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공헌’ 탈 쓴 일본재단과 연세대의 수상한 커넥션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아시아연구기금 바탕, 총장과 교수들 네트워크 형성… 20년 논란 아직도 해소 안 돼


“교수사회가 좁다면 좁은 사회입니다. 개인적인 소신이 있다면야 그걸 뭐라고 할 수는 없겠죠. 혼자만의 생각을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매개로 그렇게 전파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하더라도 암묵적인 컨텍스트가 깔려 있는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연세대 교수 ㄱ씨)

“사실 돈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를테면 국가연구비 집행기관인 학술진흥재단은 경쟁도 심하고, 무슨 돈을 어떻게 썼는지 영수증 관리도 염격하게 해야 합니다. 연차보고서에 나온 제목만 보더라도 무슨 돈을 어디에 썼는지 사후 관리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교수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꽁똔’이죠. 사람을 포섭할 때 하책은 너 이거해, 라고 시키는 것이고 상책은 마음대로 하라고 풀어놓는 것이죠.”(연세대 교수 ㄴ씨)

“사사카와재단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지난 8월 중순, 기자는 제보를 받았다. 제보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사카와재단은 일본의 대표적 우익인사이자 A급 전범이었던 인사가 일본 패망 후 경정 도박으로 번 돈으로 만든 재단이다. 2011년 이름을 일본재단으로 바꿨다. 20년 전에도 연세대가 사사카와재단으로부터 돈을 받아 연구하는 것이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총장을 비롯해 학교의 주요 보직교수들이 이 기금을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공헌의 외피를 쓴 일본 극우재단과 연세대는 왜 연구기금을 만들었을까. 사진은 연세대 총장실이 있는 본관 전경.

 


A급 전범 출신 인사가 설립한 ‘우익재단’

확인이 필요했다. 제보자는 사사카와재단이 이름을 바꾼 것도 “마치 일본의 공식기금인 양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 산하의 공식 행정기구인 국제교류기금의 영문명칭은 ‘Japan Foundation’이다. 반면, 제보자가 거론한 일본재단의 영문이름은 ‘Nippon Foundation’이다. 민간조직이다. 설립자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가 A급 전범인 것은 맞다. 그는 1995년 타계했다. 현 일본재단의 이사장은 그의 3남인 사사카와 료헤이(笹川陽平)가 맡고 있다.(박스기사 참조)

1996년에 설립된 ‘아시아연구기금’ 설립과 이후 운영에서 ‘일본재단’이 어느 정도 참여하고 기여했는지는 기금 홈페이지 등에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아시아연구기금 소개에서 ‘일본재단’ 관련 부분은 이렇게 기술돼 있다. “…그동안 동북아시아 국가간의 협력과 이해증진을 위해 노력해 왔던 한국의 연세대학교와 일찍이 국제협력과 이해증진을 통한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 확대를 위한 사업을 전개해 왔던 ‘일본재단’이 1995년 종전 50주년과 한·일 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이해 동북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상호이해의 증진은 물론, 지역의 안보와 경제협력 증진을 위한 연구기금의 설립에 합의함으로써 탄생됐다.” ‘공익재단법인 아시아연구기금’은 1996년 6월 외무부의 공식 허가를 받고 한국 국내 기업들의 추가 출연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2014년 연차보고서에 공개한 재무상태표에 따르면 약 103억의 기본금을 재단은 보유하고 있다. 이 중 설립자가 낸 기본금은 5000만원이고, 기타 기본금이 79억7000만원으로 상태표에는 제시돼 있다. 아시아연구기금의 ‘설립자’는 연세대학교다. 나머지 액수의 상당 부분이 일본재단이 낸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9년 사이 학술교류와 연구과제 등에 지출한 금액은 총 42억원가량이다.

이 연구기금의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논란은 조성 첫 단계 때부터 제기됐다. 햇수로는 20년째 간헐적으로 되풀이된 논란이다. 2005년쯤에는 TV 시사프로그램에서 연구기금의 성격 논란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당시 아시아연구기금 측은 반박성명을 내 “아시아 연구기금에 기부금을 출연한 일본재단은 일본 경정사업 수입의 3.3%를 공익사업에 쓰도록 규정하고 있는 일본 국내법에 따라 설립된 공익법인으로서 ‘극우단체’라는 주장은 전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日극우 인사들, 일본재단 이사로 참여해

