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월 고침
6/ 3. 요택을 건너다
인평대군은 1656 년 음력 11 월 17 일 아침 광녕을 떠나 요택을 가로질러 동쪽 끝에 흐르는 요하를 건넜다. 닷새째 날 저녁에 요양에 도착했고 광녕부터는 340 리, 연경부터는 1540 리 떨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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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녕 0/1180- 고평관 90/1270- 사령역 55/1325- 우장 65/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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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세기 중반 광녕에서 동쪽으로 요택.요하를 가로지르는 정황이 어떤지 11 월 17,18, 19,20 일 일기를 보자.
17 일 (신유)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갰다. 밤에 떠났다.
오시에 반산역에 이르러 연못 가에서 얼음을 깨고 점심을 넉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고평관에 이르러 여염집에 유숙했다. 여기는 참이 아니기 때문에 시초를 받지 못했다. 땔나무를 베어서 썼다. 지난번 관을 나올 때는 날씨가 몹시 찼지만 그 후 좀 따뜻해져서 극심한 추위를 면했다. 고평역은 좁고도 누추해서 처음에는 노숙할 생각을 했으나, 때마침 삭풍이 저물녘에 심하게 불어서 할 수 없이 촌가에 투숙했는데 괴로움이 형언할 수 없다. 어제 낮 여양에 이르렀을 때 사람마다 그곳에 머물러 말을 쉐게 하고 이튿날 흑어구의 길을 따라 고평에 이르고자 했으니, 이는 대개 지름길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 길이 비록 광녕대로를 가는 데 비해서 한나절 정도 시간이 단축된다고는 하나, 그래도 1 백 2, 30 리 길이 되어 요사이 같은 짧은 해로는 반드시 밤을 새워 온종일 가야만 고평에 도달할 수가 있다. 더구나 이 길은 여름에는 진창이고, 겨울에는 빙판이어서 말이 미끄러져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워 온갖 애로가 겹친 곳이다. 광녕 대로는 비록 멀리 돌아가는 길이기는 하나, 여러 참이 있어서 숙식이 편리하다. 그래서 중론에 따르지 않고 대로를 따라서 온 것이다. 이 역에 이르러서 지름길의 형편을 물으니, 요사이는 인적이 통하지 못한다고 했다. 만일 중론에 따랐어라면 중도에서 반드시 크게 낭패할 뻔했다. 옛사람이 경계하는 바, `급하게 서두르면 도리어 이루지 못한다`라는 것이 진실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날은 아침에 50 리, 저녁에 40 리를 갔다.
18 일 (임술)
맑음. 아침 일찍 떠났다.
사시에 평안보(平安堡)에 이르러 긴 장벽(墻壁) 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녁에 사령역(沙嶺驛) 성 북쪽 연못 가에서 노숙했다. 부사와 서장관을 권해서 성안으로 보냈는데, 연못에서 성까지 거리가 5리 밖에 안 됐다. 겨울날이라 들에서 거처하는 것이 좋을 것은 없으나, 사령(沙嶺)의 촌가가 좁고 누추하며 날씨가 심히 차지 않기 때문에 노숙한 것이다. 막하 사람들을 모아 저물어 가는 제방에서 얼음장이 떠다니는 것을 구경했다. 밤의 장막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꿩을 굽는 것도 객중의 흥취하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참(站)이 아니므로, 시초를 받지 못했다. 땔나무를 베어서 쓰게 했다.
이날은 아침에 30리, 저녁에 25리를 갔다.
19 일 (계해)
맑음. 새벽에 떠났다.
오시에 얼음 위로 삼차하三叉河를 건넜다. 강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서장관이 찾아왔다. 어제밤 성안에 들어가 유숙한 사람들은 많은 실물失物을 했고, 연못 가에서 노숙한 사람들은 안온하게 밤을 지냈으니, 이것도 또한 조물주가 시기해서일까. 저녁에 우가장에 이르러 동관리 객관에 유숙했다. 삼차하를 건너서 우장에 이르니, 고국이 점점 가까워진다. 나그네 회포를 위안할 수 있었다. 하정이 비로소 제공되었다. 포주包廚를 계속할 수 있어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이날은 아침에 40 리, 저녁에 25 리를 갔다.
대릉하가 연경.의주 사이의 꼭 절반이라 했으니 이미 청국 영역 반을 지났고 연경길에서 가장 고생이 심하다는 요택을 건너고 삼차하 곧 요하까지 건넜으니 압록강은 목전이라 기뻐할 만 하겠다.
