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증명된 충격 사실!!
삼국은 한반도에 없었다!
1.별자리로 본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 3국의 무대는 중국 대륙이었다
(안영배 :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1997년 2월 신동아)
고려시대 김부식이 남긴 삼국사기에는 다양한 천체현상과 기상이변들이 나타난다.
호기심 많은 과학자들이 이 기록들을 과학적으로 검증해본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국사학계는 침묵만 지켰고 실험결과는 대중에 알려지기도 전에 묻혀가고 있다.
왜 그럴까? 당시의 현장을 재 추적해 본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서로 인정 받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일식,월식,태백주현(금성이 낮에 출현하는 현상)등 모두 225건의 천문 관측기록이 발견된다.
이중 가장 많이 기록된 일식의 경우 신라 30회.백제 26회.고구려11회순으로 모두 67회인데 같은 한반도 지역에서 일어난 동일한 일식을 두나라에서 동시에 기록한 것은 3회에 불과하다. 상호인접한 삼국임에도 불구하고 일식이 동시에 관측되지 않은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현상이다.
또 6세기 이전의 일식 기록은 대부분 중국의 사서에 기록돼 있어 차용한 것 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중국측 일식 기록을 옳겨놓은 것도 있다. 유일하게 중국측기록과 일치하지않는 일식기록은 2건이있는데 천문학적검증결과 지구상 어느곳에서도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일식보다 간단한 월식의 경우 삼국사기에 한번도 기록되지 않고 있다.이는 중국에서 월식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삼국사기의 편자인 김부식은 6세기 이전까지는 중국사서를 모방했음을 보여준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천문기록. 성의수첩. 하출서방신사)
이글은 지난 85년 일본의 천문학자인 사이토 구니하루가 현대의 컴퓨터 기술을 빌려고대삼국의 천문 현상을 과학적으로 검증해본 결과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에 대한 불신감과 비아냥거림이 역력히 드러나는 글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일본의고대역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대해 조작과 과정이 심하다고 지적한데 대한 일본학자의 반발 심리가 개입한 때문인지 사뭇 도전적이기 까지하다.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는 우리나라 삼국사기에, 고사기는 삼국유사에 곧잘 비교 되곤 하던터다. 그동안 일본의 두역사서는 일본 왕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것이 한국학자뿐아니라 일본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지적되 왔다. 그러다가 한국의 최고 정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역시 중국측 천문 기록을 차용 하였다는 증거가 나타나면서 너희(한국)나 우리(일본)은 피차 같은 처지가 아니냐는 논리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사실 일본 학자가 밝힌 이같은 주장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적지않은 천문 기록을 남긴 삼국사기가 중국것을 차용했다는점은 곧 삼국사기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유추해석 될수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해 불신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도 부인 할 수 없다.
역으로 한국역사의 변방으로 취급돼 모멸감을 느껴온 일본 사학계로서는 희색이 만면할 만한 소식 이었다. 이글이 발표 된후 한국의 학자들 중 아무도 반론이나 이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일본학자의 주장이 과학적 실험을 근거로 헀기 때문에 과학적 대응 논리를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자들은 아예 무시하거나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한국의 천문학자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일본 학자의 주장이 있은지 정확히 10년째 마침내 침묵만 지키던 한국쪽에서 드디어 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묘하게도 한국 역시 역사학자가 아닌 천문학자가 그 주인공으로 나섰다. 말하자면 일본 천문학에 대한 한국 천문학의 실력 대결인셈이었다
한국 역사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혜성처럼 등장한 주자는 서울대 천문학과의 박창범교수. 세계의 천문학을 주도 한다는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천체 물리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캘리포니아 과학기술대학에서 연구원 생활을 한 후 지난 93년 귀국한 박교수는, 그 이듬해에 바로 일본 학자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시 햇던 것.
논문 역시 삼국시대 천문 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이란 제목을 달았다. 분명히 일본학자의 주장을 정면으로 겨냥 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삼국사기 천문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베꼈거나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한 일본 학자들의 논리가 미국 유럽의 천문학자 사이에서도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천문 현상에 관한 우리나라는 내 세울 게 없다는 식이었지요.
