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인하대고조선연구소가 개최한 학술회의 내용을 약취한 기사의 전문이다.
연구소의 잘못된 시각의 문장은 적색으로 구분하여 그 잘못된 시각을 비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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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중화사대사관 본격 비판
단군조선, 기자조선, 고려서북계, 철령위 위치 모두 유학자들이 왜곡해 놨다.
중국인 기자를 더 높여 우리역사가 아닌 위만조선과 한사군을
당연시하여 우리 고대사로 끌어들여
일제가 고려국경을 신의주-원산만으로 끌어들이는 데도 원인 제공
철령위도 강원도 북단이라고 하여 일제식민주의사관에 원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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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2018.09.07. 서울 대학로 동숭동 흥사단 본부 대강당에서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가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역사인식과 조선총독부 편수회의 <조선사>'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
현재 우리 역사학은 조선총독부 식민주의사관 추종자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식민사학이 아니라고 한다. 일제 황국사관론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증거를 보여주어도 부정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궤변을 늘어놓는다. 예를 들어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일제황국사관론자들 따른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이미 밝혀놓은 것이다.’ ‘우리 주장 근거는 여기에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일제식민사학 추종하는 것이 아니니까, 식민사학이라고 부르지 마라’고 한다. 물론 이는 면피성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이조선 유학자들이 그렇게 이미 주장했다고 해도 이들의 학문은 일제식민사학자들에게서 직접 수혈 받은 것이다. 이들의 이런 오리발 주장에 그동안 정식으로 대응한 사례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 역사를 중화사대주의 사관으로 왜곡 시켜놓은 유학자들을 본격 비판한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조선은 일제에게 먹힌 피해자라는 분위기가 압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 제도권 대학 단체가 있어 화제다. 지난 9월 8일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서울 대학로 동숭동 흥사단 대강당에서 학술발표회를 가졌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역사인식과 조선총독부 편수회 <조선사>’를 주제로 12:00부터 17:30까지 진행되었다. 이 날 주제발표회에는 조성을 아주대학 사학과 교수, 심규하 인하대학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 윤한택 인하대학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 정태상 인하대학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가 주제발표자로 나섰다. 학술회의 좌장으로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가 이끌었다. 종합토론에는 이병건 동원대 실내건축학과 교수, 한성주 강원대 연구교수, 조성을 아주대 사학과 교수, 정운용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참여했다.
이날 학술발표회는 그동안 학자 개인이 필요에 따라 이성계조선의 중화사대주의 사관을 비판해 온 것과 달리 제도권 대학의 한 연구소차원에서 비판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주제에서도 묻어난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역사인식과 조선총독부 편수회 <조선사>’다. 이 두 집단이 같은 역사관을 갖고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각 발표자별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그리고 고려국경선 및 고려 말 철령위 위치를 밝혔다. 그런데 주제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관점은 이성계 조선 유학자들의 역사관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사료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이조선 이전의 유학자들이 남겨놓은 것이거나 이조선 유학자들이 남겨 놓은 것이 전부다. 이들이 남겨 놓은 역사책을 가지고 우리 아득한 고대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 볼 수밖에 없는 한계에 맞닥드린다. 이날 발표는 남아 있는 사료를 비교분석하고 유학자들이 남겨놓은 문헌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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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학 고조선연구소 복기대 교수가 학술발표회 소개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먼저 이번 학술발표회를 연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복기대 교수의 안내 말씀이 있었다. 고조선연구소는 현재 조선총독부에서 내놓은 <조선사>라는 책을 번역, 해제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조선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유학자들이 남겨놓은 문헌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이조선시대 실학부터 파악함으로써 “조선총독부가 어떻게 우리 역사를 왜곡, 날조했는지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일제가 남겨놓은 “<조선사>를 밝혀내는 데 주안점을 두려고 한다.” 고 발표회를 연 소감을 내놨다.