가) 요택
광녕에서 요양까지는 동쪽과 북쪽의 두 길이 있다. 동쪽으로 요택.요하를 가로질러 건너는 길과 요택을 피하여 북쪽으로 오른 후 황하.요하를 건넌 후 동남쪽으로 내려오며 심양을 거쳐 요양에 이르는 길이다.
겨울 초입이라 광녕부터 우장까지 요택을 가로지르는 210 리 길이나 요하 물줄기 마저도 얼어 그 위로 건너야 했지만 날씨는 안온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겨울보다는 가을철에 요택을 건너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연경으로 향할 때인 9 월 3, 4, 5 일 일기를 보자.
- 연경 행로
3 일(무신)
맑음. 방물은 이미 수레로 운반했다. 거기에 실은 것은 쇄마 및 향부.운부에서 보내는 물건이다. 장사치들은 뒤에 떨어져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편에 조정에 올리는 글과 장계를 부치고, 집에도 편지를 보냈다. 늦게 떠나서 성 뒤로 해서 삼하보를 지나 삼차하가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성은 삼차하 언덕에 있는데, 폐허가 되어서 사람이 없고, 냇가에 오직 뱃사공 한두 집만이 살고 있었다. `삼차`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요동의 태자하, 심양의 혼하와 두을비성의 요하가 모두 북막으로부터 흘러서 요좌로 들어가서, 세 줄기가 여기에서 합류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광록도 앞바다로 들어간다고 하나, 세 물의 근원은 자세하지 않다.
두을비는 심양 서쪽 백 리 밖 요하 북쪽 언덕에 있으니, 역시 청 나라 사람이 명 나라 군사와 대진했던 곳이다. 산해관 머리 만리장성 밖에 있는 큰 사막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의 옛터가 있고, 5 리마다 돈대 하나 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와 이적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 한 줄기는 건주의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보.무순보 등지로 해서 개원위.철령위 등을 지나 요하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보에 이르렀고, 한 가닥은 섬서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대동부 등지로 해서 큰 사막을 거쳐 의무려 뒤로 꾸불거리다가 임녕보.진원보.진녕보 등을 지나 고평역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그 터뿐이요, 임녕 근처에는 풀숲 사이에 분첩이 간간이 있었다.
산해 장성은 곧 조룡(진시황)이 쌓은 것이지만, 이 두 줄기 장성은 어느 시대에 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장으로부터 광녕에 이르기까지 200 여 리 사이는 큰 들판이 모두 진흙수렁으로서 당조唐朝의 이른바 `요택에 장마가 지면 육지로 배가 다닐 지경이다`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행려들이 다니지 못한다.
만력(1573~1620년) 연간에 영원백 이성량이 이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민정을 크게 동원하여 우장으로부터 광녕까지 큰 둑을 쌓았는데, 높이와 너비가 모두 두어 길이나 된다. 둑 북쪽에서 흙을 파온 곳은 호壕가 되었는데, 이 호로는 배가 다니고, 둑으로는 수레가 다닐 만하여 백성들이 몹시 편하게 여겼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후로는 다시 수리를 하지 않아 간간이 무너졌고 해자(濠)의 물이 넘쳐 흘렀다. 남아 있는 둑도 몹시 좁아서 말 한 필도 다니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매양 장마철을 당하면 굽이마다 물이 막히고 곳곳에 수렁이며, 또 모기가 떼를 지어 사람이 왕래할 수가 없으나 이러한 깊은 가을에는 겨우 통행할 수가 있었다. 참으로 요좌遼左는 죄인이나 살 땅이다. 하안을 거닐면서 둘레를 돌아보니, 들과 하늘이 서로 맞닿고 사방에 산이라고는 없었다. 넓고 넓어서 마치 큰 바다 가운데에서 배를 탄 것과 같았다. 학야는 9000 리란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니었다.
사람과 말이 다 건너고 나니 강바람이 늦게 일어났다. 노를 재촉하여 하수를 건너가 북쪽 언덕에서 노숙했다. 오늘 사령역에 이르지 못한 것은 나루가 험하여 뱃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방물을 실은 수레는 먼저 건넜다.
이날 25 리를 갔다.
