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월 고침

 

3/ 나. 난수를 건너 산해관으로

 

북경을 떠난 인평대군 일행은 8 일 째 날인 11 월 6 일 난수를 다리 위로 건넌다. 아래는 출발 다음 날인 10 월 30 일과 11 월 2,3, 6 일 일기 전문이다.

 

30일(갑진)

맑음. 일찍 길을 떠나 얼음 위로 로하(潞河)를 건넜다.

지난날에 본 수많은 돛단배가 자취를 감추었으니, 아마도 물이 얼기 전에 모두 돌아간 것 같다. 한낮에 하점(夏店) 점사(店舍)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녁에 삼하현(三河縣)에 이르러 성남 객점(城南客店)에 투숙(投宿)했다. 시초(柴草)를 공급받았다. 감기가 더욱 심해졌다. 계심랑(啓心郞)이 이일선(李一善)을 보내와서 문병했다.

이날은 아침에 50리, 저녁에 30리를 갔다.

 

2일(병오)

맑음. 감기가 조금 나았다.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랐다.
호타하(滹沱河)의 출교(秫橋)를 건넜다. 강물이 반은 얼었다. 사시에 방군점(邦君店)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오시에 다시 길을 떠났다. 계주(薊州)의 큰길로 가지 않고, 사잇길로 갔다. 저녁 늦게 운류하(運流河)에 이르러 객점(客店)에 들었다. 시초를 범양(范陽)으로부터 운반해 왔다. 연경과 요동 도중에서 그 풍속을 자세히 살펴보니, 성시(城市)와 교외에 왕래하는 행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크게 급한 일이 아니고는 남녀가 서로 섞여 다니지 않으니, 이는 상고 시대의 유풍이다. 그러나 상장(喪葬)의 제도는 무너졌다. 장례를 행할 때에는 전적으로 육상산(陸象山 이름은 구연(九淵), 상산은 호임)의 예론을 써서 음악을 연주하여 시체를 기쁘게 한다. 장사 지내는 곳에 비록 석양(石羊 묘 앞에 놓는 돌로 만든 양)은 쓰나, 산기슭의 길지(吉地)를 가리지 않고, 길가의 비습(卑濕)한 곳에 초라하게 묻는다. 심한 자는 시체를 밭두둑 사이에 버려서 바람과 비에 썩고 백골이 저절로 마른다. 애석하다! 명 나라 말기에 상례가 어찌 이와 같은 망측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날은 아침에 40리, 저녁에 25리를 갔다.

 

3일(정미)

맑음. 새벽에 떠났다. 운류하(運流河)를 출교(秫橋)로 건넜는데, 물이 반은 얼었다. 오시에 고수점(枯樹店) 점사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녁에 옥전현(玉田縣)에 이르러 동관리(東關里) 객점에 유숙했다. 시초(柴草)를 바쳐 왔다. 서장관이 와서 문병했다. 우리가 지나온 별산(鼈山)과 고수(枯樹) 사이는 산세가 험준하고, 산성(山城)을 많이 쌓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난번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주민들이 그 예리한 칼날을 갑자기 피했던 곳이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모두 35리씩 갔다.

 

6일(경술)

맑음. 오늘은 동지(冬至) 명절이다. 팥을 사서 죽을 쑤어 일행 사람에게 고루 먹였다. 아침 일찍 떠났다. 야계타(野鷄坨)를 거쳐서 오시에 범가장(范家庄) 충렬사(忠烈祠)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이 사당은 오삼계(吳三桂)의 아버지가 절의(節義)로 죽은 곳인데, 그 소상(塑像)이 아직도 있었다. 여러 날 병으로 신음하고 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었는데, 이제야 다행히 완쾌되었다. 비로소 말을 달려보니 상쾌하기 비할 데 없었다. 난수(灤水)의 3류(流)를 모두 출교(秫橋)로 건넜다. 강물은 반쯤 얼었다. 저녁에 영평부(永平府)에 이르러 남관리(南關里)에 유숙했다. 자진(子珍)과 성서(聖瑞)가 와서 문병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이날은 아침에 40리, 저녁에 20리를 갔다.

 

7일(신해)

맑음. 아침 일찍 떠났다.

남문(南門)으로 들어가니 적루(敵樓) 위에 ‘관해(觀海)’ 두 자가 씌어 있었다. 성(城) 안을 거쳐서 동문(東門)으로 나왔다. 오시에 배음포(背陰鋪) 냇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호행 광록경(護行光祿卿)이 와서 뵙고 술을 바치면서 성의를 표했다.

저녁에 유관점(楡關店)에 이르러 점사(店舍)에 유숙했다. 쇄마부(刷馬夫)들이 길을 가면서 시장 상점의 떡ㆍ국수 같은 물건을 약탈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매양 이를 다스리려 했으나, 죄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오후에 길 위에서 한 한인(漢人)이 꿇어앉아, 쇄마부(刷馬夫)가 엿 등을 빼앗아 먹은 일을 호소했으니, 몹시 해괴한 일이었다. 범인을 색출해서 값을 갑절로 물어주고, 중장(重杖) 80대를 쳐서 일행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초경(初更)에 그저께 보냈던 쇄마주호(刷馬主戶)가 어린 쇄마부를 찾아 싣고 돌아왔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모두 45리씩을 갔다.

