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낙랑군
윤내현은 부.준왕이 통치한 조선 시기를 고조선 후기라고 인식하면서 그 서쪽 경계를 갈석산 지역이라고 논설하였다. 이어서 제3장 4) 고조선 전기와 중기의 서쪽 경계 제목으로 고조선 전기와 중기의 서쪽 경계를 찾는다면서 고조선 말기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란하 유역이였거나 그보다 서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나는 고조선 후기, 정확하게는 부.준왕이 통치한 조선의 서쪽 경계는 갈석산 지역이 아니라 갈석산에서 동북쪽으로 750 리 쯤 떨어진 곳이라고 이미 비판하였다. 대략 서국 요녕성 서쪽 지금의 평천.관성 지점 쯤일 것이다.
또 윤씨는 <한서/지리지>와 <진서晉書/지리지>의 낙랑군 조선현 주석, `응소는 말하기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곳이다`를 인용한 후 서기전 12 세기경에 기자가 망명와 있었던 곳이 서기전 108 년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면서 <진서/지리지>에 조선현과 함께 낙랑군에 속해 있었던 수성현 주석에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진秦장성이 시작된 곳은 지금의 란하 동부 유역에 있는 갈석산 지역이었고 수성현이 갈석산 지역에 있었다면 조선현도 란하 유역에 위치하였을 것이고 기자가 망명하였던 조선도 란하유역에 있었다고 단언하였다. 결국 윤씨는 낙랑군이 설치된 서한부터 서진西晉 시기까지 곧 서기전 108 년부터 대략 서기 265 년부터 서기 300 년 경까지의 낙랑군 위치도 지금의 란하 최하류 동부 연안에 표시된 갈석산과 산해관 부근이라 한다.
그리고 낙랑군 조선현 지역은 기자가 망명할 당시 고조선이 도읍하고 있었다고 하고 <후한서/동이열전.예전> 기록을 근거로 고조선 강역을 서쪽으로는 지금의 갈석산까지, 동쪽으로는 지금의 요동과 지금의 대한반도 북부 지역이라고 추측하였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래 모두가 조선의 땅이다. 옛날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는데, 기자는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
즉 윤씨는 당시의 예는 (대한반도)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부, 옥저는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일부, 고구려는 지금의 요하 동부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옥저.고구려가 본래 조선이라면 그러한 조선은 단군이 통치했던 고조선일 수밖에 없으니 갈석산 부근에 있었던 기자 조선과는 위치가 맞지 않는다고 하며 <후한서> 문장구성으로 보아 기자가 망명한 조선은 고조선에 속한 지역이라고 하였다.
나는 위와 같은 윤씨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 열광하였다. 낙랑군 위치가 아니라 란하 부근 갈석산.산해관 부근이라는 점과 그곳도 단군조선의 서쪽 강역이었다는 내용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윤씨의 인식은 무논리적이고 너무 안일한 해석이라 결국 유치한 망발이라는 생각에 이르고 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서기전 108 년 쯤 낙랑군이 설치된 곳을 아래 추정도 표시와 같이 갈석산.산해관 부근이라고 추정하고 그 근거를 <진서/지리지><태강지리지> 등에서 찾았다는 점 때문이다.
<진서/지리지>
평주 낙랑군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주) 윤내현이 주장한 고조선의 5 도읍 추정
1.5 - 평양,아사달 2 - 본계,조선 건국 후 첫도읍 평양성 3 - 란하 유역, 백악산아사달 4 - 북진, 장당경
<한서/지리지><후한서/군국지> 기록의 낙랑군 위치와 <진서/지리지><태강지리지> 기록의 낙랑군 위치는 명백히 다르다. 갈석산.산해관 부근에 설치되었다는 낙랑군은 서기 265 년 조조가 세운 조위를 찬탈한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의 낙랑군이지 서기전 108 년 서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곧 <한서/지리지><후한서/군국지> 기록의 낙랑군 위치가 아니다. 서진의 낙랑군은 서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지역을 유지할 수가 없어 후방 안전한 지점인 서한.동한.서진 시기의 요서군 비여현 부근으로 옮긴 낙랑군으로 더부살이한다라는 여우旅寓 뜻의 교치군僑置郡이다. 임시방편이고 명목상의 군일 뿐이다.
