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월 고침

요양.연산관을 지나 압록강으로 

 

인평대군은 11월 20 일 우장을 떠나 청국 국경 관문인 책문으로 향했다. 우장에서 의주까지는 600 리 길이고 요양에서 연산관을 지나 봉황성 책문까지는 험한 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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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차하.우가장 0/1390- 필관포 80/1470- 요양 70/1540- 낭자산 65/1605- 첨수참 35/1640- 연산관 40/1680- 진이보 60/1740- 진동보 60/1800- 봉황성 50/1850- 유전 60/1910- 압록강.의주 80/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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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북경부터 압록강 의주까지 1990 리 로정이 묘사된 고지도 <대청광여도>라 하는데 일본인이 교정하였다 하니 원도와 구별하여 <왜청도>라 하겠다. 

 

- <왜청도> 

   강희년간(1663~1722)에 채방병이 판각한 것을 1785 년 일본인 장구보적수(나가쿠보 세키스이)가 교정.

   영국도서관 소장

 

 

 

아래는 요택.요하.성경승덕현.연산관.봉황산.압록강의주가 표시된 부분.확대도다. 

 

주) 1~8 위치는 요양.낭자산.첨수참.연사관.진이보.진동보.봉황성.탕참 등 동팔참 위치.

 

아래는 요양부터 의주까지의 전체 로정의 일기다. 

 

22 일(병인)
흐림. 용만 사람이 요동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으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집 소식을 알고 싶어 밤중에 역관 서효남(徐孝男)을 먼저 달려서 보냈다. 새벽에 길을 떠났다. 보각사(普覺寺) 앞 들판에 이르니, 하인 명남(命男)이 꿩 한 마리를 잡았다. 사시에 남사하보(南沙河堡) 냇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오시에 수산령(首山嶺)에 올랐다. 만윤(灣尹)의 군관 전사립(田士立)이 서 역관(徐譯官)을 만나서 비로소 사행이 요동에 이르렀음을 알고 달려왔다. 교자 앞에 이르러 다만 저보(邸報 관보(官報))만을 바쳤으니, 고향 소식이 아직도 의주에 도착하지 못한 때문이다. 고향 소식은 비록 듣지 못했어도 저보를 자세히 보아 국가가 편안함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고국의 여러 가지 소식과 도강(渡江 압록강을 건너는 것)한 날짜 등을 물었더니, ‘온 나라가 모두 편안해서 더 말씀 드릴 것이 없고, 10일에 도강하였습니다. 선래군관(先來軍官)들도 무사히 마전곤(馬轉滾)을 지나갔으며, 동지사(冬至使)가 보름경에 의주에 도착합니다.’ 한다. 일행은 모두 환성을 올렸다.
날이 저물어서 얼음 위로 태자하(太子河)를 건너서 요양(遼陽) 새성(城) 밖 천총의 집에 유숙했는데, 전사립이 기백(箕伯 평안 감사) 유심(柳淰)ㆍ만윤(灣尹) 김휘(金徽)의 문장(文狀) 및 쌀과 진찬(珍饌)을 올렸다. 골고루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역(異域)에서 주린 나머지 고국의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되니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정이 제공되었다.
이날은 아침에 40리, 저녁에 30리를 갔다.
 

23일(정묘)

밤에 큰눈이 내려 행차가 떠나지 못했는데, 평명에 조금 개었다.

돌아갈 생각이 화살 같아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출발을 재촉하여 쌍참(雙驂)을 멍에했다. 사시에 냉정(冷井)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눈이 하늘을 덮어 대낮이 밤처럼 어둡다. 괴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으나, 한양(漢陽)에서 연산(燕山)에 이르기까지 냉정(冷井)이 중간이 되니 이미 고국에 절반이나 이른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했다. 미시에 떠나 옥상령(玉祥嶺)을 넘었다. 삼류하(三流河)를 얼음 위로 건넜다. 저물녘에 낭자산(狼子山)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는데,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종일토록 눈을 무릅쓰고 길을 걸었더니 인마가 모두 굶주리고 피곤했다. 이튿날 새벽에 큰 고개를 넘을 생각을 하니, 매우 근심스럽다. 초저녁에 역관 양효원(梁孝元)이 진동보(鎭東堡)로부터 돌아와서 소상하게 말했다. 동지사는 오늘 연산(連山)에서 자고 내일 첨수(甜水)에 이른다고 하며, 이어 천서(天書 임금이 보내는 글)와 가신(家信)을 올렸다. 나라가 무사하고 집이 편안함을 자세히 알았다. 마음이 너무나 기뻐서 바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칠 것 같기도 하다. 두 보(杜甫)의 시(詩)에 ‘집에서 온 편지가 만금의 값어치가 있다.[家書抵萬金]’라고 한 것이 실로 빈말이 아니었다.