지난 8월 15일 오전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29회 전몰자 추도 중앙국민집회’라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영령에 보답하는 모임’이라는 단체와 일본회의라는 단체가 공동 주최한 것으로 돼 있다. 이날 행사를 열면서 이 단체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종전 70년, 이제라도 영령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였다. 일본회의가 공개한 이날 행사 프로그램에 따르면 ‘각계 대표’ 제언이라는 이름으로 나열된 발언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중의원이자 자민당 정조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나다 토모미(稻田朋美), 오선화(吳善花) 다쿠쇼쿠대학 교수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를 노리고 있는 중견 정치인인 이나다 토모미는 2013년 “위안부제도는 전시에는 합법이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1998년 일본으로 귀화한 오선화씨는 <치맛바람>, <반일한국의 미래는 없다> 등의 저서와 TV 정치평론 출연 등의 ‘친일’ 활동으로 한국에서는 입국 거부대상자다. 이날 야스쿠니 참배 행사를 공동주최한 일본회의의 회장은 타쿠보 타다에(田久保忠衛) 교린대학교 명예교수다. <주간경향>은 일본재단의 조직표에서 타쿠보 교수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 6월 24일 전원 새로 취임한 것으로 돼 있는 이 재단의 평의원 명부에는 타쿠보 교수뿐 아니라 다른 범상치 않은 이름들도 발견된다. 정치평론가로 직함이 돼 있는 야야마 타로(屋山太郞·83)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에서 갈라져 나온 ‘일본교육재생기구’라는 단체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2007년 뉴욕타임스에 “위안부 성노예 주장은 날조된 것”이라는 내용의 전면광고를 주도하기도 했다. 평의원을 맡고 있는 와타나베 쇼이치 일본 조오지대 명예교수(85) 역시 위 광고에 참여했는데, “남경사건(남경대학살)은 조직적인 학살이라고 볼 수 없다”는 등의 극우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일본 우익’을 연구해온 이향철 광운대 교수는 “세 사람 모두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인사로, 일본재단의 이사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인물들”이라며 “조직이 개편되면서 평의원으로 옮긴 것을 보면 외부에서 봤을 때 극우인사들을 중심으로 재단이 운영된다는 비판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단 회장을 맡고 있는 사사카와 요헤이의 성향은 어떨까. ‘겁 먹지 말고 국제사회 리더가 돼라.’ 지난 8월 26일 산케이신문의 ‘정론’에 그가 쓴 칼럼의 제목이다.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에 띈다. “아베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에 대해 역사인식과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과 중국 측의 공격이 눈에 띄지만, 세계로 눈을 돌리면 평화국가로의 행보와 국제공헌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일본은 자신감을 갖고 자기 주장을 세계에 내놓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위안부 문제와 같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아베 담화의 핵심인 ‘평화’와 국제안보로 나가라는 주문이다. 이 교수는 “우리의 시각에서는 ‘반성은 그만할 때가 됐다’는 주장으로 읽힐지 모르지만, 심하게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 현지 분위기에서는 양식 있는 주장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문제는 다시 아시아연구기금이다. 일본재단과 관계를 묻는 <주간경향>의 질문에 대한 서면답변에서 기금 측은 “기금의 출처가 일본재단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재단과 법률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완전히 독립된 법인체”라며 “기금의 기본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일본재단이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쳐 아시아연구기금의 활동을 주도하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일본재단이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기금 측의 주장에는 의혹이 남는다. 단적인 사례가 2012년 재단의 이사로 참여했던 아카자와 료세이 자민당 중의원의 경우다.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지난 6월 물러난 아카자와의 과거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앞서 언급한 이나다 토모미 등 2011년 입국 거부를 당한 일본 의원 3인의 자민당 보고회에 참석해 “다케시마(독도)를 불법점거 중인 한국 정부는 논리와 법률로 논의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감정에 호소했다” 등의 발언을 했다. 논란과 관련, 지난 8월 19일 한겨레신문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아시아연구기금 측은 “아카자와 의원을 이사로 일본 쪽이 추천했을 때 한국 쪽에서 논란이 되기는 했다”고 답변했다. 이와는 별도로 오가타 타케주 일본재단 이사장이 2008년부터 8년째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연세대 교수 ㄱ씨는 “일본재단 이사장이 직접 이사로 들어왔다는 것은 기금 측이 주장한 외관상의 독립성은 이미 훼손됐다고 봐야 한다”며 “아카자와 료세이 의원의 발언도 이미 언론 보도 등을 통해서 알려진 문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일본재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연구기금 측은 “기금의 이사회는 이사 한두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으며, 기금 주요 업무가 학술연구 지원사업이기 때문에 이사들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 있으며, 한 사람의 이사 성향이 기금을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매년 8월 15일 일본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일본 우익들의 집회가 열린다. 지난 8월 15일 ‘힘내라 일본’이라는 단체가 일장기를 들고 야스쿠니 신사 앞을 행진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연대 현 총장, 기금 설립 핵심 역할?

그런데 왜 연세대였을까. 기금 측은 “이사회에 재직 중인 연세대 교수는 3명뿐”이라며 현재 재단은 학교와 무관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연차보고서에 기록된 역대 이사회 명단을 보면 연세대 주요 보직자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핵심 라인은 연세대의 역대 총장과 재무처장이다. 12대 송자 총장(1992~1996)부터 시작해 13대 김병수, 15대 정창영, 17대 정갑영 현 총장이 역대 주요 임원을 역임한 것으로 돼 있다. 여기에 박태규·박상용·김학은 전 연세대 재무처장, 백윤수 현 연세대 재단본부장이 역시 핵심 임원으로 참여했다. 김학은 전 재무처장은 현 아시아연구기금의 이사장이다.