또한 1870 년대 초부터 일본명치왕이 서한 시기의 난수.대요수.염난수 등 주요 3 개 물길을 변조하여 난수 1 개 물길로 만들고 청국 지리 기록을 그대로 활용한 지도를 제작.선전했기 때문에 서진이 교치한 낙랑군 위치도 지금의 란하 동쪽 갈석산.산해관 지역이 아니라 원래의 갈석산.산해관 위치인 지금의 란하 최하류 서쪽이였다.
서한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는 위 추정도와 같이 지금의 희봉구 표시 부근이며 <사기/조선열전> 기록과 같이 요동군 동쪽 끝 경계의 바깥 지역을 흐르는 패수부터 동쪽 종선 개념으로 대략 700 리 정도까지였다. 그곳에는 <한서/지리지> 낙랑군 패수현과 탄열현 주석과 같이 패수와 820 리 길이의 열수가 흘러야 하며 <후한서/군국지> 낙랑군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진 곳이여야 한다.
과연 지금의 갈석산.산해관 지역에서 패수와 열수를 지목할 수 있는가?
또 그곳이 낙양에서 5000 리 거리라 할 수 있는가?
결국 윤씨는 서한부터 서진까지 대략 300 여 년의 차이를 무시하고 낙랑군이라는 똑같은 명칭이라 똑같은 위치로 인식한 것이다.
첨언하자면 서한.동한 시기 모두 요서.요동.현토.낙랑 등 4 개 군의 대략적 위치는 <후한서/군국지> 주석과 같이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3300 리, 3600 리, 4000 리, 5000 리 떨어져 있었다.
遼西郡 秦置 洛陽東北三千三百里
遼東郡 秦置 洛陽東北三千六百里
玄兎郡 武帝置 洛陽東北四千里
樂浪郡 武帝置 洛陽東北五千里
또한 갈석산.산해관 지역은 춘추시대부터 시황 진 시기까지는 요동군의 남쪽지역이고 요수의 최하류가 경유하는 지역이지만 서한.동한 시기에는 요서군의 남쪽 지역이였고 요수도 난수濡水로 개칭되었다. 곧 해양.신안평.영지.비여.양락.임유.루 등의 현이 설치된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300 리 떨어진 지역이다.
<한서/지리지>
遼西郡
海陽 龍鮮水東入封大水 封大水綏虛水皆南入海
新安平 夷水東入塞外
令支 有孤竹城
肥如 玄水出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陽樂
臨兪 兪水首受白浪 東入塞外 又有候水北入兪㒍 下官水南入海 又揭石水賓水皆南入官
낙양에서 3300 리 떨어진 곳과 5000 리 떨어진 곳이 같은 곳일 수는 없는 것이다.
위 <한/지> 기록의 요서군 속현 중에서 위의 해양현외 6 개 현을 제외한 차려.유성.빈종.교려.호소.도하.문성 등 7 개 현은 우북평군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흐르며 요서군 북쪽 지역인 유성현의 북쪽을 지나 서북쪽 새외에서 발원하여 동남류한 대요수가 합류하는 요동군 방현의 서남쪽 지역에 설치된 요서군의 북쪽 지역 현 명들이다. 서진에서는 후한의 요서군을 남북으로 나누어 남쪽 지역은 유주 요서군으로, 북쪽 지역은 평주 소속의 창려군으로 재편했다. 즉 창려군은 서진에서 교치한 평주 소속의 낙랑군 북쪽에 설치된 것이다.
한편 이곳 서진의 평주 창려군과 요동국(?군) 사이 지역에서 선비족 모용외가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던 중 서한 무제가 설치한 원래 위치 부근의 낙랑.대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요동에 근거하였다는 장통이 고구려 미천왕의 압박에 못이겨 서쪽으로 요동국을 넘어 창려군 구석 지역의 모용외에게 망명하였었다. 이에 모용외는 서진의 창려군과 요동국 사이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는데 서진이 평주 자사로 봉한 모용외가 독단적으로 군.현을 설치하였으니 서진이 설치한 교치군인 평주 낙랑군과는 현저히 다른 성격의 낙랑군이니 이는 교치가 아니라 도치盜置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모용외가 이끈 선비족은 승승장구하여 서남쪽으로 유성현.계현.업으로 차례로 진출하여 황제국인 전연.후연이라 불리웠지만 384 년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동진에 대패하면서 전진에 부용한 모용세력도 꺽이고 다시 요서군 유성현 지역으로 돌아왔으나 결국 풍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만다.