그러나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를 갖추고 있고 중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가진 우리나라가 천문 관측을 일방적으로 중국에 의존 했다는 주장이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습니다.
박교수의 도전의 변이다.
그는 즉시 실험에 들어 갔다. 삼국시대의 천문상태로 가기 위한 프로그램을 짰다. 천문현상은 정연한 물리법칙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천체역학적계산에의해 몇천년전의 기록도 그 진위여부를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다. 이처럼 천문현상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은 특히 고대사 연구에서는 특별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사서에 기록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내용들은 집필자의 주관이나 역사적 변천 과정에서 선별되고 왜곡될 소지가 많은 반면, 천문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은 그 성질상 변조가 어렵고 설혹 조작이 있었다고 해도 대부분의 조작 사실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일본 학자들의 우리나라 천문기록 검증에 대한 역검증도 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천문관측 검증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준비한뒤 연구실에 워크스테이션, 선 스팍-10을 설치하고 근거리 통신망LAN으로 대학의 중앙컴퓨터와 연결 프로그램을 가동시겼다. 시간이 흘러 이윽고 컴퓨터 모니터에 관측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교수는 먼저 중국사서에는 발견되지 않는 우리만의 독자적인 관측 기록인 태백주현과 달이 행성을 가리는 엄폐(occulation)현상에 대한 검증작업을 벌였다. 이 기록이 정확하다고 판정되면 천문 관측에 대한 우리의 독자성을 일차적으로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인 태백주현은 신라에 4회.백제 3회.고구려1회 등 모두 8회가 기록돼 있다. 이 중 금성이 태양에서 멀리 떨어짐으로써(최대이각) 가장 밝아지는 시기를 계산해본 결과 삼국시대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4개로 50%의 적중률을 보였다.
놀라운 점은 계산이 맞아 떨어진 삼국 최초의 기록은 백제 구수왕 11년(서기 224년)의 일인데 이는 서기 200년대 초부터 한국의 고대국가들이 독자적으로 천체를 관측하고 기록하였다는 점을 증명한 것이다. 또 금성은 공중에 먼지나 수증기가 없는등 기상조건이 좋은 경우 평소 낮에도 볼 수 있는 행성이므로 나머지 4개의 기록들도 오기라고 볼 수 없다. 실제 7개의 태백주현 기록들이 동아시아에서 기상조건이 좋은 늦여름과 초겨울사이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 천문기록이 실제 관측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교수는 나머지4개의 금성관측 기록만해도 당시 천문학 수준과 관측제도의 완벽성을 였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금성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기상조건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장기간에 걸쳐 금성의 위치 변화를 측정해 낮에도 금성의 위치를 대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주의깊게 추적해야만 가능한 것. 지금까지 일본의 천문학자들은 태백주현 기록의 한국 독자성은 인정했으나 진위 여부에 대한 상세한 계산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또 이 기록들이 갖는 의의를 의도적으로 소홀히 취급함으로써 국내학계에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던 것
일본 천문학자의 치명적 오류
또다른 우리의 독자 기록인 달이 행성을 가렸다는 엄폐현상을 보자
달이 행성을 가렸다는 기록은 신라에 17회, 백제 2회로 모두 19회다. 여기서 백제의 기록중 1회는 동일한 시기에 신라에 기록이 있고 나머지 1회는 중국의 진서에도 나오므로 이를 제외 한다면 신라의 17회 기록이 우리만의 독자 관측으로 일단 상정 할 수 있다
박교수가 계산한 결과 17회 현상중 9회는 천체역학적으로 실현이 확인됐고, 3회는 행성이 달에 상당히(1~3도)접근하였으며 2회는 다른 행성이 달에 근접했다. 이 역시 삼국사기 기록들이 천체역학적 계산 결과와 매우 인상적인 일치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일본학자들은 달의 행성 엄폐 현상 기록들이 천문학적 계산에 의한 결과 확인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 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양국의 학자가 똑 같이 과학적인 절차를 밟았으면서도 왜 이같이 다른 결과가 벌어지는 걸까.