첫 발표자로 나선 조성을 아주대 사학과 교수는 ‘한국사에서 단군인식’을 주제로 발표했다. ‘신라말, 고려초에서 조선중기까지 단군인식의 전개와 우리 역사체계’를 비교분석했다.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삼국사절요> <동국통감>을 주로 활용했다. 그에 따르면 유학자들은 단군조선을 인정한다. 그러나 대체로 단군을 이어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삼국시대 순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단군-동부여, 또는 단군-부루 기록도 보이지만 공식견해로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체계로 우리역사를 보는 것은 중화사대주의 역사관의 전형이다. 對중국 종속사관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그러나 전혀 다른 역사줄기도 얼마든지 캐낼 수 있다. 단군-부여-고구려-사국시대 순이다. 이러한 관점을 외국문헌이 알려주고 있어 신선함을 주기도 한다. 고려중기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저술했다는 <고려도경>이다. 이날 조성을 교수는 단재 신채호 역사관도 소개했다. 단군조선-부여로 이어지는 역사체계다. 그러나 그는 이 역사관은 이날 발표하지 못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어 조 교수는 장차 북조선과 관련하여 민족 동질성 회복과 정체성 확립에 남북한 역사학이 기능해야 함을 강조했다. 또 그는 근대민족국가 형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아직 분단으로 인하여 확립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반대하거나 가로막고 있는 세력을 꼬집었다. 민족주의만 나오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세력이 있는데 이러한 행위는 제국주의 앞에 스스로 무장해제하자는 것과 같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이 나라 역사학을 장악한 식민사학계를 염두에 두고 따가운 비판도 잊지 않았다. 우리 상고사 무대는 반도 언저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주와 연해주, 요동, 요서 및 열도까지 역사지평을 넓혀야 민족 전체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이 광활한 지역이 우리역사 무대였음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이어 심규하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 기자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분석, 비판했다. 그는 기자가 처음 등장한 것이 이조선시대라고 단언할 정도로 이조선의 역사관을 비판했다. 이조선시대와서 기자가 갑작스럽게 부각되었다며 의도를 파고들었다. 그에 따르면 기자가 우리를 문명개화시킨 존재로 부각되었는데 이는 이성계 일당이 이조선을 개국하면서 대명나라 사대정책을 국시로 하면서 부터다. 개국 명분을 명나라에서 찾다보니 나라 이름 조차도 명나라가 정해주는 것으로 정했다. 그게 조선인데 이 조선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가 와서 만들었다는 기자조선에 더 가깝다. ‘새끼 중국’라는 뜻의 ‘소중화小中華’를 자신들의 통치이념으로 삼아야 했던 당시 지배세력에게 문명교화시켜 주었다는 기자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어 이런 중화사대주의 사관이 기자를 현재 평양으로 갖다놓게 되었고 필연으로 위만조선-한사군도 평양에 있었다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지금 남아있는 사료가지고도 이런 역사체계를 얼마든지 깰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역사가 바로 잡힐 때 국가 사회 전반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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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학술발표회에서는 토론시간에 날선 장면들이 있었다. 제도권 학계에서 초빙된 사학자들이 반박 토론에 참여했고, 방청석에서도 제도권 학자들이 질문공세를 펴기도 했다. 대표학자가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다. 사진은 윤한택 교수가 주제발표하는 장면이다. |
이어진 윤한택 교수는 고려국경선을 이조선 유학자들 특히 다산 정약용 <아방강역고>에서 어떻게 보았는지 분석했다. 그에 의하면 고려국경선은 현재 압록강 선에 머문다. 그런데 이것을 더 줄여서 현재 압록강, 원산만으로 굳혀 버린 것이 조선총독부 일제황국사관론자임을 밝혀냈다. 쯔다소키치(津田左右吉)다. <고려사>만 잘 고증해도 이러한 설정은 터무니없는데도 쯔다는 압록강-원산만 선으로 정했다. 윤 교수는 쯔다가 지리고증이 난관에 부닥치자, <고려사>를 아예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내던져 버리고 제멋대로 지리 비정했다고 꾸짖었다. 그리고 현재 국사 교과서에 실린 고려국경선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을 하도록 원인 제공한 것이 이조선의 최고 사상가이자, 지성인, 석학으로 알려진 <목민심서>저자, 다산 정약용 같은 이라는 것이다. 윤 교수는 이 점을 말미에서 분명히 했다. 이날 윤 교수는 고려 국경을 중국사료와 우리 사료를 교차 비교해가면서 고증했다. 현재 만주 심양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요동으로 가고 동쪽으로는 두만강 넘어 길림성에 가닿는다.
마지막 발표자로 정태상 교수가 나섰다. 그는 고려 말 명나라와 전쟁직전 까지 몰고간 철령위 위치 문제를 다뤘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이조선 유학자들이 끼어들고 있다. 우리가 유학 사상가로 알고 있는 성호 이익은 철령을 어디로 보았을까. 정 교수에 따르면 성호 이익은 반도고려를 전제로 하여 철령위가 고려에 있었지 요동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을 순암 안정복이 이어받아 그대로 주장한다. <동사강목>에 그렇게 나온다고 한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구체적으로 강원도에 철령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주원장이 주장한 철령위를 위치를 말한다. 다만 나중에 실제 설치된 곳은 봉황성 동북이라고 했다고 한다.