이날은 아침에 30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24일(무진)

흐렸다가 동틀 무렵에 눈이 개었다.

조반을 먹고 늦게 떠났다. 차량(車輛)과 가교(駕轎)는 험한 곳을 피해서 길을 갔다. 달려서 청석령(靑石嶺) 밑에 이르렀다. 고개 오른편에 암혈(巖穴)이 있고,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의지하여 내려가게 되어 있으니, 이는 바로 석웅황(石雄黃)을 캐는 곳이다. 고갯길은 전부터 험악한 데다가 이제 눈이 말의 무릎까지 차서 개 이빨 같은 악석(惡石)을 가리우고 있는데, 초행하는 사람은 그 험한 것을 알지 못한다. 오시에 첨수참(甜水站)의 북문(北門)에 이르렀다. 동지사 역관(冬至使譯官) 이형백(李馨白)ㆍ김진립(金晉立)이 와서 뵈었다. 성문(城門)에 들어가서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동지사의 일행 중 마부와 말이 먼저 이르렀다. 성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두 상인(商人)이었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른다고 했다. 상고배가 이처럼 혼잡을 이루기는 근래에 없는 일이었다. 해질 무렵에 동지 정사(冬至正使)인 판서 윤강(尹絳), 부사 참의 이석(李晳), 서장관 지평 곽제화(郭齊華)가 와서 만났다. 친구와 만나 다정한 말을 나누노라니 시름에 찬 나그네 회포가 시원하게 풀려짐을 느꼈다. 헤어졌던 수역 지사(首譯知事) 박경생(朴庚生) 이하 사람들이 일제히 와서 뵈었다. 돌아오는 길에 풍윤현(豐潤縣)에서 국화분(菊花盆)을 가지고 올 것을 분명히 부탁했다.

이날 35리를 갔다.

 

25일(기사)

맑음. 이른 아침에 윤 판서 이하가 와서 하직하므로,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것도 몰랐다. 늦게 떠나 돌이켜 보니, 자준(子俊 판서 윤강의 자)의 행차가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자연히 마음이 우울해졌다. 자준의 마음은 필시 나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다. 성 서쪽의 큰 내는 급한 여울인데, 얼음장이 물 위를 덮어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말을 언덕 위에 세우고 막하의 모든 사람, 역졸들까지도 모두 말을 타고 건너게 했다. 사시에 회령령(會寧嶺)을 넘고 벽동 천변(碧洞川邊)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적설(積雪)이 말 배[馬腹]까지 찼다. 저녁에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26일(경오)

맑음. 밤중에 먼저 전사립(田士立)을 책문(柵門)으로 보내어 의주서 맞이하는 인마가 들어오고 있는지 여부를 탐지케 했다.