 

8일(임자)

맑음. 새벽에 떠났다.오시에 대리영(大里營) 점사(店舍)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산해관에 이르러 서관리(西關里) 객점에 유숙했다. 마패(麻牌)와 아역(衙譯) 차성철(車聖哲)ㆍ김응선(金應先)이 와서 뵈었다. 선래군관(先來軍官)이 출관(出關)한 날짜를 물으니, 초하룻날 관을 통과했다고 한다. 시초를 바쳐 왔다. 호행대통관(護行大通官) 이몽선(李夢先)은 성품이 매우 양순했기 때문에, 부사ㆍ서장관이 마침내 찰원(察院)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을 면했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대군일행은 북경을 떠난 후 하루 쉬고 산해관까지 총 680 리 길을 걸었으니 9 일 동안 하루 평균 75 리 쯤 걸은 셈이다. 북경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며 로하.호타하.운류하.난수를 건넜고 통현.삼하현.옥전현.영평부 남관리.유관점 등을 차례로 거쳐 산해관에 이른 것이다.  

 

청 시기의 로하.호타하.운류하 3 개 물길은 현 <중국전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주) <중국전도> 하북.요녕성 부분도, 2008 년 9 월 중앙지도문화사 인쇄.발행

 

 

청국 정사 <청사고/지리지>에는 로하를 직예성 순천부 통주를 흐르는 북운하北運河로, 삼하현 동쪽에 흐른 호타하는 구하泃河로, 계주薊州동쪽이며 옥전玉田 서쪽에 흐른 운류하는 이하梨河이며 古경수浭水로 설명하고 있다. 난수濡水는 송.거란 시기부터는 란하滦河로 개칭되었지만 대군은 옛 명칭 그대로 기록하였다.(주1) 이러한 지리는 당연히 <한서/지리지> 기록과도 일치한다. 서기전 202 년 전한 건국부터 1911 년 청국 멸망까지 2100 여 년 동안 지형 변화를 일으킬 만한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한/지>에는 <청/지>의 로하를 어양군 어양현을 경유한 750 리 길이 고수沽水로, 호타하.구하를 우북평군 준미俊靡현을 경유한 루수壘水로, 운류하를 우북평군 무종현을 경유한 650 리 길이 경수浭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란하에 대해 알아 보자. 

 

1) 난수.란하

 

난수.란하로 불린 물길이 중국사서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관자>였다. 서기전 7 세기 춘추시대 사건인 제나라 환공과 관중이 북정하여 산융을 정벌한 후 고죽국을 공격하려고 비이계곡에 도착하여 물길을 건너는 정황만 묘사되어 있다.  전한 시기 편찬된 <설원>에서 처음으로 요수遼水라고 기록되었고 <수경> <한서/지리지> 등에서는 난수濡水로 개칭되어 기록되어 있다. 10 세기 초에 건국된 거란국 정사인 <요사/지리지>부터 란하滦河로 개칭되어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도 란하 이름 그대로 위치 변동없이 흘러내렸다. 

 

 결국 란하는 춘추시대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진시황시기까지는 요수였고 한 시기부터는 난수로, 요 시기부터는 란하로 불렸음을 알 수 있겠다.(주2)

 

란하는 <한서/지리지>에서는 현수玄水가 동쪽으로 흘러 난수로 합류한다며 겨우 난수 두 글자만 언급되어 있지만 5 세기 말 북위사람 역도원이 편찬한 <수경주/난수>에는 발원지부터 바다에 흘러들기까지 전체 경유지가 설명되어 있다. 즉 새외 곧 지금의 독석 부근인 어이진 동남지점에서 발원하여 물음표 ? 모습과 같이 흐르며 중.하류는 전한 시기의 어양.우북평 2 군과 요서군의 영지현 동쪽을 경유한다면서 세세한 지류까지 설명되어 있다. 특히 최하류 지역인 요서군 비여현을 경유하면서 양락현에서 흘러내리는 현수를 <한/지>에서는 동쪽으로 흐른다고 했지만 `蓋自東而注也` 즉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물길이라고 정정할 정도로 정확한 물길 전문 지리지라 할 수 있겠다.(주3) 

 

1929 년 편찬된 청국 정사 원고인 <청사고/지리지>에는 란하 길이가 처음으로 기록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현토.요동 2 개 군을 경유하는 염난수와 같은 2100 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영평부

樂亭 ... 滦河自昌黎入 ... 都行二千一百裡 ...

 

이는 서기 80 년 경 편찬된 <한서/지리지> 현토군 서개마현 주석에서 마자수를 받아들인 후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흘러갔다는 2100 리 길이인 염난수 곧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요하와 같은 길이이니 난수.란하도 큰 물길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는 지금의 난수.란하 부근에 설치된 전.후한 시기의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 등 5 개 군의 영역과 치소 및 주요 현 위치가 아래와 같다고 주장한다. <수경주/난수> 기록에서 난수가 동남쪽으로 흐르며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 지역을 경유한 후 바다로 들어갔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난수.란하가 위 표시와 같이 흘렀고 후한 시기의 어양.우북평.요서 3 군 위치가 위와 같았을까?

