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요서백제

 

인평대군이 산해관을 경유하여 광녕에 이를 때까지의 500 리 로정은 한 시기 요서군의 동쪽 변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올라 요동군의 서쪽 지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중국 정사급 지리 기록에는 이곳 요서군 지역에 백제가 설치한 백제군白濟郡 또는 진평군 진평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서/고구려전>

백제국은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모두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고, 백제도 요서를 빼앗아 차지하였다. 백제의 치소를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하였다.

 

<양서>

마한에는 54 개 나라가 있었는데 백제는 그 가운데의 한 나라이었다. 나중에 점차 강대해져 여러 작은 나라들을 겸병하였다. 그 나라는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동진 때 요서.진평 2 군을 빼앗아 차지하여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구당서>

백제의 땅은 장안의 동쪽 6200 리 되는 곳에 있다. 동북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그 나라의 왕이 사는 곳은 동.서 두 성에 있다. 

 

<통고>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진평(당나라 유성과 북평 일대다)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진나라 이래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1 천 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태평환우기>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바로 왜국에 이른다. 진 이래 대대로 번국의 작위를 받았으며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위와 같이 동진 말 즉 서기전 300 년 전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백제군 또는 진평군 진평현은 어디일까? 아래는 백제가 구체적인 장소에 나타나는 기록이다.    

 

<진서/재기/모용황>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狹湊都城 恐方將?國家深害 宜分其兄弟宗屬 徙于西境諸城 撫之以恩檢之以法        

고구려.백제 및 우문.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를 옮겼는데 의를 내세워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 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럽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종속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위 기록은 서기 344 년 모용선비가 세운 연국 기실참군 봉유가 모용황에게 진언한 봉표 일부다. 모용황은 342 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의 항복을 받고 미천왕 시신과 남녀포로 5 만여 명 및 부고에 있던 수많은 보물을 빼앗았다. 따라서 고구려가 옮겼다는 병세란 당연히 포로일 것이고 백제 역시 요서 지역에 있던 백제 병사일 것이다. 당시 모용황은 도성인 용성 화룡궁에 있었다.  

 

- <역대여지험요도/전한강역도>, 1900 년경 청국인 양수경  

 

 

 

위 고지도는 아래 모사도의 적색 실선 내 지역을 묘사한 것이다. 

 

 

 

용성 화룡궁은 요서군 유성현 지역이고 서쪽에는 동북류하는 백랑수.대릉하가 흘렀고 대요수.황하 하류로 들어가야 한다.  당연히 지금의 란하 하류 서쪽 지점이다. 결국 요동군 동쪽 끝에 흐르는 패수의 남쪽에 있었던 백제는 바다로 기록된 지금의 란하 하류인 실정황 만灣을 서쪽으로 건너기만 하면 요서군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한편 봉유가 봉표를 올리고 2 년 후인 346 년에는 부여까지 등장한다.  

 

 <자치통감/ 진기/ ?종성황제 하 영화2년>

永和二年 春 正月...初 夫餘居于鹿山?百?所侵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 燕王?遣世子俊?慕容?慕容恪慕?根三?? 萬七千??夫? 俊居中指수? 事皆以任恪 遂拔夫?? 其王玄及部落五萬?口 而? ?以玄????? 妻以女 

346 년 봄 정월...처음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모용각,모여근 등 세 장군과 만 칠천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토록하엿다. 준은 영내에서 지시를 하였고 군사의 일은 모용각에게 일임하여 드디어 부여를 소탕하여 그 왕 현과 부락 오만여 구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 현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었다.  

 

녹산에 거주하였다는 부여는 서기 285 년 선비 모용외에게 격파된 부여인 것으로 보이며 백제가 녹산에 있던 부여를 공격하고 재차 모용황이 공격했다는 얘기다. 

 

이후 모용씨는 중원 침략에 나섰고 동진과 전진이 대결하는 384 년 이후는 화북 지역을 장악하였지만 곧바로 탁발선비의 공격을 받고 용성으로 되돌아왔다. 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굴곡지며 흐르는 오르도스 지역에서 굴기한 탁발선비는 흉노 유연을 격파하고 음산 일대를 장악하여 315 년 대代를 세웠으나 곧 쇠락하였고 이후 다시 굴기하여 낙양.장안 지역을 차지하여 국호를 위魏로 개칭하였다. 이후 탁발선비 북위北魏는 북진하여 요서군 비여.유성현 지역으로 쫓겨난 모용씨에 이은 풍발.풍홍의 북연 도성 용성을 차지하고 영.평주를 설치했다. 이때 평주 지역에 조선현이 다시 설치된다. 

