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란하 중.하류였습니다.

 

 

위 추정 표시의 핵심적 근거는 아래 기록입니다.  

<한서/지리지>
遼東郡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玄兎郡 西蓋馬 馬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千一百里 

<후한서/군국지>

廣陽郡 高帝置 ...葪本燕國 刺史治(一)

(一)漢官曰 洛陽東北二千里

上谷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二百里

漁陽 秦置 洛陽東北二千里

右北平郡 秦置 洛陽東北二千三百里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一)...

(一)魏氏春秋曰 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 因名之水小水貊

玄兎郡 武 洛陽東北四千里

樂浪郡  洛陽東北五千里

遼東屬國...洛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

昌遼 ... 徒 ...徒河 ... 無慮 有無慮山 險瀆(二) 房 ...

(二) 史記曰 王險衛滿所都

 

 

즉 청 시기의 요하는 고구려.백제 초기부터는 염난수였으며 염난수 중류로 흘러드는 서쪽 지류가 대요수였으며 송.거란부터는 황하로 불렸습니다. 

 

이런 연유로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했으며 패수를 해성의 헌우락이라 했고 연수 계인경은 <환단고기/북부여기> 본문에 자신의 지리 인식인 패수는 금 곧 1910 년대 란하라 했을 것입니다.

 

한편 위 지도상에 표시된 흑.적색 실선 끝에 표시된 해亥와 정북正北은 기준지에서의 방향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해는 정북의 서쪽으로 시계 시침으로는 11 시 방향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익.이중환도 아래와 같이 전한 것입니다.

<성호사설/천지문> 이익(1681~1763)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과 같다. 그리고 대마도와 제주도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했다고 하니, 이는 곧 지관들의 일반론이다.

<택리지/복거총론,산수총론> 이중환(1690~ )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다. 해亥 방향에 앉아서 사巳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이다. 그런고로 예전부터 중국과 친해 왔다. 그러나, 땅이 좁고 물이 젓어 위인을 낳지 못했다.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 그리고 동호와 여진족이 모두 중원을 제패하고 황제가 된 일이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만은 그렇지 못해서 주어진 영토만 지키며 감히 뜻을 품어 보지 못했다`라 했다.

<후기 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배우성 37~38 쪽

즉 이조선의 도읍 경사인 한양을 기준으로 당시의 백두산.선춘령 위치는 시계 11 시 좌우 지점이였습니다. 그러한 지리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 아래의 무제목지도입니다. 

 

- 가칭 <백산대맥도>

이조선 영조 26 년(1751)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 <해동지도>에 실린 것으로 추정

출처: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고지도.제목 <산해관.성경.흥경.길림오랍.영고탑>,

 

 

결국 이조선 500 여 년 동안 평양.압록강.의주부터 청국 연경까지의 지리 곧 열하승덕과 심양승덕 등을 위시한 모든 위치는 위의 현 <중국전도>에 표시된 흑색 지명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적색 지명 표시는 공식적으로는 1934 년 간행된 <만주국지도>부터입니다.

 

즉 위 <만주국지도>에 표시된 백두산이 해좌亥座가 되려면 그 기준지는 동해 울릉도 쯤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조선은 울릉도 쯤에 도읍한 적이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아래와 같은 엉터리 지도를 고지도라고 기만하여 보물로 지정했습니다. 

 

-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2007 년 12 월 31 일 대한민국 보물 제 1537-2 호로 지정 

 

 

 

 

결국 <만주국지도>와 현 <중국전도> 표시는 청 시기의 란하.황하.요하를 란하 1 물길로 변조하고 황하.요하를 동북쪽으로 3000 여 리 씩 이동.위작하여 지금의 서요하, 지금의 요하로 이동.위작하고 3 강 유역의 원래의 모든 지명까지도 이동시킨 엉터리 지리입니다. 곧 식민사관과 동북공정 주장의 핵심 논리입니다.

 

이러한 지리 조작은 1872 년부터 일본 서향융성이 육군참모부를 동원하여 기획.실행시켰고 첫 결실이 1875 년 일본 육군참모국이 공식관찬지도라며 간행한 <아세아동부여지도>였습니다.

<아세아동부여지도>

출처: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홈페이지/연구/고지도

 

 

하지만 1875 년 당시 지리도 아래와 같았습니다.

저러한 지리는 거슬러 올라 전한 시기까지에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한 시기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의 위치도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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