박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 학자들은 달과 행성의 최근접 시각을 계산할 때 조금이라도 해가 떠 있을 때(아침이나 저녁무렵)일어난 엄폐현상들은 아예무시하는 부주의를 저질렀습니다. 예를 들어 일몰 직전에 달이 행성에 최근접하고 이후 서서히 멀어 진다고 할 경우 일몰 때 달이 아직 행성과 매우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많아 당시의 첨문관측자들은 범(달과 행성이 1촌 이내에 빛이 서로 미치는 현상)이나 입으로 묘사했는데 일본인들은 이런 개념들을 몰랐던 거지요. 어쩌면 우리나라 일식 기록들이 중국것을 모방했다는 강한 선입견 때문에 나머지 천문 기록들에 대해 별다른 주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고요. 그렇다면 일본 학자들이 진한 불신을 표시했던 문제의 일식 기록들은 어떠할까.
먼저 일식 기록은 고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사건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고대에서 태양은 절대 권력자의 상징이었는데 그 태양에 변화가 있다는 것은 정치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대한국과,중국, 그리고 일본(628년이후)역시 일식을 중요시 여기고 측정하려 했던 것이다
박교수는 일단 한국과 중국의 일식 기록이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을 고려해 북위 10도에서 60도(위도), 동경 90도에서 150도(경도)지역을 분석대상으로 잡았다. 이는 한반도를 포함해 중국, 동남아시아,일본까지 고려한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를 다시 50곱하기60, 즉 3천개의 블록으로 나눠 일식 관측이 어디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는지(최적관측지)를 파악해 보기로 했다
일식의 경우 달이 태양을 가리는 그림자가 지구상의 모든곳에 드리워지지 않고 알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따라서 한 나라에서 주기적으로 관측한 일식 기록을 추적하다보면 어느 지역에서 일식 현상을 관측했는지를 밝힐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의 기록이 한반도에서만 관측할 수 있는 일식 이라면 일본 학자의 주장은 빗나가고 만다
경악할 만한 실험결과
작업은 방대 했다. 워낙 광범위한 지역을 고려하다보니 일식자료를 입력하고 컴퓨터를 돌리는 시간만도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이윽고 삼국의 일식을 볼 수 있는 최적관측지가 컴퓨터 모니터에 지도로 나타났다 그런데 컴퓨터 지도가 이상했다.
이작업에 처음부터 참여해 마지막 결과물을 살펴보던 박교수팀은 찬찬히 흟어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햇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최적 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에서 그것도 서로 지역을 달리해 나타난 것이다.
신라의 경우 일식 기록이 있는 2세기 까지는 최적관측지가 중국 양자강 유역으로 표시된 반면, 7세기 이후 즉 후기신라(통일 신라)는 한반도로 나타났다, 또 백제는 발해만 유역, 기록 횟수가 가장 적은 고구려(11회)는 백제보다 더 북방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그림참조)
박교수가 실험한 것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총 67회의 일식기록중 동아시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식 54개. 이를 관측한 나라별로 분류한 다음 최적 일식 관측지를 추적한 결과다. 기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최적 관측지는 바로 그 국가의 위치가 된다.
이는 서구에서도 보편적으로 공인 받은 방법론이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당시 중국의 일식 기록을 베꼈다면 중국의 특정 장소에 삼국의 최적 관측지가 일치해 나와야 하는데 위치가 서로 확연하게 다르다. 그렇다고 한반도는 더욱 아니다 무언가 계산이 잘못 된 것일까.
혹시나 해서 고려시대의 일식기록을 똑같은 방법으로 대입해보았다. 고려 일식 기록 99개에서 임의로 16개를 선택하는 방법으로 실험을 1천번 수행 한 결과 후기 신라의 경우처럼 한반도가 최적관측지 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방법론이나 천문학적 계산에 있어서 오차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고대 삼국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 위치 했다는 말인가.
박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실험결과 삼국의 최적관측지가 위도상으로 서로 매우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은 중국의 사서를 베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김부식이 당시의 중국 사서에서 일식 기록을 베껴서 역사서를 쓸 때 삼국마다 이렇게 다르게 배치할 확률은 계산상 0.03%에 불과하므로 불가능한 일 입니다.