 

<위서/지형지>

평주 북평군 

朝鮮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 復置 屬焉

昌新 前漢屬涿 後漢晉屬遼東 後屬 有盧龍山

조선현은 전후한과 진 시기 낙랑군에 속하다가 폐현되었는데 (다시 설치하여 북평군에 속하게 했고) 432 년 조선민을 비여현으로(혹 비연현에서) 옮겼다. 

창신현은 전한 시기 탁군, 후한.진 시기에는 요동군 속현이였고 북평군에 소속시켰다. 노룡산이 있다. 

 

위 기록의 조선민은 모용황에게 끌려왔던 부여.고구려.백제 백성이고 평주 북평군 조선현 위치는 청 말기 1900 년 경 양수경이 편찬한 <역대연혁지도/북위형세도>에서 영지.고죽성 북쪽 지점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역대연혁지지도/북위형세도> 1900 년 경 청국인 양수경 

 

 

즉 조선현 위치는 아래와 같이 현재는 삭제된 원래의 란하 최하류다.

 

 

 

 

 

아래는 1980 년 담기양이 편찬했다는 <중국역사지도집/동진16국남북조>에 표시된 조선현이다. 

 

 

 

 

표시된 난수濡水.란하와 진장성 경유지 및 동단까지 묘사가 정확하며 화국 정사 기록과 일치한다. 담기양의 추정도 중에서 가장 의외의 묘사다. 1900 년 양수경의 <험요> 간행 이후 현재까지 란하.황하.요하 유역을 묘사할 때는 섬나라 일국의 지리 조작을 묵인.동조 표시하였지만 위와 같이 란하.산해관 지역만의 도면이라면 정확하게 묘사해서 화국인들에게도 신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인 것 같다. 결국 1900 년 <험요도>를 간행한 양수경이나 1980 년 <중국역사지도집>을 간행한 담기양 등도 북경 이동 지역의 전통적인 유주.평주.영주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요서백제 위치와 관련하여 <요사/지리지>중경대정부 서문 기록을 보겠다. 

 

中京道大定府 虞爲營州夏屬冀州周在幽州之分 秦郡天下是爲遼西 漢爲新安平縣漢末步奚居之 幅員千裏多大山深穀唨險足以自固魏武北征從兵大戰 降者二十餘萬 去之松漠 其後拓拔氏乘遼建牙於此 當饒樂河水之南溫兪河水之北 唐太宗伐高麗 駐蹕於此 部帥蘇文從征有功 奚長可度率衆內附 力量饒樂都督府 咸通以後挈丹始大 奚族不敢復抗 太祖建國...중략...有七金山馬孟山雙山松山土河 統州十縣九 大定縣白( )故地...

중경도 대정부는 우 시기에는 영주, 하 시기는 기주, 주 시기에는 유주라 하였고 진 시기의 군제 하에서는 요서군이라 하였으며 한 시기에는 신안평현으로, 한 말에는 해족이 거주하였다. 폭원이 천 리에 이르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험하여 지키기가 쉬웠다. 위나라 조조가 북벌하여 큰 싸움에서 20 여만 명을 포획하니 송막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탁발씨가 지휘소를 세웠으니 요락하수의 남쪽이며 온유하수의 북쪽 땅이다. 당 태종이 고려를 침공할 때 주필하던 곳이였고 당시 부의 우두머리 소문이 이 전역을 종군하여 자못 공이 있었다. 해족의 장 가도가 족속을 이끌고 내부하니 살펴 요락도독부를 맡겼다. 함통(860~873) 이후 거란이 세력을 키우니 해족은 다시는 항거하지 못했다. 태조(907~925)가 건국하고....중략....칠금산.마맹산.쌍산.송산이 있고 토하가 흐르며 10 주와 9 현을 통할한다. 대정현은 옛 백( )의 땅이다... 