일찍 길을 떠났다. 사시에 나장탑(羅將塔)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저물녘에 진이보(鎭夷堡)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날씨가 몹시 찼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날이 저물 때 선래군관(先來軍官) 최귀현(崔貴賢)이 하인 강적(江赤)을 데리고 서울로부터 달려와서 천서(天書)와 가신을 바쳤다. 낭산(狼山) 이후로 자주 집 소식을 듣고 또한 고국의 진미를 맛보니 나그네의 회포에 위안이 되었다. 사행(使行)의 많은 사람이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번번이 사고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면하게 되어 상하가 모두 기뻐했다. 유독 홍여한(洪汝漢)이 자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마부(馬夫) 한 사람이 어머니의 상(喪)에 간 것이 가장 가련한 일이었다. 최귀현에게 따뜻한 말로 위안해 주면서 이어 왕복한 소식을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10일에 압록강을 건너 가산(嘉山)에 이르러서, 이면(李㴐)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어서 떠나가지 못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파발을 달려 14일에 입경(入京)했습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하셔서 특별히 술과 음식을 주시고 돌아갈 것을 허락하셨는데, 김여준(金汝俊)은 병이 중하여 서울에 머물러 있고, 혼자서 강적(江赤)을 데리고 16일 다시 서울을 떠나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했다. 저녁때가 되자, 자진(子珍)과 성서(聖瑞)가 와서 임금이 만안(萬安)하심을 하례했다. 서울서 온 감귤(柑橘)ㆍ청어(靑魚)ㆍ은어(銀魚)로 안주를 만들고, 의주에서 보내온 향기로운 술을 잔에 가득 따라 부어 취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변방에서 얻기 어려운 경지였다. 화각(畫角)이 두 번 울리고 인마가 떠났다. 행중에 엄명을 내려 먼저 객점(客店)에 드는 일을 금하였는 데도 이에 따르지 않는 자가 많으니, 너무나 분개할 일이다. 오늘은 비밀히 군관 김여로(金汝老)를 보내어 남몰래 먼저 가서 객점(客店)에 이른 자 14명을 붙잡아 중장(重杖)을 쳤다. 그리고 원역(員役) 중에서 종을 제어하지 못한 잘못으로 장(杖)을 받은 자도 있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 모두 30리씩 갔다.

 
27 일(신미)
맑음. 아침 일찍 떠났다.
사시에 팔도하(八渡河)의 제7류(流) 냇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얼음 위로 건넜다. 호행 광록소경이 와서 뵙기에 주과(酒果)로 위로해서 보냈다. 미시에 얼음 위로 옹북하(瓮北河)를 건넜다. 저녁에 진동보(鎭東堡)에 이르러 천총의 집에 유숙했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아침에 40리, 저녁에 20리를 갔다.
 
28 일(임신)
맑음. 아침 일찍 떠났다.
사시에 백안동(白鴈洞) 냇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전사립(田士立)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백승윤(白承潤)이 의주의 마부와 말을 거느리고 책문 밖에 이른 지 이미 나흘이 지났으나, 성장(城將)이 허락하지 않아 책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저녁에 봉황성에 이르러 옛날의 주인 각씨 마패(閣氏麻牌)의 집에 유숙했다. 주인이 거위를 삶아 와서 융숭하게 대접했다. 예물을 주었다. 하정(下程)이 제공되었다. 역관 서효남(徐孝男)과 양효원(梁孝元)을 보내어 성장(城將)을 설득하여 책문 밖의 인마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도록 하였다. 날이 저물 때 백승윤이 마부와 말을 거느리고 와서 뵈었다. 대전 별감(大殿別監) 한립(韓立)이 따라와서 천서(天書)와 가신(家信)을 전했다. 또 하사하는 물건이 있어 절하고 공경하여 받아서 동반들에게 나누어 주니, 일행에게 생색이 났다. 분수에 넘치는 홍은(鴻恩 임금의 은혜)을 뼈에 새겼다. 호행 광록소경 등에게 예물을 주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다. 만윤(灣尹)이 관례에 따라 보내왔으므로, 차등(差等)을 두어 나누어 주었더니 매우 기뻐했다. 우장(牛庄)의 호행 아역 강가부(姜加富)와 갑군 열 사람 및 봉성 수장(守將)에게 예물을 나누어 주었으니 이 또한 관례이다. 날이 저물 무렵에 봉성 아역 일은금(日隱金)과 박씨(博氏) 두 사람이 의주 청역(義州淸譯 청역은 청어(淸語)의 역관) 음성발(陰城發)이 쓴 ‘봄ㆍ가을의 개시(開市)에 돈을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조선 상고(商賈)들이 남몰래 전문(錢文) 휴대하는 것을 금한다.’는 문서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전문은 전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조금도 구애될 것이 없다. 만윤(灣尹)이 하루아침에 이를 막는다면 우리도 가만 있지 않겠다.’ 하면서 발끈 화를 내고 갔다. 비록 공갈하는 말이지만 사기(辭氣)가 매우 거칠었다. 음 역관(陰譯官)이 쓴 것은 아마도 조정의 분부일 것이나, 청 나라 사람의 큰 이익인 만큼 막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이날은 아침에 30리, 저녁에 20리를 갔다.