이후 중원은 탁발씨의 선비족이 차지한 후 원위.북위라 불리웠고 동북쪽으로 진격하여 풍발.풍홍의 북연 용성 화룡궁을 공격하였는데 서한.동한의 요서군 비여.유성현 지역이였고 이후 서진의 유주 요서군과 평주 지역이였다. 서기 436 년 용성.화룡궁 남북지역을 차지한 후 북쪽에는 영주를 설치하여 창려.건덕.요동.낙랑.기양.영구 등 6 군을 두었고 남쪽은 요서군.북평군을 통령한 평주를 설치하였다.
<북위/지형지>
平州...治肥如城...
遼西郡...
肥如...有...碣石...令支城...濡河
陽樂...眞君七年倂令支含資屬焉...
海陽...
北平郡...
朝鮮 二漢晉屬樂浪 後破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 復置屬焉
昌新 前漢屬涿 後漢晉屬遼東屬焉 有盧龍山
營州 治和龍城 ...
昌黎郡 晉分遼東置 眞君八年倂冀陽屬焉...
龍城 眞君八年倂柳城昌黎棘城屬焉 有...狼水
廣興 眞君八年倂徒河永樂燕昌屬焉 ...
定荒 ... 有...松山
建德郡 眞君八年置 治白狼城...
石城 前漢屬右北平...
廣都 眞君八年倂白狼建德望平屬焉...
陽武 ...有三合城
遼東郡 ... 治固都城
襄平...有靑山
新昌...
樂浪郡...治連城
永洛...
帶方...
冀陽郡 眞君八年倂昌黎...
平剛
柳城
營丘郡...
富平...
永安...
결국 서진 시기 모용외가 도치한 낙랑군이 북위가 설치한 영주 지역에 그대로 이어져 설치되었음 알 수 있다. 연화원년 432 년에는 영주 지역에 있던 조선민 곧 344 년 전연 모용황 시기 용성에 포로로 붙들려 있던 고구려 및 부여 백성과 이곳 요서군 북쪽지역으로 진출한 백제 백성들은 다시 포로로 붙들려 남쪽 평주 지역 곧 서한 시기 요서군 비여현으로 옮겨졌고 부근에 조선현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서진 시기 교치된 낙랑군 조선현이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 1900 년 경 편찬된 양수경의 <역대연혁지도>에 실린 <북위형세도>
위 <북위형세도>가 묘사한 범위는 아래의 적색 사각 실선 지역이다.
또한 <수서/지리지> 기록의 상곡군 수성현 주석에 언급된 영락현과 영락현이 속한 낙랑군은 북위가 설치한 영주 지역에 번진의 발호로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된 남영주의 5 군 11 현을 후제에서 창려 1 군과 영락.신창 2 현을 남기고 모두 폐하였고 수 문제 개황원년(581)에는 1 군 2 현에 불과한 남영주를 서한 시기 탁군 고안.신창 등의 현이 있던 이수易水 유역의 무수현으로 옮겼고 583 년에는 교치된 남영주의 속군 창려군을 폐하였고 598 년에는 무수현을 수성현으로 개칭하였다.
上谷郡 開皇元年置易州 統縣六 戶三萬八千七百
易 開皇初置黎郡 尋廢 十六年置縣 大業初上谷郡 舊有故安縣 後濟廢 有駁牛山五回嶺 有易水
淶水...
? 舊範陽居此 俗號小範陽 開皇初改爲?
遂城 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准營州 置五郡十一縣 龍城廣興定荒屬昌黎郡 石城廣都屬建德郡 襄平新昌屬遼東郡 永樂屬
樂浪郡 富平帶方永安屬營丘郡 後濟唯留昌黎一郡 領永樂新昌二縣 餘並省 開皇元年州移 三年郡廢 十八年改爲遂城
有龍山
永樂 ...
飛狐 ... 有巨馬河
결국 별 효용도 없는 교치 정황이 장황하게 기록된 것 뿐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위 <수서/지리지> 기록을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으나 서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위치는 대한반도 평양은 절대 아니며 정확한 위치는 윤내현씨와 똑같이 서진 시기 교치된 갈석산.진장성 부근이라고도 하였고 또한 명확한 설명도 없이 수 시기의 상곡군 수성현 곧 북경 서남쪽 300 여 리 떨어진 지금의 보정이라고도 억측하였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냉정하게 망발하지 말라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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