반면에 일제침략기 일제식민사학자들은 반도 또는 인근에서 찾았다고 한다. 쯔다소키치는 압록강변이라고 하고, 이케우치히로시(地內宏)은 북한 강계 맞은편의 황성이라고 주장한다. 강원도 북단이라고 이 둘은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서기1930년대 들어서 이 설이 바뀐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 이병도가 바뀐 설을 따랐다고 한다. 나중에 바뀐 설은 강원도 북단을 철령위로 본다. 이병도가 이를 따랐고 이것이 친일파 청산이 물 건너가는 바람에 그대로 현행 국사교과서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철령위 위치가 바뀐 이유를 당시 정치변동 때문이라고 보았다.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일본제국주의가 팽창함에 따라 역사도 이에 맞게 다시 바꿀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날 학술발표회가 끝나고 토론회로 이어졌다. 다만 여느 발표회에서 보지 못한 풍경도 있었다. 연합뉴스에서도 부장 급 기자가 나와서 의견을 개진했고,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집 부실제작을 지적하기도 했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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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재 비판 글>
고려 압록강은 요하가 아니다.
단 요동에 흐르고 요하의 동쪽 지류인 혼하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인하대고조선연구소의 역사 인식 시각이 참으로 맹랑하고 고약하다.
그중 압권인 것은,
다산 정약용이 일본종 진전좌우길이 주장한 식민사관의 원인제공자라 하는 것이다.
또 성호 이익은 철령이 고려에 있었지 요동에 있지 않았다고 했다 하고 순암 안정복도 이익의 설을 따랐다고 하며,
다산은 강원도에 철령위가 있다고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읽은 역사책이나 고지도가 얘들이 읽은 것과 다른가?
대체 얘들은 어떤 책을 읽었길래 이따위로 생각하고 있는가?
너희 조성을.심규하.윤한택.정태상 등은 대한인이 아니냐?
대체 너희들 정체가 뭐냐?
다산이 <강역고/북로연혁고>에서 말한 철령과 압록강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너희 스스로 일본이 조작한 식민사관 지리를 맹종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어찌 조선 선학들을 그렇게 무지무식하게 비난하는가?
낯 부끄러운 짓을 왜 자청하는가?
조선 500 년 동안 위로는 왕에서부터 밑으로는 말몰이꾼,노비까지 몽땅 요하가 흐르는 요동을 몰랐을까?
연경행 사신단이 숱하게 건너다녔던 요동이다. 그 요동이 지금의 란하 중류 승덕.평천.반가구수고 사이 땅이란 것을 몰랐을까?
<한서/지리지>부터 <청사고/지리지>까지 설명.기록된 요동이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3600 리 떨어진 곳이고 1250 리 길이의 대요수와 2100 리 길이의 염난수 곧 송.거란 이후부터는 황하와 요하가 흘러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지금의 란하 지역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지리는 2000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즉 너희 인하대고조선연구소는 강단사학계의 식민사관을 비판한답시고 쥐뿔나게 나대다가 무지무식한 지리인식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다산.성호.순암 등에게 퍼붓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보아줄 수 있는 문장이 있다면 정태상의 `철령위 위치를...봉황성 동북이라 했다`일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이 처음에 설치했다가 고려의 반발을 사서 뒤로 물린 두 개의 철령위 모두 요동에 있었단다. 즉 요동의 혼하인 고려 압록강의 남쪽이였고 이조선 압록강 북쪽에 있었던 봉황성의 동북이 아니라 봉황성의 북쪽 분수령 너머에 흐르는 요하 동쪽과 혼하 동쪽이란다.
아래의 권근 진정전 같은 기록들을 제발 읽어보려무나.
권근의 철령.쌍성 관련 진정전 陳情箋 <동문선 권40>
신(권근)은 아룁니다.
홍무 21 년 2 월 15 일에 배신 문하평리 설장수가 경사에서 돌아오니, 호부에서 발행한 성지를 공경히 받들었습니다. `그 철령의 이동.이북.이서가 원래 개원에 속한 것이니 소관 군민은 그대로 요동에 붙이도록 하라.`하였으니 신은 일국의 신민과 더불어 놀랍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우러러 소회를 아뢰는 것입니다. ... 중략....