 

29일(계유)

맑음. 새벽에 떠났다. 8리쯤 앞으로 나갔는데, 부사를 배행(陪行)하는 당상 역관(堂上譯官) 박이절(朴而嶻)이 달려와서 급히 고하기를,“선래군관(先來軍官) 이면(李㴐)의 종이 염초(焰焇)를 수레 속에 감추어 실었습니다. 고용(雇用)한 차부(車夫)는 통원보(通元堡) 사람인데, 좋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장(城將)에게 이 사실을 고발해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좋은 대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했다. 그러나 일이 이미 벌어졌으니, 선후책(善後策)을 강구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요행을 바랄 뿐이었다. 또 5리를 가서 책문에 이르렀다. 먼저 도착한 인마가 모두 책문을 나가지 못하고 한데 모여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교자(轎子)를 책문 앞에 내려놓았다. 성장(城將)이 손에 작은 염초 덩어리 하나를 쥐고서 말하기를 ‘이제 고발로 인해서 금물(禁物)을 이미 적발했습니다. 일행의 짐을 모조리 수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궁극한 곤경에 빠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무슨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좋은 말로 설득하고 있을 즈음에 먼저 온 인마가 모두 샅샅이 수색을 당했다. 그야말로 백인(白刄)으로 서로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금물(禁物)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품목을 일일이 기록하고 연경(燕京)에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마다 실색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내가 생각건대 이는 근년에 없었던 일이므로 그들이 하는 대로 버려둘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인마를 뒤로 물리치고 말안장을 내리고 밥을 짓게 하여 그 형적(形跡)을 감추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역관을 보내서 엄격히 항의(抗議)하게 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갈수록 횡포를 부려 사람으로 하여금 분함을 금치 못하게 했다. 붙잡혀 있는 쇄마부(刷馬夫) 다섯 사람을 교자(轎子) 앞으로 끌어다가 갑자기 중장(重杖)을 치고, 저네들과 다시 말하지 못하게 했다. 광록소경과 성장(城將)이 이와 같은 불평의 기색을 보자 도리어 불안스럽게 여기면서 수색을 늦추고 인마를 나가게 하는 한편 부드러운 낯빛으로 와서 위로하기를, “이 물건들이 비록 금령(禁令)에 저촉되기는 하지만, 가죽은 무두질해서 만든 것이고 금ㆍ은(金銀)은 녹여서 가공(加工)한 것입니다. 대개 중요하기는 하나 그 죄는 중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했다. 다시 광록소경과 작별했는데, 상품(上品) 은장도(銀粧刀)를 예물로 주었다. 채찍을 휘둘러 책문을 나왔다. 이는 필시 만시(灣市)에서 남아 있던 재앙이 억울하게도 사행(使行)에 미친 것이다. 그 노갑이을(怒甲移乙 갑에게서 성난 것을 을에게 분풀이하는 것)하는 소행이 더욱 통탄스럽다. 다섯 죄인은 차원(差員)인 희천(煕川) 원을 시켜 압송해서 가게 했다. 오시에 대룡산(大龍山)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대동(大同)의 우졸(郵卒)이 말 두 필을 끌고 와서 뵈었다. 오늘 아침에 벌어졌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털이 위로 뻗친다. 이것은 실로 요동을 드나든지 20년 동안 일찍이 없었던 치욕이었다. 붙잡힌 다섯 놈은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아침 수색에서 자진(子珍)의 종이 붙잡힌 것을 내가 주선해서 간신히 무사하게 만들었다. 자진이 찾아와서 간곡하게 사례했다. 성서(聖瑞)가 뒤를 이어 와서 일을 상의했다. 상통사(上通事) 최진남(崔振南)에게 일행 속에 금물(禁物)을 감추어 오는 자를 적발하여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10대를 쳤다. 비록 체례(體例)에 의해서 벌이 행하여진 것이지만, 어찌 다만 그의 허물이겠는가. 10여 년을 두고 금령(禁令)을 범한 것이 이제 비로소 발각된 것이다. 관서(關西) 음우(陰雨)의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이 한스럽다. 저녁에 유전(柳田)에 이르러 노숙(露宿)했다. 의주중군(義州中軍) 장우길(張友吉)ㆍ동지(同知) 박희복(朴希復)ㆍ미관첨사(彌串僉使) 장사민(張士敏)ㆍ건천권관(乾川權管) 김수창(金壽昌)ㆍ전 권관(權管) 김준철(金俊哲)이 와서 뵈었다. 의주 포수가 노루 두 마리를 바쳤다. 초저녁에 자진(子珍)이 찾아왔다. 들에 천막을 쳤지만 날씨가 차지 않았다. 노루를 굽고 술을 데워 마시면서 무릎을 맞대고 정답게 담화를 나누다가 밤이 깊은 뒤에 헤어졌다. 이날은 아침과 저녁에 다 같이 30리씩 갔다.

