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평양 땅에 대한 상상

  • 임기환
  • 입력 : 2022.01.20 15:42
 

[고구려사 명장면-141] 나당전쟁이 끝나가면서 80년 가까이 동북아시아에 휘몰아쳤던 전쟁의 광풍도 잦아들었다. 어떻게 보면 나당전쟁은 다소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675년 9월 신라 문무왕은 당 고종에게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조공하였다. 그러자 당 고종은 전해인 674년 정월에 삭탈했던 문무왕의 신라왕 관작을 다시 복구하였고, 문무왕 대신 신라왕으로 책봉했던 김인문도 임해공으로 다시 고쳤다.

애초에 신라 문무왕이 백제 땅을 차지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문무왕을 책망한 것인데,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당 고종은 의외로 쉽게 문무왕의 사죄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 고종이 왜 갑자기 너그러워졌을까? 여기에는 서쪽 토번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더 이상 신라와 전쟁을 벌이기 어렵다는 국제정세의 변동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듬해인 676년 2월에는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성(遼東城)으로, 뒤이어 신성(新城)아로 옮겼고, 백제 땅에 설치하였던 웅진도독부도 요동의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미 서주(徐州)와 연주(沇州) 등으로 이주시켰던 백제 사람들을 다시 건안성 웅진도독부로 불러모았다. 백제 부여융은 웅진도독 대방군왕이 되어 건안성에서 백제 유민들을 통솔하였다. 요동반도 고구려 땅 건안성에 백제인과 웅진도독부를 둔 것은 고구려 유민들의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의도로 보인다. 신라가 고구려 유민의 보덕국을 금마저(익산)로 옮긴 것과 같은 모양새다.

어쨌거나 웅진도독부는 676년 2월까지는 명목상으로나마 백제 옛 땅에 설치되었던 기관인데, 이를 요동 건안성으로 옮겼다는 것은 한반도 백제 땅이 신라 영역이 되었음을 묵인한 셈이다. 또 안동도호부를 요동 땅으로 옮긴 것 역시 한반도 내 고구려 영역을 포기하였음을 시사한다. 당이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군대를 보내 진압한 것은 고구려 영역을 지키겠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고구려국의 부흥 자체가 더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고구려 부흥세력을 진압한 뒤에 이들을 후원했던 신라에 대해서는 그렇게 다급하게 제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곧이어 당은 토번의 내분을 이용해 총반격을 가하기 위하여 676년 3월에 토번(吐蕃)을 정벌하기 위한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675년 매초성 전투를 벌인 이근행과 말갈군은 676년에 청해(靑海) 지역에 투입되었다. 이런 정세는 이제 신라와의 전쟁은 당분간 종식하겠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678년 9월에 당 고종이 신라를 재침하려 했지만 시중(侍中) 장문관(張文瓘)은 "지금 토번 정벌이 시급할 때 신라를 원정하는 것은 순리가 아니다"라고 만류하였다. 당 고종은 여전히 신라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토번의 정세로 인해 다시는 당과 신라가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결국 나당전쟁은 675년에 종식된 셈이다.

애초 신라가 당과 전쟁을 불사한 이유는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백제 땅 및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을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김춘추와 당 태종의 밀약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 고종은 전쟁의 성과를 신라와 나눌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니, 사실 전쟁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당 고종이 신라 측 주장을 묵인하고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으니, 신라는 밀약대로 평양 이남을 차지하였을까?

나당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매초성 전투지를 어디로 비정하느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신라는 최대로 잡아도 예성강 일대에서 더 이상 북진하지 못했다. 당이 한반도 서북부에서 철수했다고 하더라도 예성강 너머까지 진출해 굳이 당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고 판단한 듯하다. 신라의 북쪽 경계는 한동안 예성강 일대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으로 신라의 지원이 절실해진 당이 패강(浿江) 이남이 신라 영역임을 공식으로 인정하면서 신라도 다시 북진울 시도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에 의하면 736년에 윤충 등을 보내어 평양 일대 지세를 감찰하게 하였고, 748년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야 예성강 이북에 14군현을 설치하였다. 762년에는 오곡성 등 6성을 축조하여 태수를 파견했는데, 이 6성의 위치는 오늘날 곡산, 서흥, 봉산, 해주, 재령, 수안으로 대략 멸악산맥 일대였다.