 

 

위와 같이 거란.요국의 중경 대정부 치소인 대정현이 옛 白( ) 땅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옛 백( ) 땅`의 괄호 안은 대체 어떤 글자가 합당할까? 서기전 202 년 전한부터 916 년 거란.요국 건국까지 1100 여 년 동안 요서군의 북쪽 관내 지역에 `백( )`이라는 종족 혹 국명은 백제百濟 외에는 없다. 즉 백제군이고 요서백제이고 진평군진평현이다.  

 

이번엔 <명사/지리지> 북평행도지휘사사 대녕위 대정현 기록을 보자.  

 

<명사/지리지> 北平行都指揮使司 

本大寧都指揮使司 洪武29年9月置 治大寧衛 ...領衛10.....西南距北平布政司八百裏 ...  大寧衛...治大定縣 ...改左右後3衛爲營州左右中3護衛...南有土河...  會州衛   ...西北有馬孟山...土河之源出焉 下流合於漌河 又南入於遼水...

북평행도지휘사사 본래 대녕도지휘사사였고 1396년9월 설치. 대녕위에 치소가 있으며...10 개 위를 통령하고...서남쪽으로 북평포정사까지 거리는 800 리이다  ... 대녕위 ... 대정현에 치소가 있고 ... 좌.우.중 3 개 위를 영주좌.우.중 3 호위로 개칭 ... 남쪽에 토하가 있고 ... 회주위 ... 서북쪽에 마맹산이 있다 ... 토하의 발원지이며 하류는 근(潢의 오기)하로 합쳐지고 또 남쪽으로 흘러 요수로 들어간다.

 

청국 정사에도 대정현.대녕위와 관련된 대녕성이 기록되어 있다.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승덕부

평천현  府東150裡 ...老合河古託紇臣水 俗省曰老河 出喀喇沁右翼南190裡永安山 ...又東北合昆都倫河入建昌 大寧城東北80裡 州判駐 ...

열하 승덕부에서 동쪽으로 150 리 떨어져 있다. ... 노합하 곧 옛탁흘신수이며 속칭 노하가 객라심우익 남쪽 190 리 떨어진 영안산에서 발원한다. ... 또 동북쪽으로 흘러 곤도륜하와 합류한 후 건창현을 경유한다. 대녕성(은 평천현에서) 동북 8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주판이 통령한다. 

 

결국 <요사/지리지>의 옛 백( )땅이라는 대정현 위치는 명 시기 북평행도사사.대녕도사사에 속한 대녕위.영주호위 치소인 대정현이고 그 위치는 청 시기 직예성 승덕부 평천현에서 동북쪽으로 80 리 떨어졌다는 대녕성일 수 밖에 없다. 한 시기 요서군 지역과 요.명.청 시기 대정현.대녕위.대녕성과 가까운 평천현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 위 담기양 추정도와 비록 조작도이기는 하지만 일본 육군참모부 간행했을 것으로 보이는 아래 <왜황도>도 있다.

 

 

 

위 고지도를 통하여 조조에 이어 탁발선비의 북위가 해족을 공격하기 위해 지휘소를 세웠다는 요락하수.온유하수는 아래 기록과 같이 청 시기 직예성의 적봉직예주와 열하구 승덕부 사이에 흐르는 영금하와 열하임을 알 수 있고 노합하와 대릉하가 동북 방향으로 흘러 각각 황하 중류와 황하 하류로 흘러든 정황도 충분히 구별.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적봉직예주 ...西南距省治1320裡...領縣1 潢河自圍場入 州北200餘裡之巴林旗 東南老哈河 自平泉逕東南隅 納伯爾克河 

                   北入建 英金河古饒樂水...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인 보정부까지는 1320 리이다. ... 거느리는 현은 하나이다. 황하는 적봉에서 북쪽으

                   로 200 여리 떨어진 파림기 위장에서 흘러오며 동남쪽에는 평천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백이극하를 받아들인 노

                   합하가 있는데 북쪽으로 흘러 건창현으로 흘러들어간다. 영금하는 옛 요락수인데... 

 

승덕부  ...康熙42年(1702) 建避暑山莊於熱河...西南省治780裡...熱河古武列水...欒河自欒平入合之

                강희42년 피서산장을 열하에 세웠다. ... 서남쪽으로 직예성 치소까지 780 리다. ... 열하 곧 옛무열수가 흐른다.

                란평에서 흘러오는 란하로 합류한다.  