결국 이는 삼국의 일식 기록이 서로 다른 중국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관측한 결과임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중국의 일식 기록이 삼국의 관측기록을 차용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후한의 일식 기록은 외부에서 들어 적었다고 하는 기록건수가 전체의 40%에 이릅니다. 특히 고구려 태조 64년(서기 116년)의 일식기록에 대응하는 후한서 오행지 일식 기사에는 요동이문(요동으로부터 들었다)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는 동이족 자료가 전달됐음을 의미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또 삼국시대 천문관측 기록은 그 실현율(실제로 일어난 비율)이 77%로 중국(60%)보다 더 높게 나타나고 서기 628년부터 기록한 일본의 일식 기록 실현율 44%보다도 월등히 뛰어난점도 삼국의 천문학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한편 삼국시대 천문 현상 기록 자체만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 할 수 있다 중국 사서에도 있는 천문 관측기록은 중국의 별자리 개념을 가지고 묘사한 반면 중국에 보이지 않는 우리만의 독자 기록은 중국의 별자리식 개념을 가지고 표현했다는 점이다.
예를들면 신라 남해왕 20년(서기 23년)금성이 태미원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후한서 광무제기에 똑같은 기록이 있는 반면 신라 일성왕 20년(서기 153년)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그리고 북방에 보엿다가 20일 만에 없어졌다는 기록은 우리만의독자기록이다.
여기서 김부식은 어떤식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김부식은 여러 가지 우리 고대사서를 검토하면서 천문기록 현상이 보이면 중국의 사서에서 확인해보아 발견되면 중국의 기록 방법을 따랐고 우리 민족의 독자적 기록이면 그대로 방위로 표시 했던 것이다
삼국은 한반도에 없었다!!
박교수는 삼국이 대륙을 근거지로 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홍수 기록이다.
먼저 신라의 홍수 기록을 살펴보면 2세기에서 4세기 까지는 음력 4~5월에,5세기 이후 부터는 음력6~7월에 큰물(홍수)이 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장마와같은 기상 현상은 1백~2백년 사이에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기록 역시 지구상에서 위치가 다른 두곳에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음력 4월~5월에 큰 물이 나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강우량이 적은 곳은 어디인가 동아시아에 산재한 기상관측소가 최근 50년~1백년간 축적한 강수량 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양자강유역과 그 이남으로 드러났다.
같은방법으로 음력 6~7월에는 산동반도와 한반도 지역에 강우량이 많았고 이 시기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은 강우량이 많지 않음도 확인됐다.
결국 이같은 기상학적 특성은 신라의 일식 기록을 찿는 것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구려본기에는 큰물 기록이 각각 7회와 6회만 나와 통계학적 분석이 신라보다는 어려운 측면이있다
백제의 경우 큰 물이 발생한 달이 5월에 3회,6월에 4회가 있었고 고구려의 경우 5월에 3회, 6,7,8월에 각각1회식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백제는 신라보다 큰물이 한달 정도 늦고 고구려는 백제 보다도 약간 늦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기상기록 역시 일식기록으로 추적한 최적관측지의 위치와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제 일본학자들이 주장한 의혹과 불신은 모두 풀렸다.
일본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식기록에 대한 최적관측지를 한반도에 있는 평양(고구려), 부여(백제),경주(신라)로 잡아 분석한 결과 6세기 이전 삼국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이런 과학적 결과를 두고 정작 기뻐해야 할 국내 사학계는 무거운 침묵만 지켰다.
고대사 전공의 한 국사학자는 일본인들이 삼국사기를 부정한데 대한 통쾌한 반증이기는 한데 그 결과가 아무래도----하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 국사학계로서는 박교수의 결과물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다. 지금까지 쌓아온 고대 삼국에 대한 학문적 업적은 모두 한반도를 토대로 성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고대 삼국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은 재야 사학계에서 일찍부터 주장돼온 바다.
이중재, 오재성씨등 재야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저서를 통해 삼국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있었다는 생각하는 한 우리 고대사의 미스터리는 풀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러면서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논리를 펴는 여러 가지 문헌사료 등을 제시하고 있다.
