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 구하가 둘러빠진 곳을 오르다

인평대군 귀로의 산해관에서 광녕까지 로정은 아래와 같다. 

 

산해관 0/680- 전둔위 75/755- 중후소 50/805- 영원위 85/890- 탑산소 60/950- 금주 60/1010-십삼산 80/1090- 

광녕 90/1180-

 

15일 (기미)
맑음. 새벽에 떠나 자성(子城)의 동문(東門)을 경유하여 나성(羅城)의 동문을 나왔다. 자성의 문은 이름이 없었고, 나성의 문은 이름이 있었으니, ‘동엄(東嚴)’이라고 했다. 동쪽 냇가를 지났는데, 이곳은 청인이 몽고 군대를 유인해서 묻어 죽인 곳이다. 백골이 아직까지도 쌓여 있으니, 길 가는 나그네들이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오시에 대릉하(大凌河)를 출교(秫橋)로 건넜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강은 반쯤 얼었다. 닭이 울자 인마(人馬)가 먼저 떠났다. 달빛이 컴컴하고 길이 희미해서 의주위(義州衛)로 향하는 길을 잘못 간 자가 과반이었는데, 날이 밝아서야 되돌아 왔다. 인마가 피곤해 있었다. 연경으로부터 용만에 이르기까지 대릉하가 꼭 절반이었다. 이 강을 건너고 보니 돌아갈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사람들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용감하게 나아갔다. 저물녘에 십삼산(十三山)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16일 (경신)
된서리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끼었다가 낮에 걷혔다. 새벽에 떠났다.
사시에 여양역(閭陽驛) 성 밖 촌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짙은 안개에 가리워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저물녘 광녕위(廣寧衛)에 이르러 여염집에 유숙했다. 시초를 바쳐 왔다. 연경으로부터 광녕위에 이르는 사이에 사슴ㆍ멧돼지ㆍ노루 등을 가득 실은 수레가 도로에 잇달았다고 하는데, 이는 호인(胡人)들이 대규모로 사냥해서 잡은 것이다. 이날 밤에 월식(月蝕)이 있었다. 달빛이 산관(山關)에 희미했다. 갑군(甲軍)이 광녕에 체부(替付)하고 돌아가기를 고하므로 남초(南草 담배)를 나누어 주었다. 이날에는 아침에 40리, 저녁에 50리를 갔다.
 
 

 

산해관을 나와 구하가 둘러빠졌다는 곳을 끼고 걸어 6 일째 되는 날에 다리 위로 대릉하를 건너 십삼산을 지나 7 일차 저녘에는 광녕에 도착하였다. 산해관부터는 500 리 떨어진 곳이니 일 평균 70 리 쯤의 행보였고 북경으로부터는 1180 리 떨어진 곳이다.  청 시기의 광녕 위치 역시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북진일 수가 없다. 명백한 오류다. 

 

 

 

앞 글에서 이미 대군 일행이 도착한 산해관 위치도 지금의 산해관이 아니라 하였듯이 산해관을 나와 동쪽으로 구하가 둘러빠진 곳이며 장수절이 정확하게 언급한 요수의 최하류이고 실정황은 만灣을 끼고 대략 정북쪽 방향으로 오르는 길이다. 그래야만 우북평.요서 2 개 군을 경유한 대릉하의 하류를 건널 수 있다. 이후 의무려산 남쪽 지산인 13산을 지나 광녕 곧 전한 시기 요동군 무려현에 도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가) 대릉하

 

 
대릉하는 전한부터 당까지 대략 1000 여 년 동안 백랑수로 기록.설명되었고 송 이후부터 대릉하로 개칭되어 청국이 멸망 시까지도 변동 없이 제 위치를 흘렀다. 

