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월 고침

 

요택을 건너다 

 

인평대군은 1656 년 음력 11 월 17 일 아침 광녕을 떠나 요택을 가로지른 후 동쪽 끝에 흐르는 요하를 건너 우장에 올라섰다.  광녕부터는 210 리, 연경부터는 1390 리 떨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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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녕 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우장 65/1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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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세기 중반 광녕에서 동쪽으로 요택.요하를 가로지르는 정황이 어떤지 대군 일기를 보자.

 

17 일 (신유)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갰다. 밤에 떠났다.

오시에 반산역에 이르러 연못 가에서 얼음을 깨고 점심을 넉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고평관에 이르러 여염집에 유숙했다. 여기는 참이 아니기 때문에 시초를 받지 못했다. 땔나무를 베어서 썼다. 지난번 관을 나올 때는 날씨가 몹시 찼지만 그 후 좀 따뜻해져서 극심한 추위를 면했다. 고평역은 좁고도 누추해서 처음에는 노숙할 생각을 했으나, 때마침 삭풍이 저물녘에 심하게 불어서 할 수 없이 촌가에 투숙했는데 괴로움이 형언할 수 없다. 어제 낮 여양에 이르렀을 때 사람마다 그곳에 머물러 말을 쉐게 하고 이튿날 흑어구의 길을 따라 고평에 이르고자 했으니, 이는 대개 지름길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 길이 비록 광녕대로를 가는 데 비해서 한나절 정도 시간이 단축된다고는 하나, 그래도 1 백 2, 30 리 길이 되어 요사이 같은 짧은 해로는 반드시 밤을 새워 온종일 가야만 고평에 도달할 수가 있다. 더구나 이 길은 여름에는 진창이고, 겨울에는 빙판이어서 말이 미끄러져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워 온갖 애로가 겹친 곳이다. 광녕 대로는 비록 멀리 돌아가는 길이기는 하나, 여러 참이 있어서 숙식이 편리하다. 그래서 중론에 따르지 않고 대로를 따라서 온 것이다. 이 역에 이르러서 지름길의 형편을 물으니, 요사이는 인적이 통하지 못한다고 했다. 만일 중론에 따랐어라면 중도에서 반드시 크게 낭패할 뻔했다. 옛사람이 경계하는 바, `급하게 서두르면 도리어 이루지 못한다`라는 것이 진실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날은 아침에 50 리, 저녁에 40 리를 갔다.

 

18 일 (임술)

맑음. 아침 일찍 떠났다.

사시에 평안보(平安堡)에 이르러 긴 장벽(墻壁) 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녁에 사령역(沙嶺驛) 성 북쪽 연못 가에서 노숙했다. 부사와 서장관을 권해서 성안으로 보냈는데, 연못에서 성까지 거리가 5리 밖에 안 됐다. 겨울날이라 들에서 거처하는 것이 좋을 것은 없으나, 사령(沙嶺)의 촌가가 좁고 누추하며 날씨가 심히 차지 않기 때문에 노숙한 것이다. 막하 사람들을 모아 저물어 가는 제방에서 얼음장이 떠다니는 것을 구경했다. 밤의 장막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꿩을 굽는 것도 객중의 흥취하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참(站)이 아니므로, 시초를 받지 못했다. 땔나무를 베어서 쓰게 했다.

이날은 아침에 30리, 저녁에 25리를 갔다.

 

19 일 (계해)

맑음. 새벽에 떠났다.

오시에 얼음 위로 삼차하三叉河를 건넜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서장관이 찾아왔다. 어제밤 성안에 들어가 유숙한 사람들은 많은 실물失物을 했고, 연못 가에서 노숙한 사람들은 안온하게 밤을 지냈으니, 이것도 또한 조물주가 시기해서일까. 저녁에 우가장에 이르러 동관리 객관에 유숙했다. 삼차하를 건너서 우장에 이르니, 고국이 점점 가까워진다. 나그네 회포를 위안할 수 있었다. 하정이 비로소 제공되었다. 포주包廚를 계속할 수 있어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이날은 아침에 40 리, 저녁에 25 리를 갔다.