기상전문가의 또 다른 증명
이들 재야사학자들 중 21년 동안 기상청에서 근무한 기상관측 전문가 정용석씨는 기상학적 자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삼국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이같은 연구 결과를 참과 거짓의 역사 1,2(청노루)라는 저서를 통해 상세히 밝히기도 했다.
먼저 홍수와 가뭄에 대한 삼국시대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사기에는 신라 파사왕 29년에 홍수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로 사신을 보내 정부의 양곡을 풀어 구제하였고로 기록돼 있다. 파사왕 29년은 서기로 108년. 바로 이해는 백제 기루왕 32년 인데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엉뚱하게도 백제에서는 봄,여름에 가뭄이 있어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는 끔직한 일 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해 같은 계절에 둘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빠져있는 상황은 마찬가지인데 신라쪽은 홍수 때문이라고 하고 백제는 가뭄 때문 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한반도에 삼국이 있었다고 할 때 신라 지역인 경상도와 강원도는 홍수로 난리가 났고, 백제 지역인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는 약6개월 동안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했다는 뜻이다. 정용석씨는 이기록은 한반도의 기상 원칙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구자전원칙과 전향력을 볼 때 북반구에서는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상식. 따라서 한반도에서 위와 같은 상황이 되려면 대륙에서 이동한 습기가 많고 규모가 큰 저기압이 황해를 건너오는 도중에 바다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공급받아 일단 백제 땅을 껑충 뛰어 넘은뒤 경상도와 강원도 땅에서 포화상태가된 수증기에너지를 뿌릴 때 신라 지역에는 홍수가 발생한다.
그럴 경우 같은시기 6개월동안의 긴 가뭄을 일으킨 큰 고기압 덩어리는 한반도에 있을 자리가 없게된다. 이렇게 오랜 기간 지속적인 가뭄 현상을 일으키는 공기 덩어리는 최소한 수백킬로미터에서 수천킬로미터를의 반경을 유지하며 요지부동이거나 이동 속도가 아주 느린 특성이 있다.
기상학 용어로는 블로킹 기단 이라고 하는데 강수현상을 일으키는 공기 덩어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범위가 크고 넓다.
즉 백제뿐 아니라 홍수 상황에 있는 신라와 고구려까지 가뭄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공기의 흐름으로 볼 때 백제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나고 신라지역에서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면 억지춘양으로나마 해석이 불가능 하지는 않다. 그러나 정반대의 현상은 기상학상 불가능 한 것이다.
결국 이기록은 기록 자체가 잘못 돼었거나 아니면 삼국의 위치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삼국의 기후 현상이 현 한반도 쪽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기상 증거는 더 많이 나타난다.
다음 기록을 보자.
신라 벌휴왕 9년(서기 192년) 여름 4월에 서울에 눈이 3자나 내렸다(삼국사기) 신라 눌지왕 41년(서기 457년)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삼국사기) 백제 기루왕 23년 (서기99년)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삼국사기) 먼저 여름 4월은 지금으로 말하면 양력 5월6일 입하가 지난때이다.
한반도의 신라 지역은 대체로 12월 하순을 전후해 첫눈이 내리고 늦어도 3월 초순이면 눈이 그치는 곳이다 또 지금의 경주는 3,4개월정도의 짧은 기간 동에만 눈이 내릴 수 있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곳이다. 그런데 벌휴왕 9년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3자(76센티미터 추정)나 내려 극심한 피해를 주었다면 보통의 기상 이변이 아니다.
옛날 제왕들은 때아닌 계절에 눈이나 서리가 내려서 곡식을 해치는 일이 생기면 정사를 잘못 처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판결한 죄인을 다시 심사 하거나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는등 심각하게 받아 들였다 이 때문에 사서에서도 기상이변을 비중있게 다루는 것이다.
문제는 신라에 기상이변이 발생했다면 홍수때의 공기 이동처럼 백제땅에도 더 많은 눈이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백제의 기상현상은 신라 지역보다 대개1개월 이상 빨리 내리고 또한 경주보다는 늦게까지 내리게 된다. 그런데 백제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아예 기록이 누락됐거나 실제로 신라와는 강역이 달라 백제에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일 게다.
