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40 년 전까지만 해도 이조선 사신들은 임무를 마치고 북경을 출발하여 510 리 쯤 떨어진 란하를 건너 노룡에 도착하였고 170 리를 더 가야 산해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또한 산해관을 나선 사신들은 대릉하를 건너 의무려산이 있는 청 시기 봉천성 금주부 광녕현에 도착했는데 산해관부터는 500 리 로정이였고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북쪽으로 오르는 길이였습니다. 대충 화국 지리를 익힌 한국 역사학계는 산해관에서 광녕까지의 동쪽 바다를 지금의 요동만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산해관 곧 진장성 동단의 동쪽 바다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입니다. 즉 요하 하류가 발해로 흘러들기 직전 바다와 강을 구별하기 힘든 만灣입니다. 이 만灣을 당인 장수절은 요수라고 하였고 1656 년 진주정사로 북경을 다녀온 인평대군은 <연도기행>에서 구하가 둘러빠진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사기정의>
始皇長城東至遼水 西南至海之上
진시황 시기 수축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닿았고 장성동단의 서남쪽은 바다다.
<연도기행>
... 남쪽은 발해(渤澥)에 임하여 은빛 물결이 하늘에 닿았고 북쪽은 장성을 바라보아 분첩(粉堞)이 구름에 연했으니, 기상이 웅장하고 시야가 호탕하다. 고금에 몇 사람이 이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던가. 이미 승지(勝地)에 이르렀으니, 한 번 누 위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려 했으나, 층루(層樓)가 반이나 썩어서 높은 난간이 거의 무너졌다. 이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년에 올라가서 바라본 것이 이미 옛일이 되었다. 부질없이 수선할 인물이 없음을 탄식할 뿐이다. 관문(關門)에서 바다를 연결시킨 것은 조룡(祖龍)의 공이 아니라, 바로 서달(徐達)이 창조한 것이다. 누 밖의 호탕한 물결은 원래 발해가 아니고, 구하(九河)가 둘러빠진 곳이다. ...
즉 북경.의주를 오간 이조선.명.청국 사신들의 로정은 아래 흑선 실선이 아니라 적색 실선이였습니다.
즉 화국의 세번째 정사 <후한서/군국지> 요서.요동 2 군 주석과 같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300 리, 3600 리 떨어진 곳은 지금의 란하 하류 서쪽 강안 지역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한이 설치한 요동군 위치가 경도상 지금의 란하 위치라는 것을 아래 <지리도>가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리도>
결국 삼한을 통일한 신라와 고구려 유장 대조영이 세운 진국의 서쪽 국경은 지금의 란하까지였고 그 서쪽은 거란.요국 영역이였습니다.
단재 신채호.연수 계인경 두 선생이 이미 100 여 년 전에 지리 조작의 기점이며 핵심인 란하.황하.요하 조작.이동 가능성을 명확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한국사학계는 조작 지리가 공식화된 만주국의 건국 직전인 1931 년 당시의 요하조차도 지금의 요하라고 확단합니다.
이런 자들이 역사학자이고 한국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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