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월 고침
나. 요서백제
산해관에서 광녕까지의 500 리 로정 중 금주까지 330 리가 요서군의 남북 지역이였고 대릉하를 건너 광녕까지 170 리는 요동군의 서쪽 지역이였다. 결국 요서와 요동을 나누는 경계는 대릉하인 것이다. 그런데 중국 정사 기록에는 이 요서군 지역에 백제가 설치한 백제군白濟郡 또는 치소인 진평군 진평현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송서>
백제국은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모두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고, 백제도 요서를 빼앗아 차지하였다. 백제의 치소를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하였다.
<양서>
마한에는 54 개 나라가 있었는데 백제는 그 가운데의 한 나라이었다. 나중에 점차 강대해져 여러 작은 나라들을 겸병하였다. 그 나라는 원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동진 때 요서.진평 2 군을 빼앗아 차지하여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통고>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진평(당나라 유성과 북평 일대다)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진나라 이래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1 천 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구당서>
백제의 땅은 장안의 동쪽 6200 리 되는 곳에 있다. 동북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그 나라의 왕이 사는 곳은 동.서 두 성에 있다.
<태평환우기>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서쪽으로 대해를 한계로 하여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고 소해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바로 왜국에 이른다. 진 이래 대대로 번국의 작위를 받았으며 백제군을 스스로 두었다.
위와 같이 동진 말 즉 서기전 300 년 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를 차지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가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흥망하였다는 이제까지의 역사 인식으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기록들이다.
아래는 서기 344 년 모용선비가 세운 연국의 기실참군 봉유가 모용황에게 진언한 봉표 내용 일부다.
<진서/재기/모용황>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狹湊都城 恐方將?國家深害 宜分其兄弟宗屬 徙于西境諸城 撫之以恩檢之以法
고구려.백제 및 우문.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를 옮겼는데 의를 내세워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니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 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럽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종속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위 기록은 342 년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의 항복을 받고 전왕 미천왕의 시신과 남녀포로 5 만여 명 및 부고에 있던 수많은 보물을 빼앗고 난 2 년 후의 기록이다. 그런데 대체 백제 병세가 모용선비 도성에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선비족 연국의 기실참군 봉유가 말한 도성은 전한이 설치한 요서군 유성현 북쪽에 건축한 화룡궁이고 고구려.백제 등이 옮겼다는 병세란 당연히 포로일 것이라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고구려.백제 포로가 있었다는 화룡궁은 지금의 어느 지점일까? 아래는 요서군 유성현 부근을 상세하게 묘사한 청국인 양수경이 1900 년쯤 간행한 <역대여지험요도>다.
- <역대여지험요도/전한강역도>

주) 양수경이 표시한 대요수는 염난수.요하의 오기이며 요동군 양평현도 염난수 변에 있던 것이 아니고 대요수가 경유하는 곳에 설치되었으니 명백한 오류다.
미흡한 부분은 추기하고 오류 부분은 적색 x 표시하였다. 적색 실선은 인평대군 일행의 귀로 로정이다.

<수경주/대요수> 기록에 의하면 용성 화룡궁은 요서군 유성현 북쪽, 서쪽에는 동북류하는 백랑수.대릉하가 흘렀다니 대략 위 표시 지점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위의 <역대여지험요도/전한강역도>의 대축척도는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비류.온조 형제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패.대수를 건너 마한에게 얻은 100 리 땅에 세운 백제도 당연히 요동군 동쪽 끝에 흐르는 위 추정도에 표시한 패수의 남쪽일 수 밖에 없다. 즉 요동군 동쪽 지역의 남쪽이며 낙랑군의 서쪽 지역이다. 또한 그 위치는 한반도 중부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하류의 동쪽 강안 지역인 것이다. 즉 이제까지의 지리 추정과 같이 대요수가 염난수 중류로 합류한 후 강폭이 크게 넓어진 만灣의 동쪽 지역이다.
결국 백제는 1250 리 길이 대요수가 흘러든 2100 리 길이의 염난수 하류를 서쪽으로 건너기만 하면 요서군에 닿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발해 바다가 아니라 염난수 하류인 만灣을 건너는 것이니 한국강단사학계의 추정과 같이 잘못된 기록이라거나 불가능한 일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봉유가 봉표를 올리고 2 년 후인 346 년에는 부여와 백제가 함께 등장한다.
<자치통감/ 진기/ ?종성황제 하 영화2년>
永和二年 春 正月...初 夫餘居于鹿山?百?所侵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 燕王?遣世子俊?慕容?慕容恪慕?根三?? 萬七千??夫? 俊居中指수? 事皆以任恪 遂拔夫?? 其王玄及部落五萬?口 而? ?以玄????? 妻以女
346 년 봄 정월...처음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모용각,모여근 등 세 장군과 만 칠천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토록하엿다. 준은 영내에서 지시를 하였고 군사의 일은 모용각에게 일임하여 드디어 부여를 소탕하여 그 왕 현과 부락 오만여 구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은 부여 현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딸을 주었다.
녹산에 거주하였다는 부여는 서기 285 년 선비 모용외에게 격파된 부여의 주세력이 아니라 잔여 세력이 용성 주위에 있었을 녹산으로 끌려온 잔여세력이였을 것이다. 선비족의 동북쪽에 설치된 요동.현토군 지역에서도 훨씬 북쪽에 있었던 부여를 백제나 선비가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모용 선비족은 중원 침략에 나섰고 동진과 전진이 대결한 384 년 직후 화북 지역을 장악하였지만 곧바로 탁발선비의 공격을 받고 용성으로 되돌아왔다. 탁발선비는 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굴곡지며 흐르는 오르도스 지역에서 굴기하여 한차례 굴곡을 겪은 후 낙양.장안 지역을 차지하여 국호를 위魏로 개칭하였다. 이후 북진하여 요서군 비여.유성현 지역으로 쫓겨난 모용씨를 꺽은 풍발.풍홍을 격파한 후 용성을 차지하고 이곳에 영.평주를 설치했다. 조선현이 설치된 것이 이 시기다.
<위서/지형지> 평주 북평군
朝鮮/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 復置 屬焉
조선현은 전후한과 진 시기 낙랑군에 속하다가 폐현되었고 432 년 조선민을 비여현으로 옮기고 조선현을 다시 설치하고 북평군에 속하게 했다.
위 기록의 조선민은 모용황에게 끌려왔던 부여.고구려.백제 백성일 것이다. 북위의 평주 북평군 조선현 위치는 청 말기 1900 년 경 양수경이 편찬한 <역대연혁지도/북위형세도>에서 영지.고죽성 북쪽 지점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역대연혁지지도/북위형세도> 1900 년 경 청국인 양수경