서리 현상은 더욱 그렇다
눈의 경우 간혹 한반도 백제에 많이 내리고 신라에 적게 내릴 수는 있어도 서리는 그렇지 않다. 대륙에서 찬공기가 이동해와 한반도에서 그 성질을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리는 신라따로 백제따로 구분해서 내리지 않는다 특히 곡식을 해칠 정도의 무서운 서리는 더 그렇다. 따라서 곡식을 망가뜨릴 정도의 서리가 백제지역에 내렸다면 경상도와 강원도 산악지방에 서리가 내리지 않을 확률은 0%에 가깝다. 그러나 백제에 피해를 준 서리가 신라에는 나타나지 않고 반대로 신라에 피해를 준 서리는 백제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역시 삼국이 한반도에서 인접해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토함산(吐含山)이 화산 활동했다?
정용석씨는 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천4백여년전에 신라국에서 화산폭발과 화산활동이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와 고구려에는 지진 기록만 있을뿐이고 화산 기록만큼은 신라가 유일하다.
그 기록을 검토해보자
신라진평왕 31년(서기 509년)봄 3월에 모지악산의 땅이 탔다. 구덩이 너비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5척이나 되었고 10월15일에 꺼졌다 신라 무열왕 4년(서기 657년)가을 7월에 동악 토함산의 땅이 타서 3년만에 꺼쪘다 국내 사학자들은 모지악 산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토함산은 현재 그대로 경주에 있는 산으로 보았다 또 토함산의 화산 활동에 대해 일부 사학자는 LNG나LPG의 천연가스 폭발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들 화석 연료가 생기는 층이 경주 일대에 있어야 하는데 세계지질학적 보고에 의하면 한반도는 석탄이외에는 화석연료가 없는 지층이라고 판정하고 있다 또 만약에 경주 토함산에서 천연가스가 3년 동안이나 뿜었다고 한다면 최소한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해발7백50미터의 평범한 화강암석으로 이루어진 경주 토함산은 천연가스가 나올 수 있는 산도 아니고, 더더욱 화산폭발에의한 휴화산도 아니다 한반도의 어느곳에서나 쉽게 볼 수있는 토질과 석질의 산인 것이다
정용석씨는 이 때문에 토함산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적이 있다고 말한다. "포항에서 기상대에 3년간 근무를 하면서 경주를 포함해 인근의 지형을 샅샅이 흟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화산활동은커녕 천연가스 폭발 같은 흔적 이라고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경주 일대의 지형과 지세는 지금도 눈감고 훤하게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은 분명히 토함산이 화산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먼저 화산활동에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지진이 따라 붙는 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열왕때 토함산이 불기둥 뿜기 2백41년전인 실성왕 15년(서기 416년)에 토함산이 무너져 샘물이 솟았고 물기둥의 높이가 3장이나 되었다는 기록과 1백86년전인 자비왕 14년 (서기 471년)에는 신라의 서울 땅이 갈라져 동서남북 넓이가 20장이나 되는 대규모 강진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토함산은 화산활동을 하기 전에 전주곡으로 지진 현상까지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토함산은 어디에 있을까 정용석씨는 중국 안휘성 소호시 합비라는 곳에 있는 함산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토함산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한다 화산으로 용암을 뿜어내는 활화산일때는 토함산이 되지만 요즘 말하는 휴화산일 때에는 토하지 않기 때문에 함산含山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 실제로 중국대륙의 지형지리지인 중국지에 의하면 함산은 화산활동이을 한적이있는 휴화산이고 그 인근의 합비지역은 화산활동의 여파로 토질이 좋아 작물이 잘 자란다고 돼 있다고 한다
고대사의 수수께끼들
비단 천체현상이나 기상학적 개념으로 보지 않아도 우리나라 고대사에는 여전히 수수께끼가 많다
중국의 사서에 고구려가 당나라에 굴복하면서 낙타등을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나 일본서기(원본22권)에 백제가 낙타 1마리. 노새 1마리, 양2마리를 보냈다등의 기록은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보는 한 있을 수 없는 현상들 인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정창원에 보관돼 있는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은 백제가 보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바둑판 측면에 열대지방에나 있음직한 낙타 그림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국내 사학계가 한반도를 근거로 해서 쌓아온 고대사 복원 업적을 무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들은 실제로 한반도에 있는 금석문 유적등을 통해 고증받은 것도 많기 때문이다 이에 박창범교수는 과학자적 입장에서는 두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한반도의 사람들이 중국 대륙에 있는 특정 집단들과 연관을 맺어 천문학적 기록 혹은 역사 기록을 받아 들여 지신들의 역사로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즉 한반도의 백제는 백제대로 신라는 신라대로 중국대륙의 인연있는 집단 혹은 국가들과 교류를 맺어 이같은 자연과학적 현상을 자기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삼국시대 초기에 삼국은 중국대륙을 주무대로 한반도를 변방 정도로 취급해 활동하다가 여러 가지 정치 사회적 이유로 나중에 한반도에 정착 했을 가능성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 이같은 가능성을 높여주는 천문학적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전 5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 사이에 집중적으로 보였다가 이후 4백년간 기록의 공백 상태를 거친다음 서기 600년경에서 934년 사이에 다시 관측 기록이 보인다는 점이다
