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조선 압록수와 발원지 백두산
앞글 말미에서의 몇몇 숙제와 관련한 답은 서국의 동쪽 영역 바깥 곧 요동의 바깥 지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이조선 시기 500 년 동안 서북 국경선은 압록수였다. 그 압록수 서쪽의 큰 물길은 요하였으며 그 요하의 동서 지역이 청국의 봉천성 봉천부와 금주부 지역이였고 명국의 요동도지휘사사였으며 한漢이 설치한 요동군이였다. 이러한 단순.명료한 지형지세와 지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조선 시기 압록수 서쪽의 요양.해성.반산.광녕.금주.신민 등 요하 동서 지역에 설치된 명.청국 지명들은 2000 여 년을 거슬러 올라 서한, 시황 진, 전국시대 연국의 요동군 및 요동외요 지역에 설치된 요양.안시.험독.무려.방房.양평 등의 현 지역이였다.
그리고 이조선 선학들은 이러한 요동의 요하 동쪽에 흐르는 국경선 압록수의 발원지인 백두산 좌향과 그 압록수 남쪽으로 남해 바닷가까지의 이조선 전체 영역의 대략적인 모습을 아래와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과 같다. 그리고 대마도와 제주도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했다고 하니, 이는 곧 지관들의 일반론이다.
<성호사설/천지문> 이익(1681~1763)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다. 해亥 방향에 앉아서 사巳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이다. 그런고로 예전부터 중국과 친해 왔다. 그러나, 땅이 좁고 물이 젓어 위인을 낳지 못했다. 서쪽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 그리고 동호와 여진족이 모두 중원을 제패하고 황제가 된 일이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만은 그렇지 못해서 주어진 영토만 지키며 감히 뜻을 품어 보지 못했다`라 했다
<택리지/복거총론,산수총론> 이중환(1690~ )
<후기 조선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배우성 37~38 쪽
또한 이조선 영조 26 년(1751) 간행되었다고 알려진 <해동지도>에 실린 가칭 <백산대맥도>에도 백두산 북쪽에 해亥를, 그 동쪽 바다에는 정북正北이라 표시되어 있다.
- 가칭 <백산대맥도>
이익과 이중환이 전하는 말과 같이 명.청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 발원지 백두산의 좌향이 해좌사향이 되려면, 또한 백두산 동북쪽 지역에 정동쪽으로 흘러나가는 물길이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이 정북 방향이 되려면 백두산과 압록강은 대체 지금의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겠는가?
또한 이조선 강역의 모습이 서쪽으로 얼굴을 내밀어서 중국에 읍하는 형상이거나 또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과 같으려면 그 백두산과 압록강이 지금의 백두산과 압록강일 수가 있을까?
결국 명.청 시기의 요하 동쪽에 흐르는 압록강 발원지 백두산은 결단코 현재 위치일 수가 없다. 위 추정도와 같이 지금의 서국 요녕성 서쪽의 노로아호산 지역에 백두산.선춘령이 있었다.
또한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렀을 압록강 역시 지금의 압록강일 수가 없고 당연히 명.청 시기의 요하 곧 한.당 시기의 염난수의 하류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한.당 시기의 난수.대요수.염난수.요수.열수 등의 경유지도 아래와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윤씨의 요동군과 일반 의미의 요동 위치가 다르다는 주장은 옳지 않은 것이며 아무런 근거도 없다. 외려 후학들의 혼동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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