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오르다

인평대군의 귀로 중 산해관에서 광녕까지 500 리 로정은 아래와 같았다. 

 

산해관 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10 일(갑인)
맑음. 바람이 크게 불었다.
날이 밝자, 지난날 산관(山關)의 주인이었던 거인(擧人 향시에 합격한 사람) 이생동(李生棟)의 생질 양 수재(楊秀才 수재(秀才)는 미칭(美稱))가 차를 달여 가지고 찾아왔다. 예물을 주었다. 관내(關內)에서 호행(護行)하던 세 역관, 두 장교와 갑군 및 공부랑이 와서 작별 인사를 했다. 신분에 따라 차이 있게 예물을 나누어 주었으니, 이것은 관례이다. 늦게 길을 떠났다. 관문(關門)으로 해서 산관(山關)을 나왔다. 마패 한 사람, 갑군 열 사람, 아역 김응선(金應先)이 호행했다. 팔리보(八里堡)를 거치고 망부사(望夫祠)를 지났다. 망부사는 제(齊) 나라 사람 강녀(姜女)가 남편을 기다리던 곳이다. 강녀의 남편은 10년 동안 성을 쌓다가 죽어서 돌아오지 못했다. 강녀는 이곳에 이르러서 남편을 그리며 슬피 울부짖었다. 오래도록 떠나가지 않다가 돌로 변했다. 사람들이 그 절개를 불쌍히 여겨서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오시에 중전소(中前所) 촌가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전둔위(前屯衛)에 이르러 여염집에 유숙했다. 역(驛)이 아니기 때문에, 시초(柴草)를 받지 못하고 사서 역기(驛騎)에게 주었다.
아침에는 관(關) 안에 있었기 때문에 비록 날이 춥다고는 하나 그처럼 심하게 차지 않았으나, 한번 관문을 벗어나니, 강한 바람이 땅을 휩쓸고 찬 기운이 하늘에 서리었다. 한 겹의 성(城)인데, 춥고 더운 기후의 차이가 어찌 이다지도 심한가. 며칠 전 쇄마주호(刷馬主戶)가 데려온 어린 쇄마부가 도중에서 죽었다. 아마도 날씨가 찬 까닭인 것 같았다. 이날은 아침에 40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14일(무오)
맑음. 아침 일찍 떠났다.
행산(杏山) 큰길로 가지 않고 사잇길로 갔다. 오시에 고교보(高橋堡)로부터 5리 남짓한 냇가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미시에 떠났다. 세 고개를 넘고 금주성(錦州城) 남쪽의 두 큰 내를 얼음 위로 건넜다. 이 내는 소릉하(小凌河)의 상류이다. 서문(西門)으로 해서 들어갔는데, 금휘(金暉)라고 이름 했다. 백탑(白塔) 밑에 있는 천총(千摠)의 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성(城)은 조대수가 3년 동안 포위를 당했던 곳이다. 세 겹으로 포위했던 터가 아직도 남아 있어 분첩(粉堞)이 무너져 있는 것이 얼른 시야(視野)에 들어왔다. 당시 패전으로 폐허가 되었으니, 남아난 것이 없어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성안에 사람이 가득했다. 괴이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더니, 난주(灤州)의 백성 수천 호를 옮겨서 채운 것이라고 했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다 같이 30리씩을 갔다.
15 일(기미)
맑음. 새벽에 떠나 자성(子城)의 동문(東門)을 경유하여 나성(羅城)의 동문을 나왔다. 자성의 문은 이름이 없었고, 나성의 문은 이름이 있었으니, ‘동엄(東嚴)’이라고 했다. 동쪽 냇가를 지났는데, 이곳은 청인이 몽고 군대를 유인해서 묻어 죽인 곳이다. 백골이 아직까지도 쌓여 있으니, 길 가는 나그네들이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오시에 대릉하(大凌河)를 출교(秫橋)로 건넜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강은 반쯤 얼었다. 닭이 울자 인마(人馬)가 먼저 떠났다. 달빛이 컴컴하고 길이 희미해서 의주위(義州衛)로 향하는 길을 잘못 간 자가 과반이었는데, 날이 밝아서야 되돌아 왔다. 인마가 피곤해 있었다. 연경으로부터 용만에 이르기까지 대릉하가 꼭 절반이었다. 이 강을 건너고 보니 돌아갈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사람들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용감하게 나아갔다. 저물녘에 십삼산(十三山)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16일 (경신)
된서리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끼었다가 낮에 걷혔다. 새벽에 떠났다.
사시에 여양역(閭陽驛) 성 밖 촌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짙은 안개에 가리워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저물녘 광녕위(廣寧衛)에 이르러 여염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연경으로부터 광녕위에 이르는 사이에 사슴ㆍ멧돼지ㆍ노루 등을 가득 실은 수레가 도로에 잇달았다고 하는데, 이는 호인(胡人)들이 대규모로 사냥해서 잡은 것이다. 이날 밤에 월식(月蝕)이 있었다. 달빛이 산관(山關)에 희미했다. 갑군(甲軍)이 광녕에 체부(替付)하고 돌아가기를 고하므로 남초(南草 담배)를 나누어 주었다. 이날에는 아침에 40리, 저녁에 50리를 갔다.
 