 

 
 

연경길에서 가장 고생이 심하다는 요택을 가로질러 요택 동쪽 끝에 흐르는 요하를 건너면 요동의 동쪽 지역인 해성.요양 지역에 이른다. 이후 동남쪽에 있는 길게 뻗어있는 청석령.회령.마천령 등을 가로질러 넘어 책문을 통과하여 120 리 공지를 지나면 바로 압록강이다. 요동의 동쪽 지역은 압록강과도 가까운 곳이였으니 대군 일행 모두는 마땅히 기뻐하였을 것이다. 

 

요택을 지나는 길은 두 길이 있다. 광녕에서 동남 방향으로 요택을 지나 요하를 건너는 가로지르는 길과 요택을 피하여 북쪽으로 오른 후 황하.요하를 차례대로 건넌 후 동남쪽으로 내려오며 심양을 거쳐 요양에 이르는 길이다. 대군은 겨울이라 요택을 가로지르는 길을 택한 것 같다. 요택 여기저기에 있는 얼음이 얼은 빙판길은 진흙수렁과 무릎이 잠길 정도의 물길이 연속되고 모기떼로 인한 고통스러운 여름 길과 같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요택 지역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고지도를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 가칭 <건륭도>

건륭부청주현도지 乾隆府廳州縣圖志

이 책은 홍양길(洪亮吉1746~1809)이 건륭 52년(1787)에 초고를 완성하여 가경 8년(1803)에 간각되었는데, 이는 홍양길 생전의 당대 지리저작으로, 체례는 이길보의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를 모방하였다고 한다. 양계초(梁啓超)가 말하기를, "건륭 말에 홍치존(洪稚存)(치존은 홍양길의 호이다, 필자주)이 저술한 《건륭부청주현도지(乾隆府廳州縣圖志)》 50권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절본(節本: 발췌본)으로, 자료를 좀더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한 것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 책은 궁중에 비장하고 있는 《일통지(一統志)》의 내용을 민간에 전하여 지리지식의 보급에 유익했다 

 

 

위 <건륭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광녕에서 우장까지의 요택 로정과 주위의 주요 지명.지세를 추기했다. 

 

 

 

추기한 청색 실선 황하 곧 한.당 시기의 대요수는 <수경주/대요수> 기록에 근거하여 추기한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경판도>에는 백평산을 경유하는 대요수와 지석산에서 발원한 요수가 구분.묘사되어 있으나 <건륭도>에는 흔적조차 없다. 두 고지도는 같은 시기에 간행되었으니 아마도 홍양길의 인식 한계인 것 같다. 하지만 황하로 흘러들어야 하는 대릉하 곧 우북평군 백랑현에서 발원하여 북쪽.동북쪽.동남쪽으로 흐르며 요서군 유성현 북쪽과 요동군 방현에서 대요수로 합류한다는 백랑수 하류 위치로 보아 추기한 황하는 정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요택 동쪽 끝에 흘러내린 요하의 동쪽 강안 지역에 우장牛莊.해성 및 전한 시기의 지명 안시, 백제 지명 웅악.건안, 통신라의 영해, 거란.요국의 요주耀州 등이 표시된 것으로 보아 홍양길은 대략 2000 여년 간의 지명을 당시의 지명으로 병기한 것이며 이는 요동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 인식을 보여주는 증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송.명.청 시기 간행된 고지도 중에서 방현 남쪽에 험독현險瀆縣이 표기된 것은 <건륭도>가 유일한 것 같다.

 

사람들은 세부적인 것에 눈을 빼앗기다 보면 거의 대부분 큰 것을 놓친다. 또 눈에 익숙한 것을 보다 보면 이미 인식된 지리와 지형을 떠올린다. 요하.요양 등의 표시가 있으니 마치 지금의 요하와 지금의 요양 지역을 떠올리겠지만 홍양길이 묘사한 지역은 지금의 란하 중류 2 개의 승덕이 표시된 곳이다.