 

1일(갑술)

아침에 눈이 내리고 저녁에 흐렸다.
인마가 밤에 떠나는데, 청마(淸馬) 세 필이 별안간 보이지 않았다. 사면이 모두 다북쑥뿐이니 도적이 있을 리 없다. 괴이한 일이다. 새벽에 떠났다. 오시에 갑목(甲木)의 비석 곁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말 먹이는 사람들이 탕참산(湯站山) 골짜기에서 잃어버린 말을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 곤장을 쳐서 경계했다. 백마(白馬)에 귀양와 있는 사람 김진창(金振昌)은 전에 관하(管下)의 아전이었는데, 와서 뵈었다. 책문에서 붙잡힌 죄인 중에 정범(正犯) 두 사람은 도피했다. 그러므로 차범(次犯) 두 사람을 잡아서 수를 채웠더니 밤낮으로 원통함을 호소했다. 정범을 오늘에야 찾아내게 되어 차범 두 명을 석방했다. 점점 고국에 가까워오니 돌아갈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눈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신시에 삼강을 얼음 위로 건넜다. 과섭차원(過涉差員)으로는, 중강의 북쪽은 옥강만호(玉江萬戶) 이국립(李國立)ㆍ남쪽은 방산만호(方山萬戶) 김윤성(金胤晟)이고, 압록강의 북쪽은 수구만호(水口萬戶) 김천일(金千鎰)ㆍ남쪽은 인산첨사(麟山僉使) 권진명(權震鳴)이었다. 강안에서 만윤(灣尹) 김휘(金徽)가 의장(儀仗)을 거느리고 나와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인마를 점고하였다. 용만의 남문(南門)으로 들어가서 용만관(龍灣館)에 유숙했다. 반년 동안 이역에서 무한한 고생을 하다가 고국땅으로 돌아왔다. 술잔을 기울여서 회포를 푸니, 그 기쁨은 말하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각무차원(各務差員)은, 청북도차원(淸北都差員) 정주(定州) 원 김경(金鏡), 지응차원(支應差員) 선천(宣川) 원 정한기(鄭漢驥), 역마차원(驛馬差員) 어천독우(魚川督郵) 김징(金澄)이다. 참(站) 위에 나와 접대하는 것은 태천(泰川) 원 홍경우(洪儆禹)이다. 부사ㆍ서장관과 함께 계본(啓本 임금께 상주하는 글)을 의논해서 만들었다. 금법(禁法)을 범한 죄인을 용만 옥에 굳게 가두었다. 용만으로 돌아온 일을 상주하는 계본을 보내는 파발 편에 임금에게 올리는 편지와 가신(家信)을 부치느라 새벽 닭이 두 홰를 우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이날은 아침에 45리, 저녁에 35리를 갔다.
 

 

책문에서의 난감한 일을 마무리 짓고 대군일행은 마침내 의주에 도착한 것이다. 

 

가. 동팔참

 

요양에서 압록강까지 450 리 지역에는 요양.낭자산.첨수참.연산관  4 참과 진이보(통원보), 진동보(사열참), 봉황성(송참.개주), 탕참  4 참을 합하여 팔참이 있었다. 참站은 사신.상인.행려자들의 숙박 편의를 위하여 설치한 시설이며 모두 청국 영역이니 동녘 동자를 써서 동팔참이라 한 것 같다. 탕참은 책문과 압록강 사이의 공지였고 설치.운영되지 않았다.

아래는 동팔참 지역을 거쳐 연경길을 오갔던 선학들의 지리 인식과 감회를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다. 

 

최부 <금남표해록>1488

해주.요동 등지의 사람들은 반은 중국인이고, 반은 우리나라 사람이고, 반은 여진 사람이었다. ... 석문령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 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과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대개 우리 나라 사람과 같았다.