 

 

청 시기의 대릉하 곧 한.당 시기의 백랑수 중류 남쪽 지점이 한 시기 요서군의 북쪽 지역에 설치된 유성현이였고 전연 모용황은 용성현으로 개칭하고 화룡궁을 쌓은 곳이다. 또한 명 시기 대녕위를 영주호위로 개칭한 연유도 북위가 이곳 화룡궁.화룡성이 있는 유성.용성현에 영주를 설치하고 영주와 창려군의 치소로 삼은 전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서/지형지>  영주營州

治和龍城 ... 領郡六 ... 昌黎郡 ... 龍城(縣)眞君八年倂柳城... 建德郡 ... 廣都(縣)眞君八年倂白狼 ... 遼東郡 ... 襄平(縣) ... 有靑山 ... 樂浪郡 ... 治連城 ... 帶方(縣) ... 冀陽郡 ... 平剛.柳城(縣) 營丘郡 ...

 

북위가 설치한 영주에는 창려.건덕.요동.낙랑.기양.영구 등 6 군이 속했고 창려군은 한 시기 요서군 유성현을, 건덕군의 광도현은 한 시기 우북평군 백랑현이였을 곳을 병합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사/지리지>에서 대정부 대정현 지역을 요서군 지역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하여 어양군을 흘러내린 고하의 하류에서 동쪽으로 난수.란하까지 이어지는 인위적으로 개통한 신하로 흘러드는 봉대수의 발원지인 신안평현이라 설명한 것은 오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후금.청국을 세운 만주족이 한족 명국을 멸망시킨 후 편찬한 <만주원류고>에도 요서백제지에 대한 기록을 취합.분석해 놓았다.   

 

<흠정만주원류고> 부족3 백제

<통고>에는 또 `남쪽으로 신라와 접해 있다`고 하고, <당회요>에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른다`고 하였는바, 백제의 지경을 상고해 보니.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금주.의주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해.개에 걸쳐 있고, 동남쪽으로 조선의 황해.충청.전라도의 제도에서 끝이 나,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쭉하다. 따라서 유성과 북평을 기준으로 신라가 있는 곳을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게 되지만 경상과 웅진을 기준으로 이를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있게 된다. 또 북위 때 백제가 물길과 공모해서 힘을 합해 고구려를 취하려고 했던 것을 보더라도 동북쪽이 역시 물길과 인접해 있었던 것이다.                                                                                             <흠정만류원류고> 장진근 역주 146 쪽

 

위 기록과 같이 18 세기 말의 만주족은 요서백제 위치를 <요사><명사><청사고> 지리지에서 설명한 토하.노합하가 동북류하여 황하 중류로 흘러드는 대정현.대녕위.건창현 보다는 훨씬 동북쪽인 대릉하.황하 하류 지역인 의주.금주.광녕 지역으로 설명했다. 부정확한 설명이다. 하지만 광녕 등의 남쪽으로 걸쳐 있다는 해.개는 해성과 개평을 지목한 것으로 이곳은 패.대수의 남쪽 지역이니 당연히 백제의 초도 위례성.한성 지역이며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남평양성일 것이다. 

 

결국 거란 역사를 편찬한 몽고족과 만주족이 인식하는 요서백제 추정지는 동.서 방향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어쨋든 5 세기의 위진 남북조 시기의 <송서><양서> 부터 18 세기 말에 편찬된 <만주원류고>까지 대략 1300 여 년 동안 중국 정사급 기록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백제의 요서군 지역 진출과 경략이 망상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백제본기> 개로왕 18 년(472) 기록에는 사사로이 임명한 북위로 보내는 사신의 직함을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라 하였고 그 상표문 중에 `풍족의 사마는 조축의 생각이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천위가 한 번 거둥하면 정벌이 있고 싸움은 없을 것이며 신도 비록 불민하나 온힘을 다하여 마땅히 부하를 거느리고 성풍을 이어 향응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여기에서 말한 대방과 낙랑의 여러 군은 500 여 년 전 한.조위 등에서 설치한 만.우거가 잠시 점거한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 부근의 대방.낙랑군을 말한 것이 이 아니다.