그러면 요서백제 위치는 정확히 어디였을까?
<요사/지리지>중경대정부 서문 기록을 보겠다.
中京道大定府 虞爲營州夏屬冀州周在幽州之分 秦郡天下是爲遼西 漢爲新安平縣漢末步奚居之 幅員千裏多大山深穀唨險足以自固魏武北征從兵大戰 降者二十餘萬 去之松漠 其後拓拔氏乘遼建牙於此 當饒樂河水之南溫兪河水之北 唐太宗伐高麗 駐蹕於此 部帥蘇文從征有功 奚長可度率衆內附 力量饒樂都督府 咸通以後挈丹始大 奚族不敢復抗 太祖建國...중략...有七金山馬孟山雙山松山土河 統州十縣九 大定縣白( )故地...
중경도 대정부는 우 시기에는 영주, 하 시기는 기주, 주 시기에는 유주라 하였고 진 시기의 군제 하에서는 요서군이라 하였으며 한 시기에는 신안평현으로, 한 말에는 해족이 거주하였다. 폭원이 천 리에 이르고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험하여 지키기가 쉬웠다. 위나라 조조가 북벌하여 큰 싸움에서 20 여만 명을 포획하니 송막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탁발씨가 지휘소를 세웠으니 요락하수의 남쪽이며 온유하수의 북쪽 땅이다. 당 태종이 고려를 침공할 때 주필하던 곳이였고 당시 부의 우두머리 소문이 이 전역을 종군하여 자못 공이 있었다. 해족의 장 가도가 족속을 이끌고 내부하니 살펴 요락도독부를 맡겼다. 함통(860~873) 이후 거란이 세력을 키우니 해족은 다시는 항거하지 못했다. 태조(907~925)가 건국하고....중략....칠금산.마맹산.쌍산.송산이 있고 토하가 흐르며 10 주와 9 현을 통할한다. 대정현은 옛 백( )의 땅이다...
위와 같이 거란.요국의 중경 대정부 치소인 대정현이 옛 白( ) 땅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옛 백( ) 땅`의 괄호 안은 대체 어떤 글자가 합당할까? 어쨋든 요국 강역이 묘사된 <지리도>를 보자.
- <지리도> 1247년 송인 황상이 각석

위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을 확대한 것이 아래이고 이해하기 쉽도록 추기했다.