< 주간경향>은 기금의 초기 설립과정에 깊숙이 관련돼 있는 관련 인사로부터 기금 설립 초기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기금 설립과정을 주도한 인사가 정갑영 현 연세대 총장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재단 측에서 굉장히 놀라워했다. 사전 정지작업 없이 다이렉트로 한국 쪽에서 기금을 만들자고 제안이 왔던 것이다. 10억 엔은 일본에서도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재단에서 한국 쪽 요청을 검토했던 시게무라 도시미쓰 교수나 지난해 타계한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 대사가 회의에 참석해서 발언한 것을 기억하는데, ‘거꾸로 일본 우익단체 돈을 받아서 기금을 만드는 것에 대해 한국 여론의 반대가 예상된다’며 부정적 평가를 한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이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정갑영 현 총장이라는 것이다. “당시 연세대학 총장들은 사실상 들러리에 가까웠고 정 총장이 주도하는 위치였다. 물론 좋게 보면 새로운 한·일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극우 의혹을 받고 있는 일본재단으로서는 이미지 변신을 할 수 있다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2005년 프로그램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역임한 정갑영 총장의 이후 관련 행적은 이사회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 총장은 그 이후에도 기금 운영과 배분에서 사실상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복수의 전·현직 연세대 교수들은 말한다. 앞서 언급한 연세대 ㄴ교수도 “외국에서 돌아왔을 때 ‘연구비를 다 만들어놨으니 찾아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연세대학교 본부에서 핵심 보직을 맡았던 한 교수는 “아시아연구기금을 연대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려는 것에 대해 몇몇 교수들이 강하게 반대하자, 정 총장 등이 주도해 학교 바깥에 기금을 세우고 여러 사람들에게 권유하다시피 해 연구비를 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특히 인문사회 계열 교수들은 상대적으로 연구비도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 총장의 이름은 아시아연구기금이 2013년 공개한 연차보고서에서 다시 등장한다. ‘2025년을 향한 한·일 협력의 모색’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제12차 한·일 밀레니엄 포럼’ 행사에서 정 총장은 김병철 고려대 총장, 카마타 카오루 와세다대 총장, 세이케 아츠시 게이오대학 총장과 함께 ‘한·일 협력의 미래를 향하여: 대학의 긍정적 역할’이라는 제목의 토론에서 발표를 한 것으로 돼 있다. 정 총장의 역할과 관련해 아시아연구기금 측은 “당시 정 총장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사무총장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이해된다”며 “아시아연구기금에서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봉사해온 분들이 있는데, 정 총장을 찍어서 연관성을 부각시키는 것 자체가 적절한 평가가 아니며, 다소 편향된 정치적 시각에 따른 언급”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주간경향>은 정 총장에게 제기된 의혹에게 해명을 듣고자 연락을 취했으나, 마감시간까지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재단 설립자 사사카와 료이치는 극우 파시스트

사사카와 재단 설립자 사사카와 요이치



“솔직히 경정사업이라는 것이 겜블, 말하자면 도박사업인데 그 수익권을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줬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향철 광운대 교수의 말이다.

1889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사사카와 료이치는 만 96세인 1995년 사망했다. 그의 인생역정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풍운아’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초등학교 동창이다. 36세인 1925년에 정치활동을 시작한 그는 일본 군국주의가 대륙으로 팽창하던 시절인 1931년 우익단체인 ‘국수대중당’을 결성한다. 그는 자신의 우익성향을 감추지 않았다. 1974년 미국 타임과의 인터뷰에서는 “나는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파시스트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1935년 공갈 혐의로 국수대중당의 다른 간부들과 체포돼 4년을 복역한 그는 무죄로 풀려난 뒤 평상시 존경한다고 밝힌 무솔리니를 찾아가 회견을 하기도 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A급 전범 혐의로 형무소에 수감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자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였던 기시 노부스케를 만난다. 이 교수는 “그는 기시 노부스케를 옥우(獄友·감옥친구)라고 불렀는데, 일본 정가에서는 그 인연으로 경정사업권을 따낸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정 도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린 사사카와에게는 ‘전후 일본 정계의 흑막을 조종하는 손’, ‘일본 우익의 돈줄’ 등의 수식어가 붙었지만, 막상 일본의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진 그의 모습은 ‘자선사업을 하는 할아버지’, ‘한센병 퇴치에 앞장선 일본의 사회복지가’다. 그가 설립한 재단인 일본선박진흥회의 TV 광고물 ‘일일일선(一日一善: 하루에 하나씩 착한 일 하기)’ 할아버지로 유명세를 떨쳤다.

자선활동의 한편으로 우익활동을 계속했는데, 승공연맹 등의 단체활동을 하면서 통일교 문선명 총재와 막역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교 관계자는 “과거 반공을 매개로 보조를 맞췄을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한센병 퇴치와 관련한 활동으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한국에서도 1975년 한국 한센병 구호활동에 10억 엔을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76년 박정희 정부는 그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1등급 훈장인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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