즉 신라의 주세력이 중국에 머물다가(이때는 최적 관측지가 중국 양자강 유역)4백년간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7세기에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이다(이때는 최적 관측지가 한반도로 나타남)
한편 박교수는 조심스럽게 단군에 대한 예기도 끄집어 냈다 그는 지난 94년 삼국시대의 천문기록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 1년전에 단군시대에 대한 천문기록을 이미 연구 발표 한 바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때의 경험이 삼국시대 천문기록을 검증하게 된 원인이 됐다는 것 그러나 그가 단군 조선시대 천문 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은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천문학으로 고조선사도 증명!!
그는 단군에 대하여 또 무엇을 밝혀냈다는 걸까
최근 들어서야 단군시대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국사학계에서는 아직도 단군을 신화시대로만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대표적인 사서로는 단기고사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들 수 있다
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엮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편년체 역사서다 여기서는 역대 단군 임금들의 행적등이 일일이 소개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라는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시대 역사서로 단기고사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라는 낙인이 찍혀 외면돼 왔다
이서적들이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은 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박교수와 같은 천문학자의 눈에는 이들 책도 달리 보였던가 보다
"위서라고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단군조선에 관한 책에도 천문현상이 기록돼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동아시아 제국들은 천체현상이 지상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주술적 믿음하에 천체 운행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거지요 그렇다면 이들 책이 위서야 아니냐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바로 당대의 천문 현장으로 돌아가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방법은 삼국시대 천문기록 검증과 같은 식입니다
박교수에 따르면 이들 단군 역사서에는 모두 12회의 천문 현상에 관한 기록이 수록돼 있다고 한다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로 가장 많고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등 다섯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 그리고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 군데씩 기록돼 있다(도표참조)
단군 조선시대 천문현상 기록 일람표
1)
2세 단군 부루 58년(B.C 2183)
일식
2)
13세 단군 흘달 50년(B.C 1733)
오성취루
1년오차
3
17세 단군 여을 20년(B.C 1533)
일식
4
29세 단군 마휴 9년(B.C 935)
남해 썰물
4년후 실현
5)
6세 기자 2년 7월(B.C 918)
일식
4년후 실현
6)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B.C 837)
일식
4년후 실현
7)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B.C 765)
일식
연도일치
8)
19세 기자 1년 봄(B.C 579)
일식
연도일치
9)
39세 단군 두흘 21년 8월(B.C 525)
일식
월일치
10)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B.C 423)
일식
월일치
11)
47세 단군 고열가 48년 10월(B.C 248)
일식
연도일치
12)
36세 기자 인한 35년(B.C 241)
일식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행성 결집에 대한 기록이다.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라는 한줄의 글귀가 그것인데 제13세 단군인 흘달단제 50년(무진년) 즉 B.C 1733년에 다섯 개 별이 누성(동양천문학에서 표시하는 별자리 이름)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 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컴퓨터로 샅샅이 조사했다 검정결과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으로부터 B.C 1734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 이해 7월13일 초저녁에 다섯 개의 별이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고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있어 별빛이 한층더 찬란하게 빛났다 천문학적으로도 매우 드문 현상이었다
한편 B.C 1733년을 기점으로 하여 오행성이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교수는 기록연수가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3천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 떨어질 확률은 계산결과 0.007% 즉 세계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 햇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이었다
오행성 결집 형상과 함께 박교수 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두기록 두 사서 모두 제 29세 마휴단제 9년(BC 935년)때 남해조수퇴3척이라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 났다고 적혀있다 조수면의 변화는 달과 태양의 조석력에 의해 일어나므로 천체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오행성 결집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후인 BC 931년 11월22일에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 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 했다는 사실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 넣었을 가는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일식기록에서도 4년의 오차가 발생한게 2건이나 된다는 점이다