 

우선 <후한서/군국지> 상곡.광양.어양.우북평.요서 등의 5 개 군 주석에는 5 개 군 위치를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각각 3200 리, 2000 리, 2000 리, 2300 리, 3300 리 떨어져 있다고 개략적이지만 단순.명료하게 설명되어 있다.  

 

<후한서/군국지>

廣陽郡 高帝置 ...葪本燕國 刺史治(一)

(一)漢官曰 洛陽東北二千里

上谷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二百里

漁陽 秦置 洛陽東北二千里

右北平郡 秦置 洛陽東北二千三百里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광양군까지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2000 리,

상곡군까지는 3200 리,

어양군까지는 2000 리,

우북평군까지는 2300 리,

요서군까지는 3300 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위 기록대로라면 우북평.요서 2 개 군의 치소 사이는 1000 리여야 한다. 즉 위 <중국전도>에 추기한 옥전 곧 우북평군 무종현에서 지금의 산해관 북쪽 지점인 요서군 양락현까지를 1000 리라 볼 수는 있겠다. 현재의 란하가 <수경주> 기록의 그 난수라면 광양.어양.우북평.요서 4 개 군까지의 리 수 기록만으로나 동남류하는 난수가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을 경유한다는 설명으로 보아 위 <중국전도>에 표시한 어양.우북평.요서 3 개 군의 위치는 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인평대군은 전.후한 시기 우북평군 무종현이였고 당 측천무후 시기 개칭된 옥전에서 동쪽으로 난수.란하를 건너 도착한 노룡 곧 전.후한 시기의 요서군 비여현까지를 240 리라 하였다. 그 리 수는 대군일행이 직접 걸은 리 수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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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순천부 通州 府東四十裡 ... 白.楡.漒口三河竝自順義入 楡納通惠河 與白會 是爲北運河

                        三河 府東少北百十裡 ... 北有泃河 自平穀入

                        薊州 府東 少北百八十裡 ... 梨河東自遵化入

            준화직예주 ...西南距省治六百三十裡 ... 梨河古浭水 

            영평부 盧龍 ... 滦河自遷安入 合靑龍河

                        遷安 府西北四十裡 ... 滦河自承德府入 合黃花川河瀑河 又南 左得鐵門關水 入潘家口 古盧龍塞也

주2)

<한서/지리지>

遼西郡 肥如 玄水出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주3)

<수경>
濡水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

<수경주>

(1) 濡水出禦夷鎮東南 其水二源雙引 夾山西北流 出山合成一川 又西北逕禦夷故城東 鎮北百四十里 北流 ... 又東北注難河 難河右則汙水入焉 ... 水出東塢南 西北流逕沙野南 北人名之曰沙野 鎮東北二百三十里 西北入難河 濡難聲相近 狄俗語訛耳 ... 濡水又東南 五渡水注之 水北出安樂縣丁原山 南流 ...  濡水又東南逕盧龍塞 塞道自無終縣東出 渡濡水 向林蘭陘 東至清陘 盧龍之險 ... 余按 盧龍東越清陘 至凡城二百許里 自凡城東北出 趣平岡故城 可百八十里 向黄龍則五百里 故陳夀《魏志》田疇引軍出盧龍塞 塹山堙谷 五百餘里 逕白檀 厯平岡 登白狼 望柳城 平岡在盧龍東北逺矣 ...  濡水又東南 逕盧龍故城東 漢建安十二年 魏武征蹋頓所築也 ... 濡水又東南流 逕令支縣故城東 ... 秦始皇二十二年 分燕置遼西郡 令支隸焉 魏土地記曰 肥如城西十里 有濡水 南流逕孤竹城西 右合玄水 世謂之小濡水 非也 水出肥如縣東北玄溪 西南流逕其縣東 東屈 南轉 西迴 逕肥如縣故城南 俗又謂之肥如水 ... 西南流右㑹盧水 水出縣東北沮溪 南流 謂之大沮水 又南 左合陽樂水 水出東北陽樂縣溪 地理風俗記曰陽樂 故燕地 遼西郡治 秦始皇二十二年置 魏土地記曰 海陽城西南有陽樂城 ... 與大沮水合而為盧水也 ... 盧水有二渠 號小沮 大沮 合而入于玄水 ... 地理志曰 盧水南入玄 玄水又西南逕孤竹城北 西入濡水 故地理志曰 玄水東入濡 盖自東而注也 地理志曰 令支有孤竹城 故孤竹國也 史記曰孤竹君之二子 伯夷 叔齊 讓國于此 ... 濡水自孤竹城東南 ... 濡水又逕故城南 分為二水 北水枝出 世謂之小濡水也 東逕樂安亭北 東南入海 濡水東南流 逕樂安亭南 東與新河故瀆合 瀆自雍奴縣承鮑丘水 東出 謂之鹽闗口 魏太祖征蹋頓 與泃口俱導也 世謂之新河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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