서기전 202 년 전한부터 916 년 거란.요국 건국까지 1100 여 년 동안 요서군의 북쪽 관내 지역에 `백( )` 두 글자의 종족 혹 국명은 백제百濟 외에는 없다. 즉 거란.요국의 중경 대정부 치소인 대정현이 요서백제이고 백제군이며 진평군진평현의 위치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번엔 <명사/지리지> 북평행도지휘사사 대녕위 대정현 기록을 보자.
<명사/지리지> 北平行都指揮使司
本大寧都指揮使司 洪武29年9月置 治大寧衛 ...領衛10.....西南距北平布政司八百裏 ... 大寧衛...治大定縣 ...改左右後3衛爲營州左右中3護衛...南有土河... 會州衛 ...西北有馬孟山...土河之源出焉 下流合於漌河 又南入於遼水...
북평행도지휘사사 본래 대녕도지휘사사였고 1396년9월 설치. 대녕위에 치소가 있으며...10 개 위를 통령하고...서남쪽으로 북평포정사까지 거리는 800 리이다 ... 대녕위 ... 대정현에 치소가 있고 ... 좌.우.중 3 개 위를 영주좌.우.중 3 호위로 개칭 ... 남쪽에 토하가 있고 ... 회주위 ... 서북쪽에 마맹산이 있다 ... 토하의 발원지이며 하류는 근漌(潢의 오기)하로 합쳐지고 또 남쪽으로 흘러 요수로 들어간다.
청국 정사에도 대정현.대녕위와 관련된 대녕성이 기록되어 있다.
<청사고/지리지> 직예성 승덕부
평천현 府東150裡 ...老合河古託紇臣水 俗省曰老河 出喀喇沁右翼南190裡永安山 ...又東北合昆都倫河入建昌 大寧城東北80裡 州判駐 ...
열하 승덕부에서 동쪽으로 150 리 떨어져 있다. ... 노합하 곧 옛탁흘신수이며 속칭 노하가 객라심우익 남쪽 190 리 떨어진 영안산에서 발원한다. ... 또 동북쪽으로 흘러 곤도륜하와 합류한 후 건창현을 경유한다. 대녕성(은 평천현에서) 동북 80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주판이 통령한다.
결국 <요사/지리지>의 옛 백( )땅이라는 대정현 위치는 명 시기 북평행도사사.대녕도사사에 속한 대녕위.영주호위 치소인 대정현이고 그 위치는 청 시기 직예성 승덕부 평천현에서 동북쪽으로 80 리 떨어졌다는 대녕성일 수 밖에 없다. 한 시기 요서군 지역과 요.명.청 시기 대정현.대녕위.대녕성과 가까운 평천현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 비록 조작도이기는 하지만 일본 육군참모부 간행했을 것으로 보이는 아래 <왜황도>도 있다.
- <황조일통여지전도- 이후 왜황도라 한다>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간행한 <황조일통여지전도>를 일본에서 1865 년 재간행했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

따라서 서진 말인 서기 300 년 전후하여 요서지역의 백제군 및 고구려.백제.신라.가라.탐라 등의 강역도 아래와 같았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후금.청국을 세운 만주족이 한족 명국을 멸망시킨 후 편찬한 <만주원류고>에는 요서백제지에 대한 기록이 취합.분석되어 있다.
<흠정만주원류고> 부족3 백제
<통고>에는 또 `남쪽으로 신라와 접해 있다`고 하고, <당회요>에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른다`고 하였는바, 백제의 지경을 상고해 보니. 서북쪽으로는 오늘날의 광녕.금주.의주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해.개에 걸쳐 있고, 동남쪽으로 조선의 황해.충청.전라도의 제도에서 끝이 나,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쭉하다. 따라서 유성과 북평을 기준으로 신라가 있는 곳을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게 되지만 경상과 웅진을 기준으로 이를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있게 된다. 또 북위 때 백제가 물길과 공모해서 힘을 합해 고구려를 취하려고 했던 것을 보더라도 동북쪽이 역시 물길과 인접해 있었던 것이다. <흠정만류원류고> 장진근 역주 146 쪽
위 기록과 같이 18 세기 말의 만주족은 요서백제 위치를 <요사><명사><청사고> 지리지에서 설명한 토하.노합하가 동북류하여 황하 중류로 흘러드는 대정현.대녕위.건창현 보다는 훨씬 동북쪽인 대릉하.황하 하류 지역인 의주.금주.광녕 지역으로 설명했다. 부정확한 설명이다. 하지만 광녕 등의 남쪽으로 걸쳐 있다는 해.개는 해성과 개평을 지목한 것으로 이곳은 패.대수의 남쪽 지역이니 당연히 백제의 초도 위례성.한성 지역이며 또한 고구려 장수왕 시기의 남평양성일 것이다.
결국 거란 역사를 편찬한 몽고족과 만주족이 인식하는 요서백제 추정지는 동.서 방향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어쨋든 5 세기의 위진 남북조 시기의 <송서><양서> 부터 18 세기 말에 편찬된 <만주원류고>까지 대략 1300 여 년 동안 중국 정사급 기록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백제의 요서군 지역 진출과 경략이 망상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제 <삼국사/백제본기> 동성왕 10 년(488년) 기록을 보자.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위나라가 보낸 병사가 우리를 공격했지만 우리에게 패했다.
백제가 북위 병사를 패배시켰다는 기록인데 마땅히 북연 풍홍의 도성 용성.화룡궁 지역을 포함하여 서남쪽에 있는 대정현.대녕위.대녕성 지역까지를 차지한 요서백제의 기사다. 탁발선비 북위는 요서군의 북쪽 지역 유성현 일대의 모용선비 지역까지만 정벌하였을 뿐이지 고구려 영역은 커녕 대요수.염난수가 흘러든 요택도 건너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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