荷谷 허봉 선조 원년(1567) 진하 부사

동팔참의 땅은 산동에 예속되어 요동의 외요가 되며, 산천은 우리나라와 꼭 같아서 준엄한 영과 큰 하수가 많다.

 

김정중 <연행록>

회령령, 회정길, 여기부터 마을 모양과 물맛이 자못 우리 나라와 같은 느낌이 든다. 연산관은 옛 鵝골關이다. 원발점에 들어가 말을 쉬게하고 좌우의 가게를 찾았다. 가는 곳마다 가게 주인이 한 잔의 차를 내어 들기를 권하니, 제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예절이 있다. 문 위 춘첩자가 있는데, `문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복을 받고 호는 동.서.남.북의 재물을 들이다`는 글귀가 우리 나라의 저자문에 붙은 축어와 비슷하다.

권협 <연행록>

분수령 이북의 지세는 북쪽에서 내려와 골짜기의 여러 물이 모두 태자하에 모여서 서쪽 혼하로 들어가고, 분수령 이남의 물은 모두 팔도하로 모였으니, 분수령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김창업 <노가재연행록>

분수령은 평탄하며 서쪽 물은 요하로 들어가고 동쪽 물은 중강으로 들어가므로 이렇게 이름지었다. 금주.복주.해주.개주 등 요동의 모든 산은 여기에서 나아간 산맥이다.

 

김순협 <오우당연행록>

대개 송참부터 이 곳(분수령)까지의 120 리 사이는 비록 봉교나 골수와 같이 높고 큰 산들은 없어도 여러 험한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연이어져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도 마을을 열 만한 곳이 없다.

 

홍대용 <당헌연기>

책문은 변방의 황폐하고 궁벽한 지방으로 습속이 유치하고 사나우며, 입고 먹는 것을 오로지 조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행이 도착할 때마다 땔나무 같은 모든 물건의 값이 때를 틈타서 마구 뛰어오르고 방세도 매우 비싸게 받는다. 의주 사람들과는 이웃처럼 친숙하게 지내며 우리 나라 사정을 잘 알고 있어, 이해 타산에 밝고 교활한 것이 모두 우리 나라 풍속 그대로다. ... 북쪽 풍속은 사람을 비켜 세우는 법이 없는데, 오직 봉성 사람들만은 우리 나라 사정을 익히 알고 있어서 성장이 자나갈 때면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소리질러 길 아래로 비켜 세웠다. ... 책문을 열자 수백 명의 청인과 산서 상인이 몰려 나왔다.

유득공 <연대재유록>

책문의 호인은 사납고 거세어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매우 무례한데, 이 두 사람은 사람을 대접할 때에 예의가 매우 정성스럽고 도타우니, 풍속이 변방과 크게 다름을 알겠다.

 

김경선 서장관 <연원직지> 1832

책문에서 영수사까지로 하루 2 참씩 합하여 8 참이 되어 이름지은 것이다. 팔참 사이는 높은 산과 험한 고개, 큰 내와 깊은 숲이 많아 길이 매우 험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수레를 뒤집을 염려가 있다. 대개 그 난립한 산 중간에 널려 있는 들판이 많다. ... 고려촌은 요동들 첫머리에 있는 촌으로 촌가 수십 호가 있다. 동녕위의 옛터로 고려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崔認齋(이름은 晛 1563~1640)의 기록에는 `고려촌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고려말을 하고 차차 자라면서 의상과 관복은 고려 것을 많이 쓴다.`고 했는데 지금 보기에는 촌락이 매우 쇠잔하여 그 사람들이 아직도 고려의 후손인지 알 수 없다. 대개 동서로는 여기서(신요동)부터 산해관까지 이르고 남북으로는 의산醫山에서 시작하여 바다 가까이 이르러 그 길고 넓게 뻗친 것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천지가 큰 것을 알게 된다.

 

이조선 중기 인평대군 당시에는 요양부터 책문까지는 청국 영역이다. 하지만 고구려.고려 시기에는 요양 동쪽의 태자하와 북쪽 심양 부근의  혼하를 잇는 어느 선까지가 경계였다. 즉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기록에 보이는 서압록이 혼하인 것 같다.  

 

이처럼 인평대군이 청국 영역을 지나면서 건넌 요택.요하 및 요동 요양은 지금의 란하 중류와 동쪽 지역이였기 때문에 북경부터 의주까지의 로정은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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