽 강안 지점에 설치한 열하승덕.평천.노룡.산해관 등의 지명도 옮긴 란하 중.하류 동쪽 적절한 위치에 표시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산해관까지라고 표시된 진장성동단과 갈석의 원래 위치도 서쪽으로 대략 500 리 쯤 떨어진 곳이였습니다.
- 지리 조작 수법 개략도
-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압록강과 백산대맥
그리고 황하 변조는 일국 뿐만이 아닙니다. 청국인 양수경도 1900 년 편찬했다는 <역재연혁지도/요지리도>에서 황하를 발원지에서 정동쪽으로 흐르는 물길로 표시했습니다.
- <역대연혁지도/요지리도.황하> 1900 년 청국인 양수경 간행
결국 <아동도>에 당시 지리를 정확하게 표시하자면 아래와 같아야 합니다. 일국인들이 화국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를 한반도 평양이라 주장하지만 화국 세번째 정사 <후한서/군국지> 낙랑군 주석과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왜 기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지고 그 낙랑군의 서남쪽 귀퉁이에 설치한 대방군에서 바닷길로 남쪽으로 또 동쪽으로 韓땅 7000 리를 가면 대마국의 북안 곧 지금의 부산 부근이였을 변진구야한국에 도착한다는 설명도 아래와 같은 지리일 때만 상식.합리적일 것입니다.
- <아동도>에 추기한 1875 년 당시의 란하.황하.요하.흑룡강 및 압록강
어쨋든 위 <아동도> 묘사로 보아 일국 육군 참모부도 청국의 동북쪽 국경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동도>가 제작된 1875 년 당시 일국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이조선과 청국 국경 지역의 부정확한 지도를 제작토록 지시를 내릴 만한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나는 정한론이라는 조선 침략 당위성에 취한 과단한 성격의 사쓰마번 하급 무사였던 명치유신 3 걸 중 우두머리격인 서향융성의 독단이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수백 년 권좌를 이어온 막부를 끌어내려 항복을 받은 유신 3 걸 중 이조선 침략을 즉시 실행할 것을 주장한 자가 서향융성이였습니다. 당시도 명치왕을 독살하여 가짜 명치왕을 앞세워 동경에 입성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2 인은 내정 안정이 시급하다고 인식하고 선진국 견학을 위해 미국.유럽 순방길에 올랐었다 하니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저런 무지막지한 엉터리 지도를 제작.간행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서향 1 일이였을 것입니다.
9. 대한 고대 역대국 강역
따라서 삼한을 통일한 신라.진국 강역과 서쪽 경계도 아래와 같았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모사도/통신라.진국 강역>
<요사/지리지> 동경
耀州 刺史 本渤海椒州 故縣五椒山貊嶺사泉巖淵 皆廢 戶七百隸海州 東北至海州二百裏 統縣一 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 一百二十裏
요주는 자사가 통령하며 본래 진국(발해) 초주였고 옛 현은 5 개이고 초산.백령.사천.암연현이 있었는데 모두 없앴다. 700 호가 살았고 해주에 예속되었다. 동북쪽으로 해주까지는 200 리이고 암연현 1 개를 두었다. 암연현 동쪽으로는 신라와 경계했고 옛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 암연현에서 해주까지는 120 리다.
위 기록과 같이 거란.요국의 요주는 해주에서 관할하였고 해주는 거란의 동경 치소가 있는 요양에서 남쪽으로 120 리 떨어진 곳입니다. 이는 청국 봉천부 지리와 같기 때문에 <청사고/지리지> 기록을 원용한 리 수입니다.
결국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서쪽 경계가 요동 지역 요양 부근까지였고 요하 하류의 동쪽 강안 지역까지였기 때문에 당연히 백제의 강역도 그곳까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 300 년 쯤인 서진 말기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가 진출했다는 요서백제 경략도 당시의 대요수와 염난수가 합류한 이후의 만灣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기만 하면 되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였습니다.