 

- <건륭도>가 묘사한 범위

 

 

황하 곧 <한서/지리지>에 요동군 망평에 주석된 1250 리 길이 대요수는 <수경주/대요수> (주1) 기록에 의하면 백평산에서 발원하여 새외를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양평현 서쪽으로 들어오고 북쪽의 지류격인 요수는 지석산에서 발원하여 새 밖에서 동쪽으로 곧장 흘러 망평현 서쪽을 지난 후 크게 꺽이어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양평현에서 북쪽 지류 요수를 받아들인 대요수는 이후 남류하면서 방房.안시安市 등의 현 지역을 차례대로 경유한 후 바다 곧 현토.요동 2 개 현을 경유한 2100 리 길이 염난수의 중류로 합류하여야 하는 물길이다.  

 

한편 인평대군은 어느 시기에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는 2 개의 장성을 언급하였었는데 위 모사도2에 표시한 연장성燕長城이고 <사기/흉노열전>에 설명된 조양부터 양평까지의 장성이다. 아래는 한양을 떠나 북경으로 향한 연행길 중 삼차하를 건너기 직전 우장에서 느낀 점을 담은 9 월 3 일 일기다. 

 

 
맑음. 방물(方物)은 이미 수레로 운반했다. 거기에 실은 것은 쇄마(刷馬) 및 향부(餉府)ㆍ운부(運府)에서 보내는 물건이다.
장사치들은 뒤에 떨어져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편에 조정에 올리는 글과 장계를 부치고, 집에도 편지를 보냈다.
늦게 떠나서 성 뒤로 해서 삼하보(三河堡)를 지나 삼차하(三叉河) 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성은 삼차하 언덕에 있는데, 폐허가 되어서 사람이 없고, 냇가에 오직 뱃사공 한두 집만이 살고 있었다. ‘삼차’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요동(遼東)의 태자하(太子河), 심양(瀋陽)의 혼하(混河)와 두을비성(豆乙非城)의 요하(遼河)가 모두 북막(北漠)으로부터 흘러서 요좌(遼左)로 들어가서, 세 줄기가 여기에서 합류(合流)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광록도(廣鹿島) 앞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나, 세 물의 근원은 자세하지 않다.
두을비(豆乙非)는 심양 서쪽 백 리 밖 요하(遼河) 북쪽 언덕에 있으니, 역시 청 나라 사람이 명 나라 군사와 대진(對陣)했던 곳이다. 산해관(山海關) 머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에 있는 큰 사막(沙漠)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고, 5리마다 돈대(墩臺) 하나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 한 줄기는 건주(建州)의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보(淸河堡)ㆍ무순보(撫順堡) 등지로 해서 개원위(開元衛)ㆍ철령위(鐵嶺衛) 등을 지나 요하(遼河)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보(三河堡)에 이르렀고, 한 가닥은 섬서(陝西)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太原府)ㆍ대동부(大洞府) 등지로 해서 큰 사막(沙漠)을 거쳐 의무려(醫巫閭) 뒤로 꾸불거리다가 임녕보(林寧堡)ㆍ진원보(鎭遠堡)ㆍ진녕보(鎭寧堡) 등을 지나 고평역(高平驛)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그 터뿐이요, 임녕(林寧) 근처에는 풀숲 사이에 분첩(粉堞)이 간간이 있었다.
산해 장성(山海長城)은 곧 조룡(祖龍 진시황(秦始皇))이 쌓은 것이지만, 이 두 줄기 장성(長城)은 어느 시대에 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장(牛莊)으로부터 광녕(廣寧)에 이르기까지 200여 리 사이는 큰 들판이 모두 진흙수렁으로서 당조(唐朝)의 이른바 ‘요택(遼澤)에 장마가 지면 육지로 배가 다닐 지경이다.’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행려(行旅)들이 다니지 못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이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민정(民丁)을 크게 동원하여 우장(牛莊)으로부터 광녕(廣寧)까지 큰 둑을 쌓았는데, 높이와 너비가 모두 두어 길이나 된다. 둑 북쪽에서 흙을 파온 곳은 호(壕)가 되었는데, 이 호(壕)로는 배가 다니고, 둑으로는 수레가 다닐 만하여 백성들이 몹시 편하게 여겼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후로는 다시 수리를 하지 않아 간간이 무너졌고 해자[濠]의 물이 넘쳐 흘렀다. 남아 있는 둑도 몹시 좁아서 말 한 필도 다니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매양 장마철을 당하면 굽이마다 물이 막히고 곳곳에 수렁이며, 또 모기가 떼를 지어 사람이 왕래할 수가 없으나 이러한 깊은 가을에는 겨우 통행할 수가 있었다. 참으로 요좌(遼左)는 죄인이나 살 땅이다. 하안(河岸)을 거닐면서 둘레를 돌아보니, 들과 하늘이 서로 맞닿고 사방에 산이라고는 없었다. 넓고 넓어서 마치 큰 바다 가운데에서 배를 탄 것과 같았다. 학야(鶴野)는 9000리란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니었다.
사람과 말이 다 건너고 나니 강바람이 늦게 일어났다. 노를 재촉하여 하수를 건너가 북쪽 언덕에서 노숙했다. 오늘 사령역(沙嶺驛)에 이르지 못한 것은 나루가 험하여 뱃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방물(方物)을 실은 수레는 먼저 건넜다.
이날 25리를 갔다.

