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년 4 월 고침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오르다

인평대군의 귀로 북경을 나온지 12 일 째날 산해관을 나와 18 일 째날 도착한 광녕까지 500 리 로정은 아래와 같았다. 

 

산해관 0/680- 전둔위 75/755/12- 중후소 50/805/13- 영원위 85/890/14- 탑산소 60/950/15- 금주 60/1010/16-

대릉하.십삼산 80/1090/17- 광녕 90/1180/18-

 

 
10 일(갑인)
맑음. 바람이 크게 불었다.
날이 밝자, 지난날 산관(山關)의 주인이었던 거인(擧人 향시에 합격한 사람) 이생동(李生棟)의 생질 양 수재(楊秀才 수재(秀才)는 미칭(美稱))가 차를 달여 가지고 찾아왔다. 예물을 주었다. 관내(關內)에서 호행(護行)하던 세 역관, 두 장교와 갑군 및 공부랑이 와서 작별 인사를 했다. 신분에 따라 차이 있게 예물을 나누어 주었으니, 이것은 관례이다. 늦게 길을 떠났다. 관문(關門)으로 해서 산관(山關)을 나왔다. 마패 한 사람, 갑군 열 사람, 아역 김응선(金應先)이 호행했다. 팔리보(八里堡)를 거치고 망부사(望夫祠)를 지났다. 망부사는 제(齊) 나라 사람 강녀(姜女)가 남편을 기다리던 곳이다. 강녀의 남편은 10년 동안 성을 쌓다가 죽어서 돌아오지 못했다. 강녀는 이곳에 이르러서 남편을 그리며 슬피 울부짖었다. 오래도록 떠나가지 않다가 돌로 변했다. 사람들이 그 절개를 불쌍히 여겨서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오시에 중전소(中前所) 촌가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전둔위(前屯衛)에 이르러 여염집에 유숙했다. 역(驛)이 아니기 때문에, 시초(柴草)를 받지 못하고 사서 역기(驛騎)에게 주었다.
아침에는 관(關) 안에 있었기 때문에 비록 날이 춥다고는 하나 그처럼 심하게 차지 않았으나, 한번 관문을 벗어나니, 강한 바람이 땅을 휩쓸고 찬 기운이 하늘에 서리었다. 한 겹의 성(城)인데, 춥고 더운 기후의 차이가 어찌 이다지도 심한가. 며칠 전 쇄마주호(刷馬主戶)가 데려온 어린 쇄마부가 도중에서 죽었다. 아마도 날씨가 찬 까닭인 것 같았다. 이날은 아침에 40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14일(무오)
맑음. 아침 일찍 떠났다.
행산(杏山) 큰길로 가지 않고 사잇길로 갔다. 오시에 고교보(高橋堡)로부터 5리 남짓한 냇가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미시에 떠났다. 세 고개를 넘고 금주성(錦州城) 남쪽의 두 큰 내를 얼음 위로 건넜다. 이 내는 소릉하(小凌河)의 상류이다. 서문(西門)으로 해서 들어갔는데, 금휘(金暉)라고 이름 했다. 백탑(白塔) 밑에 있는 천총(千摠)의 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성(城)은 조대수가 3년 동안 포위를 당했던 곳이다. 세 겹으로 포위했던 터가 아직도 남아 있어 분첩(粉堞)이 무너져 있는 것이 얼른 시야(視野)에 들어왔다. 당시 패전으로 폐허가 되었으니, 남아난 것이 없어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성안에 사람이 가득했다. 괴이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더니, 난주(灤州)의 백성 수천 호를 옮겨서 채운 것이라고 했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다 같이 30리씩을 갔다.
15 일(기미)
맑음. 새벽에 떠나 자성(子城)의 동문(東門)을 경유하여 나성(羅城)의 동문을 나왔다. 자성의 문은 이름이 없었고, 나성의 문은 이름이 있었으니, ‘동엄(東嚴)’이라고 했다. 동쪽 냇가를 지났는데, 이곳은 청인이 몽고 군대를 유인해서 묻어 죽인 곳이다. 백골이 아직까지도 쌓여 있으니, 길 가는 나그네들이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오시에 대릉하(大凌河)를 출교(秫橋)로 건넜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강은 반쯤 얼었다. 닭이 울자 인마(人馬)가 먼저 떠났다. 달빛이 컴컴하고 길이 희미해서 의주위(義州衛)로 향하는 길을 잘못 간 자가 과반이었는데, 날이 밝아서야 되돌아 왔다. 인마가 피곤해 있었다. 연경으로부터 용만에 이르기까지 대릉하가 꼭 절반이었다. 이 강을 건너고 보니 돌아갈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사람들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용감하게 나아갔다. 저물녘에 십삼산(十三山)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16일 (경신)
된서리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끼었다가 낮에 걷혔다. 새벽에 떠났다.
사시에 여양역(閭陽驛) 성 밖 촌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짙은 안개에 가리워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저물녘 광녕위(廣寧衛)에 이르러 여염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연경으로부터 광녕위에 이르는 사이에 사슴ㆍ멧돼지ㆍ노루 등을 가득 실은 수레가 도로에 잇달았다고 하는데, 이는 호인(胡人)들이 대규모로 사냥해서 잡은 것이다. 이날 밤에 월식(月蝕)이 있었다. 달빛이 산관(山關)에 희미했다. 갑군(甲軍)이 광녕에 체부(替付)하고 돌아가기를 고하므로 남초(南草 담배)를 나누어 주었다. 이날에는 아침에 40리, 저녁에 50리를 갔다.
 