BC 935년에 근접한 일식기록으로는 6세 기자임금 2년(BC 918년)7월의 기록과 32세 단군 추밀 13년(BC 837년)3월의 기록이다 이들 기록 때에는 일식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정확히 4년후에는 각각 대응 시킬 수 있는 일식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는 단군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연대 계산상 오차가 있었다는 가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단군시대 일식과 관련해 박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사실 일식 현상은 그것이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했기 때문 이지요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 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1천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2183년에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4백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개의 일식 기록중 5개의 기록 (4년 후로 계산한 2개의 기록까지 합치면 모두 7개)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 중 2개는 연도뿐 아니라 월 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 할 만 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일부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전적으로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 하기는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 합니다.
특히 단군조선시대의 천문관측기록은 중국보다 월등히 앞선 연대이기 때문에 중국 기록을 뻬낄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서들이 후대에 추가 윤색되었다는 점도 있으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박교수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 시킬 수 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교수(단국대사학)와 박성수교수(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박교수의 천문학적 연구 결과는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제가 될 것이며 단기고사나 단군세기를 이제는 정식으로 연구해볼 때가 됐다고 밝혔다 또 그동안 단군등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상고사학회측에서는 학회연구 논문집 상고사학보에 에 박교수 논문을 게재 하기도 했다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교수(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실었으며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문헌사적 연구뿐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밝힌 바 있다
이처럼 한 천문학자의 집요한 연구결과가 기존의 학문세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여러 학문들이 분활돼 자기의 영역만 찾을 게 아니라 인접 학문 들과 공동보조를 맞추면 의외의 소득을 거둘 수 있다는 귀중한 사례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박교수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사학자들도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
"삼국시대 천문관측 연구 논문을 발표한 이후 국사학을 전공하는 어느 학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천문학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남의 학문에 끼여들어 근거도 없는 말을 하느냐는것 이었습니다 무엇이 근거 없는지 대보라고 하니까 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상식과 맞지 않는 다는 것 입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과학자는 과학적 결과만 놓고 말 할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연구 결과가 틀렸다면 얼마든지 정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결과를 인정한다면 학문에 있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자세가 필요 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박교수는 왜 역사가 국사학자 들 만의 것이냐고 반문 했다 한국인이면 당연히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는냐는 것 그의 말이 지극히 타당한 것 같았다(끝)
나라이름 어원으로 풀어본 대륙고구려 대륙백제 대륙신라
① 백제
일백 百 + 거느릴 濟
일백개의 소국을 거느렸다는 뜻의 나라 이름입니다.
어떻게 한반도에서 더구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100개의 소국을 거느린 대제국 될 수 있겠습니까?
백제는 대륙의 황하지역 중하류에 위치하였던 대제국입니다.
② 신라
새롭다 新 + 비단 羅
새 비단 좋은 비단의 뜻으로 누에를 쳐서 비단 생산을 주산업으로 하는 실크로드(비단길)와 연관이 있는 나라이름이며 황하 중상류 유역에 위치하였던 비단의 생산을 주산업으로 하는 나라입니다.
③ 고구려
높을 高 + 언덕 句 + 고을 麗
언덕이높은 푸른 초원에 위치였다는 뜻의 나라 이름이며 지금의 몽고의 초목지역에 위치하였던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의 나라입니다
'식민사관.동북공정 실체 > 한국의 식민.공정 맹종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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