5 일 (경술)
맑음. 크게 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떠나 둘째 돈대를 지나니, 승전비가 있었다. 이는 곧 감찰어사 송흥조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약 20 리쯤 가니
둑이 무너져서 물이 넘쳤다. 여기서부터 반산에 이르기까지는 육지가 바다를 이루었는데, 그 깊이가 무릎을 넘는다. 물속으로 10 리를 가다가 다시 둑 위로 올라가서 반산역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허물어진 성 옆에 유민 두세 집이 있는데, 옛날 여기에서 호되게 물난리를 당했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여기에 오니 나도 모르게 이에 신물이 난다. 북쪽으로 의무려醫巫閭를 바라보니, 푸른 봉우리는 하늘에 닿아 멀리 구름과 가지런하고, 깎은 듯한 암벽은 서쪽으로 수백 리를 달려서, 마치 용이 날고 봉이 춤추는 것처럼 신경을 옹호하고 있다. 그 기이하고 웅장한 경치가 꼭 신선이 그 속에 사는 것만 같았다. 제헌이 광성자에게 도를 물었다는 말이 자못 헛되지 않는 듯싶었다.
날씨는 비록 춥지만 때는 아직 가을철이기 때문에, 일행 중에 털옷 입은 사람을 보면 자못 비웃었다. 넓은 들의 사나운 바람에 한기가 배나 더했다. 털 외투와 갖옷을 벗지 못하니 도리어 우수운 일이다.
오시에 떠났는데, 성 북쪽 10 리나 둑이 무너져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또 물속으로 2 리를 가고 둑 위로 5 리를 가서 비로소 육지를 만났다. 광녕앞 고개를 넘노라니 고개 밑에 비석이 있으니 이것은 곧 홍려소경 두공의 신도비였다. 광녕 선화문을 거쳐서 들어가 나성 안의 천총의 집에서 잤다. 선화문은 곧 나성 동쪽 문이다.
...
이제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하정이 있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편안해 했다. 심양으로부터 이 성에 이르는데는 세 길이 있는데, 한 길은, 심양의 소남문으로부터 나와 요하의 하류를 건너고 진녕보를 거쳐서 여기에 이르는 것인데 대략 4 일간의 로정이 되고, 한 길은, 심양 상서문으로 나와 영안석교를 지나고 요하를 건너서 두을비성.황기포.백기포.진원보를 거쳐서 여기에 이르는 것인데 약 5 일간의 로정이 되고, 한 길은, 두을비성으로 해서 신성과 반제탑을 거쳐 여기에 이르는 것인데 약 6 일간의 로정이 된다. 이 세 길은 내가 모두 지나본 것인데, 로정을 자세히 계산해 보면, 우장으로 해서 가는 길이 겨우 1,2 일의 시간을 감하는 대신 그 고생은 배나 된다. 예부 좌시랑 1 인과 낭중 2 인이 건주 경계인 백향성을 감축하다가 역마로 달려와 유숙한 곳에 찾아왔다. 이들과는 이미 면분이 있었기 때문에 예물을 주었다. 무려의 배가 북쪽 땅에서 유명하여 돈을 주고 사먹어 보니 맛이 몹시 상쾌했다.
이날 오전에 35 리, 오후에 50 리를 갔다.
200 여 리의 겨울 빙판길은 봄.여름.가을에는 진흙수렁과 무릎이 잠길 정도의 물길의 연속이였다. 극심한 추위는 없지만 모기떼로 고통스러운 길이였다. 차라리 겨울 길이 나은 것 같다. 아래는 요택을 피하여 북쪽길로 우회한 김창업.김경선의 경험담이다.
지리를 상고해 보면 이 물은 요수로서, 호지에서 나와 장성으로 들어가고 남으로 혼하와 태자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이 세 물이 합쳐지는 곳을 삼차관 또는 삼차하라고 하는데, 근년에 사람들이 우장을 경유할 때 건너던 곳이다. 이 물을 건너 2 리 쯤 가면 또 작은 물이 나타나는데, 바로 周流河의 지류이다. 경치는 큰 길과 달리 지나는 곳마다 염전이 많았으니 그 토양이 비옥함을 역시 알 만하다. ... 봉성에서 주류하에 이르기까지는 초가가 많고, 주류하부터 산해관까지는 토옥이 많다. 토옥이 나타난 이후로 이따금 와가는 있어도 초가는 전혀 볼 수 없다. 이것은 이을 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김창업 자벽군관 <노가재연행록> 1712
일판문에서 이도정의 사이는 옛부터 물맛이 가장 나쁘다는 곳이다. 이곳은 요동 들판 가운데에 위치하여 물과 샘이 모두 고여 있고 빠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물맛을 보니 과연 신 듯도 하고 떫은 듯도 하여 실로 입에 대기가 곤란했다.
김경선 서장관 <연원직지> 1832
요택을 묘사한 고지도가 있다. 청국인 홍양길(洪亮吉1746~1809)이 건륭 52년(1787)에 초고를 완성하여 가경 8년(1803)에 간각하였다는 <건륭부청주현도지>에 실린 지도다. 앞으로 <건륭도>라 하겠다.