- 삼국 강역
또한 삼국 건국 직전인 서기전 100 년 쯤의 지리도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단군부여.한韓 및 한漢 8군>
특히 <삼국지>의 왜 기록과 같이 낙랑군의 서쪽 귀퉁이에 설치한 대방군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향하며 한땅을 지나 뱃길 7000 리를 가면 지금의 부산 부근에 있었던 변진구야한국에 도착하였으니 결국 지금의 산해관 서북쪽 청룡하 하류 남쪽 지역부터 지금의 요동반도 및 한반도 전체를 한韓 영역으로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왜倭>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 ...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渡一海 千餘里至對馬國
- 왕검조선.천군 강역
화국 및 대한의 지리지 기록이나 고지도 묘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화국.일국은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역사학계마저 전한 시기의 난수.대요수.염난수를 지금의 란하.서요하.요하라며 황당할 정도로 넓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낙랑군 위치도 한반도 평양이라며 비상식적인 주장을 현재까지도 계속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처럼 무지무식한 주장을 할까요? 저들을 한국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10. 한국 재야역사학계의 미흡한 지리 인식
한국역사학계는 물론이고 일국.화국 역사학계도 서울이 백제 한성이였고 이조선의 경도였다고 주장합니다. 북조선 평양이 이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이였고 고려의 서경이였다고 하며 그 이전은 화국 한나라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이였고 더 이전은 준왕이 다스린 조선의 왕검성이였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화국전도>에 표시된 북경부터 서울까지의 현재의 지명은 한.화.일 3 국 모두 화국의 한나라 시기 곧 고구려.백제.신라 건국 시기부터 변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위 민족사학을 자처하는 작금의 한국 재야역사학계에서는 낙랑군 위치가 북조선 평양 일대일 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일본이 만든 대조선사관 곧 식민사관과 화국의 동북공정이 오류라고 비난합니다. 동시에 서울.한양은 이조선 500 년 도읍이였고 고조선.마한 땅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재야는 낙랑군 위치에 대해서 정확하고 반론 불가능한 명확한 정설을 내놓았을까요? 즉 <승람> 기록과 같이 이조선 한양인 지금의 서울 오른쪽.서쪽 바다가 발해일까요? 비난이 아니라 식민사관.동북공정의 주장을 부인할 만한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한.화.일 3 국 역사학계의 100 여 년 지속된 단단한 학설을 깰 수 있는 탄탄한 논리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요?
결국 삼면이 바다로 묘사된 아래 영역을 지금의 한반도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극히 정상적이고 정확한 묘사가 의문투성이의 이해할 수 없는 엉터리 지도가 된 것입니다.
- <무비지/조선도> 1612 년 모원의
1 바다가 지금의 황해인가요?
2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인가요?
그러면 5 강은 지금의 어느 강인가요?
또 6 바다와 육지는 지금의 동해와 일국 국토인가요?
명국인 모원의가 간행한 <조선도>의 묘사 범위는 아래의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인 지금의 란하와 지금의 요하 사이 지역을 묘사한 것입니다.
단국대 명예교수 윤내현은 <고조선연구>에서 낙랑군이 산해관 지역에 설치되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낙랑군 수성현에 진장성 동단이 있다는 화국 정사 <진서/지리지> 기록과 당인 장안이 조선에 습수.열수.선수가 있고 합쳐 열수가 되는데 낙랑조선 명칭은 3 물길명에서 얻은 것 같다고 기록된 <사기집해> 구절에 근거한 주장입니다.
<진서/지리지>
樂浪郡 漢置 統縣六 ...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사기집해>
張晏曰 朝鮮有濕水列水仙水 三水合爲列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그런데 윤내현은 습수를 지금의 북경 북쪽 지역에 설치된 상곡.어양 2 군 사이를 흐르고 <한서/지리지> 상곡군 군도현에 주석된 습여수濕餘水로, 열수列水도 어양군 안락현 북쪽 바깥 지역에서 난수 중류로 흘러드는 지류 무열수武列水로 곡해하였습니다. 또한 선수仙水도 <수경주/난수> 기록과 같이 어양군을 흐른 750 리 길이 고수의 하류에서 동쪽으로 우북평군 지역을 관통하고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면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 지역을 경유한 난수와 연결된 인공.작위적인 신하新河로 흘러들어가는 요서군 신안평현이 발원지인 용선수龍鮮水라고 단정한 후 한나라 시기의 상곡.어양.우북평.요서 4 군 지역을 낙랑조선 지역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게다가 요동군 번한현을 흘렀다고 주석된 패수沛水를 한수汗水라고 읽고 이마저도 란하 최상류 지역으로 흘러드는 지류 우수于(물수변첨가한 于)水라고 곡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낙랑군 위치는 갈석산과 진장성동단인 산해관이 표시된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 윤내현이 곡해 지목한 습여수.무열수.용선수.우수의 원래 위치
<한서/지리지>
上谷郡 ... 軍都 濕餘水東至路 南入海
遼西郡 ... 臨兪 兪水首受白狼 東入塞外
遼東郡 ...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수경주/난수>
...濡水從塞外來 ...出禦夷鎭東南 其水二源雙引 ... 謂之連淵浦 又東北注難河 難河右則于(물수변첨가한 于)水入焉 水出東鳥(흙토변첨가한鳥)南 西北流逕沙野南 ...