 

 

대군 일행은 구하가 둘러빠졌다는 곳 곧 옛 염난수이며 요하 최하류의 서쪽 강변 지역을 거슬러 올라 대릉하를 건너 십삼산을 지나 산해관을 나온지 7 일차 저녘에 광녕에 도착하였다. 광녕은 북경으로부터는 1180 리 떨어진 곳이고 의무려산 남쪽에 설치되었으니 곧 전한 시기 요동군의 무려현이다.  

 

아래의 추기와 같이 광녕.의무려산 서북쪽에서는 1250 리 길이 대요수 곧 황하와 요동군에서 북쪽으로 400 리 떨어진 현토군에는 2100 리 길이 염난수와 요산에서 발원한 요수 곧 송.거란부터 개칭된 요하.혼하가 남쪽에 있는 요동군 서안평현과 요양현으로 흘러들어야 한다.  

 

 

 

위 <중국전도>와 같이 구하란 결국 대릉하.황하.요하.혼하 등을 말한 것이다.

 

가. 구하가 둘러빠진 곳

 

한편 예나 지금이나 북경의 동쪽 지역에서 큰 물길로 경계를 이룰 만한 곳은 지금의 란하와 지금의 요하 지역이다. 북경에서 동쪽으로 50 리 떨어진 로하 곧 옛 고수나 500 리 쯤 떨어진 일본이 삭제한 원래의 란하 하류는 지금의 란하 하류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강폭이 좁다. 즉 인평대군 일행은 로하와 원래의 란하는 다리 위로 건넜지만 구하가 둘러빠진 곳은 강폭이 워낙 넓어 다리를 놓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풍랑이 심해 배를 타고 건너는 것도 힘들었다.

 

산해관에서 동쪽으로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배로 건널 수만 있다면 육로를 택한 것에 비해 힘도 덜 들고 일정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청국 조정에서는 이조선 사신들의 로정을 변경을 지나는 육로로 지정하였었고 만약 배로 건넌다 해도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곳이였기 때문에 이조선 시기 거의 모든 사신들의 로정은 육로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외가 없을 수가 없다. 후금이 요양.심양 지역을 차지하자 육로가 막힌 것이다. 결국 1629 년 진하겸변무사 이흘과 동지사 윤은국 일행은 평양에서부터 배를  타고 요동 남쪽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건너려 했지만 풍랑을 만나 동지사 일행이 탄 배가  부서져 바다에 빠져 숨지는 일이 있었다. 

 

아래는 이흘의 해로 로정과 <조천일기> 중 일부다. 

 

평양-강서 돌석강-급수문-용강-장련 정분-삼화 색천-영도-주라천 덕도-석다산-우리채 참채-가도-대계도-거우도-녹도-석성도-장산도-광록도-삼산도-해성도-평도-철산취-여순-쌍도-남신포구-북신-조예두-해평도-각화도-寧遠衛

 

8/1 동지사.서장관과 함께 연광정에 올라 대동강 신.풍백에게 제사. 대동관에서 망궐례를 행하고 오전 9 시에 배를 타고 즉시 선신제를 지낸 후

        출발 강서 돌석강 강촌 숙박 이날 80 리 행

  19 녹도를 지나 石城島에 도착 이날 1 천 수백리를 감 서북쪽이 요양 땅임. 명나라 장수 김정경의 군문 쪽으로 가서 정박하고 유숙함

  20 수 십리를 가서 장산도에 도착하여 유숙

  21 廣鹿島에 정박 이날 백 여리 행 배위에서 유숙

  23 광록도에 정박하는데 마침 세찬 비바람을 만나 다른 두 배가 위험했으나 다행히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아 안심하고 시를

       지어 축하해 주었다.

