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연장성과 고려 천리장성
인평대군은 연경으로 향하던 중 어느 시기에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장성을 언급하였었다.
아래는 1656 년 9 월 3 일 일기다.
맑음. 방물(方物)은 이미 수레로 운반했다. 거기에 실은 것은 쇄마(刷馬) 및 향부(餉府)ㆍ운부(運府)에서 보내는 물건이다.
장사치들은 뒤에 떨어져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편에 조정에 올리는 글과 장계를 부치고, 집에도 편지를 보냈다.
늦게 떠나서 성 뒤로 해서 삼하보(三河堡)를 지나 삼차하(三叉河) 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성은 삼차하 언덕에 있는데, 폐허가 되어서 사람이 없고, 냇가에 오직 뱃사공 한두 집만이 살고 있었다. ‘삼차’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요동(遼東)의 태자하(太子河), 심양(瀋陽)의 혼하(混河)와 두을비성(豆乙非城)의 요하(遼河)가 모두 북막(北漠)으로부터 흘러서 요좌(遼左)로 들어가서, 세 줄기가 여기에서 합류(合流)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광록도(廣鹿島) 앞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나, 세 물의 근원은 자세하지 않다.
두을비(豆乙非)는 심양 서쪽 백 리 밖 요하(遼河) 북쪽 언덕에 있으니, 역시 청 나라 사람이 명 나라 군사와 대진(對陣)했던 곳이다. 산해관(山海關) 머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에 있는 큰 사막(沙漠)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고, 5리마다 돈대(墩臺) 하나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 한 줄기는 건주(建州)의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보(淸河堡)ㆍ무순보(撫順堡) 등지로 해서 개원위(開元衛)ㆍ철령위(鐵嶺衛) 등을 지나 요하(遼河)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보(三河堡)에 이르렀고, 한 가닥은 섬서(陝西)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太原府)ㆍ대동부(大洞府) 등지로 해서 큰 사막(沙漠)을 거쳐 의무려(醫巫閭) 뒤로 꾸불거리다가 임녕보(林寧堡)ㆍ진원보(鎭遠堡)ㆍ진녕보(鎭寧堡) 등을 지나 고평역(高平驛)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그 터뿐이요, 임녕(林寧) 근처에는 풀숲 사이에 분첩(粉堞)이 간간이 있었다.
산해 장성(山海長城)은 곧 조룡(祖龍 진시황(秦始皇))이 쌓은 것이지만, 이 두 줄기 장성(長城)은 어느 시대에 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장(牛莊)으로부터 광녕(廣寧)에 이르기까지 200여 리 사이는 큰 들판이 모두 진흙수렁으로서 당조(唐朝)의 이른바 ‘요택(遼澤)에 장마가 지면 육지로 배가 다닐 지경이다.’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행려(行旅)들이 다니지 못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이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민정(民丁)을 크게 동원하여 우장(牛莊)으로부터 광녕(廣寧)까지 큰 둑을 쌓았는데, 높이와 너비가 모두 두어 길이나 된다. 둑 북쪽에서 흙을 파온 곳은 호(壕)가 되었는데, 이 호(壕)로는 배가 다니고, 둑으로는 수레가 다닐 만하여 백성들이 몹시 편하게 여겼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후로는 다시 수리를 하지 않아 간간이 무너졌고 해자[濠]의 물이 넘쳐 흘렀다. 남아 있는 둑도 몹시 좁아서 말 한 필도 다니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매양 장마철을 당하면 굽이마다 물이 막히고 곳곳에 수렁이며, 또 모기가 떼를 지어 사람이 왕래할 수가 없으나 이러한 깊은 가을에는 겨우 통행할 수가 있었다. 참으로 요좌(遼左)는 죄인이나 살 땅이다. 하안(河岸)을 거닐면서 둘레를 돌아보니, 들과 하늘이 서로 맞닿고 사방에 산이라고는 없었다. 넓고 넓어서 마치 큰 바다 가운데에서 배를 탄 것과 같았다. 학야(鶴野)는 9000리란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니었다.
사람과 말이 다 건너고 나니 강바람이 늦게 일어났다. 노를 재촉하여 하수를 건너가 북쪽 언덕에서 노숙했다. 오늘 사령역(沙嶺驛)에 이르지 못한 것은 나루가 험하여 뱃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방물(方物)을 실은 수레는 먼저 건넜다.
이날 25리를 갔다.
이 곳 요동 지역의 장성은 아래 <경판도>에 추기한 것 같이 당연히 전국시대의 연장성燕長城과 고려의 장성일 수 밖에 없다.
의무려 뒤로 꾸불거린다는 연장성은 <사기/흉노열전>에 설명된 조양부터 양평까지의 장성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건주위 경계에서 시작하여 철령.개원위 등을 지난다는 장성 곧 요하의 동쪽 지역의 장성은 수.당.거란 공격에 대비한 고구려.고려의 천리장성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연장성과 고구려.고려 장성을 직접 보고 기록을 남긴 이는 아마도 인평대군이 유일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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