... 濡水又東南 索頭水注之 ... 南流經廣陽僑郡西 魏分右北平置今安州治 ... 注于濡 濡水又東南流 又武列水入焉 ...
... 新河自枝渠東出合封大水 謂之交流口 水出新安平縣 ... 又東南流 龍鮮水注之 水出縣西北 ...
<후한서/군국지>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 臨楡(二) ... (二) 山海經曰 碣石之山 ... 水經曰在縣南 ...
樂浪郡 武帝置 洛陽東北五千里
윤내현 주장은 한마디로 억지입니다. 산해관.갈석산 지역은 춘추.전국 시대 및 진시황 시기까지의 요동군이였고 서기전 202 년 전한부터는 요서군으로 재편된 곳입니다.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요서군과 낙랑군은 대략 1700 리 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산해관 부근을 낙랑군이라 단정하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서/지리지> 낙랑군 탄열현 주석에 명확하게 820 리 길이 열수가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요서군과 더 서쪽의 어양.상곡군 및 어양군 북쪽 바깥 지역을 흐르는 한문 한글자가 같다며 혹은 발음이 비슷하다면 쌩뚱맞은 4 개 지류를 언급하였습니다. 화국 역사학자들은 윤내현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인정할까요? 듣자마자 헛소리라고 무시할 것입니다.
또한 지리지 기록의 산해관.갈석산 위치를 현재의 산해관.갈석산으로 인식한 것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또 <진서/지리지> 낙랑군 수성현 기록을 활용하여 전한이 설치한 낙랑군 지역이라 단정했지만 식민사관맹종자인 천관우.공석구 등도 지적하였듯이 265 년 위.오.촉 삼국시대를 끝내고 다시 화국을 통일한 서진이 설치한 낙랑군이고 약 360 년 전에 설치한 원래의 낙랑군 지역을 관리.유지하지 못하여 북경 방향인 후방으로 옮긴 잠정적인 군.현이였습니다.
결국 윤내현은 어느 시기의 낙랑군인지도 구별하지 못하였고 같은 글자가 쓰였다며 엉뚱한 물길과 뜬금없는 지역을 쳐다고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윤내현은 북조선의 리지린 다음으로 지금의 란하 주변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언급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는 구절을 제대로 해석하고 검증하지 못한 것입니다. 재야에서 환호했던 낙랑군.산해관 설이 `교치 군.현`이라는 식민사관.동북공정 맹종자의 비판 한 구절로 완패당한 이후 현재까지 한국사의 모순된 지리를 석명할만한 논증은 전무합니다. 결국 낙랑군.한반도 평양설은 더욱 굳어졌고 마침내 2017 년 화국 시진핑 주석은 미국 트럼프대통령에게 `한국은 화국의 일부`라고 말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신단재보다도 더 과격하게 연수 계인경 선생은 고려 시기 범장이 편찬했다는 <북부여기> 본문에 자신의 지리 비정 `패수는 今금 란하`라는 구절을 넣어 <환단고기>를 엮었습니다. 今금은 당연히 계연수 선생이 망명한 1910 년 전후입니다. 두 선생의 주장에 의한다면 지금의 란하 주변이 요서.요동.현토.낙랑 등 4 개 군지역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산해관은 요서군 남쪽 지역의 동쪽 끝 지점이였고 패수는 요동군의 동쪽 경계선 바깥 지역을 흐르는 물길이며 동시에 낙랑군의 서쪽 끝 지역에 흐른 물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역사 지리 문제가 해결되었나요? 고대의 요하가 왜 란하인지에 대해서 단재가 간명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미흡합니다. 산해관 근처가 요동군이였다라면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인가요? 요하.패수가 왜 란하인지 논증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 변조.조작의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현 <화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에서 동쪽으로 차례대로 흐르는 대릉하.요하.혼하.압록강 등을 넘어 송화강.흑룡강까지의 지리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 유역의 지리 전체를 <한서/지리지>를 비롯한 화국의 모든 정사급 기록과 대조.검증하여 원래 위치를 규명해야 합니다. 일국 육군참모부가 조작하기 이전의 지리를 찾아야 합니다.
결국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 한국 역사서를 정확히 읽어내려면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 년 당시의 정확한 지리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화국 정사급 지리지에 기록된 대요수.황하와 염난수.요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사는 제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역고/서북로연혁고>를 엮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사학계는 극히 간단한 서북과 정북도 구별하지 못하는 방향 감각도 잃은채 정확한 지리 설명조차도 식민사관의 빌미를 주었다며 비난합니다. 하루빨리 깨닫고 상식적인 시민에게 엎드려 사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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