736년에 평양 지세를 살피게 하였다는 사실은 그때서야 겨우 평양 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북쪽 영역에서 신라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8세기 중엽까지도 신라는 평양과 대동강 일대를 충분히 영역화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 뒤에도 그리 큰 변화를 보이지는 않는다. 782년에 패강진(浿江鎭·황해도 평산)을 설치하여 예성강 이북 땅을 군정(軍政) 방식으로 통치하였으며, 826년 헌덕왕 때에 패강에 장성 300리를 축조하였다. 이 장성은 자비령 일대나 혹은 재령강 일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에도 아직 대동강이나 평양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 무렵에 평양은 누구의 영역이었을까? 676년 안동도호부의 요동 이치 이후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그 뒤 이 일대에 세력을 뻗칠 수 있는 존재는 발해이다. 발해는 서경압록부를 설치·운영하였는데 그 위치는 압록강 중상류 지금의 임강시로 비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발해는 압록강 수로를 이용하여 중국 당과 사신을 보내거나 교역 활동을 하였다. 732년 당 등주 공격 시에도 압록강 수로를 일부 이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는 이 압록강 교통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어느 시기엔가부터 압록강 이남 일정 영역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발해가 평양 일대를 영역화했다는 흔적은 찾아지지 않는다.

▲ 기성도병(箕城圖屛) : 조선시대 평양성의 모습을 전해주지만, 고구려 장안성의 윤곽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평양과 그 일대는 676년 이후 당의 영역도, 신라의 영역도, 발해의 영역도 아니라는 말이 된다. 평양은 늦어도 기원전 4세기부터는 고조선의 중심지로 수도 왕검성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그 뒤 낙랑군 조선현으로 중국 왕조와 한반도 사이 교역과 교류의 중심이었으며,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된 후에는 한반도의 거점으로서 기능했다.

뭐니 뭐니 해도 평양이 가장 화려하게 만개한 시절은 고구려 평양천도 이후였다. 특히 거대한 장안성을 축조한 뒤 평양 도성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도시로 손꼽혔다. 고구려의 위상에 걸맞게 물산이 풍부하고 문화가 융성했던 국제적인 도시였다.

이렇게 천년 동안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번영하던 곳이 고구려 멸망 후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사실 전쟁으로 인한 폐허는 다시 복구할 수도 있지만, 평양은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평양이 변경의 최전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 태종은 김춘추와 밀약을 맺으면서 평양 이남을 신라에 양도하겠다고 했다. 이는 자연스레 평양을 당과 신라의 접경지로 만든다는 뜻이고, 고구려 평양성을 아예 소멸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평양은 그렇게 변경이 되었다.

고대 시기에 국가 사이의 변경은 일종의 완충지대였다. 서로 간에 힘을 비워두는 곳이었다. 그래야 충돌이 적게 생기기 때문이다. 평양과 대동강 일대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도성으로서 인구가 밀접했던 이 지역은 당이 3만호에 가까운 귀족 등 유력자들을 이주시켰고 나머지 귀족세력들도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부흥전쟁의 한복판이었으니 한동안 일반 주민들조차 이곳을 떠나 텅 비워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당전쟁이 끝난 후 평양 일대에는 다시 주민들이 모여들어 삶을 일구고 살았을 것이다. 본래 이 일대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였다. 게다가 신라든, 발해든, 당이든 그 어떤 나라의 힘도 미치지 않은 곳이었으니 조세를 터무니없이 걷어들이고, 귀족들이 군림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으니 혹 살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이 나지 않았을까?

고조선 이래 지난 천년 동안과 같은 번영과 풍요로움은 없을지라도 어차피 이를 누리지 못하는 일반 주민들은 모처럼 지배자가 없는 이곳에서 자기들끼리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이른바 국가라는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이곳이 어느 면에서는 혹 무법천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크게 가진 것 없고 빼앗길 게 없는 변경에서의 삶이라서 전쟁이라는 긴장감만 없다면 나름 무릉도원 같은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었으리라 상상해본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평양과 그 일대는 천년 동안의 영화를 잃었지만, 250년 동안 그와는 전혀 다른 변경 공간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렇게 장기간 힘의 공백지와 같은 공간은 한반도 어디에도 없다. 그것도 도읍지이며 중심지였던 곳이. 그런 변경의 시간 동안에도 눈에 띄지 않고 기록에도 남지 않았지만, 주민들은 살았고 보이지 않은 역사도 이어졌을 게다.

평양에 다시 국가의 힘이 미치기 시작한 때는 고려 태조 때였다. 태조 왕건은 918년에 평양을 대도호부로 삼고 곧이어 서경으로 그 위상을 올렸다. 평양이 다시 중요한 정치사회적 공간이 된 것이다. 이후 평양은 중요한 역사의 현장으로서 역사에 그 이름이 숱하게 오르내렸다.

이렇게 보면 변경으로서의 평양 역사 250년 동안도 매우 특별한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때 그 공간에서 있었던 역사가 어떠하였을지, 막연하지만 즐거운 상상을 허용하는 것도 또 다른 평양의 역사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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