아래와 같이 읽으면 쉬을 것이다.
광녕 동남쪽으로 흘러내린 황하 곧 한.당 시기의 대요수는 <수경주>에 의하면 새외에서 발원하여 백평산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양평현 서쪽으로 들어오고 북쪽 지류격인 요수는 지석산에서 발원하여 새 밖에서 동쪽으로 흘러 망평현 서쪽을 지난 후 크게 꺽이어 서남쪽으로 흘러 양평현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양평현에서 북쪽 지류 요수를 받아들인 대요수는 이후 남류하면서 요수遼隧.방房.안시安市 등의 현 지역을 차례대로 경유한 후 바다로 들어갔고 서남쪽 지류인 백랑수 곧 송.거란 시기부터 개칭된 대릉하도 방房현으로 흘러와 대요수 곧 송.거란 이후 개칭된 황하로 합류했다.
결국 요동군 치소인 양평현이나 요수가 경유하는 망평현은 황하가 동쪽으로 흐르다가 크게 꺽이어 남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곳에 있었을 것이다. <건륭도>에는 방현 서남쪽에 많은 이들이 왕검조선 도읍이라고 인식하는 험독險瀆현도 표시되어 있고 요택 동쪽 끝으로 흘러내린 요하 동쪽 강안 지역에는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차례대로 개원.철령.심양.해성海城 .안시 등이 보인다. 또한 해성 서쪽에는 요택을 가로지른 후 삼차하를 건너 도착하는 우장牛莊이, 해성 동쪽에는 태자하가 경유하는 요양遼陽이 표시되어 있다.
앞에서 제시한 <경판도>에는 백평산을 경유하는 대요수와 지석산에서 발원한 요수가 구분.묘사되어 있으나 <건륭도>에는 흔적조차 없다. 두 고지도는 같은 시기에 간행되었으니 아마도 홍양길의 인식 한계인 것 같다.
한편 인평대군이 어느 시기에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는 2 개의 장성은 란하.황하.요하 3 물길 유역이 고대부터 진시황시기까지와 송.거란 전과 후 시기에 각각 남쪽의 황하.장강 세력과 북쪽의 동호.선비.거란 세력 및 동쪽의 왕검조선 후예국 사이의 경계였기 때문에 당연히 전국시대 연국과 고구려.고려 시기의 장성일 것이다. 즉 섬서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대동부 등지로 해서 큰 사막을 거쳐 의무려 뒤로 꾸불거리다가 임녕보.진원보.진녕보 등을 지나 고평역에 이르렀다는 장성은 연 전성기 장수 진개가 동호를 1000 여 리 물리치고 동호를 방비하기 위한 조양부터 양평까지 쌓았다는 장성일 것이고 건주위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보.무순보 등지로 해서 개원위.철령위 등을 지나 요하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보에 이르른 장성은 요하 동쪽이며 요동 지역을 감싼 장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왕검조선의 후예국인 고구려와 고려에서 쌓은 장성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나) 황하 潢河
그러면 요동군 양평현으로 흘러내린 대요수.황하의 중류와 상류는 대체 어느 지역을 흘렀을까?
황하와 관련해서는 반드시 아래 고지도를 검토해야 한다. 1832 년 청국인 이조락 등이 <황조일통여지전도- 이하 황조도>를 간행하였다는데 아래는 1865 년 일본에서 재간행하였다는 <황조일통여지전도>의 요하 부분도다. 일본 재간행본은 원본인 <황조도>와 구별하여 앞으로 <왜황도>라 하겠다.
아래와 같이 물길 위주로 읽으면 보다 쉬울 것이다.
<왜황도>의 황하와 <건륭도>에 필자가 임의로 추기한 황하는 흐르는 방향이 완전히 다른 물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청 시기의 황하 곧 한.당 시기의 대요수 발원지와 상류는 어느 지역을 어떻게 흘렀을까?
주1)
大遼水
[수경]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東南過房縣西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주]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屈而西南流, 逕襄平縣故城西. 秦始皇二十二年滅燕, 置遼東郡, 治此. 漢髙帝八年, 封紀通為侯國, 王莽之昌平也, 故平州治. 又南逕遼隊縣故城西, 王莽更名之曰順睦也. 公孫淵遣將軍畢衍拒司馬懿于遼隊, 即是處也 ... 地理志..房故遼東之屬縣也. 遼水右㑹白狼水, 水出右北平白狼縣 ... 十三州志曰..大遼水自塞外, 西南至安市, 入于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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