말씀하신 철령 이북은 문.고.화.정.함 등의 여러 주를 지나 공험진에 이르기까지는 자고로 본국의 땅이였는데, 요 건통 7 년에 동여진사람들이 난리를 일으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차지하므로 예왕이 요국에 고하고 토벌하기를 청하여 군사를 보내어 잃은 땅을 회복하게 됨에 함주.공험진 등의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원나라 지정의 초기 무오 년간에 이르러 몽고 보지관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수복할 때에, 본국 정주 반민 탁청과 용진현 사람 조휘가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가서 항복하면서 지금 조정의 요동 함주로 부근인 심주에 쌍성현이 있음을 들어 알고 본국 함주 근처인 화주에 옛날에 쌓았던 조그마한 성 둘이 있으므로, 인하여 모호하게 주청하여 드디어 화주를 쌍성으로 잘못 일컫고, 조휘를 쌍성총관으로 탁청을 쌍성천호로 삼았는데, 지정 16 년에 이르러 원조에 주달하여 상항의 총관.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의 땅을 다시 본국에 소속되게 하여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고 인민을 관할하고 있사오니, 반적으로 말미암아 침삭당했던 땅을 대국에 호소하여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지금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로에 속한 것이니, 그대로 요동에 붙이게 하라는 명을 공경히 받들어 보았으나, 이 철령의 산은 왕경과 겨우 3 백리의 거리이며, 공험의 진은 변방의 경계로 한정된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위에서 권근이 말한 왕경이란 아마도 서경 곧 평양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어쨋든 평양에서 북쪽으로 300 리 이상 떨어졌을 요동 함주로 부근 심주 곧 청 시기 심양에 쌍성현이 있었고 또 이곳 심양 동쪽에 고려의 함주도 있었으며 또 함주 옆에 있었던 고려의 화주에 옛날에 쌓은 성 두 개 곧 쌍성이라 불린 것이 있었다는 얘기다. 욕심 많은 주원장이 고려 화주에 있는 쌍성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하니 고려가 발칵 뒤집어진 것이다.
이제 <명사/지리지> 요동도지휘사사 철령위 기록을 볼까?
철령위... 홍무21년3월 옛철령성에 철령위를 설치. 26년4월 옛 은주땅으로 옮김. 즉 지금의 치소다. 서쪽에는 요하가 있고 남쪽엔 범하와 소청하가 요하로 흘러든다. ...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다 즉 옛철령성이고 고려 경계와 접해있다. 홍무 초에 현을 설치했다가 얼마후 폐했다.
욕심으로 가득한 주원장이란 놈이 고려의 반발이 너무 무서워 이조선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300 리 씩이나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고 보는가? 어리석고 무지무식한 추측 그만 하라. 철령이 고려에 있었다는 것, 두 철령 사이의 떨어진 리 수를 500 리라 하였다는 것이나 강원도 철령으로 인식하였다는 것 등은 모두 일본이 조작.변조한 문장들이니 제풀에 속지 말라.
어쨋든 다산이 실제 설치된 철령위 위치를 봉황성 동북이라 했다는 것은 명 철령위 위치뿐만 아니라 고려 철령 위치도 요동 혼하 동쪽에 있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태상이 스스로 욕하는 것을 알기는 할까?
고지도 - 가칭 <백산대맥도>
조선 영조 26 년(1751) 홍문관에서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해동지도>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
위 원도를 일본놈이 원도의 압록강 남쪽에 지금의 대한반도를 덧붙쳐 제작한 것이 아래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다.
조작지도 - 한국보물 1537 호로 지정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
아래는 위 2 개의 고지도가 묘사하는 범위다. 적색 표시는 <백산대맥도>가, 청색 실선 지역은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가 묘사하는 지역이다.
추정도- 백제가 건국한 서기전 18 년 쯤 지리
추정도- 고구려 이후 역대국 강역
성호.순암.다산 등이 인식한 압록강은 당연히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 지역을 흐르는 란하의 동쪽 지류 청룡하였느니라. 너희들이 조선 유학자들의 중화사대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어도 지리 비정에 대해서 만큼은 멍청하다는 꾸지람만 들을 것이다.
너희 인하대연구소의 지리 인식의 바탕은 `공식적으로 일본이 1934 년 만주국지도에서 청국 시기의 란하 이동의 모든 지명을 동쪽으로 이동시키고 지도를 조작하여 만든 대조선 사관 곧 식민사관 지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이 지명.이동시키고 지도를 조작한 사기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단재가 `고대의 요하는 란하`라 교시한 것을 기억하지 않겠다면 인하대연구소도 `조작.식민사관맹종자` 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닐 것이다.
공부 더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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