 

 

위와 같이 인평대군은 삼차하를 건너기 직전 우장에서 전국시대인 연 전성기 대략 서기전 283 년 경 진개가 동호를 1000 여 리 물리치고 양평까지 쌓았다는 장성 곧 서쪽에서부터 이어온 장성이 의무려산 북쪽을 지나 남쪽으로 꺽이어 요택의 서쪽 지역인 고평역에 이르른 희미한 흔적을 설명한 것이다. 연장성을 직접 보고 설명한 이는 아마도 인평대군이 유일한 것 같다.

 

요하와 황하가 합류하는 요택 지역과 서쪽으로 란하까지의 지역은 고대부터 남쪽의 황하.장강 세력과 북쪽의 동호.선비.거란 세력 및 동쪽의 왕검조선 후예국들 사이의 접경지였기 때문에 연장성 뿐만 아니라 진장성도 있어야만 했을 것이고 또한 건주위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보.무순보 등지로 해서 개원위.철령위 등을 지나 요하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보에 이르른 장성 곧 고구려와 진국 및 고려 등에서 쌓고 정비한 장성도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면 요동군 양평현으로 흘러내린 대요수.황하는 상류는 대체 어느 지역을 흘렀을까? 황하와 관련해서는 반드시 아래 고지도를 검토해야 한다.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황조일통여지전도- 이하 황조도>를 간행하였다는데 아래는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하였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의 요하 부분도다. 일본 재간행본은 원본인 <황조도>와 구별하여 앞으로 <왜황도>라 하겠다. 

 

 

 

아래와 같이 물길 위주로 읽으면 보다 쉬울 것이다. 

 

 

<왜황도>의 황하는 동남류하지 않고 정동류하며 요하의 중류로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요하의 상류 서쪽 지류로 합류한다.

아래는 위 부분보다는 약간 서쪽 부분인 란하 상류와 황하 발원지 부분이다. 

 

 

 

위의 황하가 <건륭도>에 필자가 임의로 추기한 황하의 흐름 방향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청 시기의 황하이며 한.당 시기의 대요수는 어떻게 흘렀을까? 

 

 

주1)

大遼水

[수경]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東南過房縣西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주]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 ... 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 ...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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