 

개로왕이 언급한 풍족이란 모용선비가 중원에서 쫓겨온 후연을 탈취한 풍발.풍홍의 북연을 말한 것이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 24 년(436) 기록과 같이 북위가 북정하여 북연의 백랑성을 공격하고 승리하자 장수왕은 장수 갈로맹광을 북연 도읍 용성 화룡궁으로 보내 전후 80 여 리에 이르는 풍홍과 용성 호구를 요동을 거쳐 고구려로 데려갔지만 용성 부근에 남은 북연 백성이 조축의 생각이 있고 즉 주인인 풍홍을 따를 것이고 낙랑의 여러 군이 고향을 생각한다는 것 역시 용성 부근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의 위시한 여러 군 백성들이 옛 풍홍을 잊지 않아 북위를 맞이하려는 군세가 상당하니 속히 용성으로 군사를 보내 고구려 영향력을 말끔하게 제거해달라는 얘기다. 

 

결국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 지역에서 굴기한 백제는 서진말인 서기 310 년대 부터 서쪽에 있는 바다 곧 지금의 란하 최하류를 건너 요서군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344 년에는 선비족 모용황 도성인 용성에 부여.고구려와 함께 포로 신분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436 년 풍홍이 고구려로 납치된 후로는 풍홍의 화룡성 지역까지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대방 외 여러 군을 설치하였을 것이다. 

 

이제 동성왕 10 년(488년) 기록을 보자.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위나라가 보낸 병사가 우리를 공격했지만 우리에게 패했다.

 

백제가 북위 병사를 패배시켰다는 기록인데 마땅히 북연 풍홍의 도성 용성.화룡궁 지역을 포함하여 서남쪽에 있는 대정현.대녕위.대녕성 지역까지를 차지한 요서백제의 기사다. 탁발선비 북위는 요서군의 북쪽 지역 유성현 일대의 모용선비 지역까지만 정벌하였을 뿐이지 고구려 영역은 커녕 요택을 건너지도 못했다. 

 

 

 

 

아래는 요서백제와 관련한 선학들의 인식이다.

 

신경준 (1770년 與地考)
최치원이 당나라 대사시중에게 보내는 시에 나오는 백제가 대륙 동해안을 뒤흔들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백제의 백제의 요서 영유는 사실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누락된 것이라고 봄


신채호 (1931년 조선상고사)
근구수왕때 중국의 요서 산동 강소 절강 등의 지방을 점령하였던 것이며 북조계의 사서에 기록이 없는 것은 북조사관들의 태도 때문임. 백제가 멸망할 때에도 요서에 백제군이 있었다고 봄.

 

김세익 (1967년 력사과학 , 1991년 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
백제의 요서진출을 3세기 말로 보고, 6세기 초중엽에 걸쳐서 요서지역에 진평군을 두고 다스렸고,
백제군의 위치는 대릉하, 소릉하의 하류유역에서 란하의 하류유역으로 봄.

 

 

 

마. 월지장

 

최치원과 신채호는 백제가 서국의 동해안 곧 산동.강소.절강 등의 해안 지역을 점령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 인식한 것이다. <구당서>에도 백제의 땅이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 월주越州도 강소.절강 지역일 수는 없다.

 

<청사고/지리지> 기록에는 직예성 준화직예주 풍윤현에 월지장越支場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豊潤 ...州東南百裡 改예同玉田  海南二百裡...薊運河自玉田緣界...越支場 南百裡 大使駐...

풍윤...(준화직예)주에서 동남쪽으로 100 리 떨어진 곳이다. (옥전과 같이 고쳐 예속시켰고)? 남쪽으로 200 리 떨어져 바다가 있고 ...계운하가 옥전 부근 경계에서 흘러온다. ... 월지장은 남쪽으로 100 리 떨어진 곳인데 대사가 주재한다.

  

풍윤현에서 남쪽으로 100 리 떨어지고 대사大使가 머무른다는 월지장越支場은 발해 연안의 습지대고 대략 지금의 당산 부근으로 보인다. 월지장은 청국이 주.현 지역 내에 설치한 시설 관명인 주판州判.통판通判.주부主簿.순사巡司.유격遊擊.부장副將 등과는 성격이 판이한 대사大使가 주재駐在하였다. 아마도 고대부터 전해지거나 특수한 직무와 관련된 직명으로 보이며 월지장 위치도 요서백제지와도 멀지 않다. 

 

아마도 <구당서>의 그 월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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