  26 삼신제를 지냄. 역풍이 불어 배 위에서 유숙. 장계와 편지를 보냄

  27 三山島를 (지나) 海城島에 도착 정박 유숙. 일명 용왕당이라 함

  28 비

9/1 파도가 심하고 날이 추워 겨울옷을 입음

   2 平島에 이름 이날 백 여리 행

   3 배 위에서 삼신제를 지냄

   4 비바람이 거셈

    6  역풍으로 여순旅順을 향하다가 鐵山의 부리를 보고 배 위에서 제사 지냄. 오후에 旅順에 정박.유숙

  11  雙島 정박 

  12 역풍으로 배 위에서 유숙 

  13 南迅 포구 앞 염장에 당도. 이날 400 여리 행. 정풍을 얻은 것은 오직 이 날 뿐임

  14 여기부터(쌍도 앞 염장) 覺華까지는 큰 바다임. 새벽에 삼신제를 배 위에서 지내고 北迅포구 정박 유숙

  17 새벽 1 시 天妃神에 제사. 각화도로 향하다가 풍랑이 심해 早隸頭에 이르러 정박.여기서부터 영원까지 50 리이고 각화까지

        물길로 130 리임. 동지사의 배가 풍랑에 휩쓸려 빠짐 

  18 머물러 배를 수리함 

  19 海平島를 지나니 烟臺가 보임. 각화도에 당도하여 선상에서 숙박. 寧遠까지 10 여리임. 북으로 松山城이 있고 醫無閭라는

        산이 있는데 북쪽 진산이라고 함. 산 밖에는 오랑캐 撻子의 땅이라고  

 

다행히 위의 해로가 묘사된 고지도가 있다. 

 

- 각성연해구애전도(各省沿海口隘全圖)

    청(淸) 진매(陳枚) 乾隆52年至嘉慶17年間(1787-1812)
    소장 : 대만국립고궁박물원. 

 

- <강해전도> 1812 년 추정

 

 

두 고지도에 묘사된 압록강.요동반도 부근을 지금의 압록강과 지금의 요동반도로 인식하겠지만 앞글에서 논증한 것과 같이 중국의 요동은 2000 여 년 동안 지금의 란하 중류 2 개의 승덕이 표시된 지역이였으니 착각.착오가 없어야 할 것이다.

 

사실 지금의 란하 수계에서 한국과 중국의 고.중.근세사가 거의 모두 이루어졌다. 중.하류의 서쪽은 요서.요동 2 군과 평주.영주.영평부가 설치된 지역이였고 동쪽은 진번과 마한.백제 및 준왕조선과 낙랑군 지역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해관에서 광녕까지의 로정에서 가장 의문의 지점은 대릉하일 것이다. 대릉하는 <수경주/대요수> 기록과 같이 대요수 하류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이고 한.당 시기의 백랑수다. 그 발원지는 우북평군 백랑현에 있는 백랑산이고 대략 동북쪽으로 흐르며 우북평.요서.요동 3 개 군을 경유하여 대요수로 합류한다고 하니 마치 큰 물길처럼 인식하며 지금의 대릉하를 떠올리다. 하지만 백랑수.대릉하는 공교롭게도 우북평.요서.요동 3 군의 접경 지역을 흐르기 때문에 짧은 물길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서/지리지>에도 백랑수의 길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서/지리지>에는 백랑수 보다 훨씬 큰 물길인 어양군을 흐른 750 리 길이 고수, 어양.우북평 2 군 지역을 흐르는 650 리 경수, 요동군 지역을 흐르는 1250 리 길이 대요수와 현토.요동 2 개 군 지역을 경유하는 2100 리 길이 염난수, 낙랑군 지역을 흐르는 820 리 길이 열수(주1)등과 같이 길이를 기록한 반면 상곡군의 습여수, 현토군의 요수, 낙랑군의 패수 등은 요서군 비여현 주석의 백랑과 같이 길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연히 650 리 미만의 짧은 물길이기 때문일테지만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지금의 대릉하를 상상하는 독자라면 커다란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쨋든 대릉하는 전한부터 당까지 대략 1000 여 년 동안 백랑수로 기록.설명되었고 송 이후부터 대릉하로 개칭되어 1932 년 만주국이 건국되는 해까지도 제 이름을 빼앗기지 않고 변동 없이 흘렀지만 지금의 대릉하는 아니다. 

 

(주1)

<한서/지리지>

漁陽郡 漁陽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入海 行七百五十里

右北平 無終 故無終子國 浭水西至雍奴入海 過郡二行六百五十里

遼西郡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玄兎郡 西蓋馬 馬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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