 

 

 

백랑수 물길을 상세하게 설명한 문헌은 오직 <수경주>일 뿐인데 대요수 항목에 설명되어 있다. 백랑수가 대요수 하류로 합류하는 지류일 뿐더러 <한서>를 편찬한 반고의 물길 길이 기록 기준인 650 리 길이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짧은 물길이기 때문에 대요수 항목에 넣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쨋든 백랑수는 우북평군 백랑현에서 발원하여 동북류하며 요서군의 유성현 북쪽을 지난 후 동남쪽으로 크게 휘어 요동군 방현에서 대요수로 합류한 물길이다.(주1)

 

그런데 <수경주>에서 백랑수가 발원하여 우북평.요서.요동 3 개 군 지역을 경유하였다고 하니 제법 큰 물길인 것처럼 인식한다. 현재 전해지는 <후한서/군국지> 우북평.요서.요동 3 개 군 주석과도 같이 백랑수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2300 리 떨어진 우북평군 지역에서 발원하여 3300 리 떨어진 요서군의 북쪽 지역인 유성현 북쪽 지점으로 동북류한 후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요동군의 방현으로 흘러가야 하니 대략 최대 1300 리에 이르는 큰 물길로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으나 한.중.일 3 국 역사학계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지역에 표시된 지금의 대릉하 길이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앞 글에서 <후/지>의 광녕.어양.우북평 3 개 군 주석의 낙양부터 떨어진 리 수는 요서.요동 2 개 군 위치를 더 동쪽으로 위치시키려는 고의 변조라고 추단하였고 또한 <한서/지리지> 어양.우북평.요동.현토.낙랑 등 5 개 군에서 물길의 길이를 기록한 것은 고수 750 리, 경수 650 리, 대요수 1250 리, 염난수 2100 리, 열수 820 리(주2) 뿐이기 때문에 백랑수는 절대로 큰 물길일 수가 없는 것이다. 대략 이러한 길이를 기준으로 물길을 언급한 반고는 요서군 임유현의 주석에서 유수의 발원수격인 백랑수의 백랑 두 글자만 언급하였을 뿐이다. 

 

<한서/지리지>

요서군

臨兪   兪水首受白浪 

임유현   유수는 백랑수에서 갈라졌다.

 

결국 백랑수는 650 리에 미치지 못하는 비교적 짧은 물길이라 추측할 수 있고 현 <중국전도> 표시에도 우북평.어양 2 개 군을 경유한 650 리 경수 길이보다도 훨씬 짧게 표시되어 있다.

 

 

 

주1)

[수경주]
大遼水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 又東南過房縣西 地理志 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東南 北流西北屈 逕廣成縣故城南 ... 又西北 石城川水注之出西南石城山 東流逕石城縣故城南 地理志 右北平有石城縣 北屈逕白鹿山西 即白狼山也 ... 魏書國志曰..遼西單于蹋頓尤强, 為袁氏所厚 故袁尚歸之 數入為害 公出盧龍 塹山堙谷五百餘里 未至柳城二百里 尚與蹋頓將數萬騎逆戰 公登白狼山 望栁城 卒與虜遇 乗其不整 縱兵擊之 虜衆大崩 斬蹋頓 胡漢降者二十萬口 ... 其水又東北入廣成縣 東注白狼水 白狼水北逕白狼縣故城東 ... 白狼水又東 ... 又東北逕昌黎縣故城西 地理志曰交黎也 東部都尉治 應劭曰今昌黎也 ... 髙平川水注之 ... 東流逕倭城北 盖倭地人徙 之 又東南逕乳樓城北 蓋逕戎鄉邑 兼夷稱也 又東南注白狼水 又東北 自魯水注之 ... 白狼水又東北逕龍山西 燕慕容皝以栁城之北龍山之南 福地也 使陽裕築龍城 改栁城為龍城縣 ... 號新宫曰和龍宫 ... 白狼水又北逕黄龍城東 十三州志曰 遼東屬國都尉治 昌遼道有黄龍亭者也 魏營州刺史治 又東北 濫真水 ... 東南入白狼水 白狼水又東北出 東流分為二水 右水疑即渝水也 地理志曰 渝水首受白狼水 西南循山 逕一故城西 世以為河連城 疑是臨渝縣之故城 ... 一水東北出塞 為白狼水 又東南流至房縣 注于遼 魏土地記曰 白狼水下入遼也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주2)

漁陽郡 漁陽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入海 行七百五十里

右北平 無終 故無終子國 浭水西至雍奴入海 過郡二行六百五十里

遼西郡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玄兎郡 西蓋馬 馬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莽曰玄兎亭

樂浪郡 呑列 分黎山 列水小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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