 

 

대군 일행은 산해관을 나와 구하가 둘러빠졌다는 곳 곧 옛 염난수이며 요하의 최하류 서쪽 지역을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 대릉하를 건너 십삼산을 지나 7 일차 저녘에 광녕에 도착하였다. 북경으로부터는 1180 리 떨어졌고 전한이 설치한 요동군의 무려현이다.  

 

광녕 곧 무려현 지역에 설치된 요동군에서 북쪽으로 대략 400 리 떨어졌다는 현토군으로는 2100 리 길이 염난수와 요산에서 발원한 요수 곧 송.거란 이후의 요하와 혼하가 흘러야하고 요동군 지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즉 지금의 란하 중.하류로는 대릉하.황하.요하.혼하 등이 흘러드는 북경에서 가까운 동쪽 지역에서 가장 큰 수계다. 이러한 수계 본류를 거슬러 오르는 산해관에서 광녕까지의 로정에서 가장 뚜렷한 지점은 아마 대릉하일 것이다. <수경주>에 백랑수가 대요수 하류로 흘러들고 우북평.요서.요동 3 개 군을 경유한다고 하니 마치 큰 물길처럼 인식한다. 하지만 3 군 지역의 끝 지점이 공교롭게도 모여 있는 지역을 흐르기 때문에 사실 큰 물길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 발원지는 지금의 옥전 부근이였을 무종현을 통령하는 우북평군 지역에서 발원한다고 하니 현 <화국전도>에 표시된 지금의 대릉하를 상상한 독자는 의외일 것이다. 

 

대릉하는 전한부터 당까지 대략 1000 여 년 동안 백랑수로 기록.설명되었고 송 이후부터 대릉하로 개칭되어 1932 년 만주국이 건국되는 해까지도 제 이름을 빼앗기지 않고 변동 없이 흘렀다. 

 

백랑수를 상세하게 설명한 첫 문헌은 <수경주/대요수>인데 대요수보다는 남쪽 지류인 백랑수를 설명한 분량이 훨씬 많다. <한서>를 편찬한 반고는 대요수 길이를 1250 리라 했는데 이는 어양군의 750 리 길이 고수, 우북평군의 650 리 길이 경수나 낙랑군의 820 리 길이 열수 등을 뛰어넘는 큰 물길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마도 대요수의 상.중류 지역의 지리를 모르기때문일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그런데 북경 동쪽의 자잘한 물길을 제치고 가장 긴 대요수도 현토군 서개마현을 경유한 후 요동군 서안평현을 지난다는 2100 리 길이 염난수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주1) 결국 대요수는 염난수의 서쪽 지류였을 뿐이며 백랑수는 염난수의 서쪽 지류인 대요수 하류로 흘러드니 염난수의 손자뻘인 셈이다. 

 

어쨋든 백랑수는 우북평군 백랑현에서 발원하여 동북류하며 요서군의 유성현 북쪽을 지난 후 동남쪽으로 크게 휘어 요동군 방현에서 대요수로 합류한 물길(주2)이고 현 <화국전도>에도 우북평.요서.요동 3 군 위치를 예상한 곳에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주1)

漁陽郡 漁陽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入海 行七百五十里

右北平 無終 故無終子國 浭水西至雍奴入海 過郡二行六百五十里

遼西郡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玄兎郡 西蓋馬 馬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주2)

[수경주]
大遼水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 又東南過房縣西 地理志 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東南 北流西北屈 逕廣成縣故城南 ... 又西北 石城川水注之出西南石城山 東流逕石城縣故城南 地理志 右北平有石城縣 北屈逕白鹿山西 即白狼山也 ... 魏書國志曰..遼西單于蹋頓尤强, 為袁氏所厚 故袁尚歸之 數入為害 公出盧龍 塹山堙谷五百餘里 未至柳城二百里 尚與蹋頓將數萬騎逆戰 公登白狼山 望栁城 卒與虜遇 乗其不整 縱兵擊之 虜衆大崩 斬蹋頓 胡漢降者二十萬口 ... 其水又東北入廣成縣 東注白狼水 白狼水北逕白狼縣故城東 ... 白狼水又東 ... 又東北逕昌黎縣故城西 地理志曰交黎也 東部都尉治 應劭曰今昌黎也 ... 髙平川水注之 ... 東流逕倭城北 盖倭地人徙 之 又東南逕乳樓城北 蓋逕戎鄉邑 兼夷稱也 又東南注白狼水 又東北 自魯水注之 ... 白狼水又東北逕龍山西 燕慕容皝以栁城之北龍山之南 福地也 使陽裕築龍城 改栁城為龍城縣 ... 號新宫曰和龍宫 ... 白狼水又北逕黄龍城東 十三州志曰 遼東屬國都尉治 昌遼道有黄龍亭者也 魏營州刺史治 又東北 濫真水 ... 東南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出 東流分為二水 右水疑即渝水也 地理志曰 渝水首受白狼水 西南循山 逕一故城西 世以為河連城 疑是臨渝縣之故城 ... 一水東北出塞 為白狼水 又東南流至房縣 注于遼 魏土地記曰 白狼水下入遼也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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